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막다른 협곡에서
널판지 위에 앉아 있는 양몽환이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지 아니면 눈을 감고 있는지
그의 표정은 태연했다.
이때, 단전에 진기를 집중한 천홍대사는 큰 소리로 양몽환을 불렀다.
[양대협! 천하 영웅 고수들이 이곳에 모여 양대협을 구하려고 하는 중이오.
도옥이 아무리 교활하고 무공이
강하다 해도 천하영웅 전부와는 맞서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아무쪼록 조심하고 이틀만 참아주시오.
그러면 를림없이 구해드리겠소!]
그러나 양몽환은 천홍대사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그대로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한 양몽환을 산 밑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더 애가 탔다.
그때 다시 산 위에서 좀전에 외치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무슨 말이든 빨리 하도록 하시오. 오랫동안 놔둘 수는 없소!]
하는 한편에서 문공태는 자기의 위치와 양몽환의 위치를 눈으로 재어보고 둘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양몽환이 앉아 있는 널판지로부터 문공태가 서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허공으로서
거의 이십장(二十丈)! 아차 실수라도 하여 떨어지는 날이면 아무리 무공이 강한 양몽환이라도
뼈도 추릴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 동안 거리를 재어보던 문공태는 서쪽 산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시오! 우리들은 양대협에게 긴히 전할 말이 있는데 밧줄을 좀 더 내려줄 수는 없소?]
그러자 산 위에서는 큰 소리로 웃기부터 하고는 소리치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장난은 하지 마시오.
양몽환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준것도 여러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이오!]
한마디로 거절한 직후, 쇠막대기에 밧줄이? 천천히 감겨 올라가며 순식간에 쇠막대기도?
양몽환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순간, 천하영웅의 고수들이었지만 산봉우리만 바라볼 뿐 별도리가 없었다.
절로 탄식이 터져나오는 문공태는 청죽장을 꼬나쥐며 땅을 팡팡 내려쳤다.
[음! 십 장 정도만 더 내려왔었어도 구할 수 있었는데 ......]
하는 말에 정현도장도 발을 굴렀다.
[그렇습니다. 먼저 단검으로 밧줄을 끊은 뒤 우리들이 함께 양대협을 받아 안으면
틀림없이 구할 수 있었을 거요.]
그러자 천홍대사는 목청을 뽑으며 산 위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비겁한 놈들아! 양대협을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이 빈도가 올라가겠다!]
버럭 소리를 지른 천홍대사는 뒤를 돌아보며 굳은 결심을 나타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양대협을 구할 결심이 있다면 나를 따르시오.
이 빈도가 먼저 앞장을 서서 절벽을 올라가겠소!]
하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절벽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순간, 여러 사람들도 일제히 천홍대사의 뒤를 따라 절벽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다가갔다.
이때, 앞장서서 먼저 절벽에 다가선 천홍대사는 갑자기 땅을 박차며 거의 이장(二丈)이나 뛰어
절벽에 등을 착 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벽호공(壁虎功)의 무공을 이용하여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홀연 산 위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지며 곧이어 무수한 바위? 덩어리가 질벽을 타고
그대로 굴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거의 천근이나 될 듯한 바위들은 절벽에 부딪쳐 우르르 광광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맹렬한 속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절벽에 등을 착 붙이고 꼼짝하지 않는 천홍대사를 급히 불렀다.
[대사님! 속히 내려오세요! 위험해요!]
떨어지는 돌을 피하며 날카롭게 부르짖는 옥소선자에 비해? 천홍대사는 꼼짝하지 않고
위를 올려보는 것이었다.
사실 워낙 가파르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벽호공의? 재간이 아니고는
다른 어떠한 경신법의 재간으로서도 오를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러한 절벽을 기어오르다 바위 덩어리의 세례를 받게 된 천홍대사는?
절벽에 봄을 바싹 붙이고 바로 자기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큰 바위 덩어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거의 머리에 부딪칠 찰나, 급히 옆으로 해엄치듯 다섯자나 몸을 옮겨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피하는 것이었다.
천홍대사의 머리를 명중시키지 못한 육중한 바위는 그대로? 절벽을 미끄러지듯 굴러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소림사의 승려들은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는 곧장? 절벽 밑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한편,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옥소선자가 음성을 낮추어 이창란을 불렀다.
[노선배님! 천홍대사의 위험한 행동을 좀 말려주세요.]
하고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그러자 이창란도 깊이 탄식했다.
[저 벽호공의 재간을 쓸 때에는 다른 무공은 발휘할 수가 없는데......]
그러면서도 소리쳐 천홍대사를 부르지는 않는 것이었다.
이에 옥소선자는 더욱 조바심이 났다.
[노선배님께서는 잘 아시면서 왜 말리지? 않습니까?
절벽 위에는 이미? 도옥에 의하여 바위와 나무 토막이 준비되어 있을 거에요.
더구나 대사님의 몸이? 쇳덩어리가 아닌 이상 위험을 자초하는 결과밖에 더 되겠어요?
속히 말려주세요.]
그제서야 이창란은 단전에 힘을 돋우는 것이었다.
[대사! 속히 내려오시오!]
하는 소리에 정현도장도 큰 소리로 천홍대사를 불렀다.
[대사! 어서 내려오시오.
우리들이 의논해서 좋은 계획을 세우면 될텐데 왜 위험한 길을 택하시오
어서 내려오시오!]
그러자 문공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려오시오! 좀 더 좋은 계획을 세웁시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내려오기를 권하자 천홍대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날려
가볍게 절벽에서부터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 찼다.
[우리들은 반드시 양대협을 구해야 하오.
위험이 있다고 해서 몸을 사린다면 무슨 수로 구한단 말이오?
어떻게 해서라도 양대협만 구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오.]
하며 길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천홍대사는 소림사의 장문인으로서 그의 성격은 워낙 매사에 침착한 편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양몽환을 구하는 데는 침착성을 잃고 서두르는 것이 대사답지 못하고 이상스러웠다.
그러나 정현도장은 다른 말로 그를 위로했다.
[대사! 우리들이 이곳에 온 이상 어떻게든 양몽환을 구하지 못하겠소?
너무 초조히 서두르지? 말고 이 사태를 주시하고 대책을 강구합시다.]
하자 문공태도 허허 웃었다.
[사실 우리들이 양대협을 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도옥의 계략을 무찌르고
이곳을 빠져나가느냐 못나가느냐 하는 문제와 같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양대협을 구하고 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중대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양대협을 구하지 못한다면 이곳을 빠져나가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나 천홍대사는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여러분들은 아직 도옥의 위인됨을 모르고 하는 말씀이오.
만일? 우리들이 자기를 사로잡으려거나 해치려는
기미를 안다면 먼저 양대협을 죽일 것입니다.
그런즉 대세가 기울어지기 전에 먼저 손을? 써서 양대협을 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줄 아오.]
하고는 땅이 꺼질 만큼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이때, 이창란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하면서 천홍대사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렇습니다. 지금 천홍대사의 말처럼 정세가 도옥의 패배로 바뀌어진다면 그는 반드시
이 늙은이의 사위를 죽이고 그 다음에 우리들에게 반격할 것이오.]
하는데 그때까지 주위를 살피고 있던 옥소선자가 다급히 그러나 음성을 낮추어 소리쳤다.
[누가 내려와요.]
그러자 일제히 고개를 돌린 그들의 시선에는 절벽 위에서부터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도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를 내려오던 도옥은 땅에서부터 거의 이장(二丈)쯤 되는 곳에서 잡았던 밧줄을 놓으며
가볍게 땅으로 내려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이때, 차가운 시선으로 도옥을 노려보던 천홍대사가 먼저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대는 진짜 도옥인가, 아니면 가짠가?]
그러자 다가오던 도옥도 차가운 눈초리로 천홍대사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도옥이라는 사람은 이 도옥 하나 뿐이오! 무슨 진짜와 가짜가 있단 말이오!]
[흥, 웃기지 마. 똑같은 놈을 둘이나 봤는데 무슨 소린가?]
[그렇다면 이 도옥의 말을 믿지 못하겠단 말이오?]
하며 싸늘하게 웃음을 흘리자 문공태가 선뜻 한 걸음 나섰다.
[그렇지! 나도 믿지 못하지만 여기 계신 여러분도 믿지 못할 걸세.]
[흥! 믿지 못하겠다면 할 수 없지! 그러나 차차 알게 될 거요.]
[그대가 정말 도옥이라면 우리들의 요청을 들어야겠는데?]
[무슨 요청이오?]
[그것은 즉각 양대협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자네는 진짜 도옥이 아닐세!]
그러자 도옥은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는 것이었다.
[핫...... 하...... 여보 문공태 양반! 그따위 요청은 둘을 필요가 없소!
그나저나 당신네 화산파에서는 몇 명이나 왔소?]
[이 늙은이 한 사람뿐이오. 그런데 그건 왜 묻지?]
[하! 그거 매우 유감인데....... 화산파에서 한 명이라도 더 왔다면 이 도옥은
화산파의 고수들이 연합하여 싸우는 수법을 볼 수 있었을텐데 ......]
하며 싸늘한 웃음을 흘리자 문공태의 얼굴빛은 노기로 가득 차 파랗게 변했다.
그것도 그럴것이 화산파의 장문인인 문공태 하나쯤은 도옥의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모욕 중의 모욕적인 언사에 성미가 급한 문공태의 얼굴빛이 그대로 있을리는 만무였다.
그러나 고수답게 노기를 억제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때, 천홍대사가 소리높이 염불을 외우며 도옥을 불렀다.
[도시주! 이 빈도가 한가지 부탁을 드리겠소!]
그러나 도옥은 여전히 싸놀한 웃음을 흘리며 쳐다보는 것이었다.
[역시 양몽환을 놓아달라는 부탁이겠지?]
[바로 그렇소. 내놓으시오.]
[그건 어렵지 않소. 그러나 그렇게 당신들이 놔달란다고 해서 내줄 수는 없소.]
[그럼?]
[한가지 조건이 있소.]
[어떤 조건이오?]
[소림파에서 책임지고 구대문파를 통합하여 이 도옥을 천하 무술계의 맹주로 만들어 준다면
그래서 이 도옥이 맹주가 된다면 그즉시로 양몽환을 돌려주겠소.]
하고 도옥은 어떠냐는 듯이 턱을 쓰윽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천홍대사는 한번 더 염불을 외우고는 천천히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중대한 일은 반드시? 중의(衆意)가 따라야 하는 일이오.
누구? 한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오.
더구나 일시적으로 그들 중의를 속일 수도 없는 일이고 또 덕망도 있어야 하오.]
[이 도옥은 그따위 중의가 어떻고 덕망이? 어떻고 하는 것은 필요없소.
당신들이 이? 도옥을 천하 무술계의 맹주로 만들겠다고 맹세만 하면 되오.]
하며 오만하게 대답하는 도옥의 말에 문공태는 허허 기운없이 웃었다.
[도옥이! 그따위 말을 하는데도 혀가 잘 돌아가는가?]
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도옥은 문공태쯤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홍대사를 향해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만일 여러분들이 맹세하지 않는다면......좋소.
이 도옥은 여러분들이 맹세하게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러한 말에 천홍대사는 다시 염불을 외웠다.
[도시주는 지금 천하의 정세가 어떠한지 그것부터 한번 살펴보고 조건을 내세우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정세가 어떻다는 말이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도옥의 말에 이번에는 정현도장이 나섰다.
그러나 정현도장의 말은 도옥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했다.
[우리들이 힘을 합하여 그대를 공격하는 것은 도리상 안되었소만
양대협을 구하기 위해서는 별 수 없는 일이오.]
[흥! 얼마든지 공격해 보시오.
이 도옥이 그따위 공격을 무서워한다면 이곳까지 내려오지도 않았을 거요.]
방자하게 큰 소리를치는 도옥을 이창란은 눈꼴이 시어 보고 있을 수가 없는지 흥! 코웃음을 터뜨렸다.
[건방진 소리마라! 이 금수(禽獸)보다 못한 놈아!]
눈을 부라리며 호통치는 이창란에게 번쩍 고개를 든 도옥은 어금니를 깨물며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도옥은 이미 당신을 두 번이나 죽이지 않고 삼려두었소.
더구나 지나간 정의같은 것은 이제 냄새가 나오.
만일 다시 한번 더 겨루게 된다면 사지를 끊어버리겠소!]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창란은 또 한번 코웃음을 쳤다.
[그래 좋다. 이 늙은이도 네놈이 새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를 버린지 이미 오래다.]
그러자 도옥은 한번 더 날카롭게 이창란을 노려보고는 꾀로 여러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들은 그래도 명색이 일파의 장문인들이오.?
강호에서 명망을 떨치는 분들로서? 비겁하게 도망가지는 않으리라 믿소.
더구나 이 도옥도 마찬가지오.
그러나 한가지, 여러분들이 이 도옥을 감복하게 한다면 이 도옥도 응분의 사례는 잊지 않을 것이오.]
하고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여러분들도 잘 알겠지만 원래 강물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흐르는 법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인물이 나와 옛 인물들을 대신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고 상도(常道)요 .
이렇게 말하면 대강 짐작은 하겠지만 그래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 일러두는 말이오만
여러분들도 이미 강혹에 나온지 수 십년! 이제는 몸도 늙었소.
그리고 힘도 없고 무공도 별것 아니라는 것을 이 도옥은 잘 알고 있소.
그러니만큼 이재는 모두 물러가 조용히 사는 것이 어떤가 하는 말이오.]
말같지도 않은 말율 듣고 있는 것도 큰 고역이지만 그런말에 화를 벌컥 낼 천홍대사도 아니었다.
[그대의 말이 옮긴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대는 무예계의 맹주가 될 사람이 못되오.]
[뭣이? 그럼 이 도옥보다 나은 사람이 누구요?]
잔뜩 비위가 상한 도옥은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천홍대사는 태연히 대답했다.
[양몽환 대협이오.]
그러자 도옥은 고개를 젖히며 큰 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양몽환이라고? 핫......하......좋소. 그러나 여러분들의 의사가 그렇다면 이? 도옥은 양몽환을 먼저 죽여버리겠
소. 그러면 그를 맹주로 받든다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사라질 것이오.]
하는 말애 문공태는 아니꼽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장검 한 자루로 천하 무술계의 맹주 노릇을 하려고? 천만에 말이지!]
그러나 이번에도 도옥은 문공태의 말을 욱살하고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에 번번이? 무시당하기만 하
는 문공태는 슬그머니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도옥! 건방진 수작은 그만 두고 어서 이 늙은이와 한 수 겨루어 볼까?]
흥! 소리를 지른 문공태는 더 이산 참지 못하고 청죽장(靑竹杖)을 들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도옥에게 덤벼들었다.
그 순간! 내려치는 문공태의 청죽장을 왼 손으로? 맞받아내며 금환검을 뽑아든
도옥은 크게 냉소를? 터뜨렸다.
[잠깐! 이렇게 한 사람씩 상대한다는 것은 이 도옥이 귀찮소. 한꺼번에 모두 덤비시오]
하며 태세를 고치는 도옥의 태도는 거만하기 그지 없었다.
한편, 도옥의 금환검을 뽑는 수법과 왼 손으로 청죽장을 맞받아 내는 수법에 순간?
섬?한 문공태는 속으로 가슴을 내려쓸었다.
<이놈이 그동안 꽤 많이 달라졌군......>
하는 바로 그때, 도옥은 아예 문공태는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이 금환검을 휘둘러?
천홍대사에게 지쳐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보시오! 천홍대사! 여러분이 함께 달려드시오!]
조롱하듯 차갑게 외친 도옥은 내뻗었던? 금환검을 천홍대사에게 찌르고 돌아서면서?
왼 손으로 정현도장을 후려갈기고 재빨리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천홍대사와 정현도장까지 건드려 홧김에 달려들도록 만들자는 심산이었다.
그러자 분통이 터져 문공태는 무시만 당한 것도 서러운데 가만히 서 있는 사람까지 건드리는
도옥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건방진 놈! 어디 맛좀 봐라!]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청죽장을 휘둘러 지쳐 들어갔다.
한편, 천홍대사와 정현도장도 I+신들의 지위를 생각했음인지 성급히 합세하여 달려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천홍대사를 건드리고 돌아서면서 정현도장을 후려갈기고 피해 나오다가 이창란에게 발길질을 하는 도옥을 아무리 군자라도 가만 놔둘 수는 없었다.
드디어 도옥의 뜻대로 문공태, 천홍대사, 정현도장 그리고 이창란이 도옥을 가운데로 몰아놓고
빙빙 돌기 시작하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제일 먼저 금환검의 공격을 막아내고 장검을 휘두른 천홍대사는 급히 주위를 경계하고 사태를 살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싸움이 극도로 불리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세(地勢)도 그러했지만
도옥의 무공을 볼 때 아무래도 승산이 없는 것같았다.
그러나 도옥의 성난 호랑이처럼 이리저리 날뛰는 수법은?
점점 악랄해지고 얼굴에는 살기마저 등등한 것이 그대로 있으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홍대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달려드는 도옥을 간신히 막아내고 숨을 돌렸다.
그때, 이창란은 길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귀원비급에 기록된 무공은 모두 절기만으로 엮어진 것인데 우리가 이렇게 무작정 덤비다가는
큰 불행을 가져오겠군......]
하는데 청죽장을 휘돌려 강한 장충을 도옥에게 몰아붙인 문공태는
이창란의 탄식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지금 보기에는 우리가 연합해서 도옥을 공격하니 유리한 태세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우리가 크게 불리하단 말이오.]
그 동안에도 천홍대사와 정현도장은 서로 필살의 한 수를 겨누고
도옥과 대치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지금 문공태는 이창란과 의논 아닌 의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가 연합해서 기세를 잡으면 되는거 아니오?]
이창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문공태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러자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를 휘둘러 허공에 장막을 치며 말했다.
[도옥은 보통의 무공인이 아니오. 그가 쓰고 있는 재간은 실로 악랄하고 날렵한 검법이고
장법이란 말이오.
그러니 우리들이 힘을 합쳐 그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그 반대로?
우리가 헌꺼번에 쓰러질 위험이 있단 말이오.]
그러자 문공태는 홀깃 도옥을 바라보고는 청죽장을 휘둘러 역시 장막을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선배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소.]
하고는 도옥에게로 달려나가며 강한 장풍을 몰아불이는 문공태에게 도옥을 일시 넘겨준
정현도장은 이창란에개 달려오며 엄숙히 말했다.
[이 빈도에게 제일진(第一陣)을 맡게 해주신다면 본 파의 오행검진(五行劍陣)으로 도옥을 상대하겠소.]
그 순간, 문공태와 천홍대사를 겨누고 공격하던 도옥은 수법을 돌변시키며 검과 몸이 혼연일체가
되어 정현도장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번쩍 정신이 든 정현도장은 급히 자세를 낮추어 도옥의 공격을 피하고는 역공해 들어갔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지쳐오던 문공태의 청죽장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검법을 무궁무진하게 변화시켜 공격하고 피하는 도옥의 재간에 문공태와 정현도장은
어쩔 수 없이 한 쪽으로 피하고 말았다.
그때, 수염을 곤두세운 이창란의 용두지팡이가 허공을 가르며 흙을 날렸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이렇게 싸우다간 안되겠소. 여러 도형들은 잠시? 물러 나시오.
이 늙은이가 상대하겠소. 만일 싸우다가 이 늙은이가 쓰러진다 해도 염려마시고
내가 쓰러진 다음 노형들이 전력으로 싸워주시기 바라오!]
하는 바로 그때, 일성대갈하는 도옥의 외침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른 옥소선자가
맥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옆에서 사태를 주시하고 진기를 돋우고 있는 옥소선자를 먼저 발견한 도옥이
암암리에 천강지의 지풍을 날려 옥소선자의 혈도를 짚어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곧이어 선장을 든 소림사의 승려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또 쓰러지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두 명을 쓰러뜨린 도옥이 의기가 양양해서 비호처럼 이리? 날고 저리 뛰며
정신까지 혼란하게 하는데는 절로 마음이 초조해지는 이창란이었다.
<음...... 이와같은 때 싸움으로는 우리? 동료만 잃고 말겠군!
더구나? 묘수도 강구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동안에 도옥에게 기회만 준 셈이군 ......>
그러나 도옥은 여전히 비호처럼 날뛰며? 금환검을 휘두르고 그때마다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이듯 매서웁고 날카로운 섬광이 비오듯 했다.
그리고 이리저리 피하는 여러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기세있게? 몰아붙이던
도옥은 두 명을 쓰러뜨리고 획! 몸을 날려 일장밖에 있는 바위? 위로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이만하면 이 도옥의 실력이 어느 정도라는 것쯤은 알았을거요.
만일 더 사우겠다면 이 도옥은 더욱 악랄한 수법으로 대할 것이오.
그런 것쯤은 미리 알아두시고 항복을 하든지 싸워? 목숨을 버리든지 양자택일(兩者擇一)하시오.
이것이 마지막 기회요. 한 마디로 분명히 태도를 밝히시오.]
긴 이야기를 도도하게 엮어내린 도옥은 자아! 대답해라! 하는 듯이 어깨를 펴고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는 한면, 이창란을 위시한 여러 사람들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옥과 일대 일로 싸운다 해도 이길 승산이 없고? 그렇다고 그를 에워싸고 연합하여
공격한다 해도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에 거의 일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면, 한 사람씩 대항하여 도옥이 정신없이 공격하는 그틈을 타서 다른 사람이?
역공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아울러 생각해 본 천흥대사는 상처를 입지 않은 제자들을
돌아보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나의 몸에 어떤 변이 일어나 숨이 끓어지면 너희들은 나의 유언(遺言)을 대사들에게 전하라.
즉 소림파의 문규(門規)에 의해 회의를 열고 다음 장문인을 선출하도록!]
하고 비장한 각오로 유언까지 하는 천홍대사였다.
그러자 주위의 여러 사람은 물른? 도옥까지도 천흥대사의 말속에 사생을 결하고 격전을 벌리겠다는
굳은 결심이 은연중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정현도장도 자기의 부하 네 명을 돌아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양대협이 우리 무당파에 끼친 은덕이 적지 않다. 너희들도 명심하고 양대협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하라!]
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표명하자 네 명의 부하는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미 싸워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됐다. 그럼, 우리의 오행검진으로 귀원비급의 절기를 시험해 보자!]
하고 즉시 나서려는 정현도장을 허......허......웃으며 문공태가 막아섰다.
[잠깐, 두 분 도형께서는 잠깐 기다리시오. 우선 이 문모에게 양보하시면 단단히 맛을 보이겠소이다.]
하고 청죽장을 꼬나쥐는 문공태 앞에 이번에는 천홍대사가 막아서는 것이었다.
[아니오. 이 빈도에게 맡겨두시오.]
그러자 다시 정현도장이 나섰다.
[안될 말이오. 이 빈도도 다섯 사람의 오행검진으로 싸우겠소이다.]
하며 저마다 도옥과 상대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든지? 두 사람은 양보해야 한다.
그러나 고개를 흔든 문공태는 또 한번 청죽장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본인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두 분 도헝도 아시다시피 과거에 이 문모와 양대협과는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 오해를 이번 도옥과의 싸움에서 풀어야 하겠습니다.]
하며 도옥을 쓰러뜨혀 양대협을 구하는 것만이 서로 오해를 풀 수 있다고 버티는
문공태의 말을 듣고 있던 이창란이 앞으로 나서는 것이었다.
[문형! 그것은 이 늙은이도 마찬가지오. 그러나 지나간 과거도 과거지만 우선 이 늙은이는
사위를 구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오.
그러니 이 늙은이가 먼저 싸워야 하겠소.?
그래서 만일 이 늙은이가 죽으면 그 다음에 싸워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문공태는 이렇게 서로 아옹다옹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듯이 도옥에게로 뛰어나가며
옆구리애 차고 있던 두 개의 금환(金丸)을 뽑아 힘껏 던지고는 눈썹을 곤두세우는 것이었다.
[도옥아! 이 늙은이가 화산파의 팔십일수(八十一手) 복마장법(伏魔杖法)으로 너의 귀원비급을
상대해 주마!]
하면서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바위? 위에 섰던 도옥은 금환검을 휘둘러?
문공태가 던진 금환을 딱! 딱! 후려갈기고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죽고 싶어 환장했으면 얼마든지 오시오!]
하며 금환검을 휘둘러 검막을 뿌려 도옥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 휘파람을 불며 질풍같이
도옥에게로 달려가는 문공태의 동작은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일단 몸을 날린 문공태는 청죽장을 꼬나들고 그대로 도옥의 머리 위로 날았다.
순간! 탁! 탁! 청죽장과 금환검이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그 다음 날렸던 몸을 돌려
바위 밑으로 내려서는 문공태에 비해 도옥은 자리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질풍같이 달려가 휘두른 청죽장이지만 별무신통이었다.
은근히 울화통이 터진 문공태는 손바닥에 침을 탁! 뱉아 청죽장을 고쳐 쥐고는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내려와라! 이놈! 썩 내려오지 못해?]
발을 구르며 호통을 치자 도옥은 싸늘하게 웃음을 흘리고는 가볍게 바위를 차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금환검과 일체가 되어 문공태를 덮치는테 그야말로 날카롭고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금환검이 풍차처럼 돌아갔다.
주호의 여유도 주지 않고 휘두르는? 금환검에 일시에 당황해진 문공태는 머리 위로
청죽장을 올리고 그냥 이리저리 휘둘러 바람을 일으키며 이를 약물고 다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도저히 적수가 안되는 상대였다.
이리치고 저리 막아 소나기같이 퍼붓는 도옥의 공격에서 겨우 빠져나온 문공태는
넋이 뼈질 지경이었다.
그러한 문공태를 보고 있던 정현도장은 장검을 번쩍 들어올리며 문공태를 불러들였다.
[문형! 이리 나오시오. 빈도가 대신 싸우겠소!]
소리높이 외친 정현도장은 벼락같이 들었던 장검을 휘둘러 무수한 꽃망울을 그리면서
도옥의 가슴을 겨누고 몸을 날렸다.
그러자 도옥은 여유있게 한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눕히면서 금환검을 내뻗어 정현도장의
장검을 밀어불이고 허리를 굽히며 바싹
정현도장에게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이 홱! 돌아가도록 금환검을 변화시켜
역습하는 데는 근 소리치고 달려든 정현도장도 뒤로 물러서기에 진땀이 났다.
이렇듯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정현도장을 보고 있던
천홍대사는 한숨을 쉬듯 염불을 외우고는 선장을 거꾸로 쥐었다.
[아미타불! 이번에는 이 빈도가 상대해 드리겠소!]
한번 선장을 거꾸로 거머쥔 천홍대사는 수염을 꿋끗이 일으켜 세우며 정현도장을 앞서 달혀들었다.
그 바람에 정현도장은 비실비실 물러나 천홍대사에게 도옥을 맡겨버렸다.
내공력이 웅후하고 더구나 무게가 거의 삼백근이나 되는? 선장을 거머쥔 천홍대사는
기세있게 달려나가 쇳소리를 내며 선장을 휘둘렀다.
그러자 도옥은 자기의 금환검으로 천홍대사의 선장을 맞받아? 낼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순간 어쩔줄을 몰라
뒤로 몇결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 틈을 노려 단숨에 열두 번이나 선장을 휘두른 천홍대사는 그때마다 도옥이 교묘히 요리조리 피하는 바람에 허탕만 치고 제풀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도옥은 피하기만 할 뿐 선뜻 달려 들지 못하는 것이 아무래도 선장의 위력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던 얼마 후 교활한 도옥의 눈이 힘이 빠진 천홍대사를 놓칠리 없다.
즉각 차가운 웃음을 날리며 반격하기 시작하는 도옥의 금환검에 천홍대사도 할 수 없이
다섯 걸음을 물러서고 말았다.
사실 지금 도옥의 검법은 너무나 기묘해서 후려치는 것인지,
찌르는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만쿰 재빨랐다.
후려갈긴다고 생각하면 어느덧 돌변해서 가슴팎까지 예리한 칼끌이 다가서고 검끝이 다가섰다고
생각하면 어느덧 몇 걸음 앞에서 유유히 빙그르르 돌아가는 금환검이었다.
그러한 수법에 무거운 선장만 휘둘러 기운이 빠진 천홍대사는 어깨로 가픈 숨을 몰아쉬고
수염만 날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용두지팡이를 꼬나쥔 이창란이 천홍대사를 불러들였다.
[대사는 이 늙은이에게 양보하시오!]
하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벌써 용두지팡이에서는 맹렬한 장풍이 흙과 모래를 날리고 있었다.
윙! 소리가 나도록 냅다 휘두른 용두지팡이를 살짝 피한 도옥은 재빨리 입을 놀렸다.
[차례차례로 다 나오는군! 이노영웅이 물러서면 그 다음엔 누가 나설 것입니까? 하...하...하...]]
조롱하며 금환검을 겨누는 도옥을 이창란은 금방 목이라도 비틀어 버릴 듯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이놈! 잔소리 말고 이것부터 받아라!]
벽력같이 소리치는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를 빙글 돌려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수법으로?
돌변시키면서 도옥의 허리를 겨누고 힘껏 날렸다.
그러나 도옥은 흥! 코웃음을 터뜨리며 금환검을 옆구리에 차악 끼면서 살짝 몸을 돌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허탕을 친 이창란은 제풀에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그리고 엎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바로? 잡고 돌아서는 순간,
뒤로부터 벼락같이 달려드는 도옥의 공격에 그만 황망히 여섯? 걸음이나 피하던 이창란은 으흥!
호랑이 울음처럼 노성을 터뜨리며 용두지팡이에 바람을 잔뜩 일으켜 세우고 마악 내려치려고 했다.
홀연! 머리 위 허공에서부터 애잔한 학의 울음소리가 계곡을 덮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쏜살같이 아래로 급강하하던 한 마리의 학이 땅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 마리의 학뿐인줄 알았던 일동을 놀라게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자색이 아릅답고 절묘한 여인이 학의 등에서부터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순간, 이창란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주약란!]
틀림없는 주약란이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은 전부터 안면이 있는 주약란에게 주먹을 쥐었다.
주약란 역시 거의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라 가볍게 목례를 해서 반례했다.
[오랜만이군요!]
하고는 도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옥! 저를 알고 있겠지요?]
하는 말에 도옥은 싸늘하게 웃었다.
[물론 알고 있소. 그대가 불귀의 객이 된다 해도 이 도옥은 잊지 못할 것이오!]
주약란은 도옥의 차가운 웃음보다 더 차디차게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대단하시군요! 잊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다는 거죠?]
[흥! 한번 겨루어 볼까 하오.]
[이길 승산은?]
[없지도 않소! 이 도옥이 아직 누구한테? 져본 일은 없소!]
[그까짓 귀원비급의 무공으로?]
그러자 도옥은 몸을 흔들며 웃어젖혔다.
[핫...... 하...... 귀원비급에 기재된 무공보다 더 오묘한 무공은 없지.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터득한 사람은 바로 이 도옥이오. 그대 주약란은 어림도 없지!]
주약란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고는 옥소선자가? 쓰러질 때 떨어뜨린 옥피리를 집어들며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굴빛을 바꾸었다.
[아마 귀원비급을 터득했다고 해서 무술계의 제일인자처럼 자부하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이 한 자루의 옥피리로 귀원비급의 무공이 어떤지 한 번 시험해 볼까요?]
하는 주약란의 태도는 실로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약간 생각이 달라진 도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수년간 천기석부에서 무공만 단련했다는 주약란이 아닌가? 어떤 절기인지는?
모르지만 조금 조심해야겠는데 ......>
이렇게 생각하는 도옥은 과거에도 몇 번 상대한 경험이 있어 약간 마음이 긴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다.
지금 움츠릴 도옥이 아니었다.
한편, 주약란은 옥피리를 고쳐쥐며 여러 사람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지만 여러분들께서는 자리를 넓혀 주시면 고맙겠어요.]
하고 당부하는 말에 즉각 일동은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요구대로 자리를 넓혀주었다.
이때, 도옥은 비록 큰소리를 치긴 했으나 주약란의 무공에 약간 두려움을 느껴 금환검을 쥔채
운기만 할 뿐 선뜻 달려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주약란도 무슨 속셈인지 도옥을 노려볼 뿐 공격하는 것에 조금 주저하는 빛이 보였다.
이리하여 서로 노려보기 얼마 동안!
갑자기 쥐었던 금환검을 거두며 도옥은 주약란을 부르는 것이었다.
[주약란! 잠깐 할 말이 있소!]
그러자 주약란도 태도를 늦추며 곧 응답했다.
[무슨 말이죠?]
[양몽환과 조소접을 사로잡아 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벌써 알고 있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심하림이 스스로 이 도옥을 찾아와 같이 있소.
그리고? 양몽환에게 혼인파기서에 수인까지 하게 해서 지금은 자유의 몸일뿐 아니라
언제든지 이 도옥과 부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있소?]
순간, 주약란은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그러나 곧 태연을 되찾았다.
[흥......믿지 못하는군!]
[심소저가 직접 나에게 사실을 말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죠.]
[핫......하......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대가 이 도옥을 따라 같이 간다면 심하림을 만나게 해주겠소!]
그러자 이창란이 큰 소리로 주약란을 불렀다.
[주소저! 어떤 말에도 응하지 마시오.
저 도옥은 교활하기 이를데 없는 놈으로 주소저를 이길 수 없으니까
계략을 써서 함정에 빼뜨리려고 하는 거요.]
하고 주의를 주는 이창란의 말에 주약란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후배가 잘 알고 있습니다.]
[흥! 왜들 이 모양이오? 이 도옥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요?]
그러나 주약란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태도를 돌변시키는 것이었다.
[만일 그대가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공격하겠어요.]
순간, 주약란보다 먼저 도옥의 금환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도옥의 일격은 그 속도가 얼마나 느린지 무공을 모르는 사람은 능히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천홍대사와 정현도장 그리고 이창란처럼 무공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고수급들은
그 완만한 도옥의 일격이 얼마나 놀랍고 비상한가를 알고 있었다.
보기보다는 날카롭고 민첩하기 이를데 없는 도옥의 일격이 주약란의 가슴 부위에 있는
십여 군데의 요혈을 노리고 들어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뭇 사람들의 애를 태우게끔 주약란은 전혀 눈치도 못챈 듯 옥피리를 느긋하게 쥔채
반격할 마음이 없다는 표정을 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주약란의 태도에 숨이 막힐 뭇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도옥의 느린 금환검이 거의 주약란의 가슴에 닿을 무렵 느리게 들어가던
금환검은 번쩍! 섬광을 날리며 그야말로 쏜살같이 찌르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주약란은 무슨 생각에 잠겼다 깨어난 듯 살짝 옆으로 비켜서며 들었던
옥피리를 밑에서부터 치켜 을리며 도옥의 옆구리를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십분 자기의 검법 제간을 발휘하지 못한 도옥은 몸을 뒤로 틀며 훌쩍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한 도옥의 행동을 보고 듯 실망의 빛을 띄우며 말했다.
있던 주약란은 약간 맥이 풀린다는 듯
[몇년 만나지 못하는 동안 겨우 그 정도밖에 진전하지 않았나요?]
하면서 옥피리를 들어 도옥을 향해 찌르듯 한번 후려치고는 옥피리를 거두어 들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옥도 지지않고 비스듬히 몸을 눕히며 금환검을 휘둘러 주약란의 옥피리를 막고는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흥! 코웃음을 치고 주약란을 소리높이 불렀다.
[주약란! 수 년동안 천기석부에서 배웠다는 절기가 겨우 그거요?]
좀전에 주약란에게서 받은 모욕을 곧장 되돌려 주는 도옥이었다.
그러자 주약란 역시 차갑게 웃으며? 옥피리를 빙그르르 돌려 고쳐쥐면서 순식간에?
네 번의 공격을 퍼붓는 것이었다.
지금 주약란이 공격한 네 수는 말이 네 수지 그대로 한 수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공격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비범한 무공을 지닌 몸이었다.
여유있게 앞의 세수를 받아낸 다음 맨 마지막 한 수는 얼굴을 찌푸리며
금환검으로 맞받아 쳐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창!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금환검과 옥피리는 부딪쳤다가 일제히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을 역이용한 도옥은 맹렬히 반격을 가해 들어갔다.
그런데다 지금까지의 수법을 돌변시켜 굉장한 속도로 역습해 들어오는 도옥의 금환검에서는
싸늘한 섬광과 무수한 불꽃이 튀며 주약란의 몸을 완전히 검막(劍幕)속으로 휘말아버리듯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주약란의 옥피리는 도옥이 공격하는 금환검을 따라 위로 아래로 또는 좌우로
막아내기만? 할 뿐, 수 십 차례의 공격이 쉴 사이없이 춤을 추듯 가해와도 주약란은
한 수도 반격하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도옥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린 듯한 주약란의 태도에 이창란 이하
여러 고수들은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런데다 도옥의 수법은 점점 날렵하고 예민해져 갈수록 날카롭고 매서운 공격에 궁지에 몰린 듯한
주약란을 지켜보는 여러 고수들은 가슴이 아팠다.
그중에서도 천홍대사는 발을 구르며 분통해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정현도장을 불러 한숨과? 탄식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귀원비급의 무공은 과연 놀랍구려. 만일? 주소저까지 도옥에게 패한다면 이 세상에서?
도옥을 해칠 사람은 없을거요.
나무이이타불! 이를 어쩌면 좋겠소? 이럴 때 어찌 체면만 차리고 있겠소. 우리 함께 나섭시다.]
실로 안타깝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다.
정현도장 역시 사태가 지금 보고 있는 바와 같이 주소저가 끌리고? 있는 이상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천홍대사의 말대로 힘을 합쳐 나설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힘을 합칠 필요없이 혼자 나설 마음이었다.
[좋습니다. 빈도가 먼저 오행검진으로 싸우겠습니다.
만일 이 빈도가 당해내지 못하면 그때 대사께서 싸워주시오.]
하면서 도옥과 주소저를 번갈아 보았다.
이때, 도옥은 더욱 기세가 등등하여 주위를 펄펄 날아다녔고 금방 산이라도 무러뜨릴듯
당당한 기세로 주약란을 궁지에 몰아넣고 마음대로 공격하고 있었다.
한편, 수염이 꿋꿋이 일어나고 얼굴에 주름살이 깊이 패인 이창란은 여차하면 뛰어들
자세로 용두지팡이룹 단단히 거머쥐고 있었고 팔비신옹(八臂神翁) 문공태 역시 금환(金丸)을
한움큼 거머쥐고는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렇듯이 여러 고수들이 절망에서 마지막 기운을 차릴 때 드디어 형세는 돌변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펄펄 날으며 기세를 떨치던 도옥이 일약 수법이 달라진? 주약란의 옥피리에
그만 주춤 멈추어 서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수세에서 공격으로 태도를 돌변시킨 주약란의 수법은 금환검을 휘두르는
도옥의 수법과는 정반대의 수법이었다.
날으는가 하면 기고, 기는가 하면 어느덧 몸은 허공으로 높이 솟았다가 재주를 넘으며
곧장 내려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옥피리도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고 변화무쌍이었다.
바로 이것이 오년 동안 천기석부에서 주약란이 연구 터득한 수법이었다.
사실 귀원비급의 무공으로 말한다면 천기진인(天機眞人)과 삼음신니(三音神尼)의
두 준재(俊才)가 합심하여 기록한 무공으로서 주약란과 같이 총명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그 심후한 무공을 완전히 터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희세의 두 인물이 남긴 귀원비급의 무공을 정반대의 방법으로 오년 동안
천기석부에서 두문불출하면서 연구 터득하여 다른 하나의 새로운 무공을 이룩하여 놓은 것이었다.
그러한 주약란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도옥은 그때마다 어디서 어떻게 공격하여 오는지
예측할 수도 없었고 반격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되어 도옥의 금환검은 무형(無形)의 벽에 부딪치고 드디어?
정신까지 어지러워지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역전한 전세를 보고 그제서야 천홍대사는 감탄을 연발했다.
[과연, 주소저다운 검법이군......]
그러는 중에도 여전히 주약란의 옥피리는 춤을 추듯 어지립게 도옥의 몸을 휘감아버리는 듯하다
옆으로 살짝 비켜서면서 금환검을 어지럽게 만들어버리고 맡았다.
주약란의 옥피리에 완전히 휘감겨 제압당한 도옥의 금환검은 급기야 던져버리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금환검을 놓으면 승부는 결정이 날 것이고 그렇다고 그대로 금환검을 쥐고 있으면 크게.
상처를 입게 될 위기에 놓인 도옥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나 상처를 입는 것보다는 금환검을 내던지고 맨 손으로 승부를 겨루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도옥은 재빨리 금환검을 내던지고 목을 움츠러뜨리면서 주약란의 공격을 피해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자 그렇게 날카로운 수법으로 기기묘묘하게 속공을 전개하던 주약란은 갑자기 공격을 멈주고
날카롭게 도옥을 불렀다.
[도옥! 목숨이 아깝다면 양상공을 내놓는 것이 좋을 거요.]
그러는 바로 그때였다.
홀연 서쪽 절벽 위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큰 고함소리가
[당신들이 더 이상 망령되이 행동한다면 이 절벽 위에서 양몽환을 굴려 즉사시키겠소.]
순간, 일제히 고개를 돌린 사람들의 시선에는 양봉환의 뒷덜미를 움켜쥔
왕한상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여차하면 뒷덜미를 움켜쥔 양몽환을 그대로 던져버릴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아연실색한 뭇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제서야 큰 소리로 웃어젖히는 도옥이었다.
[핫...... 하...... 과연 양몽환은 쓸데도 많군......
방패도 되고 목숨을 구하는 데도 쓰이고, 핫...... 하......]
그러자 주약란의 싸늘한 음성이 허공을 찢었다.
[도옥! 네가 비록 오늘은 비열한 방법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 도망칠지는 몰라도
반드시 내손에 죽을 것이다. 잊지 마라.]
[흥! 이후의 일은 이후의 일, 그때 가서 봐야 알 거요.
과연 누가 누구의 손애 죽는가를...... 핫...... 하......]
하고는 절벽으로 다가가 내려진 밧줄을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웃어젖히며 주약란을 불렀다.
[주약란! 그럼 이 도옥은 갑니다.]
그리고는 그대로 절벽으로 오르고 말았다.
절벽에서 도옥이 사라지고 양몽환의 목덜미를 움켜쥔 왕한상이 양몽환을 끌고 사라지자
그제야 이창란은 들었던 용두지팡이로 힘껏 땅을 두들기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고이얀 놈!]그러나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격으로 여러 사람들이 절벽만 올려다 볼 뿐
그 위에는 파란 하늘만이 가득 차 있고 아무 것도 없었다.
얼마 동안 실의에 잠겨 있던 주약란은 체념한 듯이 일동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지금 초조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모쪼록 마음을 가다듬고 대책을 모색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요.]
하며 위로하듯 하는 말에 문공태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주소저! 우리들의 지혜는 아무리 짜봐도 그게 그겁니다.
별 수가 없단 말씀이죠. 아무래도 주소저가 묘안을 짜냈으면 좋겠소.]
[저도 별로 이렇다할 묘안은 없어요.
그러나 한가지 말씀해 둘것은? 지금 도옥이 우리들을 이곳에 가두고는
우리들이 꼼짝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이에요.
그러나 저에게는 현옥이 있다는 것을 도옥이 잊은 모양이군요.
여러분들은 염려마시고 현옥을 타고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세요.]
그러자 이번에는 천홍대사가 나섰다.
[그렇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문제는 해결된 셈이오. 그러나 양대협을 구할 길은 없구려.......]
[그 점은 제가 강구해 보겠어요. 대사께서는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하고 천홍대사를 안심시킨 주약란은 쓰러져 있는 옥소선자를 부축해 앉히고는 짚힌 혈도를 풀어놓았다.
그러자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뜨던 옥소선자는 바로 눈앞에 주약란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끓어앉으며 예의를 표했다.
[아, 소저!]
하는 것을 주약란은 손을 흔들어 옥소선자의 행동을 저지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차리지 않아도 돼요.]
하면서 옥소선자의 귀에 입을 바싹 댄 주약란은 무슨 말인가를 가만히 속삭였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정히 앉아 즉시 운기 조식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옥소선자를 조식케한 주약란은 다시 뭇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들은 혹시 건량(乾糧)을 가지고 계신가요?]
하고 묻는 말에 즉시 문공태가 대답했다.
[이 늙은이는 건량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만 정현도장께서 한 이틀분의 건량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자 주약란은 시간을 알아보려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 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됐어요. 이틀분의 양식이면 충분해요.]
하고 잠시 말을 끊었던 주약란은 곧 이었다.
[그럼, 건량을 각자 나누어 먹은 다음 조식하여 피로를 풀어두는 것이 좋겠어요.]
그러자 문공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 늙은이는 배고픈 걸 모릅니다. 이 늙은이의 걱정은 말고 나누어 드시오
그리고 주소저깨서,는 무슨 할 일이라도 있으면 이 늙은이를 시켜주시오.]
[알았어요. 그러나 만일을 위해서 조식해 두세요.
아무리 내공이 강하다 해도 며칠씩 계속해서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는 여러 사람들의 표정을 두루 살피고는 다시 말을 계속 하는 것이었다.
[여하간 여러분께서는 좀 조식을 취해 두세요. 그리고 조식이 끝나면 제가 긴히 드럴 말씀이 있습니다.]
하는 말에 여러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사실 문공태나 정현도장 그리고 천홍대사나 이창란은 며칠 동안 주야를 가리지 않고 달혀온 데다가
막다른 협곡으로 유인되면서부터 일전을 벌려 조식을 취할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주약란의 말이 아니어도 잠시 동안 조식을 취하고 혔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런데다 안광이 예민한 주약란은 이들의 얼굴에서 피로함을 발견하고
조식을 취해 두어야만 언제 어느때 달혀들지 모르는 도옥 일당을 맞아 재주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같아 조식을 취하도록 권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주약란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문공태는 더 이상 우기지 않고
건량을 골고루 나누어 먹고 곧 조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석실에 스며드는 독가스 한번 조식을 취하기 시작한 여러 사람들은
오랜만에 취하는 조식에 모두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뜨며 조식을 끝냈을 때는 밤도 깊은 이경(二更),
교교한 달빛만이? 산야(山野)를 비추는 시각이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 둘 조식을 끝내고 일어나 앉는 것을 보자
주약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겠죠?]
하고 조용히 웃으며 묻는 말에 천홍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피로를 완전히 씻은 것같소이다.]
[그럼, 됐어요.]
반짝이는 눈을 들어 여러 사람들을 둘러본 주약란은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분들이 보시다시피 이곳이 막다른 협곡이긴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어떤 함정이 있을 것같지는 않습니다.
설사 사방 절벽에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둘이 절벽 위로 오르지만 않는다면
먼저 공격을 가해 오지는 않을 거에요.
그러나 한가지 주의해 둘 것은 도옥이 우리들을 이곳에 감금해 놓고 자기편의 고수들을
차례로 보내 우리들과 싸우게 해서 우리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지치지 않도록 조식을 취하게 한 것입니다.]
하고 주약란이 주위의 사태를 내다보듯 하는 말에 정현도장은 옳은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저의 말이 옳소. 우리들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솔직히 시인하자 주약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가 관찰한 바로서는 도옥이 이 백장붕에 많은 시일과 노력을 투입시켰지만
이 협곡까지는 우리둘을 유인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다면 이 계곡에 함정을 파놓았을 것이에요.]
그러자 문공태가 불쑥 일어났다.
[그러나 이곳에 함정이 없다고 해서 우리들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예, 옳은 말이에요. 그러나 함정이 없는 대신 매복수가 있을것은 틀림없어요.
우리가 이곳에 며칠 있을지는 저도 모르지만 협곡좌우에 매복하고 있는 고수들을
물리치지 못하는 한, 이 협곡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애요.]
그때 한쪽 옆에서 조용히 운기 조식을 취하던 옥소선자가 천천히 일어나 주약란에게 다가왔다.
[소저, 이제는 원기를 회복한 것같습니다.]
하며 생긋이 웃어보였다. 그러자 주약란도 마주 웃어주었다.
[좋아요. 그럼 가보도록 하세요.]
하자 옥소선자는 허리를 굽혀 주약란에게 인사하고는 옆에 대기하고 있는 현옥의 등에 을라탔다.
이어 현옥은 긴 날개를 두어번 퍼덕이고는 곧장 허공으로 비상해 올라가
금방 구름 속으로 자태를 감추고 마는 것이었다.
워낙 큰 현옥이라 그런지 긴 날개를 한번 퍼덕이자 그 날개 바람에 모래가 어지럽게 날리는 것이었다.
그때, 현옥이 사라진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천홍대사는 주약란에게 고개를 돌리며 염불을 외웠다.
[아미타불! 주소저, 이 빈도가 한마디 여쭐 것이 있소이다.]
[무슨 말씀인지요?]
그러자 천홍대사는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본파의 다음 조(組) 고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염려스럽소.]
하며 협곡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며 천홍대사를 불렀다.
[대사님, 염려마십시오. 그것은 이미 제가 옥소선자에게 부탁해 놓았습니다.?
이 협곡으로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여기서 연락하는 대로
내외(內外)가 호응하도록 했습니다. 대사님!]
하는 말에 천홍대사는 염불을 외우며 허리를 굽혔다.
[고맙소이다. 고맙소!]
그러는 한편에서 이창란은 수염을 내려쓸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주약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건량이라고는 하루분밖에 남지 않았소.
만일 사오일 동안 계속해서 여기에 머물러 있는다면 낭패가 아니겠소?]
그러자 이번에도 주약란은 염려말라는 듯이 생긋 웃었다.
[노선배님께서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옥소선자가 늦지 않게 건량을 보내줄 것입니다.]
하는 말에 이창란과 천홍대사는 서로 마주보며 눈을 크게 뚤 뿐 더이상 말하지 못했다.
단지? 모든 것을 사전에 미리 알고 옥소선자를 보내 준비케 하는 주약란의 비상한 두뇌에
감탄만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이때, 문공태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역시 주약란을 불렀다.
[주소저! 만일 도옥이란 놈이? 우리들을 상대하지 않고 그대로 이곳에 감금해 둔다면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럴리는 없습니다.
도옥의 성질로 보아 우리들을 그냥 못 본 척하지는 못할 거에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들을 자기 면으로 만들려고 악을 쓸 거에요.
그러다 안되면 무공으로 공격해 올지는 몰라도......]
아무 염려말라는 듯이 주약란은 가볍게 대답해 주었다.
이때, 다시 천홍대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이떻게요? 말씀해 보세요.]
[주소저의 학을 이용해서 우리둘을 모두 절벽 위로 올려주시오.
그러면 도옥이와 승부를 겨루도록 하겠소이다.]
그러나 주약란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의 상태로는 우리가 도옥과 승부를 겨루는 것보다 양상공의 생사가? 더 중요해요.
만일 우리들이 도옥을 공격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양상공의 목숨을 방패삼아 우리들을 위협할 거에요.
그렇게 되면 싸우지도 못하고 그의 요구를 들어야 해요. 즉 도옥의 부하가 되어? 치욕을 받든가,
아니면 스스로 자결하여 목숨을 버리든가 하는 일대 불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하고 냉철한 안목으로 앞으로의 사태를 분석 설명하는 말에 정현도 장은 불만을 표시했다.
[주소저의 말씀대로 일이 진전된다면 우리들은 여기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밖에 더 됩니까?]
[결국 그런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두르지 말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자는 거에요]
하는데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문공태가 갑자기 긴장하며 급히 부르짖었다.
[저기! 붉은 등이 하나 나타났소!]
하는 말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과연 서쪽 절벽 위에는 하나의 큰? 등불이 나타나고 그 뒤를 이어절벽 위에?
자태를 나타내는 왕한상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위 위에 떠억 버티고 선 왕한상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우리 방주께서는 주소저 한 분만 이 절벽 위로 올라오시라는 명령을 내리셨소.]
하는 것을 정현도장이 맞받아 소리쳤다.
[뭐라고? 그 간교한 도옥에게 어찌 주소저 한 분만 보낼 수 있소?]
그러자 주약란은 급히 손을 흔들어 정현도장을 제지시켰다.
[상관없어요.]
하고는 곧장 절벽 밑으로 다가가 날카롭게 외치는 것이었다.
[어떻게 절벽을 올라가죠?]
하는데 왕한상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굵은 밧줄을 내려뜨리며 역시 고함을 질렀다.
[이 밧줄을 타고 올라오시오!]
주약란은 내려진 밧줄을 잡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그리고는 밧줄을 타고 절벽을 오르는 것이었다.
공력이 초인간적인데다가 제비같이 날렵한 주약란은 밧줄을 잡자마자? 땅을 박차며
눈 깜짝할 사이에 왕한상이 서 있는 옆으로 쉽게 올라섰다.
한편, 왕한상은 주약란에게 약간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두어걸음 물러서며 주먹을 쥐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미소를 띄우며 왕한상을 불렀다.
[왕한상! 그대는 어찌하여 도옥의 부하가 되었습니까?]
그러자 왕한상은 대답도 하지 않고 가볍게 기침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딴 소리를 했다.
[방주께서는 지금 동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고는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왕한상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삐쭉 나온 바위 뒤로 그곳엔 횃불로 밝힌 천연적인 동굴이 있었다.
왕한상은 다시 몸을 옆으로 비켜서며 손을 들어 어서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자, 어서 들어가시지요.]
순간, 주약란은 압암리에 진기를 돋우어 전신에 운기시키는 한편,
만일에 대비해서 온 몸을 강기(鋼氣)로 감싸고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넓이가 거의 세칸(三間)정도로 중앙에는 둥근? 탁자가 놓여있고
그 위에 붉게 타고 있는 촛불을 마주 바라보고 앉은 도옥의 교활한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주약란은 탁자를 사이로 도옥과 마주 앉으며 먼저 싸늘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이 석실(石室)에서 단 둘이 만나자는 거죠?]
그러자 도옥도 역시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주약란이란 여자가 이토록 경솔한 사람인줄은 미처 몰랐소.]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잔재주를 부리지 말고 용건부터 말하세요.]
[별것 아니오. 다만 이 도옥은 천하 무술계의 고수들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몽땅 이 계곡으로 유인해서 몰살시키려는 계획이오.]
[흥! 마음대로 해보시지. 그러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걸요.]
[흥! 틀림없이 몰살시키고 말겠소. 만일? 주소저가 가운데서 방해만 놓지 않는다면?
더 간단히 몰살시킬 수 있소.]
[미안하군요. 그러나 나는 이미 이 백장봉 계곡에 나타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소저를 이렇게 청하여 의논하자는 것이 아니오?
만일 주소저가 이 백장봉을 떠나주기만 한다면 어떠한 요구 조건이라도
이 도옥은 다 들어주겠소. 어떻소?]
하며 조건을 내걸어 주약란에게 백장봉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조건? 그런 식으로 속이려는 거에요?]
[천만에. 이 도옥은 남아 대장부요.]
[이장부? 그렇다고 해두고. 내가 조건을 내놓는다 해도 당신은 들어주지 않을 텐데.]
[정당한 조건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을 맹세하겠소.]
[진정인가요?]
[암, 맹세코!]
[그럼, 양상공과 조소저를 내놓으세요. 그렇게만 한다면 나는 미련없이 이 백장봉을 떠나겠어요,]
하고 내놓는 조건에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이 도옥은 코를 찡긋거렸다.
[그건 안되겠소!]
[왜 안된단 말인가요?]
[주소저도 좀 생각해 보시오 그들을 내놓는다면 이 도옥이 섬멸하려는 천하의 고수둘이
이 백장봉으로 모이지도 않을 거요.
그렇게 되면 수년 동안 피땀을 흘려 계획한 대사(大事)가 수포로 돌아간단 말이오.]
하고는 주약란이 말하기도 전에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니만큼 그건 안되고......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
[그들을 석방하기는 하되 지금이 아닌 적당한 시기에 즉 다시 맘하면 천하 고수들이
모두 이 백장봉에 모인 다음에 석방하면 거떻겠소?]
[뭐라고요? 그래서 고수들을 속이는 제물로 삼겠단 말인가요?]
[아니, 그럼 그전에 석방해도 되겠지만......
그렇다면 그들이 모두 무공을 폐하고 더이상 단련치 못하도록 한다면 맹세코 약속대로 석방하겠소.]
그러자 주약란은 일가에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내가 응낙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세상에 어느 바보가 당신을 믿겠어요?]
하고 코웃음을 치자 도옥은 약간 언성을 높여 위협하였다.
[좋소. 만일 주소저가 물러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다면 강체로라도 백장봉 밖으로 끌어내겠소!]
[위협하는 건가요? 마음대로 해보세요.
그러나 만일 양상공을 해친다면 천하? 고수들을 몰살시키기 전에 당신부터 죽일 거에요.
천하 고수들 또한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에요.]
[천하 고수들? 핫...... 하.......그런 놈들은 안중에도 없소. 그리고......]
[그리고?]
[당신 주소저 외에는 이 도옥과 백합을 겨를 수 있는 놈은 하나도 없소.]
[그래도 내가 겁나는 모양이죠?]
[천만에! 이 도옥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오.]
[그래요? 대단하시군....... 그러나 만일 지금 당장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어디로 피하죠?]
[흥! 그런건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소. 그런 준비도 없이 당신을 여기까지 부를 도옥은 아니오.]
[제법 큰 소리를 치지만 전혀 믿기지 않는데요.]
[그러나 믿어두는 것이 좋을 거요. 그렇지 않으면 평생 한을 품게 될 것이오.]
그러나 주약란은 미소를 띄우며 사방 벽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정말 피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한번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은 데요.]
하던 주약란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만일 백장봉에서 나를 떠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실대로 밝히지 않으면
오눌이 바로 기일(忌日)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요.]
그러나 도옥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태연히 웃음을 흘렸다.
[이유? 많지요. 그러나 서두르지 말고 한가지 구경이나 하시오.]
하고는 오른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한번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암벽(岩壁)에 틈이 벌어지며 하나의 돌문이 드르륵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열려진 돌문 저쪽편에 하나의 석실이 나타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약란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것은 도옥과 똑같이 생긴 젊은이 하나가 날카로운 한자루의 비수를
양몽환의 등에 대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보고있는 주약란을 바라보던 도옥은 껄껄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어떻소? 저 비수로 말하자면 극독을 묻힌 것으로서 살을 조금이라도 찢는 날이면
주소저와 같이 무공이 강한 사람도 구하지는 못할 것이오.]
주약란은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지만 곧 정신을 수습하고 냉정해졌다.
근 오년만에 만나는 양몽환을 이처럼 위험한 처지에서 상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기구한 운명이오,
인연이라 생각하면서 주약란은 후! 한숨을 쉬며 도옥애게로 고걔몰 들렸다.
그리고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비수를 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죠?]
[그는 이 도옥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오.]
[모습이 꽤 닮았군요. 그러나 당신처럼 교활하지는 않겠죠?]
[핫...... 하 ...... 그도 이 도옥과 똑같이 잔인하고 계략이 많소.
그렇지 못하다면 어찌 제자로 삼았겠소?]
그러나 주약란은 그런 말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이 양몽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도옥에게 물었다.
[양상공은 어떻게 된 거죠? 혈도를 짚혔거나 아니면 중상을 당한 모양이군요?]
[천만에! 이용가치가 많은 양몽환에게 어찌 중상을 입히겠소!]
하는 말에 주약란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의 뇌리 속에는
하나의 계략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 만일 나의 천강지력(天鋼指力)으로 비수를 겨누고 있는 도옥의 제자를 쓰러뜨리면
그리고 전광석화같이 양상공을 안고 동굴을 빠져나간다면? ......>
그래서 양상공을 구해놓고 도옥과 겨루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만콤 무서운? 위험이 따르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 도옥의 제자인 그 젊은이가 천강지의 지력(指力)을 피하거나 급소에
명중하지 않는 경우, 극독을 묻힌 비수가 그대로 양몽환을 찌르지 말라는 법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나 버린다는 것에 주약란은 조바심이 났다.
이리 궁리하고 저리 생각해 봐도 별로 신통한 계략이 떠오르지가 않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러한 주약란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훌연 크게 소리내어 웃는 도옥이었다.
[자, 볼 만큼 보셨겠죠? 그만하면 양뭉환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
하는 말에 주약란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웃음을 거두며 어떤 결심이 선 듯
입술을 깨물었다.
[늦지 않아요. 골 구해내고 말겠어요.]
[흥! 그건 이후의 일이고 지금은 대사(大事)나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고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무슨 의논이죠?]
[그야 물론 양몽환에 관해서지!]
[흥! 양상공의 생사로서 나를 위협한다 해도 이 주약란은 결코 당신의 수단에 넘어가지는 않아요.]
하는데 도옥이 오른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열렸던 돌문이 열럴때 처럼 드르륵 닫혀졌다.
주약란은 양몽환을 보면 볼 수록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파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외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백장봉을 이렇게 꾸미려고 많은 노력과 시간을 썼겠군요.]
[그렇소. 거의 삼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오. 훌륭하지 않소?]
하면서 도옥은 자기 왼쪽 무릎을 내려다 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주소저가 이 도옥의 왼쪽 무릎뼈를 부러뜨린지도 어언 오년의 세월이 홀러갔소.
그래서 이 도옥은 목숨을 걸고 귀원비급 속에서 무릎의 치료법을 찾아보았지만 치료법은 없었소.]
[그때 만일 양상공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십여 명의 도옥이 있어도 살아나진 못했을 거에요.]
[바로 그거요. 그때 생각을 해서 지금도 이 도옥은 양몽환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이제 주소저에게 돌려보내려는 것이오.]
순간, 무슨 계략으로 이따위 말을 하는가 의아히 생각하던 주약란은 태연히 그의 말을 받았다.
[무엇 때문에 나에게 돌려준단 말인가요? 양상공은 위로 부모님이 계시고 밑으로는
처첩이 있어 돌볼 사람이 많은데 ...]
그러자 도옥도 잠시 어리둥절한 듯 주약란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는 것이었다.
[그럼, 주소저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거요? 양몽환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오?]
[물론 양상공과 조소저를 구하러 왔어요..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의도가 이상해서 하는 말이에요.]
하면서도 주약란은 자기의 표정에서 교활한 도옥이 어떤 눈치라도 채지 않았는가 염려해서
일부러 태연을 가장했다.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오해하지 말아요. 나는 정도(正道)를 따르는 사람,
그래서 죄없이 위험한 처지에 갇힌 양상공과 조소저를 구하려는 것뿐이에요.]
그러자 도옥은 아차했다.
지금까지 그는 남이 따를 수 없는 기지로 남의 눈치를 보는데는 귀신이라고 자부해온 터에
지금 주약란 앞에서는 반대로 자기의 눈치를 주약란이 보고 있는 것같아 잠시 당황했다.
<...... 오년이란 세월동안, 주약란은 천기석부에서 두문불출했고 양몽환 역시 천기석부로
주약란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이 도옥이 익히 아는 바가 아닌가?
그런데다 양몽환에게는 이요홍과 심하림이라는 아내가 있는 것읕 아는 주약란이
양몽환에게 정을 품고 있을리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의 주약란의 태도로 보아 그동안 품었던 정이 식어졌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차츰 야릇한? 생각이 고개를 쳐드는 도옥은
혼자 수심에 싸인 표정을 짓기도 하고 기헬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한 도옥을 주시하고 있는 주약란은 주약란대로 이상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 저놈이 또 무슨 간계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군 ......>
하는데 그제야 도옥은 헛기침을 하며 주약란을 부르는 것이었다.
[주소저! 그대가 양몽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면
이 도옥은 주소저와 한가지 상의할 것이 없소.]
그러나 주약란은 틀림없이 간계가 나오리라 생각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필요없어요.]
하고는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겨 놓고 말았다.
그러자 도옥은 낄낄 소리내어 웃었다.
[돌문은 이미 닫힌지 오래요.
주소저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돌벽(石壁)을 뚫고 나갈 수는 없겠지!]
하는 말에 주약란은 쇠뭉치로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즉시 돌아선 주약란은 눈씹을 치켜 올렸다.
[좋아요. 나갈 수 없다면 우선 당신부터 처치하겠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주약란은 섬섬옥수를 들어올려 강력한 일지(一指)의 지풍(指風)을 쏘아붙이고 말았다.
그러자 도옥은 몸을 살짝 피하며 크게 소리내어 웃어젖혔다.
[오! 천강지력!]
그 순간,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은 주약란은? 도옥을 덮치듯 달려 들면서
눈깜짝할 사이에 여덟? 수의 장풍(掌風)을 날리고 벽에 기댔다가 힘껏 몸을 튕기면서
천강지의 일지풍을 날렸다.
그러나 도옥은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지 주약란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석실을
살살 기어다닐 뿐 반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약란의 공격이 조금 늦추어지는? 틈을 타서 장풍권(掌風圈)을 벗어나더니 재빨리
소리치는 것이었다.
[주소저! 잠깐 손을 멈추고 이 도옥의 말을 들으시오.]
그러는 한편, 주약란은 벽을 의지하고 급히 조식을 취했다.
그리고 자기의 공격을 교묘히 피하는 도옥의 신법이 모두 귀원비급에서 터득한
신법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놀라운 신법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저 도옥은 귀원비급의 무공을 완전히 터득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의 공격을 그렇게 용이하게 피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주약란이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잠시 조식을 끝내고는 도옥을 노려보았다.
[왜 반격하지 않죠?]
[주소저 좀 생각해 보시오.
이 도옥이 주소저를 이곳까지 오라고 한 것은 결코 주소저와 싸우려고 부른 것이 아니란 말이오.
어찌 손님과 싸우겠소?]
순간, 주약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도옥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자 다시 도옥은 말을 계속했다.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하는 말이오만,
주소저는 이 도옥의 호의를 받아들여 양몽환과 이야기나 하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의외의 말에 정신마저 혼란해지는 것같은 주약란은 돌문밖으로 유유히 나가버리는
도옥을 부르지도 못했다.
그 순간! 덜컹! 하는 소리와 함깨 천장으로 부터 두꺼운 철판이 내려와 마악
도옥이 나간 동굴 입구를 여지없이 막아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사태가 돌변한 동굴 속에서 주약란은 암암리에 도옥의 계략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후회할 주약란이 아니었다.
이런 때일 수록 정신을 차리고 당면한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주약란은
태연히 철판으로 막힌 동굴 입구까지 걸어갔다.
그리고는 두꺼운 철판을 한번 지그시 밀어보고는 요지부동하는? 철판과 등을
돌리고 곧 되돌아가 의자에 편히 앉았다.
어떤 일이 닥쳐오려면 와보라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약란이었다.
아무도 없는 텅빈 석실, 중앙에 탁자와 그 위에 은은히 타 들어 가고 있는
한 자루의 황초(黃燭)만이 어둠을 은은히 밝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극히 짧은 순간이나마 홀로 있다는 외로움을 느끼는? 주약란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오른쪽 돌벽으로부터 픽! 픽! 하는 기분나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돌벽에 네모반듯한 창구(窓口)가 나타나더니
그다음 그 창구를 메우듯 천천히 나타나는 얼굴이 있었다.
순간, 주약란은 울고 싶도록 흥분된 감정을 억누르며 달려갔다.
[아! 양상공!]
창구로 얼굴을 나타낸 사랍은 그렇게도 보고 싶고 마음 속에만 그리던 양상공 바로 양몽환이었다.
오년만에 양몽환과 얼굴을 마주 대한 주약란의 감정은 이루 말할수 없이 떨리기만 했다.
그러나 터지려는 을음을 억제하며 다시 눈을 들어 창구를 올려다 보자 쓸쓸히 웃고 있는
양몽환의 얼굴이 초췌한 듯했으나 보고 싶었던 얼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주약란은 터지려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말하기 시작했다.
[양상공! 상처라도?]
그러나 양몽환은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이다가 말하지 못하고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쓸쓸히 웃는 것이었다.
그러한 양몽환을 보는 주약란은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뿐 아니라 목구멍까지 곽 막히는 것같았다.
술픔과 괴로움을 떨쳐버리려고 무진히 참아도 기어이 떨어지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머리를 흔들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입을 열기만 하면 그대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잠시 동안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신을 차린 주약란은 말을 하지 못하는 양몽환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증오로 가득 찬 시선을 그대로 석실 입구로 보냈다.
[이 악랄한 도옥! 양상공의 아혈(啞穴)까지 짚어 말도 못하게 하고......
그리고는 이야기나 하라고 꼭 복수해 주겠어!]
그리고 잠시 동안의 시간이 지나갔다.
다음 순간! 주약란의 저주에 찬 소리를 들었는지
어느 사이에 도옥이 나타나 양몽환의 아혈을 풀어주고 낄낄거리며 사라지는
목소리가 석벽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제야 양몽환은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주소저! 오랜만이군요.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주소저를 이런데서 뵙게 되다니 ......]
말소리까지 처량한 양몽환의 말을 듣고 있는 주약란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럴 때일 수록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주약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꼭 당신을 구해드리겠어요.]
[고맙소. 그러나 도옥은 나를 놔주지 않을 겁니다.
주소저께서도 저를 구하려고 무모한 모헙을 하시지 oll고
더욱 도옥의 간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끝내 눈물을 주르르 흘린 주약란은 양몽환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급히 외면하면서
손등으로 눈불을 닦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당신을 구하려고 많은 고수들이 이 백장봉으로 몰려왔어요
염려하지 말고 몸이나 보중하세요.]
하고 잠시 말을 끊는 주약란은 전음지술(傳音之術)을 이용하여 다시 말을 계속했다.
[모쪼록 굳은 의지로 참아주세요.
그리고 꼭 살아야해요 늙으신 부모님과 이요홍 그리고 하림을 위해서
그리고 저를 위해서 마음을 굳건히 가지세요.]
하고 주약란은 고개를 딱 떨어뜨렸다.
북받치는 설움에 마음을 진정 할 길이 없었다.
그러한 주약란을 바라보고 있는 양몽환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무슨 말로 주약란을 위로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그러한 바로 그때,
갑자기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뒤이어 도윽의 음성이 터져나왔다.
[이제는 충분한 이야기를 나누었겠지. 그러면!]
하는 말이 끝나자 마자 네모반듯한 창구는 다시 닫혀지고 양몽환의 얼굴도 사라지고 말았다.
허무한 꿈인 것만 같았다. 분명히 양상공의 얼굴이 있던 곳은 석벽으로 변하고 주위는
다시 종전대로의 석실로 촛불만 하염없이 타고 있었다.
안타깝고? 괴로운 주약란은 자기의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주먹을 쥔채
사방 벽을 돌아가며 치고 또 쳤다.
그러자 또 다시 도옥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약란! 벽을 부수고 나갈 작정이오?]
그러나 도옥의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암벽(岩壁)뿐 도옥이 숨어있을만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주약란은 사방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도옥을 부르고 말았다.
[도옥! 왜 숨어서 나오지 않죠?]
그러나 여전히 위치를 분간할 수 없는 곳에서 도옥의 응답 소리가 들려왔다.
[주소저! 서두르지 마시오. 어쨌든 이 도옥과 주소저는 좀 의논을 해야 하니까......그러나]
[그러나? 뭐죠? 계속해 봐요.]
[그러나 그때가 되면 주소저는 미안하지만 지금과 같은 거만한 태도가 싹 없어질 거요.]
그 순간, 주약란은 암석 어느 곳에 구멍이 뚫어져 있어 도옥이 자기의 행동을
세밀히 보면서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경각심을 높이고 뚫린 구멍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자 홀연! 돌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석실에 불어닥쳤다.
그리고 잠시의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한번 드르륵 문소리가 났다.
아마 열었던 문을 닫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만가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획! 몸을 돌린 주약란은
눈을 크게 뜨고 후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금 걸음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사람은 뜻밖에도 흰? 옷을 입은 심하림이 아닌가!
달려가 손을? 잡으려던 주약란은 멈칫 서고 말았다.
근심에 잠긴 모습으로 걸어오는 하림은 마음이 무거운 듯 걸음을 옮겨 놓기에도 힘든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고개마저 푹 숙이고 들어오는 그녀는 자기 앞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는 것같았다.
얼마 동안 살며시 들어오는 하림을 응시하고 있던 주약란은 조용히 하림을 부르고 말았다.
[림매!]
그제야 걸음을 멈춘 하림은 수그렸던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던 하림은 분명히 주약란이 서 있다는 것을 확인이나 하려는 듯이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그만 엎어지듯 주약란에게 달려들고 마는 것이었다.
[란이 언니!]
하림은 울고 있었다.
두 줄기의 눈물을 마구 뿌리며 우는 것이었다.
그러한 하림의 등을 쓸어주는 주약란도 코허리가 시큰했다.
잠시 동안 하림이 울도록 내버려두었던 주약란은 조용히 하림을 불렀다.
[림매! 울지 말아요.]
그제서야 하림은 눈물을 닦으며 주약란을 올려다 보았다.
[언니도 잡혀왔어요?]
[아니, 잡혀온 것이 아니고 스스로 왔을 뿐이야. 그러나 염려할 것 없어요.]
[저는 도옥에게 속았어요.]
[속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양상공을 놔준다고 하고서는 아직 놔주지 않는 거에요.]
하는 하림의 말을 들은 주약란은 약간 얼굴이 흐려졌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해봐요.]
그러자 하림은 눈을 내려깔며 땅이 꺼질 듯이 한숨부터 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옥과 부부가 되기로 약속하면 양상공을 놔주겠다고 해서....]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주약란은 눈살까지 찌푸렸다. 그러한 그녀의 표정은
<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야!>
하는 것같았다.
[그래서 저는 양상공에게 혼인파기서에 수인하게 했어요.]
주약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 양상공이 수인해 주던가요?]
[예, 처음에는 도옥의 강요인줄 알고 안 찍으려고 했어요
그런 걸 제가 저의 뜻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무 말 없이 찍어주었어요.]
[그리고는?]
[지금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에요.]
하고 잠시 말을 끓었던 하림은 음성을 낮추어 계속했다.
[사실 저는 기회를 봐서 도옥을 죽이고 양상공을 구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섣불리 일을 하면 도리어 양상공이 해를 입을까 해서 아직 못하고 있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하는 그때, 암벽 너머에서 다시 도옥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소저! 조금전 이 도옥이 의논하자고 제안했는데 아직 결정하지 못했소?]
하는 소리에 추약란은 소리나는 곳을 향해 차갑게 대답했다.
[도옥! 나를 위협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위협? 핫...... 하...... 위협은 아니오. 다만 주소저가 응낙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 도옥이 계획한 대사에 방해가 된단 말이오.
그런 주소저를 그냥둘 수 있겠소
이 도옥을 나쁘다고 원망하겠지만 주소저는 그 석실에서 평생동안 살아야할 수밖에 없소.]
[흥! 뜻대로 될 것같아요?]
[이 도옥은 주소저와 정면으로 싸우려는 계획이 아니오.]
[그럼?]
[손을 쓰지 않고 독연기(毒煙氣)를 뿌려 고스란히 죽이겠다는 것이오.]
[흥! 이 주약란이 그렇게 당신 뜻대로 이 석실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제법인데. 그러면 한번 당해보실까?]
하는 말이 끌나자마자 한쪽 암벽에서부터 짙은 연기가 뿜어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불과 세칸 남짓한 석실에 짙은? 독연기가 뿜어져나오자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차?
주약란과 하럼은 눈도 뚤 수 없고 숨도 쉴 수 없었다.
그리고 목구멍으로 쓴 침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순간, 위기를 직감한 주약란은 하림의 손을 잡아 앉히며 소리쳤다.
[속히 앉아요.]
그러자 주약란이 앉히는대로 털썩 주저앉은 하림은 급히 주약란을 부르는 것이었다.
[란이 언니! 이렇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나 다급한 하림에 비해 주약란은 침착했다.
[말하지도 말고 숨도 많이 쉬지 말아요.
그리고 운기하세요.
나에게 대적할 방법이 있어요.]
그러는 동안 석실 안은 진한 연기로 가득 차고 타고 있는 촛불도 잘 보이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지나자 매섭고 지독한 연기는 하림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말았다.
그러자 주약란은 하림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림매! 눈을 감고 숨을 조금씩 쉬도록 해요.
도옥의 이 방법이 악독하기는 하지만 우리를 죽이지는 못해요.]
그러나 점점 더 뿜어져나오는 연기는 급기야 서로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하림은 입을 열고 대답하지 못하고 주약란의 손을 꼭 쥐어주는 것으로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내공이 주약란보다 심후하지 못한 하림은 내식지법(內息之法)으로 버티고 버티다가
기어이 참을 수 없는 경지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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