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강호에 나타난 도옥
각별한 예를 갖추어 부부의 의를 맺었건 냉수 한 그릇을 떠 놓고 부부의 의를 맺었건 간에
일단 양(楊)씨 가문(家門)으로 출가한 이상 양씨 부인이다.
꼭 남자와 동침(同寢)해야 만이 부부가 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하림으로 말하면 양씨 가문인 양몽환에게로 출가했다 해도 아직 처녀의 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것을 도옥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전 생각대로 첫사랑이니 어쩌니 하는 것은
구역질이 나는 노릇이다.
그러나 도옥은 따로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냥 히죽거린다.
[그까짓 것이 무슨 상관이오
내가 심소저라고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데 양부인이라고 부르라고
핫....... 하....... 그러지 말고 심소저 ! 나하고 부부의 의롤 맺는 것이 어떻소?]
하림은 입이 딱 벌어졌다.
안하무인도 유분수지. 너무나 어이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도옥이었다.
[ 점점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 생각했던대로 악한이군요.
그런 말을 또 다시 한다면 그냥? 두지 않겠어요 ! ]
단호한 말이다.
[ 왜 싫으신 모양이군 !
만일 나와 부부의 의를 맺기만 한다면 심소저는 그야말로 부귀와 명예를 일시에 얻을 것이오 ! ]
[ 무슨 재간으로? 당신같은 사람은 보기도 싫어요 ! ]
[지금은 싫어도 어느 때인가는 반드시 나를? 좋아하게 될 것이오.
내가 얼마 후에? 무술계를 제패하고 맹주[盟主]가 된다면 당신 심소저는
맹주의 어부인(御夫人)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모양이군 ! ]
[어림도 없는....... 저의 오빠도 이기지도 못하면서 주제에 맹주는 무슨 맹주에요? ]
[ 두고 보시오. 양몽환이 내 발등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도록 고통을 줄 때가 올 것이오 ! ]
[흥! 혼자 큰 소릴 치시는군요. 당신처럼 교활한 악한은 한번에.......]
하면서 말을 마치지 못한 하림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 잔등에 꽂아 두었던 장검을 쓱 뽑아들었다.
그러자 도옥은 일순 멈칫 했다가 상대도 안된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한 걸음 나서는 것이었다.
[잠깐 ! 오랫동안 심소저의 무술을 보지 못해서 궁금하던 중인데 오늘 보게 되어?
기쁘오마는 내 말을 잠깐 들으시오 !]
장검을 뽑아 햇빛에 번쩍이며 하림은 운기(運氣)를 조절했다.
[들을 것도 없어요. 이 황야에서 오늘이 끝인줄 아세요 ! ]
[ 좋소 ! 그럼 내가 죽지 않고 심소저를 사로잡아 데리고 가서 내 부인으로 삼으면?
양가놈은 눈 알이 나올 것이오 ! 핫...... 하......]
너털 웃음을 웃으며 한걸음 더 다가서는 것을 하림은 장검을 높이 들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사로 잡힌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요.
그동안 오빠의 무공을 전수받아 저와 홍(紅)언니도 무공이 쟁쟁하다는 것을 몰랐어요?]
순간! 도옥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아픈 상처였다.
어렸을 때는 서로 사랑하던 이요홍(李瑤紅)이?
지금은 양봉환의 어엿한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사실 도옥으로서의 첫사랑은 이요홍 바로 그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로서는 천하 최대의 적인 양몽환의 부인이라는 것이다.
도옥은 이를 갈았다.
[좋아 ! 지금은 우선 심소저부터 내 것으로 만들고 그 다음에 이요홍을 찾아오겠소!]
하고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하림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몸을 비스듬히 누이듯 하며 하림이 쥐고 있는 장검을 향하여 달려드는 것이었다.
우선 하림이 쥐고 있는 장검부터 뺏고 천천히 사로잡을 계략인 모양이었다.
순간 ! 하림은 재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몸을 빼고 검광(劍光)을 하늘 가득히 뿌렸다.
[휘익 ! ]
그러나 하림의 검광은 도옥의 몸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하림의 장검 수법이 미숙한? 것이 아니라 도옥의 몸 놀림이 더욱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하림은 이상한 눈 빛으로 도옥을 노려보았다.
상상외로 빠른 도옥이었다.
<예전의 도옥이는 아니군, 몸 놀림이 저토록 빠를 수가 있을까? >
라고 생각하리만큼 날쌔고도 재빠른 동작이었다.
그림자만 왔다갔다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도옥은 여전히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제법이군 ! 못 보는 동안에 꽤 늘었는데...... ]
분통이 터진 하림은 달려가서 장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허사였다.
눈 앞에서 아른거리던 도옥이 어느틈에 뒤로 돌아갔는지
하림이 힘껏 잡고 휘두르던 장검이 공중 높이 솟았다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하림은 오론 팔이 시큰하고 이상한 통증을 느끼며 이마에는 땀만 송송 배어 나왔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해서 장검이 떨어진 곳을 멍청히 바라보고 섰던
하림의 눈 앞에 성큼 나타난 도옥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심소저 ! 천강지력(天强指力) 수법이 어떻소? ]
하림은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일전으로 승부가 난 싸움에서 눈만 흘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비겁한 수법이군요 ! 여자에게 천강지력을 쓰다니......]
[ 핫...... 하...... 비겁할 것은 조금도 없소.
어쨌든 미안한 일이지만 심소저는 내가 모시고 가야겠군.]
하고는 하림에게로 덮쳐 들었다.
그때 하림은 도옥의 천강지력 수법으로 오른 팔의 혈도가 찔려 있어서
왼 팔로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덮쳐든 도옥을 피하여 왼 팔을 휘둘러보았지만 금방 왼 팔의 혈도도 짚히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이제는 여지없이 도옥이 하자는 대로
아니 도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몸을 움직일 기운도 없는듯 했다.
그것은 너무 분한 나머지 마음을 모질게 갖고 고통을 이기려다 지친 허탈상태 그것과 흡사했다.
지금까지 팔팔거리던 하림을 요지부동으로 만들어 놓은 도옥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신도 유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당신은 무엇 하는 놈인지는 모르지만 쭈그리고 앉은 꼴이 죽여 달라는 모양이군.
내가 손댈 것도 없이 혼자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이 어떨까? ]
도시 안하무인의 오만한 태도로 허세를 부리는 데는 밸이 뒤집힐 유원이었다.
신도 유원은 엉거주춤 일어서며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건방진 놈, 내 비록 나이가 많아 적수가 못되지만 그따위 건방진 소리에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하며 상대할 태세를 취하자 도옥은 가볍게 코웃음을 친다.
[그래 ? 그렇다면 이 금환이랑의 분근착골(分筋錯骨) 맛을 보여주지! ]
말이 떨어지자 마자 도옥이 섰던 자리에서 멋지게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윽 !]
신도 유원의 가느다란 비명이 들렸다.
그야말로 한 수도 써보지 못한채 오른쪽 팔굽을 도옥에게 짚혀버렸던 것이었다.
신도 유원 ! 당시의 고수 신도 유원으로서는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으깨어지는듯한 아픔을 참으며 신도 유원은 비지땀을 흘렸다.
<아 ! 이 신도 유원의 십년 무공도 허사로구나 ! >
절로 나오는 탄식을 어금니로 깨물며 도옥의 손아귀에 짚힌 팔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자 도옥은 얼굴을 찌푸리며 유원의 팔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어 비틀어 버렸다.
[ 우드득 ......]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유원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히...... 히...... 맛이 어떤가 소원대로 죽지 못한다면 내가 간단히 목숨을 끓어줄까? ]
하며 승자(勝者)의 쾌감을 은근히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의 도옥의 얼굴은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었다.
이때, 하림은 눈을 감았다.
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정말 유원을 죽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눈을 뜬 하림은 입술을 떨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치고 말았다.
[사악한 도옥, 놓지 못해요! ]
외마디 비명같은 하림의 고함 소리에 흘깃 하림을 바라보던 도옥은
하림의 얼굴에서 어떤 연민의 정을 느꼈는지 조금 수그러지며 정색을 하는 것이었다.
[심소저! 무슨 말씀인지 ? ]
그제야 하림은 자기의 외마디 소리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신도 유원이 비록 자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해도 죽게 버려둘 수는 없었다.
하물며 하림같은 여자로서야 !
하림은 조금 언성을 낮추었다.
[ 잡은 손을 놓으세요]
이때 도옥의 표정은
<심소저와는 아무 관계도 없지 않으냐? >
는 표정이었다.
[ 왜 그러시오? ]
[ 그분은 지금 상처를 입은 몸이에요.]
[어디서 상처를 입었는지, 그까짓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나는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하는 사나이 대장부요.]
[사나이 대장부라는 사람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마구 죽일 수 있어요 ? ]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내 자유요, 심소저는 관계하지 마시오! ]
[비겁해요 ! 그분을 죽이지 않으면 저를 잡아갔다는 것이
저의 오빠에게 알려질까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죠? ]
그러자 도옥은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하림을 노려보았다.
[ 천만에 ! 내가? 심소저를 데려간다는 것을?
그 양가놈이 속히? 알았으면 좋겠는데 두려워? 한다고? 핫...... 하...... ]
패기에 넘친 웃음 소리에 하림은 눈끝이 올라 갔다.
[그렇다면 그분을 놓아 주세요. 그래서 수월산장(水月山莊)으로 보내세요.]
[그래서 양가놈에게 알리라는 말이군 !
심소저가 내 것이 되었다면 양가놈이 펄펄 뛰겠군 !
그것도 좋은 생각이오.
심소저는 .내 마음을 잘 아시는군 ! 역시 내 부인이 될 자격이 있군 ! 핫...... 하...... ]
하림은 고개를 돌리며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는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 타고난 성질이 악종이면 할 수 없군 ! ]
그러나 도옥은 더욱 잔인한 표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유원의 비틀어 잡은 팔굽에 힘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기어이 유원의 요혈을 찔러 기절해 쓰러지도록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 그러나 그렇게 순순히는 죽지 않을걸 !..... ]
더러운 물건이나 쥐었다 놓은 것처럼 손을 툭툭 털어버리는 도옥이었다.
유원은 숨소리도 없이 길게 엎어진 채 쓰러져 있고 햇빛은 머리 위에서 쨍쨍 내려쬐는 한낮이었다.
유원을 쓰러뜨린 도옥은 눈이 부신듯 손바닥을 이마 위에 올려 햇빛을 가리우며 쓰러진 유원을
발 끝으로 꾹꾹 눌렀다.
[생긴 것은 힘깨나 쓰게 생겼는데...... 형편없군. 한 수에 쓰러지는 놈이......]
혼자 중얼거리며 하림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도옥의 악독하고도 잔인한 행동을 보다 못한 하림은 그가 다가오는 것이 뱀 보다 더 싫고 징그러웠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도옥의 손아귀에 걸려 있는 신세였다.
도마 위에 놓인 고기 바로 그것이었다.
[그만 하고 살려주면 무엇이 어때서 잔인한 행동을 하죠?]
눈에서 불꽃이 틜듯 이글거리며 분노의 목소리로 외치자
도옥은 그 까짓 일쯤...... 하는 식으로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흥 ! 내 취미지. 아무 관계가 없어도 나는 사나이란 말이오. 한번 한다 하면 하는 사람이오.]
[ 저리 비키세요. 보기도 싫어요 ! ]
[ 지금은 보기 싫어도 때가 오면 보고 싶어 몸이 마를 것이오 !]
[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아요 ! ]
[ 핫 ...... 하 ...... 염려 마시오. 내가 보고 싶도록 만들어 드리겠소!]
시종 빈정거리며 하림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도옥은 음성을 낮추며 화제를 바꾸었다.
[심소저 ! 지금 저 놈을 왼쪽 팔과 두 다리,
그리고 말도 못하게 아혈(啞穴)을 마비시켜 버렸지만 오른 팔은 그냥 두었소.]
[왜 오른 팔까지 못 쓰게 할 것이지 그냥 두었죠 잔인한 사람이.]
[그래도 잔인하다는 말이 듣기 싫어서 오른 팔은 그냥 두었소.
그렇지만 저렇게 사홀 동안만 누워 있으면 다 완치되어 움직일 수 있을 거요.]
[사흘 동안 당신은 매정하게 저 분을 버려두고 가겠지만
세상에는 당신같이 악한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사흘이 아니라 이따 저녁에라도 지나는 사람이 구해 줄거예요,]
[ 바로 그것이오. 그래서 오른 팔을 그냥 둔 것이오.]
[무슨 말이죠? ]
[심소저 말대로 분명히 누가 와서 구해 줄 것이오.
그러나 치료법을 모르는 사람이 무턱대고 그의 손을 만지면
저 놈은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참지 못해 그만 죽어버릴 것이오.
그 뿐인가, 지금 그의 몸에 있는 무공의 힘은 전부 저 오른 팔에 집중되었단 말이오.
그래서 누가 저 놈을 구하려고 몸을 만지면 뼈가 쑤셔 아프게 된단 말이오.
그러면 저 놈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오른 팔을 휘두를 것이오.
훗...... 그런데 저 놈이 휘두르는 팔에 한 번 맞기만 하는 날이면
저 놈을 구하려던 놈도 그자리에서 죽어버린단 말이오, 핫...... 하......]
하림은 몸서리를 쳤다.
[잔인하고 악한 ......!죽어서 지옥에도 못갈 놈 !]
[지옥 지옥의 맨 밑바닥에 간다 해도 죽고 난 후면 무슨관계요.]
하고는 하림이 다른 말을 더 하기 전에 하림의 허리를 옆구리에 끼고는
성난 호랑이처럼 앞으로 먼지를 날리며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도옥의 사령화신(四靈化身)인 주작(朱雀)과 현무(玄武)가 바짝 따르며
엄호하듯 쫓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막한 태고 그대로의 정적이 조용히 깔리고 우거진 수풀이며 바위 위에
뜨거운 헷살이 내려 쪼이고 있었다.
새 소리,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황막한 들판, 가끔 먼지를 날리며 바람이 지나갈뿐
적막하기 그지없는 들판을 조용히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도옥의 악랄한 수법으로 정신을 잃고 가사(假死)상태에서 희미하게 정신이 든 유원은
잊었던 아픔이 일시에 몰려오므로써 절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도옥에게 당하던 쓰라리고도 어이없는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복수의 불길은 두 눈에서 눈물이 되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러나 이렇게 아픔을 참지 못하고 또 그 누구든지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한,
이 황야에서 죽어갈 것만 같은 두려움에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일어나야지. 그래서 하림이라는 여자가 도옥에게 잡혀갔다는 것을 전하고
또 나도 무공을 닦아야지...... 으음...... 양씨라는 사람이 사는 곳이.......
수월산장이라고...... 아이고...... 누가? 지나가지 않을까?...... >
시시때때로 쑤시고 저려오는 여러곳의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중얼거리는 소리가 말이 되어
소리만이라도 났으면 아프고 답답함이 덜할 것만 같았다.
땀도 흐르지 않고 목은 바싹바싹 말라갔다.
몸 어느 한 곳이라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더구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 고통이 가중해지는 데는
신음소리만 헛김이 되어 입술사이로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나 신도 유원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 >
아무리 비통해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디선가 빈 상자 통이 데굴데굴 굴러오는? 듯한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든
유원은 그와 반대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빈 마차에 허름한 옷을 입은, 한 눈에 보아도 나뭇군이 분명한
사람이 마차에 탄 채 흔들 거리며 악양성을 향하여 지나가고 있었다.
순간, 유원은 있는 기력을 다해 상하지 않은 오른 손을 흔들어
그 나뭇군 마부가 자기의 위치를 알고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데 성공했다.
입은 벙어리가 되고 몸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유원으로서는 막상 나뭇군 마부가 와도
어떻게 해야겠다는 결정도 짓지 못한채였다.
이윽고 유원의 손짓에 가까이 다가온 나뭇군 마부는 어질게 생긴 눈이 커지며 혀를 찼다.
[에구 ...... 이게 무슨 일이오? 대낮에 강도를 맞다니.......]
하면서 유원을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
순간, 사지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지 못한 유원은 고슴도치처럼 떼굴떼굴 구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나뭇군 마부는 그대로 동정 어린 목소리로
[아무나 밖에 나오면 날강도를 당하니...... 이 놈의 세상 살 수가 있나.....]
세상이 험악한 것을 한탄하며 그래도 유원을 부축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유원은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했다.
도옥의 말대로 오른 손을 내저어 만일 마부의 몸 어느 부분에 맞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숨질 것은 뻔한 일이고 그렇다고 다가와서 부축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알릴 수도 없는...... 말은 안되고 무작정 아픔을 참으며
몸을 떼굴떼굴 굴릴 수 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마부는 그 착하디 착한 표정으로 얼마큼 내려다 보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그러는 줄 알고
[그럼 가만히 누워 계십쇼 제가 두 팔로 안으리다.
그래서 마차로 악양성까지만 가면 용한 의원이 있읍니다요.]
하며 이번에는 두 팔로 안을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견디다 못해 유원은 이 마부에게서의 구명(救命)을 단념하고 아예 접근도 하지 못하게
오른 손에 주먹을 쥐고 힘껏 휘둘렀다.
오른 손을 휘두르므로써 당장 쑤셔 오는 아픔을 참는 것이 죄 없이 착한 마부의 생명을
앗는 것 보다 나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오른 손을 휘두르며 얼씬도 못하게 하는 유원을
한참 내려다 보던 나뭇군은 고개를 기웃기웃하고는 휭하니 돌아 서고 마는 것이었다.
[원.....이세상에 별 사람 다 있군......무슨 말을 해야 알지 !
살려주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주먹질이라니......세상인심 참 고약해지는군 !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뛰어올라 멀리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긴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온 몸이 나른해진 유원은 아픔도 정신이 있을 때 느끼는 아픔이지,
지금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한없이, 한없이 자신의 몸뚱어리가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기분으로 또 한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뜨겁게 내려 쬐던 햇빛도 그 뜨거운 열기를 다 뽑아 냈는지 아니면
서늘한 들판 바람 때문인지 조금 시원해진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떴을 때는
아니,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 보는 젊은이의
시원한 눈이 바로 이마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환상이 아니면 자기는 아주 죽어서 어느 지옥 한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도 시원한 젊은이의 눈은 거기에 있었다.
그제야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조금전까지의 일을 하나하나 더듬을 수 있었다.
그러던 유원은 오른 손을 들어 땅에 글씨를 쓰겠다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시원한 눈의 주인은 한 걸음 물러서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보기에는 나이가 이십 사오세쯤 되어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한,
그리고 남의(藍衣)인지 흑의(黑衣)인지 젊은이가 입은 옷이 확실히 보이지 않은 것은
자기가 너무 고통에 시달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에 힘을 주어
땅바닥에 글씨를 그렸다.
[내 몸을 조금도 만지시 마시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살리리면 내 몸에 손을 대지 마시오.
지금 나는 분근착골 수법으로 상처를 받은 몸이오.
또 나의 오른 손에 맞으면 당신의 생명이 위태롭소.
나는 아혈(啞穴)을 짚혀 말도 하지 못하오.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소.]
쓰는 대로 젊은이는 따라 읽으며 놀라움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본 유원은 젊은이가 자기를 해칠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 글씨를 내려쓰기 시작했다.
[내 걱정은 마시고 수월산장으로 가서 양대협 어른께 양상공의 부인이
도옥이라는 자에게 잡혀갔다고 전해주시오. ]
그러면 자기도 살아날 방도가 있을 것만 같았다.
유원이 쓰기를 마치자
젊은이는 이글이글 타는 눈과 분노를 띄우며 경련을 하듯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도대제 어느 놈이 당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 ]
하는 물음에 유원은 아무 걱정도 짓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감은 눈 끝에서는 눈물이 흘러 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불행히도 저는 추궁과혈(推宮過穴) 수법을 몰라
고쳐드리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오마는 당신 말대로 수월산장으로 양공을 찾아가겠소!]
하고 돌아서는 순간,
언제 어디서 왔는지 도사(道士) 차림으로 옷을 입고 불상(佛像)을 든 여인과 딱 마주쳤다.
그러자 여도사는 약간 머리를 숙여 젊은이에게 읍(揖)을 하고는 한 걸음 비켜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수줍은듯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것이었다.
[말씀드리옵기는 황송하오나 지나는 길에 그 사정이 하도 딱하여 말씀드립니다.
지금 저 분은 옛날 서역(西域)의 삼음신니(三音神尼)가 창안한 불혈착골(佛穴錯骨) 수법으로
상처를 받았읍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경계하는듯 아니면 증오하는듯 한 것이 아름다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다.
여도사의 조용한 말에 젊은이는 공손하게 읍하며 애원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치료하는 방법이 없을까요? ]
하고 물은 것은 불혈착골 수법을 한 눈에 아는 여도사가?
분명히 그 치료법도 알고 있으리라는 추측에서였다.
[글쎄요, 하도 써 본지가 오래여서.......]
하면서 불상을 내려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유원의 옆으로 가서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었다.
그 다음 가늘고 어여쁜 두 손이 도포 속에서 나왔다.
그 순간!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조금만 만져도 그렇게 뼈를 부수고 살을 저며내는듯 참을 수 없이 아프던
유원의 몸이 어쩌면 거짓말 같이 흡사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함 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고사하고 여도사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이상한 쾌감마저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도사는 시종 눈을 감고 불공을 드리듯 기도하는 자세로 어느 부분에서는 빠르게,
또 어느 부분에서는 느리게 주물러 막힌 혈도와 관절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후, 여도사의 손이 서서히 멈추어지는 것이었다.
[잠깐만 조용히 누워 계시다 일어나세요.]
하고는 옆에서 걱정스러움과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고서 있는 젊은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비록 악랄한 수법으로 다친 상처이지만 이틀 안에 고치면 인체에는 상관이 없읍니다.]
하고 조용히 읍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젊은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만일 상대가 남자라면 손이라도 덥석 쥐고 흔들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그러면서도 젊은이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아닌 증오와 경계심이 떠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냐고 물을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참으로 고마우신 도사이십니다. 죽은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윱니다.]
하고 고마움을 표하자 여도사는 다만 고개를 숙이고 읍을 할 뿐이었다.
이때, 여도사의 치료로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신도 유원은 일어나는 길로
여도사의 발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자 대비하신 부처님의 은총을 여도사님께 빕니다.
은혜를 갚고자 하오니 이름만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여도사는 모든 세상사가 그렇지 않으냐는 듯이
또 한번 읍을 하고는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었다.
[부처님께 바친 몸이 이름이 있겠읍니까? 일어나 앉으십시오.]
유원이 일어나 앉기를 기다리던 여도사는 얼마 동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불혈착골 수법으로 상처를 낸 사람이 혹시 도옥이라는 사람인가요? ]
[네, 분명히 도옥이라고 했읍니다.]
[어떠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 자세히 보셨읍니까? ]
[무릎까지 내려오는 황의(黃衣)에 금환검(金環劍)을 메고 있읍니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것 같은 팔지를 손목에 끼고 있었읍니다.]
여도사는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그리고는 하얗게 이빨 자국이 난 입술읕 떨며 가만히 혼자 말하는 것이었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줄 알았는데......]
긴 한숨을 쉬는 그녀의 얼굴에는 일순 날카로운 빛이 맴돌다 사라졌다.
그리고는 음성을? 조금 높이는 것이었다.
[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지요? ]
[ 자세히는 모르겠소만 북쪽으로 가는 것 같았읍니다.]
하고 확실치 못한 대답을 하자 여도사는 실망하는듯 했다.
그리고나니 유원은 불쑥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복우삼인(伏牛三人)과 사흘 후에 악양루에서 만나자는 말을 했지......
분명히 도옥과 같은 옷을 입은 소년이......>
복우삼인을 쓰러뜨리고 가면서 두 명의 황의소년 중에 한 소년이 하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꼭 만나셔야 한다면 악양루로 가 보시오.]
하고는 복우삼인과 황의소년들이 싸우던 이야기에서부터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유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여도사는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었다.
[ 시간은 정하지 않던가요? ]
[그저 삼일 후라고만 하고 시간은 정하지 않더군요.]
하는 말에 여도사는 결심이나 한듯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것이었다.
[이틀만 더 기다리지. 지금까지 몇년을 기다렸는데 ......]
혼자 말하듯 하며 악양성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여도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유원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대관절 이 여도사와 도옥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 ....... 원한일까, 사랑일까? ...... 이상한 일이군. 어딘지
분노에 싸인 듯한 여도사의 얼굴이 이상하다 했는데 그렇다면 원한일까......>
이때, 여도사의 물음이 없었던들 유원은 언제까지나 혼자 생각에 잠겼을 것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로 가시겠어요? ]
어디론가 떠날 차비를 하며 묻는 말에 유원은 후딱 정신이 들었다.
[글쎄요, 수월산장으로 가서 양부인이 잡혀갔다는 것을 전해야겠읍니다.]
그러자 여도사의 입에서는 상상치도 못했던 말이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만 두세요 ! ]
눈이 휘둥그래진 유원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 문이 막혔다.
그때 다시 여도사의 말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들려왔다.
[제가 안 이상 알려드리지 않아도 좋아요. 양상공이 아나 제가 아나 같아요.]
점점 모를 소리만 하는 것이었다.
[...................]
[남들은 도옥을 무서워 겁내지만 저는 겁내지 않아요.]
[ 그러면 여도사께서 ? ]
유원은 여도사가 양대협에게 전해주겠다는 것인줄 알고 손을 저었다.
[안됩니다. 나는 그 양씨 부인에게 맹세했읍니다. 꼭 전해주겠다구요.]
하면서 양부인이 자기에게 대해준 친절을 생각했다.
그러나 여도사는 완강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의 말을 들으세요. 만일 듣지 않는다면 당신의 혈도를 찔러 버리겠어요.]
참으로 놀라운 말이었다.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손수 고쳐준 상처를 다시 상하게까지? 하며
못가게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유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한번 더 간청해서 양대협에게 위급을 알리고 싶었으나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애 목구멍까지 나왔던 말이 도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내 상처를 고치는 것으로 보아 이 여도사의 무공도 만만치 않은 모양인데...... 어쩌지?......>
안절부절했으나 여도사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이때까지 여도사와 신도 유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젊은이는 여도사의 증오 같기도 하고
경계심 같기도 한 표정을 세심히 바라보다가는 술그머니 자리를 비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젊은이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여도사는 개의치 않고 신도 유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지금부터 저를 따라 오세요 ! ]
명령하듯 하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으나 그녀의 표정에 위압되어 들었던 고개를 내렸다.
[네?? 네 ...... 생명을 구해준 구명은인(救命恩人)인데 무슨 말인들 거역하겠읍니까? ]
풀이 죽은 유원은 고삐 잡힌 송아지가 되고 말았다.
[ 그럼 앞장을 서세요.]
[ 어디로 가시려는지 ?......]
[ 하여간 앞장 서세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유원은 하라는 대로 여도사의 앞에 섰다.
[가세요.]
여도사가 가라는 대로 걸음을 옮기며 유원과 여도사는 악양성으로 들어왔다.
[걸음을 멈추세요.]
유원은 걸음을 멈추었다.
[우선 여인숙을 찾아 가야해요.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에게 몇 가지의 무공을 가르쳐 드리겠어요.
이틀 후에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
길거리에 있는 여인숙은 거의 모두가 비교적 깨끗했다.
그 중에서도 깨끗한 여인숙을 골라 든 여도사와 유원은 잠시? 피곤한 몸을 풀고
밤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무술을 배워 주기 시작했다.
원래 고수인 유원이 비록 몇년 간을 쉬었다 해도 그 소질이나 터득하는 속도는 놀라울 만치 빨랐다.
두어 시간에 걸쳐 기기묘묘한 절수를 완전히 익힌 유원은 여도사의 무궁무진한 비법에
절로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지금까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수법에 경탄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가르치는 대로
하나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배우는 유원의 성실한 태도도 태도이지만 지치지 않고 가르쳐 주는
여도사의 꾸준한 노력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기기묘묘한 절수는 세 가지로 대분(大分)되어 있었지만 그 하나하나를 연구하면
무궁무진한 수법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유원은 무릎을 치며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어느덧 새벽, 동이 틀 무렵에야 운기 조식하고 있는 여도사의 옆을 떠나 방을 나온 유원은
시원한 새벽 공기를 길게 들여마셨다.
그러던 유원은 그래도 수월산장의 양대협에게 양부인의 위급을
알려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유원은 갑자기
[옳지 ! ]
하며 손뻑을 탁 쳤다.
그리고 새벽 잠에서 덜 깬? 여인숙의 심부름꾼을 두드려 깨웠다.
무슨 일이냐고 눈을 비비며 나오는 심부름꾼을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간 유원은
은밀한 이야기나 하는듯 말 소리를 낯추었다.
[여보게,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려나?]
[나으리, 무슨 말씀이신지......]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건성으로 되묻는 심부름꾼의 머리를 탁 !치며 유원은
정신을 차리라는 시늉을 했다.
[이봐! 긴하게 어디를 좀 가야겠는데 그럴만한 사람이 있을까?]
그제야 심부름꾼은 크게 하품을 하며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었다.
[돈만 준다면 얼마든지 있읍죠.]
[돈은 얼마든지 있다. 한 사람만 불러오너라.]
허리를 굽신하고 물러 갔던 심부름꾼은 곧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너무 늙은 노인이었다.
허연 수염에는 때가 껴 꺼뭇꺼뭇하고 남루한 누더기 옷차람에 등까지 굽었다.
노인을 본 유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 이 늙은이가 무엇을 한다고 데려 왔어? ]
그러자 노인은 굽은 등을 펴 보이며 유원에게 바싹 다가서는 것이었다.
[이래봬도 하루에 백리 길은 문제 없소.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말도 모르는 모양이군 ! ]
[그러면 천리 길도 갈 수 있소? ]
[가다 뿐이오! 무슨 일인지 시켜나 보슈.]
이모 저모로 한동안 노인을 뜯어 보던 유원은 이 노인이
혹시 어떤 비범한 인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노인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됐소.]
하고는 간단한 사연을 대충 적어 봉한 편지(片紙)를 내주었다.
노인이 떠난 후 유원은 그 노인에 대한 내력을 심부름꾼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어디 전들 알 수 있나요?
우리 여인숙에서 열흘 동안이나 묵으며 밥 값도 못내는 늙은이라오.
며칠 있으면 자기 손자들이 돈을 가지고 온다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죠.]
유원은 노인의 정체가 아무래도 수상하다 생각했으나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고
황금 덩어리를 심부름꾼에게 쥐어 주었다.
[저 노인이 돌아오거든 반을 주고 나머지는 자네가 갖게! ]
하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도옥, 진짜 그는 누구인가 ?
운기 조식하며 그대로 불상(佛像)처럼 앉은 여도사 옆에서 눈을 붙이는듯 마는듯 하던 유원은
이미 동이 튼 것을 깨닫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밖으로 한 걸음 옮겨 놓았을 때였다.
뜰 가운데에 턱 버티고 유원을? 노려보는 황의(黃衣)의 소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언제부터인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소년은
여자와 같은 어여쁜 얼굴이었다.
손목에 낀 금환(金環)과 등에 멘 금환검(金環劍)은 아침 햇빛에 번쩍이고 눈동자는 이슬처럼 반짝였다.
순간 ! 유원의 뇌리에 악몽같은 일이 떠올랐다.
<음...... 바로 나를 병신으로 만든......>
하는데 황의 소년의 음성이 새벽 공기를 뚫었다.
[소리내지 마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방으로 들어갑시다.]
하며 성큼 문 앞으로 다가섰다.
유원은 급히 소년을 가로막았다.
온몸이 후들거렸다.?
그것은 어제 분근착골 수법으로 상처를 받은 것도 받은 것이지만
지금 방 안에는 운기 조식하고 있는 여도사가 무아의 경지에서 단정히 앉아 있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물론 사태가 불리하면 또 어떠한 싸움이 벌어질지
그것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 들어가진 못하오 ! 여기서 말하오 !]
[ 시끄럽게 굴면 또 병신을 만들어 버릴테야! 비키지 못해?]
하며 방문의 문 고리를 잡아 여는 순간 방안에서 운기 조식이 끝난
여도사가 밖으로 나오려고 문을 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이 열리며 엉겁결에 딱 마주친 여도사와 황의소년은
서로 얼굴이 닿을 듯한 위치에서 맞서게 되었다.
그리고 여도사의 입에서 날카롭고도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들려오기는 잠시 후의 일이었다.
[앗! 도옥이! ]
그리고는 얼굴을 할킬듯이 덤벼드는 여도사를 황망히 피한 소년은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여도사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부드득 갈았다.
[기어이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 그 몇년 동안을 ......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던 너 도옥이 ! ]
잠시의 여유도 없이 소년의 얼굴을 향하고 손을 뻗치며 달려들었다.
순간! 황급히 뒤로 물러 섰던 소년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여도사의 공격부터 막아내고는
잠깐만 참으라는 듯이 손을 흔든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 입이 몇개 있어도 내 가슴 속에 맺힌 원한은 풀지 못해 ! ]
하며 여도사가 잠시 들었던 손을 내리고 공격 태세를 풀자
그제야 황의의 소년은 눈을 굴리며 여도사의 아래 위를 훑어보는 여유를 가졌다.
[여보시오, 도사님 !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례하단 말이오? ]
순간! 여도사의 눈꼬리가 치켜올랐다.
[이 뻔뻔스러운 놈 ! 누구 앞에서 딴청을 부려 !
이 자리를 피하려 하지 말고 무릎꿇고 죄를 받는 것이 남자야! ]
[내 참 별꼴 다 보겠소. 누구한테 봉변을 당했나 본데.
왜 나한테 화풀이요? 나는 당신을 본 일이 없소.]
[점점 한다는 소리가, 아직도 그 악한 버릇을 못 고치고, 자 이 동숙정의 복수를 달게 받아라 !]
하면서 다시 달려드는 것을 재빠르게 피한 소년은 하늘을 항해 호탕하게 웃는 것이었다.
[핫...... 하....... 동숙정이라고? 동숙정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 난 이때까지 듣도 보도 못했는데......]
하고는 여도사의 날카롭고도 사나운 표정에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돌리며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러자 여도사 동숙정은 그렇게 찾아 해매던 도옥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도포에서
찬바람을 휘익휘익 날리며 그 뒤를 쫓아 달려 나갔다.
[비겁한 놈 ! 도망을 치면 얼마나 가려고 ! ]
무서운 여자였다.
아름답고 착하던 여자가 한번 원한이 맺히면 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혼자 혀를 차며 황의의 소년과 여도사가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유원이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여도사가 뒤쫓고 있는 황의의 소년은 그렇게도 원한이 맺혀 찾고 있는
금환이랑 도옥은 아니었다.
도옥의 사령화신(四靈化身)중의 주작(朱雀)이라는 소년으로서 너무나도 도옥과 닮았기 때문에
꿈길에서도 찾아 헤매던 동숙정의 눈에는 영락없이 도옥으로 보였을 것은 너무나도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한편 !
언제까지나 소년과 동숙정이 사라진 방향만을 지켜보고 넋을 잃은듯 서 있던 유원은
바로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돌아보고 입이 딱 벌어지도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라지 마라!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 또 병신을 만들어 버릴테다.]
입을 딱 벌린 유원은 세상 돌아가는 것이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아니 이럴 수가...... 하는 것은 생각뿐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여도사 동숙정에게 쫓겨 달아난 황의의 소년이 유원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서야 어찌 나타날 수가 있으며, 또한 황의의 소년을 뒤따르던 여도사는
어찌 되었는지......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임마 ! 벌린 입이나 다물어, 더 벌리고 있으면 아혈(啞穴)을 찔러버리겠어!]
아무리 마음을 다부지게 먹으려 해도 너무나 놀라운 일에 혼이 나간 유원이었다.
만일 이러한 상태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체되었더라면 그대로 그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원에게는 이상하게도 위급할 때마다 하늘의 도움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아름다운 여자가 생명을 구해주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황의의 소년이 유원을 노리고 있을 때에 청아하고도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사형! 오랜만이군요.]
하는 소리에 후다닥 몸을 돌린 황의의 소년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을 깜박거리는 소년의 앞에는 청색(靑色)으로 곱게 단장한 여인이
검은 머리를 위로 올려 맵시있게 틀어올리고 함빡 웃으며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유감인 것은 그녀의 한쪽 팔이 빈 소매만 바람에 약간 움직이는 것이었다.
미모의 여인이 사형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서기는 했지만 황의의 소년에게는
전혀 생소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눈올 깜박거리며 서 있는 황의의 소년을 뚜렷이 바라보던 여인은
그래도 모르겠느냐는 듯이 얼굴을 소년 앞으로 바싹 댔다.
[너무 오랜만이어서 잊으셨나요....... 저 이요홍이에요. 그래도 모르시겠어요? ]
그러나 소년은 깜박이던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젓는 것이었다.
[소저는 사람을 잘못보신 모양이오.
저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사매(師妹)로 삼은 일이 없소이다.]
이와 같이 불의로 일어난 기현상의? 덕택으로 정신을 차린 유원은 어떻게 되어가는 판국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얼마를 그러고 섰던 유원은 무엇인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옳지 ! 아까 여도사도 그렇고 지금 이 여자도 도옥을 찾고 있는 모양이군 !
그렇지만 도옥과 똑같이 생긴 놈이 네 명이나 있으니 어느 놈이 진짜 도옥인지 알아 볼리 없지......
암 몰라보고 말고.......>
유원의 추측은 적중했다.
지금 이요홍 앞에서 고개를 젓는 소년은 도옥의 사령화신 중의 현무(玄武)라는 놈이었다.
의복은 물론 생긴 모양까지 거의 똑같으니 도옥으로 착각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그들을 분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 뿐이었다.
목소리만은 제각각이었다.
동숙정과 마찬가지로 이요홍도 현무를 도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모르는 이요홍이나 도옥과 이요홍의 관계를 모르는 황의소년이나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이요홍은 더욱 답답한지 발까지 동동 굴렀다.
[몇년 못보는 동안 사형은 달라지셨군요. 이요홍도 몰라보시고...... 정말 모르겠어요? ]
소년은 점점 난처한 모양이었다.
부득부득 도옥이라고 우기는 여자 앞에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옥이라고 나설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자 눈치를 챈 이요홍은 하나 뿐인 오른 팔을 들어 소년의 앞길을 막고자 했으나
두 팔이 성한 소년에게는 힘이 미치지 못했다.
[나는 도옥이라는 사람이 아니오. 그리고 이요홍이라는 사람도 모르오.]
하고는 몸을 날려 달아나는 것이었다.
순간, 이요홍은 도옥을 놓쳐서는 하림의 거처를 알 길이 묘연해진다는 것을 생각하고
소년의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사형! 저는 모른다고 해도 좋아요. 그러나 심소저는 어디 있어요? ]
바싹 따르며 쫓아나가는 것이었다.
기기묘묘한 일로 해서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 만사가 이미 정해진 대로 움직여지는 것인지,
신도 유원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인생을 살아가는 연극인지도 모른다.
유원은 그 연극이 게속 우연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우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원이 어지러운 머리 속을 식히기도 전에 대문이 열리며
지팡이를 든 백발의 노인이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오기나 한 듯이 황의의 소년이 금환을 쩔렁거리며
지금 막 들어선 노인 앞에서 정중히 읍(揖)하는 것이었다.
순간! 유원은 온 몸의 피가 모두 정지되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공포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의 뒤를 쫓듯 달려와 지금 읍하고 선 황의의 소년은 여도사 동숙정이나
외팔의 이요홍이 찾고 있는 금환이랑 도옥 바로 그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옷차림과 생김새가 똑같은 네 명의 소년과 지금 들어온 황의의 소년을 구별할 수 있는 판단력이
유원에게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병신이 되도록까지 만든 도옥의 그 잔인한 수법과 차가운 웃음이
뇌리속에 너무나 지독하고 선명하게 박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원의 추측대로 분명 도옥이었다.
[노선배님 ! 오랫동안 뵙지 못하였는데 어찌 지냈사오며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금환이랑 도옥은 노선배님의 염려지덕(念慮之德)으로 무사히 지냈읍니다.]
하고 엎드려 읍하며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백발의 노인은 주름진 얼굴이 몇번인가 씰룩씰룩? 경련을 일으키다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도옥이라고?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로다.
내 듣기로는 귀원비급을 찾다가 수백길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들었는데
허! 거참 괴이한 일이로다.]
믿기지 않는다는 노인의 말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실지로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시겠죠. 그러나 어찌 이 도옥이 그렇게 죽을 수 있겠읍니까.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값없이? 죽어서야 되겠읍니까?]
[허, 거참......그렇긴 하다만 네가 살아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데도 믿기지 않는다니 어이된 말씀이십니까? ]
[글쎄 믿어야 좋을지...... 어떨지.......]
하고는 도옥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노인은 정말 이 소년이 도옥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 늙은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하는 물음이 떨어지자 마자 도옥은
<이거 사람 어떻게 보는 거야? >
하는 식으로 어이없어 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비록 몇년 동안 뵈옵지 못했다고 해서 어찌 노선배님의 성함 마저? 잊겠읍니까?
몇년 동안 강호(江湖)무술계를 떠돌아 다녔지만 소천의(蕭天儀) 노선배님만큼
의술(醫術)에 능한 분을 보지 못했읍니다.]
그래도 소천의는 사실인가 아닌가 해서 다시 묻는다.
[그러면 네가 분명히 천용방(天龍幇)의 도옥이란 말이냐? ]
[예, 그렇습니다, 방주(幇主) 이창란(李滄瀾)의 제자 도옥이 틀림없읍니다.]
소천의는 더 물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분명히 도옥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는
풍문으로만 떠돌던 도옥의 죽음을 부정할 도리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절벽에서 떨어진 놈이 무슨 재간으로 살아났으며
또 비보(秘寶) 귀원비급(歸元秘)은 어찌 되었을까...... >
궁금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면 귀원비급은 어쨌느냐? ]
[예,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소천의 노선배님을 찾아 강호를 헤매었읍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여기서 만나 뵙게 되는군요.
확실히 이 도옥은 복이 있는 놈입니다.]
[ 나를 찾아?? 무슨 일로? ]
[소천의 노선배님께서 궁금하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겠지만
때가 되면 천천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소천의는 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교활하고 방약무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도옥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성품이었다.
하던 말을 중단하고 입술에 침을 싸악 바른 도옥은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 이 금환이랑 도옥은 귀원비급을 탐독하고 무술을 익혀
이 천하에 도옥을 당할 놈이 하나도 없읍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소천의 노선배님께서는 이 도옥의 말을 믿어 주시겠지만 믿지 못하시겠다면 당장,
그렇죠, 당장 한 가지의 무공을 보여드릴 수 있읍니다. 아시겠죠.]
[.........]
소천의는 숫제 대꾸도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도옥의 얼굴 위로 싸늘한 그리고 잔인한 빛이 얼룩져 지나갔다는 것을
소천의는 알 길이 없었다.
[...... 그래서 쓰러진 천용방을 이 도옥이 다시 일으켜 강호의 병신같은 고수들을
싹 쓸어보겠다는 것입니다.
소천의 노선배님께서는 응당 찬성하실줄 믿고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래서 음으로나 양으로나 이 도옥을 도와주십사 하는 부탁과 또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읍니다.]
듣고 있자니 기막힌 말 뿐이었다.
소천의의 수염이 부르르 떠는 듯 했다.
[지금 너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수 년전 소실봉(小室峰)에서의 그리고 단혼애(斷魂涯)에서의 그 피비린내 나는 살상(殺傷)을
벌써 잊었느냐?]
도옥이 말하려는 것을 소천의는 손으로 제지하며 말을 이었다.
[가만, 내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끝나고 우리 강호에는 지금 태평 세월을 누리고 있는데
네 어찌 천용방을 세우고 평지풍파를 일으키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미 몸도 늙었다만 늙은 몸으로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대로 세상이 편안하기를 바란다.
두번 다시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마라! ]
수염을 부르르 떨며 말을 끝냈다.
그러나 도옥은 눈에 살기(殺氣)를 띄우면서 차디차게 냉소하는 것이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이 도옥은 사나이 대장부!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하는 성질입니다.
이 도옥이 소천의 노선배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래도 이 도옥이가?
사나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지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받을 일이라면 이런 방법을 쓰지 않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죠.]
[......듣기 싫다. 어서 물러가라 ! ]
[아직 물러갈 시간이 안되었읍니다. 물러가기 보다 제가 좀 모시고 가야겠는데요.]
[뭐 ? 날? ]
[그럼 또 누가 있읍니까? ]
[안 간다! ]
단호한 말이다.
그러나 도옥의 대답도 단호했다.
[ 가도록 해야겠소 ! ]
겸손도 다 버리고 이제는 같이 소리를 지른다.
[ 안간다면 ? ]
[가도록 만들죠.
그렇지 않아도 소천의 노선배님을 찾으려 한것은 다름이 아니라 귀원비급에
단약(丹藥)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 그 약을 좀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싫다.
더구나 그 약이 구인제세(救人濟世)의 약도 아니겠고......]
[물론이죠.
그러나 노선배님이 이 도옥을 도와 패업(覇業)을 이루면 부귀영화가 줄줄이 쏟아질 겁니다.]
[이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무엇이든 싫다.]
강경하게 거절하는 소천의를 노려보던 도옥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 그리고는 느닷없이 달려들어 소천의의 곡지혈과 명문혈을 누르고 돌아서면서
아혈(啞穴)까지 눌러버렸다.
그리고는 축 늘어진 소천의를 발로 툭 차면서 대문 쪽으로 향하고 백호(白虎)를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백호야 ! 이 늙은 놈을 내 처소까지 업고 가라! 그러나 무례한 행동은 하지 마라 ! ]
사령화신(四靈化身)중의 백호는 언제 와 있었는지 대문안으로 뛰어들어와
도옥이 시키는 대로 소천의를 업고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소천의가 백호의 등에 업혀 나가자 도옥은 얼른 그렇게 해 버릴 것을 공연히 실갱이를 벌였군......
하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털며 돌아서다 한쪽 구석에 얼어 붙은 듯
서 있는 유원을 발견하고는 손뼉을 치며 통쾌하게 웃어대는 것이었다.
[핫......하...... 나는 또 어느 나으리라고 너 이놈 명(命)도 길구나......]
하고는 잠시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 놓고 얼르듯 하다가 표정을 딱 바꾸는 것이었다.
[네 놈울 죽일 수도 있지만 써 먹을 데가 있을 듯도 해서 살려준다.
그 대신 오늘부터 너는 내 부하가 되는 거다.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죽여주마 ! ]
하는가 했는데 비호처럼 덤벼 들어 소천의를 늘어지게 한 수법으로
유원을 쓰러뜨리고는 번쩍 들어 방안으로 던져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아혈까지 눌러 유원을 던진 도옥은 방문을 닫다 말고
어느 누구인가의 손에 덜미가 잡혔다.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너무나도 순간적인 일이어서 자기의 덜미를 잡은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얼마나 독하게 잡혔는지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도옥은 당황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하낫 두울......세엣......하면서 자기의 덜미를 잡은 손을 낚아챔과 동시에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가 훌쩍 던져버리고 말았다.
순간 !
[ 앗 ! ]
하고 비명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사람의 배를 깔고 앉은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엇! ]
도옥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하는 것과 함께 밑에 깔린 사람의 놀라는 비명이
짤막한 시간에 방 안의 공기를 찢었다.
동숙정이었다.
[ 동숙정 ! ]
[ 이 사갈같은 도옥아 ! ]
동숙정과 도옥은 서로 어울려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서로 밑에 깔리지 않으려는 싸움이 한참 지나갔다.
그러나 여자는 여자였다.
도옥의 완력에 별 수 없이 밑에 깔려버린 동숙정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갈같이 포악한 놈아! 너를 찾아 몇년을 고생했는데.......
오늘...... 여기서...... 너를 죽여 뼈를? 깎아...... 먹어야......]
숨이 찬 것은 물론 너무나 원한과 분통에 차 있던 동숙정으로서는 어떠한 말을 해야
속에 맺힌 원한이 풀릴지 말을 맺지 못하고 몸을 뒤채며 도옥의 손등을 물어 뜯었다.
그러나 도옥은 지난 일이야 어찌 되었건 그리고 동숙정과의 원한이 어찌 되었건
그런 것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오랜만에 맡아보는 여자의 체취에 불쑥 욕정(欲情)이 솟아 올랐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동숙정과는 대조적으로 도옥은 음탕한 그리고 굶은 사자가 먹이를 만난 듯
씩씩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날뛰는 것이었다.
[이거 왜 이래? 오랜만에 만났으면 우선 정(情)이나 나누고 차차 말할 것이지......]
어디까지나 도옥다운 태도요 행동이었다.
그 밑에서 동숙정은 요동을 쳤다.
그러나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복수고 뭐고 우선 급하게 된 사태부터 수습해야 할 위치의 동숙정이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옷은 다 찢어지고 도옥의 요구대로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위기에 처한 동숙정으로서는 이를 악물고 발버둥만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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