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20. 폭풍전야의 등가보(鄧家堡)

오늘의 쉼터 2014. 10. 24. 17:28

제3권

 

20. 폭풍전야의 등가보(鄧家堡)

 

 

양몽환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들 무술인들은 마땅히 싸워야겠지만 무고한 백성들까지 화를 당하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비록 도옥의 간계가 동사매의 말대로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양대협의 말대로 백성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말이오.]
등고강은 바싹 귀를 세우고 양몽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대략 이러합니다.

즉 등가보의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모두 피난시켰다가 등가보가 평안해지면 다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양대협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오?]
[모든 사태가 이 양대협 때문에 비롯된 것인데 어찌 피하겠습니까?

혼자라도 등가보를 지킬 작정입니다.]
[천만에! 어찌 양대협 때문이겠소?

더구나 양대협의 결심이 그러하시다면 말씀대로 부녀자와 어린애 그리고
늙은이들은 피난시키고 장정들은 남아서 등가보를 지키게 하겠소이다.]
그러자 양몽환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됩니다. 장정들이 남는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한 사람의 장정이 남으면 한 사람이 죽고 열 사람의 장정이 남으면 열 사람이 희생될 뿐입니다.

그러니 모두 피난하게 하시오.]
[양대협의 말도 알아듣겠소.

그러나 이왕 피난을 시키려며 양대협도 피난하시오.

이 늙은이로 말하면 이 등가보에서 나고 등가보에서 늙었소이다.

현재 무술계의 추세로 보아 매우 험악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소.

이러한 때에 양대협께서는 몸을 보중하셨다가 위험한 국면을 타개하셔야 할 몸이오.

굳이 등가보에 남아야 할 사람은 바로 이 늙은이란 말씀이오.

이제 몸이 무엇이 두렵겠소? 등가보에서 태어나 등가보에 뼈를 묻는 것이 이 늙은이의 소원이오.

어서들 떠나시오.]
비장하고도 감개무량한 말이었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당연히 혼자서라도 최후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발휘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아닙니다. 등보주님께서는 사태를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어허, 무슨 말씀이시오? 이 늙은이가 지키겠다는 ......]
[등보주님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겠습니다마는 만일 이 양모인까지 등가보를 떠나면

도옥이 더욱 잔인성을 발휘해서 등가보 주위의 이십리(二十里)를 잿더미로 만들어

화풀이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적을 상대해서 싸우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선 백성들을 피난시키십시오.

다음에 다시 의논합시다.

저도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하고 거의 결정적인 말처럼 단언을 내렸다.

그러자 등고강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대협의 의견이 그러시다면 이 늙은이도 더 말하지 않겠소이다.

말씀대로 백성들을 피난시킬 수 밖에 없구려.]
하며 탄식했다.
[고맙습니다. 잘 생각해서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백성들을 피난시키는 일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속히 분부를 내리십시오.]
하고는 등고강과는 말이 끝났다는듯 몸을 돌려 하림과 동숙정에게 분부를 내렸다.
[당신과 동사매께서는 영공 화상을 잘? 감시하시오.

우선 그의 동태를? 살펴서 내환(內患)부터 없애야 하겠소!]
하고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거실로 돌아갔다.
결정적인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거실로 돌아온 양몽환은 심기가 편치 못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생각에 잠겼던 양몽환은

잠깐이라도 누워 눈을 붙일까해서 침대를 더듬다 말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침대 위에는 언제부터 들어와 있는지 새까만 흑의로 몸을 감싸고 얼굴에도

역시 검은 보자기로 복면한 괴한이 두 눈만 반짝거리며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양몽환이 방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와 문을 열고 들어와 방안을 서성거리는

기척을 느꼈으련만 침대 위의 흑의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협이고 담이 큰 양몽환도 잠시 정신이 아찔하고 등골이 오싹했다.

이마에서는 진땀도 흘렀다.

의외에도 너무나 놀라운 충격이었다.
순간, 한 걸음 물러서며 전기를 운집했다.

눈을 부릅뜨고 흑의인을 노려보는 양몽환의 머리속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이 등가보의 방비가 허술한 것도 그렇지만 방안에까지 들어와 앉아 있는 흑의인을

나는 왜 일찍 발견하지 못했는가? ......>
하면서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배에 힘을 주었다.
[누구요? 당신은!]
그러나 흑의인은 숨소리 하나 없었다.

숨소리 뿐 아니라 앉은 자세조차 고치지 않는데는 양몽환도 긴장했다.

그리고는 불끈 쥐었던 주먹에 진기를 넣으며 후려갈겼다.
그러나 이 어찌된 일인가?
양몽환이 묻는 말이나 후려치는 주먹을 피하지도 않고 앉아있던 흑의인은

양몽환의 주먹이 거의 가슴에 닿을 듯 하는 순간,

흑의인의 오른 손이 번개같이 위로 올라가며 양몽환의 오른 손맥혈을 후려갈기고 마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순간적으로 역습을 당한 양몽환은 재빨리 오른 손을 거두어 들이며 두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흑의인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을 두 걸음 물러서게 한 흑의인은 손을 올려 자기의 얼굴을 가렸던

검은 수건을 벗는 것이었다.
[놀라지 말아요. 나는 독용부인이 아니에요.]
눈을 크게 뜬 양몽환은 탁! 맥이 풀렸다.

틀림없는 조소접 바로 다정선자의 음성이었다.
[조소저!]
하고 가만히 부르는 양몽환의 소리에 조소접은 그대로 앉은채 침대에서

뛰어내려 양몽환 코앞에 바싹 마주서는 것이었다.
그제야 양몽환은 정상으로 돌아가 운집했던 진기를 풀었다.
[조소저인줄 모르고...... 잠시 기다리시오. 불을 켜겠소!]
그러자 조소섭은 손을 흔들어 불을 켜지 못하게 제지하는 것이었다.
[필요없어요. 캄캄한 밤, 절간 앞에서는 독용부인과 잘도 이야기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겁이 나세요?]
순간, 양몽환은 가슴이 써늘했다.
[알고 있었군!]
[기분 나쁜가요? 그까짓 독용부인의 무공이 뭐가 대단하다구.

흥! 내가 뒤를 미행해도 눈치조차 못채는 여자를!]
[그럼, 조소저도 등가보를 공격한다는 도옥의 계획을 알고 계시겠군!]
[물론, 알고 있어요.]
이러한 때에 양몽환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서먹서먹 하기도 하고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 같기도 해서 마음에 착잡한 파문이 일어났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어 모든 생각을 털어버렸다.
[조소저도 알고 있다니 하는 말이오만 만일 도옥 일당이 등가보를 공격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걱정이오.]
[그러시겠죠. 피라미들만 있으니......]
시큰둥하게 말하는 조소접 역시 양몽환 못지않게 착잡해 보였다.
그러나 양몽환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지금 등가보에 있다는 고수들이라는 사람들이 별로 재간도 없는 사람 뿐이라는 것을

조소저도 알고 있는지......]
그러자 조소접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침대에 걸터 앉더니 양몽환에게도 앉으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 입을 열었다.
[좋은 계략이라도 있으신가요?]
하는 것이었다.
[특별한 계략은 없습니다.

단, 등가보의 모든 사람들을 피난시키고 나 혼자 도옥과 겨루어볼 생각입니다.]
[뭐라구요? 그렇게 한다면 죽음을 스스로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이왕 나의 운명이 도옥과 겨루어야 할 운명이라면 그를 죽이고 나도 죽는 것이 옳은 일이오.

그렇게 되면 원이 없겠소.]
[필부지용(匹夫之勇)은 취할 바가 못돼요.]
하는 그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며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순간, 긴장했던 양몽환과 조소접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방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다름아닌 하림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인지 장검까지 들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하림은 주위가 캄캄하여 양몽환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양몽환이 촛불을 켜자 방안이 환해지면서 뜻밖에 조소접을 발견한 하림은 매우 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극히 짧은 순간,

두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것이었다.
그때, 양몽환이 하림을 불렀다.
[지금 조소서와 등가보의 방비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오.]
그제서야 하림은 청초한 얼굴에 약간 미소를 띄웠다.
[조소저! 잘 왔어요. 좀 도와줘요.]
하며 조소접 옆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태도에서는 털끝만치의 질투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을 켜지 않은 방에서 조소접과 마주앉아 있던 양몽환은

하림의 출현으로 약간 불안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박한 태도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러자 조소접도 좀처럼 볼 수 없던 웃음을 방긋 지어보이며 자기 옆에 앉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여기 앉아요.]
하고는 하림이 앉기를 기다려 밤중에 양몽환을 찾아오게 된 것을 사과했다.
[사정이 너무 급해서 바로 찾아오느라고 심사매에게는 인사도 못했군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보다 일이 너무 위급한 것이 걱정이에요.]
하림의 출현으로 다시 어색했던 방안의 분위기는 또 하림의 재치로 분위기가 전환되어

세 명은 곧 등가보의 방비 문제로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조소접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사 도옥과 생사를 겨룬다해도 준비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피차 무공이 비슷한데 무슨 준비가 필요하겠습니까?]
[이렇게 하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그러자 양몽환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조소저, 정말 도와주겠소?]
[별로 힘이 될지는 모르지만......]
말끝을 맺지 못한 조소접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었다.

그러는 그녀의 시선에는 감격해 하는 양몽환의 모습이 너무나 크게 보였다.
[때로는 일부러 당신을 곤경에 빠지게 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모두 제가 못난 탓이에요.]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또 다시 방안의 분위기는 숙연해지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를 해서 조소접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하림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는 것같았다.
한편, 양몽환도 지금까지 도옥과 연결시키던 것을 생각하면 조소접에게 미안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음 ......내가 공연한 오해를 했군......>
하면서도 좀처럼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꿀 화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역시 하림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뜨렸다.
[아, 정말 잊고 있었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양몽환은 급히 하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엇을?]
[고불 영공이 달아났어요.]
[뭐라구? 도망?]
[그래요. 지금 동언니가 쫓아 나갔어요.

저는 당신에게 알리려고 왔는데 조소저를 만나는 바람에 잊고 있었어요.]
양몽환은 벌떡 일어났다. 화난 얼굴이었다.
[그럼, 당신은 여기서 조소저와 이야기나 하고 있어요.]
하고는 하림의 손에 든 장검을 빼앗아들고 급히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소섭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가지 마세요.]
[?............]
휙 돌아선 양몽환에게 조소접은 다시 말을 이었다.
[곧 돌아올 거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조소접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 고불 영공이란 자의 무공이 악랄하여 동사매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그러나 조소접은 그런 것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태연히 말했다.
[동사매의 무공도 대단해요. 아마 영공이란 자가 동사매에게 덤벼들지 못할 거에요.]
양몽환은 조소접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어떻게 조소저는 그런 것까지 알고 있소?]
[그뿐 아니라 다른 것도 알고 있어요.]
[다른 것?]
[도옥이 나에게 등가보를 공격할 때 북쪽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물론 거절했지만, 저는 독용부인보다 더 자세히 도옥의 계획을 알고 있어요.]
[?......]
[그리고 등가보의 백성들을 피난시키겠다는 당신의 의견은 좋아요.

그러나 조심해서 피난시키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밤 삼경(三更)에 다시 와서 하겠어요.]
하면서 몸을 일으킨 조소접은 옆에 앉아 있는 하림의 손을 꼭 쥐는 것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일 다시 오겠어요.]
하고는 몸을 날려 등가보를 떠났다.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떠나가는 조소접이었다.
그때까지 엉거주춤하고 서 있던 양몽환은 조소접의 모습이 어둠속으로 사라지자

가볍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당신은 가서 자요. 어떻게 되겠지 ......]
[당신은?]
[동사매를 찾아 봐야겠소.]
하는 바로 그때, 방문 앞에서 동숙정의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나 여기 있어요!]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동숙정이 들어왔다.
그러자 하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요? 영공화상(靈空和尙)은 ......?]
하는 하림의 물음에 동숙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는 것이었다.
[내참 우스워서...... 글쎄 그 작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등가보를 뛰어나가서는

휘이 한바퀴 돌고는 그냥 들어오지 않겠어요? 내 참......]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내밀며 웃는 동숙정을 따라 빙긋이 웃는 양몽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소저의 말이 맞는군......]
조소접이 하던 말을 생각하며 역시 혀를 찬 양몽환은 이마를 찌푸렸다.
[분명히 영공도 도옥의 간계에 빠져 이 등가보까지 온 모양이오.

무슨 목적으로 도옥이 영공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우리들의 동태를 지켜보게 하고 구대문파의 무술인들을 선동할 목적으로 온 것 같소.

그렇게 되면 모든 고수들이 우리들에게서 멀어질 위험도 없지 않소!]
[그렇다면 영공을 먼저 없애버리면 걱정없지 않겠어요?]
동숙정의 말에 양몽환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그런 방법도 있지만 그놈을? 역이용(逆利用)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소?

그렇지 않아도 우리 등가보의 세력이 약한데......]
[일테면 영공을 설득시켜 거짓 정세를 도옥에게 알려주자는 말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허위 정보가 도옥에게 들어간다면 우리가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영공화상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하고는 동숙정의 귀에 입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양몽환의 귓속말을 들은 동숙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어요.]
하고는 문밖으로 급히 뛰어나갔다.
동숙정이 뛰어나간 다음 양몽환은 하림에게도 분부를 내렸다.
[당신은 좀 쉬어야겠소. 아무래도 나를 도와줄 사람은 당신과 동사매밖에 없으니......]
[알겠어요. 그러나 육보(六寶)도 있지 않아요? 육보의 한발쓰는 무공이 대단해요.]
[그래야 세 명밖에 더 되오?]
그러자 하림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요. 이런 때 란(蘭)이 언니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것은 지금의 상태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괄창산까지의? 거리가 먼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주약란이

지금 두문불출하고 있는데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양몽환과 하림은 각기 자기대로의 생각에 잠긴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튿날.
저녁부터 등가보의 백성들은 피난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야음(夜陰)을 타서 피난길을 떠나는 등가보의 백성들은

누구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걸음을 옮겼다.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대로 입을 꼭 다문채 부모의 손을 잡고 총총 등가보를 빠져나갔다.
육중한 대문 옆에 서서 피난길을 떠나는 등가보의 백성들을 바라보고 있는 양몽환의 마음은 무거웠다.
<...... 만일 내가 이곳 등가보에 오지 않았던들...... 아니 차라리 나 혼자의 힘으로?

등가보를 지킬 수만 있어도 이들에게 고난의 피난길을 떠나지 않게 할 수 있으련만......>
무겁고 우울한 심정으로 성벽에 기대선채 생각에 잠겨 있는 양몽환을 가만히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등고강이었다.
도적을 막기 위하여 전재산을 들여 등가보에 성벽을 쌓았다는 보주 등고강, 죽어도

 뼈를 등가보에 묻겠다는 등고강 노인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피난길을 떠나는 마당에서도

또 등가보가 잿더미로 변한다는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태연자약했다.
흰 수염을 바람에 나부끼며 미소마저 띄우고 있는 등고강을 양몽환은 차마 마주 바라볼 수 없었다.
[등보주님!]
하고 허리를 굽혀 인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등고강은 태연한 표정으로 양몽환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이었다.
[양대협! 상심마시오. 지금 등가보에 남아 있는 장정은 모두 백십구 명이오.

그만하면 등가보를 수비할 수는 있지 않겠소?]
되도록 양몽환의 마음을 위로해주려는 말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자기의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것같았다.
<한 명도 남기지 말라고 했는데......>
하면서도 등고강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남기를 원했습니까?]
[한사코 남겠다고 하기에 할 수 없이 이 늙은이가 남으라고 했소이다.]
[잘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모쪼록 등보주님께서 그들을 잘 배치시키십시오.]
[알았소. 그리고 등가보에 있는 수 십개의 연주갑나(連珠匣拏)와 독침이 달린 매화침통(梅花針筒)

그리고 궁천건(宮天健)이 만든 세 통의 독약을 모두 사용하도록 하겠소.]
[좋습니다. 도옥이 독(毒)으로 공격하는 한 우리들도 독으로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등가보에 모인 구대문파의 고수들에게도 사태를 설명해서 있고 싶은 사람은 있고

가고 싶은 사람은 가라고 해두었소이다.]
[잘하셨습니다. 그럼 등보주님이 살펴서 일을 처리하십시오. 저는 밖을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등고강과 헤어진 양몽환은 그 길로 자기의 거실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하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이오?]
[잠도 오지 않고......조소저도 올 때가 되고 해서......]
둥근 탁자를 가운데로 하고 마주 앉은 부부는 오랜만에 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때가 때인만큼 각기 불안과 초조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월산장에서도 일찍이 없었던 둘만의 시간이지만 맺힌 회포를 풀기에는 주위가 너무나 위태로웠다.
말없는 가운데 촛불은 빨간 불꽃을 날리며 타고 있었다.
점점 긴장과 초조감이 더해가는 침묵의 시간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하림은 한숨을 쉬며 양몽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웬일일까요? 삼경이 지났는데...... 설마 조소저가 약속을 잊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자 양몽환도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약속을 잊었다면 모르지만 알고서도 오지 않는다면 큰 일이오......]
[설마 알고서도 오지 않을라고요?]
[모르지...... 혹시 도옥에게 붙잡혀 있는지도......]
[그럼, 찾아봐요......]
[조소저를? 어디에 있는줄 알고?]
[그렇군요. 거처를 알아둘걸......어쩌면 좋아요?]
초 한자루가 거의 타들어가도록 기다리는 조소접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겠지, 오겠지......하고 기다리던 양몽환의 얼굴에도 초조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도옥에게 붙잡혀서 못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양몽환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네 개의 눈은 가물가물 타들어가는 촛불만 응시한채 아무 말이 없었다.
바로 그때, 문 밖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그러나 들어서는 사람은 그렇게 기다리며 애태우던 조소접이 아니었다.
땅에 끌릴듯이 치렁치렁 늘어진 검은 치마에 궁녀(宮女) 형으로 머리를 틀어올린 여인은

한 손에 옥피리(玉簫)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조소접인줄 알고 웃음을 띄웠던 양몽환과 하림의 얼굴에는 일시 띄웠던 미소가 사라지고 말았다.
[두 부부가 다정히 앉아 있군요. 누구를 기다리시는가요?]
순간, 양몽환과 하림은 거의 동시에 가늘게 외쳤다.
[앗, 옥소선자(玉簫仙子)!]
틀림없는 옥소선자였다.

주약란과 같이 천기석부에 있다는 독용부인의 사매인 옥소선자가

지금 조소접을 기다리는 양몽환 부부앞에 실로 꿈같이 나타난 것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양몽환은 주먹을 쥔 두 손을 마주대고 읍했다.
[옥소소저! 오랜만입니다.]
그러자 옥소선자도 역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벌써 오년이 됐군요. 그동안 두분께서도 안녕하셨어요?]
수인사를 끝낸 양몽환과 하림은 옥소선자에게 의자를 권하고 마주 앉았다.
[그곳 주소저도 안녕하신가요?]
[예, 팽사매도 별고 없이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요?]
[별로......]
[그럼, 왜 피난들을 가는지요?]
양몽환은 침통한 낯빛으로 옥소선자를 바라보았다.
[도옥이 다시 강호에 나타나서 풍파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이 등가보를 도옥이 공격한다고 해서.....]
말끝을 맺지 못하자 옥소선자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 일 때문에 아씨께서 속히 가 보라고 해서 달려오는 길이에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과 하림의 얼굴은 촛불만치나 더 밝아졌다.
[어떻게 알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묻는 양몽환의 물음에 옥소선자는 다만 생긋이 웃을 뿐

탁자 위에 켜진 촛불을 바라보는 하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확실히 눈치가 빠른 옥소선자였다.

 예전에 비해 더 아름다워진 것같았다.
[예. 그래요.]
[누군데?]
[옥소 언니도 잘 아는 조소저에요.

오늘밤 삼경에 와서 대적할 의논을 하자고 했는데 아직 안오는군요.]
그러자 옥소선자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몽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곳의 형편이 어떻죠? 대적할 준비는 되었는지요?]
연이어 묻는 말에 양몽환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극히 위험한 처지이지만 이렇다할 준비가 없습니다.]
[좀 더 자세히 들려주세요. 이곳 사정이 어떤지?]
하고 묻는 옥소선자의 표정은 야무지기만 했다.
한때는 양몽환을 사랑했고 양몽환을 위해 설삼과를 구해주던 옥소선자이지만

지금은 주약란의 부하가 되어 예정 감정을 버리고 구원자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양몽환은 잠시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았다.

꿈만 같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대로 좋았다.

우선 지금의 형편을 자세히 들려주어서 위기를 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린 양몽환은 비교적 자세하게 그간의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서 도옥은 강호의 고수들을 매수하여 이 등가보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하고 말을 끝마쳤다. 시종 조용히 양몽환의 설명을 듣고난 옥소선자는 꼭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저는 즉시 천기석부로 되돌아가 이곳 사정을 아가씨에게 전해드려야 하는데.

그러나 지금의 형세로서는 제가 다시 천기석부로 돌아갔다 올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만큼 저는 여기 남아서 양상공을 도와드리겠어요. 얼마나 힘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하고 천기석부에 되돌아가지 않을 뜻을 밝혔다.
[그러면 천기석부에서 주소저가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가지 않아도 돼요. 저를 이곳에 보낼 때 아가씨께서는 만인 일이 위급하면 오지 말고

양상공을 도우라고 분부했어요.

다만 아가씨께서 궁금히 여길지도 모르니 양상공께서 서찰(書札)을 보내세요.

 여기 아가씨의 서찰이 있어요.]
하면서 옥소선자는 한 통의 서찰을 품속에서 꺼내 양몽환에게 건네주었다.
[저에게요?]
건네주는 서찰을 받아든 양몽환은 급히 겉봉을 뜯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하림은 감격한 어조로 주약란을 칭찬했다.
[참으로 란이 언니는 비범해요.]
하는 말에 옥소선자가 말했다.
[맞아요. 일반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있어요.]
자못 칭찬은 아끼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양몽환은 겉봉을 뜯고 한장의 편지를 펼쳐들었다.
편지는 첫머리부터 양몽환, 심하림, 이요홍의 안부를 묻고 아래와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 근 오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한번도 뵈올 기회가 없었습니다.

늘 뵈옵고자 마음 속을 빌고는 있었습니다만 인간사(人間事)가 그렇듯이 기연(奇緣)이 닿지 않는군요.

서로의 숙명(宿命)이라 여기며 지금까지 소식 한자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근래 들리는 소문이 하도 분분(紛紛)하기에 오늘 옥소선자를 양상공께 문안차 보냅니다.

옥소선자가 돌아오면 사연을 알리라 믿습니다.

요사이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소접(趙小蝶)이 자칭 다정선자(多情仙子)라고 하며

강호를 누빈다 하고 도옥이 죽지 않고 나타나 무술계를 뒤흔들고 천용방을,

재기(再起)시켜 강호를 제패하리라는 소문이어서 양상공의 안위가 염려스럽습니다.
옥소선자 편에 몇자 문안을 드리오니 양상공께서 자세한 일을 알려주기 바랍니다.

보중하십시오. 주약란 올림. >

 

서찰을 다 읽은 양몽환은 옥소선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반갑습니다. 주소저께서 이토록 염려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소저께는 회답을 부탁했는데 옥소
사매가 여기에 머무르신다면 어떻게 회신을 보낼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옥소선자는 생긋이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염려마세요. 보낼 수 있어요.]
양몽환은 즉석에서 지묵(紙墨)을 꺼내 근간의 사정을 되독록 상세히 적고 끝으로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도 썼다.
< ......지금 이 양모인은 노부모(老父母)님을 이요홍(李瑤紅)처에게 부탁하여 한적한 곳으로?

모시게 하고 지금은 하림과 함께 등가보에 와 있습니다.?

수일내에 도옥이 공격해 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이 양모인은 장래 강호의 평안을 위해 사생을 결하고 승패를 겨룰 결심입니다.

모쪼록 주소저께서도 이 양모인에게 성원(聲援)을 보내주리라 확신하며

주소저의 행운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양몽환. >


쓰기를 마친 양몽환은 피봉을 붙여 옥소선자에게 건네주었다.
양몽환에게서 주약란에게로 보내는 회신을 받은?

옥소선자는 회신을 품속에 간직하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서......내일 아침 일찍 보내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낼 수 있습니까?]
의아해서 묻는 양몽환의 말에 옥소선자는 잔잔히 웃을 뿐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바꾸었다.
[도옥이 동서남북 네 곳에서 일시에 공격한다면 네 곳의 지휘자는 어떤 인물들인가요?]
[확실치 않습니다만 도옥 자신이 한 방위를 맡은 것은 자명한 일이고

다른 한 방위는 독용부인이라는 여자가......]
하는 바로 그때, 옥소선자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 했다.
[독용부인이라구요?]
순간, 양몽환은 아차했다. 그것은 독용부인이 바로 옥소선자의 사매가 된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 바로 옥소선자의 사매가 되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양상공이 알고 계시죠?]
[몇번 만나본 일이 있습니다.]
[그래요? 양상공께 말하던가요?]
[그렇습니다.]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것은 모르겠군요. 거처를 밝히지 않으니......]
옥소선자는 오랜만에 듣는 사매의 소식에 반가움을 나타냈다가도 금방 어두운 그림자가 지나갔다.
[많은 고생을 했을 거에요. 동떨어진 섬에서 홀로 쓸쓸히 지내느라고......

그런데 도옥의 계략에 빠진 모양이군요......

오랫동안 우리 사매는 만나지 못했어요. 찾아가 봐야겠어요.]
하고는 옥피리를 힘있게 쥐고 그 길로 돌아서며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순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독용부인을 무슨 방법으로 찾을까하는 의아심을 품고?

만류하려고 급히 뛰어 나가던 양몽환은 옥소선자의 뒤를 따르다 말고 그대로 돌아서고 말았다.

그것은 옥소선자의? 재빠른 동작이 눈에 뜨일만큼 진전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진전했군! 저만한 무공을 지녔다면 어디서든지 독용부인을 찾을 수 있겠군.>
되돌아 방으로 들어온 양몽환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옥소선자도 걱정이지만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조소접이 더욱 걱정이었다.
[이미 사경(四更)이 지났는데......]
그러자 하림도 걱정했다.
[이상하죠? 조소저가 그토록 약속을 어길리는 없잖아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에요.]
[그런 것 같소. 필시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오.

그 도옥이란 자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조소저가? 아직 모르는 모양이오.]
[그럴지도 몰라요.]
[더구나 이 등가보를 공격하려는 것도 나 한 몸을 노리고 도옥이 꾸민 짓인 줄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오.]
[그러나 지금까지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이번에도 도옥은 헛수고를 할거에요.]
[왜?]
[지금까지 모두 당신에게 패하지 않았어요?]
[이번만은 달라요. 등가보의 백성들을 몰살시킨다고 하는 것도 아마 내가 피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셈일거요.
거기다가 이번 도옥 일당의 공격에는 정말 승산이 없는 우리들의 형편이 아니오?]
[아니에요. 조소저도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했고 또 옥소 언니도 오지 않았어요?

비록 도옥이 많은 고수들을 이끌고 온다 해도 겁낼 것은 없어요.]


양몽환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글쎄...... 장담할 일은 못되지만......]
하고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옥소선자 한 사람이 더 도와준다 해도 도움이 되지는 못할거요.]
하는 말에 하림은 더 말하지 않고 양몽환에게로 다가와 그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하는 말에 화내지 마세요, 네?]
[무슨 말인데?]
[조소저는 당신을 좋아하나 봐요.]
하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화내지도, 놀라지도 않고 여유있게 웃을 수 있었다. 그것
은 하림이 가끔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글쎄...... 허...... 허...... 모르지...... 하도 성격이 잘 변해서 그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전 알아요. 속으로는 당신을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표시할 길이 없으니까 때로는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심술을 부리기도 하고......]
[허...... 허...... 잘 아시는군...... 그러나 염려할 것은 못돼요. 그녀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있던 상관할
바가 아니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 당신을 좋아하면서도 말을 할? 수는 없고 그래서 성격이 비뚤
어지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에요? 더구나 저와? 홍이 언니를 생각하면 당신에게 접근? 할 수도 없고 해서
말이에요.]
그제야 양몽환은 의외라는 듯이 하림을 주시했다.
[놀라운 일인데......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아니, 저 혼자의 생각이에요.]
<아직 어린줄만 알았는데......>
하는 것은 양몽환이 아직까지 하림을 귀엽게만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미처 하림의 마음이 어른다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자 하림은 생긋 웃으며 양몽환을 올려다 보았다.
[나와 홍이 언니가 당신과 결혼식을? 올릴 때 서로 정실(正室)이? 되지 않겠다고 했는데 왜? 그랬는지 아세
요?]
하면서 수월산장에서 올리던 결혼식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순간, 멈칫하고 있던 양몽환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것 보세요. 당신은 저만큼 생각하지 못해요.]
[무엇 생각하고 못하고 한단 말이오?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러실 거에요. 그때 홍이? 언니와 저는 서로 의논했어요.? 그래서 정실(正室)은 란이 언니가? 되어야 한다
구......]
[뭐라구?]
양몽환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던 양몽환은 음성을 낮추어 꾸짖듯이 말했다.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소? 주소저를 정실로 해야 한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오? 주소저의 신분이나
알고 하는 말이오?]
[알고 있어요. 란이 언니가 인간세상의 황(凰)이고 선녀(仙女)라는 말씀인줄을...... 허나 황(凰)도 봉(鳳)이 있
어야 하고 선(仙)도 경(境)이 있어야 해요. 그것처럼 당신에겐 란이 언니가 있어야만 빛을 발할 수 있어요.]
실로 어이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신......당신......]
하도 어이가 없어 당신 소리만 연발하는 양몽환의 입을 막으며 하림은 말을 계속했다.
[홍이 언니도 마음이 착하고 질투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더구나 저는 말할 것도 없구요. 당신이 아시고 계시
는 대로 저는 당신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고 순종하겠어요. 조소저와 주약란 언니도? 저는 다
좋아해요.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다 좋아해요. 맞아들이세요. 네?]
양몽환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당신,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니오? 아내된 여인이 남편에게 처첩을 많이 거느리라고 권하는 여자가 이 세
상에 어디 있소?]
그러나 하림은 웃지 않았다.
[저는 진심이에요. 세상에 없는 일을 제가 하면 안되나요?]
[그만해 두시오. 좋은 칭찬의 말도 세 번 하면 듣기 싫은 법이오!]
딱 잘라 말하는 양몽환은 지그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자 하림도 더 말하지 못하고 눈을 내려깔았다.
기다리던 조소접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독용부인을 찾으러 나간 옥소선자도? 돌아오지 않은채 이틀이라는
날짜가 후딱 지나가고 이제 도옥이 등가보를 공격한다는 날이 밝았다. 그리고 드디어 서서히 온누리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으며 다가오고 있는 밤을 맞게 되고 말았다.
밤 하늘에 교교히 떠 있는 달만 환한 빛을 발할 뿐 쥐죽은 듯이 조용하기만한 등가보는 이제 밤도 제법 깊
은 이경(二更)을 맞이하고 있었다.
넓은 등가보의 구석구석마다 횃불을 밝히고 있는 백 이십여명의 젊은이들은 각기 번쩍번쩍 눈에 광채를 띄
우고 어둠 속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각일각 다가오는 악몽의 시각, 머지않아 아비규환의 도가니 속으로 변할 등가보지만? 지금은 아무 인기척
도 없이 정적만 감돌고 가끔 횃불에서 기름타는 소리가 고요 속을 깨뜨리고 지나갈 뿐이었다.
긴장할대로 긴장해진 등가보에는 쥐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바로 이때, 성벽에 기대선채 어둠 속을 응시하던 양몽환의 충혈된 두 눈에서 불빛이 번쩍했다.
검은 그림자라고 생각한 순간도 잠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고막을 찢으면서 드디어 일은 벌어지고 말았
다. 물밀듯이 아니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치듯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발자국 소리 하나 없
이 성벽까지 다가와 개미떼처럼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비장한 각오로 등가보를 사수하려고 굳은 결심을 한 양몽환은 혼자의 몸으로 강적을 대항하기 위하여
백 이십여 명의 등가보 장정들에게는 자기의 명령 없이는 대적하지? 못하게 한 다음 장검을 비껴들고 등가
보의 대청 앞으로 걸음을 옮겨 가슴을 딱 펴고 우뚝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미떼같이 성벽을 타고 넘어 들어오는 검은 그림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성벽을 넘어온 그림자들은 제각기 장검을 들고? 양몽환이 버티고 서있는 곳으로 달려오다가 주춤
그 자리에 모여서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슴을 딱 펴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 있는 양몽환의 늠름한 태도에 위압당했는지 아니면 충격
을 받았는지 더 전진해 오지 않고 그 자리에 쭈욱 늘어서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그의 날카롭고도 예민한 눈초리로 검은 그림자들을 재빨리 뚫어보았다.
그러던 양몽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음...... 이상한 일이군 ...... 분명히 있어야 할 독용부인이나 조소접이 안보이는데...... 틀림없이 무슨 사태가
벌어진 모양이군...... 동서남북 중에서 일방위(一方位)를 지휘하려던 것이 변경되었을까? ...... >
생 사 (生 死)의?? 결 투
양몽환은 조소접과 독용부인이 보이지 않는 데에 한숨을 몰아쉬었다.
< 이 양모인을 도와주겠다던 조소접과 독용부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 틀림없
는 일이다...... 이제 내가 취할 길은 도옥과 대결하는 길뿐이다...... >
여기까지 생각한 양몽환은 각오를 새로이 했다.
< 좋다...... 얼마든지 나 혼자라서도 도옥 너를 상대해 주마! >
결심한 양몽환이 발을 구르며 큰 소리로 도옥을 불렀다.
[도옥! 숨지말고 앞으로 나서라!]
그러자 양몽환의 외치는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 속에서 도옥의 음성이 터지며 모습을 나
타내는 것이었다.
[여기 있다!]
외치며 대청 앞으로 성큼 나선 사람은 바로 금환이랑 도옥이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윗저고리에 금환을 딸랑거리며 양몽환 앞에 나타났다.
순간, 양몽환은 주먹을 쥔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이 양모인 한 사람을 취해 이렇듯 많은 고수들을 이끌고 온데 대하여 본인은 영광으로 생각하오. 도형에게
감사하는 바이오.]
그러자 도옥은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감사할 것까지는 없소. 조소접과 독용부인이 양형을 도와준다고 한 모양이지만 이미 구원의 손길은 사
라졌소. 이래도 무명의 졸개들을 이끌고 이 도옥과 겨루어 보겠다는 것이오?]
하는 말에 양몽환은 지지 않고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핫...... 하...... 도형! 이 양모인 혼자라도 능히 도형을 상대할 수 있소. 그러나 도형이 이 등가보를 공격하는
의도는 단지 이 양모인 하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오?]
[물론! 양형이 이 등가보의 수령 아니오?]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소. 그러나 등가보의 무고한 백성들이 어찌 도형의? 고수들과 상대가 되겠소? 이 양
모인에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도형의 의견은 어떻소?]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오?]
[우리 등가보의 백성들과 도형의 고수가 싸우기 전에 먼저 도형과 이 양모인이 승부를 겨루는 것이 어떻소.
만일 이 양모인이 패한다면 도형의 뜻대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오. 그러나 도형이? 패한다면 이 등가보에
서 깨끗이 물러가는 것이오. 어떻소?]
그러나 도옥은 양몽환의 제의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흥! 양형의 생각으로는 이 도옥을 이길 것같소?]
[승부는 겨루어 봐야 알것이오. 이기든 지든 대답부터 하시오!]
하고 우렁 차게 소리쳤다. 그런 양몽환의 외치는 소리는 등가보 일대를 덮는 듯 요란했다.
그러자 도옥은 약간 주춤했다. 많은 부하들 앞에서 잠잠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즉시 차갑게 냉소를 터뜨렸
다.
[양형이 원하는 바라면 못들어 줄 이 도옥이 아니오. 그러나 싸우기 전에 조건을 정하는 것은 싫소!]
하는 도옥의 말에 양몽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 ......흉악하고 간사한 점으로서는 내가 도옥에게 당하지 못한다. 오로지 전력을 다해서 도옥을 쓰려뜨리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다... >
라고 생각한 양몽환은 즉각 장검을 뽑아들었다.
[좋소. 손님 대접을 해서 받아드리겠소. 자아! 먼저 공격해 오시오!]
그러자 도옥은 홀연 큰 소리로 웃어대는 것이었다.
[핫...... 하......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
하고 손에 든 금환검을 휘둘러 양몽환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도옥이 달려드는 행동은 마치 소걸음만큼이나 느렸다.
그 순간, 양몽환은 도옥의 느린 공격 가운데서도 실로 놀라울 만큼 기기묘묘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즉시 장검을 휘둘러 도옥의 공격을? 저지한다면 기기묘묘하게 변화시키는 도옥의? 수법이 양몽환의 요혈을
노리고 들어올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다.
비록 양몽환이 귀원비급을 완전히 터득하지는? 못했지만 대강의 뜻을 조소접에게서? 들은 양몽환은 도옥의
행동에서 어느 정도로 무공이 변화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옥의 금환검이 양몽환의 가슴을 찌르는? 것만 해도 그러했다. 느릿느릿하게 공격해서? 금환검을 휘두르던
도옥이 양몽환의 가슴에 거의 닿을때쯤 재빨리 수법을 변화시켜 날카롭게 찔러오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의 두자나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바람에 도옥의 금환검
은 양몽환의 가슴에서 두 자나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실랄한 일격이 실패한 도옥은 코웃음을 쳤다.
[흥! 양형의 무공도 제법이군!]
하면서 벼락같이 속공을 전개한 도옥은 금환검을 풍차처럼 휘둘러

순식간에 열두 번의 공격을 가하고 주춤 물러섰다.
그러자 뒤로 피하기만 하던 양몽환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어금니를 소리가 나도록 꽉? 깨물고 장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눈꼽만치의 여유나 사정을? 두지않고 반격해 들어갔다.

양몽환이 일찍이 이처럼 노해본 일이 없는듯한 분노한 표정으로 반격을 가하는 데는?

비록 간사한 도옥이라도 그 자리에서 장검을 피할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허겁지겁 뒤로 밀린 도옥은 맨 처음 위치까지 밀려갔다.

그 순간,

양몽환도 냉소를 터뜨렸다.
[도형도 제법인데!]
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반격해 들어갔다. 뒤로 밀리기만 하던 도옥도 분통이 터졌다.

많은 부하들 앞에서 뒤로 밀리기만 한다면 말이 아닌 것이었다.
흥! 소리를 내며 장검을 휘두르는 양몽환에게 역공해 들어갔다.
그러자 장검과 금환검이 불똥을 튀며 삽시간에 주위 일대를 검광으로 장막을 치고 말았다.
쇠와 쇠가 마주치고 둔탁한 소리가 등가보를 가득 채웠다.

서로 필사의 일격을 노리고 있는 싸움은 실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밀고 밀리고 일진 일퇴의 공방전이 점차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한편, 한쪽 구석에서 양몽환과 도옥의 싸움을 보고 있던 하림은 천천히 걸어나와

여차하면 달려나갈 기세로 자세를 취하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싸우는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옥의 부하 수 십명과 등가보의 젊은이들도 숨소리 하나없이

쌍방에 진을 치고 대치한채 관전하고 있었다.
한편, 양몽환과 도옥의 사생결전(死生決戰)은 점차 번쩍번쩍 불꽃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공격을 가하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실로 변화 무쌍하여 허공에서 장검과 금환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시퍼런 섬광이 여기저기 번쩍이는 것이었다.

서로간의 공격이 얼마나 치열한지 어느 검이 양몽환의 장검이고 어느 검이 도옥의 금환검인지

분간할 수 조차 없었다.
바로 그때, 돌연 도옥이 코웃음을? 치고는 번개같이 금환검을 휘두르며?

양몽환의 어깨를 내려치고 말았다.
그러자 잠시 몸이 움찔했던 양몽환의 어깨에서는 붉은 선혈(鮮血)이 주르르 흘러

땅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양몽환의 어깨를 내려친 도옥은 몸을 돌리면서

그대로 양몽환의 아랫도리를 후려갈기며 양몽환의 장검 속에서 빠져나오고 말았다.
어깨를 찔려 눈 앞이 아련했던 양몽환은 다시 돌아서며 휘두르는 도옥의 금환검에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리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도옥의 수법은 귀원비급에서 터득한 검법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금환검을 막지 못하고 일시에 두 곳의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리게 되었다.
순식간에 두 곳에서 피를 흘리게 한 도옥은 기고만장했다.
[양형! 이래도 더 상대하겠소?]
그러나 양몽환은 흐르는 선혈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미 각오한 몸인 바에야 그까짓 세차 정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해서

장검을 던질 위인은 아니었다.
[천만에!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오. 도형의 무공도 진보했소!]
그러자 의기양양해진 도옥은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핫...... 하...... 그래도 상대를 하겠다는 거요?]
[물론!]
단전(丹田)에 진기를 운집한 양몽환은 머리 위로 장검을 높이 들어올리며 외쳤다.
[오늘밤의 일전으로 우리들의 생사가 판가름되기를 바라오!]
[좋소. 며칠 동안 양형을 제거할 방법을 궁리했소!]
[그래서?]
[귀원비급의 무공을 이용하여 양형을 죽이기로 결정했소!]
[헛...... 허......]
어이없이 웃던 양몽환은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 ......이상하군...... 상처를 입은 나에게 공격해오지 않고 왜 말만 하고 있을까?......

아마 무슨 간계를 쓰려고 노리는지도 모른다...... >
공격해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진기를 열심히 운집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도옥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양형! 이 도옥이 한가지 할 말이 있소. 그 말을 양형이 듣는다면 죽음을 면할 것이오.]
[할 말이 이 양모인이 죽음을 두려워할 것같소?]
[그래도 들어보시오.

지금 나는 원래 양형과 이 도옥이 한때 절친한 친구지간으로서 지낸 정의를 생각했소.
그래서 양형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거요.]
그러나 양몽환은 아무 말도 없이 도옥을 노려보기만 했다.
분명히 지금 도옥은 어떤 간계를 꾸미고 있음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실실 웃으면서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랄한 수법의 명수인 도옥을 양몽환이 모를리 없었다.
양몽환의 대답이 없자 도옥은 싸늘한 웃음을 흘리던 입을 열었다.
[양형이 색(色)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 도옥은 알고 있소.

그래서 나는 과거에 지내던 정의를 생각해서 양형을 종일 지분(脂粉) 속에서 살게 해주고 싶단 말이오.

이 도옥의 성의를 받아 들일줄 믿고 미인(美人)들을 소개시켜 주고

또 비록 좁긴 하지만 보금자리도 마련해주겠소. 어떠시오?]
무슨 간계를 쓰려는지 도옥의 의중을 알 도리가 없는 양몽환은 신중을 기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도형이 어떠한 말로 이 양모인을 중상해도 상관없소. 세상 사람이 분별할 것이오.]
[핫...... 하...... 과연 양형은 군자요. 이 도옥이 감탄하는 바이오.]
하고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분명히 자기의 부하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수거(囚車)가 도착했느냐?]
그러자 무리 중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방주님의 명대로 대령시켜 놓았습니다.]
하는 말에 도옥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차갑게 호령하였다.
[이곳으로 끌어오라. 천하가 존경하는 양대협이 수거 안에서 몇년 동안 단꿈을 꾸게 하겠다!]
그러자 양몽환은 크게 웃으며 소리쳐 외쳤다.
[도형! 당신의 정의는 고맙소. 그렇지만 도형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거요!]
[흥! 오늘 이 도옥의 뜻대로 되고 말거요!]
[누구 마음대로?]
소리친 양몽환은 머리 위까지 들어올렸던 장검을 곧장 도옥을 겨누고 질풍같이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도옥은 재빨리 한걸음 피하면서 거호문외(拒虎門外) 한 수로 양몽환의

장검을 밀어내면서 반격을 전개했다.
삽시간에 싸움터로 다시 변한 등가보의 대청 앞뜰은 피를 흘리는 양몽환의 선공(先攻)으로

두 개의 장검이 검빛을 번쩍이기 시작했다.
일시에 두 곳이나 상처를 입혀 우세한 형세를 확보한 도옥은 패기넘치는

태도로 반격하고 있었고 피를 흘리는 양몽환은 땀을 흘리며 보복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도옥으로서는 처음에 양몽환의 무공을 경계했지만

지금의 사태로서 볼 때 실로 의기양양한 자신의 위치에 진기가 더욱 끓어오르고 있었다.

금환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은빛이 번쩍했고 그런가 하면
어느 사이엔가 양몽환의 뒤로 돌아가 역습하는 것이었다.

그런 반면, 양몽환은 조금씩 사기가 저하되는 듯
직접적으로 도옥에게 접근하지 않고 되도록 신중을 기해 일격을 노리고 있는지

장검을 서서히 휘두르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양몽환의 태도에 더욱 용기를 얻은 도옥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양형! 왜 겁나시오?]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장검을 겨누고 날카롭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한편, 용호상박의 싸움을 보고 있는 하림 옆에는 등고강과 등개우

그리고 동숙정과 유원이 다가와 숨소리를 죽이고 주먹을 쥔채 지켜보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지 않는 양몽환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 손을 쓸 수 없는

하림이하 여러 사람들은 발을 굴렀다.
그러나 양몽환 자신은 남이야 안타깝게 생각하던 어떻게 생각하던 이미 계획이 서 있었다.

그것은 고심대사(苦心大師)에게서 전수받은 내공의 진기가 지금 싸우고 있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단전으로 모이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미 도옥과 접전한지도 한시간이 되어 오지만?

내공은 내공대로 점점 더 운기되고 장검 자루를 쥔 손에는 힘이 용솟음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단 한 수로 도옥을 요절낼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기운이? 나고 눈동자는
더욱 반깍반짝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기회를 노리고 있던 양몽환은 우선 자신의 장검을 풍차같이 휘둘려 검막(劍幕)을 쳐놓았다.
그러자 한동안 도옥은 금환검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겨쥐며 빙빙 돌기만 했다.
그러던 도옥은 조바심이 났다.

더 빙빙 돌 수만은 없었다.

 큰소리를 한번 외친 도옥은 눈을 부릅뜨며 일직선으로 금환검을 바로 세우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장검과 금환검이 여지없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등가보를 울림과 동시에 양몽환은

도옥의 공격을 피해 슬쩍 둥근 원을 그리는듯 장검을 휘두르며 쾌재를 불렀다.
눈을 질끈 감으며 마주친 장검으로 도옥의? 금환검을 힘껏 밀어붙였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두 손을 동시에 휘둘러 마악 검막 속을 빠져나가려는 도옥의

몸뚱이를 내려치고 말았다.

그러자 양몽환의 공격에 도옥은 앞으로 엎어질듯 하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한치의 여유도 주지 않고 다시 한번 날카롭게 날려 도옥을 여지없이

나둥그러뜨리는 것이었다.
너무나 예기치 않았던 공격의 한 수에 땅바닥에 나뒹구러진 도옥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러나 양몽환은 더 공격하지 않고 도옥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양몽환의 검막 속을 빠져나간 언제 당한 일인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은도옥은 번쩍 정신을 차리면서 후다닥 일어났다.

그리고 양몽환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자기가 쓰러져 있는 동안 능히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장검을 움켜쥔채

눈을 부라리고 있는 양몽환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흥! 놀랐어!]그래도 냉소를 터뜨리는 도옥의 말에 양몽환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천만에!]
[놀라운 재간에 이 도옥이 감탄하는 바이오. 어디서 배웠소?]
한번 호되게 당한 도옥은 옷에 묻은 흙을 털며 비웃음조로 물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차갑게 냉소하며 대답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지금? 가한 일격으로서 얼마간의 패기(敗
氣)를 만회한 셈이었다.
[흥! 도형이 알고 있는 귀원비급만 천하의 귀보(貴寶)인줄 알겠지만 세상에는 많은? 귀보(貴寶)가 있다는 것
도 알아두시오.]
호기있게 내뱉았다. 그러한 양몽환의 말에 도옥은 아니꼬운 표정으로 입을 씰룩거렸다.
[자랑하지 마시오. 그까짓 재간쯤 별것 아니오.]
[대수롭지 않다면 한 수 더 받아 보시겠소?]
그러자 도옥은 분통이 터지는지 그 자리에서 발을 구르다 말고 질풍같이 달려 들어왔다. 순간, 이미 예상하
고 있던 양몽환은 장검을 휘둘러 도옥의? 접근을 제지하면서 반격을 가했다. 말로 다투던? 양몽환과 도옥은
다시 결투를 벌리고 말았다.
공격을 가해온 도옥의 검법은 그야말로 기묘한 변화가 무쌍했다.
금환검이 검빛으로 발하며 허공에서 춤을 추는가 하면 어느 사이에 대여섯의 날카로운 공격이 바람을 가르
며 날카롭게 찔러오는데에는 양몽환도 어쩔 수 없어 휘두르던 장검을? 거두며 몇 걸음 물러설 도리밖에 없
는 일이었다. 그러던 양몽환은 전신에 끓어오르는 고심대사의 무공을 발휘하며 벼락같이 왼손을? 휘둘러 강
한 장풍을 몰아붙였다.
그러자 도옥은 그만한 기지는 있었는지 날카롭게 공격하던 금환검을 거두며 훌쩍 몸을 날려 양몽환의 장풍
을 교묘히 피했다.
그러나 피하는 도옥의 날쌘 행동보다 양몽환이 후려갈긴 장풍이 조금? 앞서 도옥의 몸을 한바퀴 휙 돌려놓
고 말았다. 그바람에 도옥은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도옥은 아무래도 수긍이 가지않는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즉, 보기애는 양몽환의 검풍이나 장풍의 위력이 대단치 않은 것같은데도 도옥 자신이 양몽환의 공격에 여지
없이 엎어지고 휘청거리는데는 눈이 커다랗게 떠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분통이 터지는 도옥은 머리끝까지 뻗치는 화통에 입술이 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어떤 수법으로 자기의 몸을 엎어버릴지 두려운 감마저 들어
선뜻 달려들지는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귀원비급까지 터득한 도옥 자기가 양몽환의 한번 장풍에 몸이 휘청거리고 엎어진다면 말이 아니다. 당장 저
놈을! 이를 악물은 도옥은 금환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달려들 바로? 그때, 뜻밖에
도 도옥의 부하가 도열한 두리 속에서 큰소리가 들리며 잠시 술렁거렸다.
[방주님! 수거(囚車)가 도착하였습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건장한? 여덟 필의 말이 한 재의 가마를 끌
고 앞으로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수거(囚車)에 모든 사람들은 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
한편, 양몽환도 뜻밖에 나타난 마차에 눈을 돌렸다.
팔뚝만한 쇠창살을 엮은 철책(鐵柵)으로 만들어진 수거는 상자처럼 만들어졌고 그 쇠창살 안에는 실로 놀라
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해 봐도 그 철창 수거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조소접과 독용부인이 아닌가! 순간, 양몽환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조소저!]
그러자 도옥은 입을 꽉 벌리고 통쾌하게 웃어젖히는 것이었다.
[핫하...... 양형은 놀랐을 거요. 조소접과 독용부인이 양형을? 도와준다고 했는데...... 핫하...... 이제 무슨 재주
로 돕겠소!]
하고 조롱섞인 말에 양몽환은 순간 전신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같았다.
[비겁한 짓이군! 설마 무공으로 두 사람을 잡았을리는 없고 무슨 계략을 꾸민 모양인데 ......]
[흥! 무공이나 계략이나 잡힌 것은 마찬가지요!]
하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어젖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양형을 도와준다는 사람들이 저 모양이 되었으니 양형의 마음이 아플거요. 그러나 철창속에 갇힌 다음에야
별 수 없을거요. 더구나 쇠창살에 붙은 뾰족한 가서 끝에는? 극독(極毒)이 묻어 있어서 조금만 살이 닿아도
썩어 들어간만 말이오.]
[그래서 지금 저렇게 앉아 있단 말이오?]
[그렇소! 그녀들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가시를 만져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오.]
양몽환은 눈썹이 곤두섰다.
< 악랄한 놈...... 조소접과 독용부인이 무릎을 끓지 않는다면 도옥의 잔인성이 그녀들을 그냥두지 않겠지......
>
그러는 사이에도 도옥은 자못 기세가 등등했다.
[양형! 보시다시피 조소저나 독용부인의 재색이 양형의 부인들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오. 이 도옥이 특별히
생각해서 베푸는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친구의 정분을 받이 주시오!]
하고 희희낙락 가가대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냉정한 표정으로 도옥을 노려보았다.
[고맙소. 그러나 너무 큰 소리 치지 마시오. 조소저와 독용부인이 지금 수거 안에 있다고 해서 큰소릴 치는
지는 모르지만 그녀들의 날렵한 부하들이 그냥 있지는 않을거요. 그렇게 되면 도형은 더? 많은 원수를 갖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소?]
[머리 잃은 뱀은 기어갈 수 없고 날개 없는 새는 날지를 못하오. 그들의 수괴(首魁)가 지금 수거 안에 감금
당했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소. 양형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齒牙)가 없으면 잇몸이 대신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만일 일이 여의치? 못해서 그녀들이 스스로 목숨
을 끊는다면?]
[핫하...... 목숨은 하나요. 두개도 아니고 열개도 아니오. 자기 목숨은 누구나 아까워 하는 법, 스스로 자결하
지는 않을 것이오.]
하고는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돌아본 다음 다시 계속했다.
[만일 양형이 염려된다면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녀들에게 자살하지 말라고 권해보시오!]
안하무인으로 방자하게 떠드는 도옥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양몽환은 다른 생각에 잠겼다.
< ......도옥이 그녀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철책 속에서 구할 수 있겠는데...... >
하면서 양몽환은 수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도옥은 심하림에게 고개를 돌려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원래 여복(女福)이 많은 양형이니 너무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 마시오.]
하고 하림의 눈치를 슬쩍 보는 것이었다. 그러한 태도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림에게? 질투심을 일으키도록
하려는 의도같았다.
그러나 하림은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염려말아요! 조소저가 꼭 당신을 죽이고 말거에요.]
[죽인다고? 이 도옥이 그따위를 두려워한다면 감금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하림은 더이상 대답하지 않고 외면해 버렸다. 보기도 싫었다.
그러는 한편, 수거 앞으로 다가간 양몽환은 소리를 낮추어 조소접을 불렀다.
[조소저!]
그때까지 눈을 꼭 감고 단정히 앉아 있던 조소접은 사르르 눈을? 뜨고 양몽환을 본 다음 쏠쓸히 웃으며 다
시 눈을 감고 마는 것이었다. 확실히 기운이 없는 모습이었다.
사실 조소접은 강호에 발을 들여놓고서부터 지금까지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여장부의 관록을 여지없이
발휘하던 여걸(女傑)이었다.
그러한 조소접이 지금 도옥의 간계에 빠져 수거 속에서 쓸쓸히 웃고 있는 것을 본 양몽환은 인생무상을 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양몽환으로서는 그녀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지기도 몇 번인지?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팔뚝만큼의 굵기로 된 쇠창살이지만 조소접의 무공으로서는 별로 어렵지 않게 탈출해 나올 수 있을 것같았
다. 더구나 독용부인이 돕는다면 더 쉽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것같았다.
이렇게 생각하여 볼때 조소접과 독용부인이 합세하여 쇠창살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은 그 가시끝에 묻어 있
다는 극독(極毒)때문인 것같았다.
이때, 양몽환에게 소리치는 도옥의 음성이 들렸다.
[양형! 어떻소? 함께 들어가 있고 싶지 않소?]
하는 말에 양몽환은 차가운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도형은 너무 자부하지 마시오. 이따위 간계로 조소저와 독용부인을 가두어 둘 수 있을 것 같소?]
[흥! 지금 갇혀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거요?]
[도형의 어떤 간사한 수법 때문이겠지!]
그러자 도옥은 더욱 크게 소리내어 웃어젖혔다.
[핫...... 하...... 그럼, 그 안에 있는 사람이 가짜 조소저와 독용부인같소?]
[가짜는 아니겠지. 그러나 도형이 악랄한 수법으로 마취약을 먹인 모양이오!]
[그렇소. 과연 양형은 생각이 넓은 사람이군! 약을 먹이지 않고서도 저렇게 얌전히 앉혀둘 수 있겠소?]
하는데 양몽환대신 하림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틀림없이 보복당할 거에요. 우리 란이 언니가 알게 되면!]
그러자 도옥은 홱 고개를 돌려 하림을 노려보았다.
[뭣이? 주약란이가?]
[그래요, 가만 놔두지 않을 거에요. 이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당신은 목숨이 없어져요.]
[흥! 주약란을 겁낼줄 아시오?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바로 저 수거 안으로 집어넣겠소. 수거 안
이 비록 좁지만 주약란 하나쯤 더 들어가 앉을 수 있소!]
[큰 소리치지 마세요. 상대도 안돼요!]
[그렇겠지! 그러나 이 도옥을 옛날의 도옥으로 알면? 큰일이오. 과거에는 양형과도 적수가 못되었던 도옥이
란 것을 알아두시오!]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상대가 못돼요.]
그러자 도옥은 가슴을 딱 펴며 허세를 부렸다.
[상대가 안된다고? 핫...... 하...... 그럼, 양형과 조소저를 비교하면 누가 더 상할 것같소?]
[그야 조소서가 귀원비급을 터득했으니까 무공이 더 강하죠.]
[바로 맞았소. 그렇게 무공이 강한 조소서를 이 도옥은 사로잡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오.]
하고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만일 이 도옥에게 거슬리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주소저나 이요홍까지라도 모조리 사로잡아서 이 수거 안
에 감금시키고 만천하의 무술인들이 보도록 강호에 끌고 다니겠소!]
구경거리를 만들겠다는 도옥의 큰소리에 양몽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도형! 그 잠꼬대같은 소리 집어치우시오!]
[뭐라고? 잠꼬대? 핫...... 하...... 좋소. 그러나 오늘 여기서 양형과? 심소저를 처치해 버리면 이요홍과 주약란
이 남을 뿐이오. 이요홍을 잡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요. 다만? 주약란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녀도 여기 조소
저보다는 무공이 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오. 조소저를 사로잡은 이 도옥이 주약란을 겁낼줄 아시오? 흥!]
하고 말을 마치는 바로 그때였다. 양몽환의 눈썹이 곤두서며 장검을 휘두르려는 바로 그? 순간 난데없는 큰
고함소리가 양몽환의 장검을 멈추게 했다.
[도옥! 큰소릴 치지 마시오. 지금 천하 고수들이 이 등가보에 와 있소!]
순간, 양몽환은 급히 소리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음성이었다.
누굴까 하고 소리친 주인공을 찾던 양몽환의 시선은 금방 광채를 발했다.
[아, 스승님!]
가늘게 떨려나오는 소리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길고도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덮은 도사차림의 노인은 틀림없는 일양자(一陽子)였다.
곤륜파(崑崙派)의 장문인이며 일찍이 양몽환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현도관(玄都觀)의 주인인 스승 일양자가
틀림없었다.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곤륜파에서 추방되던 때의 일양자, 대각사에서 고불 영공과 싸울? 때의 일양자, 그리
고 현도관에서 무공을 가르쳐 주던 일양자, 양몽환의 눈 앞에 주마등처럼 옛일이 번개같이 지나갔다.
양몽환은 다가오는 일양자에게 급히 달려가 땅에 엎드렸다.
[사부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러나 양몽환의 인사를 받은 일양자의 태도는 의외로 냉정했다.
[이미 너는 곤륜파의 제자가 아닌데 어찌 나에게 인사를 한단 말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온몸의 피가 일시에 멈추는 것같았다.
그러나 곧 태연해졌다.
[하루의 가르침을 받았다 해도 스승은 스승이십니다. 하물며 하루가 아닌 십여년 동안 배움을 받은 이 제자
입니다. 어찌 스승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곤륜파에서 추방된 것은 이 제자의 잘못 때문인데? 이제 무엇을
탓하십니까?]
머리를 조아리며 똑똑히 아뢰는 양몽환의 말을 듣고 있던 일양자는 가만히 탄식하는 것이었다.
[음...... 그렇다면 너는 곤륜파에 대해서는 추호의 원한도 없느냐?]
[어찌 원한을 품겠습니까?]
[알겠다. 일어나거라!]
그제야 땅에 엎드렸던 양몽환은 천천히 일어났다.
오늘 이곳에 사부님이 오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이 싸움에 관여하시지 마십시
오. 이 몸 혼자서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며 일양자에게 주먹을 쥐고 읍했다. 그러자 일양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등에 메었던 장검을 뽑아 양몽환
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 장검은 쇠를 짜르는 것이다. 이것을 너에게 주겠다. 잘 싸워라.]
그러나 양몽환은 선뜻 받지 못하고 사양했다.
[어찌 이 제자가 그런 귀중한 보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받아라. 이 장검이 너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속히 받아라!]
하며 양몽환의 폼에 안겨주는데는 양몽환도 더 사양하지 못하고 두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달빛과 수많은 횃불이 밝혀진 등가보의 대청 앞에는 뜻아닌 일양자의 보검으로 싸늘한 은빛 검광이 번뜩였
다.
일양자에게서 보검을 받아들고 몸을 돌린 양몽환은 즉각 도옥에게 소리쳤다.
[도형! 이 보검이 어떤가 한번 시험해 보지 않겠소?]
그러자 도옥도 거리낌없이 소리쳐 응수했다.
[일양자가 양형에게 준 보검읕 양형은 또 이? 도옥에게 선사하겠다니 핫...... 하......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고마운 말이오...... 그럼, 공격하시오!]
쾌히 도전을 받아들이는 도옥이었다.
[너무 건방진 소리는 마시오!]
말을 끝마치며 양몽환은 보검을 비스듬히 후려갈겼다.
그러자 한줄기의 싸늘한 은광(銀光)이 도옥의 몸을 휘감는 듯 했다.
그러나 도옥은 날렵한 몸짓으로 금환검을 휘둘러 불꽃을? 튕기면서 양몽환의 장검을 피하는 동시에 반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한번 후려친 양몽환의 장검은 걷잡을 사이도 없이 도옥의 금환검을 튕기며 일직선으로 곧장 내려뻗
치고 말았다. 그 순간 위기를 직감한 도옥은 내려쳤던 금환검을 급히 거두며 돌아서면서? 한번 더 휘둘러보
았다. 휙! 바람을 가르며 양몽환의 장검을 피해 일격을 겨누었지만? 너무나 몸이 치우쳐 어림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한 때를 노리고 있던 양몽환은 이미 생사를 결정한듯 싸늘한? 빛이 수없이 번쩍이는 보검을 있는 힘을
다하여 휘둘렀다.
그러자 도옥은 잠시 정신이 혼란해졌다. 도옥의 금환검 검법도? 이미 절기에 이른 검법이었다. 그러나 귀원
비급을 터득한 도옥이 맥없이 양몽환의? 보검에 휘말려 옆으로 튕기어지며? 정신까지 아찔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바였다.
분통이 터진 도옥은 순간적으로 아찔해지는 정신을 수습하며 그대로 금환검을 휘두르고 말았다.? 그러나 보
검과 맞부딪쳐 날카로운 쇳소리를 낸 도옥의 금환검은 또 튕겨나가고 말았다.
그러던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양몽환과 도옥은 각기 싸우던? 태세를 늦추며 몇 걸음씩 물러나? 휘파람을 불며 나타난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백 발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고 청색도포를 입은 노인이 머리에는 방건(方巾)을 쓰고 있고
손에는 용두(龍頭) 지팡이들 들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뒤엔 무엇인가? 보자기에 싼 긴 물건을 각기 하나
씩 멘 장정이 따르고 있었다.
그러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한 양몽환은 잠시 눈을 껌벅거렸다.
조금도 틀림없는 장인(丈人)어른이었다. 한 때는 천용방(天龍幇)의? 방주(幇主)로서 천하 무술계를 뒤흔들었
던, 그러다 단혼애 결전장에서 여지없이? 패해버린 해천일수(海天一 ) 이창란(李滄瀾)?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창란을 발견하는 순간 양몽환 뿐 아니라 수십명의 무술인들도 눈을 크게 뜨고 과거의 이창란임을 확인하
고 입을 크게 벌렸다.
실로 예기치 않은 장소에 예기치 않은 사람이 나타난 것에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횃불이 지글지글 타고 있는 불빛 앞까지 다가온 이창란은 손에 들었
던 용두지팡이를 땅에 탁! 꽂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 바람에 이창란의 용두지팡이는 땅에 반자나 푹 묻히
는 것이었다. 그것을 신호로 해서 뒤에 따르던 장정들도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달려온 이창란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눈앞에 버티고? 서있는 일양자를 먼저 발견하고는 주먹을 쥐
고 읍했다.
[도관주(都觀主)! 그동안 별고 없으셨소?]
그러자 일양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덕택에 무사하오이다!]
이때, 양몽환이 급히 달려가 이창란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장인어른 안녕하셨습니까?]
공손히 허리를 굽히자 이창란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받았다.
[음! 그래 잘 있었는가?]
하고는 곧 자세를 고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한쪽으로 좀 비켜주게. 도향주(陶香主)에게 할 말이 있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땅에 꽂았던 용두지팡이를 쓰윽 뽑아들었다.
이때, 이창란의 말대로 한쪽으로 비켜서던 양몽환은 정중히 말하였다.
[장인어른! 조심하십시오!]
이창란에게 외치는 양몽환의 소리에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를 들어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네!]
한편, 도옥은 옛날에 자기의 스승이었고 더구나 방주였던 이창란에게 정중한 태도로 읍을 하며 허리를 굽혔
다.
그러나 이창란은 도옥의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건성으로 아는 척을 하고는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도향주! 이 노부(老父)를 기억하겠나?]
하는 말에 도옥은 담담히 웃었다.
이노영웅(李老英雄)을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강호에 이노영웅의 명성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하고는 굽혔던 허리를 펴는 태도가 언뜻 보기에도 건방지기 한량이 없었다.
더구나 이창란으로서 도옥을 말하면 일찍이 친자식처럼 키워 무공을 가르쳐주었고 장래를 걸었던 도옥이었
다. 그러한 도옥의 건방진 태도는 고사하고 사부(師父)님도 아닌? 이노영웅 운운하는데는 괘씸한 생각이 들
었다.
그것은 이창란 사기를 의식적으로 무시하려는 태도였다. 순간, 이창란은 노기가? 충천했다. 수염까지 떨리고
용두지팡이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도옥은 이창란의 노한 표정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듯 외면하고 돌아서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때
도옥의 오만한 태도를 보고 있던 일양자가 엄숙한 어조로 도옥을 불렀다.
[도옥이! 어찌 사부님을 이노영웅이라 부른단 말이냐?]
그러나 도옥은 냉랭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일양자에개 소리쳐 대답하는 것이었다.
[천용방이 패하고 해산된 이상 무슨 사부님이 있단 말이오?]
그 순간, 드디어 이창란의 노기띈 음성이 터지고 말았다.
[닥치지 못해! 이놈! 사부까지 몰라보는 놈!]
그러나 도옥은 히죽이 웃으며 오만불손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그의 대답은 너무나? 대담한 대답이
다.
[장강(長江)의 물결도 뒷물이 앞물을 밀치는 법이오. 하물며 인간세상에서 어찌 사부만 있으라는 법이 있습
니까? 이미 이노영웅께서는 늙었습니다. 이 도옥이 비록 천용방의 제자였지만 그것은 지나간 과거, 이제 누
구의 제자도 아닌 이 도옥입니다. 이노영웅께서는 영웅심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서 여생이나 보내는 것이 좋
을줄 압니다.]
순간, 이창란은 들었던 용두지팡이를 힘껏 휘둘렀다가 땅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닥쳐라! 이 짐승같은 놈!]
그러나 도옥은 여전히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경노존현(敬老尊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화내시지 마시고 말씀이나 하시지요!]
도무지 이창란을 무시하고 하는 말밖에 아니었다.
그러한 도옥은 노려보며 분통을 터뜨리던 이창란의 두 볼은 움푹 주름이 잡히는 것이었다.
[좋다. 이미 우리들의 관계는 끓어졌다고 하자. 그러나 한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무엇을 묻겠다는 말씀입니까?]
[천용방은 누가 세웠느냐?]
[그야 이노영웅께서 세웠지 그 누가 세웠겠습니까?]
[바로 그거다. 이 노부가 세운 천용방인데 너는 무슨 이유로 지금? 천용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느냐? 네가
바로 천용방의 방주라고 자칭한다는데?]
[흥! 이노영웅님은 잘 들으시오. 이노영웅님이 세운 천용방은 이미 망했을 뿐 아니라 해산을 선고한지도 오
랩니다. 그런 천용방을 이 도옥이 다시 일으킨 것인데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입니까?]
[음! 그런 것은 이 노부가 알바 아니다. 다만 무슨? 이유로 이 노부가 세운 천용방의 이름을 따서 자칭하느
냔 말이다.]
[천용방의 이름을 이 도옥이 쓴다고 해서 틀린 것이 무엇입니까? 더구나 이름을 지었으면 지었지 이노영웅
의 천용방인가요? 몇 백명이 천용방이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이놈! 점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내놈이 이 노부의 천용방이라는 명칭을 도용하는 의도를 다른 사람들은
모를지 모르지만 이 노부만은 속이지 못해!]
[그것은 이 도옥의 자유입니다. 그따위 천용방이라는 명칭을 쓰는데 무슨 음모가 있단 말이오?]
[그래? 비록 천용방이 해산되었지만 각처의 분지파(分枝派) 들은 이 노부의 명령을 지키고 있다. 그것을 네
놈이 악용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래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여전히 빈정거리며 대답하는 도옥과 반대로 분노가 치밀어오른? 이창란은 시종 노기를 띄운채 말하고 있었
다.
[음...... 그 한가지만으로도 너는 강호에서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도옥은 끝내 듣고 있지 못하겠다는 듯이 껄껄 웃어댔다.
[...... 좀더 정직하게 딸과 사위를 위해서 이 도옥을 처치한다고 말하시오!]
[뭣이? 그렇다면 이놈! 이 노부를 어쩌겠느냐?]
[이노영웅님! 사실 옛 정분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조용히 이곳에서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나
중에 옥석(玉石)을 가리지 못하는 도옥의 금환검에 후회하시지 말고 조용히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놈! 하늘이 높은줄 알고 하는 수작이냐? 이놈. 내가 비록 몸은 늙었어도 네놈 하나는 문제없다!]
소리쳐 외친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도옥을 노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네놈이 귀원비급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이 노부가 한 수 배워야겠다!]
하고 한 수 겨룰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도옥은 잠시 망설였다.
한때는 자기의 방주였고 더구나 어려서부터 무공을 전수시켜준? 스승 이창란에게 금환검을 바로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이 된바에는 최후로 한번 더 다짐을 받아두는 것이 명분이 설 것같았
다. 그래서 도옥은 금환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진정으로 이노영웅께서는 이 도옥과 겨루어야 하겠습니까?]
[오냐. 겁내지 말고 달려들어라. 도대체 귀원비급에 기재된 무공이 어떠한지 알아보겠다. 자, 덤벼라!]
[진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습니다. 이 도옥은 옛날의 정분으로 참으려고 했는데...... 그럼, 선수로 공격해? 보
시오!]
이창란은 더 참지 못하고 용두지팡이에 바람을 일으켰다.
봄은 이미 늙었지만 용두지팡이를 휘두르는 팔은 그야말로 젊은이들을 무색하게 했다.
언뜻 보기에는 별로 위력이 대단해 보이지 않았지만 한방 맞는 날이면 그야말로 바위라도 산산조각을 낼만
큼 무시무시한 공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순간, 도옥은 여유만만하게 이창란의 용두지팡이를 슬쩍 피하며 날쌘 동작으로 금환검을 휘둘렀다. 그렇
게 한번 휘둘러진 도옥의 금환검은? 이창란의 용두지팡이를 한쪽으로 밀어붙이며? 비스듬히 이창란의 가슴
앞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한 도옥의 날쌔고도 기막힌 한 수의? 공격은 너무나 의외의 것으로 일시 이창란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을 교묘히 피한 이창란은 단전(丹田)에 진기를 몰아넣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도옥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이노영웅! 놀라지 마시오. 지금 이 도옥의 한 수가 바로 귀원비급에 기재되어 있는 검중화신(劍中化身)이란
수법이오.]
하며 허세를 부리는 데에는 이창란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오냐! 귀원비급이고 뭐고 이 노부를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얼마든지 재간을 부려봐라. 겁나서 않는다.]
늙은이답지 않게 큰 소리로 응수하며 호통을 친 이창란은 용두지팡이에 힘을 주었다.
수거속에 갇힌 두 여인
용두지팡이에 힘을 주는 이창란을 은근히 노려보고 있던 도옥은 패기에 넘친 태도로 소리쳤다.
[그러나 이노영웅님! 지금 한 수를 사정없이 발휘하였다면? 오늘이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옛 정분을
생각해서 사정을 두었죠.]
갈수록 방자스럽고 허세를 부리는 도옥의 태도에 이창란은 벌컥 울화가 치솟고 분통은 있는대로 다 터지고
말았다. 생각하면 치가 떨릴 일이었다.
옛날의 제자에게서 차마 듣지못할 치욕을 받고 있는 이창란은 아무리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해도 진
정할 수가 없었다. 강아지를 기른 것이 호랑이가 된 꼴이었다.
[뭐라구! 그따위 수작은 하지마라. 그렇다고 고마워 할 내가 아니다. 이 노부는? 기회만 있으면 너를 죽이고
말겠다. 너도 사정을 두지 마라!]
[흥! 그러나 이노영웅님이 평생토록 기회를 노려도 죽이지는 못할 겁니다.]
이창란의 주름이 잡힌 얼굴은 여전히 노기가 꿈틀거렸다.
[이놈! 이 노부의 말을 들어봐라. 옛날 이 노부가 너를 키울 때 어떤 사람이 너의 뒷덜미에 반골(叛骨)이 있
는 것을 보고 장차 은혜를 원수로 갚을 놈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 노부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참말
이었구나!]
하고 침통히 탄식하며 하는 말에 도옥은 잠시 머리가 숙여졌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라는 생각
이 들었다. 부모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창란에게서 키움을 받은 도옥이 무공도 전수받고 귀엽게 자랐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더구나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의 과거를 들추는 이창란의? 말을 그대로 듣고
만 있는다면 이창란의 입에서 또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그래서 도옥은 이창란의 입을 막아버리려고 결심했다.
즉시 금환검을 고쳐쥐며 도옥은 냉랭하게 소리질렀다.
[쓸데없는 소리는 마시오. 옛날은 이미 지나간 일이오. 지금 왈가왈부해 봤자? 소용이 없을거요. 우선 이 검
이나 받으시오.]
내뱉듯이 말한 도옥은 이창란이 피할 사이도 주지 않고 그대로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그러자 도옥이 달려나
간 앞길에는 무수한 금환검의 꽃망울이 하늘을 뒤덮었다.
엉겁결에 도옥의 공격을 받은 이창란은 도포를 펄럭이며 용두지팡이를 휘둘러 당장의 위기를 면할 수 있었
다.
그야말로 날카롭고 살기가 등등한 도옥의 금환검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도옥대로 만용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것은 풍차같이 휘두르는 이창란의? 용두지팡이에 만일
금환검이 닿는 순간이면 여지없이 두 동강이 나버린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뿐 아니라 이창란의 성
격으로 보아 사정없이 닥치는대로 부수어 버릴 것을 알고 있는? 도옥은 일단 금환검을 휘둘러 이창란을 위
협한 다음 재빨리 뻗쳤던 금환검을 거두어 들이며 용두지팡이의 공격권에서 몸부터 빼내는? 것이었다. 세상
에 아무리 의리없는 놈이라도 지금 사부 이창란과 겨루는 도옥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도옥이었다.
한편, 지금까지 제자로만 알고 있던 도옥에게서 세상이 공노할만큼 스승에게 검을? 들이대는 무례함을 상대
로 용두지팡이를 휘두르는 이창란도 심기가 편치 못했다. 호랑이 새끼를 거두어 길러도 어디? 이럴 수가 있
으랴! 싶으리만치 후회하며 분통을 터뜨린 이창란은 단 한번의 용두지팡이로 도옥의 머리를 박살내려고? 기
회를 노렸다. 이까짓 놈은 죽여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일단 도옥의 금환검을 피해 감시 주춤했던 이창란은 부르르 수염을 떨며 용두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용두지팡이에서 내뿜는 날카로운 장풍(杖風)은 주위를? 장막(杖幕)으로 가리우며 금방이라도 도옥의
머리를 두쪽으로 뻐개버릴 위세였다.
이창란이 비록 단혼애에서 무참히 패하여 천용방을 해산하고 패장(敗將)으로 낙인이 찍혔지만? 끝내 무공만
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이창란의 용두지팡이가 지금? 기염을 토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때는 사제지
간이었으나 지금은 원수지간이 되버린 도옥과 사생을 겨루는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실로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용두지팡이었다. 이창란의 용두지팡이의 위력에 도옥은 할? 수 없이
한걸음 한걸음 뒤로 물러설 도리밖에 없었다. 한번 맞기만 하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때마다 목덜미가 서늘해
졌다. 그러나 한편에서 보고 있는 양몽환의 눈에는 왜그런지 도옥을 공격하는 이창란의 태도가 미심쩍었다.
어딘가 사정을 둔 공격같기만 했다. 양몽환이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이창란이 건원지신공(乾元指神功)이
라는 그야말로 필살의 재간을 사용치 않는데에 있었다.
< ...... 장인 어른이 아무래도 도옥에게 미련이 있는 것이 틈림없어...... >
그러는 순간, 한소리 크게 외친 도옥은? 번개같이 몸을 날려 금환검을 휘두르며 이창란이? 무수히 그어놓은
장막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죽기를 각오한 것이었다.
순간, 장내는 숨을 죽였다.
그러나 의외로 이창란의 장막을 헤치며 튀어나오는 도옥이었다.
놀랄 일이었다. 아무리 귀원비급을 터득한 도옥이지만 이 창란이 만든 용두지팡이의 장막? 속에서는 빠져나
올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로 도옥의 뒷등을 내려 칠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내려
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놓지지 않은 도옥은 위기를 면하고 장막속에서 빠져나오고 말
았다. 그리고는 돌아서면서 번개같이 휘두르는 도옥의 금환검에 이창란은 옷소매를 짜악! 찢기고 말았다.
설마설마하고 내려치기를 주저하다 역공을 당한 이창란이 일부러 머뭇거렸는지 아니면 나이탓으로 손이 말
을 잘 듣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도옥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소매까지 찢겨지자 굵은 눈썹이 꿈틀했
다. 즉시 건원지신공으로 도옥의 가슴을 노렸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이창란의 옷소매를 찢은 도옥의 몸이
이창란의 등뒤로 돌아간 후였다.
날쌘 동작으로 신공을 하고 뒤로 돌아간 도옥은 큰소리로 외쳤다.
[이노영웅께서는 이미 상처를 입은거나 같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더 싸운다면 목숨까지 끓어버리겠으니 그만 물러가라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자 이창란은 들었던 용두지팡이를 힘없이 내려뜨리며 크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만두자 그만둬!]
하는 것이 아닌가. 실로 뜻밖의 말이었다.
그러자 도옥은 가슴을 쫙 펴보이며 위세를 부렸다.
[이노영웅께서는 아직 부족한가요?]
하는 말에 이창란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침통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노부가 네놈같은 마음이 악독했다면 너는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이 도옥도 역시 같습니다. 만일 옛날의 정분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노영웅의 옷소매나 찢고 말지
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마디도 지지않고 방자스럽게 하는 말에 이창란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것은 옛날에 떨치던 자신의 명성을 생각하니 지금 자기의 처지가 수치스럽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 없이 잠시 동안 서 있던 이창란은 혼잣 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오늘 이 싸움은 무공을 겨루어 명예와 생사를 결정하는 싸움이다. 잠시 물러섰다가 다시 싸우기로 하자!]
일단 싸움을 중지할 것을 표시했다. 그러자 도옥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으실대로 하시오. 이노영웅으로서는 잠시 쉬었다 싸우는 것이 좋을 것이오.]
비꼬는 말에 불쑥 화가 치민 양몽환이 보검을 쥐고 달려나갔다.
[도형! 이 양모인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아무리? 심한 상처라도 숨이 붙어있는 한 싸워서 생사를
겨루어야할 것이오.]
그러자 도옥은 가소롭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양형은 이 도옥과 죽어도 싸우겠다는 말이오?]
[물론이오. 우리 둘 중에 누구 히나라도 죽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아시오!]
[흥! 그러나 이 도옥은 더 이상 양형을 상대해서 싸우고 싶지 않소!]
하면서 들고 있던 금환검을 머리 위로 올렸다가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것을 신호로 도옥의 많은 부하가 늘어선 무리 중에서 괴상한 옷을 입은 노인이 불쑥 나오지? 않
는가!
보통 사람의 머리보다 두 곱이나 더 커보이고 말처럼 긴 얼굴의 노인이었다.
그런데다 달빛에도 번쩍이는 대머리였다. 그대신 머리에? 날 머리칼이 턱으로 몰린 듯 무성히? 자란 수염은
노인의 입을 가릴만큼 많았다.
그리고 옷도 중국 특유의 색으로 통바지를 해입었고 손에는 일찍이 본 일이 없는? 구두장(鳩頭杖)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양몽환은 전혀 본적이 없는 노인이었다.
그러한 노인의 생김새나 옷차림은 한번 보면 평생 잊지 않을만큼 괴이한 모습이었다.
얼마 동안 노인의 거동을 보고 있던 양몽환은 재빨리 무리 속으로 몸을 감추는 도옥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가 없었다. 아마 도옥을 대신하여 이 노인이 양몽환과 겨룰 모양이었다.
양몽환은 보검을 휘둘러 무수한 검광을 뿌린 후 엄숙히 입을 열었다.
[누구요? 당신은!]
그러자 노인은 괴상하게 웃다가 뚝 그치며 양몽환을 노려보았다.
[중원 땅에서 이 늙은이를 본 사람은 적지만 이름은 많이들 알고 있소.]
[그렇소? 도대체 당신의 이름이 뭐요?]
[이 늙은이의 이름은 보통 백독옹(百毒翁)이라고 부르지!]
[백동옹이라? 들은 일이 없는데?......]
[그렇소? 이 늙은이는 천하에 백가지 독을 사용할 줄 알지. 그래서 백독옹이라 부르고 있소!]
그러나 양몽환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 ...... 백독옹이라...... 그렇다면 독약을 잘 쓰는 모양이군...... 한 칼에 해치워야지...... >
여기까지 생각한 양몽환이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보검을 들어 늙은이를? 내려치려고 달려드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한 칼에 해치우려는? 양몽환의 결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괴이한? 피리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휙 몸을 돌리며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옥피리를 든 옥소선자가 나는 듯이? 달려와 무리
앞에 서는 것이었다.
백독옹은 갑자기 나타난 옥소선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대로 양몽환에게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자네가 바로 양몽환인가?]
양몽환은 옥소선자와 눈인사만 나누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소!]
[그럼 됐어! 이 늙은이는 오늘 더도말고 자네 한 놈만 죽이면 그대로 돌아갈 수가 있어!]
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양몽환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구?]
그러나 백독옹은 양몽환의 반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자네와 이 늙은이가 싸우기 전에 한가지 말해둘 것이 있네! 그것이 이 늙은이의 습관이지만!]
그래도 양몽환은 미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백독옹의 말이 터졌다.
[무릇 이 늙은이와 싸우는 자는 무공이 어떠하든 그에 맞는 독을 쓰고? 있지. 그러나 자네에게는 이 늙은이
가 무슨 독을 쓸 것인지 알려주지 않겠다는 말이네. 조심해서 싸우게!]
그제야 양몽환은 늙은이의 말뜻을 알아듣고 크게 웃었다.하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창란의 말에 일양자는 펄쩍 뛰었다.
[아니 지금 어디로 가신단 말씀이오?]
[먼저 백장봉으로 가겠소이다.]
[이노형! 이노형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이다. 그러나 참지 않으면 큰 일을 그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 수록 신중을 기하고 계획해서 대사를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도관주께서는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시오?]
[지금은...... 그러나 하루 더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요?]
하는 말에 이창란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힘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럼......하루 더 생각해 보고 떠나겠소이다.]
그리고 한편!
대청에서 물러나온 하림은 자기 거처로 돌아오자 마자 복받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침대에 엎어져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참고 참았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소리를 내어 울다가 흐느끼기도 하고 어깨를 들먹이기도 하는 하림의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나와 침대와 베
개를 흥건히 적셨다.
얼마나 울었을까? 날어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울기만 하던 하림은 울다울다 지쳤는지 눈물을 거두었다.
그리고 초에 불을 당겨 탁자 위에 세워 놓고 경황없이 앉아 있었다.
이러한 때에 찾아온 사람이 옥소선자였다. 촛불을 마주보고 옥소선자는 눈이 퉁퉁 부은채 촛불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하림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옥소선자는 옆 방에서 하림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가 울음이 그치는 것을 알고 들어온 것이다.
[하루종일 울었어. 이제 울음을 그치고 내말을 들어요. 양상공은 도옥의 손에 해를 입을 사람이 아냐.]
위로하는 옥소선자의 말에 하림은 또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손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
다. 그런데 의외로 백독옹에 대한 물음이었다.
[옥소 언니! 백독옹은 아직 안 왔어요?]
[응. 아직 안 왔어.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
[언니를 속인 것이 아닐까요?...... 도옥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가 없어요.]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백독을 사용할 수 있는 재간은 있지만 거짓말은 안할거아......혹시 도옥이? 해쳤
을까 그것이 걱정이지......]
[그렇다면 나의 원도 이루어질 수 없겠군요.]
[무슨 일인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냐?]
[백독옹에게 독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려고 했어요.]
[왜?]
[도옥을 죽이려고요.]
[도옥이란 자가 얼마나 간사하고 악독한데 어떻게 그에게 접근할 수? 있겠어?...도리어 그의 계략에 빠질 거
야.]
[염려없어요. 다른 사람은 경계할지 몰라도 나만큼은 경계하지 않을 거에요. 그러나 도옥을 이길 무공이 나
에게는 없어요.]
하고 말하던 하림은 별안간 몸을 일으켜 벽에 걸린 장검을 뽑아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깨물며......
[도옥을 찾아가겠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옥소선자는 놀라는 표정으로 급히 하림의 손을 잡았다.
[안돼요. 지금은 어려워. 나의 말을 들어요.]
[말리지 마세요. 도옥을 죽이지 못하고 또 그이까지 죽는다면 나도 더 살지 않겠어요.]
그러나 옥소선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지금 도옥을 찾아간다면 인질 한 사람을 더 보태는 결과 밖에 안돼요. 더구나 사매의 무공은 도옥
에게 비교되지 않아요. 하여간 내 말만 들어요. 내가 이곳의? 사연을 모두 적어서 주소서에게 나의 현옥 편
으로 보냈어요. 이제 닷새 안으로 주소저의 지시가 올 거에요. 그때 행동해도 늦지 않아요.]
그제야 하림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밝게 웃었다.
[정말이에요? 란이 언니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글쎄 내 말만 듣고 며칠만 기다려요.]
그러나 밝게 웃던 하림은 웃음을 거두며 머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왜?]
[기다릴 수 없어요. 이미 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만 의지하고 있어서 수단을
부리거나 독한 마음을 품은 적이 없어요 그러나 이번만은 달라요. 꼭 도옥을 죽이고 말겠어요. 어떠한 수단
을 써서라도 내손으로 말이에요.]
너무나 당돌하고도 놀라운 말에 순간 옥소선자는 눈이 커졌다.
너무 울다보니 정신까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와? 기지로 빛나는 눈동
자에는 이미 굳은 결의가 역력햇다. 도대체 언제부터 하림이 이토록 다부지게 행동할 수? 있는 패기가 있었
던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 하림은 말을 계속했다.
[더 이상 나를 말리지 마세요. 만일 한번 더 말린다면 옥소언니와의 관계도 모두 끊겠어요. 다만 내일 정오
때쯤 어른들에게 내가 도옥을 찾아 따났다고만 전해주세요.]
하고는 방문을 열고 훌쩍 지붕 위로 뛰어로는 하림은 곧이어 등가보의 높은 성벽을 넘어 어둠 속으로 모습
을 감추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어서 옥소선자는 미처 하림을? 막지도 소리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멀리 사라지
는 하림의 모습만 보고 있다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항상 착하기만 하던 사매를 무슨 힘이 저토록 강하게 만들었을까?]
혼잣소리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내 가??? 가 야 할?? 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하림을 보고 혼자 중얼거리며 섰던 옥소선자가 마악 돌아서는 바로 그때, 옥소선자의
말에 대답이나 하는 듯이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친 사랑이나 증오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어요.]
하며 방으로 들어서는 목소리의 주인은 도사복 차림의 동숙정이었다.
흠칫 놀라 돌아보던 옥소선자는 장검까지 멘 동숙정을 발견하고는 쓸쓸히 웃었다.
[보고 계셨군요.]
[예,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옥소 언니는 심소저를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떻게 하다니? 심소저가 금환이랑 도옥을 찾아나선 것 말인가요?]
[그래요. 심소저는 마음만 착했지. 강호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어요. 지금은 도옥이 원수란 것만 알고 떠났지
그 부하들의 악랄함은 모르고 있어요. 저러다가 신변에 위험이라도 닥친다면 큰 일이 아니겠어요?]
[옳은 말이에요.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어떻게든 할 수가 없군요.]
[왜요? 심소저가 중간에 연락한다고 했나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주소저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려야 해요. 그래서? 잠시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군
요.]
[그럼 어떡하나...... 나 역시 이곳을 떠날 수가 없게 됐는데 ......]
[무슨 일인데요? 내가 대신하면 안될까요?]
[별로 큰일은 아니지만 대각사의 고불? 영공의 행동을 감시하라는 양사제의 부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일인지 방안에만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는군요.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래요? 그럼 내가 대신 감시하겠어요. 동소저는 심소저를 쫓아가도록 하세요. 혹시 등가보 주위를 감시하
고 있는 도옥의 부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만일 그렇다면 심소저의 행동이 이미 미행을 받고? 있을 거에
요.]
[그럼 고불 영공을 잘 감시하세요. 곧 떠나겠어요.]
하고는 곧장 자기의 거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나타난 동숙정은 잘 알아볼 수? 없도록 변장하고는 등가보의 성벽을 넘어 어둠속으
로 사라졌다.
한편!
날이 밝기를 기다려 고불 영공의 거처를 살피고 돌아오던 옥소선자는 대청 으숙한 구석에 이창란의 부하인
검북사의(黔北四義)라는 네 명의 젊은이가 이창란과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즉시 몸을 숨기고 그들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그러던 바로 그때 대청 문이 열리며 일양자와 등고강이 나오는 것도 보였다.
그러자 이창란은 주먹을 쥐고 뒤에 나오는 일양자와 등고강에게 인사하는 것이었다.
[그럼, 먼저 떠나겠소이다.]
일읍하며 하직을 고하는 이창란을 바라보며 일양자와 등고강도 주먹을 쥐고 반례하였다.
지금 이창란은 일양자와 약속한대로 하루를 더 머무르고 이제 도옥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다. 몇번 만류하
다 굳은 결의를 나타내는 이창란을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옥소선자는 무슨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 모를 일이야. 겨우 오년 전인데...... 불과 물의 사이로 싸우던 사람들이 저렇듯 의좋게 인사를 나눌 수 있
을까? 더구나 이창란은 자기가 거두어 기른 도옥을 상대로 사생을 결하는 싸움까지 하지 않았는가?? 참, 사
람의 일이란 정말 모르겠군...... 원수가 동료로 변하고 또 동료나 제자가 원수가 되다니...... 세상만사가 묘하
게 돌아가는군...... >
하고 생각하는 동안 이창란은 등고강과 일양자가 석별을 아쉬워하는 모습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네 명의 부
하를 이끌고 등가보의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옥소선자는 더 살펴볼 흥미를 잃고 등고강과 일양자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양자가 옥소선자에게 손짓하며 빨리 오라는 시늉을 했다.
[잘 오셨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소.]
[무슨 말씀인가요?]
조금 웃어 보이며 일양자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오. 안으로 들어갑시다.]
이리하여 등고강과 일양자는 옥소선자를 앞장 세우고 대청 안으로 들어가 둥근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혹시 주소저에게서 무슨 소식이라도 오지 않았소?]
먼저 일양자가 옥소선자에게 묻는 말이었다.
[아직 소식이 없군요. 이삼일 안으로 올 것같아요.]
[속히 연락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된 지금 같아서는? 주소저가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
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저도 좋겠어요. 그러나 너무 바빠서 걱정이에요. 제가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자세한 말을 나누지도
못하고 떠나왔으니까요.]
[그렇게 주소저가 바쁜가요?]
하고 묻는 일양자의 말에 옥소선자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비밀이지만..... 지금 주소저는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무공에 전심하고 있어요.]
[아! 그렇습니까?]
[극히 위험한 무공인가봐요. 그 무공은? 아직 세상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무공인데 조금이라도 단련에
실수가 있으면 목숨을 잃거나 평생 불구가 된다고 했어요. 그렇듯 위험한 무공은 주소저같은 대인대용(大仁
大勇)한 사람이 아니고는 생각도 못할 일이에요.]
하고 말하는 옥소선자의 말에 일양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나타냈다.
[옳은 말씀이오. 주소저와 같이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못할 일입니다.]
[정말 뛰어난 인물이죠.]
[그런데 이삼일 안으로 연락이 올 것같습니까?]
[제 생각에는 꼭 올 것같습니다.]
[그러시면 이 빈도에게도 소식을 받는대로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이 빈도는 주소저에게서 소식이
올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같습니다.]
[염려마세요. 소식이 오는대로 전해드리겠어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어요.]
하고 대청을 물러나왔다.
해가 중천에 뜨고 등가보에 따스한 햇살이 내려쪼이는 오후.
주소저에게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다 무료해진 일양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옥소선자의 방을 찾아갔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방 앞의 넓은 뜰 잔디밭에서 서성거리며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하얀 비단조
각으로 하나의 진(陣)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다가오는 일양자를 발견한 옥소선자는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하도 기다리기 갑갑해서 찾아왔소이다.]
[저도 도장 못지않게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오후까지 소식이 없다면 사태가 어지럽게 되겠죠?]
하면서 고개를 들어 넓은 하늘을 두루 살피며 무엇을 찾는 눈치였다.
순간, 일양자는 주약란의 소식이 오리라는 날짜가 오늘로 그 기한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그녀의 행동
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파란 하늘은 몇 조각의 흰구름만 떠있을 뿐 매일 똑같은 하늘이었다.
일양자 역시 옥소선자가 하는대로 고개를 젖히고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온통 살폈으나 머리만 어질
어질할 뿐 보이는 것은 몇 조각의 구름뿐이었다.
그러다 끝내는 눈까지 침침해지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살피던 옥소선자는 그대로 시선을 하늘에 둔채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송령(松鈴)과 팽(彭)언니에게 시켜 먼저 기별을 보낼 수도 있을텐데 ......]
하고 중얼거리는 바로 그때, 다급한 목소리로 옥소선자를 부르는 일양자의 음성이 터졌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옥소선자에게 일양자는 하늘 한 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저기, 저 구름 밑에 까만 것이 날아오는 것같소!]
[정말이에요? 어디죠? 어디?]
역시 다급하게 묻는 옥소선자에게 일양자는 팔을 들어올렸다.
[저기, 바로, 큰 구름이 있지 않소? 그 밑을 잘 보시오. 까만 점이 있지 않소?]
과연 일양자가 가리키는 곳에는 옥소선자의 눈에도 완연히 보일만치 까만 점이 하나 곧장 날아오는 것이었
다.
그리고 순식간에 까맣게 보이던 하나의 점은 하얀 자태를 나타내며 가까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그 하얀 물
체는 밝은 햇살 아래 눈이 부시도록 하얀 빛을 번쩍이면서 날아 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옥소선자는 손뼉을 치다말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영학(靈鶴)인 현옥(玄玉)을 보내다니...... 아무래도 주소저는 이번? 일을 예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
죠?]
하며 말을 마쳤을 때는 머리 위까지? 날아온 현옥이 그 긴 날개를 움츠리며? 옥조선자가 진을 만들어 놓은
비단 헝겊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것이었다.? 순간, 등가보 일대는 찬란한 현옥의? 빛으로 하여 환하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더구나 수 년만에 주약란의 현옥을 다시 보게된 일양자는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황홀함을 느낄 수 있
었다. 등 위에 네 사람을 태우고 넓은 하늘을 마음대로 날으는 현옥, 더구나 천기진인에 의해서 주약란에게
넘겨진 현옥은 그전보다 더 커졌다.
비단 위에 내려앉은 현옥은 일양자에게 고개를 돌려 몇번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오랜만에 만나 반갑
다는 인사 같았다. 일양자에게 머리를 돌려 ?번 울음을 운 현옥은 옥소선자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왼쪽 날개를 길게 펴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현옥의 머리를 쓸어주며 다정스럽게 말했다.
[수고했어요.]
하면서 펴든 현옥의 날개 밑에서 대나무로? 만들어진 둥근 통을 꺼내는 것이었다. 대나무통의? 한끝에 있는
마개를 열고 그 안에서 한장의 서찰을 뽑아들었다.
옥소선자는 조심히 서찰을 펴들었다. 그 서찰에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 잠시 적의 기세를 피하고 대기하시오. 주약란. >
너무나 간단한 사연에 옥소선자와 일양자는? 실망했다. 어떠한 계획이 있어? 대기하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주약란 자신이 직접 올 뜻으로 한 말인지 얼핏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양자와 옥소선자는 잠시 침울한 기분에 빠졌다. 그러던 얼마후 먼저 옥소선자가 입을 열었다.
[아마 주소저는 이곳의 갑박한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에요. 제가 편지를 보낸지도 며칠이 지나지 않
았어요? 그래서 이 며칠간의 위급한 사태는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주소저가 직접 오겠다는 내용도 아니고 ......]
근심띄운 얼굴로 옥소선자를 바라보는 일양자의 마음 속은 초조하기만 했다.
[할 수 없어요. 제가 직접 천기석부로 돌아가서 그간에 일어난 사태를 알려드릴 수밖에 없군요.]
[그렇게라도 해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잠시 말을 끊고 일양자와 옥소선자는 다시 침울한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일양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곧 떠나시죠.]
[예, 그렇게 하겠어요.]
[그런데 백독옹은 어떻게 된 일이오? 꼭 돌아온다고 하면서 가지 않았습니까?]
깜빡 잊었다는 듯이 말하는 일양자의 말에 옥소선자는 태연하게 웃었다.
[아직까지 안오는 것으로 보아 도옥의 손에 잡힌 모양이에요. 그러나 백독옹이 오든 말든 상관없어요. 다만,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이요.]
[무슨?]
[만일 제가 떠난 다음이라도 원군(援軍)이 왔다고 해서? 도옥을 해치려고 하지 마세요. 공연히 도옥을 건드
렸다가 그의 수중에 있는 양상공이 해를 입는다면 주소저가 노할 거에요. 그러니만큼 도관주 어른께서는 제
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주소저가 무슨 계획이 있는지 알아보고 행동하도록 해 주세요.]
[알겠소!]
일양자의 대답을 들은 옥소선자는 현옥의 등에 가볍게 올라타며
[그럼, 곧 다녀오겠어요.]
했다. 그러자 현옥도 옥소선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 긴 날개를 펼치며 서서히 하늘로? 비상해 올라가 삽
시간에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마는 것이었다.
한편 !
등가보를 떠난 심하림은 그 길로 백장봉(百丈峯)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금 하림의 마음 속과 머리 속에는 양몽환? 하나만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어떻게 하면 양몽환을? 구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쉽게 구해낼 수 있는가 하는 생각만이 하림의 전부였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이 그녀
에게는 의식되지도 않았다.
그러한 하림이 주위의 사태나 지세(地勢)에 아랑곳 없이 걸음을 재촉하며 노을이 지는 황량한? 들판을 가로
질러 가던 바로 그때, 뒷편 갈대밭 사이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나자 하림은 번쩍 정신을 차리며 장검부터 뽑
아들었다.
그 순간!
그녀 앞에 불현듯 나타나는 사나이는 단숨에 박살을 내도 시원치 않을 그래서 죽이기를 결심하고 찾아가는
바로 도옥, 그 도옥이 아닌가! 장검을 쥔 하림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뜻밖에도 쉽게 만나게된? 도옥을 하
림은 놓칠 수 없다고 다짐하고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앞 길을 가로막은 도옥은 깔깔 방정맞게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심소저, 어디를 그렇게 부지런히 가시오? 혹시 양몽환을 찾으러 가는 길이 아니오?]
하고 빈정거리는 듯하는 말에 하림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 무공으로는 도옥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면? 그 반대로 계략을 쓸 수밖에! >
여기까지 생각한 하림은 뽑아들었던 장검을 칼집에 꽂으며 잠잠히 웃었다.
[나는 또 누군가 했죠!]
[그런데 왜 장검을 거두시오? 이 도옥과 싸우지 않고 말로 하자는 것이오?]
실로 눈치가 빠른 도옥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 말을 받아넘겼다.
[무공으로 당신을 이길 수는 없고 그래서 이야기나 하자는 것이죠.]
하는 말에 도옥은 히죽 웃는다.
[모든 사람들은 심소저를 순진하디고 말하지만 이 도옥이 보는 바로는 천하에서 가장 총명한 사람이오.]
[뭘......그럴라구요?]
하고 가볍게 응수한 하림은 맞은 편의 잔디밭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서 앉아서 이야기해요.]
도옥이 따라오든 말든 먼저 잔디밭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도옥은 어슬렁어슬렁 하림의 뒤를 따라 역시 하림이 앉은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요?]
[몰라서 물어요?]
[그럼, 양몽환?]
[물론이죠.]
[핫......하...... 꽃이라든가 중천에 떠 있는 달이라든가 아니면 무술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 도옥의? 이야기를
하자면 모르지만 양몽환의 이야기라면 하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데......]
[꼭 그 이야기만 하자는 것은 아니에요. 풍월과도 관계있는 이야기에요.]
[풍월과도 관계있다고?]
[모르겠어요? 항상 당신은 총명하다고 자부하면서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해요?]
하고 생긋 웃는 하림을 응시하던 도옥의 이글이글 불타는 듯한? 눈동자는 하림의 얼굴에서 띨어질 줄을 몰
랐다.
[심소저와 이 도옥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이오? 아니면 양몽환과 조소접, 독용부인을 관계시켜 이야기하
자는 것이오?]
[우리 둘의 이야기에요. 왜 이런데서 남의 이야기를 해요.]
[그래? 핫......하......그렇다면 들어볼 흥미가 있는데.]
하림은 또 한번 의미없는 웃음을 생긋 웃어보였다.
[그럼, 제가 묻는 말에 솔직이 대답하세요.]
[그거야 어떤 것을 묻느냐에 달려있지.]
[그럼, 묻겠어요. 당신은 정말 나를 좋아해요?]
그러자 도옥은 입을 딱 벌렸다. 좋아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암, 틀림없는 사실이지. 믿지 못한다면 하늘에 맹세하겠소!]
[아니, 맹세까지는 할 필요 없어요. 제가 믿어주면 되잖아요?]
하고 생긋이 웃는 하림을 파라 도옥도 씨익 웃었다.
[그러나 모두 소용없는 일이지...... 심소저를 이 도옥이 아무리 좋아해 보았자 이미 양몽환의 부인인데.]
[그렇지만 제 말을 좀 들어봐요.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이 도옥이 하는 일은 원래부터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지. 어떤 말이든지 해보시오. 무슨 말인지 믿을 수 있
으면 믿고......]
[제가 양몽환과 비록 결혼한 몸이긴 하지만 잠자리를 같이 한 일은 없어요.]
그러자 도옥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 했다. 그러나 곧 태연해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믿을 수 있어요?]
[왜 잠자리를 같이 안하오?]
[그것은 간단해요. 누구 한 사람을 위해서죠.]
[이요홍? 그래서 양몽환과 한 방에서 자지 않는다는 거요?]
[아니에요. 저와 홍언니는 친자매처럼 지내고 있어요.]
[음! 그럼 이 도옥을 위해서인가? 설마 그런 뜻은 아니겠지?]
그러자 하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에요.]
하고 말하는 하림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도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더욱 모르겠는데. 도대체 누구 때문에 잠사리를 같이 안한다는 말이오?]
[주약란! 란이 언니 때문이죠.]
간단히 대답하는 하림을 도옥은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아니, 뭐! 주약란 때문이라구? 핫......하......당신들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주약란에게 물어야 한단
말이오?]
[그런 뜻이 아니에요. 홍이 언니와 저는 란이 언니를 존경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구나 홍이 언니와 제가 양몽환과 결혼하게 된 것도 사실 란이 언니가 가운데서 도와준 덕택이에요. 우리
들은 무수한 고난과 시련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란이 언니가 도와주고 구원해 주었어요.]
그러자 도옥은 크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거야 주약란이 속셈이 있어서 한 일이겠지. 주약란이 당신들을 도와준 것은 실은 양몽환을 도와준거
나 마찬가지란 말이오.]
[그럼, 당신도 란이 언니가 양몽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 도옥이 어떤 사람인데 모르겠소? 나는 처음부터 주약란이 양몽환을 좋아한 것을 눈치챘단 말이오.]
[저는 전혀 몰랐어요. 홍이 언니가 가르쳐? 주어서 알았을 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홍이 언니와 의논했어요.
란이 언니를 양몽환의 정실(正室)로 삼아주자고요.]
[흥! 양몽환은 여복도 많군...... 흐...... 흐...... 알았소. 이젠 그따위 이야기는 그만두고 우리 둘의 이야기를? 하
는 것이 어떻겠소?]
하며 싸늘해지는 도옥을 주시하고 있던 하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무슨 일로 양몽환과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죠?]
그러자 도옥은 하림을 응시하면서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간단해.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이 도옥은 하루하루가 불안하단 말이오. 지금 천하 무술계를
장악하려는 이 도옥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가 바로 양몽환이란 말이오.]
[그래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안되겠군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당신이 미워하는 양몽환을 놓아달라
는 것이니까요.]
하는 말에 도옥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재미있게 웃었다.
[그거야 댓가만 충분하다면, 즉 양몽환을 놓아주는데......어떠한 댓가가 있느냐에 달렸지.]
하는 말에 하림은 여유를 두지 않고 물었다.
[무엇을 바라죠? 그 댓가라는 것이?]
그러자 도옥도 여유를 두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바로 당신!]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태연했다.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저와 이야기나 했겠어요?]
도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엄숙해졌다.
[알고 있었다면 다행이오.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하시오. 후회하지 말고.]
하림도 따라 일어서며 주저없이 말했다.
[이미 오래전에 생각해 봤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시오. 이 도옥은 어떠한 여인이든 눈에 들기만 하면 즉각 짓밟는다는 것을! 그래서
이 도옥의 이름이 나쁘게 평가되지만!]
[알고 있어요. 지금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도 그런 것을 개의치 않기 때문이에요.]
도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이미 마음으로 작정했단 말이오?]
[물론이죠. 오랫동안 생각하고 찾아왔어요.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됐어요.]
도옥은 고개를 끄덕거렀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좋아! 원래 이 도옥은 누구의 말도 믿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심소저의 말을 믿기로 하겠소. 특별히 믿어주
겠단 말이오!]
[왜 저의 말만 특별히 믿을 이유라도 있어요?]
[왜냐구? 그것은 간단하지. 원래 당신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그리고 만일 거짓말을 한다면 그
에 대한 보복도 두려워 할 당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그러는 동안 하림은 하림대로 자기의 계획을 짜고 있었다.
< 이 도옥이란 자는 워낙 간사하고 꾀가? 많은 자다...... 만일 내가 도옥을 죽이려면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
못할 방법을 강구해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하림은 속 마음과는 달리 생긋이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이번에 당신을 찾아온 것은 무슨 사정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에요. 다만......]
[다만?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오?]
[정당한 조건을 걸고 담판하기 위해서 온 거에요.]
[그것이 조금 전에 말한 조건이오?]
[그래요. 저는 이미 결정하였어요. 이젠 됐죠?]
[후회하지 않겠소? 애초부터 후회할 일은 안하는 것이 좋소!]
[몇 번씩이나 말해야 돼요? 이미 결정했어요. 이젠 양몽환을 놓아 주세요.]
그러자 도옥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양몽환을 놓아주는 것은 어려울 것 없지. 그러나 만일 양몽환을 놓아주고 난? 후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
는다면?]
[물론 아직까지 저는 양몽환의 부인이에요. 그러니만큼? 제가 양몽환을 만나보고 그에게서 혼인파기서(婚姻
破棄書)를 쓰게한 후 당신과 정식으로 부부가 되는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남편있는 여자가 어떻게 다른 남
자와 혼인할 수 있겠어요?]
하는 하림의 말도 일리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만일 양몽환이 혼인파기서를 쓰지 않는다면?]
[양몽환이란 사람은 당신과 달라요. 제가 말하면 당장 그 자리에서 써줄 거에요.]
그러자 도옥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이었다.
[글쎄......양몽환의 평소 행동은 보면 그럴 것도 같은데......]
[틀림없이 써줄 거에요. 그래서 혼인파기서를 써준다면 이후 제가 약속을 안지킨다 해도 저는 갈 데가 없게
되지 않아요? 천상 당신의 부인이 되는 길밖에!]
하고 조리있게 말하는 하림을 바라보던 도옥은 몇번 고쳐 생각하고 난 다음에야 대답했다.
[좋소! 당신의 말을 따르도록 하지!]
하림은 미소를 띄웠다.
[그럼, 이제부터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그러자 도옥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쓸쓸히 웃었다.
[만일 처음부터 당신이 나를 이와같이 대해 주었더라면 오늘처럼 일을 저지르고 소란을 피우는 도옥이 되지
는 않았을 것을......]
하는 장탄식과 함께 후회의 빛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순간 도옥의 얼굴은 실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인
간 본연의 표정이었다.
그러한 도옥을 보고 있던 하림은 그에게 용기를 주는 듯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마음만 바로 잡는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아요.]
그러나 도옥은 완강히 고개를 가로 지었다.
[지금은 안돼. 어쩔 수 없이 호랑이의 등에 탄 지금의 상태로 서는......]
하고 말을 끊었던 도옥은 다시 이었다.
[당신이 이 도옥에게 오는 시기가 늦었어. 이제는 좀 더 기다려서 마음을 바로 잡아야지. 당신의 덕으로 개
과천선(改過遷善)해야겠소.]
[그럼, 당신이 지금까지 한 일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요?]
하는 말에는 은연중 가시가 있고 지나온 도옥의 과거를 힐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한 하림의 말을 듣고 있던 도옥은 쓸쓸하게 웃었다.
[사실 선(善)과 악(惡)의 차이는 종이 한장의 차이밖에 안되오. 양몽환이 천하 무술계에서 존경을 받는 이유
는 그가 오로지 남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몸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 도옥은 다른 방법으로 천하
무술계에 의구심을 일으켜 맹주로 떠받들게 하려고 할 뿐, 목적은 같으나 수단이 다를 뿐이오!]
그러나 하림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천만에 말씀, 어찌 너같은 자를 양몽환에게 비길 수 있다는 말인가. 선과 악이 종이 한장의 차이인지는 모
르지만 너와 양몽환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했다. 만일, 자기의 표정을 밖으로? 나타내 도옥이 눈치챈다면 공든 탑이 무
너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얼마동안 서로 말없이 서 있던 도옥은 슬며시 손을 내밀어 하림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하림은 뿌리치지 않
고 도옥이 이끄는대로 거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지금 자기의 손을 잡고 끄는? 도옥의 손목을 여지없이 잘라버리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한편, 도옥은 도옥대로 기분이 좋었다. 처음 하림의 손을 잡을때는 하림이 뿌리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
나 자기가 잡고 이끄는대로 다소곳이 따라오는 하림을 보고는 그만 모든 염려가 일시에 사라져버린 것처럼
흐뭇하고 기분이 좋아 마음이 탁 놓였다.
절로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했다. 그러던 도옥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한가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소!]

[좋소. 얼마든지 상대하겠소. 더구나 사전에 말씀까지 해주는 것에 감사드리오.]
하면서도 양몽환은 선수(先手)의 일격을 가해 백독옹이 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쓰러뜨리리라? 벼르고 있었
다.
그런데 눈으로 인사를 나눈 옥소선자가 빛나는 안광으로? 사태를 파악하고는 양몽환에게 다가오는 것이 분
명 양몽환의 싸움을 가로 막고 나설 눈치였다.
< ...... 지금 상태로 보아 내가 싸우는 것이 승산이 많다.? 지금 나의 수중에는 일양자가 준 보검이 있지 않
은가? 만일 옥소선자가 대신해서 싸운다면 옥피리 하나로는 대항하기 힘들텐데...... >
하는 순간, 벌써 앞에 다가선 옥소선자는 옥피리를 흔들며 백독옹에게 호령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백독옹이라구요?]
갑자기 나타난 옥소선자를 흘겨보던 백독옹은 상대도 안 된다는 듯이 한마디로 내뱉고 말았다.
[그래!]
싸늘하고도 냉정한 대답이었다.
[흥! 무공의 재간은 없고 명성은 얻어야겠고 그래서 악랄하기 그지없는 극독에? 의지하여 강호에 명성을 얻
으려는 생각인가요?]
하고 말하는 옥소선자를 노려보던 백독옹은 황소같은 눈을 부라리며 침방울을 튀기는 것이었다.
[뭣이? 이 강호 바닥에 이 늙은이의 무공을 모르는 놈은 눈깔이 빠진 놈일거요. 더구나 극독으로 말하면 무
공 다음가는 이 늙은이의 자랑인데 뭣이? 무공의 재간이 없다구?]
서슬이 시퍼래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백독옹의 입에서 무수히 튀어나오는 침방울을 피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왜 이리 큰소리요?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당하고 싶어요?]
옥소선자의 표독스러운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며 백독옹을 노렸다.
그러자 백독옹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가가대소하고는 냉정하게 말했다.
[창피라? 어디 한번 당해볼까?]
하던 백독옹은 대뜸 구두장을 휙!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순간, 강호에서 무수한 대거 경험을 쌓은 옥소선자는 옆으로 살짝 피하며 옥피리를 휘둘러? 더 이성 접근하
지 못하게 위협하고는큰 소리를 쳤다.
[잠깐 기다려요!]
그러나 백독옹은 분통이 텨졌는지 구두장을? 제대로 쥐지도 못하고 거꾸로? 휘어감은채 날카롭게 덤벼드는
것이었다.
[싸우다 말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더냐? 적수가 못되면 써억 물러가라!]
호통이 대단했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싸늘하게 웃는 것이었다.
[서두르지 말아요! 아직 싸우기 전인데 무슨 소리예요?]
[그럼, 싸워볼까?]
[그보나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무공으로 싸우든가,? 독으로 싸우든가 아무 것이나 임의로 선택해서? 싸우는
것이 어때요?]
무엇으로 싸워도 자식만만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옥소선자를 노려보던 백독옹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헛...... 허...... 그래? 아주 제법이군. 독에 대해서도 꽤 아는 모양이군!]
[천만에! 아는 바가 없어요.]
[뭐, 없다구?]
[거짓말 같아요?]
[이 늙은이는 백 가지의 독을 쓴단 말야.? 공연히 시비를 걸어서 이 늙은이의 극독 중에? 한 가지만 맞아도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결과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백 가지 아니라 천 가지의 독이라도 겁나지 않아요. 얼마든지 극독을 써 보세요.]
그러나 옥소선자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약간 기가 질린 듯 어깨를 들썩하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 백 가지의 독이라도 무섭지 않단 말인가?]
[그래요. 천 가지라도. 많은 사람? 앞에서 왜 거짓말을 해요? 그러나? 한가지 싸우기전에 약속할 것이 있어
요.]
[뭐! 약속?]
[지금 백 가지 독으로 나를 쓰러뜨리겠다고 했는데 자신이 있어요?]
하는 물음에 백독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 자신이 있다 뿐인가?]
[그럼. 만일 불행히도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나의 명(命)이 짧다고 할 뿐 원망은 안하겠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고 반대로 백독옹 당신이 죽게 된다면?]
백독옹은 한심한지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것이었다.
[이 늙은이는 항상 백 가지 이상의 독을? 지니고 다닌단 말야. 한 가지의 독으로 죽이지? 못하면 열 가지의
독을 쓰고 그래도 안되면 백 가지의 독을 쓴단 말야. 그런데도 죽지 않고 도리어 이 늙은이를 죽여? 어림도
없지!]
[그것은 겨루어 봐야 알지 않아요? 어쨌든 약속부터 해요. 나를 죽이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점점 고자세로 덤벼드는 옥소선자의 말에 백독옹은 도대체 그녀가 무슨 재간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자기
의 백독을 물리칠 수 있는지 그것이 믿기워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더구나 무슨 약속을? 하겠다고 말하는 옥
소선자의 태도는 강경하고도 승산이 확고부동한 것같았다.
이렇게 사태가 벌어지고 나면 아무래도 어리둥절해지고 당황되는 사람은 지금까지 호언장담한 백독옹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할 수없이 조건을 내세우고 말았다.
[만일 이 늙은이가 패한다면 즉시 이 중원땅을 떠나 다시는 무술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하지!]
그러자 옥소선자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요. 그건 너무 가벼워요. 나는 죽음을 걸고 싸우려는데 기껏 무술계를 떠나는 일이에요?]
점 점 궁지에 몰려 입장이 난처하게 된 백독옹은 그만 화를 벌컥 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화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그러사 옥소선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만일 나를 독살시키지 못하면 오늘부터 나의 부하가 되는 거에요. 나의 명령에 복종하고. 어때요?]
실로 어마어마하고도 심상치 않은 주문에 순간적으로 놀란 백독옹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늙은이가 새파랗게 젊은 여자에게 굽실굽실하란 말야?]
[그렇다면 독약으로 나를 독살시키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자신이 없는 모양이군요.]
[천만에! 독살시키고도 남지!]
[그럼 왜 싫다고 해요?]
노리는 듯 화를 돋우는 말에 백독옹은 그만 구두장을 들어 땅바닥을 힘껏 내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좋다! 약속대로 해주마! 오늘 꼭 네년을 죽이겠다!]
[좋아요. 후회하거나 나중에 딴소리를 하면 그냥두지 않겠어요.]
패기에 넘치는 옥소선자의 말은 이미 승부가 난 사람처럼 자신만만했다.
[염려말아! 이 늙은이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그럼, 됐어요. 먼저 공격하세요.]
그러자 이때까지 한편에 서서 대화를 듣고 있던 양몽환은 저윽이 근심되어 그대로 지켜볼? 수가 없었다. 급
히 옥소선자를 불렀다.
[안되는 말이오. 싸움이란 서로 공격하는 것이 싸움인데 어찌 먼저 독약을 쓰라고 하시오?]
하는 말은 백독옹의 독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옥소선자도 같이 공격해서 싸우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옥소선자의 대답은 너무나 동떨어진 말이었다.
[염려말아요. 그대신 비켜 비켜 서세요. 지나가는 독에 맞지 말고요. 만일 저 백독옹을 굴복시킨다면 도옥도
맥을 못추게 될 거에요.]
추호도 두려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양몽환에게 비켜나기를 권하는 것이 아무래도 기상천외의 귀신
이 곡할 재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양몽환도 옥소선자의 태연한 태도에 잠시 아연해졌지만 별도리 없이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자 백독옹은 지팡이를 들어 다시 한번 땅바닥을 후려갈기고는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 늙은이의 지팡이 속에 있는 독약은 한번 살에 닿기만 하면 시뻘겋게 부어오르다 살이 썩기 시작해서 열
두시간 지나면 죽어버린단 말야. 목숨이 아까우면 그만 물러가지!]
하던 백독옹은 지팡이의 끝을 조금 비틀었다. 순간, 노오랗고? 파란 독가루가 뿜어져 나오며 쏜살같이 옥소
선자에게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 주위에 몰려 섰던 고수들은 독가루를 피하여 저마다 뒷걸을질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
지 마주 날아오는 독가루를 흠뻑 뒤집어 쓴 옥소선자는 돌부처처럼?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이었
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는 여러 고수들은 혀를 내두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중에서도 양몽환은 입술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어떠한 기적이 일어날는지 자못 경악을 금치 못하는 순
간이었다.
< ...... 일찍이 옥소선자가 독약을 해독하는 재간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무슨 재간이 있기에 저토록
태연히 서 있을까...... >
하고 염려하고 있을 때도 옥소선자는 꼼짝않고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눈이 커지고 혀를 내두르던 고수들도 무슨 영문인지 다음에 일어날 일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제 옥소선자의 몸이 썩을 것인가. 그래서 스르르 녹아 없어질 것인가. 아니면 예기치 않은 불가사의의 기
적이 일어나 독약 속에서 옥소선자가 몸을 털고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경악의 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옥소선자의 태연한 표정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 ...... 언제 극독을 제거할 수 있는 개간을 터득했단 말인가?......놀랄 일이군...... >
하다기 혹시 천기석부에서 주약란에게 재간을 배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편, 사정없이 극독을 뽑아 옥소선자에게 뒤집어 씌운 백독옹은 이만하면 어떠냐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
로 옥소선자의 몸에 이상이 생겨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기대나 백독옹이 바라고 있는 놀라울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고 시간만 흘러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살이 붓기는커녕 꼼짝도 하지 않는 옥소선자를? 보고는 백독옹도 가슴을 내려쓸다 눈알이 커지고
말았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하며 눈을 껌벅거리자 옥소선자는 그제야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요? 처음부터 내 몸엔 백독이 침입할 수 없다고 했는데 뭐가 어떻단 말이죠?]
[믿을 수 없는데!]
고개를 흔들던 백독옹은 우악스럽게 쥐었던 구두장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맹렬히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
는 붉은 연기가 확 뿜어져 나오며 옥소선자를 뒤덮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안개같이 몰려오는 붉은 연기가 몸을 휘감거나 말거나 내버려둔채 상관없다는
듯이 서 있기만 한? 옥소선자는 도대체 극독이라는 것이 뭐 말라빠진 것이냐는 태도로 요지부동이었다.
이렇게 극독이 옥소선자에게서 맥을 못추자 백독옹은 부화가났다.
옥소선자가 쓰러지는 것은 고사하고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자기의 극독을 믿지 않으려는 표정이
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독의 효능을 떠들어댔다.
[여러분! 지금 이 극독은 미신독향(迷神毒香)이라는 것으로서 조금이라도? 입이나 코로 들어가게 되면 정신
이 혼미해져서 쓰러지는 것이오.]
그러나 대답은 옥소선자가 했다.
[흥! 그렇게는 안될걸요!]
하는 소리에 백독옹은 홱 돌아섰다.
[뭣이? 그렇게 안된다구? 이 늙은이를 속이진 못해. 이제 다섯을 셀 동안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질거야!]
하고는 천천히 하나, 두울......세던 노인은 다섯을 세고 여섯! 하다가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다섯이 아니라 다섯번씩 오백을 세어도 쓰러질 것같지 않았다.
그만 백독옹은 시뻘겋던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망신도 이만하면? 볼장 다 본 셈이다. 씩씩거리며 어깨
로 거친 숨을 몰아쉬어도 시원치가 않았다.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생각하면 자다? 말고도 분통이 터
져 벌떡 일어난 일이었다. 참을 수 없었다.
기왕에 당한 망신을 회복하려면 기상천외의 극독을 뿌려 옥소선자를 여지없이 쓰러뜨려야 하는데 태연자약
하게 서 있기만 한 것이 하늘이 두 쪽이 난대도 쓰러질 것같지 않았다. 화가 치민? 백독옹은 분통이 터질대
로 다 터져서 더 터질 분통도 없었다. 울부짖듯 큰소리로 괴상한 소리를 내던 백독옹은 왼쪽 소매를 정신없
이 흔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런 연기가 꾸역꾸역 뿜어져 나와 옥소선자에게로 뭉게뭉게? 밀려가는 것이
었다. 그러나 백가지의 독을 다 뿌려 보라는 듯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천연스럽게 서 있는 옥소선자에게
는 지독한 백독옹도 손을 들고 말았다. 붉으락 푸르락 얼굴을 씰룩거리며 수염을 배배? 꼬던 백독옹은 입을
일그러뜨린채 계속해서 삼십여 가지의 독약을 뿌리고 제풀에 지쳐버렸다.
< ......빌어 먹을...... 저년이 이 늙은이를 망신시키는구나...... >
백 가지의 독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상대방을 쓰러뜨린다는? 백독옹은 자기가 대적해온 경험으로 미루어 보
아 대개 두 가지나 세 가지의 독을 뿌리면 어떠한 강적도 대부분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몸
에 지니고 다니는 독약은 불과 삼십여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삼십 가지의? 독약도 가지고 다니기에
귀찮기만 했지 정작 세 가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세 가지의 독이 아닌? 삼십여가지의 극독을
뿌리면 석상(石像)처럼 서 있는 옥소선자 앞에서는 백? 가지의 독을 다 뿌려도 독약한 허비할 것이? 분명했
다.
더욱이 아무리 극독을 써도 옥소선자가 쓰러지지 않고 서 있기만 하자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의아심을
품은채 다음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백독옹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일찍이? 이처럼 자신의 백독이 맥을? 못추리라고는 상상밖이었다. 후끈 달아
혼자 씩식거리는 백동옹에게 그 누구도 입을 열어 성원을 해주기는? 커녕 놀리는 듯 냉랭한 옥소선자의 목
소리만 귀를 왕왕 울리는 것이었다.
[어때요? 이젠 쓸 약이 떨어졌어요? 얼마든지 더 써 보세요.]
그러나 속수무책, 더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패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음...... 이상한 일이야. 삽십 가지의 독약을 뿌렸는데...... 그렇다면 이? 늙은이의 독약이 모두 독이 없어졌단
말인가? ......]
혼잣소리하듯 중얼거리는 백독옹은 그래도 미련이 남은 듯 한가지 청을 더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늙은이의 독장(毒掌)을 상대하지?]
하고 외치는 백독옹의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백독옹의 청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좋아요. 얼마든지 하고 싶은대로 해보세요.]
하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백독옹은 싯누런 이빨을 들어내며 왼 손을 들어 벼락같이 옥소선자의 어깨를 내려
치고 말았다. 그 순간, 피할 생각도 없는 듯 옥소선자는 눈을 질끗 감았다. 그러자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번에 옥소선자의 어깨를 내리는 백독옹의 손바닥에는 많은 독기가 서려 있지 않은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 일장은 무쇠와 무쇠가 맞부딪치는 듯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장을 맞은 옥소선자보다 백독옹 노인이 손바닥이 찢어지는 듯 아파오고 뼈마디가 부
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참지못해 뒤로 황망히 물러서는 것이었다.
의외로 벌어진 사태에 당사자인 백독옹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그 다음의 옥소선자가 취하는 행동은 더욱 보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아연실색하게 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백독옹이 무슨 행동을 하던간에 석상(石像)처럼 서 있기만 하던 옥소선자가 크게 소리내어
웃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웃음을 거둔 옥소선자는 옷에 묻은 독가루를 툭툭 털어버리고? 백독옹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더 할 것이 없으면 졌다고 하세요.]
그러자 백독옹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속으로는 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길게 한숨을 쉬고 침통
한 어조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 늙은이의 적수가 아닌 것같소. 졌소!]
[그럼 약속을 지켜야죠?]
다부지게 쏘아붙이는 옥소선사의 말을 들으면서도 백독옹은 자기의 패함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허공을 바
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상해. 아니 믿을 수 었어......]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때 옥소선자는 승자의 권리를 주장했다.
[처음 약속대로 명령에 복종하겠죠?]
[그것은...... 그것은......]
부하가 되어 명령에 복종할 일이 아찔했다. 처음의 약속을 부정하려고 했으나 제대로 나와주지 않는 말이었
다. 더구나 여러 고수들 앞에서 크게 소리쳐 대답한 약속을 부정할 재간도 없게 된 백독옹이었다.
그러한 백독옹의 태도에 눈썹이 상큼 올라간 옥소선자는 차갑게 못을 박았다.
[똑똑히 말해요. 아직도 미련이 있어요? 처음의 약속을 잊었다면 쓴맛을 보여주겠어요.]
쓴맛! 전혀 거짓 위협은 아니라고 백독옹은 생각했다. 백독이나 백독장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받아내는
옥소선자의 무공을 이젠 가히 알만했다. 그래서? 풀이 죽은 백독옹은 눈을 내려깔고 흰자위를? 굴리며 볼멘
소리를 했다.
[누가 잊었다구 했어?]
[그럼, 싸움에 진 것이 확실하고 더구나 약속도 잊지 않았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볼이 부어오른 백독옹은 당장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백독옹은
어금니만 힘껏 깨물었다.
[그거야 이제부터 스승으로 섬기고 명령을 따라야지!]
[그렇다면 그대로 하겠어요?]
[이 늙은이가 한번 약속한 이상 별 수 없지!]
[됐어요. 그럼 명령하겠어요.]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형상이었다. 이구석 저구석에서는 킥킥 웃음이 터지고 나이많은 사람들은? 수염을 쓰
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일단 약속한 이상 옥소선자의 성격으로서는 그냥 둘 인물이 아니었다. 약속을 해약한다거나? 봐준다거나 하
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눈썹을 치켜 올린 옥소선사 앞에서 백독옹은 할일 없는 하인이었다.
[말하오. 귀담아 듣겠소!]
말하는 태도부터 반말에서 하소로 변했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엄숙히 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도옥을 적으로 취급하시오.]
하는 말이 떨어졌다. 그러자 백독옹은 우는 시늉을 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늙은이로 말하면 도옥의 초청을 받아 그를 도우려고 중원땅에서 왔는데 이제 어찌 그를 적으로 대하고
싸우겠소? 그것만은 제발......]
그러자 옥소선자는 큰 소리를 냈다.
[뭐라구요? 지금 말한 것은 니의 첫 명령이에요. 처음부터 나를 거역하겠단 말인가요?]
서슬이 시퍼런 옥소선자의 호통에 찔끔한 백독옹은 눈을 껌벅이며 탄식했다. 그러나 도리없는 일이었다.
[좋소. 그렇게 하라면 하겠소.]
하고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 부하를 몇 명이나 데리고 왔는지 모두 불러오세요. 그러면 다시 명령을 내리겠어요.]
[이 늙은이는 혼자 다니는 놈이오. 부하는 없소!]
[좋아요. 이쪽으로 가까이 오세요.]
그러자 백독옹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 싫어요?]
[아니. 싫은 것이 아니라 실은 이 늙은이가? 쓰던 물건을 하나도 가지고 오지 못했소. 얼마간이라도? 시간을
주면 가서 가지고 오겠소. 날이 새기 전에 돌아오겠소.]
[좋아요. 다녀오세요. 공연히 거짓말을 하면 안돼요.]
[틀림없이 돌아오겠소.]
[알았어요.]
완전히 굴복한 백독옹은 옥소선자가 쾌히 허락하는 말을 듣고는 그? 길로 등가보의 성벽을 넘어 자취를 감
추었다.
도옥을 대신한 백독옹이 무참히 패하여 욕소선자에게 굴복하자? 여러 고수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수군
거릴 뿐 누구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백독옹이 사라지고도 얼마를 더 버티고? 서 있던 옥소선자는 도옥의 무리들이? 잠잠히 서 있기만 하는데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는지 아니면 상대할 고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대로 양몽환이 서 있는 곳으로 돌아오
고 말았다.
그러자 양몽환은 주먹을 쥐고 일읍(一揖)했다.
[옥소사매는 언제 그런 훌륭한 재간은 배웠습니까? 실로 감복해마지 않는 바이오.]
하는 말에 옥소선자는 생긋이 웃다기 정색했다.
[양상공께서는 제가 정말 백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간을 지니고 있는줄 아세요?]
하는 것이었다.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듯했던 양몽환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럼! 지금 여리 고수들 앞에서 실제로 백독을 막아냈는데 그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러자 옥소선자는 의미있는 웃음을 살짝 웃었다.
[만일 그가 가지고 있는 백독의 독가루가 바뀌었다면 사람을 해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도리어 반문하는 듯한 그녀 표정은 백독옹의 독가루를 바꿔치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점점 그녀가 말하는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양몽환은 절로 긴장이 되었다.
[그럼, 옥소사매가 독가라를 바꾸어 놓았다는 말입니까?]
눈이 커다래져서 묻는 양몽환의 물음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옥소선자는? 또 한번 살짝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적은 막강한 세력으로 달려들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 약하지 않아요? 그런데 힘
과 힘으로 대결할 수 없는 싸움을 무슨 수로 이기겠어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옥소선자의 말대로 기지(機智)를 내어 싸워야 한다는 말은 수긍이 갔다. 그러
나 무슨 재간으로 언제 백독옹의? 구두장지팡이 속에 들어있는 독가루를 바꾸어? 놓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천기석부에서 주약란에게 배운 재간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수긍이 가지? 않는 이야기
였다.
그러나 양몽환은 의아심을 그대로 품은채 화제를 돌리고 말았다. 그것은 주약란이 재간을? 전수받은 옥소선
자라면 귀신도 모르게 독가루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우선 방으로 들어가서 옷이나 바꾸어 입으십시오.]
사실 옥소선자의 하얀 옷에는 백독옹이 뿜어낸 여러 색깔의 독가루가? 물감을 칠한 듯이 얼룩덜룩 묻어 있
었다.
그러자 옥소선자도 자기의 옷을 내려다 보며 약간 고개를 숙여보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하림은 앞서가는 옥소선자의 뒤를 따라 급히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백독옹이 큰 소리를 치고 옥소선자와? 겨루어본 결과가 너무나 허무맹랑하게 끝난? 것을 주위에 있는 여러
고수들은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백독옹이나 옥소선자의 웅후한 내공을 일찍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런데다 생각 밖으로 백독옹의 독가루를 뿜어내는 악랄한? 태도와 거기에 맞서 대항하는 옥소선자의 태연자
약한 태도에 어느 한 사람도 그들의 무공이 웅후하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백독옹이 사
라져가는 것이나 옥소선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찍 소리 한번못지르고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한편!
백독옹에게 양몽환을 맡기고 슬쩍 자리를 피해 수거 뒤에서 이만하면 양몽환이 죽었겠지! 하고 고개를 들던
도옥은 등가보의 성벽을 헐레벌떡 뛰어넘는 백독옹을 발견하고는 아차했다.
그러나 백독옹을 부르려고 했을 때는 이미 성벽 밖으로 사라진후였다.
즉시 사태의 위기를 파악한 도옥은 잠시 마음이 심란했다. 사실 도옥은 너무나 큰? 기대를 백독옹에게 걸고
양몽환의 죽는 모양을 눈앞에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망치듯 달려나가는 백독옹의 모습에 모든 사태가 이
미 자기에게 불리해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기가 폭삭 죽어버린 도옥의 부하들은 마음을 졸이며 방주 도옥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몇 명 되지 않는 적은 수의 등가보 젊은이들은 사기가 오르고 패기에 넘쳐 있는 것이었다.
그러는 한편에서 한때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던 곤륜파의? 장문인인 일양자와 천용방의 방주였던 이창
란이 저마다 혀를 차며 이야기에 한창이었다. 먼저 일양자가 입을 열었다.
[이노형! 지금 백독옹이 싸움에 패한 것은 비단 우리를 위협하던 적수가 한 명? 제거되었음을 의미할 뿐 아
니라 도옥의 한 팔을 짤라버린 것과 같지 않소이까?]
[그렇다고 봐야 하겠죠. 도관주!]
[그런데 빈도가 알 수 없는 것은 옥소선자도 우리와 마찬가지의 몸인데 어찌 극독을 맞고도 별 이상이 없는
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이 빈도 역시 그런 생각을 하였소만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데 등가보의 주인인 등고강이 수염을 날리며 달려와 먼저 이창란에게 인사말을 건네었다.?
[이노영웅! 이 빈도가 이미 대명을 듣고 뵈옵기를 원했는데 오늘 다행히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하며 두 손을 마주잡고 읍했다.
그러자 이창란도 주먹을 쥐고 반례(返禮)했다.
[황송하오이다. 귀하가 바로 등대보주님이 아니신가요?]
[바로 그렇소이다.]
[빈도의 사위를 그토록 잘 보살펴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언제 들었는지 양몽환에게서 그간의 사정을 들은 이창란은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자 등고강은 손을 흔들며 크게 웃었다.
[천만에 말씀이오. 양대협께서 우리 등가보에 오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하며 겸손의 말을 했다. 등고강과의 수인사를 끝낸 이창란은 앞에 서 있는 일양자를 등고강에게 소개했다.
[이 분이 바로 곤륜삼자의 한 분으로서 빈도의 사위되는 사람의 스승입니다.]
하고 소개말을 하자 등고강은 주먹을 쥐고 읍했다.
[곤륜삼자의 대명은 익히 들었소이다.]
하고 일읍하는 등고강을 향해 일양자도 주먹을 쥐고 허리를 굽혔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별 재간도 없습니다.]
하고 답례하던 일양자는 갑자기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바람에 이창란과 등고강의? 시선도 절로 일양
자의 시선을 따랐다.
그곳에는 보검을 힘있게 쥔 양몽환이 걸음도 당당하게? 조서접과 독용부인이 갇혀있는 수거 앞으로 다가가
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양몽환을 먼저 발견한 일양자는 낮은 음성으로 이창란을 불렀다.
[이노형! 속히 사위를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
순간, 멈칫하며 일양자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이창란을 보고 일양자는 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 도옥이 데려온 고수물이 어느? 구석에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더구나 아까보다 수거가
훨씬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이 아무래도 도옥이 또 다른 간계를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유적지계(誘
敵之計)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자 이창란은 엄숙한 표정으로 양몽환을 응시하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도관주! 우리들이 뒤를 따라가 호응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합시다. 빈도 역시 그럴 생각입니다.]
하는 말에 이창란은 굵은 눈썹을 찌푸리며 데리고 온 네 명의 장정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여기 계시는 등대보주님의 분부를 따르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네 명의 장정은 즉각 하나의 방진(方陣)을 치며 허리를 굽혀 일제히 대답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면서 각기 장검을 뽑아들고 늠름한 자세로 버티고 서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 있는 네 명의 장정은 과거 전용방의 방? 조직체였던 귀주와 운남성의 방책(幇責)인 파주(派主)들
의 아들들로서 이창란이 천용방을 해산하고 은거하게 되자? 파주들은 자기의 아들들을 보내 방주의 심부름
이나 해서 방주를 도우라고 보낸 것이었다. 그러한 내력을 지니고 있는 네 명의 장정을 이창란은 옛날의 천
중사추(川中四醜)처럼 키우기 위하여 온갖 무공을 가르쳐 제자처럼 데리고 다니는 장정들이었다.
그리고 장정들도 또 이창란의 명령이라면?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을만큼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머리를 조아리며 일제히 대답한 것이었다.
네 명의 장정을 등고강에게 맡긴 이창란은 일양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거로 걸음을 옮기려는 바로 그
찰나! 누군가가 등뒤에서 큰소리로 일양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도관주 선배님!]
순간, 퍼뜩 돌아서는 일양자 앞으로 낯선 장정이 한 자루의 장검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들고 다가왔다.
[선배님! 이 장검을 가지고 가십시오.]
두 손으로 받쳐들고 내미는 장검을 엉겁결에 받아들기는 하였지만 일양자의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등고강이 웃는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빈도의 자식입니다.]
장검을 건네주는 등개우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등개우입니다. 선배님!]
[고맙소!]
일양자도 반례하며 웃어주었다.
사실 하나밖에 없던 보검을 양몽환에게? 준 일양자는 자기가 장검도 없이? 수거 앞으로 달려나가려던 것을
생각하고는 속으로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그때, 마침 등개우가 맨손의 일양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일양자는? 수거 앞에서 당황할 뻔한 것이었다. 거
듭 고맙다고 인사를 남긴 일양자는 급히 앞서가는 이창란의 뒤를 따랐다.
한편, 일양자에게서 보검을 받아들때 쇠를 짜를 수 있다는 일양자의 말을 믿고 있던 양몽환은 지금 자기 손
아귀에 힘있게 쥐어진 보검으로 수거의 쇠창살을 끊고? 조소접과 독용부인을 구하려는 결심에서 수거 앞으
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역시 기지(機智)가 있었다. 지금 자기가 향하고 있는? 수거 앞에 도옥의 간계가 무수히 깔
려 있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어떤 함정, 아니면? 날렵한 고수들을 매복시켜 놓고 양몽환 자기를 기
다리고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조소접과 독용부인이 일시적으로 도옥의 간계에 빠져
지금은 갇혀있는 신세지만 조소접의 무공이 아니고서는 도옥을 쓰러뜨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위험
을 무릅쓰고라도 조소접을 구출하여 도옥을? 섬멸하는 길 밖에는 별도리가 없음을? 알고 지금 수거 앞으로
다가가는 양몽환이었다. 사실 수거 앞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힘껏 싸워서
조소접과 독용부인을 구출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거의 수거 앞까지 다가간 양몽환은 몸에? 있는 진기를 힘껏 운기시키며 단전(丹田)에 운집시키고는? 예민한
안광으로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혹시 돌연한 공격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일양자와 이창란은 양몽환의 뒤를 훨씬 떨어져 걸음을 멈추고는 역시 사방을 휘둘러 만일의 사대에
대처하고 있었다.
얼마동안 주위의 동정에 귀를 세우고 살피던 양몽환은 한걸음 두 걸음 수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별 이
상은 없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조금 용기가 났다. 그리고 보검에 힘을 주며 한 걸음 더 다가가 쇠창살을 겨
누고 보검을 날리려는 순간, 그때까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조소접이 황급한 어조로 외치는 것이었다.
[안돼요! 물러서요!]
순간, 뜻밖에 조소접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깜짝 놀란 양몽환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 앞이 환해지는가 했을 때는 이미 양몽환이 섰던 자리에는 한주먹의 은침(銀針)이? 화살처럼 날아
와 꽂히고 그 뒤를 이어 세 줄기의 파란 불덩어리가 무지개처럼 원을 그리며 내려꽂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는 양몽환이 조금이라도
지체했더라면 여지없이 화염 속에 휩쓸리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양몽환을 겨누고? 떨어진 불덩어리는
이글이글 불길을 올리며 저만치 굴러가다 폭음과 함께 하늘 높이 불꽃을 날리며 맹렬히 타오르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위기를 면한 양몽환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땀만 흘렸다.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얼마만에
야 정신을 차리고 안도의 숨을 몰아쉰 양몽환은 머리가 어지럽고 귀가 윙- 울렸다.
< ......후유...... 조금만 늦었어도 저 불덩어리를 흠뻑 뒤집어 쓸뻔했구나...... >
절로 입이 벌어질만큼 가공할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주위를 살피며 양몽환을 지켜보다 은침과 불덩어리가? 쏟아져내리는 것을 보고 가슴을 졸이던 일
양자와 이창란은 양몽환이 무사함을 확인하고는 저마다 가슴을 내려쓸었다.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갈
용기가 없는 듯했다.
이때, 수거의 쇠창살과 불덩어리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번갈아 보다 얼이 빠진듯 맥없이 서? 있는 일양자와
이창란을 발견한 양몽환은 돌아서서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양몽환 자기를? 염려하고 따라
온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스승님과 장인어른 두분께서 저를 이토록 염려해주셔서 황공합니다.]
하고 사의를 표했다. 그러자 먼저 이창란이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하는 말은 과연 무술인의 관록이 엿보였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강적을 조심해라!]
하는 말에 양몽환은 주먹을 앞가슴에 대며 머리를 다시 숙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양몽환은 그 길로 돌아서서 장검을 휘둘러 자신을 보호하며 수거 앞으로 다시 다가갔다.? 그것은 어떻게 하
든지 숨어서 암기를 쓰는 도옥을 불러내어 승부를 겨루리라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가느
나란 음성이 양몽환의 귀를 간지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즉각 그것이 전음지술(傳音之術)로 조소접
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조소접이 전음지술로 알려오는 말은 계속 들려왔다.
[도옥은 나의 몇 곳의 혈도를 짚어 폐쇄시키고 또 독약을 먹였어요. 그래서? 도옥은 제가 아부 것도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지금 운기해서 폐쇄된 혈도도 풀었고 온몸으로 퍼지는 극독도
한 곳으로만 모이게 했어요. 그렇게 되면 나흘 후에는 완전한 몸으로 싸울 수 있을 거에요.]
하고는 잠시 말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 양상공은 저 때문에 너무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세요. 저 스스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어요. 다만, 양
상공께서는 저의 생사에 냉정을 보이세요. 너무 조급히 구하려고? 하면 도옥의 계략대로 될 뿐이에요. 양상
공께 미안한 것은 과거에 너무 괴롭혀드린 점이에요. 지금 후회하고 있어요. 용서해 주세요 ......]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수거 속에서 용서를 비는 조소접이 애처롭고 가엾었다.? 그래서 즉시 전음지
술로 위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도옥이 어디선가? 숨어서 자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생
각이 들었다.
< 계략이 많은 도옥이 그대로 있을리는 없다....... 틀림없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것인데 조소접과 말을 주
고 받는다면?...... >
모든 사연을 알아 듣고 잔인성을 들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주저하고 있을때 다시 조소접의 전음
이 들려왔다.
[저의 말에 대답하지 말아요. 지금 어둠 속에서? 도옥이 지켜보고 있어요. 그리고 저를 구하려고 하지? 말고
도옥과 싸우게 되더라도 패하지만 마세요. 나중에 제가 나가서? 박살을 내겠어요. 지금 도옥은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지 므르겠어요.]
조소접의 전음은 여기서 다시 끊겼다.
양몽환은 조소접의 전음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그리고 맨 나중에 한 말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 ...... 그럴지도 모르지...... 자기들이 크게 믿었던 백독옹이 옥소선자에게 패하고? 떠나버린 지금 도옥은 도
옥대로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백독옹의 무공을 따를 자를 내세워 역습해 올
지도 모른다...... >
하고 생각하는 양몽환이었다. 사실 양몽환은 근래? 수 년동안 무공의 진보도 진보지만 생각하는? 폭도 매우
넓어졌다.
양몽환은 도옥이 믿고 있던 백독옹이 자기를 떠나자 그에 앙심을 품고 실로 무시무시한 보복책을 강구하고
있으리라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일 도옥이 어떤 계략을 꾸며서 역습한다면 그때는 그야말로 그? 위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처절한
참상이 벌어질 것이었다.
잠시 머리가 복잡해진 양몽환은 적은 수로 밀물과 같이 달려들 도옥의 공격을 어떻게 제압하는가에 고심하
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드디어 안하무인인 도옥의 방자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
다.
[양형! 양형을 도우려고 고수들이 꽤 많이 모였군! 흥! 그렇다면 이제부터 슬슬 손을 써볼까 하는데? 어떠시
오?]
하면서 누런 장삼에 금환검을 멘 도옥의 사태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나타났다.
지금까지 수거 뒤에서 숨어있다가 모습을 나타낸 도옥은 빠른 솜씨로 금환검을 뽑아들고 수거 앞으로 다가
가 쇠창살 사이로 금환검을 집어놓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눈앞이 아찔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도옥의
금환검이 검빛을 번쩍이며 조소접의 등을 노리고 날쌔게 찌르는 것이 아닌가!
[앗!]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던 양몽환은 부르르 주먹을 떨었다.
그러나 조소접의 등으로 날았던 도옥의 금환검은 그대로 조소접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멈추는 것이었다. 도
옥은 칼끝을 등에 들이대고 양몽환을 바라보펴 싸늘하게 웃음을 흘렸다.
[양형! 조소저를 죽이는 것이 좋겠소? 살리는 것이 좋겠소?]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잔인하고도 살기가 도는 도옥을 노려보며 냉정히 대답했다.
[도형도 인간이라면 그따위 비열한 짓은 못할 것이오!]
그러자 도옥은 흥! 하고 코웃음을 터뜨렸다.
[양형! 그래도 이 도옥은 과거의 정분을 생각해서 친구의 의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묻는 것이오. 그렇지 않
다면 조소저는 물론 이 등가보도 재밖에 남는 것이 없을 거요.]
[도형이 그렇게 악독하다는 것은 전부터 알아온 이 양모인이오. 그리나 무엇때문에 악한 일을 하는 거요?]
[이유야 간단하지. 만일 양형이 손에 든 장검을 버리고 이 도옥의 말대로 수거 안에 들어가 두 여자와 단꿈
을 꾸겠다고 하면 즉시 이 도옥은 부하를 데리고 등가보를 물러가겠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하겠소?]
[흥! 대단하시군. 그렇다면 먼저? 조소접부터 죽여버리고 그 다음? 독용부인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등가보를
불태워 모든 사람들을 몰살시키겠소!]
그러자 뒤에 있던 이창란이 양몽환보다 먼저 코웃음을 치며 눈썹을 곤두세웠다.
[이놈! 이 노부가 이곳에 있는 한, 짐승 한마리도 다치지 못한다!]
그러나 도옥은 옛 은인이며 스승인? 이창란에게는 대접을 해주는 듯 아무? 대답도 없이 여전히 양몽환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양형! 속히 결정해서 대답하시오. 이? 도옥은 원래 오랫동안 기다리지 못할? 뿐 아니라 기다리길 싫어하는
사람이오.]
그러자 더 듣고 있을 수 없는 양몽환은 이창란과 일양자를 한번 돌아보고는 입을 꾹 다문채 앞으로 걸어나
가는 것이었다.
그러는 양몽환을 저윽이 바라보고 있던 이창란은 옆에 있는 일양자를 돌아보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도관주! 저 애는 너무 성질이 깨끗하고 곧단 말이오. 앞에 함정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나가는군요.]
근심스럽게 말하는 이창란의 말에 일양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노형께서는 무슨 묘책(妙策)이 없으신가요?]
[이 빈도에게 묘책이 있다면 어찌 이렇게 서 있기만 하겠소.]
도리어 반문하는 이창란이었다.
[이노형! 이 빈도의 생각으로는 환아( 兒)가 도옥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해도 조소저를 죽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창란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완강히 흔들었다.
[도관주! 그렇게 판단할 것이 못됩니다. 도관주께서도 익히? 아시겠지만 도옥이란 놈의 위인됨이 워낙 악독
하지 않소이까? 더구나 깊이 생각하지 않는 성미에 또 어떤 일을 벌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는 이창란의 말을 듣고 있는 일량자느 고개를 끄덕거렸다. 능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창란과 일양자는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양몽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을 불허하는 순간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도옥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던 양몽환은 도옥의 고함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양형! 보검은 버리고 나오시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도옥을 노려보던 양몽환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도형! 도형이 고수들을 이끌고 등가보에 온 것은 이 양모인을 없애려고 온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잔인한 짓을 한단 말이오? 도형은 남아답게 이 양모인과 승부를 겨루는 것이 어떻소?]
하고 눈을 부릅뜨는 양몽환에 도옥은 여전히 싸늘한 태도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양형은 평소 이 도옥의 인간성을 잘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오만 기분을 상하게 하는 감정적인 말을 하시
않는 젓이 이 도옥이오. 그런데 지금 이 도옥에게는 실로? 근사한 계략이 한가지 있소. 그 계략으로 양형이
이 도옥앞에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단 말이오?]
[마음대로 해 보시오. 도형이 생각하는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조소저와 독용부인은 관계없는 일이
오. 그녀들을 위협하지 말고 석방하시오.]
그러나 도옥은 잔인하게 웃는 것이었다.
[비록 양형의 입은 그따위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녀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오?]
[무엇이 그렇지 않다는 말이오?]
[잘 들어보시오. 조소저와 독용부인은 겉으로는 이 도옥을 도우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양형을 도우려고 했단
말이오. 이 도옥이 그런 속임수에 넘어갈줄 알았겠지만 어림도 없소.]
[그래서?]
[그래서 이 도옥은 조소저와 독용부인을 아낌없이 죽여 이 도옥을 해치려는 두 명의 강적을 처치해 버리겠
다는 것이오.]
하고 말을 끓었던 도옥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이 도옥을 따르는 자는 살려두겠지만 배반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죽여버릴 거시오. 그
리고 조소저와 독용부인을 죽이고 그 다음에 양형과 싸우겠소!]
말을 마치는 순간! 조소접의 등에 대고 있던 금환검에 힘을 주며 순간적으로 피할 사이도 없게? 찔러버리고
말았다.
[앗!]
가슴이 찢어지는 듯 비명을 지른 사람은 정작 등에 금환검을 맞은 조소접이 아니라 양몽환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찌 예상이나 했으랴! 도옥의 금환검에 힘을 주는 순간과? 등 뒤에도 눈이 있는 듯 재빠르게 몸을? 앞으로
수그리는 조소접의 날쌘 동작은 똑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자 금환검은 조소접의 등을 스치고 그대로 빗나가고 말았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본 양몽환은 넋이 빠지는 듯 너무나 의외의? 행동에 멈칫 정신을 차리며 우뢰같은 큰소
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만두지 못해!]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장검을 쥔 팔뚝의 심줄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러자 도옥은 차디찬 음성으로 내뱉았다.
[뭣이? 양형은 관계하지 마시오. 여기 있는 조소저와 독용부인이 양형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한 무슨 참견
이오?]
하면서 눈썹을 여덟 팔자로 세우는 도옥의 얼굴에서 양몽환은 그야말로 살기가 등등하고 잔인한 웃음을 놓
치지 않았다. 그 순간, 양몽환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앞섰다. 정말 그대로 두면 사정없이? 죽일 것이 분명
했다.
< ......저 손! 저 웃음! 분명히 살기가 떠 있다! 그대로 두면 끔찍한 살인이 날 것이다...... >
더구나 쇠창살 안에 갇힌 조소접이나 독용부인의 처지는 문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
각에 양몽환은 그만 굴복할 도리밖에 없음을 자인했다. 살려야한다는 한가지 생각만이 그의 머리속을 꽉 채
우고 있는데는 양몽환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어떻게 하면 그녀들을 죽이지 않겠소?]
그제야 도옥은 씨익! 웃었다.
[그거야 간단하지. 아무소리 말고 양형이 이 수거 안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살릴 수 있소.]
[그러면 도형은 등가보를 물러가겠소?]
[양형이 원한다면 물러가겠소.]
하고 대답할 때 무슨 신호를? 했는지 수거 한가운데로 몇개의 쇠창살이? 쭈욱 내려와 조소접과 독용부인을
한 곳으로 몰아넣고 가운데를 막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마 양몽환이 들어올 계산을 하고? 미리 마련했던
모양이었다. 이와같이 해서 수거 안에는 직접적으로 조소접과 독용부인과의 접촉을 막는 두 개의 방이 마련
된 셈이었다.
이때, 얼마동안 신중히 생각에 빠져 있던 양몽환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이창란과 일양자를 돌아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보검을 땅에 내려 놓았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이미 굳은 각오로 결심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수거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었
다. 그러자 양몽환의 뒤를 따라 이창란이 달려나가려는 것을 일양자가 눈짓해서 말렸다.
한편, 수거 앞으로 다가오는 양몽환을 바라보고? 있는 조소접과 독용부인의 눈은 전에 없이? 광채를 발하고
샛별처럼 빛나는 눈동자에는 제각기 정이 담뿍 어려 있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서 두 명의 미녀가 발하는 광채는 너무나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양몽환은 눈을 딱 부릅뜨고 열려진 수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열렸던 수거의 쇠창살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혀졌다.
장내는 또 다시 찬물을 끼얹은 듯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적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홀연 땅이 꺼질듯 깊고 깊은 한마디의 신음같은 탄식소리가 침묵을 깨뜨리고 말았다.
조용한 침묵을 깨뜨리며 퍼져나간 탄식소리는 장내의 분위기를? 더더욱 침울하게 하고 무거운 중압감을 느
끼게 했다.
그 탄식소리를 듣는 여러 고수들은 제각기 침울해 하기도 하고? 심지어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지만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소리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듯 착잡한 침묵 속을 뚫고 삐거덕삐거덕 여덟 필의 말이? 끄는 수거는 요란한 바퀴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협 박 장 에?? 실 린?? 사 연
수거가 점점 요란한 마차 바퀴소리를 남기며 조금씩 멀어져가는 바로 그 순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 이
창란의 허연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던 이창란의 절규가 터졌다.
[마차를 멈춰라!]
조금전 내쉰 탄식소리로 교교한 달빛 아래 잠잠했던 등가보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창란의 소리에 장내가 잠
시 술렁거리다가 조용해졌다.
이때, 도옥이 휙 돌아섰다.
[이노영웅께서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수거를 잠시 머무르게 하라!]
[그건 안됩니다. 지금 양형과 등가보에서 곧 물러간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뭣이? 너는 가도 좋다. 그러니 수거만은 여기 두고 가라! 두고 가겠느냐? 그냥 가겠느냐?]
하고 호통치는 이창란의 무시무시한 얼굴이나 마주 노려보는? 도옥의 태도는 금방이라도 불꽃을 튀며 격전
을 벌릴 것만 같은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마주 노려보고 있는 이창란도 마음이 착잡했지만 도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옛날? 천용방의 방
주시절 이창란은 지금처럼 도옥에게 눈을 부라리며 명령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지금은 양상이? 달라진 것이
다.
< 그렇지. 한 때는 그래도 은사였고 더구나 날 키워준 부모같은 이창란이 아닌가? 더구나 천용방에서 그다
지도 나를 아껴주던 사람이 바로 이창란이다. 그런데 지금 많은 고수들 앞에서 호령을 한다면...... 옛정을 생
각하면 그의 말을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 >
하는 반면에 이창란은 도옥을 생각할 때마다 노엽기만 했다.
< 이놈......네가 지금 강호를 활보하는 것이 누구 덕이냐? >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으로 말하면 피를 토하고 죽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이창란이었다. 이렇듯 분노한 이창
란 앞에서 도옥은 일말의 감회가 서려 실로 도옥답지 않게 망설이고 주저했다. 앞서가는? 수거를 세워야 하
는지, 아니면 그대로 보내야 하는지 심히 괴로운 심정이었다.
그러던 도옥은 불쑥 장래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일어나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 지금 이 시기야말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때가 아닌가? 이제 나의 뜻대로 양몽환을 사로잡고 조소접과 독
용부인도 나의 손아귀에 있다. 무엇이 두려운가. 대업을 완수하려는 내가 무슨 일로 망설인단 말인가? 비록
이창란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지만 지나간 과거는 과거로 족하다. 은혜가 다 무엇인가? 수거를? 놔두면 성공
일보 앞에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지 않는가?...... >
여기까지 생각한 도옥은 본연의 방자하고 오만한 도옥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강경히 딱 잘라 말하는 도옥은 실로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때 한 옆에서 도옥을 노리고 섰던 일양자는 양몽환이 놓고 간 보검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이창
란을 불렀다.
[이도형! 말해야 소용없습니다. 미치광이 같은 놈과 무슨 말을 한단 말씀이오.]
그러자 도옥은 살기띄운 눈에 불을 켰다.
[이 도옥이 다음에 없애버릴 대상은? 바로 당신 곤륜삼자라는 것을 알아두시오.? 곤륜파 전부를 몰살시키겠
소.]
하고 외치는 소리에 일양자는 빙긋이 웃었다.
[자네가? 곤륜파를 몰살시켜? 이놈!]
그러나 웃음마저 싸악 거둔 도옥은 이마를 찌푸렸다.
[좋소. 오늘부터 육개월 이내에 곤륜파를 몰살시키겠소. 그때까지 죽지말고 살아있다가 도옥의 금환검을 맛
보시오!]
무시무시한 공갈이요 협박이었다. 그 말에 일양자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이창란이 나섰다.
[네가 비록 귀원비급에 기록된 무공을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는지는 모르지만 저 수거를 놔두지 않고 가겠다
면 이 노부가 쾌히 귀원비급의 무공을 시험해 보겠다.]
냉랭한 어조로 도전하는 이창란에게 도옥은 코웃음을 쳤다.
[이노영웅께서는 꼭 이 도옥과 승부를 가려야 하겠습니까?]
[암! 그러나 승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오늘 수거를 놓고 가지 못하겠다면 이 노부와? 너 둘 중에
하나는 없어져야 한다!]
조금도 거리낌없이 단호히 선언하는 이창란은 그만큼 비장한 각오였다.
그러나 도옥은 여전히 싸늘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이노영웅께서 사위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토록 깊은데는 이 도옥도 실로? 감복해 마지 않는 바이오. 그러나
양형은 원래 색(色)을 좋아해서 항상 여자를 끼고 다닙니다. 아! 지금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요홍이나 심
하림과 같이 이미 두 명의 처첩이 있는데도 조소저와 독용부인을 탐내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수거 안으로
기어드는 꼴을 보시고도 모르겠습니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참 떠벌리다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때 도옥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일양자가 소리쳤다.
[닥치지 못해?]
하는 것은 일양자 자신도 놀랄만큼 큰 소리였다.
잠시 도옥의 입을 봉한 일양자는 급히 이창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노형은 잠시 물러나십시오. 이 빈도가 싸워야겠소이다.]
하고는 보검을 쓱 뽑아 은광을 뿌리면서 한 걸음 나섰다.
[더 시시비비를 가릴 것 없다. 어서 덤벼라. 이 무례한 놈아!]
그러자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던 도옥은 금환검을 휘둘러 역시 검장을 뿌려 놓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좋소! 조심하시오!]
하고 소리친 도옥은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며 땅을 박찼다. 그? 순간, 도옥의 몸은 금환검과 하나가 되어 일
양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일양자도 무공으로 늙은 명인이었다.? 도옥 하나쯤 두려워해서 몸을? 사릴 위인은 아니었다. 더구나
곤륜파의 장문인인 일양자가 아닌가? 즉시 보검을 휘둘러 밑에서부터 위로 거슬러 갈기며 도옥의 금환검을
노리고 마주쳐 나갔다.
이때, 도옥은 섬광이 번쩍이는 일양자의 보검을 보는 순간, 그 보검이 보통의 장검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
다. 그리고 자기의 금환검이 보검과 맞부딪치는 날이면 그 다음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즉각
금환검을 쥔 팔을 거두어들이며 일양자의 장검을 피하면서 느닷없이 왼? 손을 휘둘러 일양자의 오른 손 혈
도를 짚으려고 했다.
그러나 궈원비급에 기기묘묘한 검법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양자는 도옥이 이미 귀원비급을
터득하고 자유자재로 몸을 쓰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고 순간순간을 날카롭게 지켜보며 역습하고 공격했다.
만일 순간적으로 아차하는 날이면 마지막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신경을 날가롭게 하고 조심하면서 곤륜파의 분광검법(分光劍法)을 발휘하는 일양자의 보검은 찬란한 검광을
뿌리며 빈틈없이 방어함과 동시에 추혼십이검법(追魂十二劍法)을 사용하여 날카롭게 공격을 취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일양자의 보검과 도옥의 금환검은 서로 아슬아슬한? 위기를 스치면서 어언 삼십여합의 격렬한 공
방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더구나 무쇠를 무우 토막 짜르듯 한다는 일양자의 보검 앞에서? 마음대로 금환검을 휘두를 수 없는 도옥은
약간 불리한 위치에서 일양자의 보검이 빗나가는 기회를 노려야 했다. 그러나 귀원비급의? 무공으로 단련한
그의 몸이나 변화무쌍한 검법은 기기묘묘하다 못해? 마치 검무(劍舞)를 추는듯 보는 사람의 눈을? 현혹시켰
다.
일양자의 노련한 수법으로 신중을 기해 공격하는 것보다 일양자의 보검을 피해 순간순간을 노려 역공해 들
어오는 도옥의 공격이 더욱 날카로웠다.
그러는 한편, 용두지팡이를 꼬나잡고 한편에서 일양자를 성원하고? 있는 이창란은 점점 마음이 초조해졌다.
지금의 형세로서는 일양자나 도옥의 무공으로? 보아 쉽게 승부가 날 것? 같지도 않은데다가 양몽환을 태운
수거는 자꾸만 이창란의 시야에서 멀어져가기만 하는 것이었다.
[도관주! 조심하시오. 이 빈도는 먼저 환아를 구해놓고 이 흉악한 놈을 처치하겠소!]
크게 외치고는 용두지팡이를 풍파처럼 휘둘러 주위 일대에 온통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놓으며 그대로 멀어
져가는 수거를 뒤쫓아 나갔다.
순간, 위험을 느낀 도옥은 이를 부드득? 갈며 금환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일양자를? 주춤 물러서게 한 다음,
한 걸음으로 수거 뒤를 쫓아가는 이창란의 앞길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잠깐 기다리시오!]
그러나 한번 울화통이 터진 이창란은 거칠 것이 없었다. 머리 위로 휘둘러 무시무시한? 장풍을 일으키던 용
두지팡이를 멈추지도 않고 냅다 도옥의 면상을 향하여 힘껏 날렸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앞으로 내뻗쳤다가
다시 이를 악물며 역소오악(力掃五嶽)의 수법으로 도옥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그러자 도옥은 성큼 옆으로 피해 이창란의 지팡이를 간단히 막으면서 차갑게 냉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이노영웅!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섣불리 경거망동을 부려서 이 도옥의 마음을 변하게 한다면 후회해
도 소용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오!]
그러자 이창란은 휘두르던 용두지팡이를 멈추며 가가대소했다.
[뭣이 어째? 이놈! 마음이 변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도옥은 양형과 언약한 바 있어 물러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노영웅께서 이 도옥의 앞길을 막고 괴롭힌
다면 즉시 약속을 취소하고 여기 등가보 일대를 재로 만들어 놓을 것이오.]
[이놈!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 그리고 등가보를 재로 만들도록 그냥 둘 것같으냐?]
[그래요? 이노영웅께서는 이 도옥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죠? 흥! 그렇다면 마음대로? 수거를 쫓아가
보시오!]
[오냐! 네 놈이 비록 이 몇 년간 무공이 늘었다 해도 이 노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굴리던 아창란은 들었던? 용두지팡이를 벼락같이 휘둘러 도옥을 대여섯 걸음이
나 물러서게 했다.
이창란의 장풍(杖風)에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서던 도옥은 그만 보검을 겨누고 눈을 부라리는 일양자와
딱 마무치고 말았다.
그러자 도옥은 급히 옆으로 비켜서며 눈썹을 곤두세웠다.
사실, 자기도 모르게 뒤로 밀려난 도옥은? 설마 뒤에서 일양자가 보검을 겨누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갑자기
양면에서 협공을 받게된 도옥은 절로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죽고 싶소?]
악을 쓰며 금환검을 바로잡은 도옥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금환검을 휘둘러 일양자를? 공격했다. 순식간에
여섯 수의 공격을 태풍처럼 퍼붓고 멈추어서는 그의 민첩한 검술 앞에서 일양자는 침착하게 보검을 휘둘러
가볍게 막아냈다.
누가 보든지 일양자에게 퍼부운 도옥의 공격은 가슴이 서늘하도록 살기와 득기가 내뿜는? 공격이었다. 그러
나 일양자는 수 십년 동안의 대적 경험과 노련한 수법으로? 도옥의 공격을 간단히 물리치고는 숨도 돌려쉬
지 않고 몸을 날려 보검을 힘껏잡았다. 그리고 곤륜파의 자랑인 추혼십이검법 중에서 기봉등교(起鳳謄蛟)와
삭풍광소(朔風狂嘯) 그리고 무흠운수(霧欽雲收)의 세 가지 검법을 혼용하여 성난 파도같이 역공을 감행했다.
세 가지의 검술법도 보기드문 재간이었지만 일양자의 손아귀에 쥐어진 보검이 더욱 맹위를 떨쳐 마치 허공
중에서 불꽃이 튀는듯 찬란한 검광을 무수히 뿌리며 수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검풍이 도옥을 휩쓸고 들이
닥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옥은 황망히 뒷걸음질처 일양자의 공격권에서 위기를 모면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뒷걸음질치는
도옥이 일양자의 추혼십이검법을 제압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일양자의 보검에 금환검이 두 동강으
로 날 것을 염려해서 황망히 피한 것에 불과했다.
그만큼 도옥의 무공은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일양자의 보검에 금환검이 박살이 난다면 모든 것은 끝장이 나고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양자는 뒤로 밀려나는 도옥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즉각 석파천경(石破千警)의 수법으로 맹렬하게 속공을 퍼부었다.
사태가 매우 불리해진 도옥은 화가? 난다고 일양자의 보검에 금환검을 들이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반격할
기회도 여의치 않자 분통이 터졌지만 계속해서 숨돌릴? 사이도 없이 날카롭게 공격해오는 일양자 앞에서는
귀원비급의 재간도 무색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한자루의 보검에서 쏟아져나오는 매서운 섬광은 두줄기로 뻗
치며 가슴과 아랫배를 노리고 있는 것에는 아연해질 수 밖에 없는 도옥이었다.
대개의 경우, 한 자루의 보검에서 일시에 쏟아져나오는? 두 개의 섬광 중에 한 줄기는 거의? 필살을 겨누는
날카로운 섬광이지만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정신을 혼란시키는? 그래서 어느 섬광이 진짜 섬광인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도옥의 눈 앞에서 정신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옥은 지금 일양자의 보검에서 뻗쳐나오는 두 개의 섬광을 순간적으로? 분간할 길이 없어 우선 두 줄기의
섬광을 모두 피하느라고 황망히 뒤로? 옆으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피하다가? 대여섯 자나 뒤로 물러서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 순간에도 일양자는 우세한 지금의 여세를 몰아 흡사 썩은 풀베듯 보검을 휘둘러 앞 길을 터놓으며 노도
같이 지쳐나가는 것이었다.
얼마를 정신없이 피하던 도옥은 슬그머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 ...... 이래봬도 내가 궈원비급을 터득했는데 저따위 늙은이에게 몰려 쫓기다니...... >
화기 난 도옥은 눈을 가늘게 뜨며 금환검을 허공으로 뻗쳤다가 앞으로 확! 내밀었다. 그 순간, 세 줄기의 사
나운 검풍이 회오리 바람처럼 일양자의 가슴으로 불어닥쳤다.
우세한 여세로 도옥을 몰고가던 일양자는 창졸간에 쏟아져 뻗치는 세 줄기의 검광에서 제일 먼저 날아오는
검광부터 후려갈겼다.
그 순간, 다시 두번째의 검풍이 들이닥치는 것이 아닌가! 번쩍 위급을 느낀 일양자는 보검을 거두어 두번째
의 검풍을 막아내려고 조금 옆으로 비켜나가는 바로 그때 뒤미처 달려온 세번째의 검풍에 가슴을 사정없이
얻어맞고 말았다. 불가항력의 검풍이었다. 더구나 차례로 달려드는? 세 줄기의 검풍을 순간적으로 피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검풍은 막아냈지만 마지막 세번째의 검풍을? 피하지 못해 호되게 가슴을 얻어맞은 일양
자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다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으며 설 수 있었다.
사실 지금 도옥이 날려보낸 세 줄기의 검광은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사람이라면 얻어맞은 가슴이 약간 뻐근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도 늙어 별로 기운이 없는데다가 힘껏
맘껏 보검을 휘둘러 기운이 쇠진해진 일양자에게는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서는 행동을 취하게 하고 말
았던 것이다.
지금 도옥이 날려보낸 검풍의 수법은? 귀원비급에 기재되어 있는 절기분력(截氣分力)의 수법으로서? 자기의
내공력을 세 줄기의 검풍으로 변화시켜 날려보낸 것에 불과했다.
그러한 검풍에 충격을 받고 뒤로 물러서는 일양자를 흘겨본 도옥은 몰을 돌려 이창란에게로 향했다.
[이노영웅! 최후로 경고하는 말이오. 이 도옥의 말을 들으시오.]
그러는 도옥의 말에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를 거머쥐며 눈을 부라렸다.
[뭣이? 최후의 경고라! 음! 네가 이 노부를 화나게 한다면 오늘 여기서 생사를 겨루어주겠다.]
그러자 도옥은 그의 독특한 웃음을 싸늘하게 흘렸다.
[지금 천하 무술계의 판도는 이노영웅이 간섭할 때가 지났습니다. 지금은 이 도옥과 양몽환과의 결전장이라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래(古來)로 양자강의 물결도 뒷물이 앞물을 앞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구세대는 물러가야 합니다. 이노영웅께서는 이미 나이도 늙었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 늙은
나이로 강호에 또 뛰어든단 말입니까? 이 도옥이 진정으로 충고하는 말이지만 이제는 강호를 떠나 산야(山
野)에 묻혀 자연과 벗삼다가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하고 여전히 싸늘한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창란은 육십년 전에 먹은 음식을 토해버리듯이 가래침을 퉤! 뱉으며 여덟 팔자로 눈썹을 모아붙였
다.
[이 괘씸한 놈! 어느 앞에서 그따위로 주둥이를 놀리느냐! 예전에 너를 제자라고 부른 것이 부끄럽구나!]
소리치며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러 강력한 장풍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자 도옥은 서서히 이창란의 일장(一杖)을 피하며 싸늘하게 웃었다.
[옛 정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이 도옥도? 참을 수 없소. 옛날에 입은 양육지은(養育
之恩)도 할 수 없소!]
[불효막심한 놈! 용서치 않으리라!]
눈을 부라린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를 아래서부터? 위로 치켜올리며 둥그런 원을? 그렸다. 그 순간, 금환검을
바로 세웠던 도옥은 어느 사이에 이창란의 지팡이 속을 뚫고? 돌진해 들어오고 말았다. 순간, 어느 누가 이
창란이고 도옥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으리만치 둘은 한덩어리가 되어 엎어지고 자빠지고 그러면서 어지럽게
돌아갔다.
한편!
등가보의 백성을 살리고 조소접과 독용부인을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 수거 안으로 들어간 양몽환은 수거 안
에 갇힌채 어떻게 하면 조소접과 독용부인을 구하고 자기도 무사히 수거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별로 신통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쇠창살 너머에서 조소접의 음성이 들려왔다.
[도옥의 잔악함을 알면서 무엇때문에 자진해서 들어왔나요?]
하고 걱정하듯 묻는 말에 양몽환은 잠잠히 웃었다.
[만약에 내가 자진해서 잡히지 않았다면 죄없는 수 백명의 백성이 죽을 것이오.]
[아니에요. 저 때문에 스스로 잡혔을 거에요. 저를 구해주려고...... 더구나 과거에 당신의 마음을 많이 괴롭혔
는데......]
[너무 염려마십시오. 조소서도 구해드려야겠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오늘? 도옥이 고수들을 거느리고
등가보에 온 것은 나 한 몸을 없애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지금까지 잠잠히 듣고만 있던 독용부인이 가만히 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자진해서 잡힌다고 도옥이가 그냥 둘 것 같아요? 틀림없이 잔인성을 나타낼 거예요.]
[글쎄 모르긴 해도 저하고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에요. 당신은 스스로 도옥의 함정에 빠진 거에요.]
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수거 밖에서 갑자기 이창란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랏!]
소리와 함께 건원지신공(乾元指神功)의 매섭고도 날카로운 일지풍(一指風)이 벼락같이 뻗쳐왔다.? 그러자 이
창란의 건원지신공의 날카로움을 아는 도옥은 즉시 허리를 굶히며 공격을 피했다.
첫번째의 건원지신공이 무위로 끝났음을 알아챈 이창란은 연이어 일지풍을 날려보내는 것이었다. 그 순간이
이창란은 실로 살기를 띄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범상치 않은 양력한 위엄이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한 이창란의 격노한 얼굴에서 필살의 살의를 느낀 도옥은 이대로? 몇 수만 더 계속된다면 생명이 위험
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이창란의 건원지를 맞받아낸다면 실로 용호상박의
치열한 싸움으로 번질것이고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쓰러지지 않는 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옥은 어떻게 할까 마음을 정하지 못한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한 때를 놓치지 않고? 이창란은 다시 한번
날카로운 건원지의 일지풍을 날려보내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도옥은 할 수 없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 순간, 이창란은 질풍같이 수거 앞으로 달려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환아! 염려할 것 없다.]
바로 그때, 어디서인지 파란 불길이 화살처럼 이창란에게로 덮쳐드는 것이었다. 눈앞이 아찔하고 뜨거운 열
기가 훅! 코를 막는다고 느낀 이창란은 엉겁결에 들었던 용두지팡이로 달려드는 불덩이리를 후려쳤다. 그러
자 화산처럼 달려들던 불덩어리는 이창란의 용두지팡이에 박살이? 나며 사방 팔방으로 파아란 불꽃이 튀어
나가고 이창란의 옷이며 수염을 태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주위는 불꽃이 피어 불바다가 되고 말
았다.
그때 한편에 서 있던 일양자가 이창란에게 달려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노형! 속히 땅에 굴러 불을 끄시오. 그 불은 독불(毒火)이오!]
이창란은 체면이고 신분이고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일양자의 말대로 즉시 땅바닥을 굴러 옷에? 붙은 불부터
껐다. 그리고 옷에 붙은 불을 끄고? 일어나는 이창란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불길에 그을린 얼굴과 손은
고사하고도 타들어가던 윈이 너덜거리고 수염도 곱슬곱슬 그을려 예전의 풍채좋던 이창란이 아니었다.
그러한 이창란을 바라보며 도옥은 깔깔 웃는 것이었다.
[어떠시오? 어노영웅! 만일 독불을 하나 더 날렸더라면 오늘 여기서 재가 되었을 것이오. 그러나 옛날의 정
분을 생각해 이정도에서 끝내는 거요.]
하고 떠들어댔지만 이창란은 아무 말 없이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때 급히 달려온 일양자는 이창란을 도와 흙을 털어주며 염려해주었다.
[이노형! 상처는 없습니까?]
그러자 이창란은 굽혔던 몸을 바로 세우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대단한 상처는 아니지만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별 것 아니오. 염려마시오.]
그러나 옷은 군데군데 구멍이 났고 또, 옷이며 수염이 그을려 반이상이 탄 것이 아무리 보아도 이창란의 말
보다는 조금 상처가 깊은듯이 보였다.
그러한 이창란을 바라보는 일양자의 눈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이노형! 상처가 깊지 않다 해도 독불이어서 매우 위험합니다.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그러나 이창란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보다 도관주! 미안하지만 그 보검을 좀 빌려주시오!]
하는 것이 상처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이창란의 늙은 노안(老眼)에는 살기와 분노가 불꽃을 튀
길 뿐이었다.
그의 강경한 의지에 감격한 일양자는 천천히 보검을 건네어 주었다.
[이노형! 조심하시오.]
일양자에게서 보검을 받아든 이창란은 실로 뜻밖에도 상처입은 팔소매를 걷어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눈
하나 찌푸리지 않고
불에 데어 피가 흐르는 싱처를 싸악 도려내는 것이 아닌가! 이창란도 독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처를 도려내어 독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미리? 조치를 하는 것이었다. 일양자의 보검에 의
하여 도려내진 이창란의 상처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철철 흘러내렸다. 그렇게 서슴없이 살점을? 도려낸 이창
란은 일양자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도관주! 이제는 염려 없겠지요!]
하더니 헛......허......하며 서글프게 웃는 것이었다.
어이없이 이창란을 바라보던 일양지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이창란의 상처에 알약을 부수어 바르고 헝겊으로 칭칭 감고 났을때는 도옥도 수거도 멀리 사라져버리고 난
후였다.
한 줄기의 파란 불꽃에 상처를 입고 수거와 도옥을 놓쳐버린 이창란은 울분을 참지 못해 발을 굴렀다.
그러나 아무리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해도 크게 충격을 받은? 이창란은 이제 늙어버린 몸을 탓하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그러한 이창란의 울분이니 옆에서 보고 있는 일양자의 분통이나 수거와 도옥을 놓쳐버린 것에 대한 똑같은
감정이었지만 그러나 일양자는 도옥의 함정에? 빠지기만 할 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싸움을 계속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크게 한숨을 쉰 일양자는 침통한 어조로 이창란을 불렀다.
[이노형! 우선 등가보로 돌아가서 환아를 구출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소......]
하는 말에 이창란도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러는 수 밖에 없는 것같소이다.]
젊은 도옥에게 각각 가벼운 상처를 입은 이창란과 일양자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등가보에 이미 정해진 방
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등가보에는 도옥의 무리가 물러가고 모든 사람들도 각기 저마다의 거처로 흩어져 들어가 넓은 대청
앞 뜰에는 교교한 달빛과 즐비한 횃불만이 어둠을 비쳐주고 있었다.
이튿날.
등개우의 안내로 등고강이 거처하고 있는 지하실로 모여든? 여러 사람들은 어젯밤에 일어났던 다른 사건들
을 등개우로부터 듣고 있었다.
즉, 등개우의 말을 들으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연이었다.
어제 도옥의 무리가 공격해 왔을 때 구대분파의 고수들은 등가보를 도우려고 여러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막강한 도옥의 부하 몇몇 고수에게 모두 격퇴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군으로 진을 치고 있던 고수들의 이름은 들은 바 없지만 승려에서부터 도사복 차림의 장정에? 이
르기까지 근 십여 명이었다는 것이다.
등개우의 말을 자세히 듣고 있던 일양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보주의 말을 듣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 하는 말이오만 사실이 그러하다면 무술계를 제패하려는 도옥이
란 놈의 속 마음을 구대문파의 고수들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구대문파가 시시비비를 없애고
모두 협력할 수도 있지 않겠소?]
하는 말을 등고강이 받았다.
[옳은 말씀이오. 지금 도관주의 말씀대로 구대문파가 협력한다면 무엇이 두렵겠소?? 그런 뜻에서 이 늙은이
가 한 말씀 드리겠소이다. 이 등가보로 말하자면 양대협의 출현으로 일약 그 명성이? 커졌지만 만면에 양대
협이 이 등가보들 구하려다 수거에 갇혀버리고 말았소.]
하고는 잠시 한숨을 쉬더니 계속하였다.
[원래 어떤 무리를 막론하고 그 무리를 이끌어나갈? 수령(首領)이 있는 법이오. 그러나 양대협이 수거에 갇
혀버린 지금 새로운 수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비록 등가보의 주인은 나지만 이 늙은이는 무공으로나 인
망으로나 양대협을 대신할 수 없소이다. 그러니 이노영웅께서 양대협을 대신하여 당분간 만이라도 등가보의
주인이 되어 합심하려는 구대문파의 천하 영웅들을 이끄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러자 이창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어찌 이 빈도가 중책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등대보주님께서 이끌어 주십시오.
이 빈도는 힘껏 돕겠습니다.]
이창란이 정중히 사양하는 말에 등고강은 손을 흔들며 거절하려고 했다. 그때 일양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등대보주님! 어찌 손님이 주인 행세를 하겠습니까? 역시 등보주님이 이끌어 나가셔야 합니다.]
하고 못을 박자 이창란은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듯이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등대보주님께서는 지금부터 위급하고도 중요한 일을 처리하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즉, 어젯밤 도옥이 끌고
간 수거가 어디에 있는지 행방부터 탐지하도록 명을 내리십시오.]
[옳은 말씀이오. 그래서 이 늙은이는 이십여 명의 하인에게 명하여 탐지해 오도록 명을 내렸소이다.]
[잘 하셨소이다. 그 하인들이 오는대로 계획을 세워야겠습니다.]
양몽환이 등가보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도옥의 함정 속으로 들어가 등가보를 떠난지도

어느덧 사흘이라는 시일이 지나갔다.
수거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떠나간 사람들에게도 신통한 소식을 듣지 못하고

하루하루 초조하게 기다리다 이윽고 사흘이 지나간 것이었다.

그동안 이창란과 일양자는 안절부절 흡사 바늘방석에 앉은 듯이 가슴을 태웠고

하림은 하림대로 식음을 전폐하고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등가보는 꼭 초상집같이 우울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흘째 아침.
그날도 등고강과 이창란 그리고 일양자는 대문만 바라보며 한 사람의 하인이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초조히 앉아있는 바로 그때였다.
등가보의 육중한 대문이 삐거덕 열리며 한 사람의 하인이 구르듯 뛰어왔다.
그리고 하인은 곧장 등고강에게로 달려가 허리를 굽히며 품속에서 한 통의 서찰(書札)을 꺼내놓았다.
급히 받아든 등고강은 겉봉부터 읽었다.
겉봉에는 붓글씨로 또렷하게 일양도장친전(一陽道長親展)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하인의 품에서 받아든 한 통의 서찰은 등고강의 손을 거쳐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일양자에게 건네어졌다.
일양자는 떨리는 손으로 겉봉을 뜯고 한 장의 편지(片紙)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급히 눈으로 읽었다.
그동안 등고강과 이창란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드디어 얼마 동안 편지를 내려다 보던 일양자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며

놀라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 이창란은 심상치않은 일양자의 표정에 가슴이 덜컥했다.
[도관주! 무슨 일이오?]
그러나 일양자는 그대로 눌라운 표정을 지은채 말없이 들고 있던 편지를

이창란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이창란은 되도록 냉정을 찾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일양도장 보시오! 귀하의 제자인 양몽환은 수거에 구금된지도

사일(四日)이란 시일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양형과의 옛정을 생각해서 절세의 미인 두 명을 옆에 붙여 놓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친구의 성의를 무시하는 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오는 팔월 십오일 밝은 달빛 아래서 귀하의 제자를 처형코자 합니다.

그러하온즉 귀하께서 오는 팔월 십오일 밤 삼경(三更) 백장봉(百丈峰)으로 오시면

제자를 비롯하여 조소접과 독용부인의 화형식(火刑式)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오셔서 제자의 명복(冥福)을 빌어주시오!

더구나 무술계의 많은 고수들도 참석키로 되어 있습니다. 도옥. >


읽기를 마친 이창란은 일양자보다 담이 컸다.
창백해지고 놀라워하는 일양자와는 달리 큰소리로 코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흥! 건방진 놈! 이 노부가 살아있는데 뭐 어떻게 한다구?]
그러자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등고강은 눈을 크게 뜨며 이창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노형! 무슨 일이오? 혹시 양대협이?]
[그렇소이다. 이걸 보시오!]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 읽은 등고강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양대협의 인의지심(仁義之心)은 천하에 뜻이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오.

실로, 그런 화를 당한다면 하늘도 무심하오.]
그러는 한편에서 일양자는 등고강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 봉투에 넣으며 침통하게 말했다.
[도옥의 이 서찰은 우리들의 마음을 혼란시키려고 한 짓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음모를 꾸며놓고 우리들을 기만하려는 수작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창란은 쓸쓸히 웃었다.
[옳은 말씀이오. 이 빈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늙은 모양입니다. 허...... 허......]
[이 빈도도 역시 늙은 모양입니다. 허...... 허......

그러나 이노형! 팔월 보름이라면 아직 석달이라는 시일이 있습니다그려.

그동안 우리도 충분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자 등고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근심이 가득찬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도옥이란 자의 서찰이 모든 무술계의 고수들에게도 이미 알려졌을까요?]
[글쎄 모르긴 해도 이 빈도의 생각으로는 우리 환아와 조소저 그리고 독용부인을

화형시키겠다는 것을 구실로 삼고 구대문파의 고수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자리에 모으려는 계책이 꾸며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대문파의 모든 고수들에게 똑같은? 서찰을 보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말하는 일양자의 의미심상한 말에 등고강이 말을 받았다.
[도관주의 생각이 옳다면 속히 구대문파의 고수들과 손을 잡고 힘을? 합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대협을 구하고 옥일당을 쳐부수는 것이 좋을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으신 의견입니다만 지금 도옥의 행방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 아닙니까?]
그러자 이창란이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면 우리들이 먼저 백장봉(百丈峰)으로 가서 도옥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군요. 그 백장봉이라는 곳이 도옥의 소굴인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곳에서
화형을 하겠다고 하겠소? 더구나 화형을 하고 구대문파의 고수들을 그곳에서 일망타진할 계략이 있다면 그
곳이 소굴이 아니라 해도 준비하기 위해서 올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빈도의 생각도 도관주와 같습니다. 팔월 십오일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일양자와 이창란은 호흡이 맞았다.
한 때는 아니 지금으로부터 오년 전만 하더라도 적대지간으로 목숨을 걸고 싸운 피차

견원지간(犬猿之間)의 사이였다.

일양자는곤륜파의 명예를 그리고 이창란은 천용방의 명예를 걸고 불꽃튀는 생사를 겨루기도 했다.
그러나 오년이 지난 지금 일양자는? 제자를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창란은?

사위를 구하기 위해서 과거의 시시비비를 불문에 붙이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도옥을 섬멸하기에

늙은이로서의 심신(心身)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생각하면 실로 세상만사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감회에 빠지는

일양자와 이창란이었다.
과거를 청산하고 옛날에 원수사이가 지금은 동료로서 힘을 합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대청의 문이 열리며 초췌해진 하림이 들어왔다.
그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말조차 하지 않던 하림이 혹시나 무슨 소식이라도 있을까 해서

들어온 것이었다.
하림이 들어오는 것을 먼저 발견한 일양자는 역시 곤륜파의 제자인 하림을 몇 년만에

만나는 것이 내심 기쁜 일이 아닐 수없었다.
그러나 지금 양몽환을 구출하기 위해 심사숙고하던 중이었고?

초췌해진 하림을 보는 순간 기쁨보다는 먼저
하림의 마음부터 안심시켜 주는 것이 급했다.
일양자에게 조용히 다가온 하림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대사부님......]
[가까이 오너라. 어찌 안색이 좋지 않구나.]
하고는 잠시 말을 끓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지금도 환아 때문에 의논하고 있다마는 별 묘안이 없구나. 여기 서찰이 있다만......보겠느냐?]
[제가 읽어도 될까요?]
[읽어도 좋다만 상심하진 말아라!]
하면서 건네주는 서찰을 공손히 받아 읽은 하림은 아무 표정없이?

읽고는 도로 일양자에게 두 손으로 서찰을 바쳤다.
그때, 이창란과 일양자 그리고 등개우는 하림이 서찰을 읽고 나면 틀림없이 눈물을 흘릴 줄 알았다.
그러나 상상 밖으로 하림의 표정이 담담한 것에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하림의 표정을 눈을 크게 뜬채 지켜보던 이창란은 놀라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편지를 읽어 보았느냐?]
그러자 역시 담담히 대답하는 하림이었다.
[예......]
저절로 이창란은 한숨이 나왔고 그리고 하림의 사람됨을 다시 인식했다.
그러나 어른들 앞에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못하는 하림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울까 싶어 위로해 주고 싶었다.
[너무 상심말아라. 지금 나도 너의 사백부님과 대책을 의논하고 있는 중이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구해오겠다.]
[감사합니다. 하늘이 도와주실 거에요.]
하는 말에 일양자는 물론 이창란과 등고강도 머리를 끄덕였다.
하림다운 태도요 말이었다.
하림을 안심시켜 안으로 들여보낸 후 이창란은 불에 타다 남은 수염을 매만지며

일양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관주......이 빈도도 벌써 나이가 칠십하고도 넷이구려.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소.

이미 야심도 버린? 몸이오. 다만 딸이라고 하나 있는 그놈만 잘 살면 원이 없소.]
[이 빈도 역시......]
하며 침통한 얼굴을 들었다.
그때 다시 이창란이 말을 이었다.
[미안한 말씀이오만 도관주께서는 이곳 등가보에서 구대문파의 고수들을 규합하시오.

이 빈도는 먼저 도옥을 찾아 죽이고 사위를 구해내겠소.

만일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팔월 십오일 밤 백장봉에 이? 몸의 뼈를 묻겠소.

자! 그럼 먼저 떠나겠소.]순간, 하림도 자기만의 생각을 하고 있다가 흘깃 도옥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인데요?]
[양몽환이 결코 나보다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공이나 지혜도 나보다 나은 점이 없는데 무
엇때문에 천하의 미녀가 다 따르는지 모르겠단 말야. 우선 심소저 당신부터 주약란,? 조소접, 이요홍 하다못
해 동숙정까지 말이오.]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인가요?]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하는 도옥을 바라보며 하림은 티없이 웃었다.
[그건 간단해요. 인간됨이 성실하고 중후한 탓이죠.]
하는 바로 그때, 하림 이외의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하림의 말에 대답하듯 소리지는 것이 아닌가?
[그 반면에 도옥은 흉악하고 잔인한 자여서 갈기갈기 찢어주고 싶단 말야!]
하고 외치는 여인은 장검을 손에 도사차림의 동숙정이었다.
그 순간, 도옥은 잡고 있던 하림의 손목을 놓으며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다.
[죽고 싶어?]
그러자 동숙정은 치켜올렸던 눈썹이 꿈틀 움직이며 하림에게 고개를 돌려 사납게 외쳤다.
[심사매! 도옥의 거짓말에 넘어가지 말아요. 나는 이미 그에게 욕을 당한 몸, 세상에 얼굴조차 들고 다닐 수
없게한 원수라는 것을 몰라요?]
하자 다 되어가는 이 마당에 느닷없이 나타난 동숙정이 무슨 말을 더 해서 모욕을 줄는지 모른다고 생각한
도옥은 단번에 숨통을 끊어놓고 말도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즉시 금환검을 뽑아들며 그대로 동숙정을 노리고 달려나갔다.
그러나 동숙정은 여유있는 태도로 장검을 휘두르며 도옥의 금환검을 맞받아치는 것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동숙정으로 해서 삽시간에 고요했던 주위는 먼지가 일고 절기를 다한 검풍이 회오리 바람
처럼 사방에서 사납게 휘몰아쳐 오기? 시작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동숙정은 하림? 앞에서 도옥의 비행(非
行)을 모조리 털어놓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도옥의 공격이 점점 사나워져 말은 하지 못하고 장검을 휘둘
러 도옥의 검풍을 맞받아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 뜻밖에 벌어진 싸움을 수습할 생각도 못하고 한 옆에 비켜선 하림은 실로 누구를 도와야 할지 갈피마
저 잡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만일 동숙정을 도와 도옥을 공격한다면? 동숙정이나 하림 자신의 무공으로 보아? 도옥을 이길 승산이 없고
그렇다고 자기의 계략을 행하기 위해서 동숙정을 공격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치에
서 애만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만일 한 옆에 서서 도옥과 동숙정이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한다면 틀림없이 도옥의 금환검에 상처받을 것이
분명한 동숙정의 무공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애써 거의 성사가 된 지금 동숙정을 도와 도옥을 공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하림은 알고 있었다.
그러던 바로 그때, 홀연 도옥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앗!]
그와 함께 도옥의 날카로운 금환검은 한줄기의 섬광을? 번쩍이면서 그대로 동숙정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찢
고 말았다.
그러나 동숙정은 이를 악물고 상처의 아픔을 참는듯 잠시 주춤했다가 장검을 겨누고 도옥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선뜻 달려들지는 못하고 금환검을 겨누고 동숙정을 노려보던? 도옥은 그의 독특한 웃음을 싸늘하게 띄우며
어깨를 쫙 펴는 것이었다.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그러나 이 도옥을 원망하지 마라!]
그러자 동숙정은 기어이 노렸던 장검을 노도같이 휘둘러 도옥의 금환검을 튕기면서 역공을? 감행했다. 그리
고 하림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심사매! 빨리 도망가요. 나는 이미 죽기를 맹세한 몸이니까 염려말고 어서 몸을 피해요!]
하고 외치며 일변 장검을 휘두르는 동숙정의 검술도 눈이 홱홱 돌아가도록 날카롭고 사나웠다. 그 반면, 도
옥은 자유자재로 금환검을 기기묘묘하게 변화시키면서 동숙정의 요혈만 노리고 공격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상대가 안되는 싸움이었다. 천하 무술계의 방주를 자처하는 도옥의 날렵한 무공과 오직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뿐인 동숙정의 무공과는 그 차이가 너무나 현격했다. 더구나 도옥은 귀원비급의 무공을 모조
리 터득한 인물이 아닌가. 순식간에 무려 여덟 곳이나 상처를 입은 동숙성은 은 몸에 피가 낭자했다.
그러나 동숙정은 온 몸이 피로 물들고 상처의 아픔으로 고통도? 대단했으나 조금도 피로한 기색없이 한 수
공격에만 전념하며 몸을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동숙정의 굴함을 모르는 의지에 도옥은 절로 감탄이 터져나왔다.
< 여러 곳에 상처를 입고서도? 굴할줄 모르다니 정말 지독한 여자군.? 귀찮은 존잰데...... 기회를 봐서 아주
숨통을 끊어놓기 전에는 악착같이 덤벼들겠지...... >
하며 잠시 생각에 빠지는 찰나!
눈 앞이 아찔하도록 벼락같이 변한 동숙정의 장검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일직선으로 도우의
오른 팔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차! 하고 피하던 도옥은 순간적으로 섬뜩하고 차가운 기
운이 지나갔다고 느꼈을 때는 잔인한 도옥의 팔뚝에서도 주르르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말았다.
옷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옷을 적시며 주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을 잠시 내려다 보던 도옥은 입을 우악스럽
게 깨물었다. 그리고자신의 팔뚝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는 순간! 금환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던 도옥은 잔인한 웃음을 띄웠다. 그리고 한 칼에 죽이려던 결심을 변경시켰다.
그떻게 되면 너무 무의미한 것 같았다. 조금씩조금씩 살점을 도려내서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온갖 쓰라린 고
통을 다 겪게한 다음 비비 몸을 틀다 생명이 끓어져 죽게 하고 싶었다. 지금의 분통으로서는 그렇게 죽여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 이 계집이 도옥에게 상처를 입혀? 핫! 메스껍다! >
눈을 부라리던 도옥은 우선 동숙정의 장검을 쥔 오른 손목부터? 댕강! 짤라버리기로 결심했다. 약간의 조식
으로 오른 팔의 상처를 지그시 누른 도옥은 금환검의 시퍼런? 칼날을 쓱 훑어보며 병아리를 덮치는 솔개처
럼 덮쳐들어갔다. 그러자 오랜 싸움 끝에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서 여덟 곳의 상처를? 입기까지 한 동숙정은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대항할 기력을 잃고 말았다.
맹렬하게 휘두르던 장검도 그 날카로운이 차차 둔해지고 몸을 놀리는 것도 눈에 뜨이게 현저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동숙정의 지친 몸은 누가 보아도 날카롭개 공격해 들어오는 도옥의 금환검에 여지없이 목숨을 잃을
것이 확실했다.
더구나 마음에 갈피를 못잡고 초조히 바라보는 하림은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도 놀랄만큼 큰소리로 싸움을 중지시키고 말았다.
[그만 손을 멈추세요!]
그러면서 하림은 장검을 뽑아들며 그들 가운데로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휘두르던 금환검을 멈춘 도옥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녀를 살리고 싶은가?]
하고 묻는 말에 하림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이토록 상처가 위중한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어요?]
하는 때, 동숙정은 싸움에만 너무 열중했던지 옆에 하림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처음 하림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친 후 하림은 이미 이곳을 떠난줄 알고 있었다. 그러한? 동숙정 앞에 하림이
나타나자 동숙정은 약간 노기를 띄웠다.
[왜 이곳을 피하라고 했는데 아직 안갔어?]
하고는 지친 몸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마는 것이었다.
동숙정이 기운없이 쓰러지고 도옥은 도옥대로 살기가 등등해서? 노려보는 가운데 하림은 잠시 생각에 잠겼
다. 그리고 곧 고개를 돌려 도옥을 바라보았다.
[이떻게 하겠어요? 정말 죽일 작정인가요?]
그러자 도옥은 크게 코웃음을 치며 거드름을 피웠다.
[물론! 살려두면 이 도옥에게는 더욱 큰 화근이? 된단 말이오. 지금 가차없이 죽여두는 것이 좋아......그러나
당신이 원한다면 살려줄 수도 있지!]
[살려주세요.]
[좋아! 당신의 말이 아니었다면 동숙정은 여기서 오늘이 끝일 것이오. 그러나 당신을 봐서 살려주지!]
[그럼, 당신이 치료해 주세요. 나는 약도 없어요.]
[죽여주지 않은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치료까지 해주라고? 핫......하......그러나? 당신이 원한다면 치료해? 주
지.]
그러면서 도옥은 품 속에서 하나의 옥함을 꺼내 하림에게 건네주었다.
[그 옥함 안에는 세 알의 영단(靈丹)이? 있소. 그 중에서 두알만 먹이면? 흐르는 피도 멈추고 새 살도 나올
것이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대밭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앞에 있는 동숙정의 상처가 너무 깊어 도옥이? 갈대밭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 못하고 허둥지둥 옥함의 뚜껑부터 열었다. 그리고 세 알의 영단 중에서 한 알을 집어? 동숙정의 입에 넣
어주었다.
과연 영단의 효과는 그 즉시로 나타났다. 그렇게도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던 동숙정은 정신을? 차리고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하림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하림은 동숙정에게 손을 흔들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속히 운기 조식하세요.]
그러나 동숙정은 힘없는 목소리로 그러나 똑똑하게 하림을 꾸짖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심소저는 어떻게 하려고 사갈같은 놈과 함께 있단? 말이야? 그 놈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그때는 후
회해도 소용없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
그러나 하림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에 인질이 세 명이나 잡혀 있는? 이상 누가 그에게 무공으로 이길 수 있겠어요? 그와
무공을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아요?]
하고는 주르르 눈물을 흘리던 하림은 흐느끼다 말고 말을 이었다.
[나 한몸 죽어서 그이를 살린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아울러 조소저도? 살리고...... 조금도 제 걱정은 말고 운
기 조식하세요. 그러면 나는 그만 가보겠어요.]
하고는 도옥이 사라진 갈대밭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혼 인 파 기 서 의?? 사 연
갈대밭 속으로 들어간 하림은 같대밭이 끝나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몇 채의 초가깁을 발견할 수 있었
다.
그 마을에는 목책(木柵)으로 소외양간처럼 울타리를 두른 것이 보였고 그 안에는 아이들과 부인들이 서성거
리고 있었다. 그리고 양쪽에는 건장한 두 명의 장정이 장검을 들고 외양간 같은 것을 지키고? 있는 것도 보
였다.
그리고 바로 하림의 눈앞에는 지금 헤어진 도옥이 걸어가는 것이 다 보였다.
하림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도옥의 뒤를 바싹 따라가다 이마를 찌푸리며 도옥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소외
양간 같은 곳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무슨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 있죠?]
그러자 도옥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도옥이 감금한 거요.]
[무엇 때문에 감금했죠?]
[만일을 대비한 거요.]
[무슨 소리에요?]
[왜 그들을 감금했는가 하면 그들의 아들이나 남편 아니면 아버지를 정탐을 보내거나 매복시켜 두었는데 그
들이 만일 이 도옥을 배반한다면 대신 죽이려고 감금해 놓았소!]
[어머? 그렇게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놀라는 하림을 들아보며 도옥은 씨익 웃었다.
[양몽환은 가장 마음이 선량한 척 하며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지만 이 도옥은 악랄한 수단으로 이름을 떨칠
계획이오. 누가 먼저 무술계의 패권을 잡고 만천하에 명성을 날릴지 두고 보시오.]
지독한 말이었다.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처질 말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지금 그런 것에 구애될 몸이 아니었
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계획한 일을 진행시키는 것만이 최후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무술계를 제패한다는 야심은 없어요!]
[그런 야심이 있다해도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지. 그러나 나하고는 적수가 못되오!]
[그래요. 지금은 당신에게 감금당한 몸이고 더구나 부인인 저는 그를 떠나 버리고 ......]
[흥! 그런 사람이 어찌 양몽환 하나겠어? 더 비참한 사람이 세상에는 부지기수요.]
그러자 하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선과 악, 그리고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요?]
[글쎄...... 없다고 보는 것이 좋아. 윈래 선과 악이라는 것은 도대체가 애매하단 말야.]
하는 말에 더 대답하지 않고 하림은? 화제를 돌렸다. 그것은 도옥을 만나는? 순간부터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입안에서 뱅뱅돌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양몽환은 언제쯤 만나게 돼요?]
그러나 도옥은 유들유들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두를 것은 없잖아? 이 도옥이 옆에 있는데 양몽환을 만나서 뭐하겠소?]
[왜 말했지 않아요? 일찍 그들 만나서 혼인파기서를 쓰게 하겠다구. 그러면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지
않아요?]
[오. 그렇지. 그런데 직접 만나서 혼인파기서를 쓰게 하겠단 말이오?]
[그럼요. 내 일은 내가 해야지 누가 해요? 참 이상한 것도 다 묻네요.]
[그렇지. 그럼 내가 옆에 있어도 되겠지. 뭐 남남지간도아니고.]
[그러세요 이왕 우리는 부부가 될 사인데요 뭐.]
[됐어. 이 길로 바로 가지. 그래서 혼인파기서를 쓰도록 하시오.]
그러던 도옥은 홱 안색을 바꾸며 위협조로 말했다.
[만일, 그를 만나고 마음이 변한다면 당신도 그렇겠지만 양몽환은 더 쓴맛을 보게 될 것이오!]
[염려마세요. 그러나 한가지 미리 말해 둘 것이 있어요.]
[?............]
[후일 당신이 이 천하 무술계를 제압하고 맹주가 되면 저를 버리지 말고 제일부인(第一夫人)의 자리를 줘야
해요.]
[암.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두말할 필요도 없지!]
[그럼. 꼭 그렇게 해줘야 해요.]
응석을 부리듯 좋아하는 하림은 순간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양몽환이 혼인파기서를 써준 후에도 나는 당신과 자유롭게 접촉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자 도옥은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저는 내가 당신의 부인이라는 것을 만천하가 알도록 삼매육증(三妹六證)을 세우고 정정당당히 당신과 혼인
식을 올리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의 부인이 되면 자유롭게 당신과 지낼 수 있지 않겠어요?]
[난 또 뭐 대단한 일이라구......... 그런건 나중에 의논하고 우선 양몽환부터 만나도록 합시다.]
하며 도옥은 앞장을 서서 걸어갔다. 하림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도옥의 뒤를 따라 마을? 중앙에 있는 초가
집으로 들어갔다.
초가집의 대문을 들어서자 다시 안마당이 나섰다. 먼저 앞장서서 안마당으로 들어간 도옥은 마당 중앙에 있
는 큰 바위들을 옆으로 비켜 놓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시커먼?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
나 속이 깊은지 캄캄해서 그 깊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도옥의 어깨너머로 구멍을 내려다보는 하림에게 도옥은 고개를 돌렸다.
[바로 이 아래에 있소. 자 들어갑시다.]
하고는 먼저 성큼 구멍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림도 곧 도옥의 뒤를 따라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먼저 구멍 속으로 들어온 도옥은 큰소리로 외쳤다.
[횃불을 밝혀라!]
그 순간, 캄캄하던 굴 속은 여기 저기서 횃불이 밝혀지며? 대낮같이 밝아졌다. 굴 속은 곧장 지하실처럼 되
어 있었다. 긴 통로가 있고 통로에 방이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등가보에서 본 지하실과 같은 형태였다.
도옥의 뒤를 따라 얼마정도 지하실을 들어간 하림은 곧이어 철창으로 칸을 막은 조그만 방을 발견할 수 있
었고 그 가운데에 눈을 지그시 감은채 앉아? 있는 양몽환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철창? 앞에는 체구가
건장한 장정이 장검을 든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발자국소리도 들었으련만 지그시? 감은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바위처
럼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는 하림을 바라보고 있던 도옥은 아무리 기다려도 눈을 뜰 것같지 않은 양몽환을 불렀
다.
[양형! 눈을 좀 뜨시오!]
그제야 슬며시 눈을 뜨던 양몽환의 눈이? 불현듯 커졌다. 뜻밖에도 하림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었
다.
[아, 당신이 웬일이오? 이곳까지!]
하고 놀라는 말에 하림은 침통히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만나고 싶었어요.]
그 순간, 양몽환은 그 번쩍이는 시선을 그대로 도옥에게 돌렸다.
그러는 그의 눈에는 불꽃이 튀는듯 날카로운 분노가 가득차 있었다.
[도형이 또 속여서 데려 왔소?]
그러자 도옥은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스스로 찾아왔기에 친구의 정을 생각해서 데려온 것이오!]
[뭐라구? 이번에는 속지 않겠소. 만일 내가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정말 사정을 두지 않고 도형을 죽이겠소.]
[흥! 잠꼬대는 그만 하시오! 아직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오?]
[여기서 죽어 귀신이 된다 하더라도 복수하겠소!]
[핫...... 하....... 이 도옥은 사람을 두려워하면 했지 귀신같은 건두려워하지 않소!]
하는 말에 약간 심사가 틀린 하림은 도옥을 노려보다 말고 살짝 미소를 띄웠다.
[그와 말다툼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지 않아요?]
하는 말에 도옥은 약간 멈칫했다가 껄껄 웃었다.
[그렇지. 지금 남의 부인을 취하려는? 마당에 이게 뭣이람. 마땅히 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아야지. 흥! 허락
안해도 겁낼 것은 없지만!]
하고는 정색하며 지금까지의 건방졌던 태도를 바꾸어 두 주먹을 쥐며 일읍(一揖)하는 것이었다.
[양형! 지금까지는 농담이고, 긴히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소.]
그러나 양몽환은 반례(返禮)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나에게? 무엇이오?]
[미안한 말이지만 며칠 안으로 양형은 죽을 몸이오. 곧 죽을 때가 가까워 온다는 말이오. 그래서 양형이 죽
기 전에 아름다운 부인의 말을 들어 깨끗이 죽어달라는 부탁이오.]
그러자 양몽환은 크게 코웃음을 치고는 말하기도 싫다는 듯이 눈을 감아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아버리는 양몽환을 지켜보던 도옥은 다시 말을 이었다.
[누차 하는 말이지만 아름다운 부인을 그냥 두고 죽는다면 살아있는? 부인에게 너무 잔인한 짓이오. 그래서
이 도옥이 옛날의 우정을 생각해서 여기 혼인파기서를 준비해 왔소. 여기에 엄지손가락으로? 지장만 찍으면
되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한번은 있기 마련이오.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고 지장이나 찍으시오.]
그러나 양몽환은 갑자기 돌부처가 된 것처럼 몸도 움직이지 않고 눈도 뜨지 않았다.? 그러한 양몽환의 심점
은 과연 어떨까? 속이 뒤집히고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러나 요지부동!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을 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얼마를 더 기다려 양몽환의 두 눈이? 떠지기만을 바라고 있던 도옥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하림을 돌아보며
턱으로 양몽환을 가리켰다.
[안되겠는데...... 눈도 뜨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군......]
그러자 하림은 눈을 깜박이며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제가 말하겠어요.]
하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양상공! 저를 좀 보세요. 기분이 나쁘겠지만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제야 양몽환은 번쩍 눈을 뜨며 놀라워 했다.
[무슨 말이오?]
하는 물음에 하림은 도옥에게서 혼인파기서를 받아 양몽환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 보셨어요?]
[아니, 안 봤소.]
[그럼, 지금 보세요.]
하림이 내밀어주는 혼인파기서를 받아 읽은 양몽환은 얼굴을 들었다.
[혼인파기서?]
[예. 혼인파기서에요. 그 파기서에 당신이 수인(手印)만 찍으면 저는 당신의 부인이 아니에요.]
너무나도 기가막힌 뜻밖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양몽환은 도옥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도옥의 짓이지?]
벽력같이 소리치며 혼인파기서를 찢으혀고 하자 하림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찢으면 안돼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에요.]
하는 하림의 태도에 양몽환은 화들짝 놀라며 순간 가슴이 터질 듯한 분노를 느꼈다. 그토록 자기를 믿고 따
르던 하림이 하루 아침에 배신하다니 양몽환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하림이
행복해진다면, 자기의 고통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림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잠시 후 깊이
한숨을 몰아쉬며 처량한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좋소!]
하고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는 양몽환의 대답이었다.
[저를 탓하지 마세요. 정말 정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사정이 있어요. 이 다음에 알게 될 거에요.]
드디어 눈물을 흘리는 하림이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하림을 바라보는 양몽환의 마음도 쓰리고 아팠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소! 나는 당신을 조금도 원망하진 않을 것이오!]
도리어 위로하는 양몽환이었다.
반면, 하림은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한없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왜 하림이 갑
자기 혼인파기서를 갖고 오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물어볼 수 없는 양몽환은 가슴이 미
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오직 지금 싸늘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도옥, 바로 그 때문이었
다.
그래서 양몽환은 하림을 원망하기 전에 도옥을 증오해야 하는 것이었다.
[틀린 곳이 있나 잘 보시고 수인(手印)하세요.]
[아니, 필요없소. 도옥의 간교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면 무슨 글자가? 쓰여져
있다해도 상관없소.]
하고는 도옥이 내미는 인주에 엄지손가락을 꾹 눌렀다가는 그대로 혼인파기서에 또 한번 꾹 눌렀다. 그리고
담담히 웃으며 혼인파기서를 하림에게 내밀었다.
[그럼! 부디 행복하시오. 이 순간부터 아가씨라 부르겠소!]
하고 정중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양몽환의 태도를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하힘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슬픈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천하 사람들은 모두 내가 양몽환의 부인인줄 알고 있는데 그래도 양부인이라고 부르면 어떻게
하죠?]
[그런 것은 염려할 것 없소. 저기 도형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잘 알릴 것이오. 그러면 아가씨보고 양
부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거요.]
이와같이 해서 부부의 의를 끊은 양몽환과 하림은 피차 어색함도 없이 남남으로 호칭되고 말았다.
한편, 양몽환에게서 혼인파기서에 수인을 받아낸 도옥은 의젓한 태도로 점잖게 뒷짐을 지었다. 그리고 양몽
환을 불렀다.
[양형! 여기 있는 심소저가 왜 양형과 부부의 의를 끊게 되었는지 아시오?]
[알 필요도 없소.]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시오. 그것은 이 도옥과도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오.]
[도형과 관계가 있다구?]
[그렇소! 심소저의 혜안(慧眼)은 실로 놀랍단 말이오. 그것은 양형이 이번에 틀림없이 이? 도옥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이 도옥과 살기로 결정한 때문이오.]
그러나 양몽환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잘했소. 모쪼록 잘 사시오. 그래야만 내가 구천에 가도 눈을 감을? 것이오. 심소저로 말하면 마음이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오.]
그러자 도옥은 소리내어 웃었다.
[핫...... 하...... 실로 양행은 천하에시 가장 웅후한 사람이오. 과연 남자답소. 아름다운 부인을? 잔인하게 하지
않으려고 수인까지 찍어주고 더욱 이 도옥에게 그토록 말하는 것으로 보아 과연 남자요!]
하고는 혼인파기서를 몸 속에 넣으며 말을 계속했다.
[하림을 깨끗이 포기하는 태도에 이 도옥은 양형에게 남자답게 죽을 수 있도록 장검을 주고 싶으나 지금 무
술계에서 양형의 명성으로 보아 그렇게 할 수도 없어서 죄송하오!]
하고 말하는 도옥은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태도로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나 도옥이 위엄을 부리고 허세를 부리면 부릴수록 양몽환은 담담히 냉정을 찾을 수 있었다.
[도형이 어떠한 수단으로 나를 괴롭힌다 해도 결코 나는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오. 물론 두려워함 것도 없
소!]
[그러나 한가지, 이 도옥의 말을 듣는다면 살 길도 있을 것이오.]
[흥! 이제는 우리 그런 이야기는 그만 두는 것이 좋겠소. 다만 심소저나 잘 데리고 사시오.]
[그런 것은 양형이 염려할 것이 아니오. 이제는 이 도옥이 마음대로 할 것이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양형
은 그토록 죽기를 원하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생명은 하나뿐이오.]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나는 지금 피로하오. 좀 쉬도록 내버려 두시오.]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벽에 등을 기대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하림은 혀를 깨물며 양몽환의 얼굴만 주시하고 있었다.? 입만 열면 모든 것을 실토(實吐)할 것
만 같았다. 그러나 참아야했다.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에도 참아야 하는 것이 지금의 하림
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때, 양몽환의 태도에서 자기가 무시당한 듯 불쾌감을 느끼고 있던 도옥은 그만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좋아. 그러나 지금은 이 도옥의 손아귀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잊지마시오. 언제든지 죽이고 싶으면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잊지마시오. 한 칼에 죽일 수도 있고 살점을 도려서 몇 토막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일 수도 있
다는 것도. 그리고. 다시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는 것을 잊지마시오.]
마구 위협조로 떠들었지만 양몽환은 그때? 잠이라도 들었는지 숨소리조차 없었다. 오히려?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프고 조바심을 내는 사람은 바로 하림이었다.
더 지체하고 있으면 도옥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고 또 무슨 행동을 해서 양몽환을 괴롭힐지 그것이 두
려웠다. 그래서 도옥의 손을 잡으며 가만히 속삭였다.
[그만 가요.]
하고 애원하듯 하는 말에 도옥도 더 있기 싫은듯 돌아섰다.
[그래.]
하고는 양몽환에게 보라는 듯이 하림의 가는 허리를 와락 끼어안으며 전음을 옮겨 지하실을 벗어나왔다.
밖으로 나온 도옥은 꽉 끼어안았던 하림의? 허리에서 팔을풀고 대신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는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는 양몽환이 혼인파기서에 수인까지 찍었으니 당신은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됐어!]
그러나 하림은 별로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도 천하 무술계에서는 아직 아는 사람이 없지 않아요? 아직도 내가 양몽환의 부인이라고 할 거에요.]
[그거야 염려할 것 없어. 내가 일부 무예계의 고수들을 모아놓고 말하면 금방? 천하 무술계는 다 알게될 거
야. 그러면 간단하지!]
그러나 하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안돼요.]
[안되다니?]
[지금 양몽환은 그대로 당신에게 감금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만일 당신이 강호 무술계에 말을 퍼뜨리면 그
사람들은 나를 박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할 거에요. 우선 감금시킨 양몽환을 석방시키고 알려야 해요.]
하고 양몽환을 석방시키도록 종용했다. 그러자? 도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도 그럴듯해. 그러나 그까짓 것이 무슨 상관이야. 남이야 뭐라고 떠들거나 말거나 우리들만 좋으면 그
만이지. 그보다도 당신은 아까 매파(媒婆)를 세워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자고 했지 않소? 사실 이런 일은
당신의 말대로 만천하가 알도록 정정당당히 하지 않으면 안될 것같소.]
하고 말을 마친 도옥은 하림을 이끌고 맞은편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것 없는 초가집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하림의 눈이 커졌다.
방을 꾸민 솜씨가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아담하고 어딘가 고결한 감마저 느껴지는 방안은 비단으로 바닥을
깔고 벽에는 몇 폭의 산수화(山水畵)도 걸려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굵은 황초(黃 )가 여러개? 걸려 있었
고 방 가운데의 둥근 탁자에는 김이 솟는 음식과 술이 그득히 차려져 있는 것이 벌써부터 준비하고 기다린
모양같았다.
도옥은 여봐란 듯이 근소리를 치며 하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친절히 하림을 탁자에? 모셔 앉게 하고
자기도 하림과 마주 바라볼 수 있는 의자에 앉는 것이었다.
[자, 하루종일 피곤도 하였을 것이오. 우선 천천히 먹으며 이야기나 합시다.]
먼저 술부터 따르는 도옥 앞에서 하림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사실 하림으로서는 오늘과 같이 길고도 무거운 번뇌를 하기는 처음이었다.
도무지 양순하고 착하기만 하던 하림이 호랑이와 여우를 합친 것같은? 도옥 앞에서 그것도 어떤 계획을 위
해서 여유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보통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기지(機智)가 빠르고 계략의 명수인 도옥을? 속인다는 것은 그만큼 하림의 두뇌도 비상해야? 하는
것이었다. 시시각각으로 재치를 보여 예민한 도옥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행동한다는 것은 착하기만? 하던 하
림으로서는 차라리 도옥에게 속고 있는 것이 편할 것같은 그래서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온 신경을 집
중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또 혼인파기서에 굵게 꽉 누른 양몽환의 수인(手印)은 벌겋게 불에 달군 인두로 하림의 마음을 꽉 눌러놓은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아차하고 조금이라도 실수나 실언을 하는 날이면? 만사가 허무하게 끝
날 뿐만 아니라 바로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마주앉아 지켜보고 있는 도옥 앞에서는 신
경이 날카로울대로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고 그의 눈치를 경계해야 하는? 고충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하림은 애써 표정을 부드럽게 하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도옥이 따라놓은 술잔을? 들어 도옥에게 권
하기까지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제가 먼저 축하를 드리겠어요.]
그러자 도옥은 손을 저으며 마시지 말라는 시늉을 하였다.
[잠깐 기다리시오]
하고는 크게 손뼉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손뼉 소리에 따라오듯이 두 명의? 하인이 쪼르르 달려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한편에 따로 놓여있는 수저를 들어 여러가지? 음식에서 한
숱갈씩 떠서는 빈 그릇에 모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여러가지의 음식에서 모두 조금씩? 조금씩 모여진
음식을 두 명의 하인이 반씩 나누어 먹고는 술까지 한잔 따라 마시고 허리를 굽히며 물러가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어리둥절해진 하림은 눈을 크게 뜨며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죠?]
하고 묻는 말에 도옥은 빙긋이 웃으며 그제서야 하림에게 술잔을 권하며 자기도 술잔을 드는 것이었다.
[항상 이 도옥을 해치려는 사람이 주위에 많기 때문이지!]
그제야 하림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혹시 이 음식속에 독이 들어있지 않나 해서죠?]
[그렇소!]
[그럼, 식사 때마다 늘 하인에게 먼저 먹이나요?]
[한모금의 물도 마찬가지지. 이 세상에는 아직 이 도옥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단 말이오.]
[그럼. 당신의 부모 형제, 아니 친구나 부인될 사람까지도 믿지 못한단 말인가요?]
하고 묻는 말에 도옥은 실로 도옥답지 않게 추연한 빛을 띄우는 것이었다.
[원래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남의 손에? 키워진 사람이오. 일가 친척도 없는 이 도옥인데? 이 세상에 누구를
믿겠소?]
[그래도 부모가 없으면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고 길러준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오늘날까지 살아올 수 있
겠어요?]
[부모가 물론 있었겠지. 그렇지 않으면 사실 태어날 수도 없지. 그러나 이미 한줌의 흙이 된지 오래고 나를
키워준 스승은 나를 버렸으니 ......]
하고 말하던 도옥은 갑자기 두 눈에 불꽃을 튀며 하림을 바라보더니 추연히 음성을 조금 낮추었다.
[그러나 지금 이 도옥에게? 믿을만한 처가 생길지? 모르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이 도옥을 대할지는 모르겠
어......]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하림은 가슴이 덜컥했으나 곧 태연하게 그 말을 받았다.
[그 여자가 누구죠?]
[바로 심소저 당신이지. 당신이 양몽환에게 혼인파기서를 쓰게 한 것도? 결국은 이 도옥에게 시집오려고 한
일이 아니오?]
그러자 하림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도 놀랄만큼 재치있게 말을 했다.
[물론 당신에게 시집오려고 한 것이죠. 그러나 혹시 동숙정언니 처럼 되지 않을까 겁이 나는대요.]
[핫...... 하...... 우리는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고 부부가 될 사이인데 어찌 동숙정과 비교하겠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하림은 금방 먹은 것이 토할 것같은 구역질이났다.
< 늑대같고 개같은 놈! 꼭 너를 죽이고 나도 죽을 결심이다......? >
하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하림이었다.
[저는 이제 당신의 부인이나 마찬가지에요. 잘 돌봐주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그러자 도옥의 입이 함지박처럼 크게 벌어졌다.
[암. 그야 여부있겠어? 그런 것은 눈꼽만큼도 염려하지 말라구......]
그러는 사이에 탁자에 그득했던 음식도 줄어들고 더구나? 하루종일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긴장했던 탓인지
음식을 조금 먹자 하림은 일시에 피로가 몰려왔다. 조금 눈을 붙이고 싶었다. 하품도 나왔다.
그러한 하림을 발견한 도옥은 눈치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손뼉을? 쳐 하인을 부르고는 하림에게 고개를 돌
렸다.
[피로한 모양이군. 미리 깨끗한 방을 준비시켜 놓았소. 갑시다. 안내해 주겠소!]
하고는 뒤미처 달려온 하인에게 술상을 치우도록 하고는 하림의 손목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도옥이 하림을 안내한 곳은 그의 말대로 깨끗하고 조용한 방이었다.
비단이불이 깨끗하게 펴진 침대 머리맡에는 촛불이 은은히 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스르르? 잠이 들 것같
은 방의 분위기가 하림은 마음에 들었다.
[참 훌륭한 방이군요.]
[신혼부부를 위해 새로 꾸민 방이지!]
싱글벙글하며 대답하는 도옥을 빤히 바라보던 하림은 침대가에 걸터 앉으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럼, 그 신혼부부는 어디로 갔죠?]
[신혼부부는 오늘 하루만 방을 빌리기로 하고 쫓아냈지. 실은 이 도옥이 하룻밤만 자려고 했는데 오늘 저녁
은 당신에게 양보하는 거요.]
그 말에 하림은 일부러 눈살을 찌푸렸다.
[신혼부부를 쫓아내는 법이 어디 있어요? 너무하시군요.]
하면서 도옥을 바라보던 하림은 그만 온 몸이 자지러지는 듯 몸을 떨고 말았다.
그리고 얼른 도옥과 부딪쳤던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하림을 바라보고 있는 도옥의 눈은 도저히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다. 흡사 토끼를
앞에 놓고 어르는 호랑이, 아니 병아리를? 노리고 날개를 접고 내려꽂히는 독수리의? 그 날카로운 눈! 붉게
충혈된 두 눈에 야욕의 음침한 빛과 목이라도 눌러 죽일 것? 같은 표독느러운 빛을 띄며 노려보고 있는 도
옥의 두눈을 피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간(肝)이 콩알만해진다는 것도 정도문제다. 그러나 하림은 곧장 정
신을 수습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세요?]
되도록 침착하게 도옥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을 음성으로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자 도옥은 그러한 표정을 바
꾸지도 않고 그대로 소리치는 것이었다.
[심소저! 당신은 진정으로 나를 좋아하오?]
순간, 가슴을 졸였던 하림은 마음을 크게 먹었다.
[아니, 그것도 말씀이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좋소. 본래 이 방은 신혼부부를 위해 꾸민 것인데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고 한 이상 아주 우리가
오늘밤 이방에서 첫날밤을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
실로 어마이마한 폭언이었다. 미리 예상은 했지만 막상 말이 떨어지자 당황되기는 고사하고 와락 화부터 나
는 하림이었다. 순간, 하림의 얼굴이 변했다.
[당신은 저를 그렇게밖에 취급하지 못하세요?]
그러자 이상하게도 탁 풀이 죽는 도옥이었다. 실로 뜻밖의 폭언에 너무나 풀이 죽은 도옥을 보다 하림은 그
렇게까지 도옥을 다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기가 죽으면 오히려 반대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하림은 알고 있었다. 요새 많이 성숙한 하림이었다.
즉시 하림은 길게 탄식하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도옥을 불렀다.
[너무 급히 서두르지 마세요. 저는 누가 뭐래도 당신의 부인이 될 여자에요. 그러나 아직 우리들은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이제 우리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고 이곳보다 더 좋은 방에서 첫날밤을 보내
요. 네?]
아무리 지독한 도옥이라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달래는 하림에게는 별 수? 없는 모양인지 몸을 돌려 문을 열
며 나직이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래 알았소. 미안하오. 그럼, 잘 자오!]
하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밖으로 나갔다.
도옥이 방을 나가고도 얼마 동안 그 자리에 앉았던 하림은? 옷을 입은채로 침대에 누웠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혹시 밤중에 뛰어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깜빡 잠이 들었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 앉기를 몇 번, 날이 훤히 밝아올 때야 비로서 마음을 놓고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정말 단잠이었다.

밤새도록 일어났다 누웠다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하림이 모든 번뇌를 잊고 깊은 잠에 빠졌을 때는

며칠동안 양몽환 때문에 뜬 눈으로 새운 밤까지 겹쳐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지고
또 꿈도 꾸지 않고 단잠을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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