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戰 雲이 감 도는 鄧 家 堡
괴로와하는 양몽환을 바라보고 있던 등개우는 따로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양대협님! 무슨 괴로운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잊으시고 하룻밤만 편히 쉬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가겠읍니다.]
하고 물러나가는 등개우를 조용히 손짓해서 불렀다.
[등형! 수고스럽지만 오래 묵은 초가 있으면 이 십근(二十斤)만 구해주십시오.]
[지금 쓰시겠읍니까?]
[내일 아침에 쓰고 싶은데.]
[예, 염려마시고 쉬십시오. 준비해 놓겠읍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난 등보주 고강은 경장 차림의 장정 여덟 명을 뜰에 세워놓고
편지(片紙)를 한장씩 나누어주었다.
[지금 나누어 준 편지를 특별히 잘 간직해서 지정한 장소에 놓고 돌아오도록? 하라.
만일 여의치 않다고 그대로 돌아오지 말고 지세와 형편을 살펴서 꼭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도록 하라!]
그러자 여덟 명의 장정들은 주먹을 쥐고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명심해서 일하겠읍니다.]
[떠나라!]
등고강도 주먹을 쥐고 인사에 답했다.
인사를 마친 여덟 명의 장정은 한편에 대기시켜 놓은 각자의? 말(馬)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말을 재촉해서 달려나갔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말 잔등에 매달아 놓은 무기와 건량(乾量) 보따리가
요란하제 흔들리는 것이 곧 보이지 않았다.
이미 멀리 달려간 것이었다.
한편, 여러가지의 번민과 괴로움에 긴 밤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양몽환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깊이 잠이 들었는지 동녘이 훤히 밝아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잠에 빠졌던 양몽환은 이상한 인기척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은 채 서 있는 등개우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오?]
[궁아저씨가...... 몹시......]
[뭐, 궁형이?]
양몽환은 어제 놓은 은침이 잘못되었는가 싶어 얼굴이 해쓱해졌다.
[궁형이 밤새 한잠 주무시지 못하고 지금까지 괴로와하고 있읍니다.]
순간, 양몽환은 긴 숨을 내쉬었다.
당장은 마음이 놓였다.
즉시 몸을 날려 궁천건의 방문을 열었다.
과연, 등개우의 말대로 궁천건은 땀을 뻘뻘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은침을 꽂았던 몇 곳의 요혈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양몽환은 곧장 지하실로 들어가 어제 똑같이 실험했던 거한의 뒷등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급히 되돌아온 양몽환은 무슨 연고로 궁천건의 요혈이 부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궁형! 용서하시오.]
힘없이 말하는 양몽환을 간신히 바라본 궁천건은 괴로운 표정으로 아픔을 참는듯
얼마 동안 말을 못하다가 띄엄띄엄 말을 했다.
[아니...... 아닙니다...... 제 명(命)이...... 다...... 한...... 것같...... 습...... 니다.]
이 말을 듣는 양몽환의 가슴은 천길만길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고
천근만근의 무거운 쇳덩아리가 머리를 치는 것 같아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나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부어오른 요혈을 자세히 검토했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급했다.
어제 은침을 놓을 때만 해도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상처를 치료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하룻밤이 지난? 지금의 상태는 상상을 뒤엎은 채 사태가 더욱 위급해져
일각일각 사신(死神)과 싸우는 궁천건이 아닌가?
양몽환은 다급하기도 하고 맥도 풀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당황하기만 했다.
그러던 양몽환은 옆에 있는 등개우에게 다급히 말했다.
[등형! 속히 가서 동사매를 불서주시오!]
이때, 양몽환과 궁천건을 번갈아 보며 초조한 마음으로 사태의 변화에만 골몰하던 등개우는
후다닥 놀라며 그대로 뛰어나갔다.
얼마를 뛰어가던 등개우는 양몽환의 무슨 말을 듣고 뛰어나왔는지조차 몰랐다.
되돌아 들어온 등개우는 죽을 죄를 지은 사람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동사매를 좀 불러주시고!]
만일 이때 양몽환이 소리라도 꽥! 질렀더라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드럽게 다시 일러주는 말에 곧장 뛰어나갔다.
그리고 동숙정을 앞세우고 들어온 등개우는 양몽환 앞에서 이마의 땀방울을 주먹으로 씻었다.
방으로 들어온 동숙정은 표정을 굳혔다.
[웬 일이세요? 양사제......]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는 동숙정은 양몽환의 얼굴에서 사태가 위급함을 알아내고 조심히 물었다.
[동사매! 지금도 권보(拳譜)를 가지고 계십니까?]
[예, 있어요.]
동사매는 급히 품속에서 책자 한 권을 꺼냈다.
[동사매는 혹시 중상을 치료하는 법을 알고 있읍니까?]
[별로...... 무공만 배우다 보니까 치료법은 미처......]
하다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궁천건을 보고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까지도 궁천건은 신음 소리를 내며 괴로와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 궁천건을 바라보던 동숙정은 그에게로 다가가 부어오른 상처를 보고는 눈을 찌푸렸다.
보기만 해도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어오른 상처는 퍼렇게 죽은 피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동숙정은 가만히 궁천건의 요혈 두 곳을 짚어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그리고는 양몽환에게 물었다.
[양사제! 어찌된 일이죠?]
[..................]
이때, 양몽환은 빠른 솜씨로 책장을 넘겨 요상편(療傷篇)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급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적당한 치료법은 없었다.
혹시 너무 서둘러서 잘못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시 첫줄부터 읽어 내려가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지하실의 긴 지하도를 다급히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급하게 궁천건의 방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등가보의 부하 한 사람이 몸을 사시나무 떨듯하며
미처 말을 못하고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보다못해 등개우는 꽥!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냐.]
[목......모가지가......네 개......]
[뭣? 모가지가 어쨌어?]
[몸뚱이는 없고......목......아니 머리만 네 개가 있읍니다.]
[뭐라구?]
[대청에 있읍니다.]
등개우는 자리를 박차고 대청으로 달려나갔다.
그 뒤를 동숙정이 급히 따라나갔다.
과연, 부하의 말대로 대청 한가운데의 탁자 위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네 개의 머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
등개우는 소름이 쫙 끼쳤다.
[웬 머리입니까?]
먼저 와서 침통한 낯빛으로 서 있는 등고강에게로 등개우는 급히 돌아섰다.
[나도 모르겠구나...... 분명히 내가 심부름을 보낸 애들인데......]
[무슨 심부름을 보냈읍니까?]
[편지(片紙)를 전하라고.]
등고강의 말대로 네 개의 머리가 놓인 탁자 위에는 피에 흥건히 젖은 넉장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무슨 편지를 보냈읍니까?]
[여러 곳으로 각 파의 장문인들을 초청하는 편지였어.]
이때, 동숙정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럼 몇 군데로 몇 명이나 보냈는지요?]
[여덟 파의 장문인에게 한 사람씩 보냈으니......]
[여덟 명을 보냈겠군요.]
[그렇소. 그런데 네 명은 이렇게 머리만 돌아왔구려.]
하는데 다시 밖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한 사람의 하인이 뛰어 들어왔다.
[또 무슨 일이냐?]
[나무 위에 시체가 있읍니다.]
[시체?]
[둘입니다.]
등개우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역시 죽어 있었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요혈을 짚힌 두명의 부하는
이미 생명이 끊어진지 오랜듯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음...... 이 무슨 변고인가...... 등가보에 괴변이 일어나다니......>
부하에게 명하여 시체를 묻게 한 등개우는 한쪽 벽에 기대어 오늘 하루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했다.
아버지 등고강이 밀사로 보낸 여덟 명의 부하중 이미 여섯 명이 시체로 변했다.
이제 나머지 두 명의 신변이 엄려되었다.
<필경 가친께서는 여덟 파의 장문인을 초정하여 양몽환대협과 상면시켜
강호의 일을 의논코자 해서 밀사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기밀을 알고 밀사들을 도중에서 살해했을까.
그리고 등가보에까지 시체를 보내준 놈은 어떤 놈일까?>
괴롭고 가슴이 아팠다.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검은 구름이 아침부티 밀려와 등가보를 뒤덮는 것 같아 등개우는 심신이 피로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아직 생사를 모르는 두명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일을 하고 돌아왔으면......
그래서 어느 파의 장문인이든 만나서 대책을 강구해도......>
그렇게만 해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진 등개우는 힘없이 걸음을 옮겨 대청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소매를 가만히 잡아당기는 손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괴롭고 한편으로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되어?
정신이 없던 등개우는 기겁하고 놀라 잡아당기는 소매를 낚아채며 획! 돌아섰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는 백의(白衣)로 아릅답게 단장한 여인이 맑은 눈동자에
웃음을 가득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요? 당신은!]
소리친 등개우는 다짜고짜로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기도 들지 않고,? 함빡 웃음을 띄우고 있는 여인을 내려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서슬이 시퍼런 등개우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웃음을 띄운채 나부시 허리를 굽히고 읍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이 얼떨떨해진 등개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검을 내려 놓는 것이었다.
[등소보주님! 안녕하신지요?]
옥을 굴리는 듯한 여인의 인사였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백의의 여인은 등개우가 쥐고 있는 장검을 눈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선 그 칼을 거두세요.]
그제야 여인 앞에서 너무 당돌했다고 생각한 등개우는
여인의 웃는 얼굴에서 악의가 없음을 알고 장검을 거두었다.
[실례했소만 도대체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요?]
[되도록 큰 소리를 내지 마시고 저의 말씀을 들으세요.]
[알았소. 말하시오.]
[저는 우리 주인 다정선자(多情仙子)의 명을 받고 등소보주님을 만나러 왔읍니다.]
[다정선자라 거짓말하지 마시오. 당신이 나의 부하 두 명을 죽였소?]
[무례하군요. 저는 보시다시피 여자에요. 그리고 흉기도 들지 않았어요.]
[그럼 누가 죽였소?]
[제가 등소보주님을 만나러 온 것은 한가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온 것 뿐이에요.
한가지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지금 두 명의 시체는 흑의의 괴한 두 명이 어디선가
시체를 메고 와서 나무 위에 올려놓는 것을 보았어요.]
[그들이 누구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등개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 여자의 말이 맞을지도 므르지......
그건 그렇고 다정선자가 무슨 말을 전하라는 것일까......>
[그럼, 당신은 다정선자가 보낸 사람이란 말이오?]
[그래요. 이제 오해가 풀린 모양이군요. 등소보주님께서는 저의 다정 주인님을 만나보셨죠?]
[그렇소.]
[그래서 등소보주님을 기억하고 계시는 다정 주인님께서는
등소보주님을 염려해서 꼭 전해드리라고 했어요.]
[무엇을 전하라는 말인지 빨리 말이나 해보시오.]
[다른 것이 아니라,
오늘밤 이 등가보에 일대 살상전(殺傷戰)이 벌어질 것이라고 하시면서 특별히 조심하라고 했어요.]
[뭐요? 일대 살상전?]
[전해드릴 것은 다 전했어요. 그럼......]
하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높은 성벽을 넘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등개우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이럴 수 있느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정신이 빙빙 돌았다.
급히 대청으로 돌아온 등개우는 하인에게 네 개의 머리를 파묻으라고 명하고는
가친과 동숙정 그리고 유원을 불러 궁천건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양몽환은 동숙정의 권보에서 몇가지의 요상법을 읽고 궁천건의 위급한 증세를 치료하고
한숨을 돌리고 있었으며 궁천건은 아픔을 잊고 평안히 잠이 들어 있었다.
[양대협님!]
등개우는 엄숙한 표정으로 양몽환을 불렀다.
그리고 지금 마악 다정선자의 시녀가 전해준 말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다정선자 조소저가 전하라고 하던가요?]
[네. 틀림없이 다정선자라고 했읍니다.]
일동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알겠소. 조소저가 보낸 시녀가 한 말이라면 믿어도 되오.]
[어떤 자들이 침입할 것 같소?]
등고강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하루에 발생한 일들로 보아 허황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매우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도옥의 일당일 것 같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누차 말한바와 같이 중상을 입은?
도옥은 아직 행동이 자유롭지 못해 직접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럼, 화신들일까요?]
동숙정의 물음이었다.
[물론, 그자의 화신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도옥보다 무공도 약하고?
모질지 못한 놈들이어서 그놈들이 직접 지휘하지는 못할 것같습니다.]
[그러면?]
[화신들과 또 부하들을 지휘하는 제 삼의 인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도옥보다는 못하지만 그만큼 악종인 제 삼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읍니다.]
[그러면 우리도 대적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읍니까?]
등개우의 근심스러운 표정에 양몽환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준비해야죠. 비록 몇 사람의 우리들이 몇 놈의 적을 막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만일을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알겠읍니다. 곧 준비시키겠읍니다.]
[그보다 등형! 이 등가보 안에는 몇 명의 장정이 있읍니까?]
[백 오십 명 정도는 됩니다.]
[무기는?]
[연환갑나(連環匣拏)라는 활(弓)이 있읍니나.]
[연환갑나]
[네. 그렇습니다. 이 연환갑나로 말하면 한갑(一匣)만 쏘면
수십개의 화살이 퍼지며 적을 교란시킬 수 있읍니다.]
그러자 등고강이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원래 제갈무후(諸葛武後)의 나궁(拏弓)들이 쓰던 활인데
이 늙은이가 몇년간 연구해서 더욱 강하게 만든 활입니다.
한번 쏘면 한대의 화살이 공중에서 이 삼십개로 갈비지며 살을 꿰뚫는 위력이 있소이다.]
[됐읍니다. 궁인(弓人)들을 잘 배치하십시오.]
양몽환의 말에 급히 나가려는 등개우를 등고강이 불러세웠다.
[노인과 부녀자는 토산호(土山壕)로 피신시키고 각 망루마다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등개우는 등에 멘 장검(長劍) 개산도(開山刀)를 고쳐 메며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멀리서 노인과 부녀자의 피신하는 소리며 장정들을 명령하는 호령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초조한 한낮이 지나고 주위는 점차로 어두워졌다.
이제 등가보가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이면서 살상전이 일어난나는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양몽환을 비롯하여 심하림, 동숙정, 유원은 제각기 망루 하나씩 맡고 등고강과 등개우 부자(父子)는
수시로 함께 망루를 순시하고 있었다.
등불 하나 밝힌곳 없이 완전히? 소등(消燈)한 등가보는 죽음처럼 조용했다.
백 오십 명의 장정들은 저마다 연환갑나를 둘러메고 어둠 속에서
귀를 곤두새우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서서히 밀려오는 어둠 초조하고 지루한 죽음같은 밤이 밀물처럼 밀려와
어느덧 밤 이경(二更) 바로 그 시각이었다.
동쪽 하늘에서 파란 불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잠시의 간격을 두고 서쪽에서 번쩍였다.
그 다음 돈같은 간격을 두고 북쪽에서 남쪽에서 파란 불길이 솟아올랐다.
신호(信號)의 불길인 모양이었다.
등가보에 잠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무기를 고쳐 쥐었다.
드디어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않고 이제 돌발하려는 사태에 온 신경을 쓰고 있던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어느 성벽에서부터 적이 침입하는가 날카롭게 눈알을 굴리고 있있다.
동쪽과 서쪽, 북쪽, 남쪽에서 각기 신호로 불길이 올라가고
또 그와 똑같은 간격이 있은 다음,
네 곳의 방위에서 일제히 펑!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등가보 안으로 후드득 불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등가보는 화염으로 휩싸이고 말았다.
한채, 두채......불길은 맹렬한 속도로 지붕을 타고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천여호(千餘戶)의 등가보를 순식간에 집어 삼킬듯 태워버리는 화염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불을 끄는 십여명의 등개우 부하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환한 불빛에 역력히 보였고 아직 불이 붙지않은 집은 미리 허물어서
다음 집으로 옮겨붙지 못하도록 몇 채의 집을 헐고 있었다.
그때까지 망루에 서서 사태를 관망하던 양몽환은
하얀 수건을 꺼내 눈만 내놓고, 복면(覆面)을 했다.
자신의 얼굴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다.
이제 어느 성 한쪽의 성벽이 무너지면서 들이닥칠지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사방을 살피려고 몸을 돌리던 바로 그때였다.
북쪽의 성벽에서 갑자기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길이 번져 올랐다.
그 순간,
이제나 저제나 하고 적이 냐타나기만을 기다리던 등가보의 부하들은
일제히 북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것이 계략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다음 순간에야 알았다.
등가보의 부하들이 북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맞은편 남쪽 성벽에서 흑의로 감싼 괴한들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 한결같이 흑의로 몸을 감싼 괴한들은 달려드는 등가보의 부하들을
썩은 풀 베듯 장검을 번쩍이면서 질풍같이 밀려들고 말았다.
살상전은 그 막을 열은 것이다.
장검과 장검이 부딪치는 소리, 비명 소리, 외치는 소리소리로 해서
삽시간에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도가니로 변한 등가보는 피비린내와 절규로 꽉 찼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망루에 선채 꼼짝하지 않고 섰던 양몽환은 십여명의 괴한이
등가보 부하들의 저지선을 뚫고 곧장 대청을 향하여 질풍같이 달려가는 검은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장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복면이 흘러내리지 않게 손질한 양몽환은 눈을 딱! 부릅뜨고
망루에서 몸을 날렸다.
쏜살같이 몸을 날려 대청 마당에 내려선 양몽환은 마악 대청 앞 마당까지 접근해 온 괴한들 앞에서
왼손 둘째 손가락을 곧장 뻗음과 동시에 오른 손의 장검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앞장서서 달려오던 두 명의 괴한이 곤두박질하며 앞으로 엎어졌다.
[윽!]
[악!]
난데없이 나타난 두 명을 거꾸러뜨린 양몽환은 계속해서
여덟 명의 무리 가운데로 돌진하며 검광을 뿌렸다.
그 바람에 또 두 명의 괴한이 처참한 신음 소리를 내며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뜻밖에 네 명의 동료를 잃고 일시에 혼란에 빠진 괴한들은 양몽환을 둘러싸고
장검을 뽑아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네 명의 동료를 잃어 사기가 떨어진 데다가 상대방의 무공이 언뜻 보아도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막상 양몽환을 에워싸기는 했지만 선뜻 달려들지는 못하고 노려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은 속전속결(速戰速決)의 원칙을 따라 눈썹을 곤두세우고 옆에 버티고 서 있는
괴한에게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괴한의 두 다리를 거머쥔 양몽환은 손에 힘을 주어 장검대신 괴한의 몸뚱이를 휘두르며
에워싼 괴한에게로 쳐들어갔다.
무섭고 기막힌 수법이었다.
장검대신 동료의 몽뚱이에 얻어 터진 괴한들은 비틀비틀 몸의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부닥쳐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개산도(開山刀)를 든 등개우가 달려들며 버둥거리는 괴한들을
두 동강으로 짤라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열 명의 시체가 두 동강이 나서 이십개의 몸뚱이로 떨어져나가고 말았다.
[양대협님!]
[등형!]
서로 이름을 불러 사기를 돋운 양몽환과 등개우는 눈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자, 그럼 등형은 동쪽 망루로 가시오. 나는 북쪽으로 가겠소.]
[보중하시오. 대협님!]
각자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린 얼마 후,
장검과 장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더욱 요란해지고 하늘로 치솟던 불길도 조금 사라지는 무렵,
북쪽 망루로 달려온 양몽환은 지금막 성벽을 타고 내려오는 칠 팔명의 괴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흑의로 몸을 둘러싸고 장검을 비껴들었다.
양몽환은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가를 지켜보았다.
우르르 성벽을 타고 넘어온 괴한들은 좀전의 괴한들과 마찬가지로
등고강의 대청으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이때, 괴한들을 노려보던 양몽환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저놈들이 대청으로만 몰리는 것이 수상한데...... 무슨 계략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양몽환은 알 길이 없었다.
그보다 오늘밤의 싸움이 더 급했다.
<몇 십명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이 많은 놈들을 하나하나 처치하다가는 끝이 없겠는데......
단번에 쓸어버려야지......>
오른 손과 왼 손의 둘째 손가락? 끝으로 지력(指力)을 모았다.
그리고 곧장 손가락을? 뻗고 괴한이 조금 더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런줄도 모르고 일곱 명의 괴한들은 등을 굽힌채 살금살금 양몽환이 기다리고 있는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양몽환은 두 손가락으로 한놈씩 겨누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두 명이 쓰러졌다.
또 한번 양몽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뜨는 그의 눈에는 일곱 명의 괴한이 단 세 명밖에 남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마저 처치해 버려야지......>
다시 한번 감았다 뜨는 그의 눈에는 단 한명만이 도망쳐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남겨두지 않았나.
양몽환은 또 한번의 지력을 모아 괴한의 등을 향해 내뻗었다.
죽을 힘을 다해 성벽으로 뛰어넘으려던 괴한은 그대로 성벽을 타고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섰다가 코와 입으로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천강지의 수법으로 일곱 명의 괴한을 깨끗이 쓸어버린 양몽환은 다시 남쪽 망루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한편, 동쪽 망루로 달려온 등개우는 네 명의 괴한과 악전고투하고 있는 가친 등고강을 발견하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쌍놈의 새끼들! 어느 누구 앞이라고!......>
부릅뜬 눈에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양몽환의 장검에 버둥거리는 괴한들을
토막내고 피를 본 등개우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껑충껑충 뛰면서 등고강을 가로막고 적과? 마주 섰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 피라미같은 새끼들을 그냥 한칼에!>
개산도를 머리 위까지 치켜든 등개우는 백홍관일(百紅貫日)과? 비발당종(飛發撞鍾)의
두 수법을 병행시기며 괴한들의 단전안혈(丹田安穴)을 노리고 날려들었다.
순간,
밤 하늘에 은빛 무지개를 그으며 개산도는 은광(銀光)을 뿌렸다. 나뭇잎이었다.
고목(枯木)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이 아닌 다음에야 네 명의 괴한이 일시에
사지를 뻗으며 혀를 내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네 명이 괴한이었다.
이마에 솟은 땀을 주먹으로 닦아낸 등개우는 미친듯이 개산도를 휘둘러 네 명의 창자를 쑤셔버렸다.
그러자 피비린내가 코를 쑤셨다.
[아버님 다치신 곳은 없읍니까?]
[야, 이놈아. 이 애비가 그렇게 맹물인 줄 아느냐?]
[됐읍니다. 그럼, 전 또......]
흐뭇한 마음으로 북쪽 망루를 향하여 땅을 박찼다.
그리고 거의 망루 벽에 다다를 무렵,
등개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거리가 두어마장 되는 곳에 세 명의 괴한이 꾸물거리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서 누구의 장검에 다쳤는지 중상을 당한 동료 한 놈이 가운데 놓고
혈도들 풀어주고 있었다.
살금살금 소리를 죽이며 그들에게 다가간 등개우는 살며시 그들에게 겨누었던
개산도를 거두어 들였다.
<한칼에 네 명이라...... 요놈들 맛좀봐라......
그러나 비겁하게 뒤에서 남몰래 공격할 수는 없지. 그것은 무술인의 수치야......>
용기가 생긴 등개우는 빙긋이 웃었다.
[어이, 왜들 그래?]
그러자 네 명의 괴한은 자기들의 동료인 줄 알았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그 중의 한 놈이 대답하였다.
[다친 모양이야!]
[제기랄...... 어디 보자.]
아무 의심없이 자리를 비켜준 가운데로 들어가 쓰러진 괴한을 만져보는 척 하던 등개우는
쓰러진 괴한을 번쩍 안았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냐고 눈이 휘둥그래진 세 놈의 가슴에다 와락 안겨주며 밀어붙였다.
[이놈들아 뭐가 으째!]
마음 턱! 놓고 있던 세 명의 괴한은 오락 안겨주는 동료를 받아 안지 못하고
그대로 벌렁 뒤로 자빠졌다.
그러자 그 위로 등개우의 개산도가 은광(銀光)을 뿌렸다.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등개우였다.
사실 무술을 배운 후 아직까지 자신의 무술 실력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 가늠해 보지도 못했고, 또 해볼 기회도 없었다.
그만치 등개우는 무술을 모르는 무술인이었다.
그러다 지금 좌충우돌하며 즐비하게 토막낸 시체들을 볼 때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이었다.
흐뭇했다.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솜씨야!>
선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다 멈추어지는 자리에서 곧바로 다시 몸을 날렸다.
아무 곳이나 달려가서 눈에 띄는대로 토막을 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더 달려나갈 수 없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달려나오는 등개우를 적으로 오인한
부하들이 일제히 연환갑나를 쏘아대는 바람에 우선 몸부터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리쳐 멈추게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할수 없이 되돌아선 등개우는 지하실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지하실 입구는 입구대로 수라장이었다.?
어떻게 화살을 피하고 부하들의 저지선을? 뚫고 들어왔는지
여섯 명의 흑의 괴한이 심하림과 유원을 상대로 맹공을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큰 체구에 맞지? 않게 단검(短劍)을 움켜쥔 유원과 무기라곤 동덩이 하나 들지않은
하림을 상대로 흑의의 괴한들을 길이가 한발이 넘는 쇠뭉치들을 꼬나쥐고
연방 장풍(杖風)과 장풍(掌風)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이 집전한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듯 민첩하게 돌아가지 못하고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때, 등개우는 하림과 유원의 표정을 살폈다.
만일 그들이? 피로한 기색으로 열세에 몰려 있었다면 지체없이 개산도를 휘두르며
뛰어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심하림의 아름다운 얼굴이나 신도 유원의 큰 얼굴
그 어느 구석에도 땀 한방울 나지 않고 있었다.
우선 안심한 등개우는 한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유유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한 패의 남녀와 여섯 명의 장정이 휘몰아치며 싸우는 광경은 가히 볼만했다.
먼저 유원이 장풍을 일으키며 단검을 고추세우고 돌진해 들어가면 함께 뭉쳐있던
여섯 명이 양쪽으로 갈라서며 유원의 공격을 피하고 역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의 한 놈이라도 하림이 서 있는? 곳에 가까이 공격해 들어가면
하림은 하얀 손을 슬쩍 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림의 가냘픈 장풍을 얻어맞은? 괴한은 바로 뒷잔등에 큰 바위나?
지워주는 것처럼 앞으로 엎이질 듯 고개를 빼고 헐렁거리며 달려나가다
돌아서는 유원의 단검에 가슴이 찢기며 퍽!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그 반대로 하림이 두 팔을 나비처범 활짝? 펼치면서
강한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면 이번에는 가운데 몰린 괴한들이 일제히 장풍에 밀려 나가다가
눈을 딱 부릅뜬 유원과 마주서서는 쇠뭉치를 휘두르다 다시 한번 하림의 장풍을 맞고
중심을 잡지못해 비실비실 뒷걸음치던 동료의 몸뚱이에 부딪쳐 함께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높이 들었던 쇠뭉치를 처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높이 든채 자기의 머리 아니면 동료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 찍고는 박살을 내며
쓰러지는 것이었다.
한편, 등개우도 개산도를 급히 뽑아들었다.
그리고 장중에 쫓겨 비실비실 뒷걸음치는 괴한의 등에 갖다댔다.
순간, 아무것도 모르고 뒷걸음질 치던 괴한은 제풀에 등개우의 칼끝에 찔려 악! 소리를 지르며
혀를 내빼무는 것이었다.
그리고 싸움에 정신이 팔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동료를 다 잃어버린 것을 안 나머지
한 명의 괴한은 죽을 힘을 다해 쇠뭉치를 휘둘러 유원을 몇 걸음 비키게 하고는 도망갈 길을
뚫어 놓았다.
그리고 막 달아나려던 괴한은 앞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등개우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는
으악! 소리를 내며 무릎을 꺾는 것이었다.
그러자 등개우는 유유히 괴한의 뱃속을 뚫은 개산도를 뽑아냈다.
[언제 오셨소?]
유원이 활짝 웃으며 다가오고 하림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지금 막 왔소이다.]
[별일 없으시오?]
[저는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은 어떤지?]
[잘 모르겠소. 그럼 등형께서는 성벽으로 가보십시오. 우리는 대문을 지키겠소이다.]
[보중하시오.]
[등형도!]
각기 가벼운 걸음으로 달려나갔다.
묘 연 한?? 행 방
한편!
십여 명의 괴한을 천강지 수법으로 처치해 버린 양몽환은 그 길로 몸을 날려 대청으로 향했다.
대청 앞에는 벌써 누구의 손으로 처치되었는지 다섯 명의 괴한이 코를 땅에 박은채 쓰러져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쓰러진 것을 보아 등개우의 솜씨는 아닌 것 같았다.
그 동안 등개우의 무공을 직접 관찰할 수 없었던 양몽환은?
괴한의 시체를 토막내던 일을 생각하고는 입가에 쓴 웃음을 흘렸다.
<등개우......비범한 사람이야......날렵하고......>
양몽환은 자기 주위에 등개우같은 야무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지금까지 양몽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꽃처럼?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 뿐이었기 때문에 등개우의 출현을 더 믿음직스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주약란을 비롯해서 조소접, 심하림, 이요홍, 동숙정, 그리고 옥소선자......
양몽환은 좋은 친구를 얻었다고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대청의 앞마당을 지나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씽씽 장풍이 몰아닥치며 필살의 공방전이 한참이었다.
숨을 죽인 양몽환은 복면이 흘러내리지 않게 손질한 다음 싸우는 사람들을 살폈다.
흰옷의 넓은 옷소매를 흔들며 춤을 추듯 장풍을 일으키고 장검을 휘두르는 사람은
분명히 동숙정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여러명을 상대로 맹공을 가한 양몽환이 괴한들이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었던 것은
도대체 무술로써 상대가 되지않는 졸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동숙정의 경우는 달랐다.
삼음신니의 권보로 귀원비급에 버금가는 무공으로 단련한 동숙정이
자기의 무공을 다해 공격하고 있다면 상대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양몽환의 추측이었다.
역시 양몽환의 추측대로, 동숙정과 교전하고 있는 상대방도 무공이 놀라왔다.
청포(靑布)로 도사복처럼 옷을 걸친 상대방은 나이가 근 오십세로 보였고 흰 수염이 바람에 너울거렸다. 그리고 건강한 체구에 부리부리하고 옆으로 찢어진 무서운? 눈을 재빠르게 굴리고 있었으며
무기라고는 쇠로 만든 부채 뿐이었다.
그 부채를 펼치기도 하고 때로는 접기도 하면서 동숙정의 공격을 피하기도 하고
역습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권보로 무공을 익힌 동숙정의 공격은 가히 살인적(殺人的)이었다.
그때마다 청포노인의 부채가 펴졌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인 듯 언뜻 역습해 들어오지 않고
신중을 기하는 것이 보통의 솜씨가 아니었다.
얼핏 은광 속에 휘어드는 청포노인의 쇠부채인가 하면?
쇠부채의 강한 바람에 부르르 튕겨나오는 동숙정의 장검은 허공에서 춤을 추며
시퍼런 칼날이 사방에 번쩍이는 것이었다.
쇠부채가 다시 접혀지고 얼마간의 거리로 청포노인이 물러서면 동숙정 역시
몇 걸음 물러서시 다음 공격을 대비하는 것이 지금의 상태로서는 언제 승부가 날지 모를 일이었다.
동숙정은 그녀의 예민한 관찰력과 지략(智略)으로 상대방의 오른팔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상대방의 청포노인은 동숙정의 바른 발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즉, 동숙정이 무지개를 그으며 장검으로 은광을 만들면 재빨리 은광 속에서 벗어난
청포노인이 허리를 굽히며 동숙정의 발을 노리고 부채를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솜처럼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양몽환이 지켜보기도 어언 삼십여 합의
공방전의 불꽃을 튀었지만 그 전에는 또 얼마나 필사의 교전을 치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동안 전세를 관망하던 양몽환은 이제 나서서 동숙정을 도와 청포노인을 가로막고
나설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지금의 전세로 보아 피차 막상막하의 실력임에는 틀림없고 더구나 동숙정이?
피로한 기색도 없는데 뛰어든다는 것은 동숙정이나 상대방에게 달가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관전하기로 했다.
이때, 또 한번 자세를 가다듬은 동숙정이 왼손으로? 태산명동(泰山鳴動)의 매서운 수법을 이용해서
비호같이 달려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드디어 일격이 적중되었는지 청포노인의? 몸이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은듯 비틀거리면서
입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일그러진 입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말았다.
[으윽......]
그러나 다음 순간!
오른 팔 소매에서 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나오는 것을 힐끔 바라본 청포노인은 부채를 쫙 폈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뜨며 허리을 굽혔다.
그리고 상체를 어지럽게 흔들며 청포노인은 몸을 땅 위에 쓰러지 듯 엎드리며
동숙정의 두 다리 사이로 날쌔게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 바람에 두어 걸음이나 청포노인의 등을 타고 끌려가던 동숙정이?
살짝 재주를 넘어 앞으로 엎어지듯 미끄러져 나왔다.
그와 함께 동숙정의 오른 발에서도 역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중상은 아니어도 당장 아픔을 참느라고 이마를 찌푸린 동숙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와 반면에 오른 팔이 떨어져나갈 듯 격렬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참는 청포노인은
거의 기운도 쇠산해졌는지 호흡을 조절하며 눈을 딱 부릅뜨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설마설마하며 동숙정의 선전(善戰)을 빌고 있던 양몽환은
기어이 동숙정이 상처를 입자 관망만 하고 있던 자신을 뉘우치며 장검을 비껴들었다.
그리고 청포노인을 겨누고 달려나가려던 양몽환은 눈을 딱 부릅뜬 노인의 눈에서 핑!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저 날카로운 눈! 분명히 왕한상이 아닌가!
단혼애에서 미쳤던 천용방의 황기단주! 궁천건의 목숨을 빼앗으려던 바로 왕한상!>
양몽환은 그대로 몸을 날혀 왕한상에게로 달려들고 말았다.
[왕한상! 이 양모를 기억하고 있겠지?]
순간,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내던 왕한상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섰던 자리에서 한 길을 펄쩍 뛰며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흑의의 장정 두 명이 왕한상을 호위하며 양몽환에게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왕한상? 한 사람뿐인 줄 알았던? 양몽환은 약간 놀랐다.
그러나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두 명의 괴한을 노려보았다.
그때, 왕한상의 너털웃음이 터졌다.
[네가 바로 양몽환이렸다. 핫...... 하...... 죽지 않고 용케 살아 있었군!]
하고는 두 명의 괴한에게 명령하였다.
[저 양가놈을 죽여버려라!]
그 명령과 함께 두 명의 괴한은 좌우에서 동시에 장풍을 날리며 지쳐 들어오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장풍과 지풍이 소용돌이치며 섞여 들어가는 대청 안뜰은 험악한 공기로 질식할 것 같았다.
돌과 모래가 날고 날았던 돌이 아무데나 후드득 떨어지고 장풍과 지풍이 마주칠때마다
요란한 폭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양몽환의 대협다운 공격은 한 수, 한 수가 기기묘묘한 절수였다.
지풍을 날렸는가 하면 먹구름이 떼지어 흘러가듯 장풍이 뚤뚤 말린 채 올라가 두 명의 괴한을
허공으로 날려보내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괴한을 다시 지풍으로 쓰러뜨리고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이 날카로운 공격으로 맹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괴한들도 날쌔고 민첩했다.
양몽환의 장풍을 얻어맞고 한 길 높이로 몸이 떴다가 땅에 발이 닿을 듯하자
그대로 몸을 날려 육박전을 벌리는 것이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장풍이나 지풍으로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백병전을 벌려 두 몸이 한데 어울려 엎어지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했으며
두 명의 괴한을 한번에 쓰러뜨리고 잔등이며 어깨를 질끈질끈 밟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서 배운 무공인지 양몽환도 아직 보지 못한 괴이한 수법으로 인해
맞은편 벽에 엉덩이를 호되게 부딪치며 쓰러진 양몽환은 사태가 만만치 않은 것에 저윽이 놀랐다.
거의 절묘에 가까운 무공을 발휘하는 두 명의 괴한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조금 벅찬 감이 있으나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급히 숨을 조정한 양몽환은 또다시 질풍같이 달려드는 한놈의 괴한을 살짝 피해 스쳐가게 하는 순간
돌아서면서 괴한의 뒷덜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갑자기 뒷덜미를 움켜잡힌 괴한은 목이 졸리는지 캑, 캑!?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양몽환은 괴한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집어던졌다.
그러자 얼마의 사이를 두고 달려드는 나머지 한 명의 동료와 요란하게 부딪치며 쓰러졌다.
버둥거리며 일어나는 괴한들을 각기 한 손에 한 놈씩 움켜쥐고는 두 팔을 넓게 벌렸다가
이를 악물며 머리끼리 마주치도록 부딪쳐버렸다.
[어이쿠!]
[으윽!]
저마다 비통한 신음소리를 내며 손과 발을 요란스럽게 내저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더 한번, 더 한번 무려 네 번을 맞부딪치고
왕한상에게로 던졌다.
이때, 왕한상은 동숙적의 공격으로 오른 팔에 중상을 입고 운기 조식하며 부하들이
양몽환을 처치하기만 기다리고 서 있다가 양몽환이 집어던진 두 명의 부하가
일시에 자기에게로 달려오자 엉겁결에 옆으로 피해 간신히 충돌을 면하기는 했다.
그러나 왕한상과 충돌하지 못한 두 명의 괴한은 저마다 앞으로 엎어지듯
뒤뚱거리며 달려가다가 때마침 대청으로 뛰어오는 등개우의 개산도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순간, 왕한상은 목덜미가 서늘함을 느끼고는 급히 부채를 펴들고는 등개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형세는 독안에 든 쥐였다.
앞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개산도를 번쩍이며 눈에 불을 켠 등개우가 있고 뒤에는 양몽환이?
한 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는데는 재주가 용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게 된 왕한상이었다.
사태는 이미 기울어졌다.
그러나 오도 가도 못하고 쩔쩔 맬 왕한상은 아니었다.
왼 손에 쥔 부채를 힘껏 휘둘러 등개우를 몇 걸음 물러서게 한 왕한상은
[휘잉!]
소리를 내며 그대로, 성벽을 향해 몸을 날리고 말았다.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아차! 속았구나!>
틀림없이 공격해 올 줄 알고 개산도를 고쳐 쥐었던 등개우는?
그대로 개산도들 휘두르며 왕한상의 뒤를 쫓았다.
[이놈아! 게 섰거라! 개산도의 맛도 안보고 어딜 도망가느거냐!]
외치며 달려가는 등개우를 양몽환이 겨우 붙잡았다.
[등형! 그만해 둡시다. 저놈도 거의 얼이 빠졌을거요.]
[헛 참! 조금만 일찍 왔으면 한방 놓는건데......]
하며 걸음을 멈춘 등개우는 마악 성벽을 넘어가는 왕한상을 노려보며 그 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이놈! 한번 살려줬다!]
왕한상이 도망가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싸움은 끝났다.
여기저기 수 없이 깔린 시체들을? 점검하고 돌아오던 등개우는 부하들에게 명하여
피아(彼我)간의 사상자를 묻게 하고 양몽환에게로 돌아왔다.
그때 역시 유원과 심하림이 동숙정을 부축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수고를 하셨읍니다. 그런데 등형! 우리편의 사상자는 몇 명입니까?]
양몽환의 물음에 등개우는 씁쓸히 웃었다.
[적이 삼십칠 명, 우리편이 열일곱 명입니다.]
[그외에는?]
[가옥이 이십채, 그리고 가친이 조금.]
[가친께서?]
[예, 팔을 약간 다치셨읍니다.]
양몽환은 하림에게 동사매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명하고 급히 등개우와 유원을 앞세워
등고강에게로 달려갔다.
이때, 등고강은 어느 괴한의 쇠뭉치에 어깨를 맞아 살점이 조금 떨어진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두 명의 시녀가 약을 붙이고 있었다.
주먹을 쥐고 읍을 한 양몽환은 얼굴을 가렸던 복면을 풀며 조용히 등고강에게로 다가갔다.
[등선배님! 면목이 없읍니다. 보살피지 못해서 상처를 당하게 했읍니다.]
그러자 등고강은 소리 높여 크게 웃는 것이었다.
[헛...... 허...... 무슨 말씀을...... 이 늙은이가 일어나서 감사를 드려야지요.]
[네?]
[우리 등가보를 구해준 양대협님께 말이오. 헛......허......]
[네...... 부끄럽습니다.]
[이 늙은이 걱정은 조금도 마시오. 아직 힘깨나 쓸 줄 알았더니...... 나도 이제는 늙은 모양이오.]
양몽환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등고강 앞을 물러나왔다.
그리고 지하실로 걸음을 옮기는 양몽환은 머리가 무거웠다.
애초의 추측대로 오늘밤의 싸움은? 도옥의 지휘가 아니라
왕한상의 지휘였다는 것이 적중하기는 했지만 무슨 까닭으로 왕한상이 나타났을까 하는
의심과 오늘 무참히 패하고 도망간 왕한상이 언제 또 역습해올지 잠시라도 경계를 게을리하면
예기치않은 참상이 닥쳐오리라는 생각에 머리가 천근 만근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좌충우돌한 후라 몸도 피곤했고, 비록 잠재워 놓긴 했지만 중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는 궁천건의 신변이 염려되어 곧장 궁천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궁천건의 방문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이 문을 열면 어떠한 사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만일, 정말 만의 하나라도 불행하게 궁천건이 죽었다면......
내 죄다. 내 죄야, 그대로 놔두었던들......>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겁났다.
다시 한번 숨을 내쉬고 용기를 낸 양몽환은 소리나지 않게 궁천건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 어찌된 일인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 사태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눈이 갑자기 커지면서 창백해졌던 양몽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방문 앞에서와는 정반대로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만일을 염려했던 궁천건이 침대 위에 정좌(正座)하고 앉아서
눈을 감고 조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을 크게 뜨고 소리없이 궁천건에게로 다가간 양몽환은 가만이 궁천건을 불렀다.
[궁형!]
부르기는 했어도 궁천건이 눈을 뜨고 입을 열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때, 양몽환의 조용한 소리에 눈을 뜬? 궁천건은 어찌된 셈인지 힐끔 양몽환을 쳐다보고는?
싸늘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나는 운기 조식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디 나 혼자 있게 해주시오.]
너무나 뜻밖의 말에 양몽환은 쇠뭉치로 머릴 얻어맞은 듯 정신이 없었다.
순간, 양몽환은 너무나 생각 밖의 냉담한 말에 불쾌해지는 감정을 지그시 누르며
일단 밖으로 나와버렸다.
<이상한 일이군......
중상은 완전히 치료된 모양인데 왜 이맛살을 찌푸리며 불쾌해 하는 것일까?......
내가 치료할 때는 그토록 쉽사리 쾌유될 줄은 몰랐는데......
이상한 일이군......>
여기까지 생각한 양몽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양몽환 자기의? 치료로 궁천건이 완쾌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삼음신니의 권보에서 몇가지의 요상편을 읽고 치료해 보았으나
궁천건의 상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고작 아픔을 잊게 하는 수법만 써서 잠들게 하고 나왔는데
그것이 효력을 보았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궁천건의 증세는 중태였다.
<그렇다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혼란한 틈을 타서 궁천을 치료해 주고 몸을 감춘 것인가?
모를 일인데, 정말 모를 일이야...>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의문투성이었다.
대청 안으로 들어와 등고강의 상처와 동숙정의 상처를 돌보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등고강과 동숙정의 상처는 별로 깊지 않았다.
하루만 치료하고 안정을 취하면 쾌유될 수 있으리만큼 가벼운 상처였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헝겊으로 싸맨 등고강은 잠이 들어 있었고?
하림의 간호로 치료를 받고 있던 동숙정은 오랜만에 생긋이 웃어 주었다.
[동사매! 좀 어떠시오?]
[염려하지 마세요. 아주 가벼운 걸요.]
동숙정은 살점이 벗겨진 상처를 내려다보며 하림에게 미안해 했다.
[어떻게 하지. 심사매에게 수고를 끼쳐서.]
그러자 하림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서 낫기나 하세요.]
하고 하림은 양몽환을 보며 방긋 웃었다.
하림과 동사매의 미소를 받으면서도 양몽환은 궁천건의 돌변한 행동에 마음이 썩 편치않아
그대로 돌아서서 나오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목숨을 살리려고 애썼는데 궁형은 나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야.
내 마음을 이토록 몰라주다니......>
침실로 들어오는 양몽환은 자꾸만 이상한?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데다 등가보를? 순시하고 돌아온 등개우의 하는 말에 더더욱 아연해지고 말았다.
[양대협님, 좀 수상한 점이 있습니다.]
[무슨?]
[글쎄 말입니다. 양대협님과 제가 처치해버린 괴한이 삼십여 명 가량 되는 줄 알았는데
이십 명이 더 있읍니다.]
[그래요 등형이 쓰러뜨리지 않았읍니까]
양몽환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사실 양몽환 혼자서도 십칠 팔 명의 괴한을
쓰러뜨렸고 등개우 역시 십여 명을 쓰러뜨렸을 것이고 기타 백오십여 명의 부하들이
얼마의 괴한들을 쓰러뜨렸는지는 몰라도 합하여 오십여 명은 되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개우가 하는 말은 의외였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읍니다마는 쓰러진 시체들을 자세히 본즉
거의 모두가 무기나 화살에 맞은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상처 하나 없이
혈도가 짚혀 죽었더군요.]
[혈도가요?]
[네, 모두 혈도가 짚혀 죽었읍니다.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날렵한 고수가 우리를 도와준 것이 아닐까? 하는데......]
순간, 양몽환은 무엇인가 궁천건의 일가 일맥이 상통하는 것 발견할 수 있었다.
<음...... 분명히 누군지 모르지만 고수가 들어왔던 것이 확실하군......?
그렇지않다면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던 궁천건이 완쾌될리가 없고
또 이십여 명의 괴한이 혈도가 짚혀 죽을 까닭이 없지 않는가?
모르긴 해도 등가보 안에서 혈도를 짚어 목숨을 끊는 재간을 가진 사람은
나 하나 밖에 없는데......
나말고 그 누가 했을까?......>
양몽환은 더 의심하지 않았다.
분명히 누가 싸움터에 들어와 도와주었고 혼란한 틈을 타서 궁천건의 중상도 치료해 주었음이 확실했다.
[등형! 나도 이상한 점을 한가지 발견했소이다.]
[양대협님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렇소이다. 바로 궁천건 형입니다.]
[궁아저씨요?]
[그토록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던 사람이 감쪽같이 나아서 운기조식하고 있는 것을 보았소.]
[그야 양대협님이 치료하신 것이 아닙니까?]
[아니오, 나는 오직 너무 고통을 못이겨 신음하기에 혈도를 눌러 고통을 잊게 하고
잠들게 하였을 뿐이오.]
[그래요? 거참 이상한 일이군요?
궁아저씨가 완쾌되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읍니까?
그런데 도대체 누가 치료했을까요?]
[나도 그것이 의문이오. 등형의 말씀대로 이 십여 명이 상처없이 죽었고 궁천건 형이
완쾌되었다면 무슨 곡절이 있는 일이 아니 겠소?]
[하여튼 제가 가보고 오겠읍니다.]
그리고 지하실로 달려갔던 등개우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해가지고는 곧 돌아왔다.
[양대협님! 이런 변괴가 있읍니까?]
양몽환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도 놀라운 일만 벌어지는 것에 의아해 하고 있는중에 등개우가
전해주는 소식은 더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히 침대에 일어나 앉아 단정한 자세로 눈을 감고 운기 조식하는
궁천건의 냉대를 받고 나온지가 채 한시간도 안되었는데
궁천건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었다.
[뭐라구요? 내가 조금 전에 보았는데.]
[글쎄, 저도 방안에 있는 줄 알고 방문을 열었읍니다.
그런데 방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고 무엇인가를 싸놓은 보따리가 있을 뿐,
궁아저씨는 보이지 않았읍니다.
그리고 여기 이 서찰(書札)이 있었읍니다.]
하며 등개우는 네모 반듯하게 접은 사각 봉투를 내미는 것이었다.
[서찰?]
양몽환은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던 양몽환은
무슨 결심이나 한 듯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봅시다.]
사각 궁투 안에는 두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한 통은 양몽환에게 그리고 한 통은? 등개우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였다.
양몽환은 그중에서 등개우에게로 가는 편지를 건네어 주고 자기것부터 읽어 내려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양대협! 지금은 무슨 말이라도 할 때가 아니어서 이대로 떠납니다.
다시 인연이 있어 만나게 될 그때를 기약하며 떠나갑니다.
떠나기 전에 만나보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읍니다.
차후 기연(奇緣)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을 후회하게 될는지 그 반대인지는 아직 말하지 않겠읍니다.
다만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이 궁천건의 적(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보중하시오.? 궁천건>
내용으로 봐서 무슨 뜻이며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궁천건의 감정이 양몽환 자기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로 감정이 좋지 않아 이후에 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지
궁천건의 심적변화를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때 역시 편지를 다 읽은 등개우는 들었던 편지를 양몽환에게 건네주었다.
[모르겠읍니다. 이것을 좀 읽어보시오.]
양몽환은 급히 읽어 내려갔다.
<여러번 생각한 끝에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니 언제고 한번은 떠나야 했다.
그것이 조금? 일찍 돌아왔을 뿐이다.
생자이별(生者離別)은 인간 세상의 순리(順理)이다.
마땅히 가친 등선배님을 뵈옵고 떠나는 것이 도리인 줄은 안다만
내가 떠난다면 가친께서는 한사코 붙잡을 것을 염려해서 아무도 모르게 떠난다.
가친께 말씀 잘드려서 노여움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내가 쓰던 물건 중에서 몇? 가지를 남겨두었다.
내게 필요없기 때문이 아니라 꼭 필요한 물건이니 네가 잘 살펴서 쓰도록 하라.
내가 필요한 물건은 남도 필요한 법이다.
아무쪼록 가친을 잘 섬기고 보중하여라. 후일 다시 만나게 되면 반갑겠다.
그러나 한가지 내가 잊지 못하는 것은 가친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다.
마소(馬牛)의 일을 해서라도 은혜를 보답하려던 것이 조금 연기된 것이다.
가친을 잘 위로해 드리기 바란다. 바쁜 길이어서 길게 쓰지 못한다.
부디 보중하라.>
숨소리 하나없이 내려읽은 양몽환은 힘없이 편지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등개우가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일까요? 갑자기.]
[음......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오.]
[무슨 생각나는 것이 없읍니까?]
[글쎄 분명치는 않지만 우리가 싸우느라고 혼란한 틈을 타서 어느 고수가 들어와 괴한을
죽이고 지하실로 들어가 궁천건을 치료해 주고 협박한 것 같으오.]
[협박이라뇨?]
[중상을 치료해 주는 조건으로 궁천건의 몸을 요구한 것 같소.?
그래서 만일 명을 거역하면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중상을 치료해 준 사람의 은혜를 보답키 위해서
그의 부하가 되려고 했는지......그렇지 않고서야 어째 이곳을 떠나겠소?]
[모를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궁아저씨가 그렇게 줏대가 없는 사람같지는 않았읍니다.
의리가 있다고 보았는데요.]
[바로 그 의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중상을 고쳐준 사람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떠난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소.]
[그럼 도대체 그 고수는 누구일까요? 중상을 고칠 정도의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면?]
과연 등개우의 말대로 궁천건의 중상을 치료할 정도의 무공을 지녔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귀원비급을 터득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양몽환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귀원비급을 터득한 사람이라?......>
[물론 무공이 지고(至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고서는 매우 어렵습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여기서 잠깐 말을 끊었던 양몽환은 천천히 다음을 이었다.
[귀원비급을 터득한 사람이라야만 가능한 일인데
이 천하에? 귀원비급을 터득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
[귀원비급? 그게 누구 누구입니까?]
[우선 다정선자 조소접과 주약란 그리고 도옥입니다.]
[그럼 세 명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겠군요.]
[그렇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도옥은 자신부터 중상인 몸이고 더구나 동정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사람이 우리를 도와 괴한을 죽이고 궁천건 형의 중상을 치료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읍니다.]
[그렇다면 다정선자와 주약란 중에서 어느 한사람이겠군요.]
[옳습니다. 그런데 주약란으로 말하면 지금 행방이 묘연한 지가 벌써 육 년이 넘습니다.
그러한 주소저가 이곳에 나타날리도 만무입니다.]
[그러시다면 다정선자인 조소저라는 말씀인가요?]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도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밖엔 없읍니까?]
[한분 더 계십니다. 예전에 천용방에 속했었지만
곧 천용방을 떠난 묘수어은(妙手魚隱) 소천의(蕭天儀)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도 귀원비급을 터득하신 분인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의술(醫術)이 용하십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행방이 묘연합니다.]
양몽환의 말을 듣고 있던 등개우는 속으로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자기가 생각해봐도 그의 말이 옳은 다음에야
지금 강호에 나타난 사람은 도옥과 다정선자 두 명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도옥은 동정심이 없는 교활한 모사꾼이지만 중상중이라면 오직 다정선자인 조소접 이외에
그 누구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알겠읍니다. 틀림없이 다정선자가 들어왔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마는 증거를 잡을 수가 없읍니다.]
양몽환과 등개우는 서로 말없이 제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양몽환은 양몽환대로 궁천건과 조소접을 생각했다.
<조소저가 여기까지 와서 고이한 일을 하고 갔다면 무슨 일로 몸을 숨기고 은밀히 했을까......>
여러가지로 연결되는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는 반면, 등개우는 등개우대로 생각에 잠겼다.
<괴이한 일이야...... 사태가 심상치 않겠는데......
그건 그렇고 궁아저씨가 떠나갔다는 것을 가친께 알리면 노하실텐데 어쩐다지?>
사실 등고강은 궁천건을 아껴주었다.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와주고 보살펴주어서 친형제처럼 지내온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두편의 편지만 남기고 떠나갔다는 것을 알면 노하고 분통해할 것은?
너무나 명확한 일이었다.
그리고 만류해서 떠나지 못하게 하지 못한 등개우에게도? 꾸지람이 있을 것이었다.
얼마 동안 고민하던 등개우는 조용히 양몽환을 불렀다.
[양대협님, 궁아저씨가 떠나가셨다는 것을 가친께 말씀드려야겠죠?]
그러자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던 양몽환은 갑자기 정신이 들며 고개를 돌렸다.
[?.....................]
[만일 궁아저씨가 떠나가셨다면 상심하실텐데......]
[아직 말씀드리지 마시오.
그렇지 않아도 부상중인데 마음이라도 괴로와하시면 어떻게 위로하겠소?
차후 병세를 봐가면서 말씀드리도록 하십시다.]
[그렇게 하겠읍니다.]
등개우는 양몽환의 말대로 궁천건의 일을 가친 등고강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해두리라 다짐했다.
반 나 ( 半 裸 ) 의?? 여 인
궁천건이 떠나간 것을 비밀로 해두기로 한 양몽환과 등개우는 서로 말없이 한동안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던 등개우는 몇 시간 동안 얼굴을 볼 수 없는 유원을 생각해 냈다.
[유형님은 어디 가셨읍니까?]
그러자 양몽환도 잊었던 일이나 생각해낸 듯 화다닥 놀라며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
하며 걱정했다.
[어디 가셨읍니까?]
[좀 밖에 내보냈읍니다. 적정(適情)을 살피려고.]
하며 걱정했다.
등개우는 양몽환의 민첩한 처사에 내심 고개를 숙였다.
<...... 언제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었을까...... 과연 대협이군......>
하는 바로 그때, 성벽을 휘익! 넘어 들어오는 거한이 있었다.
순간, 개산도를 뽑아든 등개우는 벽력같이 소리치며 거한에게로 달려들었다.
[누구냐!]
소리와 함께 개산도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리는 등개우의 손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양몽환이었다.
[등형! 유형이 돌아왔읍니다.]
[옛? 유형이?]
들었던 개산도를 급히 거두고 거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등개우가 알고 있던 유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흑의의 장삼으로 발끝까지 내려쓰고 질끈 동여맨 머리의 수건 역시 검은 헝겊인데다가
얼굴에는 흙을 칠했는지 육십이 넘어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때, 거한이 등개우의 휘둥그래진 표정을 보고 우습다는 듯이 허리를 굽혔다.
[등형도 몰라보시는군요. 이만하면 변장에는 명수죠?]
하면서 수건을 벗고 도포를 벗는 것이었다. 그제야 등개우도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어이구. 영락없이 속겠읍니다. 그려......]
[하마터면 등형의 개선도에 목이 날아갈 뻔 했소이다. 하...... 하......]
서로 대소하는 한편에서 양몽환도 빙긋이 웃었다.
[지켜본 보람이 있읍니까?]
[예, 한발 늙어서 그런지 다정선자는 보지 못했지만 시녀들은 몇명 발견할 수 있었읍니다.]
[수고하셨소. 그런데 몇 명이나 되던가요?]
[다섯 명이더군요.]
[나의 추측이 맞는군요. 아마 다정선자는 우리들의 눈을 피해 먼저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제야 양몽환과 유원의 대화를 듣고 알았다는 듯이 등개우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읍니다. 그러니까 다정선자가 시녀들을 이끌고 와서 도와주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굳이 도움을 받지 않아도 물리칠 수 있었는데 ......]
[그런데 양대협님! 다정선사가 우리들을 도와준 것은 양대협님이 계시니까
도와줄 수도 있었겠지만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궁천건 아저씨를 치료해주고
또 이곳에서 떠나게 한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혹시 예전부터 안면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않소?]
[없읍니다. 제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전에 다정연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했을 때도
궁아저씨는 거짓말이라고 믿지도 않았읍니다.
천하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까지 했읍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달라지는군요.]
[달라지다 뿐입니까? 제 아무리 용한 다정선자라 해도 어떻게 지하실 속에 있는
궁아저씨를 그것도 중상이라는 것을 알고 치료해 주었겠읍니까?
더구나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사이에 그토록 큰 은혜를 베푸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믿기지 않아도 사실인 것을 어찌 하겠소??
하여튼 사나흘 지내봅시다. 그러면 무슨? 기별이 아니면 사건이
일어나 내막을 알게될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글쎄요.]
그러는 바로 그때에 맞은편 고목에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한개의 화살이 날아와 꽂히는 것이었다.
[뭐야?]
먼저 등개우가 소리치며 개산도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유원이 고목에 꽂힌 화살을 가리키며 가만히 외치는 것이었다.
[양대협님! 저게 뭡니까?]
하는 말애 양몽환도 꽂힌 화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고목에 푹 꽂힌 화살 한끝에는 흰 종이가 둘둘 말려져 있었다.
급히 달려간 유원이 화살에서 종이를 풀었다. 서찰(書札)이었다.
성벽으로 올라가 사방을 휘둘러보고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등개우가
다가오고 양몽환이 다가왔다.
그때, 화살에서 서찰을 떼어 낸 유원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서찰입니다.]
[서찰? 누가 보냈읍니까?]
[양몽환 전(前)이라고 쓰여 있읍니다.]
[그래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아무도 모를텐데......]
양몽환은 유원이 전해주는 서찰을 받아 폈다.
그곳에는 익숙한 솜씨로 갈겨 쓴 붓글씨가 있었다.
<오늘밤 이경(二更) 동쪽 십리 지점에 있는 고가(古家)로 오시오.
오실 때는 혼자 오면 좋겠읍니다.>
간단한 사연과 약도를 그려 놓았을 뿐 누가 보낸다는 서명은 없었다.
[무슨 사연이 있읍니까?]
등개우가 조심스러운 듯이 묻자 유원도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보냈읍니까?]
[뭐, 별 것 아닙니다.]
양몽환은 주머니에 서찰을 넣으면서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누가 무슨 일로 만나자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혼자 오라고 할 때에는 어느 정도 긴요한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등개우나 유원에게는 알리지 않고 말았다.
어떤 흉계가 있다면 자신의? 무공으로서 능히 이겨낼 자신이? 있는 양몽환이었다.
양몽환은 화제를 돌렸다.
[가친께서는 차도가 있으십니까?]
[네. 거의......]
[그럼, 저도 동사매를 봐야겠읍니나.]
하고 양몽환은 등개우와 유원을 남겨두고 먼저 걸음을 옮겨 동숙정의 방으로 갔다.
동숙정은 하림의 지극한 간호로 상처가 나아가고 있었다.
[고생이 많습니다. 동사매!]
[심사매의 덕이에요.]
[언니도......]
한편에서 낯을 붉히는 하림에게 정다운 미소를 보내고는 곧장 거처로 돌아와 운기 조식을 취했다.
한편, 그것이 비밀이라는 것만 눈치챘을 뿐 아무 이야기도 하지않은 양몽환에게?
무슨 일이냐고 캐어묻기를 단념한 등개우나 유원은 각기 거처로 돌아가 운기 조식하고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웅후한 내공과 진기로 운기 조식한 양몽환은 침대위에?
단정히 정좌(正座)하고 밤 이경(二更)을 기다려 등가보를 나왔다.
교교히 달빛이 황막한 들판을 은은히 비쳐주고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 부딪쳐
살벌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밤길을 양몽환은 혼자 걸어갔다.
서찰에 자세하게 표시된 고가(古家)가 십리 길이 넘을 듯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먼 빛으로 보였다.
촛불을 켜 놓았는지 아니면 기름 횃불을 켜 놓았는지 부우연 불빛이 어렴풋이 보였다.
짐작으로 양몽환은 그곳이 서찰에 표시된 고가이며 그곳에서 누구인가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누가 무슨 일로 이 황량한 들판에서 그것도 고가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양몽환은 자기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더구나 자기가 등가보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기 때문에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도 극히 적었다.
<조소저? 도옥? 궁천건? 그도 아니면 새벽녘에 성벽을 타고 도망간 왕한상일까?>
이들 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막상 누구라고 짚을 수는 없었다.
고가의 문을 열어보기 전에는 예측할 길이 없었다.
멀리 보이던 고가가 눈앞에 다가오고 거리가 점점 좁혀지므로서 양몽환의
마음 속에는 약간의 긴장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집 문앞에까지 접근했다.
동정을 살피리라하고 접근했지만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희뿌연 불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고가는 얼마나 오래된 집인지
거의 기둥은 썩어 있었고 곰팡이 냄새와 매캐한 먼지만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방문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양몽환은 방안에서
자기의 동정을 살피기라도 한듯 날카롭게 터지는 소리에 주춤 한걸음 물러섰다.
[어서 들어오지 못하고 왜 그러고 섰죠?]
분명히 조소접의 목소리였다.
순간, 양몽환은 잠시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힘있게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양몽환의 눈에는 번쩍 불이 켜지고 말았다.
방안에 펼쳐진 광경은 양몽환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히 조소접이었고 도옥이었다.
속살이 다 비치는 속옷만을 걸친 조소접이 도옥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열심히 뺨을 비벼대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홱 돌아서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더러운 년! 날 무엇으로 알고...... 여기까지 오라고 한 것이 그 꼴을 보이기 위해선가......>
하는데 안에서 조소접의 노한 음성이 터졌다.
[들어오지 못하겠어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
양몽환은 아무말 없이 걸음을 옮겨 등가보로 향했다.
<무슨 심산으로 나에게 그 꼴을 보여주는 것일까?
간사한 도옥의 계략에 조소저가 빠졌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에게 어떤 암시를 주는 것일까?
만일 조소저가 도옥의 계략에 뼈졌다면...... 그래서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면?>
그때야말로 천하의 무술계에는 대참사가 벌어진다는 것을 양몽환은 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귀원비급을 일찍 터득해서 천하에 거칠 것이 없는 조소접과 역시 궈원비급을 터득한
도옥이 그 간사한 계략으로 조소접을 움직여 서로 힘을 합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일대 비극이 벌어질 것이었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는 강물이 되어 광활한 천지를 피로 물들이게 될 것이었다.
두렵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변절자(變節者)! 배반자(背反者)! 자꾸만 양몽환은
지금 마악 보고 온 요염한 자태의 조소접을 생각하며 침을 탁 뱉았다.
<무서운 여자! 도옥의 무릎 위에서 반나(半裸)의 몸으로 도옥을 녹이고 도옥은
도옥대로 조소저를 감언이설로 꼬여 자기 소유로 만들고...... 에잇! 생각하기도 싫구나!>
다시 한번 침을 탁 뱉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의 손에 팔목이 잡힌 양몽환은 후딱 돌아섰다.
그러자 그곳에는 여전히 속옷 바람의 조소접이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노려보고 있었다.
[조소저!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정신이 나가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그토록 도옥을 미워하던 조소접이 온전한 정신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일을 더구나 양몽환 자기 앞에서 감행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이러한 양몽환의 생각을 실증(實證)이나 하는 듯 조소접의 말은 너무나 차갑고 날카로왔다.
[당신이 뭔데...... 흥! 상관할 바 없어요. 앞으로 상관하지도 말아요.
그러나 한가지 오늘밤은 내가 오라고 불렀어요. 남자답게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명령인가요? 나도 이제부터는 조소저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안 듣겠다는 말인가요?]
[물론!]
[흥! 도도하시군!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어요.]
점점 사태는 묘하게 변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조소접과 도옥이 만나게 되었으며,
어떠한? 관계로 둘의 사이가 반나체로 비비게 되었고 또 어떠한 곡절로 조소접의 태도가?
양몽환 자기를 적대시하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분명히 도옥의 계략에 빠진 것은 확실하지만 영리한 조소접의 정신이
이토록 돌았을 때는 대단한 계략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었다.
그러나 조소접이 무슨 뜻이 있어서 오늘 만나자고 했는지 들어보고 싶기도 했다.
앞으로 적이 되든 어쨌든 무슨 곡절로 이 모양으로 적대시하는지 그 연유라도 알고 싶었다.
[죽인다구요? 핫...... 하...... 그렇게 만만히 죽어줄 것 같소?
어떤 계략으로 도옥에게 사로잡혔는지는? 모르지만 조소저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바요.
겨우 오라는 것이 도옥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조소저를 보이기 위해서였소?]
지금까지는 조소접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아온 양몽환이었다.
그러나 죽을때 죽더라도 더 이상 여자의 도움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최대의 적인 도옥과 손을 잡은 조소접이 아닌가?
어깨를 펴고 돌아선 양몽환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자 조소접은 차가운 시선으로 양몽환을 노려보며 아미를 좁혔다.
[흥! 큰 소리를 치는군요. 도대체 누구를 믿고 큰 소리죠?]
[이 양몽환은 일찌기 누구를 믿은 바도 없소.
지금까지 조소저의 인품으로 봐서? 오늘 이 사태는 심상치 않소. 매우 섭섭한 일이오.]
[섭섭한 것은 나에요. 당신은 주약란 언니가 있으니까 큰소리겠지만.]
[주소저를 끌어들이지는 마시오. 나는 어디까지나 나 혼자요.]
하는데 언제 따라 나왔는지 도옥이 조소접에게로 가서 작은 소리로 귓속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소접은 도옥의 손을 꼭 쥐며 그의 가슴을 파고 안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양몽환을 돌아보며 턱을 치켜 세우는 조소접이었다.
[왜 보기 싫으세요? 보기 싫으면 보지 마세요. 누가 보랬나?]
양몽환은 더 이상 서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홱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양몽환의 등을 대고 쏘아붙이는 조소접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가지 충고하겠어요.
지금까지는 주약란 언니의 얼굴을 봐서 그냥 놔 두었지만 앞으로는 용서없어요.
당장 내일 부터라도 무술계에서 손을 떼고 조용히 살도록해요!]
멈칫 돌아섰던 양몽환은 그대로 등가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다시 조소접의 음성이? 뒷등을 때렸다.
도옥! 빨리 해치우세요. 지금이 좋은 기회예요.]도옥의 품에 안겨 도옥에게 하는 말이었다.
귓등으로 흘려버리려던 양몽환은 더 이상 참고?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음! 너희들이 제일 귀찮은 나를 처치하고 둘이서? 천하를 쥐고 흔들 계략이로구나!
그렇다면 이대로 그냥 갈 수 없지. 도옥 아니면 조소접 둘 중의 하나라도 죽이고
나도 죽는다면 아니 도옥을 죽이고 내가 죽는다면 천하는 태평하겠지......>
필사의 각오로 양몽환이 돌아서는 순간과 도옥이 달려드는 순간과는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양몽환의 뒷등을 노리고 힘껏 달려들던 도옥은 갑자기 돌아서는 양몽환과 여지없이 충돌하고 말았다.
만일 양몽환이 죽을 결심을 하지 않고 그대로 힘없이 돌아서는 순간에 충돌이 되었다면,
그것으로서 천하는 도옥과 조소접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도옥과 조소접에게는 불행하게도 양몽환이 잔뜩? 운기하고 진기를 모았던 순간이었다.
[꽝!]
피차 내공이 중후한 고수끼리 부딪치자 둔탁한 소리를 내며 양몽환과 도옥은
한덩어리가 되어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양몽환의 강한 내공에 그야말로 강하게 부딪친 도옥이 힘이 빠졌는지
아니면 완전히 운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는지
조소접의 상상을 뒤덮고 도옥이 양몽환의 밑에 깔리고 말았다.
순간, 조소섭은 쏜살같이 달려와 깔고 앉은 양몽환을 쓰러뜨리고 도옥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닌가!
양몽환의 눈에서는 핏발이 곤두서고 부드득 이가 갈렸다.
<좋다. 비록 궈원비급을 터득하지는 못했다만 도옥과 생사를 같이해서 조소저!
네 가슴을 쓰리게 해주마!>
이를 악물고 양몽환은 체내에 있는 내공을 총집중시켜 금방 일어나서는 공격 태세를 갖추는
도옥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
갑자기 황막하던 벌판에 장풍과 지풍이 맞부딪치고 살벌한 기운이 갑도는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천강지의 수법을 여지없이 발휘하는 양몽환의 공격과 건원지(乾元指)의 수법을 발휘하는
도옥의 수법과는 그 성능이 거의 엇비슷해서 아차하는 날이면 중상이나 생명을 잃고 마는
극치의 악랄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서로 무공이 강한 양몽환과 도옥은 그만큼 서로의 몸을 지탱하며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얼마 동안 몸을 피하며 건원지와 천강지의? 강한 지풍을 교환하던 양몽환은 전법을 재빨리 바꾸었다.
잠력(潛力)이었다.
두 손바닥에 모인 잠력을 힘껏 휘둘러 도옥의 몸이 어쩔 수 없이 양몽환에게로 다가오게 한
다음 오른 발을 높이 들어 도옥의 가슴을 힘껏 밟으려고? 하였다.
순간, 양몽환의 강한 잠력을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오던 도옥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끌려가다가는 양몽환의 발길에 박살이 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미행(五迷行)법을 발휘하여 자기 몸을 다섯개의 그림자로 만든 다음
양몽환의 눈을 혼란시켜 겨우 일격을 피했다.
그리고는 자기도 잠력을 이용하여 양몽환의? 잠력을 후려갈기고 반대로 양몽환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때
이미 예기하고 있던 양몽환은 그의 잠력에 끌려가면서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끌려가는 척? 하다 더욱 속도를 가해 힘껏 달려가 그대로 도옥과 정면으로 충돌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순간, 살기가 충천한 하늘에는 또 한번 몸뚱이와 몸뚱이가 마주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끝난 것이다.
도옥은 도옥대로 양몽환은 양몽환대로 네 활개를 편채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내공이 강한 상대들이라 중상은 면했지만 당장은 운신도 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상처를 각기 입은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기운이 쇠진해서 쓰러진 양몽환은 속으로
<이러면 내가 죽지, 이러면 내가 죽지...... 일어나야지...... 그래서 도옥을......>
하면서도 꼼짝달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죽음 직전에서 헤매던 양몽환은? 있는 힘을 다해 운기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깨, 허리, 팔, 다리 어느 부분 할? 것없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참을 길이 없었다.
꽉 다문 어금니 사이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 참고 또 참았다.
그러던 양몽환은 다시 한번 무엇인가 날카로운 쇠붙이가 자기 몸을 쑤시는 듯한 생각이
머리 속을 뚫고 지나갔다.
그것은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조소접의 손가락 하나면
자기의 목숨은 끊어지고 만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순간, 홱! 정신이 들었다.
<이 자리를 피하자>
아픔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눈을 떴다.
그리고 땅을 짚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뼈마디가 바스러지는 아픔이 격렬했다.
그러나 그래도 쓰러지면 끝이라 생각하고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그러자 다른 한편에 역시 쓰러져 있는 도옥을 발견했다.
더구나 그 옆에서 열심히? 도옥의 혈도를 풀어주고 있는 조소접을 발견했다.
그러자 이때가 기회다라고 생각한 양몽환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이때, 조소접은 양몽환이 일어났는지 어쨌는지에는 정신이 없는 듯
도옥을 열심히? 주무르며 혈도를 풀어주고 있었다.
우선 도옥부터 살려야 할 것이 급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소접의 무릎 위에서 정신이 든 도옥은 조소접의 목을 끌어안았다.
[양가놈은 어찌 되었소?]
도옥이 묻는 말에 그제야 정신이 난 조소접은 급히 사방을 휘둘러 보았다.
그러나 그 사이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도망갔군!]
여전히 조소접의 목을 끌어안은채 도옥은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정작 도망간 양몽환보다는 자기 손아귀에 들어있는 조소접이 더 소중한 도옥이었다.
<됐어...... 됐어. 이렇게 살살 꼬여서 내것으로 만들면 천하가 다 내 것이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 도옥을 힘껏 안고 있던 조소접은 뜨거운 입김을 쏟아 놓으면서
어리광을 부리듯 했다.
[그따위 하나 처치 못하면서 어떻게 나하고 천하를 손아귀에 넣겠어요......]
[두고 보시오. 꼭 내 손으로 양가놈을 죽이고 조소저와 행복하게 살테니......]
[하긴 그래요. 서두를 것 없어요.
오늘 죽이지 못하면 내일 죽이고 내일 죽이지 못하면 모래 죽이면 돼요.]
[하여간 나에게 맡겨 두시고 우선......]
하면서 도옥은 조소접의 상반신을 끌어 입술을 찾았다.
그러자 조소접도 그의 입술을 더듬으며 꼭 껴안았다.
그 순간, 도옥은 동숙정을 생각했다.
그녀와의 황홀하던 순간이 휙! 지나가자 그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렇지. 지금 이 시각에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이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을 것 같았다.
점점 음침한 생각이 들며 가쁜 숨을 물아쉬던 도옥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러자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흥분에 들떠 있던 조소접은 도옥의 손을 잡아채며 발딱 일어났다.
[안돼요!]
너무나도 흥분에 도취되었던 도옥은 갑자기 일어나며 외치는 소리에 그만 기가 죽어버렸다.
얼굴을 돌릴 수 없는 수치감에 도옥은 잠시 고개를 숙인채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이때, 헝클어전 머리를 매만진 조소접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눈을 부릅떴다.
[당신같이 음침하고 나쁜 짓을 하려는 사람과는 같이 일할 수 없어요.]
조소접 역시 한때나마 입술을 비비며 몸을 뒤틀던 것이 부끄러운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자태를 감추고 말았다.
너무나 어이없이 단꿈이 깨진 도옥은 맥이 탁 풀렸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도 않아 그대로 벌렁 누워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핫...... 하...... 지금은 그냥 두었다만 언제든 내 품에 안길 날이 있을거다......
한다면 꼭 해치우는 이 금환이랑 도옥을 조소저도 알고 있겠지......
핫...... 하...... 시간 문제지......]
혼자 외치며 웃는 도옥의 목소리가 멀리 퍼져가고 주위는 다시 정적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무협지 > 풍우연귀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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