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23. 불타오르는 야욕
백독옹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승일청의 말은 도옥을 한층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좀전보다 더 얼굴빛이 흐려지는 도옥이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을텐데?......]
[그래서 부하를 보냈습니다만 그 부하가 돌아오면 상세한 내막을 알 것 같습니다.]
하는 말을 받아 이번에는 왼쪽에 쭈그리고 앉았던 노인이 엉거주춤 일어나 입을 열었다.
[저희 부하들이 탐문한 바에 의하면 독용부인의 부하들이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규합되어
그녀를 죽인 원수를 갚겠다고 우리의 뒤를 쫓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그러나 도옥은 아무말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다시 이번에는 오른쪽에 앉아 있던 노인이 부시시 일어나 두 손을 마주잡고
도옥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방주 어른! 이 노인도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는 말에 도옥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입만 돌렸다.
[말해 보시오.]
[그러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별로 놀라운 소식은 못됩니다만 이 늙은이가 들은 바로는
구대문파의 일부 고수들은 우리의 뒤를 쫓는 한편 일부 고수들은 우리들보다 먼저
백장봉으로 갔다는 소식 입니다.]
하고 조금 간신 비슷하게 말하는 노인을 흘깃 바라본 도옥은 한동안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천천히 하림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제 돌아가 쉬시오.]
하는 말에 왼쪽에 엉거주춤 섰던 노인이 한 걸음 나서며 하림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것이었다.
[이 늙은이가 안내해 드리겠소이다.]
하림은 아무말 없이 발딱 자리에서 일어나는 길로 노인을 따라 대청을 나왔다.
하림을 안내한 노인은 대청을 옆으로 끼고 돌다 두번 째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권했다.
그리고 하림이 들어서자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갔다.
문이 닫기고 노인이 물러간 다음에도 멍청히 서 있던 하림은 깨끗한 이불이 깔려 있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춤을 추는 듯 펄럭거리며 타고? 있는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져 산란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깊은 밤, 촛불을 마주보고 후! 한숨을 내쉰 하림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모로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대청에서 쫓기다시피 노인의 안내로 방에까지 들어오게 된 자신이 더없이 비참한 것 같았고
그래서 자기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듯한 도옥이 한편 야속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비밀이 있는지 모르지만 대청에서 자기를 쫓아내듯 방으로 보낸 도옥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아직 하림 자기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르르 감기는 눈을 지그시 감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홀연! 똑 똑......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하림은 귀를 바짝 세우며 일어나 앉았다.
<......누굴까? 이 밤중에......>
조금 두려운 생각을 떨쳐버리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그러자 역시 같은 낮은 음성이 창 밖에서 응답해 왔다.
[심사매! 잠깐 창문을 열어요.]
하는 음성은 좀전에 대청 앞 뜰에서 스치고 지나간 동숙정의 음성이었다.
순간, 주저없이 창문을 열어제치자 흑의로 감싼 사람이 가볍게?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탁자 위의
촛불을 호옥! 불어 꺼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문을 넘어 온 흑의인이 아무리 동숙정의 음성과 같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즉시 경계하며 음성을 낮추었다.
[동사매 언니에요?]
그러자 흑의인은 하림의 손을 잡으며 역시 음성을 낮추었다.
[쉬이! 소리를 크게 내지 말아요. 바로 나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동숙정이었다. 그제야 하림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침대를 더듬어 함께 앉았다. 그리고 정말 동숙정인가 아닌가 하는듯 눈을 반짝이는 하림의 눈 앞에 바싹 얼굴을 들이대며
먼저 동숙정이 입을 열었다.
[심사매! 지금 왕한상이 벌써부터 무슨 눈치를 챘는지 사매를 해치려고 하는 모양이야.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해.]
[알겠어요. 저도 그런 눈치를 채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양상공은 어디 있어요?]
[양사제와 조소저는 벌써 백장봉으로 떠났어. 아마 지금쯤은 백장봉에 닿았을지도 몰라.
확실치는 않지만 독용부인은 살해당한 것 같고 도옥은 수거를 네 재나 만들어서
백장봉으로 보냈다는데 어느 수거 속에 양사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고 자기가 아는대로 이야기를 들려주자 하림은 깊이 탄식했다.
[실로 도옥은 교활하군요.]
하는 말에 동숙정은 소리없이 일어나며 다시 한번 하림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는 것이었다.
[하여튼 사매는 만일을 대비해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요. 그럼 나는 또 가봐야겠어.]
하고는 소리나지 않게 닫았던 창문을 열고 잠깐 밖의 동정을 살피고는 가볍게 창문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동숙정을 보내고 다시 자리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고 양몽환의 생각으로 머리가 무거웠다.
마땅히 아내된 도리로서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양몽환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 며칠간의 일을 생각하며 하림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던 하림은 다시 한번 화들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커고 말았다.
그것은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방문 앞에서 멈추어 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굵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심소저! 주무시오?]
하는 음성은 전연 귀에 설은 음성이었다.
일시에 누구인지를 알아채지 못한 하림은 숨을 죽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자 다시 낮은 음성으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무시오?]
하림은 입술을 꼭 깨물고 동정을 살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자는 척하고 대답을 하지않으면
상대방에서 어떠한 행동으로 나올까 두려워 할 수 없이 입을 열고 말았다.
[누구시죠?]
눈물을 닦고 초에 불을 당겼다. 그때 다시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주무신다면 구태여 일어날 것 없소.]
하는 소리에야 그 음성이 바로 도옥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도옥은 하림을? 떠보기 위해 음성까지 바꾸어 불렀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밤중에 찾아온 도옥이? 무슨 딴 생각이 있어서 왔으리라 짐작하고는
도옥인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죠. 이 밤중에 여자 혼자 자는 방을 찾아 온 당신은 누구냔 말이에요?]
하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자 문 밖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리다 그치며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화를 내지는 마오. 혹시 별일이나 없는가 해서 왔소. 그럼...]
하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돌아서서 가는 모양이었다.
점차 발자국 소리가 문밖에서부터 멀어지고 잠시 후에는 조용한 적막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도옥이 사라지고서도 얼마 동안 그대로 장검을 들고 서 있던 하림은 켜놓았던 촛불을 끄고
문틈으로 밖을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어둠뿐 주위가 고요했다.
다시 침대에 누웠어도 잠은 오지 않고 눈만 더 커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잠을 조금 자두어야 했다.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 위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는 사이에
밤도 어지간히 깊어졌고 그렇게 잠이 들지 않을 것같던 하림도 하품을 하며 마악 잠이 들려는
바로 그때였다.
어디서인가 이상한 인기척이 난다고 생각하며? 뒤집어 썼던 이불을 걷어제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꼭 닫혀 있던 방문이? 소리없이 스르르 열리며 검은 그림자가? 성큼 들어섰다.
그리고는 곧 열렸던 문을 또 그렇게 소리나지 않도록 닫는 것이었다.
도옥이었다.
순간, 하림은 전신이 꿋꿋해지는 것같았다.
일어나서 소리를 쳐야 할지 아니면 자는 듯이 누워서 그의 행동을 주시해야 할지 분간하지 못하고
방망이질을 하듯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일어나서 그를 맞느니보다 놀라는? 척하면서 기회를 노려 도옥을 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는 곧 눈을 감고 자는 척 했다.
그동안 방안으로 남몰래 들어선 도옥은 침대가로 다가와 하림을 가볍게 흔드는 것이었다.
[심소저 자오?]
순간, 하림은 도옥이 자기를 깨우지 않고 무슨 행동을 취하리라 해서 잠시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흔들어 깨우는 도옥의 행동에 실망까지는 아니지만 의외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급히 일어났다.
[누구죠?]
그러나 도옥은 초에 불을 당기며 유유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요, 놀랄 것 없어!]
하고는 일어나 앉는 하림을 다시 침대에 눕히며 그의 상체를 덮치는 것이었다.
[무슨 짓이에요?]
싸늘하게 소리치는 하림의 입을 틀어막은 도옥은 급히 말했다.
[가만 있어. 한가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어.]
[무슨 일이죠?]
[당신이 여기 온 것은 암암리에 이 도옥을 죽이고자 해서 온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여전히 하림의 상체를 자기의 상체로 힘껏 누르며 하는 도옥의 말에 하림은 호흡이 가빴지만
짐짓 태연을 가장했다.
[당신은 그들의 말을 믿는가요?]
[글쎄 믿어야 좋을지...... 안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럼 믿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너무 그렬듯 하게 말해서 그것이 사실인 것같기도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이 도옥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한 것도 그렇고 당신의 사람됨을 볼 때는 그들이 하는 말이 거짓말같고 도대체 뭐랄까?
반신반의(半信半疑)라 할 수 있지 .]
하고 석연치 않은 도옥의 말에 하림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도 믿지 못한다면 저는 돌아가야겠군요.]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도옥은 상체에 더 힘을 주며 일어나지 못하게 하면서
씨익 웃는 것이었다.
[잠깐, 당신이 이 도옥을 해칠 마음은 없다 해도 양몽환을 구하려는 마음은 있겠지!]
[그것은 이미 여러번 말했잖아요? 그에게서 입은 은혜는 보답해야 한다고.]
[그것도 그렇지만 이제는 혼인파기서까지 써서 남남이 된 관계인데 아직도
그의 생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아?]
[그것은 양몽환 그 사람이 자청해서 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강요하다시피 헤서 혼인파기서에
수인하게 한 것이 아녜요?]
[우리? 우리라니?]
[그럼 우리 두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요?]
[흐...... 흐...... 당신들 부부간의 일에 이 도옥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요?]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도 도옥은 여전히 하림의 상체에 힘을 주며 헤프게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림은 숨이 가빴다.
[왜 관계가 없어요? 당신이 그를 감금했기 때문에 저는 그를 구하려고 한 거에요.
만일 당신이 아니면 그는 혼인파기서에 수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저도 수인하도록
말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 도옥에게 얼마나 깊은 정을 가지고 있다는 거요?]
[그걸 어떻게 말로 해요?]
[흐...... 흐...... 어째 기분이 이상해지고 감동적인데 ......]
하고 빙긋이 웃는 도옥을 올려다 보며 상체를 꿈틀거렸다.
[여하간 당신이 저를 믿지 못한다면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누가 믿지 않는다고 했어? 이 도옥은 당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냐.]
[그러면?]
[이 도옥이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말이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요? 그럼 제가 당신에게 어떻게 하면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요?]
하는 말애 도옥은 일부러 좀 난처한 듯이 표정을 지었다가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지, 으...... 그건 오늘밤 여기서 당신과 이 도옥이 부부의 관계를 맺는다면......
으......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되지. 그러면 당신을 믿고 마음도 놓을 수 있지.]
순간, 하림은 몸을 일으키려다 도옥이 누르는 힘에 그만 다시 눕고 말았다.
그리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나 음성은 부드럽게 했다.
[당신은 벌써 잊었어요? 당신이 패업을 이룩한 후 천하 고수들을 초청한 가운데
정정당당히 예식을 올리자고 했지 않아요
더구나 저는 이미 당신의 부인이 되겠다고 말한 이상 뭣을 그렇게 서둘러요?]
[흐...... 흐...... 이 도옥이 말하려는 것은 바로 그거요.
이왕 이 도옥의 아내가 될 당신인데 시간을 끌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는거요.]
하고 말을 마친 도옥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지면서 번쩍 오른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하림의 두곳 요혈을 짚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 다음 도옥은 빠른 솜씨로 하림이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치우고 가슴 속으로
왼 손을 디밀어 옷을 움켜쥐고는 확! 찢어 내려갔다.
순간, 하림은 전신의 힘이 일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신! 당신이 강제로 저를 욕보인다면 평생토록 당신을 저주하겠어요.]
이미 밝은 촛불 아래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거의 나체에 가까운 하림의
흰 살결이 인어처럼 침대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도옥은 하림의 몸에 걸친 마지막 속옷을 찢으며 음탕하게 웃었다.
[흥! 이 세상에서 이 도옥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요.
거기에 당신 하나쯤 더 미워한대서 별 영향은 없어.]
하면서 유유히 옷을 찢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조금 항거할 수 있었던 힘마저 사라지고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하림이 항거할 수 있는 힘은 이미 도옥의 손에 의하여 요혈이 짚혀 힘을 쓸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드디어 하림의 탄력있는 유방이 드러나고 그 아래의 매끄럽고도 싱싱한 육체가 점차 촛불 아래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도옥은 일시에 하림의 알몸을 보기가 황송한지 유방에서부터 조금씩 아래로 내려쓸며
애무하고 있었다.
하림은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다만 눈을 감고 입술을 마구 깨물뿐 정욕에 불타는 도옥의
손아귀애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제 도옥의 야욕을 채워주어야 할 한 여인으로 변하고만 하림은 일어나는 길로
벽에 머리를 부딪쳐 더럽혀진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도옥은 하림의 벗은 몸을 이리 저리 내려쓸며 애무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도옥의 눈이 점점 붉어지며 숨소리가 높아지고 거의 미친 듯이 하림의 몸을 끌어안는
바로 그 순간, 창문의 유리를 쨍! 깨며 한줄기의 섬광이 번쩍 빛나더니
싸늘한 빛을 발하는 날카로운 물체가 도옥의 눈앞으로 쏜살갈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재빨리 고개를 숙인 도옥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간 물체는 맞은면 벽에
사정없이 꽂히고 말았다.
[앗! 비수!]
벽에 꽂혀 부르르 몇번 떨다 멈추는 물체는 분명히 날카로운 한 자루의 예리한 비수였다.
그 바람에 홱! 정신이 들며 부글거리던 욕정까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도옥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벽에 꽂힌 비수를 노려보았다.
그러던 도옥은 전신에 웅후한 진기률 돋우어 만일을 대비하는 한편 왼 손을 들어 탁자 위의
촛불을 탁 쳐서 꺼버렸다.
그리고는 벽으로 기어가 몸을 숨기고 탁자 옆에 있는 의자를 들어 창밖으로 힘껏 내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우지끈! 땅에 떨어지며 부서지는 의자? 소리에 맞추어 비호같이 들창을 넘어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야말로 황홀한 경지에서 운무(雲霧)의 극치를 마음껏 향락하려던 바로 직전에서 모든 것이
산산이 깨져버린 도옥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오직 비수를 던진 괴한을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
분통이 터지고 애통하기 그지없는 도옥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들창을 넘어 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밤의 어둠뿐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즉시 진기를 새로 돋운 도옥은 땅을 박차고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 왕한상 등이 기거하고 있던 대청의 문이 우당탕 열리며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지붕 위에 을라 서 있는 도옥에게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창문 깨지는 소리며 의자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 큰 일이나 생긴줄 알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목적이 따로 있었고 더구나 이렇게 부하들이 달려와 소란을 피우면 비수를 던진
괴한이 더 몸을 숨기기에 편리할것을 예감했다.
그런데다가 몸을 숨기고 괴한을 찾으려는 자기앞에 나타난 부하가 조금도 반가울리 없는 도옥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한 도옥이 외치는 소리가 차갑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들! 누가 오라고 했어!]
그러자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괴한이 방주 도옥임을 즉각 알게 된 장정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이구동성으로 사죄를 고했다.
[방주님이신줄 모르고......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용서를 비는 말에 약간 화통이 가라앉은 도옥은 조금 음성을 낮추었다.
[어떤 수상한 자를 못보았느냐?]
[수상한 그림자라고는 개미 새끼도 못보았습니다. 방주님!]
그중에 한 장정이 대답했다.
[알았다. 돌아가라! ]
손까지 흔들어 돌아가라는 시늉을 하자 장정들은 알 수 없다는 듯이 돌아서는 것이었다.
장정들을 돌려보낸 도옥은 지붕 위에서 내려와 휘이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장정들의 말대로 이상한 그림자라곤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사라졌던 욕정이 불쑥 솟아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림이 누워 있는 거실로 되돌아가 마악 방문을 열려고 하는 바로 그때였다.
그때 갑자기 도옥의 바로 뒤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얼른 다시 긴장해진 도옥은 홱! 돌아서며 날카롭게 외쳤다.
[누구냐!]
그러자 그 다음 순간, 도옥은 실망하고 말았다.
[왕한상이오.]
왕한상이었다.
일시에 맥이 빠진 도옥은 잠시 여유를 두고 태도를 바꾸었다.
[이리 좀 오시오.]
하는 말에 멈추어 섰던 왕한상은 급히 도옥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분부라도 있으시오? 방주님!]
[별일은 아니지만 그 우씨(于氏) 형제들을 믿을 수 있소?]
무슨 곡절이 있어서 우씨 형제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묻는지는 모르지만 주로 이 집 부근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은 우씨 형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가 생각하며 왕한상은
자기가 알고 있는대로 대답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형제는 모두 우리 천용방을 위해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말에 도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 그렇다면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
혼자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왕한상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도옥을 올려다 보았다.
[혹시 방주께서는 자객(刺客)을 만난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도옥온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이 놀라다 말고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렇소. 그런데 그 자객의 수법이 아주 놀랍단 말이오.]
[그러면 잡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누군지 얼굴도 못보았소. 그래서 우씨 형제의 부하가 한 짓이 아닌가 해서......]
하면서 도옥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우씨 형제를 불러 물어보시면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입으로는 거침없이 말을 했지만 사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물어 본다는 것은 우씨 형제를
그만곰 믿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가 될 뿐 아니라 당사자인 우씨 형제로서도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왕한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도옥을 재촉하지 않고? 도옥 자신이 결정을 내려 우씨 형제에게 물어보든지 말든지
하게 하려고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우씨 형제로 말하면 도옥의 천용방에 가입한지도 얼마 안되는 사람으로서
공연히 의심하는 말을 한다면 금방 천용방을 떠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다 워낙 의심이 많은 도옥을 부채질한다는 것은 믿을만한 부하도 모두 믿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왕한상의 말을 듣고 얼마 동안 혼자 궁리하고 있던 도옥은 조금 생각을 달리한 모양인지
슬쩍 말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니, 물어볼 것까지는 없소. 그 대신? 왕형은 모든 일에 은밀히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라오.
그리고 만일 우씨 형제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채면 지체없이 알려 주시오.]
[예, 예......잘 알았습니다.]
[그러면 왕형! 오늘밤의 일은 우씨 형제에게 말하지 마시오.]
[그렇다면 방주님도 아시다시피 우씨 형제는 이 일대를 경계하는 책임자입니다.
그러니만큼 다른 말은 묻지 않고 경계가 소홀했던 것만 문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소. 내일 아침에 데려오기만 하시오.]
그리고는 몸을 돌려 하림이 누워 있는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왕한상은 돌아서 가는? 도옥을 몇걸음 따라가며
[그럼 여기서 호위라도 해드릴까요?]
하고 충성을 표하는 말에 도옥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아, 그만 두시오. 가서 쉬시오!]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곧장 하림의 방문을 열었다.
그때까지 하림은 나체 그대로의 몸으로 유방을 내놓은채 누워 있었다.
순간, 도옥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즉시 짚은 혈도를 풀어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맹렬히 끓어오르던 욕정이 정신없이 알몸으로 누워 있는 하림을 보자?
싹 가셔버리고 측은한 생각이 드는 도옥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으로 우선 부끄러운 곳부터 가린 하림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젖히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직접 도옥에 의해 몸이 더럽혀지는 위기는 면했지만 자신의 알몸을 그것도 치부(恥部)에
이르기까지 도옥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는 하림은 욕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도 잠깐,
다시 되돌아온 도옥이 이불까지 덮어주며 행동이 돌연 변한 것은 실로 하림에게는 의외의 일이었고
기대했던 것이 정반대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에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꼭 당하는 줄만 알았던 하림은 길게 한숨을 몰아쉬며 도옥을 올려다 보았다.
[웬일이죠? 옷까지 찢어놓고 왜 마음이 변했나요?]
왜 야욕을 채우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듯한 하림의 물음에 도옥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강제로 당신을 이 도옥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도 재미가 없을 것같아서
그만두겠소.]
<이 짐승보다 못한 놈, 꼭 복수하고 말겠다!>
도옥의 말을 들으며 하림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입으로는 여전히 태연을 꾸몄다.
[거짓말, 제가 괴로워한다고 당신 마음이 변했어요?]
[그렇지! ]
그리고는 다시 한번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잘자요. 내일. 아침 일찍 새옷을 보내도록 하지.]
하고는 탁자 위의 촛불을 불어 끄고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침대에서 일어난 하림은 살며시 문을 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정말 도옥이 갔는지 아니면 어디 숨었다가 또 들어올는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별로 이상한 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하림은 안으로 단단히 문을 닫아 걸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숙정 언니! 나오세요.]
그러자 언제 들어와 있었는지 침대 밑에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기어나왔다.
[도옥이 갔어?]
동숙정이었다.
[멀리 갔나봐요. 그런데 그가 마음을 바꾸리라고는 천만 뜻밖이에요.]
[강제로라도 사매의 정조를 겁탈하려다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흥이 깨져버린 탓일 거야.]
하고 앞을 내다보듯 하는 말에 하림은 쓸쓸히 읏었다.
급박한 순간에서 위기를 모면한 하림은 어딘가 허탈해 보였다.
[그런데 왜 언니는 그를 죽이지 않았어요? 침대 옆에 왔을때 손을 써도 되는 걸.]
원망하듯 하는 말에 동숙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사제가 모르고 하는 소리야.
원래 남자라는 동물은 한번 욕정에 눈이 어두워지면 정신없이 날뛰는 법이야.
그런 때에 손을 쓰면 몰라도 욕정이? 식어지고 흥이 깨져 맑은 정신으로 있을 때?
그에게 달려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하림은 알아들을 것같기도 하고 또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려운 것같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어렴풋하게 알 것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체의 몸으로 욕정의 대상이 되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도옥과 같이 있다는 것은 이리나 늑대와 같이 있다는 것과 같아요.
한창 덤빌 때는 제 정신이 아니더군요.]
하며 하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남자는 원래 여자가 잘 주물러 놓으면 꼼짝 못하는 법이지.
햐여튼 사매는 정신을 차려서 도옥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하고 조금 괴로워도 참아야 해.]
[알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어서 양상공만 구해 낸다면 저는 죽어도 좋아요.]
하고 자신의 결심을 말하는 하림을 동숙정은 타이르듯 말했다.
[심사매! 너무 조급히 생각하지 말아요.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정신을 차리고 서로가 살도록 노력해야 해요.
더구나 도옥은 지금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부하들도 사매를 의심하는 눈친데 조급히 서둘러서 도옥을 해치려 한다면
도리어 화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공연히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요.]
그러자 하림은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숙정 언니가 옆에서 좀 도와줘요. 저는 너무 마음이 약한 것같아요.]
[그건 염려말아요. 항상 옆에서 지켜주겠어. 그럼 잘자요. 나는 또 가봐야겠어.]
그러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던 동숙정은 곧 말을 이었다.
[심사매! 이것만은 명심해 딥야 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림도 따라 일어서며 귀를 세웠다.
[무슨 일인데요?]
[그것은 좀 힘들겠지만 도옥과 그의 부하들을 될 수 있는 한,
접촉하지 못하도록 해야 돼. 그래서 서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야.]
[알겠어요.]
간단히 그러나 힘있게 대답했다.
도옥에 의해 부서진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밖의 동정을 살피던 동숙정은
가볍게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튿날 두 명의 시녀가 가지고 온 새옷으로 갈아입은 하림은 흩어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때 문밖에서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심소저! 들어가도 되겠소?]
하림은 급히 몸단장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밖에는 왕한상이 서 있다가 허리를 굽혔다.
즉시 하림도 생긋 웃었다.
그것은 동숙정이 하던 말을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하림을 의심하고 있다는 왕한상을 잘 대해줘야 할 것같았다.
[들어오세요. 왕 부방주(副幇主)이시군요.]
그러나 왕한상은 웃지도 않고 손부터 흔들었다.
[우리 천용방에는 방주 한분뿐이오. 부방주는 없소.]
[그럼 어떻게 부르면 되죠?]
[이 늙은이는 천용방의 호법수령(護法首領)이라 부르오.]
[아! 그러세요? 그럼 호법수령님 들어오세요.]
하는 말에 왕한상은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펴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하림이 권하는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왕한상을 의자에 앉힌 하림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또 한번 생긋이 웃었다.
[호법수령이란 무슨 일을 하는 직책인가요?]
하고 묻자 왕한상은 점잖게 헛기침을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법수령이란 직책은 쉽게 말해서 방주님을 경호하는 모든 부하들을 통솔하는 직책이라 할 수 있소.]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예전에는 왕수령님을 도옥이 숙부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오.]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하림은 공연한 말을 했구나 생각하며 왕한상의 안색을 살피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용건을 물어 이상해지는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자 왕한상도 안색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본인은 심소저를 모시고 떠나려고 왔소.]
하는 말에 하림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또 가는 거죠?]
[그건 본인도 모르는 일이오. 알고 싶거든 직접 방주님께 물으시오.]
하고는 하림이 말하기 전에 말을 계속하는 왕한상이었다.
[자 속히 행장을 수습하시오. 본인은 밖에서 기다리겠소.]
하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때 하림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디를 가는지는 모르지만 도옥이 직접 오지 않고 왕한상을 보냈을까 하는
의심과 불안이 머리속에 가득했지만 곧 일어나 행장을 수습하고 장검까지 등에 매었다.
그리고 문을 나섰을 때는 왕한상이 뒷짐을 쥔채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럼 가시죠. 왕수령님!]
생긋이 웃으며 하는 하림의 말에 왕한상은 대청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방주님의 분부가 있어야 떠날 수 있소.]
하는데 금환검을 멘 도옥이 나오고 그 뒤로 승일청과 두 명의 장정이 역시 장검을 메고
뒤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순간, 도옥의 얼굴 표정을 살핀 하림은 지금 그가 무슨 난관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도옥은 약간 이마를 찌푸리고 무슨 일인가에 화가 났는지 좀전에 볼 수 없었던
우수마저 띄우고 있었다.
도옥이 천천히 다가오는 앞으로 왕한상은 다가가며 주먹을 마주 쥐어 보였다.
[모든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방주님! ]
하고 아뢰는 왕한상의 말에 도옥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습니다. 그럼 떠나도록 하시오.]
하고는 뒤에 따라오는 두 명의 장정을 돌아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두분이 오랫동안 고생하며 이루어 놓은 기업(基業)이 무너지게 되어 심히 섭섭할 것이오.]
하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위로의 말을 하자 왼쪽의 장정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하였다.
[저희 우방(于方)과 우비(于飛) 두 형제는 방주님께서 왕림하여 주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까짓 기업쯤 다시 하면 될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방주님께서 어떠한 분부를 내리셔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본좌(本座)도 마음이 놓이오.]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 뒤를 하림이 따르고 왕한상 이하 여러 부하들이 계속 뒤따라 순식간에 오십리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오십리 길을 가는 동안에도 모두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걷기만 하는 것이 하림의 눈에는
이상하기만 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부지런히 도옥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도옥 일행이 다다른 곳은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이었다.
얼마나 가야 갈대밭이 끝나는지 눈이 아물아물거리도록 수 없이 우거진 갈대밭에는
인적도 없고 다만 갈대밭 가운데에 수레가 지나갈 만큼 넓은 길이 뱀처럼 구불구불 뚫려 있을 뿐이었다.
갈대밭에 다다른 도옥은 끝없이 우거져 있는 갈대숲을 바라보며 혼잣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갈대도 꽤 많군. 십리 길은 되겠는데......]
하는 말에 우방이 한 걸음 나서며 설명했다.
[원래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거의 사오천경(四五千頃)이 넘는다고 합니다. 방주님!]
[음......훌륭한 곳이군......]
잠깐 말의 여운을 두었던 도옥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이런 곳에다 소림사의 중놈들을 유인해 놓고 불을 지르면 몰살시킬 수 있겠는데......]
하고는 싸늘하게 웃음을 흘리며 먼저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갈대밭 속을 거의 백장(百丈)이나 말없이 들어갔을 바로 그때였다.
홀연, 조용하기만 하던 갈대발 사면에서 갑자기 휘파람소리,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사면팔방이 요란하고 시끄러웠다.
그러나 키를 넘는 갈대가 우거져 있어서 어느 누가?
어느 곳에 숨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순간, 도옥은 허리를 굽히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낮은 음성으로 소리쳤다.
[모두 흩어져 경계하시오.]
하고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날카롭게 주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장(一丈)? 앞도 볼 수 없게 갈대가 우거져 있었다.
그때 하림이 낮은 소리로 도옥에게 물었다.
[적들이 매복하고 있어요?]
[그런 모양이오. 잠깐 주위를 살피고 행동합시다.]
그러는 동안 요란스럽게 들려오던 휘파람소리와 호각소리가 약속이나 한듯이
일제히 뚝 그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옥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왕한상을 불렀다.
[왕형! 지금 이 휘파람소리는 적들이? 위세를 떨치려는 계략 같소.
그렇지? 않고 우리들을 공격하려면 아무 소리없이 기습할 것이지
이렇게 휘파람소리를 요란히 내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소?]
[방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도옥은 귀를 세우고 날카롭게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주위는 휘파람소리도 호각소리도 없이 잠잠해지고
바람에 흔들려 부딪치는 갈대소리만 사락사락 들려올 뿐이었다.
이에 약간 안심한 도옥은 다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비바람이라도 몰아치는 듯 갑자기 쏴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을 때는
도옥 일행의 앞 길을 막는 무수한 화살이 사면 갈대밭 속에서 빗발치듯 날아와 머리 위로
마구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도옥과 왕한상 그리고 승일청은 제각기 무기를 꺼내들고 강한 검풍과 무서운 장풍을
일으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무수한 화살을? 모두 빗나가게 하고는 장겅과 금환검을 휘둘러
화살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검막(劍幕)을 쳤다.
그리고 도옥은 급히 주위를 살피고는 왕한상을 불렀다.
[갈대가 우거진 숲에서는 화살을 날리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면 주위 이장(二丈)거리에 적들이 매복하고 있음이 틀림없소.]
하는 것이었다. 과연 도옥이 말하는 이장 밖에는 갈대밭이 아닌 평지였다.
일단 말을 마쳤던 도옥은 왕한상과 승일청을 번갈아 보며 다시 말을 계속했다.
[두 분께서는 이 주위를 살펴 어떤 놈인지 한 두어 놈 사로잡으시오.]
하자 왕한상과 승일청은 즉시 주먹을 쥐어보이고는 갈대밭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대밭 속은 밖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발디딜 틈도 없이 갈대가 자라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고사하고 거의 물구덩이와
갈이 질퍽질퍽한 진흙으로 깔려 있는 갈대밭이어서 아무리 무공이 웅후한 왕한상이나
승일청이라 하더라도 박차고 퓔 재간이 없었다.
한 발이 빠지면 빠진 발부터 꺼내놓기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고 빽빽이 눈앞읕 가리우는
갈대로 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러나 안간힘을 써서 얼마를 더듬어 들어가는 그들의 앞에서 갈대가 스치는 듯
사르륵 하는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이 숨어 있던 적이 인기척에? 놀라 도망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앞에 적이 있다 해도 사로잡을 도리가 없는 왕한상과 승일청은
할수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한편, 갈대밭 속에서 어기적어기적 기어나오는 왕한상과 승일청을 지켜보던
도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릎까지 진흙에 빠져 허덕이다 나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릎까지 빠지는 습지(濕地)에서는 경신술 재간도 소용없음을 알고 있는 도옥은
잠잠히 웃고는 다음 행동을 분부했다.
[수고했소. 좀 더 두고 적세를 살핍시다.]
하는 말에 왕한상은 머리를 툭툭 치며 갈대밭을 가리켰다.
[무릎까지 빠져 경신술도 쓰지 못했습니다.]
빈 손으로 돌아온 것을 미안해 하자 도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럴거요. 두 분이 갈대밭으로 뛰어들 때 본인도 그런 생각을 했소.]
그제야 왕한상도 빙긋이 따라 웃다가 정색을 하며 도옥을 바라보았다.
[만일 적들이 이 갈대밭 속에 화살이나? 독침을 숨겨 두었다면 좀 귀찮을 것같습니다.
저의 의견으로는 이 길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이 좋을 것같은데
방주님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하고 의견을 내놓는 말에 도옥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소. 이미 우리들은 백장 길이나? 지나왔소.
만일 적들이 기습하려고 했다면 벌써 당했을 것이오.]
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겨 놓는 것이 뒤로 돌아갈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갔을까. 근 십장(十丈)정도의 길을 왔을때였다.
구불구블 이어진 길 한가운데에 하나의 말뚝이 박혀져 있고 그 말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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