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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원한 22

오늘의 쉼터 2014. 10. 21. 09:40

제24장 원한 22

 

 

 

춘추는 물론 같이 왔던 장수들도 한결같이 살아 있는 귀신을 보는 듯 눈이 어지러웠다.

 

남루한 차림에 신분을 종잡을 수 없었으나 김춘추가 공대를 하는데도 태연히 하게 소리를 하니

 

장수들도 자연히 허리를 낮추고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 그렇다면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할까요?”

 

진춘이 묻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준비할 게 뭐 있나.

 

그저 배 한 척과 바람 잡을 돛 하나,

 

그리고 노를 잘 저을 팔뚝 굵은 수부들만 있으면 족하지.”

 

“호위선은 몇 척이나 준비할까요?”

 

“호위선은 무슨 호위선, 일없네. 밑창 든든한 돛배 한 척이면 족하니 공연히 헛수골랑 말게나.”

 

그랬다가 노인은 다시 말을 보탰다.

 

“참, 당나루의 백제인들에게 김춘추가 당나라로 간다고 시위를 하려면

 

뱃전에 요란하게 치장들이나 하시게. 우선은 이물과 고물에 깃발과 휘장을 높이 세우고

 

갑판에는 단을 쌓아 사신이 앉을 걸상 을 올려두게. 고관(高冠)에 대례복까지 준비하면 금상첨화지.

 

휘장엔 김춘추라고 이름을 써놓아도 좋지 않겠나?”

 

“어이쿠 어르신, 그러잖아도 흔들리고 울렁대는 갑판에 단을 쌓고 걸상까지 올리면

 

사신이 너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잠자코 있던 변품이 난감한 기색으로 물으니 노인은 어린애처럼 해맑게 웃었다.

 

“걱정 말고 시키는 대로 하시게나. 여기 이 사신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내게 제일 중한 사람일세.

 

자네 같으면 만천하를 준대도 바꾸지 않을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겠는가?

 

광풍이 온 바다를 집어삼킬 듯이 불고, 풍랑이 일어 바다 밑의 용궁이 뭍에 나와도

 

내가 탄 배는 우물에 뜬 달처럼 고요할 것일세.”

 

눈먼 망아지 워낭소리만 듣고 따라간다고, 범상치 않은 노인이 워낙 입찬말을 하니

 

장수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춘추는 노인의 권유로 고관을 쓰고 대례복을 입은 채 갑판 위에 높이 쌓아올린 단의 꼭대기에 앉았다.

 

노인이 이물에 건 밧줄을 말고삐를 그러잡듯이 쥔 채 나머지 팔로 배를 지휘하자

 

수부들이 그 신호를 따라 힘차게 노를 저었다.춘추를 태운 관선은 깃발과 휘장을 펄럭이며

 

백제의 선단이 포진한 당나루 해역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본 백제 수군들은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때 당나루 남단에서 백제 선단을 이끌던 자는 달솔 기미진(岐彌珍)이란 장수였다.

 

그는 선왕 때부터 수군 책임자로 복무했는데, 임금이 매양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육로에 백기가 있다면 수로엔 기미진이 있다고 칭찬하던 인물이었다.

 

의자왕은 대군 3만을 이끌고 육로로 당항성을 치기 위해 아술현(아산) 북방 50리까지 진출해 있었다.

 

기미진은 혹시 사신을 태운 관선이 출항할지도 모르니

 

발견하는 즉시 수군을 내어 기필코 격침시키라는 왕명을 이미 받아놓은 터였다.

 

“저놈의 배가 아무래도 미친 모양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쪽으로 올까요?”

 

기미진이 초병의 급보를 받고 해안에 나가 자세히 보니 관선은 틀림없는 관선인데,

 

사방에 깃발과 만장이 펄럭이는 것도 수상하고, 갑판에 단을 쌓고 사람이 앉은 것도 수상하고,

 

무엇보다 가장 수상쩍은 것은 북향해야 마땅할 신라 배가 오히려 당나루 해역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기미진은 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을 우려해 금방 추격선을 내지 못했다.

 

조금 뒤에 신라배가 당나루를 두어 바퀴 돌더니

 

그대로 뱃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달아나는데 고물에 걸린 휘장에

 

신라 사신 김춘추라는 글자가 선명하였다.

 

기미진은 그제야 만일 사신을 태운 배를 놓치면 당항성은 얻지 못한다던 임금의 당부를 떠올렸다.

 

“어서 추격선을 놓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저 배를 격침시켜야 한다!”

 

이어 당나루에선 쇠뇌로 무장한 추격선 수십 척이 출항했다.

 

의자왕은 아술현에 임시로 꾸민 진채에서 장수들을 모아놓고

 

당항성을 치기 위한 계략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아술현 동쪽의 대목악군(천안)과 동북방의 감매현을 둘러보며,

 

“저곳들이 모두 신라에 뺏긴 우리 땅이다.”

 

한동안 감회에 젖었다가 우선 신라인들이 말하는 당은포로(唐恩浦路)를 끊어 당항성을

 

고립시키기로 하고 감매현 쪽으로 군사를 움직이려 할 때였다.

 

“전하께 아뢰오. 방금 당나루 해역으로부터 전갈이 왔는데 신라 사신을 태운 배가

 

당항성을 출발해 우리 배가 추격에 나섰다고 합니다.”

 

기미진이 보낸 전갈을 받자 의자왕은 잠시 출정을 미루었다.

 

“그것 봐라, 과연 신라는 당에 의지해 우리를 막으려 할 뿐 스스로 지키지는 못할 형편이다.

 

하긴 창칼 구분도 못하는 오합지졸의 군대로 어찌 나의 대군을 막을 수 있으랴.

 

이제 곧 우리 추격선이 신라 사신을 보기 좋게 수장시키고 나면

 

그때 군사를 내어 들이쳐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당나루 해역으로부터 두번째 전갈은 얼마 뒤에 곧 날아왔다.

 

“적선은 한 척이요

 

그를 추격하는 우리 배는 서른세 척이나 되는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도망가는 그 배에 깃발과 휘장이 어지럽게 펄럭이고

 

갑판에는 고관(高冠)에 대례복을 입은 자가 높이 단을 쌓고 앉았으며,

 

신라 사신 김춘추라는 글자가 휘장에 선명하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의자왕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김춘추라고? 휘장에 정녕코 그렇게 씌었더란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잡아라! 잡아야 한다!

 

김춘추가 탄 배라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그가 당나라에 간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배를 잡도록 기미진에게 전하라!”

 

왕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파발이 기미진에게 왕명을 전하기 위해 출발하고도 꽤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그사이에 의자왕은 손에 땀까지 닦아가며 전례 없이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진채를 서성거렸다.

 

하지만 학수고대하던 세번째 전갈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김춘추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설마 호위선도 붙지 않은 돛단배 한 척을 철갑선 서른세 척이 붙잡지 못했을 리야 없겠지?”

 

의자왕은 시간이 갈수록 애가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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