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흑의여인과 도옥 !
그러던 얼마 후 실로 거짓말처럼 쓰러졌던 동숙정은 눈을 크게 뜨며 벌떡 일어나 앉는 것이 아닌가!
순간, 양몽환은 급히 동숙정을 부축하며 물었다.
[동사매! 정신이 드오?]
그러자 흑의여인과 양몽환을 번갈아 보던 동숙정은 낮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양사제! 이제 알았어요. 저 아가씨는 확실히 양사제를 죽일 수 있었어요. 그러나 죽이지 않았어요.]
하며 흑의여인의 놀라운 무공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실제로 체험한 동숙정의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양몽환은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사실이군요. 그러나 우리도 저 여자의 목숨을 한번 구해준 셈입니다.]
그제야 흑의여인의 실력을 인정하는 양몽환이었다.
이때까지 양몽환과 동숙정의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흑의의 여인은
가만히 몸을 일으키며 양몽환에게 고개를 돌렀다.
[이제는 가도 되겠어요?]
하고 묻는 말에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거렀다.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흑의여인은 절간을 나서려다 말고 돌아서서 차가운 어조로 양몽환을 불렀다.
[당신과의 무술 대결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어요. 다시 싸워 결판을 내야겠어요.]
하는 말에 양몽환도 선뜻 대답했다.
[좋소.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상대하겠소!]
[좋아요. 내일밤 이경(二更)에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하고는 동숙정에게로 날카로운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한가지, 누구도 데리고 오지말고 당신 혼자 오세요.]
[원하는 대로 약속하겠소!]
가볍게 대답하는 양몽환을 돌아보고는 땅을 박차며 절간 밖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절간 밖으로 멀리 사라져가는 흑의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던 동숙정은 홀로 탄식했다.
[사제는 너무 독기(毒氣)가 없어요. 쓸데없이 인정을 베푼다는은 강적(强敵)만 만드는 거에요.]
그러사 양몽환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사매도 보아서 알겠지만 만일 그 여자가 나를 적으로 생각한다면
서로 내공을 겨룰 때 파원신공으로 나를 죽였을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서 사제를 시험하지 않고 나를 시험한 것일 거에요.]
하면서 양몽환의 말을 받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곧이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사제! 등가보로 돌아가죠?]
[불편한 곳은 없읍니까?]
[아니, 괜찮아요.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곧 두 사람은 등가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때, 양몽환은 동숙정이 혹시 불편한 곳이 없는가 살폈지만 별로 눈에 띄지도 않았다.
얼마를 달려 등가보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먼저 동숙정이 입을 열었다.
[양사제! 내일밤 이경에 그 여자와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무슨 계략이라도 있어요?]
[별로 계략은 없읍니다. 시간에 맞추어 나가야겠는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양몽환의 말에 동숙정은 표정을 굳혔다.
[심사매에게는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만일 알린다면 걱정할텐데 ......]
[글쎄...... 그러나 혼자 간다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그 여자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고 ......]
[내공력으로 겨루지 않는 한, 파원신공의 수법을 쓰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승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그떻게 간단히 말할 것이 못돼요.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하면서 동숙정은 길가의 풀밭에 앉는 것이었다. 양몽환도 동숙정 옆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해요......]
먼저 동숙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하였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입니까?]
[왜 사제는 오늘밤 그 여자와 단둘이 싸우겠다는 것인지 그 의도를 모르겠단 말이에요.]
[사매는 그것이 이상한지는 모르지만 저의 말을 들어보면 수긍이 갈 겁니다.]
[수긍?]
[지금까지 그 여자를 본 바에 의하면 분명히 도옥의 꾀임에 넘어가 있는 것이 확실해요.
만일 시시비비를 말해서 그 여자가 도옥의 모든 못된 일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도와 도옥과 싸우게 될꺼란 말이오.
그뿐 아니라 그 여자의 부하가 이십여 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도 무공의 재간이 굉장한 모양인데 이 기회에 설득시키려는 것이죠.]
[그럼 사제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 도옥과 싸우게 하겠다는 것인가요?]
[꼭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노력해 볼 마음입니다.]
[어려운 일이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한 그 여자를 움직여 도옥과 싸우게 할 수는 없어요!]
[노력하면 될거요.]
[그건 안돼요. 가령 이렇게 한다면 모르지만.]
[?......]
양몽환이 미처 말을 하지 못하자
혼자 생글거리며 웃는 동숙정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모기소리만큼 작게 말하는 것이었다.
[미남계(美男計).]
세상에 미인계(美人計)라는 말은 흔히 들었지만 미남계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또 누구를 뜻하는 것임을 안 양몽환은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원...... 사매도...... 무슨 농담을 ......]
겸연쩍게 웃는 양몽환에 비해 동숙정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 아니에요. 사제는 잘 모르고 있어요.]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자기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사제가 비록 재지(才智)가 뛰어나다 해도 여자의 마음은 잘 모를 거에요.]
동숙정의 맑고 큰 눈동자가 양몽환의 준수한 얼굴을 훑어보며 다시 이었다.
[사제는 여자를 보는 눈이 한정되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세상의? 모든 여자를 주약란이나 심하림처럼 보고 있단 말이에요.]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뜻? 모르나요? 지금 그 흑의여인을 봐도 마찬가지죠.
무엇 때문에 자기가 중상을 입으면서까지 파원신공으로 양사제를 공격하지 않았는가를 알아야 해요!]
[점점 알 수 없는 말이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 여자는 그런 것이......]
하는데 양몽환의 말을 동숙정은 중단시켰다.
[가만 있어요. 사제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아 하는 말이지만 그 여자에게 정(情)을 주면 간단해요!]
하고는 앉았던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먼저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등가보의 조교(弔橋)를 건너 각기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서로 아무 말 없이 헤어졌다.
동숙정과 헤어져 거실로 들어온 양몽환은 침대에 누웠어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흑의여인에 대한 동숙정의 야릇한 말도 그러했지만 그보다 등가보 안에 득실대는
구대문파의 무공을 알 수 없는 고수들의 모임 그것이었다.
그중에서 더욱 골치를 썩히는 인물은 바로 대각사(大覺寺)의 고불 영공(枯佛靈空)이었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등가보에까지 나타났는지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사실 가볍게 넘길 고불 영공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거의 오년전, 대각사의 고불 영공을 위시한 사형제(四兄弟)는 당시 천용방의 방주였던
해천일수 이창란(李滄瀾)에게 사로잡혀 천용방의 검북(黔北)땅 총단(總壇)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때 무술계의 구대문파가 연합하여 천용방을 풍지박산으로 만들 때 그 혼란한 틈을 타서
도망쳐 나온 바로 그 작자들이었다.
그후 그들의 소식을 듣지 못한채 오년이탄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떤 계략으로 갑자기 나타났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운 양몽환은 우선 내일밤 흑의여인과의 결투를
깨끗이 일단락 짓고 온 정신을 집중시켜 등가보 안에 머무르고 있는 영공의 동태를 주시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고불영공 등이 등가보에 도착한지도 거의 하루 낮이 되지만 아직 별 사고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동숙정이나 하림에게 영공의 동태를 살피게 하고 흑의여인과의 결투를 치르리라
다짐한 양몽환은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이튿날도 양몽환은 동숙정과 하림만을 불러 영공을 감시하도록 하고는 종일 운기 조식에 몰두했다.
그리고 은연 중에 나타나는 고심대사의 웅후한 진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고심대사가 전수한 내공의 진기는 그렇게 눈에 보이도록 뚜렷한 것은 아니었다.
은연 중에 진기가 솟아나며 체력이 강해지는 것만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밤은 금방 찾아왔다. 땅거미가 지며 주위가 어두워지자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깔리고 달이 떠올랐다.
완전히 운기 조식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양몽환은 등가보 안에 있는 사람 그 누구도 모르게 높은
성벽을 넘어 약속한 장소로 달려갔다.
주위는 고요한 적막감이 감돌고 풀벌레도 울지 않는 절간 앞에? 서서 양몽환은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약속한 이경은 되지 않은듯 은은히 비추는 교교한 달빛에 양몽환은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고 멍청히 서 있었다.
지나온 반생을 생각했다. 참으로 평탄치 못한 반생의 연속이었다.
날마다 강호 무술계의 시시비비에 말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러면서 지나온 반생이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한 바로 이때, 마치 양몽환의 한숨 쉬는 것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낭랑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무슨 번민이 있기에 한숨을 쉬세요?]
순간, 소리나는 곳으로 휙 몸을 돌린 양몽환의 눈에는 요염한 자태의 여인이 발걸음도 가볍게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까지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여자가 바로 이 여자인가 싶도록 옷차림이 크게 달랐다.
궁녀(宮女)형으로 틀어올린 머리와 땅에 끌릴듯이 치렁치렁한 하얀 옷은 달빛에 더욱 청아하고
고고해 보였고 맑고 검은 눈동자는 신비감까지 자아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흑의여인을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이 순간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난
이 여인은 더욱 아름답고 요염했다.
양몽환은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오신지 오래 되었소?]
그러자 여인도 맑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예, 한참 됐어요. 그런데 놀라셨죠? 제 옷차림이.]
[아름답습니다.]
[호...... 호...... 그래도 당신의 부인 심하림만큼은 못되겠죠?]
양몽환은 빙긋이 웃으며 적당히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실로 아름답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여인은 생긋이 웃으며 화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제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잠시 멈칫했던 양몽환은 아직 자기가 여인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있이 새삼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겸연쩍게 웃었다.
[그렇군요. 저는 아직 당신의 이름도 묻지 못했군요.]
[그렇지만 당신은 제가 누군지 이름을 가르쳐드려도 믿지 않으시겠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잠시 생각한 양몽환은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것인지......]
[그럼 믿겠어요? 제 말을?]
양몽환은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여인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제가 처녀인 것 같아요?]
점점 모를 소리만 하는 것이었다.
[그럼 부인이신가요?]
[엄연한 부인이에요.]
[그렇다면 실례했읍니다. 처녀로 알고 있었읍니다.]
하면서 양몽환은 표정을 굳혔다. 그러자 여인은 가만히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시집을 가긴 갔었죠. 그러나 시집간 첫날밤 저의 남편은 급살(急殺)을 맞고 말았읍니다.]
[급살이라구요? 실로 통태할 일입니다.]
하며 애석한 표정을 지었던 양몽환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부군의 성씨(姓氏)는 어떻게 되십니까?]
[별로 강호에 알려진 이름은 아니에요. 차(車)씨라고만 말해드리죠.
그러나 그분의 이름 석자보다 별명을 아는 사람은 더러 있어요.]
[어떤 별명입니까?]
[독용도주(毒龍島主)라는 별명이에요.]
그러나 양몽환의 기억에는 전연 들어본 이름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의 입에서도 독용도주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이름에 양몽환은 저윽이 실망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이 양모인의 견문이 좁은 탓인지 독용도주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읍니다.]
[그럴꺼에요. 그분이 이 중원(中原)땅에서는 무슨? 이름으로 통하였는지 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저를 부르시려면 독용부인(毒龍夫人) 이라고 불러주세요.]
하는 여인의 태도에서는 남편을 일찍 잃어 슬프다거나 괴롭다거나 하는 빛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냉담한 태도였다.
그러한 여인의 태도로 미루어보아 남편과의 애정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기야 결혼한 첫날밤에 죽은 남편에게 애정인들 있으면 얼마나 있으랴 싶었다.
이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있는 양몽환을 바라보던 독용부인은 자기의 말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듯한
양몽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독용부인이라는 말이 흉한가요?]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양몽환은 급히 손을 저었다.
[천만에, 별 말씀을!]
하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시면 부인께서는 바로 독용도(毒龍島)라는 곳에서 오셨읍니까?]
[그래요. 남편이 죽고난 후 많은 재물과 하인들을 제가 관리하게 되었죠.]
묻지도 않은 말까지 말하는 독용부인의 말에 양몽환은 양몽환대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 자식도 없는 사람이 누구를 위해 많은 재물과 하인을 다스릴까? ......>
하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부하까지 데리고 중원(中原)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별것 아니예요. 다만 누가 좀 도와달라고 해서 왔을 뿐이에요.]
[실례의 말같습니다만 그 누구라는 사람이 혹시 도옥이 아닌지요?]
그러자 독용부인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예요. 도옥을 만난 것은 이번 중원 땅에 와서 처음 만났어요.]
[그럼 도옥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
[저도 안다구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왕한상(王寒湘)이에요.]
[왕한상?]
자못 놀란 양몽환은 소리까지 지를뻔 했다.
지금까지 양몽환은 도옥의 꾀임에 빠져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전연 상상밖이었다.
[원래 왕한상과 저의 남편은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던가봐요.
그래서 저의 남편을 초청하려고 왕한상이 독용도에 왔다가 남편의 죽음을 알고
남편대신 저에게 청하게 되었죠.]
[그럼 부인께서는 왕한상의 청을 받아드렸군요.]
[그런 셈이죠. 그러나 왕한상의 청이 아니라도 오려고 했어요.]
[무슨 볼일이 있었던가요?]
[볼일이야 많았죠. 우선 제가 독용도로 시집간 후 중원 땅에는 한번도 올 기회가 없었어요.
한번 다녀가려고 하던 중이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말로만 듣던 양대협과 도옥이 어떤 인물인가도 알아보고 싶었고......]
[또 있읍니까?]
[하나밖에 없는 사매(師妹)도 만나볼겸 해서 오게 되었어요.]
[부인의 사매라는 분이 이 중원 땅에 살고 계시는가요?]
[예전에, 그러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요. 한참 명성을 날리던 사매죠.]
[이름이 무엇인가요?]
하고 양몽환은 다구쳐 물었다.
예전에 이름을 날리던 여자로서 지금 행방이 묘연하다면 능히 알만한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드디어 독용부인의 입에서는 여자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옥소선자(玉簫仙子)에요.]
[바로!]
눈을 크게 떴던 양몽환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
[피리의 명수 옥소선자라구요?]
[당신도 잘 알고 계시죠?]
[천하 무술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물론 도옥이도...... 그런데 도옥이 말하지 않던가요?]
[아니, 내가 말하지 않았어요.]
양몽환은 감개가 무량했다.
대각사에서 설삼과를 구해주던 옥소선자.
한때는 서로 적이 되어 싸우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함께 힘을 모아 적을 무찌르던
옥소선자가 바로 독용부인의 사매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군요. 한때 이 양모인은 옥소선자와 적으로서 싸우기도 했지만 구원을 많이 받았읍니다.]
[그럼, 당신은 저의 사매가 어디 있는지 아시겠군요?]
순간, 양몽환은 깊은 수렁에 빠졌다.
그것은 옥소선자의 거처를 독용부인에게 알려야 하는가,
어떤가를 갑자기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성격으로 보아 옥소선사나 독용부인이 다를바가 없지만 그래도 날카롭기는
옥소선자가 더한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지금 옥소선자는 주약란과 함께 천기석부에서?
무공을 닦고 있다고 하림이 말하지 않았던가......
만일 천기석부에 있다고 말해서 독용부인이 한걸음으로 달려가 혹시 소란이라도 피운다면......
그럴리야 없겠지만 주약란의 성미에 거슬리면 큰 일인데......>
여기까지 생각한 양몽환은 좀처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안다고 할 수도 없고 모른다고 하면 내가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독용부인의 재촉하는 말이 들렸다.
[왜 말씀을 하지 않죠?]
그제야 양몽환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독용부인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알고는 있읍니다만 알려드릴 수가 없군요.]
[아니 무슨 말씀이죠? 비밀인가요?]
[비밀이라면 비밀일 수도 있읍니다만, 주인의 허락없이는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자 독용부인은 눈꼬리를 세웠다.
[주인이라니요? 저의 사매는 저보다 더 개성이 강한데 어떻게 주인이 있을 수 있어요?]
[그것은 독용부인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옥소선자의 주인되는 여자는 참으로 훌륭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독용부인은 이해가 가지않는듯 반신반의의 표정으로 양몽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래요? 믿기지 않는 말이군요......]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독용부인이 자기의 사매인 옥소선자를 생각할 때 도저히 누구의 밑에 매여서 살 여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의 주인이 여자라는 데는 더욱 그러했다.
이때, 양몽환도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공연히 말해서 주약란에게 누(累)를 끼칠까 염려해서였다.
그러자 독용부인이 말을 계속했다.
[제가 중원 땅에 와서 듣기로는 당신과 저의 사매와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하고 화제를 돌리는 그녀의 말은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양몽환은 슬그머니 화가 났다.
[누가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합니까?]
하고 언성을 높이자 독용부인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물어보는 말에 왜 화를 내시죠? 그렇지 않으면 않다고 말하면 될 것을......]
원망하듯 말하는 말에 양몽환은 자기가 너무 성급했음을 뉘우치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부인께서는 아마 도옥이가 한 말을 전적으로 믿고 한 말일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러나 독용부인은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아까도 말했지요. 도옥에게 저의 사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더구나 도옥은 저를 약간 이상하게 대했어요. 그래서 다른 여자의 말을 하면 싫어했어요.]
약간 누그러진 양몽환은 음성을 낮추었다.
[도옥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들었소?]
[이상하네요. 왜 그렇게 캐묻조? 누가 말했다고 말해주면 어쩌시겠어요?]
하고는 양몽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을 만나기는 불과 몇 번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몇 번 만나보므로서 당신의 인격이 얼마나 중후하다는 것은 알고도 남음이 있어요.
그런데 강호에서 염문이 가장 많은 풍류운사(風流韻事)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비로소 느꼈어요.]
숨간, 양몽환의 칼날같은 눈썹이 치켜 올랐다.
그러나 곧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게서는 이 양모인을 너무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절대로 그런 낭설을 믿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별로 염려하지는 마세요.
원래 영웅에게는 미인이 따르게 마련이니까요.
더구나 당신과 같은 영웅에게 미인이 따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시종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독용부인을 불쾌한 낯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인.]
[그러면?]
[남녀간의 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가벼워서는 못씁니다.
서로 정이 없는 한, 더구나 정이 어지러워지면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를 벗어나게 되죠.]
그러나 독용부인은 더 말하지 말라는 듯이 손을 흔들며 다가섰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만 해둬요.]
하던 독용부인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인간적이고 윤리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다만......]
하고 말하는 독용부인의 말을 막으며 양몽환이 입을 열었다.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렇다면 당신괴 저의 사매와의 관계가 이를테면 인간적으로 순수하다는 것이겠죠?
흔히 말하는 남녀간의 정이 아닌......]
[아니 꼭 그렇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나는 인간의 정이라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사매와 이 양모인과의 관계를 말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바는 어떤 것이죠?
당신은 정도 사랑도 없는 사람인가요?]
[너무 앞지르지는 마십시오.
다만 나의 생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남녀간의 정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에서만이 아닌 서로간에 정이 있어야만......]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독용부인이 양몽환의 턱 밑으로 바싹 다가오며 생긋이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독용부인의 표정은 마치 양몽환에게 자신의 요염한 자태를 실제로 느끼게 하고
매혹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러자 양몽환은 주춤 두어걸음 물러서며 여인의 체취를 코끝으로 느꼈다.
사실 싱싱하고도 무르익은 독용부인의 육체와 그 육체에서 풍기는 살냄새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 이 여자가 나를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당돌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그러나 양몽환이 뒤로 물러서면 물러선 만큼 웃음을 띄우고 다가오는 대는 양몽환도
더 어쩔 수 없이 안색을 바꾸고 말았다.
[부인, 더는 다가오지 마십시오.
남이 볼까 두렵습니다.
더구나 부인께서는 정숙을 지키셔야 할 몸이십니다.]
그러나 독용부인은 양몽환의 말 같은 것은 이미 귓등으로 흘려버렸는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접근해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으리만큼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다가오기만 하는 것이었다.
뒤로 물러서기만 하다 우뚝 선 양몽환은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
<...... 음...... 이러면 안되지......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접근해오는 독용부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얼마동안 버티고 서 있던 양몽환은 진기를 돋우고 훌쩍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독용부인은 양몽환의 앞을 급히 막아서며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양몽환을 올려보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시려고 못가요.
당신이 등가보로 가신다면 그곳까지 따라가겠어요.]
실로 생각지도 못했던 말까지 하며 앞을 막아서고 지금이라도 당장 양몽환의 목을 끌어안고
비벼댈 것만 같았다.
다급해진 양몽환은 어디까지나 부인이 냉정한 이성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부인,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 양모인은 부인의 무공을 존경하고 있읍니다.]
엄숙하고도 냉정한 양몽환의 말에 그제서야 자기의 행동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약간 얼굴읕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억제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달래는 것 같았다.
교교한 달빛 아래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말못할 사정을 홀로 가슴 속에서 태우고 있는
여인의 심정을 양몽환인들 목석(木石)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안되는 일이었다. 무겁고 괴로운 심정이지만 끝내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인
부인의 하얀 목덜미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얼마동안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던 독용부인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한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달빛에 번쩍였다.
[용서하세요.]
[............]
양몽환은 이러한 때에 무슨 말을 해야 되는가 생각도 나지않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자 독용부인은 한숨을 쉬며 화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당신은...... 당신은 지금의 처지가 얼마나 위험한 국면에 처해있는지를 아시고 계시는지요?]
밑도끝도 없이 하는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는 양몽환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 독용부인은
그대로 표정도 바꾸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한가지만 알려드리겠어요.
앞으로 삼일 이내에 등가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어색했던 둘 사이의 분위기가 바뀌어지는 것을 기뻐하며 일부러
큰소리로 놀라는 척 했다.
[뭣이? 등가보가 몰살을?]
[그래요.]
[음...... 분명히 도옥의 짓이겠지......]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나요.]
[그럼 부인께서도?]
[예, 저는 사방에서 등가보를 공격하는 한 방위를 맡았을 뿐이지만......
하여간 이번에는 사정이 달라요.
무예계의 고수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대거 공격할 계획이에요.]
양몽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바뀌어지는 것을 계기로 놀라와 한 것이 독용부인의 말을
들어가면서 사실로 변하고 말았다.
등가보를 동, 서, 남,? 북 사방에서 그것도 고수들이 공격해 오리라는
소식은 비록 대협인 양몽환도 허술히 들어넘길 이야기가 아니었다.
<음...... 이 독용부인도 네 곳의 방위중 한 곳을 공격하는 책임자라면
나머지 세 곳의 방위를 공격하는 책임자도 보통 무공이 아니겠는데?
만일 그 사람들도 독용부인만큼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부인 이외에 세 곳의 방위를 지휘하는 사람은 누구 누구입니까?]
[그것은 모르겠어요. 도옥의 지휘아래 고수들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왕한상과 승일청이겠군요?]
[아니예요. 왕한상과 승일청은 사방위의 지휘를 책임진 도옥의 연락만을 맡았을 뿐이에요.
아직 왕한상과 승일청은 그런 중임(重任)을 맡을 지격이 못돼요.]
경악스럽고 놀라운 일이었다.
양몽환이 알고 있는 왕한상과 승일청은 현재 구대문파의 고수들이라고 자처하는 인물 중에서
그들을 대항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아직 중임을 맡길 수 있는 자격이 못된다면 이번에 공격해오는 지휘자는
왕한상과 승일청에 비교할 수도 없는 고수 중의 고수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누굴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도옥은 비범한 놈이군......
독용부인을 매수한 일도 그렇지만 왕한상과 승일청을 능가하는 고수들을 어디서 초빙해 왔을까?......
그리고 과연 그들이 누굴까?...... 실로 위험한 일이 벌어지는군......>
그러면서도 양몽환은 독용부인 앞에서 너무 놀라움을 나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미리 겁부터 집어먹는 형상이 된뿐 아니라 양몽환 자신의 체면 문제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다.
[별로 두려울 것은 못됩니다만 혹시 부인께서는 다른 방위의 지휘자를 지나가는 말이라도
도옥에게 들어보지 못했읍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도옥이 하는 말에 음수(陰수) 노인이라는 이름이 자주 들리던데......
다른 사람의 이름은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음수 노인?]
아무리 머리를 짜봐도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전연 들어본 이름이 아닌데요.]
[저도 역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잘못들어서 음(陰)자가? 위로 붙는지 수자가 위로 붙는지
기억은 못하겠지만 하여튼 그와 비슷한 이름이에요.]
[그들이 언제쯤 공격해 온다고 하던가요?]
하고 묻자 독용부인은 양몽환이 꼬치꼬치 묻는 것이 우스운지 생긋이 웃으며 양몽환을 올려다 보았다.
[당신은 제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하는군요.]
하고 조금 비웃는듯 아니면 양몽환의 속을 꿰뚫어 보듯이 묻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너무 당황하고 있구나......>
하고는 좀더 태연을 가장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인께서 들려주지 않겠다면 더 묻지 않겠읍니다.]
[상관없어요. 한마디를 알려주거나 백마디를 알려주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제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옥이 그냥두지 않을 거에요.]
양몽환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꼭 독용부인을 살살 달래가면서 기밀을 듣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안좋았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기분이 언짢다고 해서 더 듣지 않겠다고 할 일도 못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등가보에는 하림을 위시하여 수 백명의 인명이 기거하고 있는 것이다.
아차하면 독용부인의 말대로 몰살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위기라면 극히 위험천만인 위기를 눈 앞에 놓고 감정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불쾌감을 털어버리고 귀를 기울일 도리밖에 없었다.
[당신의 무공은 제가 직접 겨루어 보아서 알고 있지만
저보다 뛰어난 점도 있는 반면에 못한 점도 있어요.
듣기 싫으시겠지만 들어보세요. 만일, 당신같은 무공을 지닌 사람이
등가보에 몇 명이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당신 혼자서 이 위기를 헤쳐 나가려는 생각이시라면 실로 가공할 일이 일어날 거에요.]
하고 말하는 독용부인의 말을 들으며 양몽환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사실이었다.
양몽환 자신의 무공으로서는 도옥 하나만도 감당하기가 바쁠 것이다.
그런데 도옥 이외에 독용부인같은 무공을 지닌 고수가 세 명이라면 등가보의 어느 고수라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 한, 몰살을 면한다는 것이 어려운 노릇이었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무도한 짓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양몽환의 시야에는 도옥의 일당에 짓밟혀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는 등가보의 살풍경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이때, 다시 독용부인의 말이 계속되었다.
[만일 오늘밤 저와 약속한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면 등가보가 망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러나 당신이 약속대로 나와 주었기에 이러한 말이라도 들려드러는 거에요.
더구나 제가 동정을 한다거나 당신을 도와 힘이 되어 준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럼 부인께서는?]
[아직 저의 말이 끝나지 않았어요.
만일 당신이 오늘밤 이곳에 안 나왔다면...... 그러나 당신이 나와서 사태는 좀 변했어요.]
[감사합니다. 부인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등가보의 수 백명은 앉아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글쎄요. 인명재천(人名在天)이라는 말이 있어요.
혹시 기적이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것은 바라기 어려운 일이에요.
우선 그들이 공격해 온다는 날짜가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 이틀을 이용하여 강호의 고수들을 초청해서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을 거에요.]
하는 독용부인의 말에 양몽환은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지금 독용부인이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양몽환 자기를 너무나도 가볍게 보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 입맛이 썼다.
그러나 쓰디쓴 입맛을 다시고 입술을 축였다.
그러나 기분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난색을 표명했다.
[부인께서 이토록 염려하여 주신데 대하여는 무어라고 고마움을 말해야 할지 모로겠읍니다.
그러나 지금 등가보의 형태로 보아 이틀동안에 강호의 고수들을 초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무나도 기간이 짧고 또 고수들로 초정할만한 인물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십일의 기한이 있다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독용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미를 모으는 것이 무슨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세요.
도옥일당의 공격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 지금 형편으로서 무리한 일이라면 말이에요.
일시적이지만 그들을 피해서 등가보를 몰래 떠나시면 어떨까요?]
별다른 묘안이라도 나올까 하고 기대했던 양몽환은 크게 한숨을 쉬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후에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생각해 보겠읍니다.
무리해서 대적한다는 것은 아까운 인명을 죽이는 결과밖에 안되는 것도 알고 있읍니다.
하여간 등가보로 돌아가서 결정하겠읍니다.]
하고 말하는 양몽환도 사실 별다른 묘안이 없었다.
우선 등가보로 돌아가서 생각해보고 결정을 지으리라 여길 뿐이었다.
그러자 독용부인이 다시 음성을 낮추었다.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저는 등가보의 서 쪽 방위를 지휘할 임무를 받고 있어요.
만일 그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등가보에 남게 되면 서쪽으로? 화를 피하세요.
우선 위기를 모면하고 차후를? 계획하는 것도 중요해요.]
실로 사랑에 넘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절로 감격해마지 않는 양몽환이었다.
<...... 음...... 부인은 나를 구해주려고 애쓰는구나......>
[잘 알겠읍니다. 어쨌든 등가보로 돌아가서? 결정을 하겠지만 부인이 베풀어준 은혜는?
이 양모인이 영원히 기억하겠읍니다.]
[아니예요. 제가 당신을 도와드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 돼요.]
순간, 양몽환과 독용부인은 서로 마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눈과 눈이 마추지고 조용한 침묵이 흘러 갔다.
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모두 눈이 대신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조용한 시간이 잠시 흘러간 후, 이윽고 양몽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양모인은 속히 등가보로 돌아가 의논을 해야겠읍니다.
부인께서는 모쪼록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부인과 이 양모인이 만나는 것을 혹시 도옥이 감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쪼록 조심하십시오. 오늘밤은 이만 실례하겠읍니다.]
하고는 주먹을 쥐고 읍하며 하직을 고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독용부인은 사랑과 정이 담뿍 담긴 어조로 다시 한번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도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제가 서쪽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러나 양몽환은 그녀의 소리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어느 사이에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양몽환의 자태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홀로 서 있던 독용부인은 나직이 한숨을 쉬고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양몽환과 독용부인이 각기 어둠 속으로 사라진 얼마 후,
조용하기만한 절간 안에서부터 홀연 하나의 그림자가 자태를 나타냈다.
머리에는 푸른 두건을? 푹 눌러쓰고 황색으로 경장한 그림자의 주인공은 쓰러져가는
절간 안에서부터 소리없이 나와 주위를 살금살금 나오는가
했는데 어느 사이에 몸을 날려 북쪽으로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림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또 언제부터 숨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한편, 불안과 초조로 가득찬채 걸음을 빨리해서 등가보로 돌아온 양몽환은
그대까지 자지않고 촛불 앞에 앉아 있던 하림의 영접을 받았다.
아마도 그녀는 양몽환이 돌아오지 않자
촛불 앞에 단정히 앉아서 문밖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들어서는 양몽환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그의 품을 파고 들었다.
[기다렸어요.]
그러나 전같으면 품을 파고드는 하림의 허리를 껴안아 주었으련만 오늘만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그러한 양몽환의 표정을 보고 있던 하림은 급히 그의 품에서 몸을 떼며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죠?]
하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양대협 돌아오셨읍니까?]
등개우였다.
[등형이시오? 어서 돌어오시오.]
별로 크지도 않은 양몽환의 음성을 따라 문이 열리며 등개우가 들어섰다.
그는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듯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벙글벙글 웃기까지 했다.
[웬일이시오? 기분이 좋은 모양이군요.]
하는 양몽환은 자기의 불안을 털어버릴 듯이 싱긋 웃었다.
[양대협님이 우리 등가보에 오셨다는 소식이 강호에 전해져 각처의 고수급들이
양대협을 뵙겠다고 오늘 또 왔읍니다.]
그러나 양몽환은 별로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침울한 표정으로 등개우를 불렀다.]
[등형! 은밀히 의논해야 할 일이 있소이다.]
[저같은 사람과 어찌 의논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등개우는 양몽환같은 대협이 자기와 의논을 하자는 것이
무척 영광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오. 중요한 이야기요.]
[중요한 이야기라면 더구다......]
하다가 양몽환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등개우도 정색하고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몽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등형! 수고스럽지만 좀 은밀한 곳이 없겠읍니까?]
[지하실이라도 좋으시다면......]
[그럼 등형은 가친님을 모셔오십니오.]
하고는 곧장 하림에게로 눈을 돌리며 다시 분부했다.
[당신은 동사매를 모셔오시오.]
하림이 먼저 나가고 그 뒤를 따라? 나가려던 등개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양몽환이? 등가보에 온지도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본 일이 없는 등개우였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왔다.
붉은 천으로 씌운 둥근 탁자를? 가운데 하고 둥그렇게 둘러앉은 등고강과? 등개우
그리고 동숙정과 하림은 양몽환의 입만 주시하고 있었다.
과연 양몽환의 굳게 다물어진 입이 열리며 어떠한 중대사가 터져나올지
자못 심각하고도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얼마 후, 이윽고 양몽환은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등보주님 이하 여러분을 수고스럽게 이곳까지 오시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고 일단 말을 중단한 양몽환은 주위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지금 이 등가보는 실로 중차대한 위기에 놓여 있읍니다. 그것은,]
하는데 등고강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이미 이곳까지 등고강을 부를 때는 어느 정도 중요한 이야기리라 생각은 했지만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뭣이? 위기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그것은 제가 조금 전에 독용부인이라는 여자를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독용부인에게서 들은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등고강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놀라운 일이요. 실로 놀라운 일이구려! 어허!]
얼굴빛이 사색이 된 등고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먹을 휘둘렀다.
[고이연 놈들...... 이 등가보를 어쩌구 어쩐다고?]
부르르 떠리는 수염이 꼿꼿이 일어섰다.
그러자 양몽환과 등개우가 급히 일어나 등고강을 의자에 앉혔다.
[등보주님, 너무 분노하지 마십시오.
이왕 벌어진 일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대책을 강구해야 되겠읍니다.]
그제야 조금 흥분을 진정한 등고강은 눈을 딱 감으며 체념한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양대협께서 수고해 주시오. 이 늙은이는 분부대로 따르겠소.]
양몽환도 깊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등보주님. 지금의 형세로서는 막강한 도옥 일당을 당해낼 인물이?
우리 등가보에는 없는 듯 하옵니다.]
하고는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던 양몽환은 음성을 낮추었다.
[섣불리 대적하면 등가보의 인명(人名)이 너무 많이 살상을 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등고강의 이마에 굵은 주름살이 패이는 것이었다.
[양대협 말씀은 지금 등가보의 인원으로서 도옥 일당과 대항할 수 없다는 말씀이시오?]
[결국은 그러한 말도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서 그들과 몇시간 동안이나 대항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그럼 양대협은 어떠한 생각이 있으시오? 설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자는 뜻은 아닐 거고......]
양몽환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비록 궁천건(宮天健)형님이 주고간 향(香)을 피운다 해도 동, 서, 남, 북 사방위(四方位)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감당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보다 모든 사태가 벌어진 것은 이 양모인 때문입니다.]
[뭣이라고? 어째 양대협은 그런 말씀을 하시오?]
[아닙니다. 이 양모인이 등가보에 오지 않았다면 도옥일당이 공격해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양대협님이 우리 등가보에 와 계시기 때문에 도옥이 공격해 온다는 말씀이신가요?]
등개우가 눈을 크게 뜨고 하는 말이었다.
[옳습니다. 이 양모인이 등가보에 와 있기 때문에 등가보의 보주님들과? 일반 백성들까지
미움을 받게 되고 도옥의 잔인성이 이 등가보를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동숙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양사제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보다 도옥은 이 등가보의 백성들을 하루 저녁에 몰살시켜
자신의 명성을 높이려는 계략이 있어서 하는 짓이 분명해요.
그러면 천하 무술계가 온통 뒤집히고? 도옥은 도옥대로 천하의 이목(耳目)이 자기에게 집중되고......
그런 목적이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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