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10. 조소접의 계략

오늘의 쉼터 2014. 10. 23. 01:56

10. 조소접의 계략
 

 

지금까지 맹렬한 속도로 번져오던 불길은 어찌된 셈인지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하고는

 

더 이상 번져오지 않는 것이었다.


일각일각 혀를 날름거리며 조소접과 하림을 단번에 집어삼키려는? 기세로 번져오던

 

불길이 더 번져오지 않고 두어마장 앞에서 그냥 사나운 기세로 이글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번져오지 않는 것에 의아심을 감추지 못하고 불길의 높이만 눈으로 가늠하고 있는

 

조소접의 귀를 건드리며 다시 도옥의 음성이 퍼진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아가씨! 지금 이 불길은 이 도옥의 제화수법(制火手法)에? 의해서 더 번지지 않는 것이오.

 

이제? 이 도옥의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아가씨와 하림을 태워버리겠소!]


순간, 조소접은 새로운 번민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무리? 귀원비급을 터득한 조소접이라 해도 제화술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얼마간의 화상(火傷)을 입더라도 하림을 업은? 채 불길을 뛰어넘으려고만 했다.

 

그러나 조소접의 이러한 계획을 간파했는지 십장? 정도의 높이가 이십장(二十丈)의 높이로

 

불꽃이 높아지며? 더 맹렬하게 붙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길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분명히 도옥의 제화수법에 의해 불길이 막혀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진퇴양난에 봉착한 조소접은 잠시 생각을 돌려보았다.


<십장 정도의 불길이면 화상을 각오해서라도 뛰어넘겠지만 이십 장의 높이면

 

실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하루살이와 무엇이 다를것인가.

 

우선 저 도옥의? 말이 무엇인지 들어보기나 하고 다시 대책을? 강구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조소접은 불길의 높이와 자신의 팔보등공의 수법을 비교한 다음,?

 

도옥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불길에 타 죽는다는 것은 겁나지 않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것인지 말이나 해봐요.]


[핫...... 하...... 그럴줄 알았소.

 

이 도옥이? 하겠다는 이야기는 다시 하는 말이지만?

 

아가씨와 이 도옥이 손을 잡고 무술계를 제패하자는 것이오.]


그러자 조소접은 한가지 계략을 꾸몄다.


<옳다. 도옥의 말대로 순종하는 척 하면서 그와 접근을 꾀하자.

 

그리고 그 다음 그를 사로잡아 양몽환과 하림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

 

우선 이 불 속에서 빠져나가야겠고......>


조소접으로서는 조금 야비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이 위기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다.

일단 결단을 내린 조소접은 정색을 하고 태도를 돌변시켰다.

 

그러자 미소까지 머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좋아요. 하자는 대로 하겠어요. 그런데 나도 할 이야기가 있어요. 조금 가까이 오세요.]


[그렇게는 할 수 없소. 이 도옥이 가까이 가면 불의의 공격을 퍼부울 작정인 것을 모르지 않소!]


[그렇게 의심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나와 손을 잡자는 것이죠?]


[그럼, 믿어도 좋겠소?]


[믿지 못한다면 그만 두세요. 나도 이미 이 불길 속에서 죽기를 작정했어요!]


[좋소. 믿기로 하겠소!]


하고는 이십장 높이의 불길 너머로 얼굴을 나타내는 도옥이었다.


이때, 도옥의 눈에 비치는 조소접의 얼굴은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는 여자보다도 더욱 아름다와 보였다.

 

환한 불빛에 반짝이는 두 눈,

 

그리고 앵두빛으로 물든 입술과 보름달 같은 조소접의 얼굴은 가히 도옥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 과연, 아름다운 여자군. 내 어떻게 해서든지 손아귀에 넣어 정복해 버리고 말아야지...... >


아름다운 조소접을 사오척 거리에서 마주 보자 도옥의 욕정은 더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그러나 조소접은 도옥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계획으로 거짓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것을 알리 없는 도옥은 입술이 말랐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입술에 침을 묻혔다.


[아가씨의 말을 믿겠소. 그러면 이 도옥과 손을 잡겠다는 말이오?]


[손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만일 천하를 제패한다면? 서로 존경하고 어떠한 일이라도 상의해야 할 것인데

 

내 명령에 따르겠어요?]


조소접이 자기와 손을 잡기만 한다면 그까짓 명령쯤 대수로울 것이 못되었다.

 

조소접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굴복하게 만들 자신이 있는 도옥이었다.

 

지금?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고 꼭 지켜야할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었다.


우선 조소접부터 정복하고 볼 일이었다.


[물론이오. 그런 것은 염려 마시오.]


[알았어요. 그럼 이제는 내가 나갈 수 있도록 불을 끄세요.]

[불은 끌 필요가 없소. 아가씨가 나올 수 있을만큼 길을 열어 놓겠소.

 

그보다 먼저 한가지 부탁이 있소.]

[무슨 부탁인가요?]


[등에 업은 하림을 불 속으로 집어던져 죽이시오. 그래야만 되겠소!]


[좋아요. 내가 이미 손을 잡기로 약속한 이상 얼마든지 좋아요.]
하면서 조소접은 등에 열 십자로 묶어 업었던 심하림을 가슴 앞으로 끌어 두 손으로 안았다.

 

그리고는 이글거리는 불 속을 향하여 하림을 높이 치켜 올렸다.


이제 던지면 그만인 것이다.

 

하림을 높이 머리 위로 올려든 조소접은 잠시 눈을 감고 진기를 운집했다.

그때, 다시 도옥의 만족해 하는 소리가 불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가씨와 이 도옥이 손을 잡게 하기 위해서 하림을 인질로 삼았을 뿐이었소.?

 

이제 아가씨가 이 도옥과 손을 잡기로 약속한 이상 하림은 쓸데가 없소.

 

속히 던지시오.]

하는 소리를 조소접은 귓등으로 들으면서 도옥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림의 몸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지금 조소접이 진기를 불어넣으며 계획하는 것은 귀원비급에서도 가장 오묘한 경지에 이른

 

수법이라고 하는 회선장(廻旋掌) 수법이었다.

 

이 수법은 아무리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던진다해도 얼마의 시각이 지나면 몸이 비잉 돌면서

 

되돌아 나오는 수법이었다.

 

지금 조소접은 이 회선장의 수법으로 하림을 던지기 전에 불 속에서도 화상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기를 넣어주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진기가? 모여 들었다고 생각한 조소접은 드디어 하림의 몸을 불 속으로 던지고 말았다.

그 순간, 백의의 하림은 불길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도옥은 손뼉을 쳤다.


[잘했소! 참으로 잘했소!]


더 이상 조소접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하림을 불 속에 넣어 죽이기까지 하는 조소접을 믿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을 것인가.


[자아! 이쪽으로 나오시오. 빨리 여기를 빠져나갑시다.]


도옥은 불 속의 한 곳에 길을 터놓고 조소접이 빨리 나오기를 재촉했다.


그렇게 서두르는 도옥의 모습은 무슨 큰 일을 성사나 시킨듯 좋아했다.


그러나 조소접은 진정 하림을 불 속으로 던진 것이 못내 안 되었다는 듯이 약간 슬픈 표정을 지으며

 

터주는 불 속의 길로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도옥의 앞에서 머리를 숙이며 걱정까지 했다.


[하림 아가씨는 양몽환과 란(蘭) 언니가 제일 귀여워했는데 만일 내가 하림을 죽인 것을

 

그들이 알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하죠? 당장 나를 죽여버릴텐데....... ]


일부러 무서워하면서 몸을 떨자 도옥은 아무 걱정없다는 듯이 가슴을 펴며 큰 소리로 위로했다.


[염려할 것 없소.

 

이 천하에 도옥의 무공이 어떻다는 것을 아가씨 앞에서 보여드리겠소.

 

양몽환과 주약란을 이 도옥이 먼저 죽여 아가씨를 기쁘게 해 줄 것이오.

 

그런 걱정은 나에게 맡기고 어서 갑시다!]


그러나 조소접은 그래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멈칫 멈칫했다.


그렇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조소접의 모습은 진정 하림을 생각하는 몸짓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다못한 도옥은 조소접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오른 손을 가만히 잡아끌면서 떠나기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때, 조소접은 도옥의 손이 자기의 손에 닿는 것을 의식하며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가는듯이 몇걸음 끌려가면서 조소접 스스로가 도옥에게 쥐어진 손을?

 

살그머니 빼서 이번에는 도옥의 손을 가만히? 쥐어 주었다.

그러자 도옥은 기분이 좋은듯 활짝 웃음을 띄우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얼마 후, 조소접은 속으로 이때다 소리치며 도옥의 손목을 쥔 손에 진기를 다 모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그대로 금나수법(擒拏手法)과 분근착골(分筋錯骨) 수법을

 

병행시켜 도옥의 오른 손 곡지혈과 관절 요혈을 일시에 눌러 버렸다.


그 순간, 도옥은 뜻밖의 사태로 미처 손을 뺄 틈도 없이 조소접의 손아귀에서

 

몸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으윽!]

가늘게 비명을 터뜨리며 눈을 멀거니 뜬 도옥은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조소접이 쓴 이 수법은 생명에는 별로 관계가 없으나 짚힌 혈도가 타인에 의해

 

풀리지? 않는 한, 꼽짝달싹 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교묘한 계획으로 도옥을 완전히 사로잡은 조소접은 도옥이 간신히 발만?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곳의 혈도를 풀어 놓은 다음 이글이글 타고 있는 불길 속으로 눈을 돌려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불길 속에서 되돌아 튀어나오는 하림을 가볍게 받아 안았다.

 

그러나 하림은 도옥에게 어떠한 수법으로 혈도를 짚혔는지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죽은듯이 제대로 숨도 못쉬는 것이었다.


하림을 받아 안은 조소접은 즉시 자세를 바로 잡고 앞으로 안았던 하림을 옆구리에 끼고

 

한 손으로는 도옥의 손목을 꽉 움켜쥔채 마차를 대기시켜 놓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캄캄한 밤이지만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때문에 주위 일대는 대낮처럼 밝았다.


거의 마차가 있는 곳까지 다가오던 조소접은 자기의 시녀 네 명과 도옥의 화신인 네 명의

 

젊은이가 불을 뿜는 공방전을 벌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때까지 조소접의 교묘한 수법으로 어처구니 없이 사로잡히게 된 도옥은

 

조소접이 끄는대로 휘청휘청 걸음을 옮겨 놓고 있다가 조소접이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따라서 섰다.

[화신들에게 명하여 싸움을 중지하게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가도록 하세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신의 추한 꼴을 화신들에게 보여주겠어요.

 

나에게 관절 요혈이 짚혀 끌려오는 모양을!]

완전히 조소접의 손아귀에서 놀게 된 도옥은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이 도옥이 무슨 꼴이람! 여자를 탐내다가 이꼴을 당하다니......?

 

이제부터 여자라면 우리 할머니도 안 보겠다......>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조소접의 말대로 지금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화신들에게 보인다면

 

이후 화신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후회 막심이었으나 화신들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조소접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옥은 이를 갈면서 소리치고 말았다.


[이 도옥의 화신들은 싸움을 중지하고 먼저들 돌아가 명령을 기다려라!]

한참 공방전에 열중했던 화신들은 갑자기? 난데없이 주인 도옥의 명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금환검을 거두고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도옥의 화신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조소접은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겨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하림을 풀밭에 뉘었다.

이때, 양몽환도 장검을 뽑아들긴 했으나 독침의 영향인지 한쪽에 앉아 땀을 흘리며 괴로와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조소접은 가슴이 뭉클했다.


사실 생각하면 조소접 자기는 참으로 불우한 반생(半生)을 살아왔다.

 

일찌기 황제(皇帝)의 근위병(近衛兵)이었던 아버지 조해평(趙海萍)의 덕으로 당대 무술계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귀원비급을 얻어 절세의 무공을 닦은 후 지금까지 마음에 사무친

 

그리운 정을 입밖에 내보지 못하고 살았다.

 

일찌기? 양몽환을 살리기 위하여 처녀의 몸으로서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역시 알몸인 양몽환을 껴안고 생명을 구해주던 일, 천기석부에서 몇달 동안 양몽환에게?

 

무공을 가르쳐주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하려고 했으나 단혼애(斷魂涯)의 큰 싸움을 위해서

 

그리고 양몽환을 대협으로 만들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이별했던 일,

그리고 그 단혼애에서 천용방(天龍幇)의 이창란(李滄瀾) 이하 다섯 명의 단주(壇主)들을 무찌르고

 

모든 싸움의 승리를 양몽환에게 아낌없이 돌려준 일,

 

 단혼애의 싸움 이후 끝내 그 연정을 잊지 못해 다정선자(多情仙子)라 이름을 고치고

 

양몽환을 찾아 헤매던 일, 그리고 오늘 이 염라묘에서 다시 생사(生死)의 기로(岐路)에서 헤매는

 

양몽환을 보는 조소접의 심정을 그 어느 누가 알랴!


원래 인적이 드문 심산 속에서 살며 인간의 정이라고는 모르고? 지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양몽환을 만나 쌓고 쌓았던 애정을 풀어보려고 했으나

 

그 반대로 마음 속에는 정(情)만 쌓여 정말? 자기는 다정(多情)한가,

 

그리고 선녀(仙女)처럼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가 자문자답하다

 

끝내 다정선자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기구한 운명을 돌이켜 보는 조소접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러나 그 종말은 허무(虛無)로 가득차는 것이 못내 안타깝고 서글펐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소접 자기는 언제까지나 남을 마음 속으로만 사랑하면서 일생을 바칠 것만 같아

 

우수(憂愁)가 겹겹이 쌓이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머리를 흔들었다.

 

과거는 과거, 지금 눈을 뜨면 다시 신음하는 양몽환이 있고 하림이 있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매여 한숨짓고 눈물만 흘리고 있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다급했다.

모든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내젓던 조소접은 양몽환과? 하림을 번갈아 보고는

 

도옥에게로 고개를 돌려 고정시켰다.

[도옥! 이제는 내가 말하겠어. 아까는 할 수 없이 내가 계략을 썼지만 이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면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여버리겠어!]


[흥! 이 도옥의 머리도 비상하다고 자부했는데 꾐에 빠지다니...... 원통하고 분하다. 꼭 복수하마!]


[복수하는 것은 도옥이 죽지 않아야만 할 수 있는 것, 죽고 난 후면 복수하고 싶어도 못하지!]


[그렇게 목숨이 짧은 이 도옥이 아니지!]

어디까지나 도옥이다운 말이었다.

 

과연, 도옥의 말대로 두뇌가 명석한 사나이었다.

[큰 소리 치지 말아요.

 

그보다 먼저 화혈신침(化血神針)의 독을 제거하는 해독약을 내놓으세요.]


[내놓지 못한다면!]


[그러면 나도 생각이 있어요.

 

양몽환과 하림이 죽는 대신 나도 전맥수법(前脈手法)으로 당신의 주요 경맥을 짤라버리겠어요.

 

그러면 육개월 동안 갖은 고초를 겪다가 나중에는 피가 말라 죽어버리게 되죠.]

[전맥수법?]


[겁나겠죠? 살고 싶으면 해독약을 내놓으세요.]


[만일 가짜 해독약을 준다면?]


[그것은 내가 할 말이에요.

 

약을 먹여보고 가짜인 것이 판명되면 죽여버리죠.]

[흥! 이 도옥이 해독약을 주어서 양몽환과 하림이 산다해도 나를 놓아주지는 않겠지!]


[나는 거짓말을 안 해요. 약속하겠어요.]


[핫...... 하...... 조금 전에도 아가씨의 거짓말에 이 도옥이 이꼴이 되었는데 또 믿으라고?]


사실 그렇다.

 

그러나 조소접의 지금 심정은 양몽환을 살리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맹세하겠어요. 이번에는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겠어요.]


[그따위 약속은 몇 백번이라도 필요없소.

 

이 도옥이 해독약을 내놓지 않는다면 양몽환은 죽을 것이오.

 

그리고 이 도옥도 죽음을 각오했소!]


그렇게 되면 실로 큰 일이다.

 

도옥은 처음부터 죽여버리기로 결심한 바이지만 도옥이 해독약을 내놓지 않고

 
죽어버린다면 양몽환도 살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양몽환까지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옥은 확실히 지략이 있었다.

 

조소접의 간계를 잘 알고 있는 도옥은 양몽환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자기를 죽일리는 만무라는 판단을 얻었다.

 

그렇다면 양몽환을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조소접은 틀림없이

 

도옥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점점 담대해지고 어깨가 펴졌다.


<흥...... 네가 양몽환을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양몽환의 목숨은 이 도옥의 손에 달려있지.

 

그런데 이 도옥을 죽여? 천만에......]


약간 기가 죽었던 도옥이 눈을 반짝이며? 정상적인 도옥으로 돌아와 거만을 떨었다.

 

일은? 미묘하게 벌어져 갔다.

 

조소접은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왔다.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양몽환을 살리고 도옥을 죽이는 방도가 없을까...... >

꾀를 짜내 봤으나 별로 신통하지 않았다.

조소접은 조소접대로 생각에 잠겼고 도옥은 도옥대로 어떠한 간계(奸計)를 써서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뜻밖에도 양몽환이 눈을 뜨며 조소접을 부르는 것이었다.

[조소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저 도옥을 죽여버리시오.]


[그러면 당신과 하림사매는 어떻게 하죠?

 

도옥이 해독약의? 소재를 알고 있는데 도옥을 죽여버리면 해독약을 구하지 못해요.

 

그렇게 되면......]

양몽환과 하림도 죽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만다.

 

그러자 양몽환은 조소접의 마음씨에 감격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조소저, 이 양몽환과 하림이 죽는다고 해서 장차 이 강호에 화근이 될 씨를

 

그대로 살려둔다는 것은 불행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우리 두 명은 죽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희생되어서 강호에 평화가 온다면 그 얼마나 장하고 훌륭한 일입니까?

 

주저하지 말고 속히 처리하시오.]

이미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양몽환의 감동적인 말에 깊은 충격을 받은 조소접은

 

새로운 번민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양몽환도 살리고 강호에 평화가 오는 길을 택하고 싶은 조소접이었다.


얼마간 번민과 싸우고 있던 조소접은 한번 더 도옥에게 해독약의 소재를 물었다.


[어떻게 하겠소? 당신을 죽여 후환을 없애라는데......

 

그래도 해독약을 내놓지 못하겠소?]


이때, 도옥은 슬그머니 겁이 났다.

 

양몽환과 하림이 죽기로 결심하고 자기를 죽여버리라고 한다면 영락없이 죽을 것만 같았다.

 

양몽환이 살고 자기가 죽는다면 어디까지나 버티고 희롱할 수 있지만?

 

양몽환도 죽고 자기도 죽는다면? 도옥은 가슴이 써늘했다.

그러나 조소접의 마음을 잘 아는 도옥은 버틸 수 있는데까지 버텨 보기로 했다.


[아가씨가 이 도옥을 죽이겠다면 죽여도 좋소.

 

그러나 양몽환과 하림도 죽는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이때, 다시 양몽환이 무슨 말을 하려다 기운이 없는지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조소접은 애가 탔다.

 

양몽환을 죽게 버려둘 수도 없고 도옥을 살려둘 수도 없고......

 

진퇴? 양난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조소접은 기어이 결심하고 말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소접은 오른 손을 높이 들어 강한 천강지(天강指)의 수법으로

 

도옥의? 명문혈과 관절 요혈을 내려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냉정한 음성으로 도옥을 불렀다.

[이제는 할 수 없어요.

 

누구든지 다 죽여버리겠어요.

 

마지막으로 당신의 천문혈(天門穴)을 치겠어요.]

순간, 도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크! 이년이 환장했구나.

 

양몽환도 하림도 죽이고 이 도옥도 죽이겠다는 말이지?

 

정말 이러다 이? 도옥이 죽어버리면......>

안 될 일이었다.

 

당장 손을 높이 치켜든 조소접의 표정은

 

정말 모두 죽이려는 표정으로 싸늘하고 살기가 돌고 있었다.

이때, 도옥은 정신이 홱! 돌았다. 절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 되지...... 이 도옥이 죽다니...... 죽다니......>

목덜미가 써늘했다.


순간, 도옥은 엉겁결에 소리치고 말았다.

[잠깐! 해독약은 주머니 속에 있소!]


겁먹은 소리로 외치자

 

그제야 싸늘하게 살기가 돌던 조소접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웃음을 띄우는 것이었다.

[그럴줄 알았어. 그래도 죽기는 싫은 모양이지!]


순간, 도옥은 혀를 깨물고 말았다.

 

그리고 가슴을 쳤다.


<아이쿠! 또 속았다!>


조소접으로서는 최후로 쓴 계략이었다.

 

그 계략이 적중한 것이었다.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린 조소접은 도옥에게 다가가 그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도옥의 주머니에서 그의 말대로 구슬병에 들어 있는

 

하얀 가루약과 몇개의 독침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코 앞에 꺼낸 물건을 내밀었다.


[이것이 해독약인가요?]

조소접의 손에 의해 이미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도옥은 머리가 돌도록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별도리 없었다.

 

겨우 눈만 부릅뜰 뿐이었다.

[그렇소!]

[그리고 이것은?]


하고 독침을 내밀자 도옥은 여전히 눈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화혈신침!]

조소접은 만족하게 웃고는 손을 들어 금방 내려치며 짚은 혈도만 풀어주었다.


그래서 도옥은 두 발과 한쪽 손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해독약이고 이것이 독침이란 말이죠?]


하며 흰 가루약과 독침을 번갈아 보이며 묻는 조소접의 말에 도옥은 볼멘 소리로 대답했다.

[믿지 못하겠으면 도로 주시오!]

[좋아요. 한번 시험해 보고 주겠어요.]

하고는 눈깜짝할 사이에 독침을 뽑아 도옥의 가슴에 꽂아 놓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약을 먹어봐요.

 

정말로 이것이 독을 해독하는 약인가,

 

아닌가를 알아봐야겠어요.]


그리고는 다시 가루약을 도옥의 입에 털어 넣었다.

 

도옥은 별 수 없이 조소접이 하는대로 멀거니 서서 가루약을 받아 먹었다.


[만일 이 해독약이 지독한 화혈신침을 해독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쓰겠어요.

 

그때까지 이 약은 내가 보관하겠어요!]

이때, 도옥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통을 참느라고 눈을 감고 말았다.


<지독한 년이구나. 몇년 동안에 많이 변했는데......>


한편, 도옥에게 독침과 해독약을 실험적으로 사용한 조소접은 옆에서 지키고 서 있는

 

네명의 시녀에게 명하여 양몽환과 하림 그리고 도옥을 마차에 태우게 했다.


그리고 조소접 자신은 마차 맨 앞에 앉아 말고삐를 잡아채는 것이었다.


그러자 말은 포장 마차를 끌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를 왔을까.

 

약 오마장 가까이 왔을 때였다.

 

염라묘 근처에서 굉장하고도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그? 폭음소리가 얼마나 큰지 달리던 말이 앞발을 들었고 지금까지 불이 붙던 수풀 속에

 

시커먼 연기와 검붉은 화염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드디어 최후의 기름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순간, 조소접은 서둘러 떠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화염 속에 휘말리고 말 운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분하다. 몇달 동안의 공사가 허사로구나!]


하고 크게 한탄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조소접은 말은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지독한 놈......>


하는 소리를 몇번 되읊었다.

이윽고 마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산모퉁이를 돌고 험한길을 벗어나는 마차의 요란한 바퀴 소리를 듣고 있던 조소접은

 

마차의 바퀴 소리가 아닌 다른 이상한 소리에 귀를 세웠다.

 

분명히?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는 소리였다.

 

그리고 미행하는 사람이 네 명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원래 전음술(傳音術)에 밝은 조소접은 마차가 달릴 때 부터 주의하고 귀를 기울였던 것이었다.

 

조소접은 마차의 포장 한끝을 살짝 들고 뒤를 보았다.?

 

과연 몇마장 떨어진 거리에서 네 명의 화신이?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따라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옥의 화신은 참으로 훌륭하군요.]


비꼬는 듯이 하는 말에 도옥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어깨를 폈다.


[물론 이 도옥의 화신들은 훌륭하죠.]


[그래서 당신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요?]


[두고 봐야 알겠지만 틀림없이 이 도옥을 구할 것이오!]

하고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지그시 눈을 감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태도는 비록 생포되어 몸을 쓰지는 못하지만 모든 것이 다 계획되어 있다는 태도였다.

조소접은 그러한 도옥의 거만한 태도에 비위가 상했다.


[듣던대로 당신은 지독하군요. 생포된 주제에......

 

만일 더 나를 화나게 하면 두 눈알을 뽑아버리고 말겠어요.


그렇게 되면 눈을 떴다 감았다 할 필요도 없을 거에요.

 

그때 한번 더 거만을 떨어 보세요.]


도옥은 들은 척도 안했다.


<지독한 년! 언제부터 이렇게 악종으로 변했담?>

하면서도 지금의 상태로서는 약간 두렵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가 죽어 쩔쩔 맬 도옥은 또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천성과 성품탓도 있겠지만 염라묘 앞에서 조소접에 의해

 

도옥이 먹은 해독약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즉, 도옥이 먹은 구슬병에 담긴 흰 가루약은 사실 해독약을 만드는 원료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소접이 자기에게 찌른 독침은 도옥? 자신이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염려할 바가 못되었다.

그런데 일은 도옥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만일 해독약이라고 먹은 가루로 해서 자기만 살아나고 양몽환이 죽는다면

 

조소접의 지금과 같은 태도로? 미루어 볼때 눈알을 뽑아버리는 것쯤?

 

눈하나 깜짝 안하고 해치울 것만 같았다.


그런데다가 조소접은 나머지의 독침 삼십여개를 도옥의 온 몸에 찔러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발과 왼쪽 손까지 마취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고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두 발은 그렇다 해도 왼 손만은 써야 숨겨놓은 진짜 해독약을 조소접의 눈을 피해

 

꺼내 먹을 수 있을 것인데 그것도 왼쪽 손이나마 자유로이 쓸 수 있을 때의 일이지?

 

사족을 움직일 수 없는 지금 상태로서는 해독약이 눈앞에 있다해도 그림의 떡이었다.

도옥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쩐다?...... 진짜 해독약을 내놓고 양몽환을 살리고 나도 살아야 할 것인가?......>

아무리 간계를 부려 조소접의 눈을 속이려고 해도 더 이상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만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눈앞에서 양몽환이 독침 때문에 신음하는 것처럼 자기도 머지않아?

 

양몽환과 같은 고통을 겪을 수 밖에 딴 도리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도옥은 단안을 내렸다.

 

백명의 양몽환이 죽는 것은 조금도 서러울 것이 없지만? 도옥 자신만은 죽을 수 없고

 

또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면 살고 봐야지...... 우선 살아놓고 다음을 계획해야지......>


한면, 독침이 온 몸으로 번진 양몽환은 비오듯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몸은 점점 불덩어리같이 뜨거워지고 인사불성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처참한 광경을 보고 있던 조소접은 의심의 생겼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가루약이 해독약이라면 지금쯤은 살아나야 할 것이 아닌가?....>


한편, 이들을 태운 마차는 계속 들판을 달려가고 있었다.

양몽환과 도옥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독침이 온 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특히 양몽환은? 비오듯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치 몸은 불덩어리같고 인사불성이 되어 허우적거리는 것이었다.

 

도옥도 전혀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던 조소접은 의심이 생겼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가루약이 해독약이라면 지금쯤 몸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완전히 회복은 안 되더라도 기미는 보여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해독약을? 먹은 도옥은 눈만 감고 있는 것이 전혀 회복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옥이 해독약이라고 준 흰 가루약은 진짜가 아닌 가짜인 것만 같았다.

[도옥! 아무래도 이상하군요.

 

당신 말대로 아까 먹은 해독약이 진짜라면 지금쯤 당신은 회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또 나를 속이고 가짜 해독약을 준 것이죠?]

[음...... 조소저도 이젠 보통이 아니군. 맞았소.

 

아까 그 가루약은 진짜 해독약이 아니라 해독약을 만드는? 원료중의 일부에 불과하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소접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도옥의 간사한 계략에 또?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당장에 간사한 도옥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옆에서 소리높여 신음하고 있는 양몽환을 보고는 어찌할 줄 몰랐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그 가루약이 가짜라면 화혈신침을 맞은 도옥도? 머지않아 양몽환처럼

 

인사불성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잘 되었네요.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독침 때문에 저절로 죽을테니까요.]


그러자 도옥은 우선 자신이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할 수 없이 해독약을 주리라 결정했다.


[좋소. 해독약을 주겠소.

 

그러나 조건이 있소.

 

만약 진짜 해독약을 준다면 나를 놓아줘야 하오.]


[좋아요. 약속하죠. 자! 그 해독약은 어디 있죠? 내놓으세요.]


그러자 도옥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해독약은 내 금환 사이에 숨겨 놓았소.]


하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도옥에게 다가가 도옥의 손목에 끼어있는 금환 팔찌를 꺼내

 

그 사이에서 해독약을 찾아냈다.

 

그리고 재빨리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양봉환에게 해독약을 한 알 먹였다.


얼마 후!

해독약을 먹은 양몽환은 점차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찬?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조소접의 눈과 마주쳤다.

 

양몽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도옥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왜 조소접이 도옥을 죽이지 않고 마차에 태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된 일이오? 조소저! 어찌 도옥이 이 마차에 같이 타고 있소?]


[잠깐! 제 말을 들어보세요. 도옥은 제가 데리고 왔어요.]

[조소저가? 왜 죽이지 않고?]


[죽이는 것은 급하지 않아요. 당신과 심사매를 치료한 다음 죽여도 늦지 않아요.]


[그럼, 저 도옥이 해독약을 가지고 있읍니까?]


[그래요. 그 해독약으로 당신도 살아났어요.

 

심사매까지 살려 놓고 처치하겠어요.]

조소접의 말을 듣고 양몽환이 수긍이 간다는듯 머리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도옥이 나섰다.


[사실 양형을 살려준 사람이 이 도옥인데 죽이겠다는 말이요?]


[뭐라고요? 뻔뻔스럽게......]


조소접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며 소리치자

 

도옥은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는듯 눈을 껌벅거린다.


[뽐내지 말아요. 양상공과 심사매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을 잠시 이용했을 뿐이에요.]

도옥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입맛이 썼다.


[양상공과 심하림의 병이 치료되면 놓아주겠어요.]

그러면서 조소접은 나머지 한 알의 해독약을 심하림에게 먹였다.

마차는 어두워가는 초저녁의 들길을 계속해서 달리고 가끔 마차 바퀴에 깔렸다

 

부서지는 작은 모래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뜨리는듯 했다.

이때, 양몽환은 조소접이 무슨 까닭으로 도옥을 죽이지 않고 여기까지 데리고

 

오는지를 완전히?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보다 앞서가는 조소접의 행동에 더? 이상 조언할 필요가 없었다.

 

조소접이 하는 대로 보고만 있으리라 생각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독약을 먹은 하림이 정신을 차리며 일어나 앉아 이상하게 벌어진 마차 안의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역시 도옥을 발견하고 놀라는 눈치였다.


[어떻게 된거죠? 사매!]


그러자 이번에도 조소접은 양몽환에게 안심시켜 주듯 하림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고는 아무 걱정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하림은 납득이 안 가는지 얼마 동안 도옥과 조소접을 번갈아 보다가

 

양몽환의 눈짓에 무슨 짐작이 가는지 새침해서 돌아앉고 만다.


한편, 양몽환과 하림이 자기 눈앞에서 살아나는 것을 보라는듯이

 

조소접을 빤히 바라보던 도옥은 기어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제는 약속대로 이 도옥을 놓아주시오.]


[안 돼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요.]


[양몽환과 심하림이 살아났으면 그만이지 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이오?]

[비록 살아나기는 했지만 믿을 수가 없어요. 조금 더 두고 봐야죠.]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못하다니......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는 심산인가요?]


[천만에, 비록 여자지만 신의(信義)는 지켜요!]


[신의? 아, 이렇게 납치해 가면서도 신의요?]


하는 도옥은 무슨 속셈인지 지금까지의 태도를 돌변하고 정색을 하는 것이었다.

[좋소. 아가씨의 신의를 기다려 보겠소. 그런데 조소저!]


딴판으로 음성까지 부드럽게 변화시키며 조소접을 부르는 것이었다.


조소접은 대답대신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사실 아가씨가 신의, 신의해서 하는 말입니다만 이 도옥은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이죠?]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상의할 일이 있소이다. 조금 가까이 오시오.]


[말해 보세요. 들을만 하면 듣죠.]


[뭐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아가씨와 내가 손을 잡고......]

하는 것을 조소접이 먼저 그의 입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무술계를 제패하자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도옥은 아가씨를 금방석에 앉히고

 

이 천하에서 제일 화려하게 살도록 하죠.]

[호...... 호...... 그래서 나를 당신이 소유하겠다는 말인가요?]

도옥은 얼굴이 벌개졌다.

 

그러나 정색을 했다.

[천만에.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오.]


[필요없어요.]


[하아...... 이 도옥의 말을 아가씨는 알아듣지 못하는군......]


[알아듣지 못하다뇨? 나는 그렇게 해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자 도옥은 도옥의 특유한 웃음을 싸악 거두며 눈짓으로 양몽환을 가리켰다.

[아가씨께서는 지금 속고 있는 중이오.]


하고는 음성을 아주 작게 낮추었다.


[...... 저 양몽환의 속셈을 몰라서 가르쳐드리는 말이오만 양몽환으로? 말하면

 

여자를 낚아채는 재간이 있소.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둘씩이나 여자를 데리고 살 것 같아요.

 

그런데다 이번에는 또? 아가씨까지 손에 넣으려고 응큼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오.]


[호...... 호...... 잘 아시는군.]


[그러믄요. 이 도옥의 눈은 속이지 못해요.

 

그렇게 되면 아가씨는 세 명의 여자 틈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오?]

[그래서 당신과 손을 잡자 이런 말씀인가요?]

[헤...... 이를테면......]


하는데 양몽환이 눈을 부릅뜨며 달려들었다.


[뭐라구? 이 간사한 놈. 그따위 야비한 말로 이간시키려고?]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조소접이 중간에 끼어 양상공을 진정시켰다.


[양상공은 염려 마세요.

 

도옥이 떠드는 소리를 그대로 믿을 줄 아세요? 듣는 척 하는 거에요!]

조소접의 말을 듣고 있던 도옥은 밸이 뒤틀렸다.

<이년! 뭐 듣는 척 했다고? 두고 보자......>

마차 안은 다시 침묵이 흘렀다. 도옥은 도옥대로 조소접을 속여서 손아귀에 넣고

 

여기서 도망가려는 생각에 잠겼고 조소접은 조소접대로 도옥을 이용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양몽환은 쇠진해진 기력을 회복시켜 도옥을 처치하리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땅거미가 깔리며 점차 어두워지던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나타나면서?

 

사방 주위는 캄캄한 밤이 소리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차 위에서 말을 몰던 네 명의 시녀 중의 한 여인이 포장을 들치며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마차를 멈추겠읍니다.]

[다 왔느냐?]


[예, 도착하였읍니다.]

[알았다. 멈추도록 해라.]

시녀와 조소접의 말이 끝나고 마차가 멈추어 섰다.

민첩한 시녀들의 손에 의하여 마차의 포장이 열리고

 

그녀들이 시립한 앞에 먼저 조소접이? 내리고 도옥, 양몽환, 하림이 차례로 내렸다.

이때까지 두 발과 손을 쓸 수 없는 도옥은 조소접이 먼저 내리면서 두 발의 혈도만 풀어주었다.


마차에 탔던 사람들이 다 내리자

 

조소접은 양몽환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하림을 데리고 속히 돌아가세요.]


뜻밖의 말에 양몽환은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그럼, 조소저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요. 하림이 아직 완쾌되지 않은 것 같아요. 돌아가서 치료해 주세요.]

[언제 또 만나게 될까요?]

[연락하겠어요. 도옥은 저에게 맡기고 돌아가세요.]


더 무슨 말을 하려는 양몽환에게서 시선을 돌린 조소접은

 

잠시? 쓸쓸한 표정을 띄웠다가 금방 지우고 도옥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앞서 걸어요.]

양몽환을 뒤에 두고 도옥을 앞세운 조소접은 시녀의 안내를 받아

 

으리으리하게 꾸민 대궐갈은 집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대궐 안은 수 십개의 등이 환한 빛을 발하며 조용히 불이 붙고 있었고

 

이십 여명의 시녀들이 두 줄로 서서 조소접을 영접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며 또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알 길이 없는 도옥은 대청 중앙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것은 조소접이 멈추라는 말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도옥을 세운 조소접은 맨 앞에 서 있는 시녀를 불렀다.


[먼저 보낸 세 명의 중상자는 어디에 있느냐?]


[예, 별궁(別宮)에 모셨읍니다.]


[증세는? 치료를 해 주었느냐?]


[예, 분부대로 치료를 해서 모두 완쾌되었읍니다.]


[알았다. 물러가라.]


그리고는 맨 끝에 시립하고 서 있는 시녀를 앞으로 불러세웠다.

[속히 가서 그들을 돌려보내라.

 

완쾌가 되지 않았다면 치료해주려고? 했는데......

제각기 가고 싶은대로 가라 이르고 나를 볼 필요는 없다고 일러라.]

[분부대로 하겠읍니다.]

시녀가 물러가고 시립했던 시녀들까지 모두 돌려보낸 조소접은?

 

심신이 피로한듯 중앙에 놓인 통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는다.

몰렸던 피로가 일시에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한편, 시녀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대문 밖으로 쫓기다시피 나온 등개우와 유원,

 

그리고 동숙정은 제각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러서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형 어찌된 일이오? 양대협님도 안? 보이고...... 다정선자도

 

그냥 가라고? 했다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니오?]

[글쎄 말이요. 가서 고맙다는 인사나 하고 양대협님의 행방을 물어야 하지 않겠소?]

[글쎄 그래야 옳은 것 같은데 그냥 가라고 했다니. 이거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요.]


등개우와 유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동숙정?

 

역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렇게 무작정 서 있을 수 만은 없었다.


[그러면 이렇게 해요.]

[무슨 묘안이라도 있읍니까?]

등개우의 묻는 말에 동숙정은 계획한 일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기 이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어디 조용한 곳에서 하룻밤을 쉬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요.]


[그렇게라도 해야죠.

 

우선 좀 쉬고 내일 날이 밝으면 양대협님을 찾아갑시다.]

[그 길 밖에 없는 것 같소!]

유원과 등개우가 제각기 한마디씩 하자 동숙정은 무슨 생각이 있는지

 

먼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등개우와 유원이 부지런히 따라갔다.

 

마차 옆에서 조소접과 헤어진 양몽환도 아직 완쾌되지 않은 하림을 부축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를 걸어 마차가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먼저 하림이 입을 열었다.


[이상해요. 조소저가.]

[무슨 말이지?]


[조소저 말이에요. 혹시 그 사갈같은 도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요?]


[왜? 무슨 말이라도 있었소?]


[아니 말은 없었지만 우리둘만 보내고 도옥과 사라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사실 하림의 말대로 조소접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소접의 말대로 도옥을 살려두는? 것은 자기와 하림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자기와 하림이 살아났는 데도 도옥을 죽이기는 고사하고 함께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도옥도 간사하지만 지략이 풍부한 조소접이 치밀한 계획하에 하는 행동임을? 아는 양몽환은

 

별로 신경을 쓰지않고? 사태가 벌어지는 대로 일을 처리하리라 다짐했다.

[당신은 염려 말아요. 조소저는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일 것이오.]


[분명 그런줄은 알지만 무슨 화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돼요.]

하는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길옆 숲 속에서 시커먼 괴한이 불쑥 튀어나오며 길을 막는 것이었다.

[핫...... 하...... 겨우 여기까지 밖에 못왔소?]


[앗! 도옥!]


분명히 도옥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아차! 했다.

 

그리고 뇌리를 스치고 번개같이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기어이 조소접이 당했구나. 이 흉측한 놈이 어떤 계략으로 조소접을 해치고 도망했을까?>


조소접의 행동으로 보아 그리 쉽게 도옥을 놓아줄 성질의 여자가 아니었다.

 

분명히 도옥의 계략에 넘어갔거나 아니면 불의의 일격으로 중상을 입고 놓쳐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양몽환은 본능적으로 하림을 감싸며 나타난 도옥에게로 몸을 돌리고 진기를 돋우었다.


[조소저는?]

[핫...... 하...... 조소저? 그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

[분명히 조소저를 해치고 도망했겠지?]


[도대체 양형은 조소저와 어떤 관계인데 조소저, 조소저하고 야단이오?]

[관계가 있든 없든 도대체 무슨 악랄한 수법을 쓰고 도망쳐 나왔는가 말이오!]

설마 조소접이 도옥에게 중상을 입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워낙 계교가 간사한 도옥을 보는 순간,

 

어떠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는지 염려가 되었다.

[여복(女福)이 많은 놈은 할 수 없군! 조소저까지 탐을 내다니......]


[비겁한 놈!]

[비겁하기로 말하면 양형이 더 하오. 여자가 많으면 하나쯤 나누어 주지않고

 

혼자만 재미보려는 것이 더 비겁하지!]

[뭐라구? 입에서 나오는 말이면 다 말인줄 아는가?]

[실례, 실례, 그까짓 계집쯤 이 도옥도 얼마든지 있지.

 

그보다? 조소저가 이 도옥에게 양형을 미행하라고 하던데!]

[미행을 하라? 그래서 놓아 주었단 말이오?]


[그렇지, 슬슬 미행하다 양형을 죽이고 하림은 미안하지만 이 도옥이 실례를 하라고...... 핫...... 하......]
양몽환은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소접이 했다는 말도 금방 거짓말이라고? 판단은 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의심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양몽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떠한 수를 써서 빠져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이왕 죽지 않고 여기서 만난 바에야 도형과 결판을 내야겠소!]
[핫...... 하...... 어림도 없지. 이 도옥이 귀원비급을 오년 동안? 터득한 몸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몰라도...... 어
림도 없지.]
[흥! 귀원비급쯤 두려워 할 이 양모가 아니오. 오늘 여기서 사생을 겨루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부끄럽지 않
소.]
[잠깐! 이 도옥도 여기서 양형을 죽이고 하림을 차지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싱겁지.]
그러자 하림이 눈섭을 치켜 올렸다.
[내가 당신같은 악종에게 굴복할 줄 알아요? 만일 그렇게 되면 깨끗이 목숨을 끊어버리겠어요.]
[천만에, 이 도옥은 그렇게 하도륵 내버려두지 않을거요. 먼저 양형도 죽이고 그 다음에...... 핫...... 하......]
[도형! 그렇게 큰 소리 치지 말고 나와 상대하는 것이 더 좋을거요.]
[상대? 얼마든지 해 주겠소만 여기 이 산 속에서 양형을 죽여봤자 누가 알아줄 사람도 없어서 싱겁소. 이제
영웅 호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정말 멋있게? 죽여 이 도옥의 명성을 날릴 것이오.? 그때까지만 기다리시
오!]
[이 양모 역시 그런 생각이 있지만 여기서 죽여 버리는 것이 더 깨끗할 것 같소. 자 덤비시오.]
양몽환은 비록 중상에서 회복된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대협이? 되기까지 쌓고 쌓은 내공과 웅후한 진
기로 거의 백여 수의 싸움은 능히 할 수 있었다.
날렵하고 날카로운 무공에 있어서는 피차 실력이 대등하지만 간사하고 게교가 많은? 도옥에게는 간계(奸計)
가 모자라는 양몽환이었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적수를 피해 달아나거나 조건부로 합의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리만큼 양
몽환은 집념이 강했다.
그래서 일전을 불사하리라 다짐했다. 양몽환의 태도가 누그러지지않고 필시 일전을 벌일 기세로? 나오자 도
옥은 도옥대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급히 진기를 돋우며 달려들 기세를 취했다.
사자와 호랑이가 이제 여차하면 맞붙어 불을 뿜을듯한 살벌한 순간이었다.
하림은 어쩔줄을 몰랐다. 그러나 만일 불행하게도 도옥과의 일전에서 양몽환이 중상을 입어 죽는다면 그 즉
시 하림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양몽환의 뒤를 따르리라 결심하고 긴장할대로 긴장하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도옥의 가슴을 향하여 강한 장풍을 날리며 달려들었다.
양몽환은 일격에 아니면 세 번까지의 공격으로 승부를 낼 작정이었다. 그렇지 못하고 시간을? 오래 끌면 끌
수록 중상을 입었던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하림까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
기 때문에 만약 싸움이 길어져 양몽환이 수세에 몰린다면 도옥은? 틀림없이 하림을 업고 달아날 것이 분명
했기 때문이었다.
필살의 공격으로 두 손바닥을 쫙! 펴서 강한 장풍을 날리며 달려드는 양몽환을 발견한 도옥은 급히 두 걸음
비켜 섰다가는 자기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양몽환의? 뒷등을 노리고 한방을 정확히 겨누어 펑!? 퍼부었
다. 그러자 양몽환은 번개같이 공중에서 몸을 돌려 되돌아오며 두 발로 도옥의 어깨를 겨누고 밟았다. 그러
나 다음 순간, 살짝 자리를 피한 도옥은 자기의 어깨 대신 땅을 힘껏 밟으며 떨어지는? 양몽환의 어깨를 겨
누고 똑같은 수법으로 내려밟았다. 그리고 잠시,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도옥은 머리가 띵 했다.
그리고 울컥! 목구멍을 넘어오는 무엇이 있었다. 피! 피였다.
그것은 도옥의 어깨를 명중시키지 못한? 양몽환이 땅을 차고 한걸음 옆으로? 비켜 나면서 때마침 떨어지는
도옥의 가슴을 향하여 왼손을 힘껏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순간, 도옥은 비틀비틀 다섯 걸음 정도 옆으로 비켜 서서 긴숨을 토했다. 실로 불의의? 일격이었다. 미처 생
각지도 못한 양몽환의 재빠른 공격이었다.
도옥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끈적끈적한 피를? 한입 머금었다가 탁! 뱉으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리고는
사태가 약간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작거나 크거나 간에 선수를 당하고 보면 그 싸움은 뒤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선수를 당했다는 분함을 참
지 못하고 마구 달려들다보면 아차하는 순간에 실수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양몽환을 오늘
죽일 필요가 없는 도옥은 다음 기회에 멋있게 복수하리라 마음먹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한방 후려갈
기고 뛸 계산이었다.
한편, 도옥의 어깨를 향해 힘껏 발길질을? 하며 급강하 하던 양몽환도 다행히 도옥의? 가슴을 후려갈기기는
했으나 너무나 온 힘을 다했기 때문에 땅을 밟는 순간 다리가 휘청하며 머리가 아찔했다. 그리고 도옥이 대
여섯 걸음 물러감과 동시에 양몽환도 절로? 서너걸음 밀려갔던 것이다. 예기치 않았던 사태로? 잠시 사이가
벌어져 싸움이 중단되었을 때 양몽환은 급히 쇠약해진 진기를 불어넣으며 마지막으로 한번 더 공격할 준비
를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초조했다. 절대로 싸움을 오래 끌 수 없다는 생각이 잠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로지 한수, 이번의 한수로 결판을 내야했다. 양몽환은 진기를 운집하고 협산초해(挾山超海)의 수법을 준비
하면서 단단히 벼르고 도옥을 노려보았다.
그러는 한편, 도옥 역시 이미 사태가 기울어진 것을 파악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고 직도황용(直搗惶龍)의 수
법으로 마지막 한수를 장식하려고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도옥의 직도황용의 강한 장풍과 양몽환의 노도(怒濤)같은 협산초해의 억센 장풍이 밤 하
늘의 정적을 찢으며 드디어 공중에서 부딪치고 말았다.
[꽈르릉......]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지는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친 장풍이 서로 뚫고 나가지 못하고 은하수같
이 흰 기둥을 만들면서 밤하늘로 올라갔다? 회오리 바람처럼 온 들판을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돌과
모래가 날리고 나뭇잎들이 우수수 여기저기로 마구 휘날리며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신이? 없었다. 다만, 하림만이 잡풀? 속으로 도망가는 도옥의 뒷모습을
보았을 뿐, 양몽환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이었다.
하림은 눈을 크게 뜨고 엎어질듯 양몽환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품안을 파고 들며? 양몽환의 허리를
힘껏 끌어 안았다.
그 순간, 어찌된 일인가.
장승처럼 섰던 양몽환이 썩은 기둥 쓰러지듯 한 옆으로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술렁거리는 무술계
썩은 기둥 쓰러지듯 쓰러지는 양몽환을 따라 함께 모로 쓰러진 하림은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앗! 피!]
양몽환의 코에서는 선지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하림은 양몽환을 흔들었다.? 그러나 양몽환은 눈을 감고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옥은 도망갔어요!]
그제야 약간 정신이 도는듯 눈을 뜬 양몽환은 하림의 손을 꼭쥐며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좀 다친 모양이오.]
[어디를 다쳤어요?]
[걱정하지 마시오. 대단치 않으니......]
조급히 묻는 하림을 안심시키려는듯 고개를 흔들어 대단한? 상처는 아니라는 표시를 하고는 숨을 몰아쉬었
다.
[그럼 됐어요. 더 이상 말씀하시지 말고 잠시 조식하세요.]
하면서도 중상을 당한 쪽은 도옥인 것 같은데 어째 이쪽에서도? 피를 흘리는 것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얼마 후, 조식을 끝내고 눈을 뜨는 양몽환을 바라보며 하림은 기어이 묻고 말았다.
[전 모르겠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무엇을 모르겠다는 말이오?]
[글쎄 틀림없이 당신이 도옥을 후려쳤는데 어째 당신이 피를 흘리죠?]
그제야 양몽환은 빙긋이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난 또 무슨 일인가 했군...... 그것은 그와? 강렬한 장력(掌力)을 교환할 때 반탄력(返彈力)이 강한 사람일수
록 현문강기[玄門강氣)의 웅후한 내상을 입게 되는데 도옥의 잠력(潛力)이 나보다 조금 강했던 모양이오. 그
래서 상처를 받은 것이오.]
[그럼, 대단한 상처는 아니구요?]
[별로 염려할 것은 없소. 잠시 조식하면 거뜬해지지.]
[속히 조식하세요. 그리고 이곳을 떠나요.]
양몽환은 하림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여러해 동안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구려.]
[별말씀을...... 저는 상관없어요.]
하림은 양몽환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빙긋이 웃었다.
사실 부부의 의를 맺은지 어언 육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 갔으나 아직 양몽환은? 하림과 잠자리도 같이 한
적 없이 처녀 상태로 순결을 지키게 했다.
자기는 자기대로 한방을 쓰고 이요홍과 하림은 다른 한방에서 기거하게 하여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살게
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것은 다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꼭 부부라면 육체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법칙도 없고 신뢰와 애정
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요홍이나 심하림도 아직 깨끗한 순결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요홍도 이요홍이지만 심하림은 어려서부터 양몽환을 따르며 양몽환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
며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생각하면 양몽환은 하림에게 못할 일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한때 그녀를 기쁘게 해준 일도 없었다. 기쁘게 해주기보다는 옆에서 자기를 염려해? 주고 보살펴 주는
다시 말하면 고통의 반생이었다. 그러나 하림은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늘 미소로 자기를 격려해 준 것이
었다.
지금 자기 어깨에 얼굴을 묻고? 행복감에 도취된 하림을 보는 양몽환은? 하림에 대하여 미안함과 고마움이
일시에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측은하기도 하면서 고맙기도 하였다. 한편, 하림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양
몽환의 비중만큼 과연 자신은 하림을 행복하게 해주었으며?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었는지를 자문해 보는 것
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양몽환은 하림을 가슴 앞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힘껏 포용해 주었다. 그러자 하림
도 양몽환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로 아무? 말없이 얼마나 서
있었을까? 이윽고 양몽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채 하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어...... 제가 말해도 돼요?]
가늘게 들릴듯 말듯 가만히 속삭이는 하림의 말은 조금 떠는 듯했고 양몽환을 꼭 껴안고 있는 그녀의 몸은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양몽환 역시 며칠만에 만나는 하림을 안고 여지껏 느끼지 못한? 야릇한 도취감에
빠져 있었다. 향긋한 머릿기름 냄새와 꼭쥐면 터질 듯한 두개의 젖무덤은 양몽환의 모든 신경을 마비시키는
듯 했다.
[언제는 내가 말을 못하게 했던가......]
더욱 팔에 힘을 주며 다정스럽게 대답하자 하림은 더더욱 가슴을 파고 들었다.
[이 넓은 들판에 당신과 저 둘 뿐이에요.]
[그렇군......]
[부탁이 있어요.]
다시 가늘게 속삭이는 하림의 턱을 손끝으로 받쳐든 양몽환은 부탁이 있다는 그녀의 앵두빛같은 입술 위에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자리에 조심히 뉘었다. 잠시 후, 다치면 터질 것 같은 그
녀의 가슴에서부터 스르르 옷이 벗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촛불을 대신해서 별이 하나하나 반짝이기 시작했고 달도 그 둥그런 얼굴을 구름 속으로 감추어 주었다.
길고도 황홀한 꿈, 그 꿈을 깨며 눈을 떴을 때는 조용한 아침이 동녘에서부터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잠시 후,
부끄러운 듯 양몽환의 가슴으로만 얼굴을 묻던 하림은 멀리서 들려오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일어나 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졌다.
어디서 무슨 큰 일이 벌어졌는지 멀리 사오십장되는 거리의 관도(官道)위로 두 필의 말이? 전속력으로 먼지
를 자욱히 일으키며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 뒤로 역시 네 필의 말이 질풍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이 강호에 다시 피비린내가 나려나?...... 음......>
질풍같이 달려가는 여섯 필의 말을 멀리서 보며 양몽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이 평화스러운 강호에 다시 살벌한 분위기가 맴돌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도처에서 피비린내가 나게
된다면 당대의 대협 양몽환으로서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이었다. 대협이라고 추앙을 받을 만큼 양몽
환은 천하를 평정해야 할 무거운 책임이 두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벌어질는지...... 차라리 무술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한가한 일생을 보낼 수도 있었던 양몽환이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이십년 전에 틀린 일이었다.
<내 나이 벌써 이십육세......>
지나온 생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것도 여러명이 양몽환을
향하여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앞장을? 선 사람이 등개우, 그 뒤를 유원과 동
숙정이 달려오고 있었다.
양몽환은 우선 반가왔다. 마주 손을 흔들며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양대협님! 여기 계시는 것을 그렇게 찾아다녔군요.]
등개우가 엎어질듯이 달려오며 하는 말이다. 그? 뒤를 역시 유원과 동숙정이 만면의 웃음을? 띄우며 다가왔
다.
[어찌된 일이오?]
[양대협님은 어째 여기 계십니까?]
[아, 나는...... 그런데 여러분들의 상처는 치료하셨읍니까?]
하고 묻는 양몽환의 말에 역시 등개우가 대답했다.
[다정선자가 고쳐주긴 해서 다 완쾌는 되었읍니다만......]
[왜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이번에는 유원이 나섰다.
[그런데 무엇에 화가 났는지, 우리들보고 자기를 만나보지도 말고 속히 떠나가라고 해서 쫓기다시피 나왔지
뭡니까.]
하는 한편에서는 동숙정과 심하림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인사하기에 바빴다. 유원의 말을? 듣고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죠.]
그러는 양몽환도 혹시 조소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궁금한 것이었다.
[그런데 양대협님!]
다시 유원이 양대협을 불렀다. 그러나 좀전의 표정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무슨 일입니까? 유형]
[조금 전에 급히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셨읍니까?]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 말씀이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아십니까?]
[묻지도 못했고 또 거리도 멀어서 누구인지 조차 모르겠는데요.]
[나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물어 보았더니 바로 양대협님을 찾아간다고 하더군요.]
[나를?]
[예, 바로 양대협님을 뵈러 수월산장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모를 일이군요...... 그런데 유형은 제가 수월산장에서 떠나왔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아뇨, 어떻게 양대협님의 말씀도 들어보지 않고 또 그들이 무슨 일로 그러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알려줄 수
있읍니까?]
옳은 말이었다. 그러자 동숙정이 하림에게서 떨어져 오며 물었다.
[양사제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들이 나를 찾는다면 혹시 도옥의 일이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해요. 그러나 한 사람만 가도 충분하겠는데 여섯명 씩이나 갈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자 등개우가 동숙정의 궁금해 하는 깃을 풀어주었다.
[그것은 각 파마다 먼저 자기 파들이 알려주려고 해서 그러는 거겠죠?]
[급한 일이 있어 너나할 것없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일이라면 누구든지 한 사람만 보낼 일이지...... 사심(私
心)만 바란다니...... 어이없군요.]
[그건 그렇고 여기서 양대협님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동사매의 추측이 맞는군요. 꼭 이 근처에? 양대협님이
계시리라고 하더니...]
어쨌든 양몽환을 만나서 반갑다는 등개우의 말이었다.
그러나 일행을 만나 반갑긴 했으나 왜 여섯 명이 자기를? 찾아 수월산장으로 갔는지 그것이 궁금한 양몽환
은 유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그들이 나를 찾는지, 혹시 유형은 짐작가는 바가 없읍니까?]
그러자 유원보다 먼저 등개우가 아는 척을 했다.
[그것은 이런 것 같습니다. 지금 강호에 대사가 벌어졌는데 무술계의 맹주(盟主)인 양대협님이 나서서 해결
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모시러 가는 거겠죠.]
하는 말에 유원이 나서며 보충했다.
[이 유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천하에 한분 밖에 없는 양대협님을 어느 파에서
먼저 모셔가는가 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우울했다. 무슨 일이 어디서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과연 양몽환
자기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큰 일을 치를 수가 있을는지 그것이 스스로 의문이었다.
이때, 다시 동숙정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강호에 풍파가 일어났다는 것이 확실한데 풍파를 일으킨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틀림없이 도옥이라는 놈일 겁니다.]
등개우의 자신있는 말이었다.
[어떻게 아시죠?]
[그거야 너무 빤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놈이외에 풍파를 일으킬 놈이 어디 있겠어요?]
하는 말에 양몽환도 수긍했다.
[바로 도옥이란 자의 소행일 것이오. 미리 손쓰지 못한 것이 철천지 한이 되는군요.]
[양대협님!]
등개우가 호기있게 양몽환을 불렀다.
[무슨 말씀이 계시오?]
[아무리 도옥이란 자가 잔악하다 해도 여러 사람이 뭉치면 도옥을 없앤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읍니까?]
[물론, 그렇지요.]
[그래서...... 말씀드리기는 황송하오나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 해서......]
[계속해 보시오. 들어봅시다.]
[...... 이번 기회에 양대협님께서는 저희들과 함께 등가보(鄧家堡)로 가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곳에 가시면 저
의 가친(家親)께서 환영하실 겁니다. 그런 다음에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떨까요.]
양몽환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마음이 괴로왔다. 그러나 어느 길이든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윽고 양몽환은
고개를 들었다.
[이미 풍파는 일어났읍니다. 등형의 말씀도 좋을 것 같군요.]
그러자 등개우가 껑충껑충 뛰며 좋아했다.
[그럼 승낙하셨읍니다. 저의 등가보로 가시는 것입니다?]
[비록 이 양모가 무공이 강하다 해도 큰 기둥 하나로 집을 세울 수 없는 것과 같이 혼자 풍파를 평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등형의 말대로 가기로 합시다.]
[양대협님!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감사해 할 것은 없읍니다. 부끄럽소이다. 잠시 우리 조식이나 하고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일행 다섯 명은 양몽환의 말대로 각기 자리를 잡고 운기 조식에 들어갔다.
얼마 후,
두어시간 동안 조식을 하고 몸과 마음이 거뜬해진 일행은 등개우의 안내를 받으며 길을 떠났다.
[여기서 약 사십리를 가면 작은 마을이 있읍니다. 그곳에서 요기나 하고 다시 계획을 세우도록 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등형의 수고가 많습니다.]
[양대협님도 별말씀을......]
등개우는 가벼운 걸음으로 성큼성금 일행의 앞장을 섰고 그 뒤를 동숙정과 하림, 양몽환이 서고 맨 뒤를 유
원이 따랐다.
이렇게 하여 등가보로 가는 일행이 첫 마을에 도착한 것은 땅거미가 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마을이라야 초가가 이 백여호 옹기종기 모여 있는 눈으로 보기에도 퍽 가난한 마을 같았다. 그러나 여러 관
도(官道)로 가는 지름길인 이 고을은 보기보다 붐볐다. 뿐만 아니라 때가 때인 만큼 여인숙이나 음식점마다
무술계의 자칭 영웅들이라고 하는 수많은 무술인들이 좁은 고을 바닥을 메우고 흥청거렸다.
많은 다른 지방으로 가는 갈림길의 요충지여서 그런지, 아니면 어수선한 강호의 소문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
겠으나 여인숙이라는 여인숙은 모두 만원이었다.
그러니 한 두 사람이 아닌 다섯 명 일행으로서는 하룻밤을 쉬어갈 방 한칸 구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었다.
겨우 등개우가 동분서주한 보람으로 여인숙과 술집을 겸한 허술한 방을? 하나 구하긴 했으나 우선 앉을 자
리조차 없었다. 얼마만에야 구석 자리의 탁자를 차지하고 앉은 일행은 피곤한 다리를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은 양몽환 일행이 들어와도 누구 하나 눈여겨 보는 사람도 없었다.? 저마다 자기들끼리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왁자지껄하는 소음 속에서 귀를 막을 수도? 없고 그냥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때, 어느
구석에선가 유달리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요 근래에 말이지, 없어졌다던 천하의 비보 귀원비급이 다시 나타났다는데 말이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말이지, 누가 아는 사람 없나?]
말이지 소리를 연발하며 떠들어대는 소리는 들리지만 누가 하는 말인지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러자 다른 한쪽 탁자에서 탁한 음성이 터졌다.
[믿지 못하는 놈은 쥐어줘도 모를걸...... 핫...... 하...... 그것도 모르는 주제에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뭐야! 어느 놈이냐? 남이야 왜 왔던 무슨 상관이냐!]
노기가 충천한 거한은 들었던 술잔을 집어던지며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나섰다. 회색 장삼에? 장검을 멘 건
장한 청년이었다. 그러자 먼저 꺼낸 거한도 주전자를 내동댕이치며 회색 장삼과 마주셨다.
그 거한은 검은 도포에 단검을 차고 있었다.
삽시간에 술 좌석이 살기를 띄우고 두 명의 거한이 마주 서자? 그들이 싸울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며 둥
그렇게 원을 그리고 사람들이 물러섰다.
그런데 회색 장삼이나 검은 도포나 모두 자기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중이었는지 그 친구들도 각기 두 패
로 갈라져 여차하면 맞붙을 태세로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술과 밥을 먹던 사람들이 수선거리며 일어나고 양몽환? 일행도 그들 속에 끼어들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먼저 술잔을 깨뜨리고 중앙으로 뛰어나온 회색 장삼은 어느 놈이 시비냐고 두리번거리다 사람 틈을 비집고
나오는 검은 도포의 면상을 향하여 먼저 주먹을 날렸다.
[이 건방진 놈! 무엇이 어째!]
엉겁결에 콧등이 터진 검은 도포는 쏟아지는? 코피를 쓱 문지르고는 그 자리에서 껑충? 뛰며 두 발로 회색
도포의 가슴을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탁자를 들이받고 쓰러진 회색 도포는 일어나면서 옆에 있는 나무의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비호
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장소가 워낙 좁은데다가 비잉 둘러선 사람들로 해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검은 도포는 넓죽이 걸
상 세례를 받고 눈 언저리가 벌개지자 태도가 돌변했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회색 도포의? 걸상 밑에서 개죽
음을 당할 것 같았다. 호되게 몇번 걸상에 얻어맞은 검은 도포는? 끙! 소리를 내면서 회색 도포의 바짓가랑
이를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회색 도포는 걸상을 든채? 몇개의 탁자를 부서뜨리며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그 순간, 비호같이 회색 도포를 덮쳐 누른 검은 도포는 바위같은 주먹으로 회색 도포의 얼굴과 콧등을 가리
지 않고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이러는 동안 옆에 둘러선 사람들은 그들이? 쓰러지는 대로 비켜줄 뿐 누구 하나? 말리려 하지도 않았고 또
친구들도 서로 노려만볼 뿐 싸움을 말릴 눈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동안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어 회색 도포
의 배위에 올라타고 힘껏 맘껏 주먹을 퍼붓던 검은 도포가 모로 쓰러지면 그 반대로 회색 도포가 올라타서
주먹과 발길로 닥치는대로 치고 밟는 것이었다.? 서로가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이 좀체로 싸움이 쉬?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검은 도포나 회색 장삼 모두가 피가 낭자하게 흘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리고 이번에는 회색 장삼이 검은 도포의 배를타고 앉아 마악 주먹을 퍼부으려는 바로 그때!
[손을 멈추어라!]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 사나이는 회색 장삼의 뒷덜미를? 잡아채어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밑에 깔렸던 검은 도포의 덜미를 잡아 다른 한쪽으로 밀어젖혔다. 참으로 눈깜짝할 사이의 일이
었다.
순간, 둘러섰던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렇게 뜨며 새로 나타난 사나이를 주시했다.
등개우였다.
[여보시오, 형장들! 무슨 원수진 일이 있다고 싸움이오?]
가슴을 딱 펴고 주먹을 불끈 쥔 등개우에게 달려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싸움의 발단을 이 눈으로 보았소! 서로 말 한마디의 충돌로 이렇게 싸워야 할 일이 어디 있소!]
장내는 물을 끼얹은듯 조용했다. 이때, 다시 등개우의 우렁찬 소리가 계속되었다.
[사해개동포(四海皆同胞)라는 말이 있소. 집을 떠나면 모두 형제와 나그네요, 누구의 말이 옳든 그르든 시시
비비를 가리지 말고 두 분 형장은 화해하시오!]
실로 뜻밖이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중에는 무예계의 고수도 있겠고 또 저마다 뛰어난 재간을 한가지씩 가지
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등개우의 조리있는 말에 누구 하나 반박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피가 흘러 낭자한 두 사람과 엎
어지고 부서진 탁자와 걸상 그리고 술잔이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깔린 장내는 잠시 숙연해졌다.
[속히 화해하시오.]
그러자 검은 도포가 먼저 등개우에게 다가오고 그 뒤에 회색 장삼도 따라왔다.
[형장 말씀이 옳소!]
[정말 부끄럽소!]
각기 한마디씩 하며 손을 잡는 것을 본 등개우는 두 사람의 어깨를 짚으며 음성을 낮추었다.
[고맙소! 우리 무술계에는 의리가 있소. 두 분 형장은 화해하시고 친구로 대하시오.? 뭐 별로 시비거리도 아
닌 말을 가지고 이렇게 피를 흘린데서야 어찌 무술인이라 하겠소.]
[옳은 말씀이오. 사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서로 감정이 격했던 모양이오.]
검은 도포가 진심으로 사과한 뒤를 이어 회색 장삼도 부어 터진 콧등을 만지며 겸연쩍게 웃었다.
[형장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하오. 그런데 형장의 고명(高名)은 어떻게 되십니까?]
[등가보(鄧家堡)의 등개우(鄧開宇)라는 사람이오.]
[그럼, 등소보주(鄧小堡主)님이시군요. 하아, 이거 여기서 뵙게 되는군요. 고명은 익히 들었소이다마는......]
[반갑소, 우리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나 하십시다.]
[좋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구경꾼들도 각기 제자리에 돌아가 앉고 등개우를? 중앙으로 하고 검은 도포와 회색 장삼이
좌우에 앉아 새로 술잔을 돌리게 되었다.
한편, 한쪽 구석에서 의외로 뛰어나간 등개우를 보고 있던? 양몽환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등개우가
그렇게 대담하고 조리있게 말을 해서 싸움을 말릴줄은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음...... 등형을 지금까지 잘못 보았는데...... 저만한 위인이라면 이제부터 내가 알고 있는 무공을 가르쳐주어
도 되겠군...... 그렇게 되면 어느 고수 못지않은 무예인이 되겠어...... 가르쳐줘야지......>
속으로도 몇번이고 자기의 무공을 등개우에게 가르쳐줄 것을 다짐했다.
그러는 한편, 등개우와 검은 도포 그리고 회색 장삼은 한참 이야기에 열중이었다.
[그런데 형장들은 무슨 일로 이 좁은 고을까지 오셨소이까? 이집 술맛이 좋은가요?]
[아니! 그럼, 등소보주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신단 말씀이오?]
검은 도포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을 껌벅거렸다.
[무슨 일을 모른다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무슨 일이 났읍니까?]
[허참! 정말 몰라서 묻는 말입니까?]
그러자 등개우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표정을 짓자 검은 도포는 답답하다는 듯이
[그럼, 등소보주께서는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읍니까?]
[나는 몇분의 친구들과 어디를 좀 가는 길에? 요기나 할까 해서 들렸을 뿐, 진정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읍니
다.]
[설마 등소보주 같은 분이 모르다니 이상하군요.]
[이상하다고만 하지 말고 속시원히 말이나 해 보시오. 무슨 일인지......]
정말 모르겠다는 등개우의 말에 한참 표정을 살피던 검은 도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정말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합니다만 한 오년 전에 나타났던 귀원비급이라는 책자가 요새 다시 나타났다는
군요.]
[귀원비급이?]
[예, 바로 귀원비급이 나타났답니다. 뭐라든가? ......천기진이라는 사람이 그 귀원비급을? 가지고 왔다든가......
갔다든가 뭐라고 하던데......]
[아니 천기진인이 지금부터 몇년 전 사람인데요? 적어도 삼백 년이 넘을텐데 그 사람이 가져갔다구요?]
[글쎄! 하도 소문이 이상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형장들이 이곳에 모였소?]
[어디 우리들 뿐인가요? 이 거리가 온통 무술인으로 와글와글합니다요.]
이번에는 회색 장삼이 나서서 하는 말이었다.
[여기에 모여서 어떻게 한다는 말이요? 귀원비급이 이 근처에서 없어졌읍니까?]
[그걸 누가 알 수 있나요? 그저 귀원비급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이라도 하려고 모였겠죠.]
[그래서 형장도 이곳에 오셨군.]
[헤...... 헤...... 어디 제 눈은 눈이 아닌가요? 귀한 보물이라니 보기라도 해야죠.]
한편, 한쪽 구석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양몽환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분명히 도옥이란 자가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
이 귀원비급이니, 천기진인이니...... 소문을 퍼뜨려서 무슨 흉측한 일을 저지를 것인가......>
여러가지의 생각으로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등개우와 검은 도포는 여전히 이야기에 열중해 있었다. 지금 회색 장삼이 한? 말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근래 강호에 떠도는 풍문은 대략 이러하죠. 즉, 약 오년 전에 나타났던 귀원비급을 천
기진인이 도로 회수해 갔는데 이 고을에서 얼마 멀지않은 순양관(純陽觀)이란 곳에 나타나서 고수들의 무술
시합을 열어 제일 뛰어난 무공인에게 귀원비급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였죠.]
[우스운 소문이군요. 죽은 천기진인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왔다는 말인지...... 틀림없이 죽었는데 그런 소문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군요.]
하는 바로 그때였다.
역시 술을 마시던 사람들 중에서 삼십세 가량의 건장한 거한이 장검을 둘러메고 등개우에게 다가오는 것이
었다.
[여보쇼, 형장! 지금 형장은 천기진인이라는 사람이 틀림없이? 죽었다고 말했는데 죽은 시체를 분명히 보았
소?]
등개우는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이 친구가 정신이 있나 없나? 꼭 눈으로 봐야만 믿는다는 말인가?......>
하면서 새로 나타난 거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거한은 다시 재촉하는 것이었다.
[왜 말을 못하오?]
[여보쇼! 꼭 눈으로 봐야만 믿소?]
기어이 등개우는 퉁명스럽게 내뱉고 말았다.
[물론! 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죽었느니 어쨌느니 할 수 있소?]
[무슨 말을 하고 있소? 지금부터 삼 백년 전에 죽었는데...]
[핫...... 하...... 이 양반 정신이 돌았군. 내가 지금 천기진인 그분을 만나보고 오는 길이오.]
[만나봤다고?]
[정말 믿지 못하겠으면 오늘밤에 백모령(白茅嶺)에 있는 순양도관(純陽道官)으로 오시오.? 그러면 그 어른이
나타날 것이오.]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개우의 앞을 지나 뚜벅뚜벅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장내는 다시 술렁거렸다.
여기 저기서 수군거리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도 했다.
거한의 출현과 한마디의 말로 흥이 깨져버린 등개우는 양몽환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천기진인이 살아 있다는데.]
[난들 알 수 있읍니까?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이오.]
하고는 음성을 낮추어 옆사람이 듣지 못하게 소곤거렸다.
[등형은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천기진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말해봐야 무슨 소린지 모를 것이오. 여하간 속
히 요기나 하고 다른 곳으로 갑시다.]
일행 다섯 명은 차려내온 음식을 먹는둥 마는둥 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마을을 벗어나는 외딴 곳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내 생각 같아서는 아무래도 도옥의 농간이 분명한 것 같으오.]
[맞아요. 바로 그 도옥의 짓이에요.]
동숙정이 역시 예상한 바라고 양몽환의 말에 동조했다.
[그런데 어제 도옥과 일전을 벌린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도옥은 중상을 받고 도망갔소. 그래서 오늘 저녁에
나타나는 도옥은 분명히 그의 화신일 것이오.]
[화신도 도옥처럼 악랄하다는데......]
[그렇소. 여하간 우리도 그곳으로 가서 사태를 관망한 후 일을 처리합시다.]
[그것이 좋겠읍니다.]
[그런데 등형! 아무래도 우리들의 옷차림이 남의 눈에 잘 뜨일 것 같소. 우선 동사매의 도복(道服)부터 말이
오. 그러니 지금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옷을 재간껏 고쳐서 변장을 하도록 하시오.]
하고는 계속해서 동숙정을 불렀다.
[동사매, 미안하오마는 도복을 벗었으면 하는데...... 남의 눈에 잘 뜨일 것 같군요.]
[예, 그러겠어요. 곤륜파의 제자라는 표시로 입고 다녔지만 벗어 버리겠어요.]
[미안하군요. 혹시 심사매의 옷중에서 바꾸어 입을 만한 것이 있으면 좋겠읍니다.]
양몽환의 제안을 따라 일행은 모두 옷을 바꾸어 입고 변장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양몽환은 웃도리를 벗어 양쪽 어깨를 때어버리고 바짓가랑이도 무릎까지 걷어올렸다. 그리고 머리에는 질끈
수건을 동여매고 채찍을 들었다.
그래서 양몽환은 영락없는 마부(馬夫)로 변장했다.
등개우는 걸인 복장을 하였고 유원은 짐꾼처럼 보따리를 만들어 둘러멧다.
그러는 한편, 하림은 자기가 입었던 옷을? 동숙정에게 벗어주고 동숙정의 속옷과 자기의 속옷을? 이어 몸을
둘둘 말고 흙을 묻혔다. 그런 다음 등개우 옆에 서니 이건 또 틀림없는 걸인 복장을 한 등개우의 딸처럼 보
여서 서로 바라보고 한참 웃었다.
도포를 벗어버린 동숙정은 하림의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예쁘게 말아올렸다. 그리고 얼굴도? 다듬고 손과
발도 깨끗이 씻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우중충한 도사였던 동숙정이 귀부인으로 돌변했다.
실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옷이 좀 작은 듯 했으나 별로 눈에 띄게 어색하지도 않았다.
화려한 옷차림도 아닌 백의(白衣) 한가지만으로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 아름답게 변화시킨 것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양몽환은 유원을 불렀다.
[유형은 어디 가서 말 한 필을 사오시오.]
저녁 땅거미가 지는 순양도관에는 이상한 차림의 일행이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거지 아버지와 딸이 걸어
가고 그 뒤를 짐꾼이 그리고 맨 끝에는 마부에게 고삐를 잡혀 끌려오는 한 필의 말이 있었다. 그리고 말 위
에는 자태도 아름다운 귀부인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물론 양몽환 일행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모인 사람들도 이상한 차림의 일행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늘밤에 천기진인이 나타난다는 소문때문인지, 아니면 귀원비급을 탐내고 절기를 겨루기? 위해서인지 순양
도관 부근에는 인파(人波)로 성시(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양몽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소문이라는 것이 무섭군!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래도 제딴에는 고수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겠는데
각 지방에서 올라왔다면 그만큼 소문도 파다하게 퍼져 있는 것이 아닌가......>
양몽환이 이렇게 생각하며 인파에 밀려 순양도관 대문 앞에 걸음을 멈추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앞
에서 북적대며 움직이는 사람들과 또 뒤에서 물밀듯 이어오는 사람들로? 하여 좀처럼 걸음을 옮길 수가 없
었다.
백모령(白茅嶺)의 순양도관은 거의 낡은 기와집 한채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순양도관 주위로 돌담이 둘러처
져 있고 중앙에는 대문이 셋 있었다.
그리고 대문 위에는 금자편액(金字扁額)으로 순양궁(純陽宮) 이라 쓰여져? 있고 대문 기둥은 썩어서 그런지
한쪽 옆으로 기울어진 채 벙긋하게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열린 문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때, 등개우도 역시 이상한 모양이었다.
[웬일일까요. 안으로 들어가지를 않으니......]
[글쎄 나도 이상히 생각하던 참이요.]
하는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장정이 설명해 주었다.
[천기진인의 명이라오. 누구든지 안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용서치 않겠다고 했답니다.]
[이상한 일이군......]
그래서 그런지 열려진 문 사이로 기웃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동안 날은 저물어지고 꾸역꾸역 몰려든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얼마 후, 벙긋하게 열린 대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드디어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천기진인이시다.>
<나타나시었다.>
왁자지껄 떠들며 저마다 먼저 보려고 아우성이었다.
[밀지 마시오!]
[밀지 마시오!]
저마다 보려고 밀고 밀치고 얼마동안 북새통을? 이루는 바로 그때, 대문을 열고 나타난? 사나이는 돌층계에
버티고 서서는 모여든 군중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목청을 돋우는 것이었다.
[여러분 좀 조용히 하시오! 천기선사(天機仙師)님께서는 밤? 이경(二更)에 나오시겠다는 말씀이 계셨읍니다.
그때까지 아무쪼록 조용히 기다려 주시오. 그리고 천기선사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제일 궁금히 생각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읍니다. 그런줄 아시고 질문이 있으신 분은 종이에 소속과 성자(姓字)를
써서 여기 돌층계 위에 놓아 주시기 바랍니다.]
양몽환은 기가 막혔다. 도대체 무슨 일로? 군중을 우롱하고 또 천기진인이 살아 있다고? 풍문을 퍼뜨리는지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
<맹랑한 일이군...... 어디 좀 두고 보자......>
하는데 군중 속에서 크게 외치는 사나이가 있었다.
[여보쇼!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왜 그 안에 들어가지 말라는 거요?]
[누군지 알 필요 없소! 당신은 누구요?]
[나는 이런 사람이오!]
군중 속을 헤치고 나오는 사람은 바로 술집에서 싸우던 회색 장삼의 사나이였다.
[바로 당신이오?]
[그렇소! 당신은 드나들면서 왜 우리들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오?]
[그것은 천기선사님의 명이오. 잠자코 이경까지 기다리시오.]
내뱉듯이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회색 장삼은 눈에 불을 켰다.
[제기랄! 누군 들어가고 누군 못들어가고! 흥! 들어가 보자!]
외치고는 친구인 듯한 두 사람과 함께 곧장 열려진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렇게 당당히 들어가던 세 사람은 어떻게 된 셈인지 뻐청다리가? 되어 금방 앞으로 쓰러질듯 휘청휘청 되
돌아 나오는가 했는데 문을 나서자 마자 약속이나 한듯이 세? 명이 일시에 쓰러져 돌층계에서 데굴데굴 굴
러떨어지는 것이었다.
순간, 수많은 군중들은 눈이 둥그래졌다.
금방 뛰어 들어간 사람이 도대체 무슨 변을 당했길래 저? 모양일까 하며 두리번거리고 숨도 제대로 못쉬고
있었다.
그때, 맨 앞에 서 있던 장정이 회색 장삼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절하듯 비명을 지르며 일으
켜 세웠던 회색 장삼을 놓고 말았다.
[으악! 죽었어!]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지른 장정도 그대로 나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
어느 누구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너나없이 놀라운 표정으로 입이 굳어져 아무도
소리내지 않았다.
장내는 일시에 찬물을 끼얹은듯 아니 얼어붙은듯 모든? 사람은 돌변한 사태에 경악과 공포감으로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군중들 사이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소녀가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려 나갔다. 그리고 곧장 쓰러져? 있는 회색
장삼의 사나이에게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찬물을 끼얹은듯 조용하고 공포감이 감돌던 분위기가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하림이었다. 옆에 섰던 등개우나 양몽환이 말릴 사이도 없이 달려나간 것이었다.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곧장 회색 장삼의 사나이에게로 달려간 심하림은 사나이의 가슴을 풀어헤쳤
다.
순간, 둘러선 군중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도대체 저 걸인 소녀는 누구이며 또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하림의 거동을 주시하는 것이었다.
황급히 회색 장삼의 가슴을 풀어헤친 하림은 그의 가슴에 귀를 댔다. 그리고는 곧 일어나 앉아 재빠른 솜씨
로 그의 곡지혈과 명문혈 그리고 천영혈을 주무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순간, 둘러섰던 군중들은 탄성을 질렀다. 죽었다는 회색 장삼이 긴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앉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일어나 앉은 회색 장삼은 자기 앞에 서 있는 걸인 차림의 소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소저! 소저는 누구시온데 이 몸을 살려주셨소이까. 이 은혜 천만번 갚을 길이 망망하오이다!]
꿇어 엎드려 절하는 회색 장삼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 다음 사나이에게로 옮겨 앉은 하림은 역시 같은 수법
으로 폐쇄된 요혈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는지, 아니면 회색 장삼의 내공보다 약했
던지 이미 그들의 가슴은 싸늘한 냉기만 남아 하림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속수무책으로 그들에게서 일어나 하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군중들은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하림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저런 걸인 소녀가 어떠한 무공을 배웠기에 기사회생의 재간을 지니고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걸인 소녀가...... 심오하군. 심오해......]
[그래 무술계에 가공할 인물들이 많다더니 과연, 그렇군......]
여기저기서 놀라움과 찬탄의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한편!
<지금이 어느 때인데, 더구나 변장까지 하면서 정체를 감추려고하는 이 마당에 함부로 나서다니.......>
하며 하림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양몽환은 하림이 인명을 구하자? 더 이상 내색도 하지 못하고 모르
는 척 했다.
그러자 하림은 양몽환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옆에 서 있는 걸인차림의 등개우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러
나 그 속삭이는 소리는 양몽환에게 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가엾어요. 아무 죄도 없이 죽는다는 것은...... 경솔한 행동을 용서하세요.]
그러자 등개우는 알았다는 듯이 빙긋이 웃으며 홀깃 양몽환을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양몽환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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