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21. 애태우는 마음

오늘의 쉼터 2014. 10. 24. 17:48

 


21. 애태우는 마음

 

 

아무 일 없이 달게 잠을 자고 일어난 하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바로 옆에

우두커니 앉아서 조식을 취하고 있는 도옥의 모습이었다.

언제 들어와서 무슨 인을 하고 저렇게 의젓이 앉아 운기 조식하고 있는지 모르는

하림은 급히 자기의 옷매무새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눈에 뜨일 정도로 달라진 흔적은 없었다.
그 순간, 하림은 길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가슴을 내려쓸었다.
얼마만에 조식을 끝낸 도옥은 그때까지 침대에 올라앉아 꼼짝하지 않고 있는

하림을 발견하고는 아무 표정없이 입을 열었다.
[일찍 떠나야 하는데 당신을 기다리느라고 아직 떠나지 못했소!]
하는 말에 하림도 태연히 대답했다.
[그럼, 왜 저를 깨우지 않았어요?]
[달게 자는 것을 깨울 수가 있어야지.]
하고는 곧 화제를 바꾸었다.
[속히 준비하시오. 곧 떠나야겠소!]
하고는 방을 나가는 것이다.

그 뒤를 하림도 따라 나갔다.
하림이 도옥과 함께 초가를 나서자

마당에는 농부 차림의 장정들이 검은 베(布)를 덮은 한 채의 수거(囚車)를 에워싸고 있다가

도옥이 나타나자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길을 틔워주는 것이었다.
순간,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있던 하림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 ...... 간사한 놈들 ...... 무술인처럼 옷을 입지않고 농부차림을 하고 있구나......

그래서 얼른? 눈에 안 띄는 군...... >
하면서도 하림은 도옥을 불러세우며 나직이 물었다.
[저게 뭐에요? 검은 베로 씌웠는데?]
하고 묻는 말에 도옥은 가볍게 대답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거  양몽환과 조소접 그리고 독용부인을 태운 가마지!]
하고는 농부 차림의 부하들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그러자 그것을 신호로 해서 수거를 메고 떠나는 사람,

그냥 떠나는 사람으로 한참 술렁거렸다.
그들은 이미 내통이 되어 있는지 한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고 간혹 장검을 휘두르며

사방을 경계하는 장정도 보였다.

그리고 해가 질 때쯤해서 일행은 음침한 숲이 우거져 있는 들판에 당도했다.
일행이 모두 멈추어 서자 도옥은 뒤에 따라오는 하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본래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던 곳인데 출발이 늦어져서 할 수 없이 숙박처(宿泊處)로 변경되었소.]
하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잠깐만 여기시 기다리시오. 좀 다녀을 곳이 생겼소.]
하는 말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가는 것이었다.
도옥이 멀리 사라진 뒤 하림은 수거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뒤집어 씌운 검은 베를 들치고 안을 들여다 볼 마음이 간절했으나 지키고 있는 장정들의

눈길도 살벌하고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한시도 그 수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온 신경을 집중시켜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 하림의 눈에는 세 사람분의 음식을 가지고 수거 앞으로 다가가

검은 베를 들치고 음식을 넘겨주는 작은 키의 사내가 한없이 부러웠다.
<만일 내가 음식을 날라주는 사람이라면?>
그러면 양몽환을 만나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까지 수거를 지켜보고 있던 하림은 많은 장정들이 뿔뿔이 흩어져 쉬고있고

또 수거를 지키는 장정도 몇 명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울창한 숲의 연속이었고 장정들은 낮잠을 자는지
별로 눈에 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한 것을 지켜본 하림은 묘안을 짜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마음을 크게 먹었다.
< ......수거를 지키는 사람도 내가 도옥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봐서 알겠지.

그렇다면 수거의 휘장을 들쳐봐도 의심하지 않겠지...... >
여기까지 생각한 하림은 주저없이 수거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의 수거에까지 이르렀을 때, 수거를 지키고 있던 장정들이 다가오는

하림을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 설마, 나에게 무례한 행동은 못하겠지. >
하고는 스스로 용기를 돋우었다.

그리고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왜 그렇게 노려보는 거에요?]
그러자 장정 중의 한 사람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수거 가까이 접근시키지 말라는 방주님의 명령입니다.]
[뭐라구 방주도 나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데 당신들이 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겠단 말이에요?]
하고 도옥을 내세우며 날카롭게 소리치자 장정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비굴한 웃음을 띄우는 것이었다.
[저희들이 어찌 무례한 행동을 감히 부인께 하겠습니까?

다만 방주님의 명이시라...... 조금만 어겨도 큰 벌을 받게되기 때문에 그저 여쭙는 말씀입니다.]
[그럼, 조금 전에 흑의의 사내는 왜 그냥 두었죠?]
물론 음식을 나르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건 방주님이 정해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방주님의 명을? 받고 죄수들에게 밥을 날라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요? 그건 좋아요. 그러나 나는 꼭 봐야겠어요.

누구든지 나의 앞길을 막을테면 막아봐요.]
하고는 곧장 수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장정은 감히 하림앞을 막아서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쌀 뿐이었다.
이때, 수거 앞으로 다가간 하림은 거침없이 검은 베의 휘장을 들쳐 올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양몽환이 아닌 조소접이 단정히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조소저!]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불러보았다.

그러자 조소접은 천천히 눈을 뜨며 처량하게 웃었다.
그토록 여장부같고 쾌활하던 성격은 어디로 갔는지 후유,

한숨까지 쉬는 조소접을 보는 순간 하림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코허리가 시큰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말하던 조소접은 하림의 뒤에 장승처럼 서 있는 장정들과 시선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하림도 자기 등뒤에 퍼붓고 있을 장정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긴 말은 하지 않았다.
[몸은 어떠세요?]
하고 묻는 말에 조소접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 ...... 심소서도 눈치가 빨라졌군.

나의 건강을 묻는 것은 단순히 건강 문제가 아니라 무공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자 조소접은 흐뭇했다.
[좀 나빴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그럼, 안심이에요. 보중하세요.]
하고는 들어올렸던 휘장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수거의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반드시 자기가 찾고 있는 양몽환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 장정들은 하림의 뒤만 따라 다니며 경계할 뿐 직접 나서서 막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도옥과의 관계를 참작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인지 아니면 감히 제지시키지를 못하는지

하여튼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는 장정들의 태도에 힘을 얻은 하림은 수거의 뒤로 돌아가 검은 휘장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하림의 시야 속에는 역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양몽환의 모습이 들어왔다.
[양상공!]
양몽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망설이던 하림은 너무나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아무 생각없이 불쑥 불렀다.
혼인파기서에 수인하고 하룻밤이 지난 지금 또 무슨 일로 왔나해서 양몽환은 약간 불쾌했다.
그러나 담담한 태도로 하림을 주시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양몽환이지만 막상 마주 대하고 보니 별로 긴히 해야할 말도 없는 것같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족했다.
[조소저도 만나봤어요.]
한다는 소리가 고작 조소접의 이야기였다.

그러자 양몽환도 평상시와 같이 하림을 대해 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던가요?]
성품이 선량한 양몽환은 애초부터 하림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남남이 된 하림에게 긴히 할 이야기도 없고 말도 낮출 수가 없었다.
[별로, 건강이 좋다고 했어요.]
[심소저도 보중하시오. 어디를 가든지.]
양몽환은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염려마세요. 저는 언제든지 당신을 따르겠어요.]
그러자 양몽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는 서로 남이 된 사이가 아닙니까? 아무쪼록 건강해서 ......]
하는 바로 그때, 하림의 등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도옥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건 양형이 염려할 것이 아니오. 이 도옥이 잘 돌봐줄 테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깜짝 놀란 하림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천천히 다가오는 도옥의 얼굴엔 이렇다할 표정이 없어 우선 마음이 놓였다.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도옥임을 알아챈, 양몽환은 비위가 좀 상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침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아무쪼록 도형의 마음과 입이 똑같기를 바라오!]
하고는 하림을 바라보지도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부터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것같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양몽환을 응시하며 하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야속했다.

한번만이라도 더 자기를 봐 주었으면 했으나 눈을 감아버리는 양몽환 앞에서

하림은 할 말이 없었다.

들어올렸던 휘장을 내려놓으며 하림은 도옥에게로돌아섰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옥이 지기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거짓으로 행동하고 거짓말도 해야했다.

그래서 하림은 그렇게 했다.
도옥에게로 몸을 돌려 그의 몸에 안기는 하림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까지 갔다 오는 길이에요?]
응석을 부리듯 몸을 안겨오는 하림의 허리를 꼭 끼어안은 도옥은 하림의

머리기름 냄새와 몸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만족해했다.
[응, 별거 아니야. 이창란이 검북사의(黔北四義)라는 부하들을 데리고 쫓아오기에

다른 곳으로 고이 안내하고 오는 길이지.]
[참, 당신은 두뇌가 바상해요.]
웃으며 칭찬하는 하림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끼어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도옥은 계속 벙긋거렸다.
[흐...... 흐...... 그러나 이창란도 보통 머리가 아니지.

지금은 일시적으로 그를 속였지만 곧 속은줄 알고 쫓아올 거요.]
[두려운가요?]
[천만에!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은 이 도옥에게는 없어!]
그러면서 도옥과 하림은 한 채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천막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자, 조금 요기나 하고 떠나도룩 하지!]
하는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난데없는 피리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러자 도옥은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하림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누가 온 모양이야.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요. 내 나가보고 오겠소!]
하고는 금환검을 뽑아들고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도옥의 뒤를 따라 천막 문까지 온 하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울창한 대나무숲 뿐 아무 것도 없었다.
< ......만일 나에게 일양자 사부님이 가지고 있는 보검만 있다면

당장 수거의 쇠창살을 부수고 양몽환과 조소접을 구해낼텐데...... >
하고 생각하는 한편 금환검을 팔아들고 뛰어나간 도옥을 생각했다.
< 누가 왔을까?......다행히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도옥을 죽일 수 있겠는데...... >
하다가도 순간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 ...... 내가 본 바로는 양몽환이나 조소접의 무공이 어떻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두 사란이 힘을 합친다면 그따위 쇠창살쯤 부수고 나오련만......

혹시 무공을 쓸 수 없도록 도옥이 혈도를 짚은 것은 아닐까? >
도무지 머리가 복잡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는 동안, 피리소리에 놀란 도옥이 금환검을 뽑아들고 나간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피리소리도 들리지 않고 도옥도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덧 날도 저물어 하늘은 검은 구름이 덮인 듯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기다리다 못해 지루함을 참지 못한 하림은 천막을 들치고 밖으로 나왔다.

스산한 바람이 대나무잎을 흔들고 지나갈 뿐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는 하림은 조금전 이상한 피리소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이

일양자이길 바랬다.
그러면 보검을 빌려서 쇠창살을 부수고 양몽환과 조소접 그리고 독용부인까지 구해내고 싶었다.
그러면서 무의식 중에 숲 속에까지 다다른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으슥한 숲 속에서 한 사람의 괴한이 튀어나오며 하림에게 장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기절초풍하듯 놀란 하림은 재빨리 메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며 한걸음 옆으로 비켜셨다.
그 순간, 괴한은 상대방의 여인이 바로 하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는지 겨누었던 장검을 거두며

멈추어서는 바로 그때였다.

장검을 거두는 괴한의 뒤편으로부터 다른 괴한이 불쑥 나타나며 벼락같이 장검을 휘둘러

앞선 괴한의 등을 내려치는 것이었다.
[앗!]
손으로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지른 하림은 너무나 놀라운 사태에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전광석화같이 빠른 동작으로 쓰러진 괴한의 혈도까지 짚어 끽소리도 못하게 해버리는 솜씨에

그저 놀랄 뿐 그가 누구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했다.
그때!
정신이 나간듯 어이없이 서 있는 하림의 손을 덥썩 쥔 괴한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하림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심소저!]
순간, 하림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그사람은 실로 뜻밖에도 옥소선자 바로 그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옥소선자!]
틀림없는 옥소선자였다.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감싼 옥소선자는 머리에도 역시 검은 수건을 쓰고 있었다.
하림의 손목을 잡은 옥조선자는 쓰러진 괴한을 발로 굴려 숲 속으로 밀어넣고는 조심히 물었다.
[양상공을 만나봤어요?......]
[예. 지금 저쪽에 있어요.]
하면서 하림은 자기가 서 있는 방향의 뒤편을 검을 들어 가리켰다.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 이 숲 밖에는 많은 고수들이 몰려와 있는 모양이에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데......]
그러자 하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엉뚱한 말을 물었다.
[옥소언니! 혼수막어(混水幕魚)라는 계략이 삼십육계(三十六計) 중에 있나요?]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묻지?]
하고 되묻는 말에 하림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 안되겠어요. 큰 사부님의 보검이 아니고서는 쇠창살을 부술 수 없을 것같아요.]
하는 말에 옥소선자는 나직한 소리로 위로해주었다.
[염려말아요. 내가 양몽환과 조소접의 위험한 사정을 주소저에게 알리고 왔어요.

이제 곧 무슨 연락이 올 거에요.

그때까지만 양상공과 조소저를 암암리에 보호하면 돼요.]
하고는 계속해서 하림에게 물었다.
[도옥을 만나봤어요?]
[예, 그런데......]
말꼬리를 늘이며 말하지 못하는 하림을 바라보던 옥소선자는 다급히 뒷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나는 도옥과 함께 양상공을 만나서 그에게 혼인파기서에 수인(手印)을 하도록 했어요.]
옥소선자는 의외라는 듯 표정을 굳히며 놀라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혼인파기서?]
[도옥으로 하여금 나를 믿게 하려고......]
하림은 그간에 일어난 사정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리고 막 말을 그쳤을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인기척을 들었는지 옥소선자는 하림을 이끌고 숲 속으로 몸을 감추는 것이었다.
[쉬이! 누가 온 모양이야.]
하는 바로 그때, 과연 옥소선자의 말대로 회색가사(灰色袈裟)를 입은 두 명의 중이

숲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누구일까요? 도옥의 편일까요?]
근심이 되는 듯 속삭이는 하림의 물음에 옥소선자도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옷차림으로 보아 소림사(小林寺)의 중같은데...... 그렇다면 도옥과는 적대관계지......]
그러는데 홀연 분노한 도옥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놈이냐? 전부 죽여버리겠다!]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살을 도려내는 비명소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아마 몇 사람이 죽거나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그 소리에 옥소선자와 하림은 굽혔던 허리를 펴며 소리나는 곳을 주시했다.
소림사의 승려같은 복장을 한 두 명의 중이 갈길이나 고이 지나갈 일이지

무슨 일로 숲 속으로 뛰어들었는지 옥소선자와 하림은실로 뜻밖의 일에 눈을 크게 뜨고

귀을 바짝 세웠다.
그러나 옥소선자나 하림은 지금 두 명의 승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예측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고막을 찌르는듯 들려오고 이어서 나뭇가지,

돌덩이가 부러지고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순간, 숲속에 몸을 숨기고 바라보고 있는 옥소선자와 하림의 시선에는

금환검을 휘두르며 맞은편 숲속으로 뛰어드는 도옥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마 그쪽에서 또 싸움을 벌릴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얼마 동안 응시하며 벌어진 사태에 긴장하고 있던 하림은 아무 기척이 없는 것에

후유하고 숨을 내쉬고는 옥소선자를 불렀다.
[옥소언니! 이제 저는 가봐야겠어요.]
그러자 옥소선자는 하림의 손을 꼭 쉬며 고개를 들었다.
[어디를?]
[도옥에게 가봐야겠어요. 너무 늦게 가면 그가 의심할지도 몰라요.]
[도옥과 같이 음흉하고 잔인한 사람과 어떻게 싸우겠다고 하는건지 모르겠어.

그러다 만일 씻을 수 없는 욕이라도 당한다면 이다음 어떻게 양상공을 대할라고?]
[상관없어요. 저는 다만 양상공을 구하기만 한다면 죽어도 좋아요.

저는 지금까지 한번도 양상공을 도와주지 못했어요. 그러나 이번만은 저도......]
하는데 급히 옥소선자는 하림의 입을 막았다.
[쉬이...... 누가 또 와요.]
하는 말에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네 명의 장정을 거느린 왕한상이 맞은편 숲 속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주위는 조용해졌다.
[그럼, 가겠어요.]
하고 다시 일어서는 하림에게 옥소선자는 타이르듯 말했다.
[잘 생각해 보고 행동하는 것이 좋겠어요.

혹시 주소저가 곧 현옥을 타고 올지도 모르는데 그때 주소저에게 의논해서

행동하는 것도 늦지 않을 거에요.]
하는 말에 하림은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곧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해요.

그러나 지금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란이언니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일.

기다리기만 하다 양상공에게불행이라도 닥친다면 어떻게 해요?]
하림의 말도 일리있는 말이었다.

하림의 말대로 주약란이 오기만 기다리다 도옥의 손에 양몽환이 해라도 입는다면

일찍 손쓰지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옥소선자는 심히 처리하기 어려운 일에 마주치고 말았다.
[그럼, 심소저는 어떻게 행동하겠는지?]
[글쎄...... 하여튼 어떻게라도 해보는 수밖에 없군요.

만일 란이언니가 온다면 저에게 연락이나 해주세요.]
옥소선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단안도 없었고 더구나 하림을

말릴 계제도 아님을? 일고 있었다.

하림이 하는대로 그냥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여간 나도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양상공의 생명에 관한 문제인만큼

나도 신중을 가하긴 하겠어요.

그러나 심소저도 각별히 행동하도록 하세요.

다만 도옥의 인간됨이 교활하고 잔인한만큼 조심해서 상대하세요.]
[잘 알겠어요. 저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에요.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옥소언니께서도 보중하세요.]
하고 돌아서던 하림은 갑자기 생각난 듯 되돌아섰다.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
[저에게 독을 막을 수 있는 재간을 가르쳐 주세요.

언니는 그렇게 무섭다는 백독옹의 독도 다 막아내지 않았어요?

저는 그때 너무 감격한 나머지 언니를 만나면 꼭 가르쳐 달라고 부탁드리려 했어요.]
그러자 옥소선자의 대답은 기대가 컸던 하림에게 실망만 안겨 주었다.
[그건 모두 가짜 독약이었어. 진짜 독가루라면 주소저가 와도 막을 재간은 없을 거야.]
그러나 하림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지만 그래도 거짓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옥소선자가 겸손해서 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
[가짜라고요? 믿기지 않는데요!]
[그럴 거야. 그러나 말을 하려면 길어져서......]
하는 말에 하림은 화가 나는지 옥소선자의 말도 듣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진짜이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 같아 야속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가겠어요. 보중하세요.]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좀전의 도옥이 사라진 숲 속으로 자태를 감추고 말았다.
하림의 아름다운 자태를 집어삼키듯한 숲속을 바라보고 있던 옥소선자도

몸을 돌려 반대 방향의 숲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옥소선자와 헤어져 숲 속을 빠져나온 하림은?

곧 눈 앞에서 회색가사를 입은 두 명의 중과 도옥이 맞붙어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명의 중은 각기 선장(禪杖)과 계도(戒刀)를 들고 도옥의 그 금환검을 피해 협공해 들어갔다.

그러나 기기묘묘한 재간으로 금환검을 휘두르는 도옥은 좌중우돌 눈이 돌아가도록

날렵하게 찌르고 후려갈겨 두 명의 중을 꼼짝 못하게 어르고 있었다.
그러나 두 명의 승려도 보통의 무공솜씨가 아니었다.

나이는 거의 오십줄에 돌어선 듯한 두 명의 중은 도옥의 날렵한 공격을 재치있게 피하면서

잘 막아내고 있었다.

더구나 양쪽에서 일제히? 협공해오다 후려갈기고 뒤로 물러서는 동작이나 무기를 거두어 들이는

수법도 도옥못지 않았다.

그런데다 도옥의 공격 수법을 미리 알아내고 유효 적절한 시기에 방비태세를 취하며

물러서는 태도가 흔히 볼 수 있는 무공도 아니었다.
얼마 동안 도옥과 두 명의 중이 휘두르는 공격법에 넋을 잃고 있던 하림은

그제야 주위에는 도옥의 부하가 한 명도 없다는 것에 의아한 생각을 품었다.

아무리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 많던 부하들은 어느 숲 속에 틀어박혔는지

 어두컴컴한 숲만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 모두 어디로 갔을까? ......혹시 숲 속에서 매복하고 기회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
하고 있을때 싸움에 여념이 없던 도옥은 자기 뒤에 하림이 다가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더욱 기세를 올려 두 명의 중에게 지쳐들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의 재간을 하림에게 보이려는 행동이었다.

그러한 도옥의 패기에 넘치는 공격에 계도를 들고 달려들던 한 명의 중이 비명을 지르며?

먼저 땅 위를 굴렀다.
갑자기 한 명의 동료를 잃은 중은 그만 기가 꺾이는지 선장을 거두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

아무래도 도옥의 금환검을 피해 도망갈 눈치였다.

그런 기미를 눈치챈 도옥은 하얀 이를 들어내 히히? 웃으며 번개같이 달려들어 선장을 쥔

오른쪽 어깨를 사정없이 내려갈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장을 들었던 팔을 축 늘어뜨리며 중이 비틀거렸다.

그런 것을 여유도 두지않고 도옥이 지쳐들어갔다.

쓰러질듯 쓰러질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중에게로 접근해 들어간 도옥은

중의 허벅지를 힘껏 맘껏 걷어차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중은 사정없이 걷어차는

도옥의 발길을 얻어맞고 뒤로 나자빠지듯 대여섯 걸음이나 어기적거리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으며 두 다릴 번쩍 들었다.

두 다리를 들며 주저앉은 중을 쫓아가서 한번 더 냅다 발질질을 해서 앉은채로

홀랑 뒤로 밀어버린 도옥은 그제야 됐다는 듯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하림을 향해 씨익 웃는 것이었다.

그렇게 웃는 도옥의 웃음이 왜 그렇게 무섭고 잔인한지 하림은 오싹 몸서리를 쳤다.

그러는 한편 순식간에 무공이 절묘한 두 명의 중을 쓰러뜨리는 도옥의 솜씨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오는 하림이기도 했다.
<정말 놀라운 재간이야. 상당한 진보가 있었어......>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을 치뜨고 자기를 노려보는 도옥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 그러한 도옥의 표정에서하림은 불안을 느꼈다.

그 불안은 혹시 눈치라도 채지 않았는가 하는 근심에서였다.
< ...... 나의 행동에서 무슨 눈치를 챈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욱 조심해야지...... >
하면서 하림은 생글생글 웃으며 도옥에게 다가갔다.
[당신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요. 불과 몇 년 사이에 몰라볼 만큼 진보했군요.

그만한 실력이라면 양몽환도 당해내지 못할 거에요.]
그러나 도옥의 대답은 아주 차가웠다.

그리고 분노한 얼굴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는데 왜 나왔어!]
하는 말에 하림은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슬쩍 둘러대면서 화가 난 척했다.
[당신도 너무 하시군요.

당신이 남과 싸우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도옥은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노려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 도옥의 눈초리는 하림을 몸서리지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계시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양몽환은 한번도 당신처럼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보이진 않았어요 ......]
하며 일부러 서운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도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하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싸늘하게 물었다.
[이 도옥의 마음 속에 많은 의아심이 있는데 분명히 말해줄 수 있어?]
[무슨 의심이 있다는 거에요?]
[의심이 많지. 우선 당신과 양몽환은 천지신명께 맹세한 부부 사이로서

서로 애정이 깊은 줄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일로 이 도옥에게 달려오게 됐지?]
하고 묻는 말에 하림은 이미 그런 대답쯤 마련되어 있었다는 듯이 주저치 않고 즉시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해요. 당신이 양몽환을 놓아주는데 대한 보답으로 당신에게 온 거에요.]
그러자 도옥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댔다.
[핫...... 하...... 그렇겠지. 그러나 당신이 이 도옥에게 시집을 온다해도?

이 도옥은 결코 양몽환을 놓아주지는 않을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이 그를 미워하고 어떻게든지 없애버리려고 하는 마음을 저는 알고 있어요.]
[흥! 그러나 이 도옥을 속이진 못하지. 등가보 놈들이 당신을 이 도옥에게 보내

당신의 미색(美色)을 이용해서 이곳의 정세를 탐지한 후, 내외(內外)가 호응해서

양몽환을 구해내겠다는 계획이었겠지!]
순간, 하림은 모든 계획이 허사로 끝나는줄 알았다.

기어이 숨기고 숨기던 계획을 도옥이가 눈치채고 말하는 것만 같아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하림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나보고 당신을 살피라고 한 사람은 없었어요.]
[그럼, 당신 스스로 왔단 말이오?]
[그래요. 그 누구도 당신과 무공을 겨루어 양몽환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당신은 미색을 미끼로 해서 이 도옥을 속이고 양몽환을 구해내겠다는 것인가?]
순간, 자기의 심정을 꿰뚫어 보는 듯한 도옥의 말을 들으며 하림은 마음을 졸였다.

그래서 깊이 탄식하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저를 그렇게도 믿지 못하나요? 그런 의심이 있으면 왜 일찍 묻지 않았어요?]
[왜 지금은 늦었다는 말인가?]
[물론 양몽환과 혼인파기서를 쓰기 전이라면 늦지 않았죠.]
하고 하림이 탄식하는 말에 도옥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핫...... 하...... 심소저! 이 도옥이 그렇게 어수룩하게 당신의 계략에?

속는 사람이라면 일찍이 무예계를 제패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걸!]
하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림의 계획을 하나서부터 끝까지 세세히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나는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도옥의 간교함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 교활한 놈 도옥! 벌써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하고 도리어 나를 속여왔구나!? >
그러나 도옥이 눈치챘다고 해서 그대로 물러선다면 실로 어떠한 보복이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끝까지 버틸 수 있는대로 버티는 것만이 하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저의 말을 믿지못한다면 더 말해도 소용없는 일이군요.]
하고는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도옥은 급히 하림을 막아서며 그녀의 오른쪽 손을 움켜쥐고 차갑게 물었다.
[가면 어디로 가겠다는 거요?]
싸늘한 말에 하림도 싸늘하게 대답했다.
[몰라요.]
[모른다고?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당신이 저를 믿지 못하는 이상 이곳에 더 있어서 뭘 하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흥! 그러나 지금 당신의 오른손을 쥐고 있는 이 도옥이 조금만 힘을 준다면 성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까짓 팔 하나쯤 부러진대서 대단할 것도 없어요.]
[그래? 대단하시군! 흥! 팔과 다리, 그리고 모든 관절을 비틀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지!]
[두렵지 않아요. 뼈가 부러진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마음대로 해보시죠 ......]
[흥! 두렵지 않다고?]
[그래요. 살다보면 일생동안 여러가지의 고통도 없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당신이 저의 뼈를 비틀어 죽인다해도 사람을 속이는 것은 싫어요.]
그러자 도옥은 두 눈에 살기를 띄우며 차갑게 소리쳤다.
[당신이 이 도옥과 부부가 되겠다고 응낙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슨 말도 믿을 수 없어!]
[그건 응낙할 수 없어요. 처음의 약속대로 당신이 양몽환을 놓아주어?

제가 양몽환에게 입은 은혜를 보답하게 해준다면 모르지만 그전엔 응낙할 수 없어요.]
그 순간, 도옥은 한가지 계략을 생각해 내고 즉시 되물었다.
[좋소, 양몽환을 놓아주기만 하면 즉시 당신은 이 도옥과 부부가 되기를 응낙하겠소?]
[물론이죠. 양몽환만 놓아준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어요.

그러면 저도 양몽환에게서 입은 은혜를 갚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당신과 기꺼이 부부가 되겠어요.]
그제야 도옥은 움켜쥐었던 하림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빙긋이 웃었다.
[당신의 입으로 틀림없이 대답했어! 만일 변한다면 그 날이 끝인줄 알아야 해!]
[언제 제가 거짓말하는 것을 봤어요?]
[그렇지. 좋아. 지금 즉시 양몽환을 풀어주겠어.

그래서 당신의 눈으로 그가 석방되는 것을 보게 하겠어!]
하면서 도옥은 굳은 결심이나 한 것처럼 엄숙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도옥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잡아 낳으려구요?]
[천만에! 그가 이 숲속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 되지 않소?]
[숲 속에다 고수들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다시 잡으면 되겠죠?]
그러자 도옥은 벌컥 화를 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요? 이렇게 해도 믿지 않고 저렇게 해도 믿지 않고......]
하고 화통을 터뜨리는 바람에 하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곧 웃었다.
[아니에요. 그저 그가 무사히 숲 밖에까지 빠져나가는 것을 보기 만 하면 돼요.]
[그럼 말해봐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만족할 수 있는지 ......]
[별것 아니에요. 혹시 매복시킨 복병이 있다해도 그를 다치지 말도록?

 명령해서 이곳을 빠져나가게 하면 돼요.]
[좋아. 그렇다면 당신과 이 도옥이 함께 양몽환을 오리(五里)밖까지 전송해주면 되겠나?]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당신이 그만큼 마음을 써준다면 양몽환이 이곳을 떠난 즉시 당신과 혼인식을 올도록 하겠어요.]
하는 것은 정말 양몽환만 구해낸다면 자기의 몸을 도옥이 마음대로 주불러 터뜨려도 좋을 것같은

심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금의 하림으로서는 오직 양몽환을 구한다는 일념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육체가 도옥의 야욕의 대상이 되어도 개의치 않을 것같았다.
그러나 도옥은 하림이 말하는 혼인식이라는 것이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꼭 혼인식을 해야만 되겠소?]
[그래도...... 흙을 향(香)으로 대신해서라도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고하면 될 것 아녜요?]
도옥은 할 수 없이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무렇게나 당신 좋을대로 하지!]
내뱉듯이 중얼거린 도옥은 하림을 이끌고 양몽환이 갇혀있는 수거 앞으로 다가갔다.
도옥의 뒤를 따라 주위에 신경을 집중한 하림은 암암리에 진기를 운집하고 도옥의 행동과

주위의 사태를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다.
순진하고 선량해서 남을 속일줄도 모르는 하림이 지금 생전 처음으로 계략을 써서,

그것도 두뇌가 비상한 도옥에게 계략을 써서 양몽환을 구해내려는 순간이었다.

하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정말 무사히 양몽환이 구출되기만을 속으로 빌고 있었다.
하림과 같이 수거 앞으로 다가가던 도옥은 흠칫 걸음을 멈추며 눈을 날카롭게 부릅떴다.

그리고 사방을 휘둘러 보더니 수거를 지키고 있어야할 장정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의심을 품고 금환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도옥이 날카로운 눈에 안광을 번쩍이며 금환검의 끝으로 수거를 덮고 있는

휘장을 걷어올리는 바로 그 찰나! 홀연! 뒤쪽으로부터 무슨 물체가 달려든다고 느끼는 순간,

휙 돌아서며 금환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물체를 내려쳤다.
그러자 도옥의 금환검을 정통으로 맞은 물체는 펄!? 소리를 내며 주위 사방으로

운무(雲霧)를 그리고 쏴아! 흩어지며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와 함께 크게 놀란 도옥은 어쩔줄을 모르고 재빨리 대여섯자나?

옆으로 비켜서거 말았다.
그러나 비록 도옥의 행동이 빨랐다고는 하지만 하늘을 뒤덮듯 쏟아져 내리는

한가닥의 매캐한 기운은 그의 코 속을 후비고 들어가고 말았다.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진기를 돋우고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그리고 예리하게 살피는 도옥의 시야에는 옥피리를 들고 천천히 다가오는

옥소선자가 들어왔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얼굴에 노기를 띄우지 않고 싸늘한 웃음을 흘리며

도옥을 마주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 숲 속에 상당한 부하를 매복시켜 두었을 텐데 어째 무인지경으로 조용하죠?]
하는 말에 도옥은 코웃음을 쳤다.
[흥! 들어올 때는 쉽게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걸!]
하고 튕기는 말에 옥소선자도 코웃음을 쳤다.
[흥! 큰 소리 치지 말아요. 나하고 상대가 될 것같아요?]
하는 순간, 도옥은 조금 전에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이상한 물체를 생각하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덜컥 겁이 났다.
< ...... 혹시 저 옥소선자가 뿌린 물체가 독가루라면? ...... 음 중독될지도 모르겠는데?...... >
생각하며 두 눈을 치켜뜨고 옥소선자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도옥이 안하지. 당신 따위 하나?

사로잡는 것은 이 도옥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간단한 일이지.

굳이 이 도옥의 손을 빌릴 것도 없지!]
입으로는 너털웃음을 웃고 큰소릴치면서도 조금 전에 코로 들어온 매캐한 냄새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꼭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중독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이었다.
그러한 도옥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찬찬히 뚫어보던 옥소선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 조금 겁이 나는 모양이지...... >
옥소선자는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야릇하게 웃었다.
[살고 싶지 않으면 얼마든지 말하고 싶은대로 말해도 좋아!]
그러자 도옥도 히죽이 웃었다.

과연 도옥다운 행동이었다.
[흥! 당신같은 재간으로는 이 도옥을 어떻게 할 수도 없지!]
[글쎄, 그러나 지금 반격할 힘이나 있는지 그것이 의문이야!]
하고 빈정거리듯 하는 말에 도옥은 눈쌀을 찌푸리며 옆에 서 있는 하림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너걸음이나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한편, 하림은 하림대로.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의 자기의 계획이 성공되어 도옥? 스스로 양몽환을 석방하겠다고 수거 앞으로 나선

지금 갑자기 나타난 옥소선자로 인해서 석방되는 순간이 조금씩 조금씩 연장되고 있는 것에

긴장과 초조가 하림의 마음을 괴롭히고 았었다.

그런데다 옥소선자가 던진 이상한 물체가 어떤 독가루인지는 모르지만 힐끔 바라보는

도옥의 눈초리에서 무엇인가 심상찮은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구원을 청하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어서 더더욱 괴로웠다.

만일 그 이상한 물체가 정말 독가루여서 도옥을 잠시나마 혼미한 정신으로 만든다면,

그래서 옥소선사와 도옥이 싸움을 벌린다면 양몽환을 구해야 하는 이 급박한 시기에?

과연 누구를 도와야 할지 눈앞이 야찔해지는 하림이었다.
그때, 옥소선자의 코웃음 섞인 말이 터져나왔다.
[도옥! 오늘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얼굴 가득히 비웃음을 머금은 도옥은 흥! 소리를 내며 곧 받아넘겼다.
[건방진 소리! 이 도옥이 먼저 당신부터 죽일 걸!]
그러는 순간 옥소선자는 지금 바로 이 기회에 먼저 선수를 쓰는 것이 적당할 것같았다.
그것은 옥소선자가 계획한 일이 조금씩 눈에 뜨이기 때문이었다.
< 지금 나의 암기에 중독되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먼저 손을 써서 사로잡으면

이곳을 빠져나가기도 무난할 것이고 양상공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
여기까지 생각한 옥소선자는 더 생각딜 사이도 없이 그대로 피리를 흔들며

도옥에게 덮쳐들고 말았다.
순간, 옥소선자가 공격해 올 것을 알고있던 도옥은 들었던 금환검으로

옥소선자의 피리를 막지않고 살짝 옆으로 비키는 것이었다.
사실 옥소선자는 자기의 무공으로 도옥을 처치해버릴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뿌린 독가루에 틀림없이 중독되었음을 짐작한 옥소선자는 선수를 가해서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어 그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느닷없이 달려들어 선수를 썼지만 도옥이 슬쩍 비켜서는 바람에

그만 일격이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신중을 기해서 되도록이면 짧은 시간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무공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한편, 도옥은 도옥대로 신중을 기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뿌린 물체가 독가루여사 항거할 힘을 잃는다면 하림이 대신 싸워줄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보다 자신의 몸이 독가루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제대로 무공을 발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금씩 진기를 운집하고 있었다.
이와갇이 서로 각기 생각에 잠겨 선뜻 달려들지 못하고 잠시 대기하고 있는 동안

느닷없이 먼서 옥소선자가 한소리 크게 외치며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수중에 옥피리를 풍차같이 돌리며 도옥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옥피리의 수 많은 그림자가 도옥의 몸을 에워싸듯 찬바람이 몰아닥치는 것이었다.

실로 가공할 공격 수법이었다.
그 순간, 위기를 직감한 도옥은 재빠른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 무수한 옥피리의 그림자를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옆으로 비켜서는 도옥의 신법도 놀라웠다.
그러나 한 옆에서 마음을 졸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하림은 옥소선자가 땅을 박차는 순간

영락없이 도옥의 어느 부위에서 피가 흐를줄 알았다.

그런데 도옥이 약간 어깨를 움직이며 옥소선자의 공격을 날렵하고도 기묘하게 빠져나가는 것도

보고는 약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나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하는 도옥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옥소선자의 무공이 도옥을 따르지 못할 뿐더러 지금 자기의 행동을 눈여서 본 도옥이

어떤 의심을 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옥을 공격하고 잠시 여유를 갖는 옥소선자에게 천운취월(天雲取月)의 수법을

전개하여 검을 휘두르며 소리치고 말았다.
[옥소언니! 너무하지 않아요!]
순간, 실로 뜻밖에 하림의 공격을 받은 옥소선자는 눈앞이 아찔했다.
적어도 하림만큼은 자기에개 장검을 들이대지는 않으리라고 여겼던 옥소선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공격을 당하게 된 옥소선자는 황망히 두어걸음 피했다가 눈썹을 곤두세우며

옥피리를 휘둘러 다시 지쳐들어가 하림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실로 의외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틀림없이 독가루에 중독되었으리라고 여겼던 도옥이 놀라운 재간으로 공격권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자기의 독가루가 도옥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자 옥소선자는 당황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선수를 쳐서 먼저 공격한 싸움이 허사로 돌아가고 도리어 옥소선자 자신이

 매우 불리하고 위급하다고까지 느끼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하림마저 합세하는데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생각하면 허무하고도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분통이 터져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만사(萬事)를 성급히 처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이 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기회를 노려 일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할 것같았다.
그래서 옥소선자는 비껴잡았던 옥피리로 도옥을 공격해서 뒤로 물러나게 한 다음 돌아서면서

그대로 하렴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너무나도 기세가 등등하게 달려드는 옥소선자의 옥피리를 받아내지 못한 하림은
재빨리 한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옥소선자는 비켜서는 하림을 쫓지않고 그대로 곧장 몸을 날려 숲 속으로

자태를 감추고 마는 것이었다.
옥소선자의 공격을 피해 급히 옆으로 비켜섰던 하림은 옥소선자가 숲 속으로 자태를 감추자

즉시 도옥에게 달려갔다.
[다친 곳은 없어요?]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도옥은 고개를 흔들었다.
[속았어. 그녀한테 속았어. 다음에 만나면 용서치 않겠어.]
[무엇을 속았단 말이에요?]
[핫, 참! 이상한 냄새가 나는 가루를 뿌리기에 독가루인줄 알고 혹시 마취되면 큰일이다 싶어서

조심했지. 그래서 조금 이상하기에 독가루 냄새에 중독된줄 알았단 말야.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정말 중독되진 않았어요?]
[아니, 중독되지 않았어. 옥소선자도 이 도옥이 중독된줄 알고 덤벼들었지만

내가 중독되지 않은 것을 느꼈을 때 그녀도 눈치를 채고 먼저 도망간 거야.]
[그럼 됐어요. 중독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언제든지 옥소선자를 잡을 수 있지 않아요?]
그러자 도옥은 빙긋이 웃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도옥의 눈에 비치는 하림은 천성도 그렇겠지만 자기를 생각해 주는 것이

조금도 거짓이 아닌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줄 알고는 내심 기쁘기 한량없었다.

모두 자기를 위해서 말하는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암.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있어. 지금은 비록 도망갔지만

이 도옥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거나 마찬가지야.]
하면서 도옥은 하림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림은 도옥의 의심 속에서 풀려나온 것만이 다행이라
여기고 생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웬일일까요 ...... 숲 속에 매복시켜 놓은 사람들이 꼼짝도 안하니!]
그 말에 도옥은 빙긋이 웃으며 어깨를 폈다.
[그들은 모두 이 도옥의 명령을 받고 있지. 이 도옥의 명령이 없는 한, 어느 누구도 움직일 수 없어!]
그러자 하림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어요?

옥소선자의 무공도 상당한 실력인데!]
그러자 도옥은 그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또 빙긋이 웃었다.
[그거......? 그건 그렇고 당신이 생각하는 양몽환에 비해 이 도옥의 지략이 어떻소?]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점이 있어요.]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핫...... 하...... 우리 술이나 한 잔 하는 것이 어떻소?]
하고 즐거운 듯이 소리치는 말에 하림은 주춤 놀라는 시늉을 냈다.
[뭐 즐거운 일이라도 있어요? 갑자기 술을 마시겠다고 하고?]
[암, 있고 말고.]
[뭔데요?]
[이 도옥은 지금까지 당신을 믿지 못했소.

그러나 오늘 아니 이제는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되었소.

이러니 술 안 마시고 되겠소?이 도옥은 기쁘단 말이오.]
그러나 하림은 도옥과 같이 즐거워 할 수는 없었다.
< 만일 양몽환이 도옥과 내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는다면 얼마나 괴로워 할까?...... >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후!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자 도옥은 무슨 기미를 알아챘는지 하림의 가는 허리를 껴안으며 위로했다.
[괴로워할 것 없어. 이제부터는 이 도옥이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림이 한숨을 쉬는 이유가 자기가 하림을 믿지 않아서 그러는 것인줄 알고 큰소릴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했는지 도옥의 몸을 파고들며 자기 편에서 더욱 열을 올려

도옥을 끌어안으며 몸을 밀착시키는 것이었다.
그 순간은 모든 사물이 움직임을 멈춘 듯 도옥은 도옥대로 마음이 느긋했고 하림은

하림대로 성신을 빼앗긴 듯이 서로 몸을 껴안고 비빌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길지 못했다.

별안간 살을 도려내는 듯한 비명소리에 황홀경에 빠져있던 그들은 후딱 정신을 차렸다.

날카롭고도 처절한 비명소리에 끌어안았던 하림의 허리에서 손을 뗀 도옥은

즉시 금환검을 뽑아들며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순간, 도옥에게서 몸을 뗀 하림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즉시 도옥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비명소리는 숲 너머에서 들려왔다.

날쌘 동작으로 순식간에 숲 속을 뚫고나온 도옥과 하림은 앞에서 달려오는 이창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연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용두지팡이를 꼬나잡은 이창란은?

무엇에 그렇게 노했는지 여덟 팔자로 눈썹을 모아붙이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옆의 숲 속에서 두 명의 장정이 획 튀어나오며 이창란의 앞 길을 가로막고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창란은 달려오던 그 여세를 몰아 썩은 풀베듯 두 명의 장정을 용두지팡이로

모질개 후려갈기 그 뒤이어 쇠가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두 명의 장정은 들었던 장검을 허공으로 던지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이 날카롭고도 빠른 동작으로 두 명의 장정을 쓰러뜨리는 이 창란이었다.
그러한 이창란을 바라보던 도억은 조용히 하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이상란의 무공은 엣날과 같이 날카롭군!]
하고는 금환검을 한번 휘둘러 찬란한 검광을 뿌리면서 이창란에게 달려나가며 소리치는 도옥이었다.
[도망가지 말고 거거 서시오!]
순간, 이 창란은 음성만 듣고도 누구라는 것을 알아냈는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차가운 음성으로

맞받아 소리치는 것이었다.
[오냐. 그렇지 않아도 너 도옥을 만나러 왔다.]
하고는 도옥과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섰다.
[한가지 물어볼 말이 있다.]
[무엇을 묻는다는 거요?]
하고 싸늘하게 되묻는 말에 이창란은 입을 씰룩거렸다.
[옛날에 이 노부가 너를 키워줬다는 건 잊지 않았겠지!]
[그거야 지나간 옛날 이야기입니다. 그까짓 것을 이제 따져서 뭣 하겠소!]
[뭣이? 이 배은망덕한 놈!]
[너무 노하지 마시오. 이제라도 이 도옥을 도와 대업을 이루게 되면 일방(一方)의 웅주(雄主)자리를

하나 줘서 은혜를 갚도록 하겠소.]
[닥쳐라 이놈!]
소리를 질러 도옥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도옥은 여전히 차갑게 빈정거렸다.
[왜 큰 소리로 야단이시오?

이노영웅께서 정말 이 도옥과 싸우겠다면 옛날의 은원(恩怨)은 따지지 마시오!]
하는 소리에 분통을 터뜨리려던 이창란은 그제야 도옥의 옆에 서 있는 하림을 발견했는지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너는 림아(琳兒)가 아니냐?]
[네, 사백부님!]
[네가 어떻에 여기 왔느냐?]
이창란의 묻는 말에 하림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그녀 역시 싸늘하게 대답했다.
[놀라셨죠? 저도 이제는 변했어요. 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창란은 하림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길이 없어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던 이창란 무엇인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 ...... 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군...... >
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
[너도 도옥이한테 속은 것이 아니냐? 혹시 욕이라도 당하지 않았느냐?]
하고 힐난하듯 하는 말에 하림보다 먼저 도옥이 소리내어 웃었다.
[핫......하......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이오? 너무 지나친데!]
[어쨌든 좋다. 그러나 이 한 가지만 분명히 대답하라!]
[도대체 무얼 가지고 그러는 거요?]
[양몽환이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상처는?]
[그건 대답할 수 없소. 그러나 잘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오냐, 알았다. 그러나 너는 용서할 수 없다!]
벽력같이 소리지른 이창란은 들었던 용두지팡이를 번개같이 변화시켜 태산압정(泰山壓頂)의 한 수로,

그의 신력(神力)을 다한 공력이 웅후한 내공력으로 도옥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실로 그 수법은 태산을 정복하고 무너뜨릴만한 무서운 일장(一杖)이었다.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그러나 도옥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비스듬히 금환검을 휘둘러 이창란의 공격을 피하고는

옆으로 슬쩍 비켜서는 것이었다.
지금 도옥이 평범하게 막은 수법은 수 십년의 무공을 쌓은 이창란도 순간 아연할 만금

날렵한 재간이었다.
다시 한번 노리고 쇳소리를 내는 용두지팡이에 슬쩍 비키며 금환검을 갖다댄 도옥은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 용두지팡이를 밀어붙이며 이창란의 옆구리를 노리고 역공을 감행했다.
그리고는 연이어 한광토예(寒光吐 )의 기묘한 수법으로 사정없이 무찔러 들어가는 바람에

이창란도 할 수 없이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일단 뒤로 물러선 이창란을 그대로 버려둘 도옥이 아니었다.
순간이라도 반격의 틈을 주지않은 도옥은 그림자처럼 바싹 따라 붙으며 금환검을 휘둘러

이창란의 급소 요혈만 찌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실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봉착한 이창란은 날리는 수염이 꼿꼿이 일어나며 눈에서는

붉은 과채가 철철 넘쳐 흐르는 것이었다.

도옥이 바로 턱 밑에까지 따라붙으며 요혈은 노리는데는 아무리 신력(神力)을 가진

이창란이라도 자기의 신력이 발휘하지 못하고 도옥의 공격에 휘말려 위기를 모면하기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를 뒷걸음질 치며 피하기만 하던 이창란은 갑자기 수세(守勢)에서 벗어나며

재빨리 공력을 운집시켜 자기의 유일무이한 재간인 건원지(乾元指)의 신공을 발휘하려고

눈을 부듭떴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도옥은 잠시의 여유도 주지않고 공격을 하면서도 이창란의 표정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세심히 주시하고 있다가 이창란의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

건원지의 신공을 생각했다.

중상을 당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고 생명을 잃지 않으면 중상을 입어야 하는 실로 무시무시한

건원지의 신공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먼저 건원지의 신공을 얻어맞기 전에 선수를 써서 공격할 결심으로

천강지(天? 指)의 수법으로 재빨리 공격을 변화시겨 손을 번쩍 들었다.
지금 도옥이 선수를 써서 공격하려는 천강지수법은 바로 귀원비급에 기재되어 있는

무공의 하나로서 도옥이 무려 오년간이란 세월을 보내며 연마 단련한 기술이었다.
이 천강지의 수법은 이창란의 간월지에 버금가는 것으로서 위력으로 말해도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수법을 지금 도옥은 손을 들어 선수로 공격한 것이었다.

그 순간, 한줄기의 강력한? 지풍(指風)이 도옥의 손끝에서 빠져나가며

흡사 태풍이 불어닥치듯 이창란의 어깨를 노리고 밀려들었다.
그것은 이창란의 건원지 신공보다 한발 먼저 도옥의 천강지 지풍이 허공을 뚫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창란도 도옥이 손을 번쩍들 때 천강지수법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웅후한 내공을 믿고 밀려오는 지풍을 맞받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었다.
이창란의 건원지신공으로 말하면 한때 강호 무술계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실로 도옥의 천강지와는 막상막하의 위력을 자랑하는 수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옥보다 한 수 늦은 이창란은 천강지의 지풍을 맞받아 내지않고 급급히 옆으로 비켜나

그의 지풍권(指風圈)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도옥은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그리고는 이창란을 불렀다.
[오늘은 특별히 옛 정분을 생각해서 사정을 두는 것이오.

지금 이 숲 속에 이 도옥의 부하 수 십명이 매복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이노영웅께서도 망령되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오.

이후 이 도옥을 원망하지 마시고 속히 돌아가시오!]
소리내어 외친 도옥은 하림의 손을 잡고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옥의 위인됨이 얼마나 교활한지,

만일을 염려해서 하림을 방패삼아 이창란의 건원지 공격을 은근히 막으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림을 뒤에 달고 도망가는 도옥에게 건원지의 신공을 발휘할 수 없는 이창란은

발을 구르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이없이 도옥을 놓쳐버린 이창란은 부어터진 분통을 억제하지 못하고 들었던 용두지팡이로

땅바닥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분통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생각할 수록 원통하고 통곡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취를 감춘 도옥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도옥이 도망하면서 던진 말도 생각해 봐야했다.

그의 말대로 숲속에 수 십명이 매복되어 있다면 그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떠한 행동으로 습격해 올지도 계산에 넣어둬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에도 일각일각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있는 양몽환을 생각하면 가슴이 탔다.

그를 구하는 것만이 시급한 문제였다.
범을 잡으려면 범이 살고 있는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이창란은

즉각 용두지팡이를 꼬나잡고 숲 속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갑자기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신호를 기다려 네명의 검북사의(黔北四義)가 자태를 나타내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만일을 대비해서 이창란이 숨겨두었던 네 명의 부하였다.

도옥이 많은 부하들을 시켜 공격한다면 검북사의 네 명의 부하로 하여금 합격술(合擊術)로

대적케 하고 자기 자신은 건원지신공으로 도옥의 고수들을 쓰러뜨릴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창란의 예상을 뒤엎고 도옥이 양몽환의 아내인 하림을 데리고 있는데는

네 명의 부하를 불러 들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부하들의 생각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도옥이 사라진 후에야 생각나서 신호를 보냈던 것이었다.
즉각 달려나은 검북사의를 앞에 세우고 이창란은 낮은 음성으로 주위의 형세를 설명했다.
[지금 이 주위의 숲 속에는 수많은 도옥의 부하가 매복되어 있는 모양이다.

주위 경계에 각별히 조심하라!]
하고 주의를 주는 말에 검북사의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그따위 매복수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됐어! 이 노부는 이내 살계를 끊은지 오년이 되었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지키던 살계를 어길 것같구나!]
하고 엄숙히 말하자

검북사의 중에서 제일 연장자(年長者)인 기용(奇勇)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사위님을 구하는 일인만금 살계를 범해도 탓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음...... 그럴지도 모르지 ......]
고개를 끄덕이던 이창란은 이윽고 네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이창란의 앞길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옥소선자였다.
[노선배님! 더 들어가시면 위험한니다.]
하고 막아서는 바람에 이창란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 옥소선자. 마침 잘 만났소.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것이 있어 만나려던 참이오.]
하는 말에 옥소선자는 이창란이 궁금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짐작하고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되물었다.
[혹시 궁금하시다는 것이 심소저에 대한 일이 아닌지요?]
하자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군! 바로 심소서요. 림아(琳兒)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도옥이와 함께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구려.]
[곡절을 이야기하자면 좀 길어요.

이곳은 이야기할 곳이 못됩니다.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시지요.]
[여기서는 안 되겠소?

이 숲 속에 양몽환이 갇혀있는 모양인데 속히 구해내야 할 것같소!]
하림의 변절(變節)보다 양몽환을 구해내는 것이 더 급하다는 이창란의 말에 옥소선자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노선배님의 무공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노선배님과 여기 네분 그리고 제가 합세한다 해도

도옥 일당을 굴복시키고 양상공을 구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옳은 말이오. 그러나 이 노부가 살면 얼마나 살겠소.

힘껏 구하다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오.

그보다 양몽환이 어디에 갇혀있는지 아시오?]
[노선배님. 저의 말을 들어보세요.

지금 양상공은 실로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무작정 그를 구하려고 무모한 행동을 한다면 도옥이 양상공에게

어떠한 짓을 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지금은 양상공을 지키는 사람이 두 명 있어서 어느 정도 안심이 돼요.]
하고 낮은 음성으로 하는 말에 이창란은 이마를 좁히며 바싹 다가서는 것이었다.
[이 늙은이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겠구려. 좀 자세히 말해 주시오.]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옮기시죠.]
하고는 앞서 숲 속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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