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18. 모여드는 장문인들!

오늘의 쉼터 2014. 10. 24. 13:06

18. 모여드는 장문인들!

 

백의로 단정히 단장하고 나타난 여자는 틀림없는 조소접이었다.
조소접의 출현으로 일시 싸움이 중단된 산봉우리에는 그야말로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양몽환과 흑의인을 번갈아 바라보던 조소접은 싸늘한 시선을 흑의인에게 보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신은 누구죠?]
그러자 흑의인도 내뱉듯이 쏘아붙였다.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누구면 어떻다는 말이오? 당신이 바로 조소접이오?]
[그래요. 당신이 바로 가마 속에서 나의 시녀를 사로잡아간 사람이오?]
[흥! 당신의 시녀인지 아닌지 내가 알 바 아니요.

미안하지만 잠깐 비켜주시오.? 나는 지금 양대협과 약속을
걸고 싸우고 있는 중이오.]
[무슨 약속이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오.]
[어째 상관할 바가 아니란 말이오.

나의? 시녀를 잡아 갔으면 순순히 돌려보내지 못하고? 도리어 큰 소리를 치는군요.]
[흥! 지금 이 싸움에서 내가 지면 돌려보내지.]
[이기면?]
[미안하지만 내가 데리고 일이나 시키지!]
[건방진 소리 말아요. 세 명의 시녀는 내가 맡고 있어요. 나하고 싸워서 결판을 내요.]
[그렇게는 못하겠소. 처음 양대협과 약속한 이상 내가 이제 변경시킬 수는 없소.]
사태가 이와같이 돌변하자 입장이 난처해진 사람은 양몽환이었다.
조소접을 위해서 시녀를 구출하려고 한 일인데 조소접이 직접 흑의인과 겨루겠다는 말에 약간 당황했다.
[조소저! 나에게 맡겨두시오. 꼭 구해드리겠소.]
하고 조소접이 비켜 서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소접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필요없어요. 나의 시녀들은 내가 구하겠어요.]
하는 말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러자 흑의인이 냉소를 터뜨렸다.
[진정 당신이 나와 겨루겠다면 그것도 좋소. 그러나 새로 약속해야겠소.]
[무엇이죠?]
[만일 당신이 진다면?]
[그럴리가 없어요. 당신쯤은 간단히 처리할 수 있어요.]
[대단하군. 좋소. 당신이 큰 소리를 친 것처럼 나에게 진다면 당신도 나의? 시녀가 될 것이오.

만일 내가 진다면 시녀를 돌려 보내겠소!]
하면서 약속은 끝났다는 듯이 거두어 두었던 단검을 품? 속에서 뽑아들고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순간, 조소접은 급히 옆으로 한 걸음 비켜 서며 길게 늘어뜨린 소매를 훌쩍 흔들었다.

그리고는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흑의인의 뒷덜미를 향하여 소매를 흔들었다.

그러자 어떻게 된 일인지 옆을 스치고 달려나가던 흑의인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것과 동시에

빙그르 돌며 그대로 조소접에게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역시 예리한 단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가 눈꼽만큼의 사정도 두지 않고

그대로 조소접의 어깨를 내려찍었다.
그러자 뜻밖의 위기에 봉착한 조소접은 재빨리 몸을 비켜 땅을 박차며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내려오면서 두 발로 흑의인의 어깨를 내려 밟았다.
순간, 조소접의 어깨를 명중시키지 못하고 헛 찔렀던 흑의인은 예측도 하지 못한 조소접의 발길에

간신히 한쪽 어깨만 약간 스치는 정도로서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내공이 강한 조소접의 발길이어서 그런지 상당한 아픔이 오는듯 몸을 움칠하면서

잠시 멈칫했던 흑의인은 뒤로 물러서다 말고 노한 사자처럼 두 발과 두 손을 일시에 휘두르며

달려오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오른 손에 들었던 단검을 왼 손으로 옮겨쥐며 조소접의 오른 손을 긁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전광석화같이 빠르고도 놀라운 수법이었다.

사실 지금까지의 무공으로 미루어 보아 오른 손에 쥐었던 단검을 찰나적인 순간에

왼 손으로 옮겨쥐며 공격한다는 것은 여직껏 보지 못한 재간이었다.
그것은 귀원비급에도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수법이었다.

이와같이 놀라운 수법으로 위기에 직면했던 조소접은 가슴을 내려 쓸었다.
그것은 그럴 것이 흑의인이 돌진해오는 순간,

오른 손의 단검만 주의하면 문제없으리라 여기고 왼편으로 비켜나던 조소접이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왼 손으로 단검이 옮겨지며 오른 팔을 찌를 줄은 몰았던 것이다.
교묘한 수법으로 일시에 위기에 빠졌던 조소접은 발끈 화가 났다.
<어디서 배운 수법인지는 모르지만 오늘 한번 혼을 내야겠군...>
속으로 다짐한 조소접은 입술을 깨물며 암암리에 진기를 운집시켜 넓은 소매 속으로 잔뜩 불어 넣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다.
옆에서 보는 양몽환도 언제 조소접이 저런 대담성과 날카로움이 있었는가 싶게 쌩!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데도 절로 입이 벌어졌다.

사실 귀원비급을 모두 터득하고 있으면서도 나이가 어리고 강호의 경험도 얻지못한 탓으로

귀원비급의 무공을 발휘하지 못했던 조소접이었다.

그러던 조소접이 만 오년이 지난 오늘 놀라울만치 자기가 터득한 무공을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약 흑의인을 향하여 몸을 날린 조소접은 오른 손의 소매를 휘둘러 흑의인의 눈 앞을 어지럽게

하는가 했을 때다.

단단히 벼르고 조소접이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흑의인의 검은 옷이 허공으로 뜬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굉장한 조소접의 이미 굉장한 조소접의 잠력에 의해 흑의인이 풍선처럼

공중으로 뜬 후였다.
너무나도 강력한 소매 바람에 미처 손써볼 틈도 없이 허공으로 떴던 흑의인은 날쌔게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기수를 돌리며 땅을 밟고 내려섰다.

그러한 흑의인의 손에는 틀림없이 있어야 할 단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소접의 차가운 음성이 터졌다.
[이래도 더 싸우겠어요? 졌으면 졌다고 말하세요. 그러면 이 단검을 주겠어요.]
그러면서 조소접은 왼 손 소맷자락에서 흑의인의 단검을 꺼내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조소접의 소맷자락이 번갈아 흑의인을 공중으로 날려보냈던 것이었다.

그때 흑의인도 무공이 대단했기 때문에 더 날아가지 않고 기수를 돌려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단검이 조소접의 소매 속에서 나오는 대는 더 싸울 마음이 없는지

아니면 패했다고 시인했는지 두 손을 툭툭 턴 흑의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졌소!]
[그럼 정체를 밝히시오. 가면을 벗고!]
[그것은 약속하지 않았소!]
그러자 양몽환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양모인과 약속하지 않았소!]
[그렇던가? 그렇지. 그러나 당신에겐 지지 않았소!]
이때, 조소접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에게 지든 마찬가지에요. 가면을 벗어요.]
그제야 흑의인은 가면에 손을 대며 냉랭히 말하는 것이었다.
[좋소. 가면 뿐이오!]
하면서 철가면을 벗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과 조소접은 동시에 소리쳤다.
[앗!]
철가면을 벗으면 틀림없이 정체가 탄로날줄 알았던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철가면을? 벗은 흑의인의 얼굴에는 역시 검은 수건으로 가리워져 있고 두 눈만 반짝 빛나고 있었다.
[가면만 벗으라고 했으니 가면만 벗었소. 자, 이제는 됐소?]
차갑게 말하며 벗었던 가면을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뱉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내가 졌소. 그러나 앞으로 삼개월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납시다. 그때는 꼭 복수하겠소.]
[흥! 무슨 재주로?]
코웃음 친 조소접은 흑의인의 왼손 솜씨를 생각했다.
<...... 귀원비급에도 없는 솜씬데......?

어느 누가 귀원비급을 능가하는 비보(秘寶)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래서 삼개월동안 연마해서 다시 대결하겠다는 것인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삼개월이 짧다면 더 연기해도 좋아요. 얼마든지 괴이한 수법을 배우시오.]
[좋소. 꼭 약속하겠소!]
[그럼 시녀를 돌려보내세요.]
[염려마시오. 돌아가는 즉시 보내드리겠소!]
뱉듯이 한마디 던지고는 산 아래를 향해 몸을 날리고 말았다.

그러자 금방 흑의인의 모습은 어둠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흑의인이 사라지고 난 후,

양몽환과 조소접은 서로 아무 말? 없이 마주 서 있었다.

양몽환은 양몽환대로 사이가 벌어진 조소접이 도옥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하는 생각과

또 도옥과 일전을 벌릴 때 눈에 불이 켜질만큼 속옷 바람으로 도옥에게 안기던

조소접을 생각하고는 조소접과 마주 서 있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한편, 조소접은 조소접대로 호젓한 산 위에서 만난 양몽환 앞에서 도옥에게 안기우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화살에 끼워져 날아온 서찰을 받고 양몽환이 십리길 넘어에 외따로 떨어진 고가(古家)에 갔을 때

조소접은 속옷 차림으로 도옥에게 안기어 있었다.
사실 조소접도 반나체로 도옥에게 안겨 있을 때 목석이 아닌 이상 흥분의 도가 지나쳐

스스로를 잊고 몸을 떨었다.

그때만은 여자의 몸으로서 도옥이라는 남자라는 것에 정신이 희미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조소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양몽환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자기의 연정(戀情)을 받아주지 않자 양몽환 앞에서 어떤 충격을 주어

조소접 자기에게로 양몽환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고의로 연극을 꾸민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양몽환을 사모하던 조소접으로서는 차마 할 짓이 못된다고 느끼자

도옥을 뿌리치고 달려나왔던 것이다.
그것을 양몽환이 오해하고 있다면 오늘 이 기회에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말뚝처럼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우리 둘 뿐이군요.]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는 조소접을 힐끔 바라본 양몽환은 더 있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 말하는

조소접의 심정과 그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휙 몸을 돌리고 말았다.
[실례가 많았소. 안녕히 계시오!]
하고 이별을 고했다.
그 순간, 조소접의 눈썹이 상큼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태연해졌다.

약간? 충격이 있었음을 양몽환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조소접은 말소리를 부드럽게 하며 다른 이야기를 했다.
[지금 그 흑의인을 조심하세요. 무공이 대단한 모양이에요.]
[고맙습니다......]
무뚝뚝한 대답을 남기고 그대로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러자 조소접의 두 눈에는 보일듯 말듯 이슬이 맺히며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한숨 끝에는 애처로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 우리들은 점점 사이가 멀어지는군요 ......]
기어이 쏟아지는 눈물을 손 끝으로 찍어낸 조소접은 힘없이 걸음을 옮겨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실 조소접은 양몽환과 하림의 위급을 자신의 웅후한 내공으로 직감하고 자기의 시녀

열두 명의 화녀(花女) 중에서 네 명을 골라 먼저 양몽환을 돕게 했다.

그리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네 명의 시녀가 돌아오지 않아 다시 네 명을 보내고?

기다리다 못해 직접 산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의 애틋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몽환이 외면하고 섰다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비록 담대하고 도량이 넓은 조소접이었지만?

천성이 여자임을 어쩔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조소접을 뒤로 하고 급히 동굴로 돌가온 양몽환은?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조소접의 시녀들을 돌려보내고 하림과 육보를 재촉해 길을 떠났다.
어딘가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는가 하면 우울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황급히 길을 재촉하는

양몽환을 이상스럽게 지켜보며 걸음을 옮기던 하림은 불안한 마음으로 양몽환을 불렀다.
[왜 그러시죠? 몸이라도 불편하세요?]
걱정스러운 하림의 물음이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오. 어서 갑시다.]
더 말하지 못하게 딱 짤라 말하는 것이 더 불안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분명히 무슨 일이야 있었겠지만 이토록 황망히 길을 재촉하며 불안해 하는 양몽환을

일찌기 본 일이 없는 하림은 궁금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 웬일일까?...... 정체 불명인과 싸워서 패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무슨 언짢은 말이라도 들었을까 ......>
아무리 생각해도 하림의 좁은 소견으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말해 주세요. 당신이 그러시면 지도 언짢아요.]
울먹이는 하림의 말에 그제야 양몽환은 자기가 너무 성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굳혔던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었다.
[조소저가 왔었소.]
[조소저가요? 그곳까지?]
[그렇소!]
[무슨 말을 했어요?]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그런데 왜 안색이 나빠요?]
[아무래도 조소저가 우릴 노리고 있는 것 같소.]
하는 말을 듣고서야 하림은 전에 양몽환이 조소접과 마주 서지 말라던 말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림은 불안했던 마음이 놓였다.
<...... 그래서 그랬구나......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조소저가 우리를 노리다니 ......>
완전히 의심과 불안을 풀어버린 하림은 양몽환의 손을 꼭 쥐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어린 소사미 육보 때문에 가다가 몇 번씩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너무 어린 육보는는 양몽환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가기 싫은듯이 끌려가면서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그렇게 아껴주던 고심대사를 잃고 따라야 할 주인이 바뀐 육보는 슬픔이라는 것보다

어쩐지 양몽환이 어려워만 보였다.

그래서 고심대사 같으면 걷기에 힘들다고 응석이라도 부렸을 것이지만

양몽환에게만은 그렇지 못했다.

그보다 하림에게 정이 갔다.
그러한 육보의 어린 마음을 짐작한 양몽환은 가끔씩 걸음을 멈추고 육보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육보야, 힘들지?]
그러나 육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가 하림을 향하여 어설픈 웃음을 짓곤했다.

그것이 양몽환에게는 더욱 측은했다.
다시 걸음을 옮겨 근 십여리 길을 갔을 때였다. 어디선가 은은히 피리소리가 들렸다.

단장의 피리소리였다.
흐느끼는듯 하소연하는듯 그러다가 금방 노한듯 천변만화(千變萬化)로 변하는 피리소리는

간간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실려 고즈너기 들려왔다.
그러자 양몽환온 하림의 손과 육보의 손을 양손에 잡고 더욱 걸음을 빨리하는 것이었다.

아니 걸음을 빨리하는 것이 아니라 뛰다시피 했다.
아무 말 없이 양몽환이 뛰며 끄는 바람에 오리 길을 뛰어 달린 하림과 육보는

양몽환이 뛰던 걸음을 멈출 때에야 가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리고 양몽환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이 하림과 육보의 이마에서도 비지땀이 흘렀다.
무슨 영문인지 피리소리에 놀라 헐레벌떡 달리는 양몽환을 따라 오리 길을 달려온 하림은

가쁜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찌푸렸다.
<참 이상한 일만 일어나는군...... 그까짓 피리소리에 놀라 오리 길을 뛰다니 ......>
하는데 양몽환이 하림의 속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입을 여는 것이었다.
[지금 들린 피리소리를 누가 부는지 알겠소?]
그렇지 않아도 마악 피리소리를 생각하고 있던 하림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바로 조소저요!]
[예? 조소저가요?]
[그렇소. 피리소리로 우리들의 마음을 혼란케 한다음 해치려는 것이오.]
[설마......]
하림은 믿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양몽환의 태도가 너무나도 강경해서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이젠 산 모퉁이를 꺾어돌면 바로 등가보가 보일 것이다.

걸음을 더욱 재촉하여 막 산 모퉁이를 꺾어 접어드는 바로 그때였다.
바로 이장(二丈) 앞에서 장검을 등에 멘 두 명의 거한이 양몽환 일행을 향하여

질풍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한편,
괴이한 서찰이 화살에 끼인채 날아온 그 이튿날 아침의 등가보는 발칵 뒤집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양몽환 대협이 밤새 행방을 감춘것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등개우 바로 등소보주였다.
그렇지 않아도 괴이한 서찰을 받고 태연한 척 자기 거처로 돌아간 양대협이 안심치 않아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양몽환을 찾았으나 등가보 어느 구석에서도 그의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도저히 그대로 묵과하고 양대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먼저 유원에게 알리고 유원이 하림과 동숙정에게 알려 등가보를 샅샅이 찾았다.

그리고 등개우는 가친 등고강이 상심되지 않도록 안심시키고 망루에서 파수보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많은 부하들 중에서도 그 어느 누구 하나 양대협이 등가보의 대문이나

성벽을 넘어 나가는 것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양대협이 갔을만한 곳을 두루 수소문해? 보았으나 짐작도 가지 않았고 더구나?

등가보에 기거한 것도 하루 한나절 밖에 되지않은 양대협이 갔을만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설마 양몽환같은 대협이 어느 누구의 꾀임이나 모함에 빠져 궁천건처럼 자취를 감출 일도 만무한 일,

오늘 해질 때까지만 기다려보기로 한 것이 하룻밤이 지나고 말았다.

이제나 저제나 양몽환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등개우는 하는 수 없이

각자 십리 안팎을 두루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별무 소식이었다.
누구없이 초조했다.

그중에서도 더욱 초조히 기다리는 사람은 하림이었다.
각기 헛걸음을 치고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실망한 하림은 홀로 양몽환을 찾아 떠나게 되었고

그때 마침 승일청에게서 도망쳐나오던 양몽환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림이 양몽환을 찾아 떠나버린 등가보는 빈 집 같았다.

그러나 묘하게도 등고강이 보낸? 여덟 명의 밀사중
불행을 면한 두 명의 밀사가 각기 맡은 바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이때, 등고강의 초청장을 받은 두 명의 각 장문인은 손수 등고강이 서명한 초정장을 읽고 또 읽었다.
<<금번 폐보(弊堡)에 양몽환 대협이 왕림하였소이다.

이 기회에 우리 구대문파(九大門派)는? 양대협님을 모시고 장차 무술계의 대소사(大小事)를 의논코자

하오니 부디 참석하심을 앙망하나이다.>>
간단한 사연을 몇 번 고쳐 읽은 장문인들은 다른 파에 연락을 취해 등가보로 몰려들고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확대되자 당황하는 사람은 등고강이었다.
서찰에는 양몽환 대협을 모시고 운운......했는데 막상 각 파의 장문인들이 모여들자

주인공인 양몽환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침식을 잃고 안절부절하던 등고강은 큰 소리로 아들 등개우를 불렀다.
[어찌 앉아서 양대협이 오기만을 기다린단 말인가? 지금 당장 찾아 모셔오너라!]
추상같은 호령에 입을 봉하고 조용히 물러나온 등개우는 곧장 유원에게로 달려갔다.
그러자 유원도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힘있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대협님이 아니오이까? 신변에 위험이야 어찌 생각하겠소?]
[옳은 말씀이오. 저 역시 무사히 돌아오리라 생각은 하지만 구대문파의 장문인이 다 모여든

지금 어찌하면 좋겠소?]
얼마 동안 머리를 맞대고 있던 유원은 손뼉을 탁 쳤다.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찾아나섭시다.]
[어디로?]
[우선 북방(北方)을 향하고.]
[그 다음 남방(南方)으로.]
[좋소! 자 일어나시오!]
이래서 등개우와 유원은 호기있게 등가보의 조교(弔橋)를 건너 북방(北方)을 향하여

질풍같이 달려나갔다.
그것이 바로 양몽환이 하림과 육보의 손목을 잡고 산 모퉁이를 돌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앞에서 먼지를 날리며 질풍같이 달려오는 두 명의 거한을 예리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양몽환은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싱긋이 웃음을 띄우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림이 급히 물었다.
[누구죠?]
[등형과 유형같소!]
[그래요?]
양몽환의 예측대로 달려온 사람은 등개우와 유원이었다.
등개우와 유원도 역시 멀리서 걸어오는 양몽환 일행을 발견하고 일시 주춤했다.

그들이 바로 자기들이 찾고 있는 양몽환이라는 것을 알고는 손을 저으며 달려오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주먹을 쥐고 읍하는 것이었다.
그리자 양몽환도 주먹을 쥐고 답례하며 그들을 맞았다.
[대협님!]
[아, 등형, 유형, 두 분 형님 별고 없으시오?]
[예, 덕분에......]
가까이 다가온 등개우는 양몽환의 손을 잡고 울듯이 기뻐하며 그간에 일어난 일을 간략히 들려주었다.

그리고 표정을 바꾸며 환하게 웃었다.
[잘 되었읍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친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고 계시는지......]
[왜.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무슨 일이 다 뭡니까. 지금 등가보에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다 모여서 양대협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그래요? 무슨 일로?]
[가친께서 초청하셨읍니다. 양대협님을 모시고 장차 무술계의 대사를 의논하자는 것입니다.]
[알았소!]
간단하고도 힘있게 대답한 양몽환은 그때까지 잡고 있던 하림과 육보의 손목을 놓고

먼저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 뒤를 하림과 육보가 나란히 걷고 등개우와 유원이 뒤를 따랐다.
양몽환을 보고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등고강이었다.
[양대협! 어떻게 된 일이오? 별고 없으셨소?]
연이어 묻는 등고강의 물음에 주먹을 쥐고 읍을 한 양몽환은 등고강이 안내하는 대청으로 들어갔다.
대청 안은 문자 그대로 초만원이었다.

구대문파에서 한사람씩 장문인이 참석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십여 명의 부하나 제자를 데리고 참석한 모양이었다.

장문인만 모였다면 기껏해야 아홉 명 안팎일 인원이 무려 사 오십 명을 헤아릴 수 있었다.
대청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 중에는 일어나서 주먹을 쥐고 읍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앉은채 손을
흔들거나 목례를 해서 양몽환을 영접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청 안은 언제 준비했는지 푹신한 의자가 백여개 놓여 있었고

그 의자마다 무술계에 무공을 자랑하는 군웅 호걸들이 늠름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대청 중앙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등고강이 안내하는대로 미리 마련된 좌석에 앉으려던 양몽환은?

일동에게 주먹을 쥐어 읍을 하고는 천천히 앉았다.

그러는 바로 그때,

한쪽 구석에서 염불을 외우는 소리가 나는가 했는데 이어서 우렁찬 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
[아미타불...... 양몽환! 그대는 이 늙은이를 기억하고 있겠지?]
순간,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던 양몽환은 이마를 찌푸렸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었다.

나이는 근 칠십세, 황색의 도포로 발끝까지 내려 쓴 도사 차림의 늙은이를 바라보고 있는

양몽환의 뇌리에는 오년 전 대각사(大覺寺)의 악몽이 스물스물 지나갔다.

틀림없는 대각사의 고불(枯佛) 영공(靈空)이었다.
[고불 영공 대선사님이 아니시오?]
[음. 알아 보는군! 바로 내가 영공이오.]
그렇지 않아도 대청 안에 모인 궁웅들 중에서 감히 양몽환의 이름 석자를

큰 소리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전에 만나 본 사람 그도 원수로서 만나 본 사람

이외에는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고불 영공! 대각사의 설삼과(雪參菓)와 스승 일양자(一陽子) 그리고 까마귀 같이

지독히 악질이었던 고불 영공을 어찌 잊을수 있단 말인가!>
붉은 가사(袈裟)를 걸친 삐쩍 마른 화상(和尙)은 틀림없는 고불 영공 바로 그 화상이었다.
한편, 양몽환 옆에 앉아 있던 심하림은 고불 영공을 보는 순간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러나 이 몇 년 간 나이도 많이 들었지만 허다한 경험과 무술계의 쓰디쓴 맛을 겪은 후라

곧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림, 역시 고불 영공이라면 치가 떨릴만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냉정을 되찾고 고불 영공을 노려보는 것으로 분노를 억제할 수 있었다.
이때, 고불 영공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양대협이 이 노승의 법호를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실로 뜻밖의 일이오.]
[과분하신 말씀이오. 어찌 잊겠읍니까. 기억하고 있었소이다.]
하고 양몽환이 겸손과 또 마음에 맺힌 일을 뒤집어 표현하자,

영공은 두 손을 합장하며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선재(善哉)로다 선재로다!]

옛날의 영공을 뇌리에 되새겨 보는 양몽환은 혼자 중얼거리는 영공의 태도가 어색하고

거짓 투성이인 것만 같아 저절로 상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곧 태연히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던 등고강이 양몽환을 좌석에 앉도록 권하고 하인들에게 명하여

준비한 음식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러자 언제 그토록 많은 음식을 준비하여 두었던지 실로 산해진미의 진수성찬과

향기로운 술이 줄을 이어 날라져 왔다.

이리하여 대청에는 곧 주연(酒宴)이 베풀어졌다.
모든 군웅 호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펴가며 맛있는 음식을 골라먹고 술을 마시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얼마 후 그중에서도 약싹빠른 한 사람이 양몽환에게 술잔을 권하자

나도 나도 하면서 술을 권해왔다.

뿐만 아니라 술잔을 권하면서 꼭 한마디의 말은 잊지 않았다.

그것은 대략 이러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말로만 듣던 양몽환 대협을 이러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기뻤다는 것과

그러한 뜻에서 드리는 한 잔의 술을 사양하지 말라는......>>


그러한 뜻이었다.
양몽환은 일일이 권하는 잔을 받아 마시고 반례(返禮)로 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도

그의 예리한 눈초리로 장내의 고수급 인사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훑어보는 양몽환의 눈초리에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세 명의 사나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양몽환이 대청에 들어설 때부터 무슨 일을? 모의하고 있었는지 태도도 수상하였지만

다른 고수들처럼 양몽환에게 술잔을 권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인사도 없는 사나이들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내심으로만 수상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런대로 주연을 끝내고 하림을 재촉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조용히 하림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고불 영공을 봤소?]
[예, 봤어요. 그 화상은 아주 질이 나쁜 화상이에요.]
[맞소. 그러나 그 화상의 무공이 그 전에도 놀라왔지만 지금은 더 놀라울 것이오.]
그리고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그전보다 그 자의 무공이 진전이 없다면 당신 혼자서라도 능히 당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오.]
[무공이 진전했다 하더라도 오늘 그자가 무슨 경악한 일을 벌린다면 이 기회에 처치해 버리고

말겠어요.]
하고 야무지게 말하는 하림의 표정은 무엇인가 자신이 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신중을 기하라고 말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서두를 것은 없소. 오늘 동사매에게도 조심하라고 전해주시오.]
[알겠어요.]
[그럼 당신은 동사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쉬시오. 나도 좀 쉬어야겠소.]
하고는 하림을 보낸 양몽환은 곧장 자기의 거처로 돌아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나무 침대 위에 올라가 앉았다.
<...... 고불 영공이 어찌하여 갑자기 이 등가보에 나타났을까?......

설마 그 작자까지 도옥에게 매수당한 것은 아닌지? ......>
대청 안에 모인 군웅호걸들이 비록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무공이 강하여

무슨 불행한 일을 저지른다 해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양몽환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고불 영공도 영공이지만 양몽환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수상한 세 명의 젊은이었다.
그들이 양몽환에게 술잔을 권하지도 않고 인사도 없을 때 먼저 양몽환이 다가가

그들의 의도를 타진해보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숭숭한 일들을 잊어버리고 잠시 쉬고 싶었다.

곧 마음을 안정시키고 침대 위에 정좌하여 운기 조식을 취하였다.

그러한 양몽환은 잠시 후 모든 상념을 잊어버린 몰아의 경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양몽환이 운기 조식하고 있는 나무 침대 아래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이 튀어나오며

손에 쥔 날카로운 비수로 양몽환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재빨리 몸을 뒤로 젖혀 괴한의 날카로운 비수를 피한 양몽환은 발을 들어 괴한이 들고 있는

비수를 걷어찼다.
괴한은 단 한번의 일격으로 양몽환의 가슴을 명중시켜 처치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자

양몽환과 적수가 되지 못함을 시인했는지 곧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양몽환은 순간적으로 진기를 돋우어 방문 앞에 이르렀다.
방문을 열고 뛰어나가려던 괴한은 느닷없이 달려와 방문을 막아서는 양몽환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휘둘러 일시에 세 번이나 공격을 가해왔다.

그리고는 양몽환의 대혈만 노리는 것이었다.
이때, 양몽환은 재빨리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속으로는 혀를 찼다.

<음...... 재빠르고 날카로운 솜씬데......>
하면서 괴한의 비수를 피해 방바닥을 걷어차며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멈칫 양몽환이 물러서는 틈을 노린 괴한은 급히 방문을 열고 뛰쳐 나가려고 했다.
즉시 양몽환은 몸을 돌려 가볍게 장풍을 일으키고 진기를 모았다가 문을 향해

강력한 장풍을 몰아 붙였다.
순간, 문밖으로 나가려던 괴한은 강력한 장풍으로 문이 밀폐됨과 동시 튀어나오는

장풍의 반동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몇 걸음 비틀비틀 뒤로 밀려나가다 벽에 몸을 부딪치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양몽환은 급히 괴한의 옆으로 바싹 붙어서며 꾸짖었다.
[평소 모르는 사인데 어째 나에게 비수를 겨누는 것이오. 바로 말하시오. 누가 시켰소!]
바싹 다가가 호령치듯 하는 양몽환의 말에 더 이상 도망가거나 대항할 수 없음을 알아챈

괴한은 최후의 공격으로 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이왕 죽는 바에야! 하는 결심인듯 비수를 마구 휘두르는 것이 죽기를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사태가 위험천만임을 간파한 양몽환은 눈썹을 곤두 세우며 큰 소리로 고함쳤다.
[이렇듯 악랄한 수법으로써 상대한다면 이 양모인의 실례함을 원망하지 마시오!]
하고는 약간 힘을 주어 장풍을 몰아붙였다.

그러자 괴한은 뒤로 넘어지며 양몽환의 장풍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양몽환은 애초부텨 괴한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내막을 알아보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전력으로 강한 장풍을 내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몽환의 장풍이 별로 강하지 못한 것에 새로운 힘이 솟아났는지 이번에는

엉거주춤 일어서며 그대로 몸을 날려 몸 전체로 양몽환에게 부딪쳐오는 것이 아닌가?
비수를 똑바로 하고 양몽환의 가슴을 겨누고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눈썹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선채 비수를 피하는 것 같이 하면서

재빨리 괴한의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고 약간 힘을 주었다.
[이래도 더 달려붙겠소?]
그러자 괴한은 잡힌 손목이 저려오는지 입술을 깨물면서 쥐고 있던 비수를 떨어뜨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때, 양몽환은 약간 음성을 낮추었다.
[도대체 당신은 나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토록 숨어서까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

어디 말이나 들어봅시다.]
그제야 괴한은 더 이상 대항하기를 단념했는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꼭 다물고 마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손목이 잡힌 괴한이 검은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그 싸맨 수건이 눈썹 위까지

내려 접혀있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원래 자객(刺客)은?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금 이 괴한은 얼굴보다 머리를 감춘 것이 양몽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순간, 양몽환은 왼손을 들어 괴한의 검은 수건을 와락 벗겨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괴한의 입에서는 거의 신음과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마!]
하는 소리와 함께 수건에 싸매졌던 기다란 머리칼이 가닥가닥 풀어져 얼굴을 덮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양몽환도 절로 입이 벌어졌다.
[엇...... 여자!]
양몽환의 손아귀에 손목이 잡힌 괴한은 틀림없는 여자였다.
파 원 신 공 의?? 괴 력
천만 뜻밖에도 자객이 여자라는 데에 순간 아연했다.

쥐고 있던 자객의 손목을 급히? 놓으며 양몽환은 정중히 사과했다.
[실례했읍니다. 여자인줄 알았다면 무례한 행동을 안했을 것입니다.]
하고는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예의바른 양몽환의 행동에 멈칫했던 여인은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상공(相公)은 실로 군자(君子)이십니다.]
한숨을 쉬며 나직이 말하고 여인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양몽환은 담담히 웃었다.
[여자의 몸으로서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 양모인을 죽이려고 하였소. 자세히 사연을 들려주시오.]
그러자 여인은 한동안 눈을 내려감고 생각에 잠긴듯 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상공을 해치려던 사람을 잡았으면 마땅히 죽음을 주지않고 어찌하여 사연을 듣고자 하옵니까?]
[어찌 함부로 살계를 범하겠소! 무슨 곡절이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을 뿐이오.]
여인은 어깨에 걸쳐진 수건을 천천히 벗으며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여인은 눈을 내려감고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양상공께서는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으로서는 전혀 기억에 떠오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예전에 혹 본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없읍니다.]
[그러시겠죠. 저같이 하찮은 게집을 양상공님이 어찌 기억이나 하시겠어요.]
하는 것은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와 양몽환이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하는듯

그 표정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약간 불쾌한 생각이 안드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보고도 못보았다고 하는 것으로

 여인이 생각할까 해서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래도 전혀 떠오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미안하오만 전혀 기억이 없읍니다.

언제 만나본 일이 있는지 아가씨께서 말해주었으면 좋겠소.]
그러자 여인의 대답은 의외로 차가왔다.
[양상공은 의리도 정의(情誼)도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하는 것이 어디선가 긴요한 장소에서 만난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인과의 상면이 보통 오가며 지나친 그런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양몽환은 더욱 궁금증이 더했다.
양몽환은 여인의 생김새를 이모저모 한참 뜯어보더니 무릎을 탁! 치는 것이었다.
[옳다! 은병(銀甁)! 은병이 아니오?]
그제야 여인은 슬픈 얼굴로 변하면서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시녀(侍女)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렇지. 벌써 십여년 전 일이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
하고 혼자 말하는 양몽환은 감개가 무량했다.

옛날 수월산장(水月山莊)에서 지낼때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맹세했던

옥견의 시녀였음을 양몽환은 더듬어 낼 수 있었다.
[벌써 십년전 이야기군요 ......]
여인도 감개가 무량한듯 눈을 내려감았다.
[그런데 어째 이곳 등가보에 있소?]
[옥견 아씨가 돌아가시고 난 후 마침 저의 오빠가 왔기에 마님께 오빠를 따라가겠다고 했어요.]
[음......]
[...... 마님은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며 은량(銀兩)까지 주셨어요.

그러나 오빠는 마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량으로 매일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저는 오빠와 헤어져 여기 등가보의 시녀로 들어왔읍니다.]
[음...... 그럼, 아가씨의 무공도 이곳 등가보에서 익힌 무공이오?]
[예, 대보주님께서 저의 골격이 청기(淸奇)하다 하시면서?

등소보주님께 명하시어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게 했읍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죽이려고 했소?]
그러자 여인은 더욱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었다.

그러다 이윽고 고개를 드는? 여인의 표정은 너무나 애처로왔다.
[소비(小婢)가 잠시 오해하여 끔찍한 생각을 하고 침대밑에 숨어 있었읍니다.]
[오해? 나하고? 무슨 오해인지 말이나 해보시오.]
여인은 잠시 주저하는듯 말을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이 재촉했다.
[무슨 오해가 있었기에 나를 죽이려고까지 했는지 말해보시오.]
할 수 없다는 듯이 여인은 입술에 침을 묻혔다.
[실은 양상공께서 심하림이라는 여자만 사랑하고 이미 돌아가신 옥견 아씨는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아서 그만......]
말을 마치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이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도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내가 왜 옥견 아씨를 잊었겠소? 내 마음은 더욱 아프오...... 그만 물러가시오!]
점잖게 여인을 돌려보낸 양몽환은 오랜만에 옥견을 생각하고 지난 시절?

옥견과 지내던 일을 더듬을 수 있었다.
먼 친척으로 누님뻘이 되는 옥견은 가정 사정으로 양몽환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부터 둘 사이는 사랑이 움트고 장래를 굳게 약속했었다.
그러나 옥견이 중병(重病)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 양몽환은? 옥견에 대한 사랑으로 일시

사경(死境)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나타난 소녀가 바로 심하림 그녀였다.

그러나 양몽환의 마음 속에는 항상 옥견의 사랑스럽던 모습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잊는? 수는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옥견을 생각하고

괴로와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하림과 이요홍이 옆에 있고 더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차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벌써 십년전 일이다.
그러나 오늘 우연히 옥견의 시녀가 나타나 양몽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사실 양몽환으로 하여금

잊어버렸던 옥견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여인을 돌려보낸 양몽환은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머리를 짚고 번민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방문 앞에서 누군가가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킨 양몽환은 귀를 기울이고 다음의 인기척을 기다렸다.

그러자 다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매우 눈치가 없는 사람이군!]
양몽환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앞뒤 가릴것 없이 대뜸 방문을 열어제치며 교연창렴(巧燕滄簾)의

일식을 발휘하여 뛰어나갔다.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나의 시커먼 그림자가 질풍같이 지붕을 타고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양몽환은 곧 진기를 돋움과 동시에 땅을 박차며 지붕을 타고 넘어가는 괴한의 뒤를 쏜살같이 쫓았다.
그러나 시커먼 그림자의 경신법은 얼마나 놀라운 재간인지 그야말로 회오리 바람같이 빨랐다.

양몽환 역시 온몸의 진기를 운집하며 뒤를 쫓았다.
그러자 앞서가는 괴한과 뒤를 쫓는 양몽환의 두 그림자는 두개의 유성이 흐르는듯 했다.
순식간에 등가보의 높은 성벽을 벗어난 두 개의 그림자는 황막한 들판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질풍같이 앞서 달려가던 괴한이 갑자기 몸을 세우는가 싶더니 이미 공중에서 한번 몸을 뒤집어
땅에 내려서며 노한 소리로 크게 외치는 것이었다.
[양몽환! 이떻게 쫓아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순간, 재빨리 외치는 음성이 어디서 들은 것 같이 귀에 익었으나 갑자기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즉각 큰 소리로 호령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그러면서 앞으로 다가가던 양몽환은 멈칫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것도 그럴것이 지금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은 가마 속에서 정체를 밝히지 않고

산정(山頂)에서까지 도전했던 흑의의 불명인 바로 그자였기 때문이었다.
양몽환은 너무나도 의외의 인물에 맥이 빠지는듯 눈을 둥그렇게 뜨며 소리치고 말았다.
[바로 당신이었군!]
그러자 흑의인은 차갑게 받아 넘겼다.
[흥! 내가 두려운 모양이군.]
[천만에!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소. 이상할 뿐이오.]
흑의인은 어제 산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철가면을 썼고 다만 두 눈만 날카로운 안광을 번득이는 것이었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별것은 아니오. 어제의 대결이나 지금의 경신법 재간으로 볼때 당신의 무공은 실로 경탄해 마지않는

바인데 무엇때문에 도옥의 부하가 되었는지 그것이 이상하단 말이오.]
그러자 흑의인은 디욱 안광을 번득이며 언성을 높였다.
[뭐라구 언제 내가 도옥의 부하라고 했소?]
[당신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만일 도옥의 부하가 아니라면 무슨일로 아무 원한도 없는 이 양모를

적대시하는 거요?]
양몽환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힌듯 입을 봉하고 있던 흑의인은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어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흑의인의 음성이 터져나왔다.
[핫...... 하...... 당신과 도옥은 이 강호에서 서로 세력다툼을 하는 모양이군.

만일 내가 어떤 웅심이 있다면 반드시 당신과 도옥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없애야 할 것이오!]
[그러면?]
[당신을 도와 도옥을 없애든지 아니면 도옥을 도와 당신을 없애든지

둘 중에 하나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일이오.]
하는 흑의인의 말에 양몽환도 껄껄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것은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이 양모와 도옥을 없애버린다 해도 당신이 알다시피 조소접이라는 여자가 또 있소.

그러니 모든 일은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오. 그렇다는 말을 했을 뿐이오.

그따위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소!]
[그럼 다른 뜻이 있소?]
[무술계를 제압한다는 일은 대사(大事)중에 대사라 할 수 있소.

그런 대사를 성취하려면 무공이나 기지가 초인간적(超人間的)이 아니면 안되오......

그러나 그따위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하고 말을 마친 흑의인은 손을 들어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철가면을 벗는 것이었다.
[당신은 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소.]
순간, 양몽환의 눈에 보이는 흑의인의 얼굴은 시뻘건 핏덩이 같았다.

멈칫 놀라며 양몽환은 급히 입을 열었다.
[그 얼굴이 실로 당신의 진짜 얼굴이오?]
그러자 흑의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간단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천만에!]
그리고는 오른 손을 들어 그 시뻘건 핏덩이 같은 탈을 벗겨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나의 진짜 얼굴이오. 잘 보시오.]
순간, 양몽환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철가면과 시뻘건 복면 속에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이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초생달같은 눈썹 아래 맑은 눈동자는 호수같이 잔잔했고 발갛게 상기된 두 뺨은

 마치 저녁 노을같지 않은가!

백설같이 흰 목, 그리고 꼭 다문 입술! 눈이 휘둥그래진 양몽환은 한걸음 다가서며

자기도 모르게 가늘게 소리쳤다.
[당신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흑의인은 마저 맺지 못한 양몽환의 말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바로 여자예요.]
양몽환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제자리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만일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여자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오.]
하며 감탄하자 흑의인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난데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부인인 심하림과 저와 비교해서 누가 더 예뻐요?]
너무나 뜻밖의 말에 양몽환은 흑의의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과연 아름답고 어여쁜 얼굴이었다.

양몽환은 빙긋이 웃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나.]
[정말이에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남장하고 있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소? 혹시 도옥이라도?]
하고 묻는 양몽환의 말에 흑의 여인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제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거에요.]
[그러시다면 이 양모인이 영광스럽게도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게 된

사람중의 첫째인 셈입니다.]
[그래요. 당신이 처음으로 저의 노산진면목(盧山眞面目)을 본 셈이에요.]
[영광입니다. 그런데 욕심 같아서는 당신의 어여쁜 자태마저 보았으면 합니다]
하고 양몽환은 여인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그러자 여인은 좀전보다 더 생글생글 웃으며 몸을 꼬는 것이었다.
[비록 도옥의 얼굴이 준수하다 해도 당신만큼은 못해요.]
[천만에 말씀, 이 양모인은 그토록 준수하지는 못합니다.]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원래 남자라면 남자다운 기개가 있어야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에요.

사실 어젯저녁에도 당신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럴리가 있읍니까? 믿기지 않은 말인데요.]
하고 조금 불쾌한 빛을 보였다. 그러나 흑의여인은 여전히? 웃음을 띄우는 것이었다.

흡사 자기의 아름다운 교태로서 양몽환의 마음을 사로잡기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믿고 안믿고는 당신 마음대로예요. 저는 당신을 해칠 마음은 없어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정말 저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시험해도 좋아요.]
그러자 양몽환은 흑의여인이 양몽환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재간이 많지만

일부러 죽이지 않겠다는 말에 울화가 치밀었다.

기분이 나빴다.
[좋습니다! 이 양모인은 누구의 덕으로 살아오지는 않았읍니다.

지금이라도 곧 한 수 겨루어 보실까요?]
하고 선뜻 나서자 흑의여인도 지지않고 곧 대답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그러나 그냥 싸운다는 것은 싫어요.

우리 서로 한가지씩 조건을 내세우고 싸우도록 해요.]
[조건? 조건이 무슨 소용이 있소?

이기는 자는 살고 지는 자는 죽는 마당에 더 무슨 조건이 필요하단 말이오?]
[이상하시군요. 저는 그래도 당신을 군자로 알고 있었는데 아주 살벌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양몽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흑의여인이 이토록 예의를 찾고 나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즉시 자신이 한 말이 좀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시다면 무엇을 조건으로 걸면 좋겠읍니까?]
그러자 흑의여인은 태도가 부드러워지며 생긋 웃었다.
[이렇게 해요. 당신은 이미 저의 무공을 직접 대적해 보아서 잘 알거에요.

그리고 저에게는 부하가 이십명쯤 있어요.

그들의 무술만 해도 어느 누구에게 지지 않을만끔 손색없는 무술을 지니고 있어요.

만일 당신과 싸워서 제가 패한다면 저는 물론 저의 부하까지도 당신의 명령을 따르고

충성을 다하는 부하가 되겠어요. 어떠세요?]


하고 턱을 치켜드는 흑의여인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양몽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너무 무거운 조건이오. 그러한 것을 조건으로 받아들일 마음은 없소.]
[그러시다면 어떠한 것으로 조건을 걸까요?]
[꼭 조건을 걸고 싶다면 서로 몸 하나만을 마음대로 합시다.

만일 이? 양모인이 패한다면 당신 마음대로 이 양모인을 처리하시오. 어떠시오?]
하고 침울하게 말하자 흑의여인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충분! 충분해요. 제가 바라는 것도, 바로 당신 한사람이에요.]
[뭣이!]
놀라며 양몽환이 펄쩍 뛰었다.

그러나 여인은 이미 결정되었다는 듯이 뒷걸음질치며 싸울 태세를 취하였다.
[당신은 명성이 자자한 대협이에요. 그러니만큼 제가 먼저 공격하겠어요.]
하고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는듯이 일장을 후려쳐 보내는 것이었다.
순간, 밀려오는 여인의 장풍부터 막아낸 양몽환은 할 수 없이 싸울 이 태세를 갖추고는

잠력을 일으켜 일시에 다섯 수의 수법을 변화시켜 역습해 나갔다.

생각하면? 불쾌하고 울화가 치밀 노릇이다. 그러나 우두커니 서서

분통만 터뜨리고 있기에는 여인의 공격이 너무나 악랄했다.

한번 양몽환의 손바닥을 떠난 강력한 장풍은 휘익!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무섭게 밀려나갔다.
그러나 흑의여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양몽환이? 몰아붙인 다섯수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고는 생긋
이 웃는 것이었다.
[안되겠어요. 속히 승패를 가려야지......]
소리치며 흑의의 여인은 오른 손바닥을 펴서 바짝 세우고는 양몽환의 손바닥을 향해 맞부딪쳐 왔다.
그 순간, 펑! 부딪치는 두 개의 손바닥에서는 살이 찢어지는듯 둔탁한 소리가 퍼져 나왔다.
이때 , 여인의 손바닥과 호되게 맞부딪친 양몽환은 갑자기 한줄기의 강력한 잠력이

곧장?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즉시 운기하여 손바닥을 통해 들어오는 잠력을 막아냈다.
지금 흑의여인과 양몽환은 제각기 오른 손바닥을 맞부딪치므로서 뻗쳐나는

내공의 힘으로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로 날카로운 잠력과 공력의 대결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 패하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추호의 양보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힘에도 한도가 있고 잠력에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똑같은 수법으로 같은 힘을? 내어 겨루는 고수급의 잠력대결은 한 식경이 지나면서부터

차차 그 강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어깨로 몰아쉬며 이리뛰고 저리뛰며 손바닥을 폈다.

접었다 하는 흑의여인이나 땀을 뻘뻘 흐리며
이를 악무는 양몽환이나 거의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어버리면 승패를 가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맹렬한 공격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 양몽환과 흑의여인은

남은 힘도 거의 비슷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 어느 한사람도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진기가 없는 것을 서로 알게 되었다.
이때, 전력을 다해 최후로 공격하던 흑의여인이 양몽환의 오른손을 위로 약간 밀어젖히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래도...... 승복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양몽환은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왼 손으로 훔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천만에! 지금의...... 형태로선 둘이 다...... 쓰러질 형편이오......

이...... 양모인이 졌다는 것은......말도 안되오......]
이를 악물며 흑의여인을 밀어젖힌 양몽환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바람에 서너걸음 물러선 흑의여인은 다시 달려들려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한 흑의여인을 지켜보고 있는
양몽환의 뇌리엔 검은 구름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 여자가 도대체 어떠한 무공을 지녔기에 이토록? 내공력이 강할 수 있단 말인가.

임, 독(任, 督) 두곳이 유통안된 것으로 보아 조소접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굉장한 내공이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양몽환은 지금까지 흑의여인과 싸우면서 한가지 몰랐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내공력이 좀전보다 더욱 강하게 운기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웬일일까 고개 갸웃거리던 양몽환은 퍼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렇지, 고심대사(苦心大師)의 내공을 전수받은 까닭이구나......>
사실, 양몽환은 자기도 모르게 강력한 내공을 무진장 발휘하고 운기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고심대사의 내공을 전수받은 것임을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나보다 아니 고심대사보다 더 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심대사는 수 십년 동안 터득한 내공을 나에게 전수해 주었다고 했는데

불과 나이 이십여세 밖에 안된 여자가 어떻게 공력을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양몽환이 생각하고 있는 동안 잠시의 조식으로 잃었던 진기를 북돋운 흑의여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양몽환을 불렀다.
[왜 그러고 있죠? 졌으면 졌다고 말하세요! 저는 지금이라도 당신을 죽일 수 있어요.]
하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양몽환은 냉소를 터뜨렸다.
[졌다고? 천만에. 얼마든지 공격해 보시오.]
[큰소리 치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호랑이등에? 탄 형태가 되버렸어요.

지금 당신의 기력으로서는? 하루종일 노려보아도 저를 이길 수는 없을 거에요.]
[흥! 당신도 마찬가지요. 지칠대로 지치기는 피차 마찬가지요. 그렇지 않다면 공격해 보시오.]
[제가 당신을 당장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군요.]
[물론 믿지 못하겠소. 죽일 수만 있다면 죽여 보시오. 큰소리만 치지 말고!]
양몽환은 늠름히 어깨를 펴보였다.

그러나 흑의여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일 뿐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한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어요.]
[무엇이오?]
[당신의 내공을 흡수하여 무(無)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무공을 들어본 적 있어요?]
[들었소. 그것은 지음지독(至陰至毒)인 외문무공(外門武功)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이 그런 사악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러나 미안하지만 저는 알고 있단 말이에요.

다만 그러한 무공으로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다는 것 뿐이에요.]
[무슨 이유요? 그토록 이 양모인에게 자비심을 베풀고?]
[고마와 할것 없어요. 지금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공력을 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적할? 수 있는 내공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요.

그런데 만일 음독(陰毒)한 파원신공(破元神功)의 공력을 사용한다면 당신은 가엾게도 죽고 말아요.]
[죽어도 좋소. 진정 당신이 그런 재간을 가지고 있다면 이 양모인이 한번 구경이나 해봅시다.]
[싫어요. 저는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서로 적대 관계에서 싸우고 있는 지금 당신이 이 양모인을 죽이지 않는다면

이 양모인이 당신을 죽이겠소.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 강호 무술계의 상도(常道)요.

그러니 자비심까지 베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조급히 서두르지 마세요. 이 세상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이에요.? 목숨을 아끼세요. 만일
제가 당신을 죽인다면 심하림과 이요홍은 청상과부 밖에 더 되겠어요?]
[당신은 이 양모인의 사생활까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래요. 당신이 사매를 강간하고 도명기세(盜名欺世)의 작당으로 곤륜파에서

추방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이요.]
순간, 양몽환은 너무나 놀라운 말에 눈썹이 꼿꼿이 일어났다.
[그따위 풍문은 모두 도옥에게 들었소?]
[아니에요...... 그리고 또 있어요.

당신은 약물(藥物)을 이용하여 이요홍을 실신시킨 다음 그녀의 정조를 짓밟고

더구나 도옥에게서 이요홍을 빼앗아갔죠?

그런 다음에야 도옥이 당신을 죽이려고 노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고 뭐예요?]
그 말을 들은 양몽환은 갑자기 기혈(氣血)이 끓어오르는듯

숨이 꽉 막혔다가 한모금의 선혈(鮮血)을 토해냈다.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리는 이야기가 아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냉정을 되찾고 침착해졌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에게서 그 말을 들었소?]
하고 말한 양몽환은 너무나도 큰 충격에 일시 몸이 떨리고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것이었다.
이때,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은 흑의여인은 멍청히 서 있는 양몽환을 힘껏 밀어붙였다.
그바람에 뒤로 비실비실 물러나던 양몽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재빨리 쓰러지려는 몸을 바로 세운 양몽환은 내공력을 운집하여 역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듯밖의 충격으로 내공이 운기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더 공격할 힘마저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한편, 흑의여인도 양몽환을 뒤로 밀어붙이기는 했으나 더이상 밀어붙일 힘이 없는지

한번 공격한 자세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때,
어디선가 갑자기 가벼운 옷자락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검을 뽑아든 동숙정이 비호처럼 달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비호초럼 달려온 동숙정은 양몽환을 막아서며 재빨리 속삭였다.
[양사제 놀라지 말아요. 내가 맡겠어요!]
그러나 흑의여인은 동숙정을 보는 순간, 스스로 눈을 감아버리고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양몽환과의 대적으로 힘과 내공이 전부 쇠진되어 더 이상 싸워볼 힘도 없었다.

그건데다 동숙정이 장검을 들고 노려보는 데는 차라리 눈을 감고 죽여주기를 기다리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이때, 동숙정은 머리 위까지 높이 올려든 장검으로 흑의여인의 백설같은 목을 겨누고

내리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양몽환의 조용한 음성이 동속정을 불렀다.
[동사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갑자기 양몽환이 만류하는 소리에 들었던 장검을 내려놓으며 양몽환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지? 이 여자의 무공이 약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 기회에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을텐데......]
그러자 양몽환은 나직이 탄식했다.
[지금 이 여자를 죽인다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오.]
하는 말에 동숙정은 이마를 찌푸리며 양몽환을 못마땅하게 보았다.
[사제는 언제까지나 군자지도(君子之道)만 고집할 모양이군요. 그러다가 매번 후환을 당하면서도......]
[사매는 모르시는 말씀이오. 지금 이 여인은 다른 사람의 꾀임에 빠져 잠시 우리들과 적대 관계에

놓여있을 뿐이오.

그러한 여인을 어찌 적으로만 치부하고 죽일 수 있겠소?]
하는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눈을 스르르 감고 모든 것을 체념한듯 조용히 서있던 흑의여인이 갑자기

눈을 뜨며 냉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만일 제가 양상공을 죽일 마음만 있었으면

벌써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었을 것이에요.

당신이 와서 구할 때까지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그러자 동숙정은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양사제! 사실이에요? 이 여자가 하는 말이?]
일이 이렇게 번지자 입장이 난처한 사람은 양몽환 자신이었다.
사실 이 상태에서 흑의여인이 말한대로 동숙정에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일 흑의여인이 무공을 무(無)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대로 믿을 동숙정이 아니다.

오히려 더 분통을 터뜨리며 단번에 죽이려고 할 것이다......

더구나 흑의여인의? 놀라운 무공의 재간도 아깝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곡절로 우리와 적대 관계가 되었는지, 누가 이 여인을 선동했는지,

그것을 알아본 다음 최악의 경우를 결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양몽환은 우선 흑의여인을 살려놓고 보려는 결심이 생겼다.
그래서 양몽환은 엄숙한 어조로 말할 수 있었다.
[동사매! 이 여자의 말이 옳습니다.

만일 소제(小弟)를 죽이려는 마음만 있었으면 벌써 시체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자 동숙정은 실로 놀랍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찌푸리는 것이었다.
[그와같은 놀라운 재간이 있다면 더욱 빨리 죽여 없애야 해요.

그러나 일생동안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군자의 도리만 지키는 사제를 생각하면 죽일 수도 없고......

만일 이 여자를 죽인다면 사제는 나를 원망하겠지요.]
그러는 한편, 흑의여인은 남모르게 탄식하며 운기시켰던 내공을 풀어버리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쌍방이 지고(至高)의 내공력을 있는대로 운기시켜 서로 겨루고 있던 중에

갑자기 흑의여인이 자기의 내공력을 풀어버리자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양몽환의 내공력이

풀어지는 흑의여인의 내공력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바람에 갑자기 밀어닥친 양몽환의 응후한 내공력은 흑의여인을 허공으로 높이 날려보냈다.

너무나도 급격히 벌어진 일에 흑의여인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으로 뛰어올라

공중에서 빙그르르 재주를 넘고는 일장 밖으로 나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양몽환은 단숨에 흑의여인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이때, 흑의여인은 두 눈을 꼭 감은채 엎어져 있었고 코와 입에서는 붉은 선혈이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단한 중상이었다.
엎어진채 선혈을 쏟고 있는 흑의여인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양몽환의 옆으로

뒤미처 달려온 동숙정이 경악해 마지 않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앗! 피!]
양몽환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동숙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사매! 만일 이 여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내공력읕 거두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서로 내공력을 겨룬채 둘이 함께 죽어갔을 것이오.]
하고는 잠시 말을 끊고 흑의여인을 응시하던 양몽환은 다시 동숙정을 불렀다.
[동사매! 수고스럽지만 그녀의 상처를 보살펴 주시오!]
그러자 동숙정은 아무 말 없이 장검을 옆에 놓고 흑의여인의 가슴속으로 손을 밀어넣는 것이었다.
흑의여인의 심장은 극히 미약하지만 뛰고 있었다. 그렇게 흑의여인이 가슴에 손을 대고

얼마동안 내상의 증세를 알아보고 있던 동숙정은 가만히 손을 빼며 입을 열었다.
[내상이 중하긴 하지만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어요.]
하면서 양몽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양몽환은 낭패라는 듯이 침울한 음성으로 동숙정에게 구원을 청했다.
[동사매! 미안하지만 사매가 업고 등가보까지 갈 수 없을까요?]
[어려울 것은 없지만 사제는 꼭 이 여인을 살려야겠어요?]
하고 묻는 동숙정의 표정은 조금 냉정한듯 했다.

그러다 양몽환은 눈을 내려깔고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듯 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꼭 살려야겠다는 것보다 마음이 괴로와서 하는 말입니다.]
[왜, 이 여자가 불쌍해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만일 이 여자가 갑자기 내공력을 거두어 들이지 않았다면

내상은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 양모인을 생각해서 여인 스스로가 희생한 것 같아 그럽니다.]
[그것은 내가 그녀를 죽일까봐 겁을 내고 한 일인데요!]
[그러나 이 여자가 패해서 입은 상처는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내상을 입고 쓰러진 여자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알겠어요. 그러나 등가보에는 데리고 갈 수 없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 내가 등가보에 업고 갈 수 없다고 말하는지 사제는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속히 데리고 가서 치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해요. 그렇지만 사제가 이 아가씨를 데리고 가보세요.

지금 등가보에는 구대문파에서 모인 고수들이 많이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사제의 높은 명성을 시기하고 어떻게 하면 사제의 명성을 떨어뜨리고

모함하고 비방할까 궁리를 하고 있는 이때에 여자를 그것도 어여쁜 여자를 데리고 가보세요.

무슨 모함으로 사제를 괴롭힐지......]
동숙정의 말도 일리있는 말이었다.

사실? 구대문파에서 모인 고수들의 입이 두려웠다.

절로 탄식이 나오는 양몽환이었다.
[그럼, 다론 방도는 없을까요?]
동숙정은 잠시동안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하는듯 했다.

그러다 한숨을 쉬었다.
[사제는 이 여인을 언제까지 돌보려고 하죠?]
[내상만 치료된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만일 상처가 나서 사제와 적이 된다면? 그래서 사제를 해치려 한다면?]
그러자 양몽환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에 적이 된다해도 이 사제는 그녀를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지요?]
[만일 이 여자를 죽이면 그녀의 부하들을 더욱 자극하여 수십 명의 적을 만들 우려가 있읍니다.]
[만일 이 여자가 사제를 죽이려고 한다면요?]
[모르긴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겁니다.]
동숙정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미 양몽환의 마음이 이 여자를 살려야한다는 한가지 생각에만 전념하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동안 양몽환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동숙정은 양몽환을 도와주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사제의 생각이 그렇다면 내가 도와주겠어요.]
[동사매, 고맙습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여기서 얼마 멀지않은 곳에 절간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치료해 보도록 하지요!]
하고는 쓰러진 흑의여인을 번쩍 안고 앞장을 서는 것이었다.
거의 오리(五里)길이 될까말까한 곳에 동숙정의 말대로 절간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 지었는지 다 쓰러져가는 황폐한 절이었다.
그리고 문도 다 떨어지고 군데군데 벽도 헐어져 있는 절간이었다.
그래도 깨끗한 곳을 찾아 흑의여인을 내려놓은 동숙정은 절간을 휘둘러 보는 양몽환을 불렀다.


[양사제! 이 여자를 어떤 방법으로 치료하겠어요?]
그러자 곧 대답했다.
[사매가 좀 도와주시오. 그 여자를 앉혀놓고 붙잡아주시오.]

 그럼 내공력으로 경맥요혈(經脈要穴)을 유통시키려고요?]
[바로 맞습니다.]
하고 대답한 양몽환은 그 옆에 정좌하고 앉아 잠시 운기 조식을 취했다.
이때, 동숙정은 양몽환의 말대로 흑의여인을 일으켜 앉히고는? 부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흑의여
인은 여전히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쓰러지지 않도록 등
을 부축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운기 조식을 끝낸 양몽환은 크게 숨을 들여마셨다가 내쉬고는 흑의여인의 등뒤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내공력을 운집한 그 손바닥을 흑의여인의 등에 밀착시키고 자신의 진기를 명문혈(命門穴)에? 주입시키기 시
작했다.
그러자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흑의여인은 양몽환의 내공력에 의해 정지되었던 피가 다시 순환하는듯 꺼져가
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그녀의 작은 입에서 검은 피가 토해져 나오다 그치며
정신을 차린듯 감았던 눈을 뜨는 것이었다.
가만히 눈을 뜬 여인은 부축하고 있는 동숙정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하려는듯 하다가 기운이 없는지 다시 두
눈을 감고 말았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조용히 침묵이 흘러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시 눈을 뜬 흑의여인은 슬픈듯한 표정을
지으며 동숙정을 올려다 보았다.
[아가씨에게 폐를 끼치는군요.]
그러자 동숙정은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염려말아요. 곧 낫게 될 거에요.]
[미안합니다. 지금 피의 순환이 창통하는 것 같아요.]
그러는 한편, 이때까지 흑의여인이 등에 두? 손바닥을 밀착시키고 있던 양몽환은 서서히 손을? 떼며 이마에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냉랭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조금 조식하면 될꺼요. 그럼 우리는 가겠소!]
하면서 동숙정에게 눈짓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흑의의 여인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이미 내상이 치
유된 태도요, 몸짓이었다.
[가지 마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겁니까?]
[당신은 제가 파원신공(破元神功)의 재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하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흑의여인의 엉뚱한 말을 듣고 있던 양몽환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여자가 이 지경이 되고도 파원신공 자랑을 한담......>
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글쎄요. 믿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소.]
그러자 흑의여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믿으면 믿고 못믿는다면 못믿는거지!]
[당신의 말이 하도 이상해서 하는 말이오. 지금까지 당신은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었단 말이오.

그런데도 그 파원신공이라는 재간을 쓰지 않는 당신을 어떻게 믿으라는 것이오.]
[그렇다면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군요.]
그러자 양몽환 대신 동숙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아가씨는 중상을 입고 치료한 몸이에요.

그런데 아가씨의 마음을? 괴롭게 하면 치료가 헛될까 염려해서 우리 양사제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거에요.

내가 보기에는 우리 양사제가 믿지 않고 있음이 확실해요.]
하는 동숙정의 말에 흑의여인의 얼굴이 금방 노기를 띄우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정말 믿지 못하신단 말이죠? 좋아요. 다시 한번 시험해 보세요.]
사태가 약간 험악해짐을 느낀 양몽환은 조용히 타일렀다.
[당신은 지금 몸이 극도로 허약해 있읍니다.

그러한 몸으로 내공력을? 겨루자는 것은 목숨을 버리겠다는 말과 같소.

이 양모인이 믿는다 하고 그만둡시다.]
그러나 흑의여인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안돼요. 나는 꼭 증명하고 말겠어요.]
[도대체 무엇을 증명하겠다는 말이오?]
[제가 거짓말을 해서 당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겠어요.]
[이미 이 양모인이 믿느다고 하였으면 그만이지 새삼스럽게 증명할 필요가 있겠소?]
[아니에요. 당신은 말로만 믿는다고 할 뿐 마음 속으로 믿지 않는 것이 확실해요.]
서로 양보하지 않고 한편은 증명하겠다거니 한편은 믿으니

그만두라거니 하며 입씨름을 하는 것을 보고 있던 동숙정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리 양사제의 무공이 어느 정도로 심후하다는 것을 아가씨는 이미 알고 있을 거에요.

더구나 우리 양사제가 대협의 신분으로 이제 막 회복된 아가씨와 무공을 겨룬다는 것은 있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아가씨가 끝까지 증명해 보겠다면 내가 상대해 주겠어요. 어때요?]
하고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자 흑의여인도 여유를 두지 않고 나섰다.
[좋아요. 두분 중에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다만 제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만 밝히며 돼요.]
양상이 바뀌어진 지금의 상태로서는 만류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동숙정은 양몽환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어떡하죠? 아가씨의 고집이 대단한데...... 내가 상대해도 될까요?]
양몽환은 더 만류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거려 좋다는 뜻을 표시하고는 한마디 덧붙었다.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쪼록 조심해서 상대하시오.]
그러자 동숙정은 최후로 한번 더 흑의여인에게 그만둘 것을 권유해 보았다.
[아가씨 한번 더 생각해봐요.

지금 아가씨의 체력으로서는 무리한 일이에요.

그만두는 것이 어때요?]
그러나 흑의여인은 차갑게 거절했다.
[필요없어요. 한가지 부탁할 것은 아가씨가 저와 내공으로 겨룰때 사정을 두지 말고

전력으로 공격하라는 것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리고는 동숙정의 오른 손바닥을 펴게 했다.

그래도 동숙정은 흑의여인을 생각해서 머뭇거리자 흑의여인은 발끈 화를 내는 것이었다.
[왜 겁나세요?]
이렇게 된 바에는 동숙정도 더 권유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좋아요. 자, 시작해요.]
하고는 손바닥을 펴들자 흑의여인도 역시 손바닥을 펴서 동숙정의 손바닥에 밀착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마음이 놓이지 않는 사람은 양몽환이었다.
<무공이나 내공력으로 보아 동사매보다는 뛰어나지만 지금의 체력으로서는 무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동안 흑의여인과 동숙정은 이미 심후한 내공으로 겨루고 있었다.
지금까지 웃음이 떠돌던 동숙정의 얼굴에는 웃음이 싸악 거두어지는 한편,

흑의의 여인은 아무 표정도 없이 태연한 자세로 내공력을 겨루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보고 있는 양몽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여자가 파원신공의 재간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래서 동사매의 내공을 모두 무(無)로 만든단 말인가?......>
하는 바로 그때, 동숙정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정신을 차리고 동숙정을 살펴보았으나 그대로 앉은채
눈을 바로 뜨고 있을뿐 당장의 변화는 없었다.
순간, 양몽환은 급히 진기를 운집시켰다.

만일을 대비해서 위험에 처한 동숙정을 구해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이 었었다.

한번 비명을 질렀던 동숙정은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다시 악!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앉은채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분명히 뒤로 자빠진 사람은 동숙정이었고 흑의의 여인은 여전히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그제서야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양몽환은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당신이 상처를 입혔소?]
그러자 흑의여인은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며 가만히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는 말은 너무나 차가왔다.
[당신이 믿지 못한다고 해서, 아가씨를 시험해본 것 뿐이에요. 이제는 믿겠어요?]
[뭣이? 우리 동사매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소.

그러나 이곳까지 업고 와서 살려 놓았소.

그런데 그 보답이 그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오?]
노기가 등등해진 양몽환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그러자 흑의의 여인도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누가 당신의 사매를 죽였단 말이에요? 잠시 후면 살아나요.]
[거짓말!]
[제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속이겠어요?]
그러나 흑의의 여인의 말을 듣지 않고 쓰러져 있는 동숙정의 등에서 장검을 뽑아들었다.
[만일 우리 사매가 죽는다면 나와 당신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우리 사매와 길동무가 되어야 할꺼요!]
하면서 당장 내려칠듯이 장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그러나 흑의의 여인은 태연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믿지 못하시는군. 조금 후에 깨어난단 말이에요.]
[좋소, 기다려 보겠소.

그러나 당신은 우리 사매가 깨어날 때까지 이곳에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그러자 어찌된 셈인지 흑의여인은 공손한 태도로 아무 말 없이 동숙정이 쓰러져 있는 옆으로 가서

단정히 앉는 것이었다.
흑의여인의 이런 태도에 약간 성질이 누그러진 양몽환은 여인의 말을 믿기로 하고

역시 동숙정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동숙정의 요혈을 뚫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양몽환이 손을 댈 때마다 흑의여인은 손을 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