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화혈신침(化血神針)
[당신이 바로 수월산장의 양대협이시라면 제가 그곳까지 가는 수고를 덜은 셈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잃었던 정신을 되찾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유원은 황막한 들판에서 아혈(啞血)이 짚힌채 신음하고 있을때
위급한 자기를 구해준 심하림과 그 하림이 금환이랑 도옥에게 잡혀가던
그때의 정신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옥에게 백회요혈을 짚혀 수월산장으로 정신없이 달려간 기억은 없었다.
이때, 유원의 말을 듣고 있던 등개우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유원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
[유형! 정신이 드는 모양이구려. 유형은 지금 그 수월산장에서 오는 길이오.]
그러자 유원은 펄펄 뛰었다.
[뭐, 뭐라구요? 내가 수월산장에서 왔다구요?]
[예, 그렇습니다. 못 믿겠으면 양대협님께 물어보시오.]
유원은 그럴리가 없다는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양몽환에게로 돌아섰다.
[사실입니까? 제가 수월산장에서 왔읍니까?]
그러자 양몽환은 애초에 느꼈던대로 정신착란을 일으켰던 것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자신의 추측이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하며 싱긋이 웃어주었다.
[맞습니다. 유형이 수월산장으로 오셨더군요.]
[정말이라구요? 나, 이런 세상에 정말 믿을 수 없는데......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읍니까?]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하면서 소란을 피웠죠.]
[원수?]
[이 양모인이 유형의 재산과 부인을 빼앗고 어떤 여자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그러더군요.]
[아이고, 양대협님! 이놈을 그저 죽여 주십시오.
이제야 알겠읍니다. 이제야 바로 도옥이란 놈이......]
말끝을 맺지 못하고 자기가 한 일에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짓던 유원은
그 옆에 쓰러져 있는 동숙정을 보고 무릎을 쳤다.
[예, 맞습니다. 맞아요. 바로 이 여도사도 함께 있었죠!]
하나하나 생각이 되살아났다.
[도옥이 틀림없던가요?]
[네, 그놈이 제 입으로 금환이랑 도옥이라고 했읍니다.]
이요홍에게서 듣고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던 바라 도옥의 출현에 별로 놀라지를 않았다.
[그런데 유형께서는 무슨 일로 수월산장에 가려고 했읍니까?]
그제야 유원은 황막한 들판에서 하림을 만나 생명을 구하던 일에서부터 하림이 잡혀간 일이며
여인숙에서 어떤 노인을 수월산장으로 보내게 된 이야기를 자세히 하였다.
[......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 않고 부인께서 저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보답해야 하겠기에
수월산장으로 양대협님을 찾아가려고 했읍니다.]
양몽환은 모든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생면부지인 유원이 하림의 위급함을 전해주려고 애쓴 모양이 눈에 역력했다.
[실로 감사하기 이를데 없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편지(片紙)를 주시기에 소식을 알기는 했읍니다만
고마우신 분이 누구신가 했더니 바로 유형이었군요.]
두 주먹을 쥔 손을 앞에 모으며 정중히 읍을 하자 유원은 기절하듯 손을 저으며
양몽환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어 어찌된 일이십니까? 양대협님이 저같은 사람에게......]
[아닙니다. 유형은 고마우신 분입니다.]
[제가 구원을 받았는데 어찌 양대협님이......]
이와같이 해서 양몽환과 유원의 사이가 친하게 되는 것을 본 등개우는
자기도 즐거운듯이 싱글벙글 웃는다.
이때, 한편에서 양몽환과 유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정선자 조소접은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금환이랑 도옥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그자가 요행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귀원비급도 가지고 있겠지......
그자의 출현이 나에게는 별로 대수로울 것은 못되......
그러나 귀원비급의 무공을 다 터득했다면 이 강호에는 다시 싸움이 벌어지고 죄없는 사람이
또 얼마나 그자의 손에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조소접의 무공으로서는 도옥이 두려울 것은 없었다.
<제발 그 재간을 착한 일에나 써 주었으면......>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은 호랑이에게 사슴을 잡아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것임을
조소접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나타나지 않은 도옥을 놓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양몽환을 불렀다.
[참 오랜만이군요, 오년만인가요?]
[그렇군요. 오년이 지났군요. 그동안 별고없었는지요?]
[저는 괜찮았어요. 그런데 그동안 무공은 많이 진보했는지요?]
[별로, 조용히 책만 읽었읍니다.]
[그러셨나요!]
하고는 갑자기 무슨 괴변이 들었는지 조소접의 하얀 손이 약간 머리 위로 뻗쳐오르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에 양몽환의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상상밖으로 불의의 일격을 맞은 양몽환은
<이번에는 조소저의 머리가 이상해졌나......>
하고 생각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셈인지 의아해하는 양몽환을 향하여 이번에는 두 손바닥을 쏴 펴서
일장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엉겁결에 일격을 당한 양몽환은 느닷없이 또 공격해오는 조소접의 일장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급히 몸을 돌리며 조소접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좀전보다 더 강한 일장을 후려치며 달려드는 조소접이었다.
이와같이 정신발작과 같은 공격을 받은 양몽환도 양몽환이지만 갑작스런 조소접의 변화에
등개우와 유원도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양몽환이 조소접의 공격을 그대로 받는다면 당장 중상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다고 대적해서 싸우기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양몽환이 터득하고 있는 무공의 전부가 조소접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무술계의 대협 칭호를 받는 양몽환이지만 조소접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편, 조소접의 공격은 점점 더 맹렬해졌다.
아차하면 중상을 당할 것 같은 위기에서 용이하게 뼈져나온 양몽환은
또다시 공격해 들어오는 조소접을 향하여 자기도 모르게 몸을 날리고 말았다.
그러자 맹렬한 공격을 퍼붓던 조소접이 손을 저으며 외치는 것이었다.
[됐어요, 됐어요...... 그만 하세요!]
시작부터 끝까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공격을 피하기만 하다 무의식적으로 반격해서
일격을 가하려던 양몽환은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묻는 양몽환의 말에 조소접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가만히 웃는 것이었다.
[몇년 못보는 동안 얼마나 무공이 진전되었는가 보려고 했어요. 오해 마세요.]
그제야 양몽환도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핫...... 하...... 나는 또 조소저께서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 했죠!]
[호...... 호...... 용서하세요. 그동안 보고 싶었어요.]
[저 역시......]
양몽환의 말에 얼굴을 붉히던 조소접은 등개우와 유원을 바라보며 생긋이 웃었다.
[두분께서는 죄송합니다만 잠시 나가셨다 들어오시면 좋겠군요.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좋습니다. 얼마든지......]
등개우가 먼저 나가고 그 뒤를 유원이 따랐다.
[유형! 굉장한 솜씨죠? 그 다정선자의......]
[아니 다정선자? 그럼 그 여자가 바로 다정선자란 말씀이오?]
[그렇소. 유형은 모르셨던가요?]
[내 어찌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본 것 같더라니가 아니라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장사부를 떠나온 이유가
바로 다정선자 때문인데...... 유원으로서는 일장춘몽이 아니라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것이 오늘 이렇게 만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유원은 이마에 맺힌 땀을 연방 닦았다.
<어쩐다?...... 어쩐다?......>
천가지, 만가지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한편!
등개우와 유원이 밖으로 나가자
조소접은 얼마동안 고개를 숙여 자기의 발등만 내려다 보다가 조용히 얼굴을 들었다.
그러한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을 억제하려는듯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할 이야기라도?]
먼저 양몽환이 입을 열었다.
[......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는데 지금 다 잊어버렸어요. 그저 보고 싶었어요.]
[..................]
양몽환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소접도 무슨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감정이 격했던지,
아니면 부인이? 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단념했는지
마주 선채 양몽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얼마 후,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양몽환이 먼저 입을 열고 화제를 바꾸었다.
[조소저! 여기 동사매도 심한 상처를 입은 모양인데 좀 치료해 주시지 않겠소?]
침묵을 깨는 양몽환 말에 야릇한 분위기에서 헤어나온 조소접은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려는듯 눈을 꼭 감았다 뜨는 것이었다.
그리고 쓸쓸히 웃었다.
[그러겠어요.]
깨끗이 잊어버리고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둘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아 왔다.
그리고 동숙정에게로 다가가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때, 양몽환은 대개의 치명상은 치료할 수 있었지만 정신착란에 걸려 과거까지?
잊어버린 중상자는 치료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숙정을 치료하는 조소접의 행동을 하나하나 눈여겨 지켜보았다.
그런데다 조소접의 치료하는 속도는 양몽환이 눈으로 보고 바로 외울 수 있을만큼?
천천히 하기 때문에 양몽환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먼저 동숙정을 반듯하게 눕힌 조소접은 두 손에 진기를 모으며 동숙정의 백회혈(百會穴)부터 짚어나갔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통천(通天)과 승령(承靈)의 두 혈도를 풀어놓고 이어서 천충(天衝), 뇌혈(腦穴),
옥침(玉枕) 세 곳의 혈도를 풀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손에 진기를 모은 뒤 이번에는 오른 손의 중지(中指)로 풍부(風府), 완골(完骨)에서
두승(頭承)과 신본(神本) 부위까지 연결시키며 짚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일어났다.
이때까지 조소접의 손놀림을 주시하고 있던 양몽환은 조소접이 짚은 혈도마다 두번 세번씩
입속으로 외워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동숙정에게서 손을 뗀 조소접이 생긋이 웃으며 양몽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의외로 묻는 것이었다.
[이제는 알겠어요?]
순간, 양몽환은 얼굴을 붉혔다.
<과연, 조소저다운 일이군......>
하면서도 자기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조소접에게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읍니까?]
어떻게 지금 자기가 조소접의 치료법을 배우고 있는 것을 알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나쁜 일을 하다가 들켰을 때의 어색한 표정 그것이었다.
[제가 치료법을 알려드리겠다고 하면 순순히 배우겠다고 하겠어요?
? 저는 당신의 마음 속을 그리고 성격까지 알고 있는데요.]
그만 양몽환은 웃고 말았다.
그러나 조소접은 영리한 여자였다.
양몽환이 무색해하는 것을 보고는 화제를 돌리고 말았다.
[지금 이 상처는 백회요혈(百會要血)을 짚어 정신을 흐리게 하고 과거마저 잊게 하는 수법에
의한 것으로 이 수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와 란(蘭)언니 뿐이에요.
그런데 란이 언니가 안 하고 제가 안했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도옥이란 자의
소행이에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에요.
그 자는 원래 악랄한데다가 귀원비급까지 가지고 있어?
별의별 악한 수법을 다 쓰는 모양이군요......
앞으로 이 천지가 또 한번 뒤짚힐 거에요.]
[사실 그것이 걱정입니다. 어떻게 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글쎄, 별로 신통한 것이 없어요.
지금까지 몇년 동안 별로 무공도 닦지 않고 지냈는데 도옥이란 자가 살아있다면 무공을 더 닦아야겠군요.]
잠시 말이 중단되었을때 동숙정의 눈이 뜨여졌다.
그리고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떨리는 음성으로 외치는 것이었다.
[아니, 여기가 어디죠? 그리고 양사제가? 그리고 조소접? 내가 어떻게 된 거죠?]
먼저 깨어난 유원과 같은 행동이었고, 표정이었다.
이때, 양몽환은 동숙정이 놀라지 않도록 마음을 안정시킨 후
동숙정이 지금까지 행한 일을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양몽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정말 기가 막혔고 분했다.
[도옥! 도옥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군요.]
지나간 일을 몸부림치며 원통해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양사제가 용서해줘요. 내가 그렇게 미쳐 날뛰었다면 이후 양사제를 대할 면목이 없군요.]
[동사매는 추호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이 양사제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개운해지긴 했지만 정신이 없는 중에 부린 추태가 얼마나 많을까
생각만해도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그러자 동숙정의 심정을 위로해 주려는 듯 조소접이 입을 열었다.
[언니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 수법은 옛날 아미태산(阿爾泰山)에서 삼음신니(三音神尼)와 천기진인(天機眞人)이 만든 것으로
귀원비급에 기록되어 있어요.]
[귀원비급 그럼 도옥이 귀원비급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군요.]
놀라며 귀를 바싹 세우는 동숙정의 앞에서 조소접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 수법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우리 란이 언니와 나 밖에 없는데
언니와 내가 동언니를 해치지 않았다면 그 누가 했겠어요?]
동숙정은 이를 갈았다.
[뼈를 갈아 먹어서 꼭 복수하겠어요.]
[동언니! 진정하세요. 만일 도옥이란 자가 틀림없다면 복수가 쉬운 일이 아닐거에요.
그보다 이 수법은 인체내에 있는 모든 신경, 특히 뇌신경(腦神經)의 백회(百會)를 다치게 하는 것으로서
곧 손을 쓰지 않으면 육개월 동안은 정신이 없는 폐인(廢人)이 되는 것이에요.]
동숙정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경악과 분노를 터뜨리며 듣고 있었다.
[...... 그런데 악독하다는 도옥이도 제 스스로 원수를 만든다는 것은? 모르고 있어요. 그것은 그 수법에 당한
사람은 백회의 요혈을 짚혀 육개월 동안 정신착란을 일으켜 과거를 모르고 미쳐 날뛰지만 육개월이 지나면
저절로 정신이 돌아오게 될 뿐 아니라 누가 자기에게 악랄한? 수법으로 정신을 흐리게 만들었는지 그 사람
을 알게 되죠. 그렇게 되면 정신이 새로 든 사람은 그날부터 복수심이 끓어올라 원수를 갚기 위해 불철주야
로 찾아다니게 되는 것이에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그러면 스스로 원수지간이 되는 셈인데 왜 도옥이란 자가 절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그것이 도옥이란 자의 머리가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이죠. 이제부터 동언니는 도옥을 원수로 치부하고
복수하려고 하겠죠?]
[물론, 죽는 날까지 꼭 복수하고 말겠어요.]
입술까지 바르르 떠는 동숙정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양몽환은 너무나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몸소리를 치며
한걸음 나섰다. 사실 대협 양몽환에게는 금시초문인 악랄한 수법이었다.
[그러면 동사매께서 분명히 도옥을 보았읍니까?]
[예, 틀림없어요. 나는 오년 동안이나 도옥을 찾아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대신해서 그 자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자를 죽이기는 고사하고 다시 욕을 당하고 또 혈도까지 짚히다니......]
[........................]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동숙정은 다시 말을 이었다.
[꼭 복수하고 말겠지만, 그 자에게 혈도를 짚힌 후부터 어떻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어요]
[그것은 도옥이 동언니의 백회 요혈을 짚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 자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했을
거에요.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중에 살인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육개월이 지나도록? 회복되지 않으면 제
아무리 용하다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영약이 있다해도 고치지 못하고 죽게 되죠.]
[그럼 내가 그동안 무슨 못된 일을 했을까요?]
[그것은 저도 모르죠. 도옥이 어떠한 일을 시켰는지......]
그만 동숙정은 아! 하고 작은 소리로 신음하고는 고개를 숙여버리고 만다. 모든 것이 괴로왔던 모양이다.
그러자 양몽환이 동숙정을 대신해서 묻는 것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군요, 조소저!]
[무엇이 이상해요?]
[조소저의 말대로 모든 과거를 잊게 된다면 어떻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알아낼 수 있읍니까?]
[예, 바로 그 점이 의문이에요. 그래서 란이 언니도 심곡(深谷)에? 은거하면서 귀원비급을 새로 풀이하며 공
부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 심곡이 어디 있읍니까?]
[그것은 알려드릴 수 없어요.]
양몽환은 공연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지금 주약란의 거처를 알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다행히
알 필요없다는 조소접의 말을 듣는 순간, 자기의 조급함을 뉘우쳤다.
이때, 머리를 숙였던 동숙정이 우수에 싸인 얼굴을 돌었다.
[만일 도옥이 귀원비급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이 강호에 악랄한 수법으로 날뛴다면 어떻게 하죠?]
[그것이 염려되지만 그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야겠죠.]
그러자 양몽환이 나섰다.
[조소저께서는 무슨 묘안이 있읍니까?]
[아직은 없어요. 그러나 만일 도옥이란 자가 귀원비급을 가지고 날뛴다면? 그 귀원비급을 더 만들어내는 수
밖에 없겠죠!]
[아니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원비급을 어떻게 만들어낸단 말입니까?]
그러나 조소접은 문제없다는 듯이 미소를 띄우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염려없어요. 제가 귀원비급에 기록된 갖가지 무공을 전부 외우고 있으니까요.]
[그것은 조소저가 외우고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슨 상관이에요? 제가 외우고 있는 귀원비급의 기록을 그대로 다른 책자에 기록하면 되지 않겠어
요? 그래서 누구나 다 읽어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아닌게 아니라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조소접의 말대로 귀원비급을 몇 십권 복사해 낸다해도 시기적으로 너
무 늦어 있었다. 왜냐하면 도옥은 오년? 동안이나 귀원비급의 무공을 터득하여 연구 연마해서? 지금 강호를
휩쓰는데 이제 책자를 만들어 언제 연구하며 무공을 닦을 것인가?
[조소저의 말도 일리는 있읍니다만 너무 늦었군요.]
[그것이 걱정이에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대책을 강구해야죠.]
[..................]
[내가 알고 있는 귀원비급을 크게 나눠보면 삼음신니와 천기진인, 그리고 그 두 분의 합작(合作)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악랄한 수법을 연구해낸 사람이 삼음신니라고 저는 생각해요. 도
옥이란 자가 주로 연구 터득한 수법도 삼음신니의 수법 같아요. 그러니만큼 우리들도? 삼음신니의 기록만을
빠른 시일내에 터득해야만 될 것 같아요.]
귀원비급 이야기에 시간은 그대로 흘러갔다. 조소접이나 양몽환, 그리고 동숙정도? 마음이 우울했다. 어떻게
하면 도옥의 세력을 저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저마다 마음이 우울하고 무거웠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양몽환은 다른 한가지의 걱정이 더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생사를 알? 수 없이 대들
보에 묶여있는 하림이었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뛰어올라 하림을 끌어내리고 싶지만 조소접의 말대로 각 관절을 상하게 한다면 선뜻 나
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소저! 이제는 하림을 살려야겠는데요.]
잠시 말이 없는 잠잠한 시간을 택해 양몽환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그러자 조소접은 알고 있으
니 염려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준비는 다 시켜놓았어요. 곧 침대를 가지고 올거에요.]
순간, 양몽환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며 고마와 했다. 어디까지나? 철두철미한 조소접의 행동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양몽환이었다.
그러자 아닌게 아니라 두명의 시녀가 푹신푹신한 침대를 들고 한쪽 구석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침대를 든 시녀가 조소접 앞에 와서 읍을 하고 조용히 분부를 기다리자 조소접은 위엄있게 지시를 내렸다.
[이쪽으로 놓아요. 그리고......]
말을 중단한 조소접은 양몽환을 바라보며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쪽으로 와서 도와주세요.]
하고는 눈을 감고 진기를 돋운 조소접은 가볍게 몸을 날려 대들보 위에 성큼 올라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림의 요혈을 몇군데 짚었다. 그것은 하림의 몸을 만져도 관절이 마비되거나 상하지? 않게 하는 수
법이었다.
하림의 관절요혈에서 손을 뗀 조소접은 익숙한 솜씨로 묶여진 끈을? 풀고 끈 한쪽을 잡은채 아래서 초조하
게 바라보는 양몽환에게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힘주지 말고 안아서 침대에 눕히세요.]
하고는 천천히 하림을 아래로 내려보냈다.
양몽환은 초조한 중에서도 조소접의 말대로 조심히 하림을 받아 안고 침대 위에 눕혔다.
그동안 조소접은 소리없이 대들보 위에서 뛰어내렸다.
[조소저! 생명에는 이상이 없겠읍니까?]
하고 양몽환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것은 아직도 하림이 눈을 감은채 죽은듯이 숨도 쉬지? 않고 있기 때문이
었다.
[글쎄요. 성의를 다해서 고치겠어요. 만일 제가 심사매를 살려놓지 않으면 당신은 일생 동안 두고두고 저를
원망하겠죠?]
양몽환은 할 말이 없었다. 이런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그러나 양몽환의 대답을 기다리는 조소접이 아니었다. 즉시 하림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꿇어앉고 운기 조
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섬섬옥수의 하얗고 아름다운 손을 들어 하림의 관절요혈 이십 군데를 하나하나 짚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림의 요혈을 짚어나가는? 조소접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양몽환이나? 동숙정도 숨을
죽였다.
조심스럽고도 민첩하게 이십여 곳의 요혈을 짚어나가는 조소접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하나 두울 솟아나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심하림의 백지장같은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봉긋하게 솟은 두 개의 유방이 미세하게나마 위로 올랐다가는 아래로 내려가곤 했다.
그것은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표시였다. 이윽고 조소접이 하얀 손을 멈추고 이마에 솟은? 땀방울을 닦을 때
하림의 이마에서도 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다시 한번 주먹을 쥔 손을 마주잡고 허리를 굽혔다.
[조소저! 몇년만에 만나서도 역시 은혜를 입게 되는군요. 이미 받은 은혜도 많은데...... 이 많은 은혜를 무엇
으로 보답해야할지... 진정 감사합니다.]
그러나 조소접은 아무 말도 없이 원망인지, 애정인지 아니면 질투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양몽환을 바라
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마는 것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는 조소접의? 심정을 양몽환은 알
리가 없었다.
이때, 깊은 숨을 몰아쉬는 하림의 숨소리에 착잡한 분위기에서 조소접과 양몽환은 시선을 돌렸다.
과연 심하림은 살아난 것이었다. 괴로운 표정도 없이 깊은 잠에서 깨어난듯 하림은 희미하게 시야에 비치는
양몽환과 조소접을 번갈아 보고는 맑은 미소를 띄운다. 그리고 조소접의 손을 더듬어 잡는 것이었다.
[조사매! 조사매! 참 오랜만이에요.]
그러자 하림에게 손을 잡힌 조소접도 역시 미소를 보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심사매, 아니 양부인(楊夫人), 오랜만이군요. 아직 저를 잊지 않으셨군요.]
[영원히...... 기억하고 있을 거에요. 조사매를.]
[고마와요.]
하고는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인 조소접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잠깐만 눈을 감고 운기 조식하세요. 그러면 회복될 거에요.]
조소접의 다정한 말에 하림은 어린애처럼 홍조를 띄우며 조용히 눈을 감고 조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말대로 하림이 조용히 운기 조식하는 것을 본 조소접은 두 명의 시녀를 손짓해 불러 세우고는 양몽
환에게로 돌아섰다.
[그럼, 저는 이제 물러가야겠읍니다.]
하고 하직을 고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전혀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란 양몽환은 차마 손을 잡고 만류하지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가시다니 ? 어디로 가시겠읍니까?]
하고 급히 묻기는 했으나 사실 조소접과 앞으로 행동을 같이 할 수도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쯤 같이 지내며 지난 옛 이야기나 하려고 했던 양몽환으로서는 조소접의 하직이 뜻밖이었다.
[원래 정처가 없는 몸인데 아무 곳이나 발 닿는대로 갈 뿐이죠.]
[몇년 만에 만났는데 하루쯤 묵어가도 되지 않겠읍니까. 더구나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그래도......]
조소접은 누워 있는 하림을 바라보고는 자기가 머물러 있을 곳이 못된다는듯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밖에 나가 있던 등개우와 유원의 다급한 고함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순간, 어떤 예감이 든 양몽환과 조소접은 동시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양몽환과 조소접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어나오는듯 했다. 밖에는 유원과 등개우가 한패가
되어 누군가를 노려보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노려보고 있는 곳에는 뜻밖에? 도옥이 서 있
는 것이었다.
[도옥!]
이미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어도 몇년만에? 만나는 도옥이 비록 원수지간이긴 하지만 우
선은 반가운 일이었다.
두 팔목에 낀 금환과 등에 멘 금환검이며 영락없는 도옥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것은 양몽환이 먼저 도옥을 알아봤으면 도옥도 마땅히 양몽환을 알아봐야 할텐데 금
환의 젊은이는 양몽환을 빤히 노려볼 뿐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흠! 이 몇년 동안에 도옥은 내 얼굴마저 잊었는가?>
해서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도형! 오랫동안 뵙지 못했는데 오늘 여기서 보게 되었구려.? 그동안 옛날의 친구인 이 양몽환을 잊지는 않
으셨겠지?]
하며 한걸음, 한걸음 도옥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도옥은 싸늘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오. 우리 악수나 합시다.]
순간, 양몽환은 원래 성질이 포악한 도옥임을 알고 있는터라 도옥이 손을 내밀때 어떠한? 공격을 할지도 모
른다는 생각에서 은연중 오른 손에 진기를 불어넣으며 도옥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이 양몽환을 잊지 않고 있었구려!]
[역시 이 도옥을 잊지 않았군!]
하며 손을 흔드는데 갑자기 양몽환의 손바닥이 바늘에 찔린듯 따끔하는? 것이었다. 아차! 하고 양몽환이 손
을 뿌리치며 몇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는 이미 양몽환의 손바닥에는 자주빛의 핏방울이 맺혀져 나오고 있었
다.
[몇년만에 만나도 못된 손버릇은 그대로 있군!]
[핫...... 하...... 그것이 이 도옥의 인사라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좋소! 도형의 인사를 받았으면 나도 답례를 올리겠소!]
말을 마치면서 왼 손을 들어 강한 장풍을 밀어붙였다.
그러자 예상했다는 듯이 두어 걸음 옆으로 물러서며 도옥은 다시 한번 통쾌하게 웃었다.
[답례치군 너무 시시하군! 한번 더 해 보시지.]
양몽환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는 두 손에 강한 장풍을 모아쥠과 동시에 일장을 날려 보냈다.
지금 양몽환이 날려보낸 일장은 실로 무섭고 날카로왔다. 주위에 있는 머리통만한 돌들이 장풍에 날려 이리
저리 어지럽게 날았다가는 아무데나 마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약간 당황하며 날아오는 돌들을 피
하던 도옥은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따위 장풍에 놀랄 도옥이 아니오. 그러나 양형! 지금? 양형의 손바닥이 이 도옥의 암수에 맞았다는 것을
알고나 있소?]
[물론! 그러나 암수쯤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소.]
[핫...... 하...... 그러나 그 암수가 천산백독옹(天山百毒翁)의 화혈신침(化血神針)이라고 하면 조금 놀라겠지!]
[뭐라구? 화혈신침? 친구를 이렇게 대하다니!]
양몽환은 전신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악독하고 포악한 도옥인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독침까지
사용할 줄은 몰랐다. 환의 양몽환은 거꾸로 도는 피를 고정시키는듯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다? 말고 두 손바
닥을 확 펴서 진기를 운행한 후, 좀전의 일장보다 더 강한 장풍을 힘있게 날려보냈다.
그러자 양몽환의 손바닥을 떠난 강한 장풍이 도옥에게 다가간? 순간, 중간에서 어느 누가 날려보냈는지, 한
줄기의 강한 장풍이 양몽환의 장풍을 맞받아 쳐버리는 것이었다.
[펑!]
장풍과 장풍이 맞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나고 그 일대에는 돌과 먼지가 하늘을 뒤덮는 것이었다.
순간, 양몽환은 일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그것은 지금의 도옥보다 더 무공이 강한 고수가 자기의 장풍을
막아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었다. 양몽환은 뿌우옇게 하늘을 뒤덮은 먼지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
쳤다.
[누구냐?]
그러자 양몽환의 외침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먼지 속에서 차가운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핫...... 핫...... 하......]
싸늘하고도 소름이 끼치는듯한 웃음 소리가 그치며 먼지 속으로 나타나는 사나이!
[앗! 도옥!]
분명히 도옥이었다. 양몽환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앞에 딱 버티고 서 있는 두 명의 도옥을 번갈아 보았다.
틀림없는 도옥이었다. 옷차림, 금환, 금환검, 어디 하나 다른? 점이 없는 도옥이 먼지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
다. 해괴한 일이었다.
어느 놈이 진짜 도옥인지 양몽환은 어리둥절했다.
양몽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명의 도옥을 번갈아 보는 것을 재미있게? 보고 서 있던 두 명의 도옥 중
에서 나중에 나타난 도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양형! 오랫동안 뵙지 못했소. 그동안 안녕하시오?]
꼭 귀신에 홀리거나 아니면 놀림을 당하고 있는듯 하여 양몽환은 분통이 터졌다.
[어느 놈이 진짜 도옥인지, 앞으로 썩 나서라!]
우렁찬 호령소리에 나중에 나타난 도옥이 섰던 자리에서 한 걸음 나서며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핫...... 하...... 양대협께서는 너무 말씀이? 무례하시군! 그래도 천하의 대협이라해서 이? 도옥이 추앙하고 또
흠모하는 터인데......실망했소이다.]
[그러면 당신이 진짜 도옥이란 말이오?]
[예, 황공하오나 이놈이 금환이랑 도옥이라는 놈입니다. 양대협께서는 무슨 분부라도 계신지 분부대로 거행
하겠소이다. 헷...... 헤......]
방자스럽고 간교하기 이를 데 없는 도옥이었다. 이때, 양몽환은? 나중에 나타난 놈이 진짜 도옥이라는 것을
그의 간사스러운 말로 알아낼 수 있었다.
[도형은 일찌기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살았으면 성질도 고치고 온순해져야 할 것
아니오?]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어디 양대협님이 무서워 말이나 하겠읍니까? 흥,? 그따위 수작으로 이 도옥을 훈계
하진 마오. 내 화신(化身)을 시켜 양형을 죽여버리겠소.]
[무엇? 화신이 나를 죽여?]
[그렇습니다요. 여기 있는 이놈은 나의 화신이지요, 헷...... 헤......]
양몽환은 치가 떨려 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도옥이 지껄이는 대로 그냥 내버
려두고 싶었다.
그러나 화신(化身)까지 만들어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는 꼴은 차마 눈뜨고 못볼 일이었다.
한편, 등개우나 유원은 앞으로 일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지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여차하면 양몽환을 도와 두명의 도옥에게 달려들 태세를 갖추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도옥은 그들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독특하고도 소름이 끼치는 싸늘한 웃음을 계속해서 흘
리며 양몽환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양형! 아니 양대협님! 미안하지만 양대협님께서는 나의 화신(化身)이 화열신침으로 손바닥을 찔렀다는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알고 있소. 그러나 걱정할 것은 못되오.]
[핫...... 하...... 그럴꺼요. 걱정할 것 없이 팔을 짤라버리면? 될거요. 핫...... 하...... 참으로 인연이 깊은 일이요.
나의 사매(師妹)이자 양형의 부인인 이요홍도 한 팔이 짤리고 양형도 이제 화혈신침 때문에 한 팔을 짤라야
하고...... 천생연분, 외팔이 부부이구려. 이 도옥은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는바요.]
[도옥! 못하는 소리가 없군. 언젠가 도형의 입을 바늘로 꿰매서 다시는 말을 못하게 만들겠소.]
[영광, 영광이오. 어서 그날이 오기를 이 도옥은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소. 그러나 내 입을 꿰매기 전에 먼저
양대협의 두 팔을 댕강 잘라버릴 것이오.]
[내 팔을 잘라?]
[물론, 지금 화혈신침에 맞은 왼 손부터 자르지 않는다면 독이 퍼져 생명이 위태로울 걸!]
실로 무섭고 표독스러운 도옥이었다. 옛날에도 그러했지만 한번 하고자 하는 일은 어김없이? 실천에 옮기는
도옥이었다. 양몽환은 피가 끓었다. 당장 달려가 요절을 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행동하기 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도옥의 말대로? 침에 맞은 왼 손이 찌르르......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몽환은 도옥의 그 방자하고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는 기세를 꺾어 버려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리라!>
내공이 웅후한 힘을 내어 아픈 왼 손에 혈도를 막고 눈을 부릅떴다.
[내 팔을 자르는 것은 내가 할 일이오. 우선 한가지 할 이야기가 있소!]
[얼마든지 합쇼. 이 도옥은 남의 말을 잘 듣습니다.]
[팔을 자르기 전에 먼저 이 양모인이 도형의 방자한 성품을 뜯어 고치겠소.]
[그러면 옛날의 친구인 이 도옥을 해치겠다는 말인가요? 양형은 의리도 없군! 우리는 원수치간도 아니고 절
친한 친구사인데!]
[친구? 나는 도형이 좋은 사람이 될 때까지는 친구로 삼을 수 없소.]
[너무 하시는군, 우리 사이는 하루 이틀 사귄 친구도 아니고 몇 년간 사귀어 왔는데...... 그래서 진정한 친구
의 입장에서 내가 한마디 충고하겠는데...... ]
[충고?]
[충고가 싫다면 미리 알려드린다고 할까요? 그래도 옛 정을 생각해서 알려드리는 말씀이오. 만일 지금, 화혈
신침을 맞은 양형의 상처로서 이 도옥과 일전을? 불사한다면 두 시간 후에 독이 퍼져 죽을? 것이요. 그렇지
않고 조용히 물러가 명약(名藥)을 구해 치료한다면 하루 정도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꺼요. 세상에 이 도
옥과 같은 친구가 몇 명이나 있겠소?]
[도형과 같은 친구는 필요없소. 죽고 사는 것은 이 양모인의 명(命)이오. 우선 이 일장부터 받으시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내공을 이용하여 강한 장풍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도옥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크게 웃어 젖혔다.
[잠깐! 양형도 잘 알겠지만 이 도옥은 옛날의 도옥이 아니오.? 몇년 동안 무공을 닦아도 쓸 곳이 없어 심심
하였는데 오늘 양형이 친히 이 도옥의 솜씨를 보겠다고 하니, 친구지간에 미안하긴 하지만? 양형이 정 원한
다면 할 수 없지...... 자아, 시작합시다.]
그리고는 양몽환이 밀어보낸 장풍의 몇 곱이나 더 될 강한 장풍을 밀어붙이며 달려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몽환도 대협이다.
웬만한 장풍 따위는 손바닥으로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다. 그뿐아니라 상대방이 날려보낸 장풍을 잠력(潛
力)을 이용하여 역행(逆行)시키는가 하면 그 위에다 자신의 장풍까지 얹어서 반격하는 그야말로 자유자재로
장풍을 구사할 수 있는 양몽환이었다. 그이에? 비해 도옥의 무공은 귀원비급의 기록대로 몇년? 동안 연구한
것으로서 양몽환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뒤지지는 않는다고 자부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지금도 날카로운 장풍을 밀어붙이고 양몽환이 잠력을 이용하여 되돌려 보내오는 장풍을 두 손으로 막아 놓
았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힘껏 내려쳐 다시 그? 장풍을 양몽환에게 밀어붙였다. 이렇게 노도처럼 밀려나
간 장풍은 다시 양몽환의 반격을 받아 되돌아 오고 되돌아 오면 다시 밀어붙이고,? 그야말로 고수와 고수간
의 장풍 싸움이었다. 점점 싸움은 절정에 달하고 먼지와 돌이 어지럽게 날기 시작했다.
거의 삼십여 수.
등개우와 유원은 연방 자기들끼리 옆구리를 찌르며 말로 듣기만 하던 고수들의 싸움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쌍방 모두가 이마에 흐르는 땀도 씻지 못한채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지금 같아서는 어느 누가 더 강하
고 약한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느때는 양몽환이 구석으로 도옥을 밀고 들어가는가 하면 그 반대로 도옥이 양몽환을 구석으로 밀기도 하
고 그러면서 간간이 장풍과 장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삼라전 지붕의 기와가 수 십장씩 장풍에 날려 돌과? 모래와 함께 사방으로 날아 떨어지는 것이었
다.
실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도옥의 수법은 그동안 귀원비급의 기록대로 터득한 수법이어서 대적하고? 있는 양
몽환도 가끔 눈을 크게 뜨곤했지만? 양몽환 역시 주약란과 조소접에게서 배운? 기묘한 수법으로 도옥을 몇
걸음씩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리고 얼마나 싸웠을까.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며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치열한 싸움이 그치고 돌과 모래가 천천히? 걷히는 것이었
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먼저 눈이 휘둥그래진 등개우가 급히 양몽환과 도옥을 살폈다.
순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니 어떠한 수법을 사용했는지 도옥과 양몽환이 저마다 한쪽? 구석에 서서는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된 일이오?]
유원 역시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잠시 싸움을 멈추고 저마다 운기 조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는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
다.
그런데 얼굴 표정으로 보아 양몽환이 약간의 상처를 입은듯 했다.
조금 괴로와하는 표정이 독침 때문인지 아닌지는 분간할 수 없지만 지금 상태로서는 양몽환이 조금 불리하
다고 판단한 등개우는 장검을 비껴들고 일직선으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이건 또 웰일인가. 등개우 자신은 양몽환을 도와 상대하려고 힘껏 뛰어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제자리
에서만 뛸 뿐,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앞에서는 양몽환이 괴로와하는 표정이 보이고 발은 떼어지지 않고......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 괴이한 일도 곧 끝이 났다.
그것은 조소접이 지고(至高)한 수법으로 암암리에 무공을 활용시켜 등개우를 그 자리에? 세워두었었기 때문
이었다.
이윽고 조소접의 아리따운 자태와 함께 옥을 굴리는듯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등개우의? 발이 떼어졌다.
그러나 등개우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나가지 마세요. 당신이 나간다 해도 그를 상대할 수는 없어요.]
등개우는 은근히 울화가 났다.
<이거 사람을 어떻게 보는 거야......>
하면서 조소접을 향하여 돌아섰다.
[왜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오?]
[상대가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아세요.]
하면서 조소접은 더 말하지 않고 등개우를 앞질러 도옥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등개우도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내가 발을 옮기려고 해도 안 된 것은 필경 다정선자의 웅후한 무공 때문이었지...... 그렇다면 그녀
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한편, 도옥에게로 다가가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걸음을 멈춘 조소접은 운기하느라고 눈을? 감고 있는 도
옥의 눈이 떠지기를 기다려 차갑게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악한 자는 일찍 죽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맞군. 날 아시겠죠?]
[아다 뿐이오. 양대협님의 으...... 그렇고 그런...... 사이...... 그런데 나를 해치려고 왔소?]
[태도 여하에 따라서!]
[흥! 태도 여하라!]
[그래요. 먼저 화혈신침을 해독하는 약이 어디 있는지 말하세요.]
[핫......하...... 그것이 어떤 약인데? 천만에 가르쳐드릴 수 없소.? 더구나 천산(天山)에 백독옹(百毒翁)이라 하
면 지독하기로 명성을 날리는 사람인데 내가 가르쳐 준다고 해서 여기 있읍니다 하고 내놓을 것 같소?]
[좋아요.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먼저 죽게 해 주겠어요. 관(棺)앞에서도 울지 않는? 자는 그 관 속에 들어가
서도 안 울거에요.]
[안 우는 것이 아니라 못 울죠.]
거침없이 대꾸하는 도옥의 태도에 조소접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말은 잘하지만 똑같은 수법으로 고통을 받다 죽게 해주겠어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두실 것이 있소. 수년 동안 이 도옥의 무공이 어느 정도로 높은 경
지에 이르렀는가를 알려드려야겠소?]
[알 필요도 없고 듣지도 않겠어요.]
[마음대로, 그러나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도옥이 아니오.]
하고 말을 마치는 도옥을 향하여 조소접의 소멧자락이 펄럭 날렸다고? 했을 때는 이미 도옥의 몸이 공중으
로 떠올라간 후였다.
등개우와 유원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리고 연이어 일어나는 기기묘묘한 절수(絶手)에 벌어진 입은 얼마 동
안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공중으로 올라간 도옥의 무공이 더욱 희안했기 때문이었다.
불의의 공격을 받고 공중으로 몸을 날린 도옥이 두 발을 굽혔다 펴면서 원을 그리고는 곧장 내려오며 일장
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조소접은 그 일장을 피하고, 조소접이 섰던 자리가 장풍에 움푹 패어지며 다
시 모래가 날렸다.
귀원비급의 묘수들만 익힌 도옥과 조소접의 싸움은 더 한층 감탄과 경이의 싸움이었다.
공중에서 내려오며 강하게 퍼붓는 도옥의 일장을 피한? 조소접은 여전히 소멧자락을 펄럭이며 도옥과 맞서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해서 가지가지의 장풍을 일으키면 그 장풍을 소멧자락으로 둘둘 말아 도옥의 뒤를 쫓
아가며 와르르 쏟아놓고 와르르 쏟아진 장풍이 뒷덜미까지 날아오면 허리를 굽혀 딴 곳으로 날려보내 놓고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려놓는 도옥이었다.
그리고 돌을 깨듯 힘껏 휘두르던 주먹을 그대로 조소접의 가슴을 겨누고 내려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등개우나 유원이 일찍 듣도? 보도 못한 무공으로서 도옥의 무공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라고 혀를
차는 한편, 연약하고 가냘픈 몸으로 대적하는 조소접의 무공도 보통이 아니라고 입을 벌리는 것이었다.
휘청! 하고 조소접의 긴 허리가 움직이는가 하면 도옥의 육중한 주먹이 허공을 휘두르며 악착같이 추적하는
것이었다.
일찌기 영웅 호걸들의 생사를 겨루는 싸움은 많이 보아왔지만 아리따운 여인과 삼십여합씩이나 기기묘묘한
재간으로 대적하는 것은 난생 처음으로 구경하는 등개우와 유원이었다. 밀리고 밀고 쫓고? 쫓기고 그러면서
서로 공격하는 삼심여합.
도옥의 무공을 예전과 같이 생각했던 조소접은 더욱? 긴장하고 빈틈없이 공격해 들어갔고 귀원비급으로 몸
을 단련한 도옥은 여유있게 막아내고 빈틈을 노려 반격했다.
그러나 사람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먼저 양몽환과 삼십여합이나 싸워 약간 힘이 빠진? 도옥이 다시 새
적수를 만나 교환한 삼십 여합은 거의 체력을 소모시키고 말았다. 더구나 무공이 낮은? 상대가 아니라 거의
같은 실력의 고수인지라 공격하는 일격마다 신경이 쓰였고 명석한 두뇌의? 대결인 만큼 더 힘이 빠진 것이
었다.
이리하여 도옥의 전세가 조금씩 불리하게 되어갔다.
그리고 도옥 자신도 싸움을 오래 끌면? 끌수록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끼게끔 되었다.
'무협지 > 풍우연귀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조소접의 계략 (0) | 2014.10.23 |
---|---|
9. 불길 속의 두여인 (0) | 2014.10.23 |
7. 염라묘(閻羅廟)에서의 상봉 (0) | 2014.10.22 |
6. 모함에 몰린 양몽환 (0) | 2014.10.22 |
5. 백회요혈(百會要血)의 위력 (0) | 2014.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