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진정 그대를 사랑하건만
갑자기 터진 주약란의 노한 고함소리는 계곡을 빠져나가다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그러자 도옥은 역시 지체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밧줄을 내려라!]
하는 소리가 나자 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위 뒤에서 왕한상이 쑤욱 나타나
긴 밧줄을 절벽 밑으로 내려뜨리는 것이었다.
밧줄이 완전히 계곡 아래에 닿은 것을 확인한 주약란은 심하림부터 내려가게 하고
그 뒤를 이어 도옥의 오른쪽 손목을 꽉 쥔 채 진기를 돋우어 왼 손을 이용해서
밧줄을 잡고 쏜살같이 계곡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때, 절벽 위에서 왕한상은 내려가는 주약란에게 암수를 쓰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혹시 도옥이 상할까 염려해서 들었던 손을 내리고 말았다.
한편!
계곡 밑에 운집해 있던 여러 고수들은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주약란이 나타나자
각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만일을 대비해 주위를 급히 경계했다.
가볍게 땅에 내려서는 주약란에게 제일 먼저 달려온 문공태는 주약란의 손에 끌려오는
도옥을 보고는 기성(奇聲)을 발했다.
[앙! 도옥을 사로잡았소?]
하는 소리에 여러 고수들은 우르르 몰려와 주약란과 도옥 그리고 하림을 에워쌌다.
한편 조용한 염불소리를 내며 천홍대사가 감탄을 연발했다.
[실로 주소저는 하늘이 내리신 인물이오. 도옥을 잡다니...]
감탄해 마지않는 천홍대사의 말에 주약란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께서 염려해 주신 덕입니다.]
하고는 도옥의 혈도를 짚고 돌아서면서 무릎을 후려갈기고 말았다.
그바람에 도옥은 어쩔 수 없이 주약란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꼴이 되었다.
그때, 정현도장은 목을 길게 뽑고 주약란을 불렀다.
[주소저! 도옥을 사로잡고 양부인을 구하셨는데 양대협은 어찌 되었소?]
[만나보긴 했어요. 그러나 사태가 여의치 못해 구하지 못했어요.]
하는 한편에서 소림사의 한 승려는 천홍대사의 귀에 입을 대고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그들의 시선은 하림을 바라보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홍대사는 별로 달가운 얘기가 아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한편에 서서 주약란과 심하림을 번갈아 보던 이창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약란에게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무슨 궁금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주소저! 이 늙은이의 사위는 어떻든가요?]
양몽환의 신변 안위를 묻는 것이었다.
[양상공께서는 비록 많은 고통을 도옥으로부터? 받은 모양이지만
굳굳한 영웅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오만 이 도옥을 어떻게 할 셈이오?]
[우선 도옥을 이 계곡 밑에 있게 해서 매복수들이 우리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방패로 삼아야죠.]
그러자 갑자기 도옥은 눈을 부라리며 차갑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흥! 그러나 그것도 열두 시간 뿐이오. 열두 시간이 지나면 양몽환과 조소접은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고 그다음 이 도옥의 부하들이 예정대로 공격해올 것이오.]
오만하게 내뱉는 소리에 불끈 화가 치민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를 들어
도옥의 머리를 겨누며 수염을 곤두세웠다.
[이놈! 만일 너의 부하들이 경거망동하면 이 늙은이의 지팡이가 네 머리통부터
두 조각으로 갈라놓겠다.]
그러나 총명하고 간계가 많은 도옥은 지금 사로잡힌 처지로서 이창란에게
화를 돋우는 말을 한다면 분노에 찬 이창란이 어떤 행동을 하리라는 것쯤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문공태가 청죽장을 한번 휘두르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만일 열두 시간이 지나서 네놈의 부하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이? 문공태가 네놈의 살을 천조각 만조각으로 찢어주겠다!]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흥! 코웃음부터 터뜨리는 것이었다.
[문공태! 잘 기억해 두시오. 이 도옥이 이 백장봉을 벗어나기만 하면
당신의 화산파를 피로 물들여 놓겠소!]
[항! 이 늙은이가 그따위 위협을 두려워한다면 이곳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하고는 헛......허......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문공태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이어 천홍대사는 가만히 염불을 외우며 한걸음 다가섰다.
[도시주! 이 빈도가 한마디 하겠소.]
[해보시오!]
[칼을 놓으면 부처님이 된다는 말이 있소. 그러니 도시주도 칼을 놓는? 것이 어떠시오?
이 빈도가 보기에는 도저히 도시주는 양대협과 양립할 수가 없을 것같소.]
[흥! 불가(佛家)의 인과(因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모두 소용없소.
이제 열두 시간이? 지나면 당신이나 이 도옥도 모두 불귀의 객이 될? 것이오.
그동안 부지런히 염불이나 외워두쇼.? 극락에 가게 해달라고 말이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주약란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도옥!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먼저 분근착골의 맛을 보여주겠어요.]
하는 말에 도옥은 씨익 웃고 말았다.
도옥은 왜 그런지 주약란을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욕정이라기 보다는 증오가 지나친 연민이랄까,
아니면 사모의 정이랄까, 여하간 주약란을 미워하기는 커녕 사모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사이에 마음 한 구석에서부터 싹트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느끼는 도옥이었다.
재색(才色)을 겸비한 주약란을 볼 때마다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고고함과 도도함이 있는 것같아
극도의 증오심이 서서히 연정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도옥은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주약란을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해 버렸다.
잠시 계곡 밑에는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한 조용한 순간이 번쩍번쩍 하늘이 갈라지는 우뢰소리가 아니었다면
좀더 오래 지속되었을는지도 몰랐다.
비가 내릴 모양인지 날씨는 잔뜩 흐려? 절로 눈이 찌푸려지고
요란한 우뢰소리에 하늘을 올려다 보던 주약란은 일동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비가 오실 모양이군요. 잠시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세요.]
하고는 몸을 돌려 도옥에게 다가갔다.
[도옥! 비가 쏟아져 내리면 화공(火功)으로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거에요.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는 모양이죠......]
하고 도옥에게는 가슴아픈 말을 했지만 도옥은 못들은 척하고 외면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럼, 여기서 몇 시간동안 비바람이나 맞아보실까...]
하면서 주약란은 번개같이 손을 들어? 도옥의 오른쪽 견갑골(肩胛骨)을 우지끈?
소리가 나도록 떼어놓았다.
그러자 얼굴을 온통 찌푸리며 아픔을 참던 도옥은 이를 악물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악을 썼다.
[으윽......차라리 죽이는 것이 어떻소?]
눈동자를 모로 굴리며 이를 악무는 도옥을 주약란은 차디찬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다가
다시 달려들어 왼쪽 견갑골을 떼어놓고 계속해서 두 다리의 네 곳 관절마저 떼어놓고 마는 것이었다.
[죽여달라고요? 그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어요.
남을 모진 고통 속에서 헤매게 하는 자는 응분의 보수를 받아야 해요.]
하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계속해서 말했다.
[이런 수법으로 관절을 떼어놓으면 구할 사람도 없을 거에요.
공연히 소리지르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하는데 우뢰와 번개가 아우성치던 하늘에서는 드디어 댓줄기 같은 비가
후두둑 떨어지면서 금방 폭우로 변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급히 큰 소리로 여러 사람들에게 비를 피하도록 했다.
[저쪽 절벽 밑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하세요!]
하고 소리친 주약란은 하림을 이끌고 역시 절벽 밑으로 비를 피했다.
이때, 완전히 사지를 쓸 수 없게 된 도옥은 오도가도 할 수 없는 몸을 그대로?
허수아비처럼 벌린곤 누운채 쏟아지는 비를 모두 맞아야 했다.
온통 검은 구름으로 가린 하늘은 금방? 주위 일대를 컴컴한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거의 지척도 분간할 수 없이 뽀오얀 안개가 계곡을 뒤덮었다.
그리고 간간이 번쩍번쩍하는 번갯불이 요란한 소리를 낼 때마다 빗속에?
발랑 누워 있는 도옥의 처량한 모습이 보이곤 했다.
주약란과 마주앉은 하림은 손으로 턱을 괴고 쏟아지는 비를 멍청히 바라보고 있다가
주약란에게 고게를 돌렸다.
[언니! 정말 양상공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요?]
하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주약란도 빗속으로 던졌던 시선을 거두며 음성을 낮추었다.
[구해야지, 양상공을 구해야 돼. 그러나 그런 눈치를 도옥에게 보이면 안돼요.?
먼저 도옥을 괴롭힐 수 있는대로 괴롭혀서 참지 못하게 되면 저쪽에서 먼저 조건을 걸어 올거야.
그러면 그때 효과를 거둘 수 있지.]
[란이 언니! 꼭 구해주셔요.]
[염려말아요.]
[그런데 언니!]
[?...............]
[부탁이 있어요.]
[무슨?]
[이번에 양상공을 구하면 언니도 우리와 함께 살아요.]
주약란은 가만히 미소를 띄웠다. 마음이? 설레고 기뻤다.
그러나, 그러나......주약란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이 언니도 양상공의 부인이 되란 말인가?]
[예, 양상공도 좋아하실 거에요.]
[그건 심소저가 모르고 하는 말이야.
나같은 여자는 자격이 없어요.
나보다 더 훌륭한 여자가 있다면 협조를 해줄 수 있지만.]
[그럼, 언니는 조소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글쎄......조소저야말로 제일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말에 하림은 잠시 생각에 빠지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저도 조소저를 생각해 봤어요. 그러나 조소저의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주약란은 후! 한숨을 내쉬며 쏟아져 내리는 비를 응시했다.
[조소저도 좋아할거야. 그리고 무공에 있어서도 나보다 더 강해서 양상공을 많이 도와줄거야.]
[그럼, 언니는 싫으시단 말인가요?]
하고 묻는 말에 주약란은 빗속에서 시선을 거두며 표정을 굳혔다.
[심소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부인을 양상공이 거느리도록 하려는 셈이지?]
그러나 하림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아무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많으면 많을 수록 좋아요.]
[무슨 말인지 나는 모르겠군......그러나 나는 영원히 시집을 가지 못할거야.]
[네?......]
[시집을 가지 못한다고 했어.]
[그건 무슨 이유죠?]
[좀 비밀이지만......]
[말해줄 수 없어요?]
[글쎄, 왜냐하면 지금 나는 어떤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그 무공을 수련하려면 순결하지 않으면 안돼요.]
[정말인가요?]
[이 언니가 거짓말하는 것을 보았어?]
오히려 되묻는 주약란을 하림은 감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맹랑한 대화도 더 이상 계속하지 못했다.
그것은 서쪽 절벽 위에서부터 십 여개의 등불이 일제히 계곡 아래를 비추었기 때문이었다.
흠칫 놀란 주약란은 눈을 크게 뜨며 절벽 위를 주시했다.
그러자 그 불빛 속으로 천천히 자태를 나타내는 왕한상이 보였다.
불빛 속에서 자태를? 나타낸 왕한상은 삐죽이 나온 바위 위로 성큼 올라가 목청을 돋우는 것이었다.
[계곡 밑에 있는 사람 중에서 누가 결정권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왕모의 말을 들어보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주약란은 하림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이노선배님이 나서서 왕한상과 담판하는 것이 좋은데...]
하자 하림은 곧장 이창란에게 달려갔다.
[이선배님, 주소저께서 왕한상과 담판하시라 합니다.]
하는 말에 이창란은 쾌히 응낙하고 일어섰다.
[왕한상! 무슨 말인지 이 노인이 들어보겠소.]
했다.
그러자 왕한상은 이창란의 음성을 알아듣고는 조금 실망한 듯 잠시 대답이 없다가
얼마만에 소리치는 것이었다.
[주소저는 어디 갔습니까?]
[주소저가 어디 있는지 상관할 필요는 없지 않소?]
[그럼, 이 왕모가 내려가겠습니다.]
하고는 폭우를 무릅쓰고 밧줄을 잡았다.
그리고는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창란은 아주 기분이 고약했다.
옛날? 천용방의 방주였을 때는 일개 단주에 불과했던 왕한상이다.
그러한 왕한상이 이제는 형세가 바뀌어 이창란과 동등한 지위에서 담판을 하려고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창란은 곧 머리를 흔들어 과거를 잊기로 하고 왕한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왕한상도 마음이 언짢았다.
방주 이창란을 배반하고 피차 적으로 만나야 하는 지금,
그래도 옛날의 정분과 존경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먼저 주먹을 마주 잡고 일읍했다.
[이노영웅!]
그러나 이창란의 반응은 차가웠다.
[서로 예의는 그만두고 담판부터 하는 것이 좋겠소.]
순간,
왕한상은 약간 멋적은 듯 아니면 무안을 당한 듯 얼굴을 붉히다가 생각을 고쳤는지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주소저는 어디 있습니까?]
주약란과 담판하겠다는 왕한상의 태도요,
말이었지만 이창란은 일언지하에 잘라버렸다.
[이 늙은이와 담판해도 될거요.
그러다 결정이 곤란하면 주소저를 찾아도 늦지 않을거요.]
그러자 할 수 없다는 듯이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는 왕한상이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도방주님을 모셔가고 싶은데 이선배님께서 결정할 수 있습니까?]
[뭐, 도옥을 데려간다고?]
[그렇습니다. 모셔가야겠습니다.]
[그냥 데려가?]
[아니죠. 조건을 걸겠습니다.]
[어떤 조건을 걸겠단 말이오?]
[저희 도방주님을 이 왕모가 모셔가는 대신 양몽환과 조소접 두 사람 중에서
누구라도 한 사람만 놓아주겠습니다.]
하는 말에 이창란은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즉시 이창란은 양몽환! 하고 대답할 수 있지만
그리고 여기 모인 여러 고수들도 양몽환을 택하겠지만
지금 도옥을 사로잡은 사람은 여러 고수가 아닌 주약란이었다.
그렇다면 주약란의 의사를 물어야 마땅했다.
<주소저라면 과연 누구를 택할까?>
얼른 생각해 보았지만 주약란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이창란은 한참 망설였다.
결정을 못내리는 이창란을 보고 왕한상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혼자 결정할 수 없다면 주소저와 의논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럼, 그렇게 합시다.]
도저히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이창란은 뒤를 돌아보며 하림을 불렀다.
[림아야! 주소저를 좀 오시라고 해라!]
그러자 하림은 곧장 주약란에게 연락했다.
그래서 주약란은 이창란과 왕한상이 마주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먼저 왕한상이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이 사방(四方)의 절벽 위에는 기름을 묻힌 나무와 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소이다.
그리고 비가 그치면 지체없이 이 계곡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담판이 아닌 위협부터 하는 왕한상을 차갑게 노려보던 주약란은 가볍게 코웃음치고 받아넘겼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곳까지 내려왔나요?]
[우선 이 계곡 밑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할 것 없이 불에 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뿐이오.]
[흥! 왕한상 당신도 같은 운명일 거에요.]
[핫......하......설마 여러분들의 많은 목숨과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을 바꾸자는 것은 아니겠죠?
그렇다면 이 왕모는 영광이오.]
큰 소리로 웃어젖힌 왕한상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보다 이 왕모가 여기에 온 것은 주소저와 의견을 나누고자 해서 온 것이오.]
[그렇겠죠. 어서 말이나 해보시죠.]
[수차 하는 말이오만 양몽환과 조소접 두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과 우리 도방주님과 바꾸자는 것이오.]
[두 사람과 도옥을 바꿀 의사는 없으신가요?]
[그건 공평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 만사가 공평해야? 한다는 것은 주소저도 잘 알고 있을거요.
욕심을? 내면 안되는 법이오.]
[그런건 어디서 배웠죠?]
[배운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알고 있는 일이죠.
허......허 ......주소저,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
[즉, 이번에 한 사람만 바꾸고 다음에 또? 우리 방주님을 사로잡아서
나머지 한 사람과 바꾸기로?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도옥에게서도 그런 말은 들었어요. 그런데 당신까지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요?]
[두 사람과 도옥을 바꿔요.]
[그렇다면 이 왕모가 혼자 그런 문제를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오.
우리 도방주님과 의논해 보고 결정하면 어떻겠소?]
그러자 주약란은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폭우가 쏟아지는 빗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 도옥은 사지를 벌리고 폭우 속에 누워 있었다.
[바로 저기 누워 있는 사람이 도옥이에요. 가서 재주껏 구해 데려가세요.]
하고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것은 왕한상 네가 재주가 있다면 도옥을 구해 도망쳐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왕한상은 고개를 흔들며 변명하는 것이었다.
[뭐, 아무 염려마십시오. 그런 비열한 행동은 결코 안합니다.]
정색하며 변명하는 왕한상을 싸늘하게 쏘아보던 주약란은 코웃음을 쳤다.
[왜, 재간을 좀 부려보시죠?
당신이 도옥을 구할 수 있다면 해보세요.
어디 구경이나 해볼까요?]
하고 말하는 주약란의 태도는 만일 도옥에게 손끝이라도 댄다면
당장 손을 꺾어버리겠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러한 주약란의 태도에 왕한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도옥이 쓰러져 있는 곳을 향해 폭우 속으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옷은 말할 것도 없고 흙과 모래가 튀어 얼굴도 말이 아닌 도옥은
물에 흥건히 잠겨 있었다.
그리고 꽉 감은 눈이며 잔뜩 찌푸린 얼굴은 지독한 고통을 참느라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도옥을 보자 왕한상은 급히 탄식하며 도옥을 불렀다.
[방주님!]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도옥은 곧 왕한상임을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이 몸을 만지지 마시오.]
겨우 모기소리만큼 가느다란 목소리로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주소저가 방주님의 혈도를 짚었습니까?]
[그렇소. 그 수법을 모르는 사람이 손을 대면 위험하오.]
사실 어떠한 무공으로 혈도를 짚었는지 그 수법을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대는 날이면 반병신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한 것을 왕한상이 모를리 없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방주님! 제가 스스로 양몽환과 조소접 가운데서
한 사람과 방주님을 바꾸자고 주소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는데 주소저는 두 사람을 다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도옥은 얼굴을 씰룩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건 안되오. 지금 주약란이 이 도옥을? 죽이지 못하는 것도 실은 양몽환과 조소접을?
우리가 인질로 삼고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 두 사람을 다 내놓으면 어떻게 되겠소? 우리가 불리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오.]
[그러나 방주님! 방주님만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다시 방법을 강구해서
그들과 상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왕형! 주약란의 지모가 매우 놀랍소.?
만일 그들의 요구대로 우리들이 들어준다면? 그녀는 또 무슨 의심을 품을 것이오.
여하간 그 일은 이 도옥에게 맡기고 속히 절벽 위로 올라가시오!]
하고는 이를 갈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음...... 왕형이 삼음신니의 접골수법을 안다면 좋겠소만 ......]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제가 한번 해보죠. 이까짓거 힘들 것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왕한상은 도옥의 왼쪽 팔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도옥은 기절초풍하듯 놀라며 큰 소리를 질렀다.
[안되오! 삼음신니의 접골수법은 독특하고 절묘하여 그 비결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손을 대면 실로 가공할 일이 벌어지오!]
하며 손을 못대게 하였다.
할 수 없이 멍청히 선채 도옥을 바라보던 왕한상은 치료를 단념하고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좀전의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그럼, 방주님! 만일 주소저가 한 사람이라도 좋다면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도옥은 힘없이 눈을 뜨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응낙하시오.]
땅이 꺼져라 하고 한숨을 내쉰 왕한상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약란에게로 되돌아왔다.
[안되겠소이다. 방주께서도 비록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두 사람과 한 사람을?
바꾸는 그런 공평치 못한 조건은 들어주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약란도 차갑게 내뱉고 말았다.
[좋아요. 스스로 응낙하게끔 만들겠어요. 당신은 돌아가도 좋아요.]
[그러나 주소저, 이 왕모는 우리 방주님과 두 분을 바꾸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방주님이 싫다고 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왕모는 절대로 정말 절대로 바꿔도 좋습......]
하는 것을 주약란은 소리를 빽 질러 중단시켜 버렸다.
[알았다니까요! 이젠 그만 돌아가시오.]
머쓱해진 왕한상은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래도 이창란과의 옛 정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제기랄!
[그럼, 주소저는 이 왕모도 사로잡겠단 말이오? 그래도 이 왕모는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생각? 필요없어요. 더구나 여기 모인 고수들이 분노에 불타고 있어요.
공연히 고분고분 돌아가지 않으면 두 다리를 꺾어버리겠어요. 어서 가요.]
섭섭한 표정을 짓던 왕한상은 서슬이 파란 주약란의 말에 찔끔 몸이 움츠러들었다.
<......음, 아무래도 이 왕모와 적수는 안되지?......>
왕한상은 주약란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글거리는 화통을 터뜨리지 못하고 길게 탄식만 했다.
그러나 주약란의 말대로 고분고분 물러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여러분들은 인수(人數)가 많소. 그래서 이 왕모가?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아오.?
그러나 이 왕모도 한번 화를 내면 무섭다는걸 알아두시오.]
제법 큰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제법이란 듯 빙긋 웃었다.[그럼, 더 잘됐어요. 화를 한번 부려보시오......... 큰 소리를 치지 말고 돌아가라고 할 때 갈 것이지!]
하고 말하던 주약란의 시선은 그대로 왕한상을 노려본채 하림을 부르는 것이었다.
[심소저! 저 왕한상의 혈도를 짚어버려요.]
그 순간, 왕한상은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공연한 한마디에 오도 가도 못하고 화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주약란이 없는 고수들 뿐이라면 또 몰라도 주약란이 딱버티고 서서 노려보는 데는 적수는 고사하고
입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다 도망을 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반항 한
번 못하고 당할 도리밖에 없었다.
이때, 주약란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하림은 다짜고짜로 왕한상에게 다가와 익숙한 솜씨로? 몇곳의 혈도를 눈
깜짝할 사이에 짚어버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왕한상은 비틀비틀 중심을 못잡고 흐느적거리다가? 그만 쓰러지듯 땅바닥에 주저앉고 마는 것이
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하림을 조용히 불렀다.
[심소저! 저 왕한상은 도옥의 강요에 못이겨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야. 인간이 불쌍해. 우선 저쪽 바위 밑으
로 데려가 비나 피하도록 해줘요.]
관대히 생각해서 하는 말에 하림은 왕한상을 끌어다 바위 밑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란이 언니! 이젠 도옥과 왕한상을 사로잡았으니 현옥을 불러 절벽 위로 올라가 양상공을 구해요.]
그러나 주약란은 머리를 흔들었다.
[서두를 것 없어. 도옥과 왕한상을 잡아놓은 이상 머리없는 부하들이 양상공을 어쩌지 못해. 그동안 조식이
나 해둬요.]
하는 말에 하림은 조용히 앉아 조식을 취했다.
이윽고 어둡던 밤도 서서히 지나고 밝은 해가 백장봉의 계곡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쏟아져 내리던 비
도 그치고 맑게 개인 아침 하늘이었다.
사정없이 내려비추는 뜨거운 태양은 아직까지 쓰러져 있는 도옥의 얼굴 위를 뜨겁게 내려쪼이고 있었다.
이때, 주약란은 하림을 이끌고 쓰러져 있는 도옥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하림은 날카로운 장검을 한
자루 들고 바싹 주약란의 뒤를 따랐다.
도옥에게 다가간 주약란은 차가운 어조로 도옥을 불렀다.
그러나 도옥은 주약란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눈을? 감은채 비웃음이 가득 찬 얼굴을 찌푸리
고 있었다.
[도옥! 이제 반나절만 지나면 떼어놓은 관절은 이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죠?]
그러자 도옥은 여전히 싸늘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
[흥! 그보다 먼저 이 계곡에 있는 풀 한포기까지 불바다에 휩쓸릴 것이오. 이런 마당에 그까짓 관절쯤 무슨
대수요? 다 죽어버릴텐데!]
[그렇게는 못할 거에요. 당신이 여기 있는 이상 부하들이 어찌 자기들의 방주를? 죽이려고 불을 지를 수 있
어요?]
[이 도옥의 부하들은 명령을 따를 뿐이오. 시간만 경과되면 주저하지 않고 불을 놓을 것이오.]
[흥! 얼마든지. 그러나 기름통을 터뜨려 불을 지른다 해도 먼저 죽을 사람은 바로 도옥 당신이지!]
하고 여유있게 말하던 주약란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한가지 잊을 뻔했군......왕한상이란 자도 여기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겠어요.]
그러자 도옥은 순간 놀라는 듯했다. 그러나 곧 태연히 웃었다.
[내려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걸......주소저의 인간성을 믿은 것이 잘못이겠지!]
[인간성? 당신같이 교활한 사람에게 무슨 인간성이 필요있어요? 성인군자(聖人君子)라도? 당신같이 악한 자
들과는 상대하지 않을 거에요.]
하며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도옥도 지지않고 누운채 입을 놀리고 있었다.
[흥! 하여튼 그만두시지! 이 도옥이 죽는다 해도 주소저같이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죽게 된 이 마당에 더
말해봐야 그게 그거요. 이 도옥은 차라리 고마워 해야 할거요. 죽음의 길에 친구가 되어주는 주소저에게 말
이오.]
도리어 큰 소리로 떠드는 도옥을? 한옆에서 노려보고 있던 하림이 갑자기? 도옥의 얼굴에 장검을 들이대는
것이었다.
[란이 언니! 아주 여기서 죽여버리면 어때요? 말도 못하게 말예요.]
그러나 주약란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서두르지 말아요. 나는 이미 준비를 해두었어.]
[무슨 준비를 해두어요?]
[도옥이 매복시켜둔 절벽 위의 부하들이 어떤 이상한 거동을 보일 때에는 즉시 살계(殺戒)를 범해서 부하들
이 처참히 죽는 모양을 도옥의 두 눈에? 똑똑히 보여 주겠어. 그 다음에 양상공과 조소저를? 구해서 그들로
하여금 도옥을 처치하도록 하겠어!]
도옥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순간,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지의 관절이 모두 탈골되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조금? 움직이는 척만 해도 당장 뼈가 부수러지는
것같은 고통에 땀만 줄줄 흘려야 했다.
더구나 지난 밤 폭우에 옷이며 얼굴이 흠뻑 비에 젖었다가? 동이 트면서부터 내려쪼이는 햇빛에 살이 오그
라붙는 것같은 고통은 더 말할 수 없었다.
살이 조여들고 목이 말라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한편, 주약란은 도옥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최대한으로 주어서 결국 참지 못하고? 양상공과 조소접을 내놓고
나아가서 이 계곡에 모인 여러 고수들을 무사히 협곡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응낙을 받으려는 계산이
었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도 끝내 참고 버티는데는 주약란도 별도리가 없었다.? 도옥이 버
틸 수록 주약란은 패배를 자인해야 했다.
그렇다고 도옥을 죽여버린다면, 그래서 그의 부하들이 불을 지른다면 양상공을 구하기는 커녕 여기 모인 고
수들에게 죽음을 안겨주는 결과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주약란으로서는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해도 이미 서산으로 기우는 저녁무렵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서쪽 절벽 위에서부터 날카롭고 긴 휘파람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두 개의 불덩어리가 계곡 밑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흘깃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발견한 도옥은 낄낄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눈이 둥그래진 주약란을 바라보며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저 불덩어리는 동백기름을 묻힌 통나무로서 삽시간에 이 계곡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오!]
하고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그렇게 통쾌하게 웃던 도옥이 그만?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 말았다.
그것은 너무나 소리내어 웃는 바람에 탈골된 관절을 다치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극심한 아픔이 몰려와
웃음이고 뭐고 걷어치우고 어금니부터 물어서 고통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두 개의 불덩어리는 계곡 밑으로? 떨어져 맹렬한 불꽃을 튀기면서 타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당파의
두 제자가 뛰어가 웃통을 벗어 물에 적신 다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불을 끄는 것이었다.
이때, 주약란은 사방을 휘! 둘러본 다음 도옥을 내려다 보았다.
[도옥! 아무리 통나무에 기름을 바른 불덩어리를 던진다 해도 여기 모인 고수들을 해치지는 못해요!]
그러자 아픔을 참고 있던 도옥은 얼굴을 찌푸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안심하시오. 그들 고수들이 겨드랑이에 날개가 없는 이상 한 명도 남기지? 않고 태워죽일 것이오. 그만
한 준비는 벌써 다 해두었소.]
그러는데 절벽 위에서 고함소리가 터졌다.
[앞으로 한 시간 안으로 우리 방주님을 보내지 않으면 가차없이 이 계곡을? 불바다로 만들겠소. 지금 두 개
의 불덩어리는 구경이나 하라고 던진 것이오. 살고 싶으면 방주님을 돌려보내시오!]
하고 외치는 고함소리에 주약란은 즉시 음성을 돋우었다.
[좋아요. 그러나 이 계곡으로 불을 던진다면 여기 도옥이부터 새까맣게 타죽는 것을 보게 될 거에요.]
그러자 절벽 위에서는 무슨 의논을 하는지 잠시 조용해졌다가 얼마만에 다른 음성이 터졌다.
[그건 괜찮소. 우리 방주님이 오늘 오시(午時)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였소!]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주약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음...... 도옥이 정말 죽을 결심이라면? 그래서 이 계곡에 불을 지른다면? ......>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옥 따위를 죽이는데 양상공과 조소접을 함께 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 그럼...... 옥소선자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까지는 도옥을 살려둬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주약란은 미련없이 도옥의 관절을 모두 이어주고 말았다.
그러나 양상공과 조소접을 살리기 위해서 또 불덩어리의 공격을 두려워 해서 도옥의 관절을 이어준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약란의 뜻밖의 행동에 눈이 둥그래진 도옥에게 무슨 말인가 한마디는 있어야 했다.
[불덩어리를 던져서 꼼짝 못하고 타죽을 당신이 불쌍해서 우선 관절을 풀어주는 거에요.]
하는데 다시 날카롭고 긴 휘파람소리가 나면서 절벽에서부터? 일제히 시뻘건 불덩어리가 비오듯 하늘을 덮
으며 쏟아져 내렸다.
수 천개나 되는 듯한 불덩어리는 삽시간에 협곡을 메우다시피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위기를 직
감한 주약란은 다시 도옥의 혈도를 급히 짚어버렸다.
그러는 동안 불덩어리는 계속해서 절벽 위로부터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미리 계획한 일인지 도옥이 누워 있는 부근에는 하나의 불덩어리도 던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방주 도옥을 해치지 않으려는 것과 계곡 절벽 밑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고수들을 가운데로 모아놓는
이중의 효과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의 계획은 맞아 들어갔다.
절벽 밑에 숨어 있던 고수들은 불덩어리를 피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 가운데로 몰려들어 불덩어리를
피했다.
그리고 하림도 왕한상을 끌고 역시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계곡은 중앙 부분만 제하고 모든 곳이 화염에 휩싸이고 더구나 절벽 위로부터 불덩어리가 떨어짐
과 동시에 마른 나무통들을 굴리는 바람에 불길은 더욱 소리를 내며 무섭게 불붙고 있었다.
그러나 불길이 없는 중앙이라고 해야 겨우 오장(五丈)정도, 확확 불어오는 불길에 전신이 뜨거웠다. 만일 한
덩어리의 불이 떨어지면 모두 타죽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때, 염불을 천천히 외우고 있던 천홍대사가 길게 탄식하며 주약란을 불렀다.
[주소저! 불에 타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어떻겠소?]
하자 주약란은 근심띄운 얼굴을 천천히 가로 흔들었다.
[안됩니다. 대사님, 지금 불길이 사납고 더구나 구장(九丈)이나 높이 치솟는? 불길을 뚫고 나간다는 것은 강
한 무공으로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자 언제나 참지 못하고 성격이 급한 문공태가 청죽장을 들었다가 놓았다.
[그러면 불길이 가까이 올 때까지 그냥 있다가 불에 타죽자는 말이오?]
[가만 계셔요.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들을 구해줄 사람이 올 거에요.]
하는 말에 문공태는 후유! 한숨을 내쉬며 장탄식을 했다.
[애석하게도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구려. 어젯밤 내린 비가 지금쯤 오면 염려가 없겠는데......]
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문공태의 말에 이창란은 그래도 노장의 관록을 보였다.
[우리 내공을 쌓은 사람들은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능히 견딜 수? 있소. 그러니만큼 이렇게 하늘만 쳐다
볼 것이 아니라 각기 흩어져 불길이 더 타들어 오지 않도록 막으면 하루쯤은 넉넉히 견딜 수 있소.]
[이형의 말이 옳소.]
즉각 호응해 오는 천홍대사였다.
그러자 여러 고수들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며 각기 무기를 휘둘러 불길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기 시작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정서(正西) 방면으로 달려나가고 그 뒤를 이어 무당파의 부하들, 문공태,
이창란, 이렇게 해서 한 방위씩 맡아 불의 접근을 막았다.
그때, 도옥은 혼자 중얼거리듯 탄식하는 것이었다.
[바람만 조금 불어도 다 태워죽일텐데......애석하다!]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주약란은 그 고운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럼, 우선 도옥 당신부터 불 속으로 던져버리겠어요.]
[흥! 죽는 것을 두려워할 이 도옥이 아니오. 이 도옥이 먼저 죽으면 그 다음엔 누구요?]
[뭐라고요?]
[화내지 마시오. 이 도옥 다음엔 양몽환, 조소접 그리고 주약란, 고수들이 차례로 죽을 것이오.]
[그러나 그렇게 뜻대로는 안될 거에요. 오늘 이 불길이 아무리 사납다 해도 우리들 누구하나 죽이진 못해요.
그리고 도옥 당신도 그렇게 쉽게는 죽이지 않겠어요. 두고두고 고통을 받다가 죽게 하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오?]
[두고 보면 알게 돼요.]
그러는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조용하던 절벽 위에서부터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지면서? 수많은 흑의의 장정들이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문공태는 청죽장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좋아! 좋아! 이제야말로 주소저가 말한대로 구원자가 온 모양이군!]
하며 덩실 춤까지 추자 도옥은 밸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문공태! 아직 좋아하기는 이르오. 불길에 태워죽이지 못한다해도 이 계곡을? 빠져나가지는 못할 거요. 그때
가서 한 번 더 춤을 추지! 흥!]
여전히 기세있게 흥흥 거리는 도옥을 노려보던 주약란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도옥! 마음대로 소리를 질러둬요. 이제 양상공을 구해서 그에게 당신을 처치하도록 해 놓을 테니까!]
그러자 도옥은 어이없다는 듯이 주약란을 올려다 보는 것이었다.
[주소저! 혹시 잠꼬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뭐라고요? 그래도 아직 입은 살았군요.]
그러나 도옥은 눈을 감으며 혼잣소리처럼 장탄식을 했다.
[아! 분하다. 이 도옥이 삼년만 더 준비했더라면 그래서 수련을 쌓았더라면 당신들을 하나하나 깨끗이 죽여
버릴 걸 ......]
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또 한떼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지며 칠팔 명의 장정들이 절벽 위에서부터 불길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인? 질?? 교 환
이 뜻밖의 괴변에 놀랐는지 절벽 위에서는 더 이상 불덩어리나? 마른 나무를 굴리지 않고 더구나 기세마저
잃은 듯 조용했다. 이때 한편에서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흑의장정들을 바라보고 있던? 천홍대사는 주약란
에게 다가가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주소저의 신기묘산(神奇妙算)은 정말 훌륭합니다. 주소저께서? 옥소선자를 미리 보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불 속에서 죽었을거요.]
아끼지 않는 치사에 주약란은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어요. 도옥의 간계가 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또 무슨 계략이 있다고 하던가요?]
하고 크게 소리쳐 묻는 천홍대사의 말을 도옥이 냉큼 받았다.
[흥! 직접 당해보면 알 거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만 분통이 터진 천홍대사는 두 볼에 바람을 넣었다.
[사로잡힌 주제에 입이나 닫고 있어! 그편이 신상에 좋을 걸!]
하며 천홍대사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는 바로 그때, 한마리의 아름다운 학의 울음소리와 함께 주약란의 현옥이 옥소선자를 등에 태우고 가만
히 땅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옥소선자가 내려와 주약란에게 다가왔다.
[주소저, 지금 돌아왔습니다.]
하고 허리를 굽혔다.
[수고했어요 그런데 다른 소식은?]
[예, 제가 알기로는 이번 도옥의 화염공세 이외에도 다른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화염공세를
저지한 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럼, 무슨 대책이라도 생각해 보셨어요?]
[제 생각같아서는 주소저께서 여기에 더 머물러 계시지 말고 떠나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왜? 다른 사람들도 그냥 있는데 내가 먼저 떠나다니?]
그러자 주위의 여러 고수들을 둘러보고 주약란의 귀에 입을댄 옥소선자는 음성을 낮추어 무슨 말인가를 속
삭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약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사실이에요?]
[틀림없어요.]
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사실이고 틀림없는지 여러 사람들은 어리둥절하여 주약란과 옥소선자를 주시하고 있
었다.
그때, 주약란은 도옥에게 고개를 들리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도옥! 나는 그대가 피육(皮肉)의 고통을 더 이상 받는다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하는 말은 이제부터 사태 여하에 따라서 더 모진 고통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도옥은 순간 흠칫했다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말이나 해보시오. 그래야만 이 도옥이 대답할 거 아니오?? 만일 이 도옥이 가능한 일이라
면 고통을 받기 전에 사실을 말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어도 할 수 없소. 그러나 이 도옥이 죽는다면 아
무 소득도 없을 거요.]
그러는 동안 위세를 떨치며 타들어 오던 불길도 눈에 띄일 만큼 약화되고 있었다.
이때, 옥소선자는 재빨리 주소저에게 말했다.
[혹시 제가 잘못 추측한 일인지도 모르고 또 근본적으로 도옥과? 관계없는 일인지도 몰라요. 소저께서는 아
직 도옥에게 말씀하지 마세요.]
주약란의 입을 간접적으로 막는 옥소선자의 말에 주약란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그럼.]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옥이 소리쳐 묻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그러나 주약란은 도옥의 물음을 무시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불에 화상을 입은 사람은 없어요?]
하고 묻자 곧 천홍대사가 대답해 왔다.
[본파의 두 제자가 약간의 화상을 입었소이다.]
[그럼, 먼저 학을 타고 절벽 위로 올라가게 하세요.]
[고맙소. 주소저!]
소림사의 두 제자를 제하고는 별로 화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두 명만 우선 안전한 곳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하려는 주약란의 의도였다.
즉시 주약란은 옥소선자에게 명했다.
[우선 두 스님을 절벽 위로 옮기세요.]
하는 말에 먼저 옥소선자가 학의 등에 오르고 뒤이어 천홍대사에게 부축된 두 명의 승려가 뒤따라 올랐다.
두 명의 승려는 승포자락이 거의 반이나 타고 얼굴에도 심한 화상을 입은 것이 얼핏 보기에도 중태인 것같
았다.
학의 등에 오른 두 명의 승려중 한 사람은 화상이 너무 심해 몸도 잘 가누지 못했다. 그러자 주약란은 옥소
선자에게 승려를 안으라고 명했다.
그 말에 옥소선자는 두 팔을 벌리고 가볍게 안았다.
[그럼, 팽소저에게 치료를 부탁한다고 전해줘요.]
하는 말에 옥소선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현옥은 긴 날개를 천천히 펴며 절벽 위로 비상했다.
한편, 계곡 사방에 매복되어 있던 도옥의 부하들은 옥소선자가 이끌고 온 몇 명의 원군에 의해 거의 대부분
이 죽고 다치고 그래도 운이 좋은 자들은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절벽은 완전히 옥소선자의 원군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리고 불길도 이제는 희뿌연 연기만 낼 뿐 불길은 일어나지 못하고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현옥을 입을 벌린채 바라보고 있던 천홍대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주약란에게로 다가가며 흐뭇하게 웃었다.
[주소저에게 한가지 여쭐 말씀이 있소이다.]
[대사께서는 무슨 말씀이 있으십니까?]
[이제 도옥과 왕한상이 우리 수중에 있고 또 절벽 위의 적들도 거의? 쓰러진 것같소이다. 이 기회에 양상공
을 구해내면 안되겠소이까?]
그러나 주약란은 고개를 흔들며 얼굴빛을 어둡게 흐렸다.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라면 도옥이 이런 풍파를 일으키지 않았을 거에요.]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천홍대사는 귀를 세웠다. 그러나 먼저 도옥이 입을 열고 말았다.
[핫...... 하...... 천하를 두루 살펴보아도 이 도옥의 적수는 주소저밖에 없어!]
자랑인지 감탄인지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벌컥 화가 난 문공태가 분통을 터뜨렸다.
[사로잡힌 주제에 가만있지 못해? 더구나 지금 저따위 꼴로 무슨 재주가 있다고 떠드는 거야?]
문공태의 말에 도옥은 냉소를 터뜨렸다.
[여보쇼. 문공태! 좀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을 거요. 이 도옥을 죽이고 싶다면 죽여도 좋소. 그러나 한가지 잊
은게 있소.]
[뭣이? 무엇을 잊었단 말야?]
[양몽환과 조소접이 이 도옥의 손아귀에 들어있다는 것을 말이오. 만일 이 도옥을 죽이는 날이면 그와 똑같
은 시각에 그들도 죽을 것이오.]
위협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양몽환과 조소접을 들먹거려 죽음을 모면하려는 것인지 도옥은 몇 번째인지 모
를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홍대사가 점잖게 말했다.
[도시주! 그래서 이 빈도는 양상공과 조소저를 구한 다음 도시주를 죽이려는 것이오.]
그러자 그 말에 도옥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흥! 어림도 없소. 몇년 동안이나 허비하여 만든 훌륭한? 동굴속에 지금 감금해 놓았는데 그렇게 쉬이 구할
것같소?]
여전히 냉소를 터뜨리며 하는 말에 주약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용두지팡이를 꼬나쥐고 씨익씨익 울분을 토하고 있는 이창란에게 다가갔다.
[이노선배님! 우리가 이곳을 떠나면 도옥의 기세가 약간 꺾여질 것같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창란 대신 문공태가 먼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우리들이 이 계곡에 있는 한, 언제든지 우리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에요. 그래서 큰 소리를 치
는 것이 아닐까요?]
문공태는 허...... 허...... 웃으며 청죽장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옳은 말이오. 그럼 이 문공태가 앞장을 서겠소. 모두 따라오시오!]
하고는 청죽장으로 땅을 꽝꽝 두드리며 절벽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이때는 이미 사방 절벽 위에 매복시켜 두었던 도옥의 부하들도? 다 도망쳐버리고 불길도 완전히 꺼진 후였
다.
그러는 한편, 앞장을 선 문공태는 청죽장을 휘둘러 타다 남은 나무토막들을 헤치며 길을? 터놓고 절벽 밑까
지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절벽 위로부터 굵은 밧줄이 내려오고? 옥소선자도 현옥과 함께 내려왔다. 그러자 주약란은
즉시 분부를 내렸다.
[혹시 상처를 입은 분이 계시면 학을 타시고 다른 분들은 밧줄을 타고 오르도록 하세요.]
이어 옥소선자는 그간의 경과를 알렸다.
[동남서(東南西) 세 곳의 산 위에 매복되어? 있는 적들은 이미 천기석부에서 달려온? 사람들과 계곡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수들에 의해 제거되었고 절벽 위 두 곳의 동굴만 적이 매복해 있습니다. 소저!]
[수고했어요.]
옥소선자에게 치하한 주약란은 곧이어 문공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문장문님께서 먼저 오르세요.]
[예, 이 늙은이가 먼저 오르지요.]
하고는 밧줄을 잡고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여러 고수들이 차례차례? 질서있게 오르기 시작
했다.
이렇게 하여 뭇 고수들이 다 오르자 주약란은 도옥과 왕한상을 학에 태우고 맨 나중으로 절벽 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모든 고수들이 산 위에 오르기를 기다려 옥소선자는 큰 바위 옆으로 일동을 안내했다.
[여러분들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못해 퍽 시장하실 거에요.? 여기에 주소저께서 약간의 음식을 준비
시켜 놓았어요. 우선 식성대로 드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을 끝내자 곧이어 십여 명의 시녀들이 여러가지 음식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편한 자세로 앉아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몇 군데로 나누어 놓았다.
그러자 여러 고수들은 오랜만에 귀한 음식을 맛보게 되어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부지런히 먹기 시작했
다.
그러는 한면, 주약란은 도옥과 왕한상을 옆에 앉혀 놓고 보라는 듯이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이때, 도옥이나 왕한상도 역시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눈에 가득
히 들어오자 창자가 올라붙는 것이 실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보란 듯이? 여러가지 음식을
맛있게 먹을 뿐 조금도 도옥에게는 줄 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내밀 수도 없는 도옥은 듣지
도 보지도 않으려고 눈을 꼭 감고 손을 놀릴 수만 있다면 귓구멍도 막고 싶었다. 죽을 지경이었다. 연방 뱃
속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한 괴로움을 얼마나 참고 견뎠을까. 이윽고 다 먹은 주약란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을 감고 있
는 도옥을 싸늘하게 노려 보았다.
[도옥! 이제는 부하들도 전멸했고 함정도 허사로 되었어요. 그래도 큰 소릴 칠 작정인가요?]
[흥! 만일 주소저가 방해만 놓지 않았던들 이 도옥의 계획은 성공했을 거요.]
[방해라구요? 패했으면 깨끗이 양상공과 조소접을 내놓는 것이 좋을 거에요.? 나중에 이 주약란을 원망하지
말고요.]
[원망할리 없지. 양몽환과 함께 죽는다면 더 좋을 거요.]
[당신같은 사람과 양상공은 비교도 안돼요. 당신이 아무리 큰 소릴 쳐도 꼭? 구해내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말
아요.]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늘을 쳐다보던 도옥은 무슨 일인가에 결심을 얻은 표정이었다.
<우선 그녀의 조건을 응낙하고 이 도옥이 살아야 되지 않는가? ......>
여기까지 생각한 도옥은 큰 소리로 주약란을 부르고 말았다.
[주소저! 이 도옥이 양몽환과 조소접을 내준다는 조건에 응하겠소. 단, 그전에 나와? 약속할 것이 한가지 있
소.]
드디어 굴복할 모양이었다.
[무슨 약속을 한단 말이오?]
[그건 간단한 일이요. 즉, 오늘부터 앞으로 육개월 동안 서로 적대 행위를 하지 않기로 약속해 준다면 주소
저의 조건에 응하겠소.]
그러나 이번에는 주약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음, 무슨 계략을 또 쓸 모양이군 ......>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곧 되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죠?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그동안 음모를 계획하겠단 말인가요?]
[바로 그렇소. 피차 무공을 더 수련해서 암기나 함정으로 싸우지? 말고 무공의 실력으로 겨루어보자는 것이
오.]
[좋아요. 조금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러나 한가지 물을 것이 있어요.]
[얼마든지 물으시오.]
[당신이 사로잡은 사람이 세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한 사람은 독용부인인가요?]
[그렇소. 그러나 그녀는 조건 중에 들어있지 않소. 원래 양몽환과 조소접 두 사람만 말하지 않았소?]
[물론 없었어요. 그러나 당신이 요구하는 육개월에다 사개월을 더 주어 준비하도록 하겠어요. 그대신 독용부
인도 내놓으세요.]
하고 일단 말을 끊었던 주약란은 도옥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이었다.
[그렇다고 당신이 손해볼 것은 없어요. 양상공과 당신의 목숨도 건질 뿐만 아니라 십개월의 준비 기간을 준
다면 당신이 더 이로울 거에요.]
도옥은 가늘게 눈을 뜨고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쾌히 응낙했다.
[이 도옥에겐 독용부인쯤 아무 것도 아니오. 곧 석방시키겠소.]
하고 말을 마친 도옥은 주약란을 마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이미 죽여버린 독용부인이지만? 거리낌 없이
큰 소리를 쳤다.
[주소저! 그렇다면 이 도옥의 요구도 들어주어야겠소.]
하는 말에 주약란은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요구 조건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무슨 요구 조건이죠?]
[우선 왕한상을 놓아주시오. 그 다음에? 그에게 양몽환과 조소접을 석방시키도록 하고? 이 도옥을 놓아주면
되지 않겠소?]
[좋아요. 그러나 잔꾀를 부린다면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하고 위협조의 말을 마친 주약란은 옆에 누워 있는 왕한상의 짚힌 혈도를 익숙한? 솜씨로 풀어주었다. 그러
자 왕한상은 비틀비틀 한동안 몸의 중심을 잡느라고 눈을 크게 뜨고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는 팔 다리를
주무르며 도옥에게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옥은 품 속에서 하나의 옥패(玉牌)를 꺼내 왕한상에게 주는 것이었다.
[왕형! 이걸 가지고 우선 양몽환과 조소접을 풀어주시오. 이 도옥이 목숨을 건 도박이오.]
왕한상은 즉시 도옥에게서 옥패를 받아들고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잠시 후, 주약란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주소저는 왼쪽 골짜기에서 기다리시오.]
하고는 바위 옆으로 사라져 갔다.
왕한상이 사라지고 얼마 후, 주약란은 도옥을 끌고 왕한상이 정해준 골짜기로 내려갔다.
주약란의 손에 이끌려 계곡으로 내려가던 도옥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껄껄 바보처럼 웃으며 중얼거리는 것
이었다.
[만일 이 도옥이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주소저의 손목을 만져보지도 못할거요. 흐...... 흐......]
끌려가면서도 아름다운 여자의 따스한 손길을 느낀 도옥은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눈섭을 치켜 올리며 도옥의 왼쪽 뺨에 불이 나도록 한대 올려부쳤다.
[또 한번 그따위 소릴하면 그냥 두지 않겠어요.]
그러자 도옥은 여전히 시시덕거리는 것이었다.
[모를 일이야...... 이 도옥의 얼굴이 양몽환에 비해? 못하지 않은데 왜 이 도옥에겐 여복이 없을까?......? 우선
주소저부터 옥소선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양몽환만 좋아한단 말야......]
빈정거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느껴서 하는 말인지 여하간 양몽환이 부러운 것처럼 중얼거리는 말
을 못들은 척하고 계곡까지 온 주약란은 도옥의 손목을 앞으로? 냅다 잡아끌어 떨어지게 하고는 연이어 두
곳의 혈도를 짚어 놓고야 입술을 자근자근 깨무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잘 생각해보면 알게 될 거에요!]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양몽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주약란의 눈이 순간 빛을 발하며 점점 커졌다.
지금 천근이나 되는 듯 무겁게 걸음을 옮기며 나타난 사람은 틀림없는 양몽환이었다.
순간, 주약란은 달려가 부축해 주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차마 달려가 부축해 줄? 용기가, 아니
부끄러움이 앞서 마음을 억제하며 바위에 등을 기댄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양몽환을 바라보기만 했
다.
그간 더욱 초췌해진 듯 핼쑥한 얼굴은 햇빛을 쬐지 못해 창백했고 기운도 없는? 휘청휘청한 걸음이었다. 이
러한 양몽환을 지켜보고 있는 주약란의 마음은 아팠다. 그리고 눈꺼풀이 따가워지며 절로 눈물이 나오는 것
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동안 주약란 앞까지 다가온 양몽환은 두 주먹을 마주쥐고 허리를 굽혔다.
[주소저! 다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수고를 끼쳐 죄송합니다.]
일읍하며 하는 말에 주약란은 무슨 말을 헤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히려 당황했다.
그러나 곧 침착해지며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고통이 많으셨죠?]
겨우 이 한마디의 말로 자신의 연민의 정을 대신하는 주약란이었다.
[주소저도 저 때문에 고통이 많으셨죠?]
[별로.]
고개까지 흔들어 보인 주약란은 곧이어 도옥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옥이 저기 있어요. 가서 복수하세요.]
하는 말에 양몽환은 홱 고개를 돌리다 말고 그에게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때, 도옥은 바위에 기대고 앉은채 눈을 지그시 감고 조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에 눈을 뜨다 양몽환을 발견하고는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양몽환은 이를 악물었다.
[도형! 오늘이 있을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겠지!]
그러자 도옥은 눈도 뜨지 않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흥! 마음대로 해보시오. 지금 이 도옥은 혈도까지 짚혀 꼼짝도 못하는 처지요.? 두려워 말고 화풀이나 해보
시지!]
그 순간, 오른 손을 높이 들어 도옥을 후려갈기려던 양몽환은 힘없이 손을 내리고 말았다.
[그만 두겠소. 지금 도형에게 손을 댄다면 이 양모인도 도형과 같은 자가 될 것이오.]
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하림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쏜살같이 달려오던 하림이 예전같으면 양몽환의 품에 그대로 안길 법도 했지만 지금은 상태
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양몽환 앞에서 걸음을 멈춘 하림은 어깨를 흔들며 그만 울기
부터 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안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하림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던 양몽환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하림
의 손을 잡아주었다.
[울음을 그치시오. 그간의 사정을 짐작하고 있소. 울지 말아요.]
다정한 목소리로 하림을 위로했다. 그리고 둘이는 잠시 서로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러자 주약란이 양몽환을 부르는 것이었다.
[양상공! 도옥의 혈도를 풀어주세요.]
양몽환은 곧 주약란의 말대로 도옥의 짚힌 혈도를 모두 풀어 주었다.
그제야 팔과 다리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도옥은 천천히 일어나 주약란과 양몽환 그리고 하림을 싸늘하
게 노려보고는 휘청휘청 걸음을 옮겨 게곡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도옥의 행동에서 주약란은 다른 내상(內傷)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도옥이 바위 뒤로 자
취를 감춘 얼마 후 이번에는 역시 초췌해진 조소접이 자태를 나타내며 천천히 걸어나와 주약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언니, 고마워요.]
[조소저! 고생이 많았지.]
역시 더 말하지 못한 주약란은 고개를 숙여 괴로운 심정을? 달래고는 천천히 양몽환과 하림에게 고개를 돌
렸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그만두고 조소접의? 초췌해진 얼굴에서 시선을 멈췄다. 감개가 무량
한 모양이었다.
도옥의 목숨과 교환한 양몽환과 조소접을? 바라보는 주약란의 가슴속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괴롭고
악몽같은 며칠이었다.
주약란의 놀라운 계략으로 도옥의 손에서 구원을 받은? 양몽환과 조소접은 주약란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하
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다음 기뻐해야할 주약란은 쓸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럼, 물러들 가요. 혼자 조금 생각할 것이 있어요.]
하고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한 모습은 무슨 일엔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침통하고 음성마저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주약란을 바라보던 양몽환은 그녀의 얼굴에서 괴로움을 보고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또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그리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주약
란의 얼굴을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가에 괴로워 하고 있는 주약란에게서 잠시? 떠나있는 것이 그
녀를 위해 자신이 표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한 양몽환은 조용히 돌아서고 말았다.
그때, 천홍대사와 이창란이 허겁지겁 달려오다 역시 주약란에게서 헤어져 오던 양몽환 일행을 만났다.
먼저 양몽환을 알아본 천홍대사는 두 손을 합장하며 염불을 외웠다.
[...... 아미타불...... 양대협,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하고 인사하는 천홍대사를 향해 양몽환도 두 주먹을 마주 쥐었다.
[이 양모인 한 몸 때문에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고는 이창란에게로 돌아서며 큰 절을 했다.
[장인어른께 인사드립니다.]
공손히 허리를 굽히자 이창란은 수염을 내려쓸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생이 많았겠네...... 자, 어서 가서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고맙습니다.]
하자 천홍대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지금 여러 고수들이 양대협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우리들은 주소저 때문에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럼, 제가 가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천홍대사는 조소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저께서도 고생을 많이 하였겠소.]
[염려 덕분에......고맙습니다.]
조소접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앞서 가는 이창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과연, 천홍대사의 말대로 많은 고수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양몽환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에 양몽환은
급히 걸음을 멈추고 두 주먹을 마주 쥐었다.
[여러 고수들께 이 양모인은 진실로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처럼 수고를 해주신데 대한 은혜는
꼭 명심해서 보답하겠습니다.]
하는 정중한 인사에 문공태는 허......허......크게 웃었다.
[과분한 말씀이오. 그동안 고생이 많았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양대협께서는 우리를 이끌고 도옥
일당을 쳐부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고마운 말씀이오. 그러나 주소저가 이곳에 계신 만큼 주소저와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정현도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양대협님의 말씀이 옳소. 주소저의 지혜야말로 우리들이 흠모하는 바요. 그런 만큼 주소저께서는 어떤 대책
이 있으리라 믿소이다.]
하는 말에 문공태가 받았다.
[지금 이 백장봉에 모인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근 백을 헤아립니다.? 그러니만큼 그분들을 이끌고 때를 기다
리지 말고 즉각 행동해서 도옥을 섬멸하는 것이 옳을 것같소이다.]
하는 문공태의 말을 정현도장은 천홍대사에게 의논하듯 말했다.
[대사! 지금 문형의 탁월한 의견에 빈도 역시 찬성하는 바입니다만 주소저와 의논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이까?]
[그렇지요. 의논해서 대책을 강구하도록 합시다.]
했다. 그러자 이창란은 양몽환에게 주소저를 만나보라고 일렀다.
[그럼, 자네가 가서 주소저와 의논을 해보게.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겠네.]
[예, 곧 다녀 오겠습니다.]
쾌히 대답한 양몽환은 곧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주약란을 만나러 간 양몽환을 근심이 가득 찬 옥소선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다가왔다.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과 슬픔에 잠긴 듯한 옥소선자의 표정에서 양몽환은 순간 불안을 느꼈다.
[가보면 알아요. 어서 가요.]
하고 서두르며 앞장을 서서 총총히 걸음을 옮겨 놓는 것이었다.
창졸간에 무슨 일인지를 알길이 없는 양몽환은 불안한 마음을 억제하며 황망히 옥소선자의 뒤를 따라 어느
초가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양상공! 안으로 들어가세요. 주소저는 방안에 있어요.]
하는 옥소선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써 방안으로 들어서는 양몽환이었다.
마음이 불안하긴 했으나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성큼 방안으로 들어서던? 양몽환은 주춤 그 자리에 서고 말
았다.
그것은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 있는 주약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고 숨도 가쁜 듯이 보여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소저! 웬일입니까?]
그러자 주약란은 감았던 눈을 힘없이 뜨며 모기소리만큼 가늘게 말하는 것이었다.
[예, 조금...... 그러나 곧 나을 거에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던 주약란은 잠시 후 양몽환을 불렀다.
[양상공! 저는 곧 천기석부로 돌아가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마음이 어두워졌다.
<......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그러나 무슨 일로 주약란이 앓아 눕게 되고 또 천기석부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인지는 알길이 없었다.
[아니 왜 갑자기 가시겠다는 말입니까?]
[예 그저, 볼 일이 좀 있어서...... 그럼, 양상공께 한가지 부탁드리겠어요.]
[?............]
[심소저도 그렇지만 조소저를 잘 좀 돌봐주세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언뜻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주약란이 천기석부로 돌아간? 다음 심소저와 조소저
를 그냥 돌봐주라는 말인줄만 알고 곧 대답할 수밖에 없는 양몽환이었다.
[무엇 때문에 천기석부로 돌아가시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소저의 부탁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마주 주약란을 바라보았을 때는 숨도 제대로 못쉬는 반혼수상태에서 헤매고 있었다.
순간, 깜짝 놀란 양몽환은 급히 주약란의? 가슴에 귀를 댔다. 그리고 극히?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조소접과 하림이 달려오고 잠시 분위기는 침울 속에 빠져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래도 당황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던 양몽환은 하림과 조소접이 달려와서 마음이 놓였다. 더우기 내공이 심
후한 조소접이 매우 반가웠다. 그녀같으면 주약란의 위급한 내상을 치료할 수 있을 뿐만 같았다.
[조소저, 웬일일까요? 혹시 내상이라도 입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묻자 조소접도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주약란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댔다. 그리고는 흩어
진 주약란의 머리칼을 쓸어올려 주며 고개를 들었다.
[아주 심한 내상을 입은 것같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글쎄요. 별로...... 도옥이와 싸운 일 외에는 없는 것같습니다.]
하던 양몽환은 조소접을 주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조소저께서도 어떻게 내상을 입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단련하던 내공을 갑자기 중지했기 때문에 오는 내상이 아닌가 해요.]
하고 주약란의 내상을 미루어 말하는 것에 양몽환은 앞이 암담해지는 것같았다.
[그러면 이 백장봉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지 않았습니까?]
[저의 추측이 옳다면 지금의 상태는 이 백장봉에 오지 않은 것만 못해요.]
양몽환은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양몽환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에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혹시 귀원비급의 요상편(療傷篇)에 치료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지 조소접은 조용히 눈을 감을 뿐 꼭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불안과
초조와 그리고 고즈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조소접의 심후한 무공을 알고있는 양몽환은 조소접의 감긴 눈이? 뜨일 때까지 아니 눈을 떠 무
슨 말인가를 할 때까지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눈을 뜬 조소접의 입에서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없군요.]
그 소리에 양몽환과 하림은 서로 마주보다 근심에 싸인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숨도 못쉬고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주약란이 길게 숨을? 쉬며 조용히 일어나 앉는 것이 아
닌가? 그리고는 근심에 싸인 세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돌아본 주약란은 쓸쓸히 웃었다.
[너무 염려말아요. 지금 나는 단련하던 내공을 중단해서 잠시 진기가 유통되지 않을 따름이에요. 며칠 조식
하면 나아요.]
그리고 다시 쓸쓸히 웃는 주약란을 바라보고 있던 조소접은 머리를 숙이며 음성을 낯추었다.
[언니 제가 치료해드리면 안 될까요?]
[아니, 염려말아요. 접매(蝶妹)가 치료할 내상도 아닌 걸......]
[그래도 치료할 수 있을 것같아요.]
[접매의 무공을 모르는 내가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야.]
[아니에요. 언니, 치료할 수 있을 것같아요.]
그러나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돌아눕고 마는 주약란이었다.
아무래도 자기의 내상을 조소접에게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은 것같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치를 알아챈 양몽환은 조용히 조소접에게 말했다.
[조소저, 잠깐 기다려봅시다. 피곤한 모양입니다.]
하는 말에 조소접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하여 일단 주약란에게서 물러나온 양몽환과 하림 그리고 조소접은 문밖에 서 있는
옥소선자를 만났다.
그러나 그녀는 근심이 가득 찬 얼굴로 허공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울었는지 아름다운 얼굴은 눈물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러자 조소접을 발견한 옥소선자는 그녀에게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듯 다급하게 물었다.
[조소저! 주소저의 내상이 어떻죠? 치료하지 못할 만큼 위독해요?]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조소접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어떠한 내상인지도 모르겠고 치료법도 생각이 안나요.]
[그렇다면 천기석부로 속히 모시고 가야겠어요.]
[천기석부? 그곳에 가면 치료할 수 있어요?]
[치료보다 조용히 조식이라도 한다면 낫지 않을까요?
이 며칠 동안 너무 피곤해서 그럴 거에요.]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천기석부에 치료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이곳에서? 치료할 수밖에 없겠어요.]
하며 결심을 굳히는 조소접의 말에 양몽환은 눈을 크게 떴다.
[조소저! 무슨 치료법이라도 있습니까?]
[글쎄 몇가지 치료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게 돼요.]
[자신이 없다면 무리하게 모험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생각해 봤어요. 그러나 이렇게 걱정만 하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만일 치료가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 반대로 주소저에게 불행이 온다면 제가 죽는 것으로
사죄를 하겠어요.]
[......음......]
앞이 암담하기만 한 양몽환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놔둘 수도 없고 조소접에게 맡길 수도 없는 심히 난처하고 괴로운 심정이었다.
그러나 조소접은 양몽환보다 더 조급했다.
[지금과 같은 급박한 사태에 언니를 그대로 둘 수는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도옥이 언제 또 악랄하게 달려들지 모르는 이때에 시간만 보낼 수는 없지 않아요?]
옳은 말이었다. 지금 구대문파의 무술인들이 모두 주약란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는 양몽환은 과연 조소접이 주약란의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지 어떤지가 심히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그렇소만......]
[사실이 그렇지 않아요? 제가 비록 자신은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어요.]
하는 조소접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옥소선자가 맞받았다.
그녀 역시 불안하고 초조하기는 양몽환 이상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우선 위기를 면하기 위해서는 조소접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최선을 다해서 손을 써 보는 수밖에!]
하는 말에 자신을 얻은 조소접은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하여튼 제가 해보겠어요. 그럼, 양상공은 여기 계시고 두 분만 방으로 들어가요.]
그리고는 몇 걸음 앞장을 섰던 조소접은 걸음을 멈추며 양몽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수고스럽지만 양상공께서는 여기서 좀 지켜주세요.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이에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염려마시고 꼭 치료해 주시오.]
하는 말을 들으며 조소접은 옥소선자와 하림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방을 날카롭게 경계하며 주약란의 방에서 소식이 있기를 기다린지도 어언 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한 번 문을 닫고 들어간 사람들은 좀처럼 다시 나올 줄을 몰랐다.
또 다시 이렇게 기다리길 한 시간,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조바심이 나고 주약란의 안위가
걱정되는 양몽환이었다.
혹시 방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하고 뒷편으로 돌아가 보았으나 휘장까지 내려뜨린 방안은
들여다 볼 수도 없고 인기척도 없었다.
그러자 마음의 불안은 점점 더 도를 더해갔다.
그러는 양몽환의 머리 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실수를 해서 주약란이 죽지는 않았을까,
아니 엉뚱한 생각에 조소접이 주약란을 일부러 죽인 것은 아닐까,
양몽환은 자꾸 불안한 생각이 떠오르자 불안과 초조를 없애려고 부지런히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는 바로 그때였다.
홀연,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양몽환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
<...... 교활한 도옥이 주약란의 위기를 탐지하고 습격해 오는 것이 아닐까? ......>
하는 생각에 장검을 뽑아들고 긴장한 양몽환의 시야 속으로 이윽고 나타나는 사람은
남의(藍衣)를? 걸친 부인이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얼마나 얼굴이 추악한지 절로 악! 소리가 나올 것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금 나타난 추악한 얼굴의 주인공이 바로 삼수나찰 팽수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팽소저! 오래간만입니다.]
주먹을 쥐고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러자 팽수위도 양몽환을 알아보았는지 고개를 숙이며 반례했다.
[양상공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예, 덕분에]
[그런데 주소저의 상처는 어떤가요?]
하고 묻는 팽수위의 음성은 상당한 충격을 억제하는 듯 떨리고 있었다.
[예, 지금 조소저와 옥소선자가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하는 말에 마악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팽수위는 들어가기를 단념하고 돌아섰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조소접이 먼저 나오는 것이었다.
순간, 달려가 안위를 물으려던 양몽환은 흥건히 눈물에 젖은 조소접의 얼굴을 보고
그만 철렁 가슴이 내려 앉고 말았다.
<그럼? 죽었단 말인가?>
번개같이 스쳐가는 불안을 떨쳐버리려고 눈을 감았다.
그때, 조용히 입을 여는 조소접이었다.
[언니의 말씀이 옳아요. 저는......저는 조금도 도와줄 힘이 없어요......]
하고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
양몽환은 천만가지의 불행한 생각에 일시 정신이 아찔했다.
그리고 얼마만에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양몽환은 울고 있는 조소접을 위로할 수 있었다.
[조소저! 울지 마시오.
최선을 다해서도 치료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천명(天命)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옆에 섰던 팽수위가 뒤따라 나오는 옥소선자에게 주약란의 안부를 소리쳐 물었다.
[옥소언니! 어떻게 되었어요. 주소저는?]
[약간의 숨은 남아있어요.]
[그럼, 조소저에게 울지 말라고 해주세요.]
아주 싸늘한 음성으로 쏘아붙이듯 하는 팽수위의 말에 조소접은 얼굴에서 손을 떼며 울음을 그쳤다.
그러자 팽수위는 노여움이 가득 찬 눈초리로 조소접을 흘겨보고는 홱!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바람에 분위기가 일변해지고 말았다.
양몽환은 양몽환대로 어이없어 했고 조소접은 무안해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너무 근심하고 초조한 끝에 그리고 자기 손으로 치료하지 못한 죄책감에 터뜨린 울음이지만
팽수위는 팽수위대로 조소접이 울음을 터뜨리자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팽수위가 너무나 날카롭게 소리치고 간 직후라
왜 그런지 옥소선자는 양몽환과 조소접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변명아닌 변명을 했다.
[팽소저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럴 거에요. 상심하지 마세요.]
말은 조소접에게 하면서 고개는 양몽환에게로 돌렸다.
[괜찮습니다. 염려하지 마시오.]
옥소선자에게 안심시킨 양몽환은 곧 조소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조소저,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귀원비급 요상편을 좀 더 잘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좋은 치료법이라도 떠올를지 모르잖습니까...]
[알겠어요. 그러나 별로 좋은 치료법이 없는 것같아요.
지금 언니의 진기가 거꾸로 흐르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에요.]
[......음......거꾸로 흐른다?......]
[예, 그래서 손을 써 볼 수가 없어요.]
하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양몽환은 두 손바닥을 땅에 대고 거꾸로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조소접을 불렀다.
[조소저! 내 다리의 양관(陽關)과 곡천(曲泉) 두 혈도를 짚어 보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잠시 어리둥절했던 조소접은 곧 시키는대로 두 곳의 혈도를 짚었다.
거꾸로 선 양몽환은 두 곳의 혈도를 짚혔어도?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조소접에게 말했다.
[이번엔 오른쪽 옆구리의 천계(天鷄)와 천지(天地) 두 혈도를 짚어보시오.]
이번에도 조소접은 양몽환의 말대로 두 곳의 혈도를 짚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힘이 드는 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다시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는 나의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을 조사해서 진기가 거꾸로 도는가 살펴보시오.]
그제야 조소접은 지금 양몽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거꾸로 서서 혈도를 짚게 하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양몽환이 이와같이 실험해서 진기가 거꾸로 돌고 있는 주약란의 내상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즉각 양몽환의 옆구리에 손을 대고 진기가 거꾸로 흐르는가를 진맥했다.
그러는 동안 주위는 조용해지고 조소접은 귀까지 기울이며 어떤 사태가 일어나는가
세밀히 조사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하림과 옥소선자도 숨을 죽이고 조소접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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