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12. 흑심 ( 黑 心 )

오늘의 쉼터 2014. 10. 23. 11:37

12. 흑심 ( 黑 心 )


 

 

 

앞장선 등개우가 저택의 문을 열자 넓은 정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고

주위에는 여러가지의 이름모를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동충(東忠)은 어디 갔느냐?]


문을 열고 몇 걸음 옮기던 등개우는 누군가를 불렀다.

아마도 하인인 모양이다.

그러나 등개우가 찾는 동충은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 몇 번을 불러서야 겨우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늙은이의 소리였다.


[등소보주께서 오셨읍니까?]

하는 소리가 먼저 들리고 그 뒤로 오십세 정도의 노인이 나타났다.

등개우를 본 노인은 급히 허리를 굽혀 읍하며 인사를 했다.

[소보주님, 원로(遠路)에 별고 없었는지요.]

[별고는 없소만 어찌 이렇게 조용한가?]

[예,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왜 조용한가를 물었는데.]

사실 등개우의 말대로 주위가 너무나 조용하고 문지기 한사람 없는 것에

 

양몽환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던 중이었다.

등가보의 주인이 기거하는 저택이라면 으례히 문지기가 있을 것이오.

 

아니면 동자(東子)라도 있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음을 양몽환이 모를리 없었다.

 

그러나 등개우가 몇번 소리쳐 불러서야 그것도? 늙은 하인이 꾸물꾸물 나오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늙은 놈이 무엇을 알겠읍니까마는 이것은 대보주님의 명이십니다.]

[음......그래서 조용하단 말인가?]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곳에서 어물거리거나

 

또, 주위에 있는 물건을 만지지 말라는 명이십니다.]

[알았소. 돌아가 볼 일을 보시오.]

그러자 동충은 눈을 크게 떴다.

[소보주님께서는 어디로 가시겠읍니까?]

[아버님께!]

[그럼, 안내하겠읍니다.]

[필요없소.]

[아닙니다. 보주님께 가시려 해도 땅을 잘못 밟으시면 큰일 납니다.]

[뭐라구?]

[땅도 아무 곳이나 밟지 말라는 명이십니다.]


그러자 동숙정이 양몽환에게 나가오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상하군요. 아마 독(毒)을 바른 모양이죠?]


[글쎄,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만지거나 밟지 못하게 하는 모양입니나.]


하고 등개우를 바라보았다.


이때, 등개우는 매우 기분이 안 좋은듯 미간을 찌푸리며 하인 동충에게 말했다.


[알았소. 앞장서시오!]

[그러시면 소보주님과 여러분께서는 이 늙은이가 밟은 곳만 따라 밟고 오십시오.]


하고는 앞장을 섰다.

그 뒤로 등개우, 양몽환, 심하림, 동숙정 그리고 맨 나중에 유원이 따라왔다.

넓은 뜰을 가로 질러 노인이 밟은 곳만 골라 짚으며 육 칠마장쯤 오자

 

어찌된 셈인지 토산(土山)이 가로 막았다.

 

더 나갈 길도 없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토산까지 안내한 노인은 다시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읍하고는 물러가는 것이었다.

[그럼, 물러가겠읍니다.]


[수고했소!]

노인이 돌아가자 앞에 섰던 등개우는 바로 눈앞에 있는 토산을 훑어보고는 돌뿌리가

 

삐죽 나온 곳으로 한 걸음 옮겨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돌뿌리를 가만히 밀었다.

그러자 그 돌이 옆으로 밀리며 큰 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실로 감탄할 일이었다.?

 

 영락없는 흙이요,

 

돌인데 흙과 돌이 한쪽으로 밀리며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들어갈 수 있을만큼

 

큰 문이 되며 열려지는 것이었다.

[자아, 그럼 들어갑시다.]

그때까지 눈을 크게 뜨고 이상한 변화에 감탄을 발하는 양몽환 일행을 돌아보며

 

등개우가 하는 말이었다.

등가보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의문 투성이였고 새로운 변화에 감탄만 연발하고 있던

 

양몽환은 밀려나는 문을 바라보다 등개우의 말에 얼얼하던 정신을 되찾고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부터 길은 지하도(地下道)였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횃불을 달아놓아 길을? 비쳐 줄 뿐 캄캄한 땅 속의 외길이었다.

 

그리고 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명의 장정이 장검을 메고 길 양편에서? 파수를 보고 있다

가 등개우가 지나갈 때마다 공손히 읍하는 것이었다.

 

지하도를 얼마 동안 걸어가자 눈? 앞이 환해진다고 여긴 곳에 넓은 방이 있었다.

 

돌아가며 햇불을 달아 방안의 어둠을 밝게 밝혀주는 넓은 방 한가운데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옆에 단검(短劍)을 찬 장정이 두 손을 모은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앞장선 등개우는 양몽환 일행을 세워 놓으며 돌아섰다.

[양대협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돌아오겠읍니다.]


그리고는 노인 앞으로 다다가 공손히 읍하고는 작은 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등개우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만류한 모양인지 그대로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등개우는 조용히 노인 앞을 물러나 양몽환에게로 다가왔다.

[양대협님! 저의 가친이십니다.]

[안내하십시오.]

등개우의 안내로 노인 앞에까지 다가간 양몽환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등보주님! 안녕하십니까?]

그러자 등보주도 일어나 두 손을 맞잡으며 답례했다.

[대협께서 이처럼 찾아주셔서 영광이오.]

[부끄럽습니다.]

[진정으로 하는 말이오. 이쪽으로 편히 앉으시오.]

이래서 수인사가 끝난 등보주와 양몽환은? 등보주가 권하는 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들은

 

양몽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일행이 앉기를 기다려 등보주는 다시 등가보를 찾아준 데에 대해 거듭 인사를 했다.

[대협께서 누추한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겠소.

 

미리 알았더라면 영접이라도 나갔을 것을...... 미안한 일이오.]

[등 선배님께서는 너무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아니오. 나는 원래 성질 탓인지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오.

 

양대협께서 이곳에 오신 것을 전정으로 환영하는

 

나의 표현이 제대로 안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반갑소.]

[감사합니다. 그러하오나 너무 과분하신 말씀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헛...... 허......? 과연 듣던 바대로 인덕과 겸손이 있으신 대협이시오.

 

이 늙은이의 이름은 고강(固强)이라 하오마는 이름 그대로 등가보만 지키다 보니

 

무술계의 대협 어른을 찾아보게도 되지 않소 그려.]

[감사한 말씀입니다. 무술계의 선배님들께서 염려해 주신 덕인가 하옵니다.]

[고맙소. 그런데 이 늙은이를 애비로 가진 저놈 개우(開宇)는

 

날 닮지 않아서 그런지 성질이 좀 다르다오.


대협께서 잘 살펴주시오.]


[천만에 말씀을...... 저는 등형을 존경하고 있읍니다.

 

무술계에 등형 같으신 분도 몇 분 없는 줄로 알고 있읍니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소. 어쨌든 고마운 말씀이오. 그런데 양대협께 한 분을 소개하겠소.]

하고는 옆에 단검을 차고 있는 젊은 선비 차림의 장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번 우리 가문의 액운을 구해주신 분이오.]

하는 소개말이 끝나자 선비 차림의 장정은 한 걸음 나서며 주먹을 쥔 손을 마주 잡고 읍하는 것이었다.


[궁천건(宮天健)이라 하오.]

양몽환 역시 주먹을 쥐고 읍했다.

[양몽환이오.]

궁천건과 양몽환의 수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등보주는 만족한 웃음은 지어 보이며 양몽환을 불렀다.

[양대협께서는 혹시 궁(宮)형의 성함을 들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양몽환은 전연 들은 바도, 또 븐 바도 없었다.


[견문이 좁은 탓인지 듣지 못했읍니다.]

 

[그럴 것이오. 그러나 내가 이야기를 하면 아마 알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등보주는 궁천건과 양몽환을 번갈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혹시 조화서생(造化書生)이라는 이름을 양대협께서는 들으신 적이 있느지......]

[글쎄요......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저의 장인(丈人) 어른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고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는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궁천건이 양몽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바로 천용방의 방주이신 해천일수(海天一 ) 이창란(李滄瀾)이 장인어른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궁형께서는 저의 장인어른을 잘 아십니까?]

[별로...... 그저 하도 고명(高名)하신 분이니까 이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만나? 본 일도 없지요. 그러나 옛날 천용방의 황기단주(黃旗壇主)였던 왕한상(王寒湘)과는

 

친분(親分)이 있는 사이입니다.]

양몽환은 궁천건이 어려서 무엇을 했으며 또 지금은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잘 안다는 왕한상은 양몽환도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위세가 당당하던 천용방!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지만 가끔 천용방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천용방! 단혼애에서 생사를 겨루었던 일대 격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든가.

 

그리고 궁천건이 안다는 그 왕한상! 오기단주 중에서 제원동(齊元同)과 최문기(崔文奇)는

 

결전장에서 죽고 그때 미쳐버린 왕한상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과거였다.

[궁형께서는 지금 왕한상과 내왕이 있으신지요?]

이왕 나온 말이니 그의 뒷소식이라도 알고 싶은 생각이 났다.

 

하기야 살아서 무엇을 하든 말든 상관이야 없지만 옛날의 적수였던 왕한상이고 보면

 

무심결에 귓전으로 흘려버릴 이야기는 아니었다.

궁천건은 땅이 꺼질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내왕이요? 흠! 세상에 그놈처럼 악독한 놈이 또 있겠읍니까?]

[친분이 있으시다면서 약독하다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하는 말에 궁천건의 노기를 띄운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친분, 그것도 친분이죠. 그러나 내 목숨을 뺏으려는 친분이었지요.]

무슨 깊은 원한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것 같았다.

 

이처럼 말을 못하고 분노에 떠는 것을 보고 있던 등강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양대협! 사실 여기 있는 궁형은 참으로 운명이 기구한? 사람이오.

 

나는 여기 궁형이 아니었다면 지금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오.

 

하여간 기가 막힌 사람이오.]

하고 무슨 사연이 기막힌지 한숨까지 섞어가며 하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등형님도...... 형님께서 이 아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제가 죽을 때까지 마소(馬牛)의 일을 해도 갚지 못할텐데...... 몸둘 곳이 없읍니다.]


하고는 잠시 말을 끓었다가 양몽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혹시 양형께서 궁금히 여기실까 싶어 이야기를 하겠읍니다만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길지요.]


[무슨 이야기인지 제가 들어서 상형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읍니다.]


궁천건은 얼마동안 고개를 들고 한쪽 벽에 꽂힌 횃불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십년전 일입니다.......]

일찌기 훌륭한 스승을 만나 무공을 터득한 궁천건은 많은 사람들이 심한 중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岐路)에서 헤매는 것을 보고 단 한알의 약으로써 생명을 구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곰곰이 연구했다.

 

그러던 중 스승에게서 기독(奇毒)이 뱀을 잡아 아흔 아홉가지의 원료와 배합하여 만들면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영약(靈藥)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궁천건은 아흔 아홉가지의 약초(藥草)를 채집해서? 단단히 보관한 후

 

기독뱀(奇毒蛇)를 잡기 위하여 운남성(雲南省)에 있는 야로산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이 기독뱀이 깊은 산, 습한 곳에 더구나 사람의 인적(人跡)이 없는 곳에서 살고 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야로산이 운남성에 있다는 말만 들었지 어느 방면으로 또 어느 길을 가야

 

야로산에 닿는지도 모르는 궁천건은 걸어서 꼭 백일(百日)만에 지나는 사람에게 묻고

 

또 물어서 겨우 산어귀에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 길을 떠날 때는 찌는듯한 더위가 한창이었으나 궁천건이 야로산에 도착했을 때는

 

낙엽이 지고 바람도 서늘한 가을이었다.


일찌기 먼 길을 일이 없는 궁천건은 발이 부어 터지고 심한? 피로에 지치는등

 

수 많은 역경도 많았으나 오직 영약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걷고 또 걸어

 

야로산에 닿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전개되는 야로산의 험한 준령은 그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산세가 어찌나 험한지 깎아지른 듯한 바위와 절벽 그리고 사람의 왕래가 없음으로 해서

 

쌓인 낙엽이 키를 넘고, 습지가 있는가 하면 울창한 나무와 무성한 잡풀의 연속이었다.

 

 애초부터 길도 없었겠지만 궁천건이 보는 야로산은 실로 험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단념할 수는 없었다.

 

이제 천신만고해서 도착한 야로산 입구에서 험한 산세에 의욕을 잃고 돌아선다는 짓은

 

궁천건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기독뱀을 잡기 위해서 이 험한 산과 마주 서서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죽을? 고비도 있겠고 사나운 짐승을 만나기도 할것이다.

 

그러나 영약만? 만든다면 비명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죽는 사람을 죽음 앞에서 살려낸다는 것 그 한가지만으로도 궁천건은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험한 산과 마주 서서 싸우려는 것이었다.


야로산 앞에서 산세를 살핀 궁천건은 피로한 몸도 쉬고 또 산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쇠퇴해진 내공을 조식할겸 하루를 쉬고 그 이튿날부터 기독뱀을 잡으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쓰러져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가 궁천건의 잠자는 몸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까지 백일 동안을 걸어오느라고 피로에 지친 궁천건은 날이 새는 것도 모르고

 

단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눈을 뜬 궁천건은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얼른 눈이 떠지지 않았다.

 

얼마동안 떴다 감았다 하며 눈을 비비는 궁천건의 잡이 취한

 

눈에 건장한 사나이의 얼굴이 비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후다닥 놀라 일어나 앉은 궁천건은 눈이 부리부리하고,

 

건장한 체구의 사나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일어나 앉은 궁천건은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래 당신은 누구요?]

앞에 버티고 선 사람이 대답 대신 묻는 것이었다.

[...? 여보쇼! 내가 먼저 묻지 않았소?]

[핫...... 됐어. 대답하지. 나는 왕한상(王寒湘)이오. 당신은?]

[나는 궁천건(宮天健)이오.]


이렇게 해서 야로산 입구에서 괴이하게 만난 상천건과 왕한상은

 

서로 야로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말하게 되었다.

[아, 그럼 잘 됐소.

 

나도 기독뱀을 잡으러 왔는데 궁형과 함께 잡으면 심심치 않고 서로 도움이 될 것이요.]

[그럼, 왕형도 기독뱀을 잡으로 왔군요. 서로 무섭지 않고 잘 됐소이다.]

서로 협력해서 잡기로 한 왕한상과 궁천건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날이 가면서 더욱 친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야로산에 들어와 기독뱀을 찾아다닌지도 어언 삼개월!

 

추운 겨울이 지나고 양지쪽에서도 눈이 녹는 이른 봄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던 기독뱀을 드디어 발견했다.

 

이 기독뱀은 험한 산이나? 습지 어느 곳에나 있는 것도 아니고 흔한 것도 아니었다.

 

몇년에 한번 잠시 햇빛을 쪼이고는 곧 습지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기독뱀 한마리를

 

잡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奇蹟)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뱀이 영약이 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궁천건과 왕한상은 탄성을 질렀다.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잡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웅후한 무공으로서 기독뱀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수법을

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독뱀을 발견하기까지가 문제지 일단 발견만 하면 일은 끝난 것이었다.


그때 마침 한마리의 기독뱀이 바위를 중간쯤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마 습지에서 햇빛을 쪼이려고 바위 위로 올라가던 중인 모양이었다.


순간, 왕한상과 궁천건은 일시에 탄성을 지르며 제각기 무공을 발휘하여

 

기독뱀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


쉽게 잡았다. 과연, 기독뱀은 보기에도 훌륭했다. 굵기가 어른의 팔뚝만 하고 길이는? 겨우 한자가 될까말까
했다. 온 몸이 검푸른 이끼 빛이며 잔등에는 붉은 반점이 꽃처럼 아름답게 섞여 있었다.
[성공했소.]
[우리들의 애쓴 보람이 헛되지 않았구려.]
궁천건과 왕한상은 서로 몇달 동안 애쓴데 대해 위로하며 험한 야로산을 벗어나왔다.
그래서 몇달만에 궁천건과 왕한상이 처음 만났던 장소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왕한상이 갑자기? 태도가 변하
는 것이었다.
[궁형! 나는 원래 이따위 기독뱀은 필요가 없었소.]
[왕형! 그것이 무슨 말이오?]
[사실이오. 나는 필요가 없었소.]
[그럼 무엇 때문에 몇달씩 고생하며 기독뱀을 잡았단 말이오?]
[그것은 궁형의 인품이 좋아서 내가 함께 잡아주려고 했던거요.]
[뭐라구요? 도대체 귀신에 홀린 것 같구려.]
[아니 진정이오. 이제 잡았으니 나는 마음놓겠소. 그러니 궁형이 가지시오.]


궁천건은 정말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몇 달씩 고생하며 기독뱀을 잡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궁천건 의 인품에 끌렸기로서니 하루 이틀도, 한달 두달도

아닌 석달 동안을 고생하며 기독뱀을 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궁천건은 펄쩍 뛰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같이 고생했으니 서로 반분(半分)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아니, 마음 놓으시오. 궁형은 조금도 미안해 하지 말고 다 가지시오.]
내뱉듯이 하고는 휘적휘적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궁천건은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원......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하다보니 왕한상은 멀리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번쩍 정신이 든 궁천건은 앞서 내려가는 왕한상을 허겁지겁 좇아가 세웠다.
[왕형! 도대체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구려. 진정 왕형이 이 기독뱀을 나에게 주겠다면 받겠소만......]
[글쎄, 궁형도 이상하오. 가지라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소?]
[믿기지 않아서 하는 말이오.]
[핫...... 하...... 믿기지 않는다고? 더 말하고 싶지 않소. 아무소리 마시고 가지고 가시오.]
[그럼, 그렇게 하겠소. 그런데......]
[그런데?]
[이대로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겠소! 몇달 동안의 우의도 다지고

또? 기독뱀으로 영약을 만드는 것도 보실겸 저의 집으로 가서 며칠 쉬었다 가시오.]
[그럴 여가가 없구려. 저엉 그러시다면 이 다음에 만납시다.]
[언제?]


이렇게 합시다.

돌아오는 팔윌 보름날 아미산(峨嵋山) 입구에서 만납시다.]

[꼭!]
[꼭...... 만납시다. 그럼 잘 가시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리벙벙해 있는 궁천건을 뒤로 하고 왕한상은

아무 미련없이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이래저래 세월이 흘러 왕한상과 만나기로 약속한 보름날이 되었다.

팔월 그동안? 왕한상과 헤어진 궁천건은 길로 집으로 돌아와 드디어 영약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영약은 워낙 귀한 약초 아흔 아홉가지와 구하기 힘든 기독뱀으로? 만든 약이어서

양(量)도 많지 않았다.

 

참새알만한 크기의 알약이 꼭 아홉 알, 전부 아홉 알 뿐이었다.
며칠 있으면, 팔월 보름, 궁천건은 아미산 입구와 자기가 거하는

단실(丹室)과의 거리를 계산하여 이틀 전에 길을 떠났다.
그리고 애초에 자기가 기독뱀을 반분하자고 제의했듯이 아홉 알의 영약 중에시

절반이 조금 넘는 다섯 알을 가지고 왕한상을 만나려고 길을 떠난 것이다.
아미산 입구는 비교적 도승(道僧)들의 왕래가 잦은 편이어서 야로산처럼 무서움이 서리지는 않았다.

 

팔월 보름날,

약속한 시각에 궁천건은 반갑게 왕한상의 손을 잡았다.

[왕형! 그동안 별고 없으셨소?]
[궁형도 별고 없었소?]


서로 안부 인사가 끝나고 십년지기처럼 둘이는 흉금을 털어 놓고

지난 일년 동안 지낸 일이며 기독뱀을 잡던 이야기를 하느라고 산사(山寺)의 하룻밤이 긴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 이튿날 서로 석별을 아쉬워하며 왕한상과 궁천건은 손을 굳게 잡았다.

[왕형! 이번에 일을 보시고 한가하면 꼭 저의 단실(丹室)을 찾아 주시오.]
[그렇게 합시다. 기다려주시오.]
[암요. 기다리다 뿐이겠소. 대환영입니다.]
[감사하오.]
[그런데 왕형! 그동안, 나는 영약을 만들어 놓고 속히 팔월 보름날이 되기만을 기다렸소.]
[핫...... 하...... 무슨 일로?]
[무슨 일이 뭡니까? 귀한 영약을 어찌 혼자 가질 수 있읍니까,

여기 영약을 가지고 왔읍니다. 자, 받으시오.]

하면서 품 속에서 다섯 알의 영약을 꺼내주었다.

그러자 왕한상은 마지못해 받는 것처럼 몇번 사양하다가
그중에서 세 알만 가지고 두 알은 도로 돌려주는 것이었다.


[이 귀한 약을 만드느라고 궁형이 얼마나 애쓰셨겠소.

나는 세알도 많소만 궁형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세 알만 가지겠소.

두 알은 궁형이 요긴하게 쓰시오. 자, 그럼 일간(日間) 찾아가겠소.]


궁천건이 붙잡을 사이도 없이 휭하니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궁천건의 단실로 왕한상이 찾아오기는 그로부터 한달 후였다.
함께 사흘 동안 궁천건의 단실에서 세월 흘러가는 이야기로 사흘의 낮과 밤이 흘러가고

왕한상은 단실을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훌쩍 떠났다.

그러나 같이 지내고 사흘 동안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도 기독뱀을 만든 영약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도 없었다.

그러한 왕한상이 궁천건은 좋았다.

그 후로도 한달거리, 두달거리로 찾아와 하룻밤씩 묵어 가는 왕한상을 궁천건은

궁천건대로 절친한 친구 대접으로 극진히 대접해서 보내곤 했다.
그러면서 다시 일년이 흘러가던 어느 저녁이었다.
해도 지고 거의 으스름 저녁에 어떤 낯선 사나이가 단실(丹室)의 문을 두들겨 궁천건을 불러냈다.


[어디서 오셨읍니까?]

[여기 이 편지(片紙)를 보시면 알 것입니다.]

낯선 사나이는 묻는 말에 대답 대신 편지를 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궁천건이 편지도 펴보기 전에 휭하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괴이한 일이군...... 다 저녁 때에 이 무슨 일인고?......]


하면서 들었던 편지를 펴보았다.
<궁형! 일간 별고 없으시오? 덕분에 이 왕모(王某)도 평안하오.

그런데 급히 사람을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번 아미산에서우연히 기독뱀(奇毒蛇) 한마리를 잡았다오.

궁형도 알지만 나야 별로 필요치 않으니 궁형이 가져 가시오.

내가 들고 궁형을 찾아갈까 했는데 공교롭게도 급한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하게 되었구려.

유감이오. 그렇다고 아무 놈에게 들려 보낼 수도 없고 그래서 수고스럽지만

궁형이 손수 가져가기 바라오.?

아미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읽기를 마친 궁천건의 입가에는 기쁨의 미소가 맴돌았다.


[참으로 기특한 친구군...... 세상에 이런 친구만 있으면? 살맛 나겠는데......

이번에 가는 길에는 나머지? 영약 여섯 알을 다 주어야지.

또 한마리의 기독뱀을 잡았다니 그놈으로 또 영약을 만들면......]
아홉 알의 영약을 또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궁천건은 여섯 알의 영약을 조심히 품속에 넣고 또 단혼향(短魂香)도 품속에 따로 넣었다.
그리고 이튿날 날이 새기를 기다려 아침 이슬을 헤치며 아미산으로 곧장 치달렸다.
궁천건이 기독뱀으로 영약을 만들다 한가지의 신기한 약을 절로? 얻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단혼향(短魂香)인 것이다.

이 단혼향은 영약을 만들고 남은 기독뱀의 뼈로 만든 것으로서 바늘처럼 가는 뼈에 불을 붙이면
노란 연기가 나며 사람을 질식시키는 묘약(妙藥)이었다.

그래서 이 단혼향도 왕한상에게 주려고 품속에 넣은 것이었다.
때는 바로 엄동설한(嚴冬雪寒), 살을 에이는 듯한 찬 바람이 쉬익 쉬익 불고 금방 눈이 내릴듯

잔뜩 찌푸린 하늘은 음산하기까지 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며 궁천건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기어이 눈이 오겠군......>

눈이 내리면 길이 미끄러울까 염려되어 걸음을 더욱 재촉하며 아미산 입구에 궁천건이

도착했을 때는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때, 먼 빛으로 궁천건이 오는 것을 발견했는지 왕한상은 길 가에 나와서 손을 흔들어 궁천건을 맞았다.

[수고스럽게 오시라 해서 미안하오.]

왕한상이 먼저 손을 내밀어 궁천건의 손을 쥐며 하는 말이었다.


[천만에, 이번에는 또 귀한 물건을 주신다니 고맙기 이를데 없읍니다.]
[뭘......나야 필요치 않은건데 갖다 드려야 예가 되는 것을......]
[말씀만이라도 고맙소이다.]
[그럼 올라갈까요? 저기 보이는 계곡에 묶어 두었는데.]
[그럽시다.]


왕한상과 궁천건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왕한상이 손끝으로 가리킨 계곡을

얼마 동안 올라가던 바로 그때였다.
아무 말 없이 궁천건과 나란히 걷고 있던 왕한상이 급히 몸을 돌리며 궁천건의 뒤로 돌아갔다.
순간!
궁천건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왕한상은 재빠른 동작으로 쓰러진 궁천건의 각 요혈을 차례로 짚어 내려갔다.
명문혈(命門穴), 천영혈(天靈穴)을 짚어 혈도를 막아버리고

계속해서 내공혈(內孔穴), 산해혈(山海穴), 곡지혈(曲池穴) 되는대로 마구 짚어 내리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궁천건은 정신을 잃고 각 요혈의 혈도가 폐쇄된 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산 송장이 되고 말았다.
궁천건이 완전히 반 송장으로 징신을 잃은 것을 확인한 왕한상은 급히 궁천건의 품속을 뒤져

여섯 알의 영단을 꺼내들었다.

그 다음 오른쪽 발로 궁천건의 몸뚱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숨만 붙어있는 궁천건의 몸뚱이는 바위처럼 떼굴떼굴 굴러 계곡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누구 하나 보는 사람없이 깨끗이? 궁천건을 헤치우고 영단을 뺏은 왕한상은?

영단을 품속에 쑤셔놓고 손을 털며 돌아섰다.


[미친놈! 이 왕한상이 기독뱀을 줄 때는 다 생각이 있어서 준 줄 모르고 흥!

애초부터 영약은 이 왕한상의 차지라는 것을 몰랐지?......

기독뱀이 있다면 지옥이라도 찾아갈 놈이구나 ......]


살기를 띄웠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감도는 왕한상은?

궁천건이 굴러 떨어진 계곡을 향하여 가래침을? 퉤! 뱉은 다음 유유히 아미산을 벗어났다.
희끗희끗 날리던 눈발은 기어이 폭설로 변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넓은 하늘을

온통 덮으며 펑펑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계곡으로 굴러 떨어진 궁천건의 몸을 하얀 눈이 끝없이 덮어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여느 때와 마간가지로 매달 한번씩 아미산 상봉(上峰)에 있는 대야사(大對寺)에서

불공을 드리고 돌아가는 길인 등가보의 주인 등보주(鄧堡主) 등고강(鄧固强)은

희끗희끗 날리는 눈발에


<음...... 이거...... 가다가 길이나 잃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급히 내려오다가 중도에서 폭설을 만나 길을 찾지 못하고

아무 곳이나 밟히는 대로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이 정도로 눈이 쏟아지면 아미산을 벗어나기 전에 눈 속에 묻힐 것만 같아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래서 더욱 걸음을 빨리하며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그러던 등고강이 발을 잘못 디뎌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그런데 엎어지면서 이마가 닿은? 곳이 조금 이상했다.

처음에는 눈이 쌓여서 그러려니 하며 일어나던 등고강은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사람이었다.
[윽?]
기겁을 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눈 속에 비비고 눈 속에 붙힌 물체를 눈여겨 보았다.
분명히 사람이었다.
등고강도 무술인, 비록 등가보 안에만 묻혀 밖의 강호 무술계와 인연을 끓고 있지만?

명성을 날리는 무술인이었다.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었다.

급히 쌓인 눈을 헤치고 쓰러진 시체를 들어올렸다.

선비차림을 한 준수한 얼굴이었다.

가슴을 헤치고 귀를 댔다.

숨이 붙어 있었다.
순간, 등고강은 아무 것도 둘러볼 여유도 없이 시체나 다름없는 반 송장을 둘러 업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등가보까지 왔는지 몰랐다.

등은 물론 바짓가랑이까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용한 의사와 약을 아낌없이 썼다.

그렇게 간호하고 치료하기를 두달!


[바로 오늘이 석달째 되는 날입니다......

아주 간사한 사람은 겉을 교묘히 꾸며 충신같이 보이고 지혜로운 자는 겉으로 나타내지? 않아

어리석게? 보인다는 대간사충(大姦似忠) 대지여우(大智如愚)라는? 옛말이 있읍니다......

이 몸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목숨, 곧 회복되는 대로 왕한상을 내 손으로 죽일 것입니다.]


궁천건의 이야기는 끝났다.

이야기를 끝낸 궁천건은 울고 있었다.

그때까지 궁천건의 기구한 운명을 조용히 듣고 있던 양몽환 일행은

실로 무슨 말을 해서 궁천건을 위로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궁천건이 등고 강에게 마소(馬牛)의 일을 해도 못다 갚을 은혜라는 말의 뜻을 알았다.

궁천건의 분노와 증오 그리고 쓸쓸함이 뒤범벅이 된 얼굴을 차마 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이때, 침묵을 깨뜨리고 등보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양대협도 강호에 얽히고 설킨 이야기를 많이 들었겠지만 한가지 더 할 이야기기 있소이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며칠 전에 등가보를 침범해서 부녀자를 겁탈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상하는 참사가 일어났을 때 여기 이 궁형이 혼자 손으로 그들을 물리쳐 주었소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꼭 보답한다는 것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오.

내가 궁형을 살려준 것은 능히 속인(俗人)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흉악한 악당들을 물리치는 일은

어디 속인이 할 수나 있는 일인가요?

은혜를 받는 것이나 베푸는 것이 나 모두 사람 개개인의 운명이라 생각하오.

양대협께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하는 말이오만 양대협처럼 훌륭한 분은 속히 흉악한 자들을 없애고

평화를 찾도록 해야 할 일이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악으로 갚으려는 놈들이 이 강호에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오.]


[명심하겠읍니다. 제가 비록 힘은 없지만 힘껏 노력해서 평화를 찾겠읍니다.]
[고맙소, 고맙소.]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이때, 양몽환은 낮은 음성으로 궁천건을 불렀다.
[궁형의 지나온 일을 잘 들었읍니다. 왕한상같은 악한 놈은 어느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저도 궁형을 도와 힘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궁천건의 표정을 다시 살펴보면서 양몽환은 말을 이었다.


[...... 그런데 궁형께서는 왜 강호에 나가 왕한상을 찾지 않습니까?]

침통한 표정으로 묵묵히 양몽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궁천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 이 몸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 같소이다.

그리고 내 원수는 오직 왕한상 하나뿐이오.

왕한상 하나만 죽이면 나는 그만이오.

다시 무술계에 나가 시시비비에 얽혀 싸우고 싶지는 않소이다.]


[궁형의 심정은 알고도 남음이 있읍니다만 혹시 저와 함께 원수를 찾지 않겠읍니까?]

[아니 그럴 마음은 없읍니다. 나의 원수는 내가 갚고 싶을 뿐입니다.]

정중히 거절하는 말에 등고강이 펄쩍 뛰었다.

[궁형은 너무 고집을 부리는 것 같소.

여기 오신 양대협과 힘을 합하면 능히 원수를 갚고도 남을 것이오.]

[예, 그것도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만일 양대협이 나를 도와준다면

나는? 다시 은혜를 받게 되는 셈입니다.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보답해야 할 은혜는 등보주님을 받들어

마소의 일을 해서 죽을때까지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 갚지 못할 만큼 큰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또 은혜를 받겠습니까?

더 이상 은혜를 받고싶지 않습니다.]


지독한 결심이었다.

양몽환도 그의 말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등고강도 고개를 끄덕였고 등개우 이하 여러 사람들도 그의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더 이상 권하지 않겠읍니다.

만일 궁형께서 이 양모인을 필요로 하실 때는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감사한 말씀이오. 이 궁모인도 양대협이 필요로 하신다면 기꺼이 응하겠소이다.]

말을 마친 궁천건은 주먹을 쥐고 읍했다. 양몽환 역시 주먹을 쥐고 읍하며 인사에 답례했다.

[오늘 만난 것도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양대협께서는 이제 큰 일을 해야 할 분입니다.]

 
하고는 품속에서 구슬이 들어있는 병은 꺼내들었다.


[여기 이 구슬병을 드리겠읍니다.]


[무슨 병입니까?]

[여하간 받으십시오.]

양몽환은 두 손으로 건네주는 구슬병을 받았다.

[그 병에는 단혼향(短魂香)이라는 것이 들어? 있읍니다.

그것은 기독뱀의 뼈로? 만든 가는 바늘로서 이것에 불을 붙이면 노란 연기가 나며

사람을 질식시키고 맙니다.]


[아, 그럼, 바로 이것이 아까 말씀한......]


[예, 바로 그 단혼향입니다.

이것을 쓸 때는 먼저 그 안에 들어있는? 하얀 구슬알을 꺼내 입에 무십시오.

그 알을 입에 문 사람은 단혼향 냄새를 맡아도 아무런 영향이 없읍니다.

앞으로 혹시 필요하실까 해서 드립니다.]

[이 귀한 것을......]


[아닙니다. 아무래도 큰 일을 하실 분이 가시고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감사히 받겠읍니다.]

 

양몽환이 구슬병을 소중히 품속에 간직하고 주먹을 쥐어 읍했다.

그러자 궁천건도 주먹을 쥐고 읍했다.

[저는 잠시 볼 일이 있어 이만 물러가겠읍니다.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하고는 등고강에게 목례를 해보인 다음 한쪽 구석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궁천건이 나가고 잠시 침묵이 흐르자 등고강 보주는 화제를 바꾸었다.

[요사이 강호에는 어떤 일들이 있는지요? 이 늙은이는 워낙 바깥 출입이 없어서 알 길이 없구려.]

그러자 등개우가 앉은채 대답했다.

[요새 조금 시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읍니다.]
[시끄러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등개우는 이 며칠 동안에 일어난 일과 도옥의 흉계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에도 순양관이라는 곳에서 가짜 천기진인의 정체를 폭로하고

오는 길입니다.]

[허...... 허...... 가소로운 일이군. 천기진인 어른이 좌화(座化)하신지가 언젠데......]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앞으로 그 도옥이란 자가 또 어떤 흉계를 꾸며 놓고 헛소문을 퍼뜨릴지 알 수 없습니다.]
[도옥이가?]
[예, 그는 옛날 천용방의 향주였읍니다.

그 도옥이 귀원비급까지 가지고 있어서 이 강호에는 일대 풍파가 일 것 같습니다.]
[음...... 어린에게 독을 준 셈이오, 미친 사람에게 칼을 쥐어 준 셈이군!]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들을 섬멸하지 않으면 실로 가공할만한 살상이 벌어져

강호 천지는 피바다가 될 것입니다.]
[염려스러운 일이군. 몇년 풍파없이 지내더니......

양대협! 이 늙은이도 이제는? 늙어 힘은 없지만 양대협을 도와 일할 작정이오.]
[제가 오히려 스승으로 모시겠읍니다.]
[무슨 소릴? 여하간 스승이거나 제자거나 우리 함께 힘을 합칩시다.]
하는 바로 그때였다.
한쪽 벽에 달아 놓은 쇠종(鐵鍾)이 요란한 소리로 흔들렸다.
그와 함께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오? 등형!]
먼저 양몽환이 물었다.
[무슨 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제가 먼저 나가 보죠.]
하며 등개우가 장검을 뽑아들고 달려나가자 동숙정이 급히 일어나

등개우의 뒤를 따르며 양몽환에게 급히 말하는 것이었다.
[양사제는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나가 보겠어요.]
이때, 양몽환도 따라 나서려고 하다 동숙정이 하는 말에 주춤하고 섰다.
사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동숙정이 무공을 아는 양몽환은 동숙정 정도면

웬만한 일은 처리하리라 여기고, 기다리기로 했다.
등개우와 동숙정이 달려나가고, 얼마 후,

아무리 기다려도 달려나간 사람들이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초조히 기다리던 양몽환은 걱정이 되는지

역시 장검을 뽑아들고 지하도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양몽환의 뒤를 이어 등보주 고강이 뛰어나오고 하림과 유원도 뒤따라 나왔다.
과연, 사건은 벌어지고 있었다. 등개우는 어디가서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보이지 않고

두 명이 흑의 괴한과 맹렬히 장검을 휘두르는 동숙정의 재빠른 모습이 양몽환의 시야에 들어왔다.
칼과 칼이 부딪지고 장풍과 검풍이 소용돌이 지는 속에서 두명의 흑의 괴한과 싸우고 있는

동숙정의 무공은 그들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상대방의 두 명의 괴한도 동작이 민첩한 것이 무공이 보통은 아니었다.
동숙정의 무공으로 말하면 삼음신니의 권보를 익힌 날렵한 무공이다.

그런데 그 날렵한 무공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동숙정의 장검을 교묘히 피하는 괴한들의 무공도

삼음신니의 권보에 못지 않은 무공임에는 틀림없었다.
얼마 동안 두 명의 칼 쓰는 솜씨와 역습하며 피하는 민첩한 행동을 눈여겨 보고 있던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귀원비급의 수법이군......>


비록 귀원비급의 무공을 전부 터득하지는 못한 양몽환이지만

일찌기 조소접과 주약란의 노력으로 몇가지 귀원비급의 무공을 전수받은바 있기 때문에

자기가 배운 몇가지의 무술과 두 명의 흑의 괴한이 쓰는 수법과 일맥이 상통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옥의 화신들인가......>
그러나 도옥의 화신은 아니었다. 화신 이외의 다른 부하들인 모양이었다.

얼마 동안 동숙정과 두 명의 괴한과의 접전을 지켜보고 있던 양몽환은 싸우는 사태로 보아

언제 승부가 날지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따위 조무래기들과 힘을 써가며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양몽환은 즉각 둘째 손가락을 뻗쳐 천강지의 수법으로 두 놈 중의 놈을 겨냥하고

강한 지풍(指風)을 날려보냈다.
그러자 양몽환의 천강지풍에 맞은 괴한은 정강이를 꺾으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불시에 동료를 잃은 괴한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어리벙벙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순간,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동숙정의 싸늘한 장검이 무시무시한 검풍을 날리며 달려들고 말았다.

그 바람에 초개같이 쓰러진 괴한은 먼저 쓰러진 동료의 등 위에 풀썩 다리를 걸치며

나뒹굴어지고 말았다.
이때, 장검을 고쳐 쥔 동숙정은 두 놈의 허리를 한칼에 두 동강이로 낼 심산이었다.
허공에서 휘익! 한바퀴 원을 그린 동숙정은 햇빛에 번쩍이는 시퍼런 칼날을 그대로 내려치는 순간,

바로 그때였다.
[동사매!]
양몽환의 다급한 소리에 내려쳐지는 동숙정의 칼날이 멈추고 말았다.
돌연한 고함 소리에 칼을 멈춘 동숙정은 급히 달려오는 양몽환을 못마땅히 여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시죠?]
양몽환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쏘아붙이듯 동숙정이 말했다.

그러자 양몽환은 동숙정이 쥐고 있는 장검에 손을 대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금의 동숙정으로 말하면 악만 남은 여자다.

도옥만 생각하면 꿈에도 분통이 터져 자다말고 일어나 앉아 이를 갈아야 할 만큼

증오심이 불타 오르고 있었다.

도옥을 죽여야만 제대로 눈을 감고 잘 수 있는 동숙정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눈에 보이지 않고 분통은 터지고 그래서 도옥에게 터뜨릴 분통을

 아무 놈에게나 분풀이를 하고 싶은 충동에 칼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었다.

그런 찰나에 양몽환이 달려온 것이다.
[동사매...... 동사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 도옥이 나타나지 않고

또 도옥이 어떠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때에 이놈들을 죽여 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읍니까?]
[그러면 살려보내라는 말인가요?]
[살려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이놈들을 사로잡아서 도옥의 흉계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동숙정은 곧 분노를 누르고 양몽환의 말을 따랐다.
양몽환은 동숙정이 자기의 의견대로 따르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먼저 쓰러진 놈을 가볍게 둘러멨다.

그리고 지하실의 문을 밀 고 들어갔다.

그러자 동숙정은 나머지 한놈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질질 끌면서 양몽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무협지 > 풍우연귀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 戰 雲이 감 도는 鄧 家 堡   (0) 2014.10.23
13. 해독약 을 찾아서!  (0) 2014.10.23
11. 가 짜 천 기 진 인  (0) 2014.10.23
10. 조소접의 계략  (0) 2014.10.23
9. 불길 속의 두여인  (0) 2014.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