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3. 묘령의 여인

오늘의 쉼터 2014. 10. 22. 01:00

3. 묘령의 여인


 

옥성서선녀묘(玉城西仙女廟)에서 다정선자의 호화판 초대연이 베풀어진 그 다음날.


다정선자의 정체뿐만 아니라 많은 손님을 진수성찬으로 대접하고 술이 취한 틈을 타서

 

행방이 묘연해진 것도 장사부(長沙府) 에서는 일대 괴변이라고 마을 전체가 발칵? 뒤집혔는데,

 

이번에는 더더욱 괴이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장사현에서도 백만부호(百萬富豪)이자 무술계의 거인인 신도 유원이 어디로인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초대연에서 새벽녁에 돌아온 유원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이틀날 집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

그날 이후로 한번도 유원을 보지 못했다는 말도 있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정선자의 초대연이 괴이한 잔치였는데

 

그 뒤를 이어 신도 유원이 종적을 감추었다면 절로 거리가 술렁거리게 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뿐이 아니었다.

 

신도 유원처럼 세상에 더 부러울것 없는 사람이 가족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 억측이 분분했다.

다정선자 같은 아름다운 여인에게 반해서 그날 밤으로 다정선자를 따라갔을 거라는등,?

 

다정선자가 아닌 어떤 시녀와 불륜의 정을 맺고 산 속에서 지금도 운무(雲霧) 의? 정에

 

정신이 없을 것이라는등, 술이 너무 취해서 계곡으로 굴러 떨어져 죽었을 것이라는등

 

여러가지의 억측이 장안을 들끓었다.

이때 , 유원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수 장인청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소리야. 분명히 나하고 같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리 믿으려해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제 멀쩡하게 돌아온 사람이 오늘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해도 너무나 확실한 사실에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렇다고 없어진 유원이 나타나 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

 

태수 장인청은 거리에 술렁거리는 소문대로 무인 고수들을 인솔하고

 

어제 잔치가 벌어진 곳으로 유원을 찾으러 떠났다.

그러나 꽃과 나비 같은 시녀들로 선경(仙境)을 이루었던 곳은 황막한? 들판,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것처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황막한 벌판일 뿐,

 

술항아리 하나 발견할 수도 없었다.

세상에 괴이한 일, 괴이한 일 해도 어제 일처럼 괴이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혹시 그 장소가 여기가 아니고 어느 다른 곳인가 하여 부근 일대를 수색케 했으나

 

손톱 끝만한 단서 하나 찾지 못하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술이 그렇고 무슨 여자가 그런가.

 

빈 술항아리 하나 찾아 볼 수 없으리만치 깨끗하게 치우고 떠났다면,

 

아니...... 아니...... 내가 어제 꿈을 꾼 것이 아닌가,

 

꿈 속에서 술을 마시고 선녀들이 춤을 추고......>

그러나 장인청은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분명 어제 일은 꿈이 아니었다.

<여기 이렇게 다정선자가 보낸 편지(片紙)가 구겨진채 주머니에 들어 있지 않은가?>


장인청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는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변괴(變怪)로고,변괴로고. 이러다가 내가 미치겠군!>


한편!

장사현에서 묘연히 사라져버린 신도 유원의 행방도 찾지 못한채 하루가 지나간 그 다음날 오후였다.

첩첩이 둘러 싼 산을 가운데로 외줄기 길이 꼬불꼬불하게 시냇물처럼 이어진 오솔길, 한껏?

 

눈을 들어 시선이 닿는데 ,한껏 뻗치면 실오리 같이 아물거리던 외줄기 길이 산모퉁이로 사라지고

 

그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악양성(岳陽省)으로 가는 대로(大路)가 나타난다.


때는 한 낮, 사정없이 내리 쬐는 뜨거운 햇빛과 후덥지근한 바람이 간간이 부는 한 낮에?

 

 행색이 초라한 사나이가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다.

옷은 다 찢어진 베 잠방이와 산에서 아무렇게나 꺾어 짚은 지팡이, 그리고 발가락이 나오는 가죽신,

 

어디로 보나 걸인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사나이가 악양성을 향하여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얼마를 휘적휘적 걸어가던 사나이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다시 가야? 할 길을 한참 응시하다가는

 

조금 속도를 내어 부지런히 걸어가는 것이었다.

 

어느 누가 가까이서 온다 해도 바로 그가?

 

장사현에서 행방을 감춘 신도 유원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악양성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걸인처럼 변장한 신도 유원,

 

틀림없는 무술계의 고수, 신도 유원이다.


장사현에서의 풍설대로 다정선자이게 반한 것도, 시녀와 놀아난것도,?

 

더구나 계곡에 굴러 떨어져 죽어버린 것도 아니다.

 

지금 유원은 오직 한가지 다정선자라는 여인의 정체가 무엇이며

 

또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변장을 하고

 

길을 떠난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날? 초대연에서 술에 취해 늦도록 자다 눈을 뜬 유원은 귀신이라도 환장할 지경으로

 

돌변한 주위의 변화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차 ! 싶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향긋한 술과 아름다운 선녀, 심금을 울리는 풍악과 매혹적인 다정선자 이 모두가 하룻밤의 꿈만 같았다.


그러나 유원은 잔치가 벌어졌던 그 잔디밭에 쭈그리고 앉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초대연은 꿈이 아니었고 다정선자라는 여인 또한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이리저리 생각하던? 유원은 자기 앞날에 벌어질 일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정선자라는 여인의 정체를 알아낼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 일단 집에 돌아온 유원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하인의 옷을? 벗겨 입고는

 

다정선자가 지나갔을 만한 이 대로(大路)를 따라 악양성으로 향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고 황토 길에서는 다정선자의 일행일 듯한 말발굽과? 마차의 바퀴 자국을

 

볼 수 있었으나 악양성으로 향하는 대로에서는 수 없이 오고 가는 마차 때문에

 

그나마 분간할 재주가 없었다.

혹시 지나는 사람에게 이러 저러한 마차가? 지나가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거의 같은? 말이었다.

 

매일 수 십번씩 지나다니는 마찬데 어느 것이 무슨? 마차인지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 묻는다는? 것을 단념한 유원은 악양성에서 찾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악양성은 번화한 곳이었다.

 

길거리에도 수 십대의 마차가 줄을 이었고 즐비하게 늘어선 집과 와글거리는 사람들,

 

과연 국도(國道)의 요충지임을 잘 나타내 주는 곳이기도 했다.

날이 거의 저물어 한 집, 한 집 등잔불이 밝혀지는? 시간에야

 

유원은 악양성의 중심부인 악양루(岳陽樓) 앞에 섰다.


악양성에서 음식 맛이 제일 좋은 이 요리집 악양루는 그 만큼 음식 값도 비싸서

 

일반인들이나 가난한 사람은 큼직한 간판이나 쳐다 보는 것으로 이를 쑤시고

 

헛 트림을 할 정도로 크고 호화판의 요리집이었다.

지금의 초라한 형색으로 보아 큰 간판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거지꼴인 유원이지만

 

악양루의 간판을 바라보는 순간 잊었던 시장기가 불쑥 솟는? 것이었다.

 

몹시 배도 고프고 지치기도 한유원은? 악양루의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비단으로 깔린 이층의 층계를 서슴지 않고 올라가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어이 ! 웬 놈의 거지가 거기가 어디라고 올라가는 거냐! 썩 내려와서 죽여달라고 빌지 못할까 ! ]


하고 호령치는 것이었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고함 소리에 유원은? 그 자리에 서서 돌아섰다.

 

놀란 이 집의 심부름꾼인 모양이었다.

 

꽤 힘께나 쓰겠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놈이 심술굿게 보였으며 떡 벌어진 어깨가 심부름꾼으론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유원이? 돌아서자 심부룸꾼은 정말 가소롭다는 듯이?

 

아니면 미친놈이 아닌가 하는듯한 표정으로 유원을 바라보고 섰다가 눈썹을 곤두세웠다.


[눈알이 있음 똑똑히 보란 말야.

 

너 같은 주제에 거기가 어디라고 감히......썩 내려오지 못해 ! ]

서슬이 시퍼렇다.

 

그러나 변장은 했을망정 천하가 다 아는 당대의 고수 유원으로서는 눈썹은 고사하고

 

손톱 하나 까딱 할리 없다.

그렇지만 유원은 이따위 쓸데없는 놈에게 정체를 밝힌다든가

 

또는 맞붙어? 큰 소리를 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음성을 바꾸어 쩔쩔매는 시늉을 했다.


[어이쿠, 나으리 술이나 한 잔 얻어마실까 하고 올라가는뎁쇼.]

[핫..... 하...... 술을 얻어마신다? 하....... 하...... 얻어먹는 놈이 이층까지 올라가?]

[이층은 안됩니까요?]

[점점 한다는 소리가. 내 참, 이놈아 이층은 올라가기만 해도 열냥이다, 열냥 ! ]


[열냥?l


[그래, 열냥이라면 너 같은 놈은 눈 알이 나올꺼다.

 

어쨌든 내려와서 술 대신 내 주먹이나 한 대 먹여주마]

유원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어디 주먹 맛이나 보자고 대들고 싶었으나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 놈을 구워 삶자. 혹시 내가 이 악양땅에 있을 동안 만이라도 쓸모가 있을지 모론다......>

 

하는 생각이 들자 태도롤 돌변하여 굽혔던 허리를 폈다.


허리춤에서 잡히는 대로 금덩이 하나를 꺼내 놈의 주머니에 쑥 넣어주었다.


[자네, 꽤 쓸만하군. 이 금덩이로 옷이나 한벌 사 입게 !]


순간, 사태는 돌변했다.

 

지금까지 으르렁거리던 심부름꾼은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을 비비며 백배사죄하는 것이었다.


[어이쿠! 나으리 이놈이 눈이 있어도 제대로? 어른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입니다.

나으리,? 이 천치 바보놈이 저지른 죄를 용서하옵소서.]

좀 전까지 그 좋던 기백은 어디로 갔는지 황금 한덩어리에 눈이, 그리고 정신이 돌아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유원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점잖게 꾸짖으며 일어나기를 권했다.


[여보게, 이 무슨 짓인가. 어서 일어나서 술이나 한 잔 주게.]


그제야 놈은 죽었던 목숨이 살아나기나 한 것처럼 후다닥 일어나며 유원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예, 예, 드리구 말굽쇼. 여부 있겠옵니까. 이층으로 올라가서 제일 상좌석에 앉으십쇼, 네, 네.]

[아니, 이 소매는 놓게. 내 올라가너 앉을테니, 제일 좋은 술과 요리를 올려오게. 돈은 염려 말고......]


[원, 천만에 나으리님도 별 말씀을, 이놈에게 주신 것 만으로도 저희 집에 있는 술을 다 드려도 남습니다.]


[아니다. 염려 말고 가져오너라!]


[네, 네 ! 올라가십쇼!]

주객이 전도라는 말은 이런 때를 두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유원은 만족하게 웃으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비교적 밖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어두워지는 거리를 내려다 본다음 천천히 이층의? 주위를 돌아보았다.


한쪽 구석으로는 큰 등이 밝게 불이 켜져 있고 바로 그 등잔 아래의 식탁에는 황의(黃衣) 로 단정하게 입은

두 명의 젊은이가 그림처럼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두 명의 젊은이는 얼굴의 생김새나 옷 입은 모습이 똑같을 뿐만 아니라

 

등에? 짊어진 장검(長劍)도 똑같았다.

 

아무리 자세히 봐도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은 데다가 검은 가죽신발이 똑같이,

 

세상에 쌍둥이라 해도 저토록 똑같을 수 있을까 싶었다.

 

유원은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뜨며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깎아 놓은 나무 처럼 꼼짝도 않고 그렇다고 무슨 이야기도 하는 것이 아니어서

 

더욱 괴이하게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나이가 거의 오십이나 되었을 노인이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졸고? 있는 것인지 습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눈을 감은 것으로 보아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또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윌대로? 여위어서 가죽에다 뼈를 싸았는지

 

뼈에 가죽을 붙였는지, 뼈다귀만 앙상한 것이 눈에 뜨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고 있는 모습에 그나마 노인의 생명이 붙어있다고 느껴질 뿐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노인이었다.

그림같이 앉아 있는 두 명의 젊은이와 뼈다귀만 앙상한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유원은 괴상한 생각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유원은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으로

 

짐짓 기다려보자는 심산이 불쑥 솟아 올랐다.

그래서 겉으로는 그들을 안 보는 척 하면서도 온 신경을 그 쪽으로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윽고 온 신경을 그들 세 사람에게 기울이고 있는 유원의 귀에 아래 층에서 부터

 

올라오는 우렁찬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자국 소리는 어찌나 큰지 높은 산 위애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같았다.

 

그리고는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이층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먼저 들어은 사람은 우선 보기부터 끔찍했다.


머리는 큰 소대가리만 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한 눈에도 가히 그의 억센 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걸친 옷이 가관이다.

 

염소가죽과 쇠가죽으로 이어 만든 두툼한 저고리가 그의 큰? 배를 못다 가리우고

너덜너덜 흔들거리고 사슴의 뿔 같은 지팡이를 들고 들어서는 것이었고?

 

그 뒤를 이어 이번에는 키가 구척이나 넘는 그러나 힘이라고는 조금도 없을듯한,

 

그래서 아랫도리를 걷어차면 그냥 거꾸러질 것? 같이 멋 없고 싱겁게 생긴 사나이가

 

어술렁어술렁 따라 들어와서는 뼈만 남은 노인 앞에 둘러앉는 것이었다.

이 그러나 각색으로 생긴 세 명이 한 자리에 둘러앉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유원은

 

 그 생김새만 보고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그 다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뼈만 남은 노인은 자기 앞 자리에 누가 와서 앉거나 말거나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냥 끄덕끄덕 졸고만 있는 것이 더욱 이상하고 우스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때까지도 말 한마디 없이 그림처럼 앉아 있던 똑갈은 황의의 두 젊은이 중에서

 

벽 쪽으로 앉아 있던 젊은이가 고개를 들며 노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기침을 하는 것이었다.


[흠 ! 이제는 복우삼인(伏牛三人)세 분이 다 모인 모양이구려!]


괴상하게 생긴 세 명에게 하는 말이다.

 

순간, 소대가리 처럼 머리가 크고 가죽 옷을 입은 사람이 눈을 사방으로 굴린다.


[그렇소, 이제 우리 삼형제가 다 모였소. 슬슬 시작이나 할까!]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원은 앉음새를 고치며 귀를 세웠다.

[잠깐!]

똑같이 생긴 젊은이 중에 이번에는 다른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준비가 다 되었으니 시작은 해도 좋소만......]

[어떻다는 말이오!]

[서로 대적하는 방법을 의논하지 않았으니 그것부터 미리 의논하는 것이 좋을듯 하오.]


그제야 졸고만 있던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기분 나쁘게 웃는다.

[헛......헛...... 방법이라? 그것도 좋지만 우리는 원래 기러기 잡는 데는 명수거던!]

하는 말에 이번에는 키만 멋 없이 큰 녀석이 사실이 그렇다는 듯이 어깨를 흔들며 일어난다.


[아무렴, 명수지. 개천에서 뒤집힌 배를 봤나? 핫하......]

완전히 두 명의 젊은이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젊은이는 다음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당신들이 기러기 사냥에 명수인지, 아닌지 우리가 알 바 아니고 또 상관할 바도 아니오.

 

다만 알고 싶은 것은 우리들이 싸울 때 한 사람씩 싸울 것인지 아니면

 

한 번에 모두 싸울 것인지를 말하는거요.]

그러자 황소 대가리가 나섰다.

[한 명씩 싸우는 것은 재미가 없소. 여럿이 모여서 후딱후딱 해버리는 것이 좋겠소 ! ]

[좋소 !]

괴상한 차림의 세 명과 똑같이 생긴 두 명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들 때문에 싸우는 것일까. 그리고 이 놈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 따라가서 알아봐야지. 혹시 생각지도 못한 괴상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여기까지 생각한 신도 유원은 좋은 술과 요리를 기다리고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되도록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조심하며 이층의 계단을 하나하나 소리없이 내려왔다.

 

요리집 악양루(岳陽樓)를 나온 다섯명은 남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험한 길을 십 여리 가량 단숨에 달려온 다섯 명은 약속이나? 한듯이

 

그 자리에 주춤주춤 멈추어 서고는 서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대적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두어 걸음 뒤에서 따라 오던 유원이 급히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숨을 몰아쉬는 순간이었다.

[이놈 ! 썩 나오지 못할까, 누구들의 무술인데 엿보려고 ! ]


유원은 가슴이 덜컥했다.

 

유원의 무공으로서 겁낼? 것은 못되지만 아직 그들의 무술 실력을? 모르는 데다가

숫적으로 불리한 유원은 속으로


<들켰구나. 어떻게 한다!......>

하면서 숙였던 머리를 들고 다섯 명이 서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것이 웬 일인가!

 

소대가리가 썩 나오라고 고함을 친것은 분명 자기에게 친 호령인줄? 알았는데

 

난데 없는 사나이가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나오는 것이었다.

 

그제야 유원은 긴 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아닌 저 사나이에게 고함친 것이 분명했다.

사나이가 어슬렁거리며 일어서 나오자 소대가리의 눈이 가로 찢어진다.

[네 이놈. 도대체 어떤 놈인데 함부로 어른들의 무공을 엿보려고 !]

그러자 사나이도 만만치 않았다.

[허 ! 그놈 입버릇이 고약하군! 여기가 어디라고 딱딱거리슈?]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키만 멋 없이 큰 놈이 소맬 걷어붙였다.

[저런 고얀 놈 ! 이 키다리의 주먹 맛이 그리운가 보군!]

하면서 달려나가는 것을 뼈만 남은 노인이 황급히 만류했다.


[쓸데 없는 짓은 말아. 우선 저놈들 부터 해치우고 남은 힘으로 맛을 보여줘도 늦지 않다 !]


그제야 멋 없이 키만 큰 사나이는 이 노인 아니면 네 놈은?

 

벌써 가루가 되었을 것을 특별히 봐서 살려준다는 식으로 큰 키를 휘청거리며 돌아서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그들 세 명이 떠버리는 것을 지켜 보고만 있던 황의의 두 젊은이는

 

그들과의 간격을 넉넉히 잡고는 작은 소리로 싸울 계획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는 세 사람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럼, 시작합시다.]

황의의 젊은이가 정중히 싸움을 청하자 소대가리가 입에 거품을 물며 달려들었다.


[뭐, 시작하자구! 요런 피라미같은 놈.]

하면서 사슴뿌리같은 지팡이를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침착하게 사슴뿌리의 지팡이를 장풍으로

 

가볍게 막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서두르지는 마시오.

우선 그 지팡이로 세 번만 공격해 보시오.

그래서 내가 막지 못하면 진 것으로하겠소!]

[그따위 싸움도 있다더냐. 더 말 못하게 네 놈의 입부터 찢어 놓겠다.]

바위 뒤에 숨어서 그들의 다투는 광경을 보고 있던 신도 유원은?

괴상한 세 사람의 무리보다 두 명의 똑같은 젊은이의 늠름한 태도와 여유있는 대적 행위에 매우 놀랬다.


<흠, 대단한 젊은이군. 어디서 훌륭한 무술께나 배운 놈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는 저토록 큰 소리를 못 칠텐데......>


하면서 더욱 정신을 바싹 차리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황소 대가리의 사슴뿌리같은 지팡이는 그 위력이 어마어마 했다.


한번 휘두르면 휘두른 자리에만 둥그런 원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십 여개의 날카로운 무기를 동시에 사용한 것처럼 주위의 돌과 모래를 휘익휘익

 

회오리바람 처럼 날려 황의의 젊은이에게 사정없이 덮어 씌우는 것이었다.

순간 !

황소 대가리의 사슴뿌리 지팡이에 휘말린 황의의 젊은이가 돌과 모래를 뒤집어 쓴채

 

만신창이가 되어 들판에 뻗어버릴 것이라고 모두 생각했다.


그러나 이 어찌된 일인가.


몰래 숨어서 바라보고 있는 유원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황소 대가리의 거칠고 사나운 장풍(杖風)이 휘몰아쳐 들어오는 순간,

 

날쌔게 몸을 날려 그의 공격권에서 벗어난 황의의 젊은이는 어느 틈엔가

 

몸을 돌려 황소 대가리의 뒷? 등을 향하고 두 손울 공중으로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힘껏 앞으로 밀어붙였다.

그때였다. 그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먼지 속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질 젊은이를 보기 위하여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잠시 후에 들려올 신음소리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으윽 ! 하는 신음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면서

 

뽀얗게 뒤덮었던 먼지가 사라졌다.

순간, 그 누구의 입에서도 똑같은 외마디 소리가 터져나왔다.

[앗!]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진 것은 황의의 젊은이가 아니라

 

바로? 황소 대가리 그였다.

상당한 중상을 입었는지 두 팔과 발을 허우적거리며 버둥거리는 것이었다.


눈이 휘둥그래지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던 키다리와 노인은 믿기지? 않는 일에

 

분통을 터뜨리며 발을 굴렀다.

 

그 중에서도 아직 나이가 젊은 키다리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비겁한 놈들! 정정당당히 싸우지 않고 암암리에 공격을 하는 놈들은 내 주먹맛을 봐야지!]


그러나 황의의 젊은이는 좀전과 마찬가지로 손을 들어 잠깐 기다리라는 듯이 흔들고는 외치는 것이었다.

[한 사람씩 덤비지 말고 저 해골같은 영감도 같이 덤비면 어떠시오 ! ]

그러자 한번 분통이 터진 키다리는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이놈이 아직 입은 살아서......]

하고 뇌까리며 흔들흔들 달려드는 것을 보다 못한 젊은이는 날쌔게? 몸을 피해

 

키다리의 주먹을 피하는 척 하면서 키다리의 긴 하체(下體)를 힘껏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이건 또 더 맹랑하게 썩은 기둥이 쓰러지면 저 모양일까?

 

싶게 좌우로 기우뚱 하다가는 정말 멋 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었다.

키다리가 지른 고함소리도 채 사라지기 전애 그의 몸은 벌써 활개를 펴고 뒹구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자기의 아우 두 명을 잃어버린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은 턱이 덜덜? 떨렸다.

 

그러면서도 찢어진 눈은 매섭게 젊은이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의의 젊은이는 저? 늙은이도 처치해버려야 깨끗하겠다는 듯 굳은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몸을 굽히고? 비호같이 노인의 가슴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주위가 조용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호같이 달려든 젊은이의 머리에 가슴이 들이받힌 노인은

 

앙상한 나뭇가지가 사납고 차가운 겨울 바람에 흔들리듯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픽 쓰러지는 것이었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세 명의 적수를 그것도 두 명의 황의의 젊은이중 한 사람만이 대적하여

 

손 한번,? 발 한번, 머리 한번 움직여서 땅 위에 쓰러뜨리고마는 데는

 

당대의 고수 유원도 가슴이 써늘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처음 그들이 당도했을 때의 살벌함과는? 달리 도처에서 신음 소리가 나는? 들판을

 

유유히 뚫어보던 황의의 젊은이는 그때까지 한편에서 뒷짐을 쥔채 싸우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동료 젊은이에게 뜻있는 웃음을 보내고는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당신들 복우삼인(伏牛三人)은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지금 나와의 싸움으로? 각기 기경(奇經)과 대혈(大穴)그리고 동맥(動脈)이 찔렸소.

 

지금은 단지 아프고 쑤시겠지만 칠일이 지나면 냄새가 나며 살이 썩을 것이오.]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핀 다음 다시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신들이 죽지 않고 살고 싶다면 사흘 후에 악양루로 가시오.

 

그러면? 그 곳에 우리들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것이오.

 

그 분에게 사정하고 의논하면 살아날 길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오.]

내뱉듯 말을 마친 젊은이는 옆에 서 있는 동료에게 눈짓을 하고는 땅을 울리듯

 

요란한 걸음을 옮기며 유유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바위 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유원은?

 

끝내 그들이 누구이며 또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아내지도 못하고

 

그들의 놀라운 무공에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었다.

두 명의 젊은이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고 잠시 후.


그때까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바위 뒤에서 엉거주줌하고 서있던 유원의 고개가

 

갑자기 멎으며 앞을 주시했다.

 

그것은 당장 숨이 넘어가는듯 신음소리를 요란하게 내던 뼈다귀의 노인이 벌떡 일어섰기 때문이다.


<흠, 저놈의 영감이 일부러 혈도를 찔린 척 하고 죽는 시늉만 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재간으로 저렇게 일어날 수 있담...>


하는 동안 노인은 쓰러져 있는 소대가리 옆으로 가서 추궁과혈법(推宮過穴法)으로

 

막힌 혈도를 눌러 뚫어주고는 나머지 키다리도 역시 혈도를 뚫어주는 것이었다.


그런 얼마후에야 소대가리가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키다리도 일어나 앉았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조차 분명치 않은듯 사방을 휘둘러보던 소대가리가

 

그 큰 자기? 머리 뒤통수를 툭 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된거요?]

그러자 노인은 좀전 처럼 턱을 덜덜 떨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 병신같은 놈들. 한 방에 떨어지다니......]


말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기도 한 방에 떨어져 사시나무 떨듯 했으니 말이다.

 

입안이 썼다.


그러나 키다리는 비록 자기가 쓰러졌지만

 

젊은이의 날쌘 동작에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는 모양이었다.

[핫, 그 놈들 어찌나 빠른지. 어물어물 하다가는 죽을 것만 같습디다요.]

그래서 더 대적할 생각도 못하고 쓰러져 죽는 시늉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키다리가 수선을 떨듯 말하자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완전히 어두워진 주위를 돌아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이제까지 우리 복우삼인이 강호에 떠돌아다니며 무공을 날려 일찌기 오늘처럼? 당한 일이 없는데,

 

이 일을 무술계에서 안다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다는 말이냐?]

그래도 체면과 명예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키다리가 성큼 나섰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그까짓게 무슨 걱정이유?]


[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구?]

[그렇잖아요? 누가 봤어요?]

[임마! 아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한 놈이 있지 않았느냐 !]


그제야 키다리는 주먹맛을 보여준다고 날뛰던 생각이 났다.


황의의 두 젊은이를 깨끗이 처리한 다음 멋있게 해치우려던 또 하나의 젊은이 !


그 순간,

 

사방을 휘둘러 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 뿐 !


그 젊은이가 옆에 서있다 해도 어두워서 찾아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 젊은이도 복우삼인이 쓰러져 신음하는 동안 어디론가 없어져버린 것이 확실했다.


얼마 동안 근심에 잠겨있던 노인은 갑자기 나타났다?

 

어디론가 사라진 젊은이가 누구인지 그놈부터 잡아서 처치하지 않으면

 

정말 다시는 강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누구며 또 어디에 있는지 주위는 깜깜절벽,

 

그대로 돌아설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우선 돌아가서 찔린 혈도나 치료해야지 ! ]

[아니 지금 혈도를 풀었는데 또 무슨 혈도를 푼단 말이오.]


황소 대가리의 의아한 물음에 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지금 당장은 풀어졌다다는 경맥(輕脈)이 엉망진창으로 상한? 모양이다.

 

사실 경맥이 상했으면 나같은 재주로써는 도저히 고칠 길이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키다리가 허리며 팔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놈들 말대로 악양루에 가야겠군요. 사흘 후에.]


[만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갈 필요는 없지!]


하는 노인의 단호한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소대가리는 그래도 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어이쿠 ! 그까짓 죽음을 누가 두려워 해요 ! 죽으면 죽고 살면 살지.

 

그래도 죽기까지는 꽤 아플텐데 그 고통을 어떻게 참는담......]


하고 말꼬리를 흐리자 키다리도 같은 생각이라는듯.


[하긴 그래요. 죽어 봤자 별 것은 아니지만 아픈 것은 정말 못 참겠거든요,

 

아이고, 벌써 여기가 아픈 것 같은데......]

하는 것이었다.

한편,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더?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자기 역시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가 먼저 악양루로 가자는 말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마침 두 아우가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고 하자 마지 못해 동의하는듯


[할 수 없지, 고통을 참지 못한다면 가야지......]

하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황소 대가리와 키다리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까짓거 죽는 셈 치고 가보죠.]


노인은 묵묵부답,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 동안 침통한 표정으로 서있던 노인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그 두 놈이 어쩌면 한 놈처럼 똑같이 생겼을까?]


[글쎄, 그 놈들 생긴 것도 똑같고 옷도 똑같이 입어서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키다리의 놀라운 표정에 소대가리는 무릎을 탁 치며 노인을 흔들었다.

[형님 ! 혹시 그 놈이 금환이랑 도옥(金環二郞 陶玉)이 아닐까요?]

[글쎄 나도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금환이랑인 줄 알았는데?

 

금환이랑 도옥은 한 놈 뿐일텐데 어째 두 놈인가. 그것이 모를 일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 도옥이란 놈을 전에 한번 봤는데 옷이 지금 그 놈들과 똑같더란 말이오.

 

처음 볼 때 어디서 본 놈이라 했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노인과 소대가리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키다리는 어서 사흘이 지나 가서

 

막힌 혈도가 뚫려지기만을 바라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도옥이고 뭐고 지금 아무도 없는 벌판에서 떠들어봤자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노인은

 

긴 탄식 처럼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소대가리와 키다리가 터벅터벅 뒤롤 따랐다.

노인 일행이 어둠 속으로 묻혀버리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원은


<금환이랑 도옥 !>


을 몇 번이고 외우듯 중얼거리며 바위 뒤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몇 걸음 앞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디선가

[휘익 !]


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물체가 앞을 탁 ! 가로막는 것이었다.

 

미치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일에 뒤로 몇 걸음 물러섰던 유원은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이

 

바로 지금 자기의 시야 앞에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뼈뿐인 노인이라는 것을 알고 약간 당황했다.


<이 놈의 영감이 언제 냄새를 맡고 달려왔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노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터졌다.


[너는 무엇을 하는 놈인데 여기에 숨어 있느냐?]


유원은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미처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노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터졌다.


[여기 숨어서 우리들의 행동을 다 봤지 ?]

그제야 유원은 정신을 바싹 자리며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래 봤소 !]


[그럼 우리가 쓰러진 것도?]


[물론 !]


[우리들이 말하는 것도?]


[그것도 들었소. 그러나 당신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무슨 참견이오?]


[상관이 없다고? 그것으로 네가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할 거요?]

[할 방법은 많지만, 우선 내가 보는 앞에서 미안하지만 네가 죽어야만 되겠는데,

 

그래야만 나도 안심하고 강호에 나타날 수 있지!]


유원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냉정했다.


[죽어주지 못하겠다면?]

[생명이 아까와서 죽지 못하는 놈도 있지.

 

 네가 죽어주지 못하겠다면 할 수 없군.

 

 내가 조금 수고를 해서 죽여줄 수 밖에!]

 

 


하고 말을 마치자

 

마자 오른손을 높이 들면서 유원의 사혈(死穴)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순간 !

<소문대로 이 복우삼인은 악종이구나! >

하고 유원은 생각하면서 재빨리 그의 공격을 피해 몸을 돌리며 뒤에 메고 있던 검(劍)을 뽑아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들의 눈은 비상하여 상대방의 행동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유원이 등 뒤에서 검을 뽑아드는 솜씨를 본 노인은 감탄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흥 ! 네 놈이 검을 뽑아드는 솜씨는 대단하다만 그따위로는 어림없지 ! ]


비웃는듯 냉소를 터뜨리며 달려드는데는 당대의 고수 유원이라도 우선 몸부터 피해야 했다.


<저 놈의 영감이 아까는 손 하나 쓰지 못하고 쓰러지더니 어디서 이런 악이 나는지......>


유원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노인의 거샌 장풍이 먼지를 일으키며 찬란한 별빚을 가리우면 유원의? 굳게 잡은 검이

 

먼지를 거두며 하늘에 수 없는 검광(劍光)을 뿌렸다.


별빛과 검빛이 번쩍이면서 뿌우연 먼지를 일으키고 마치 부는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적하기 칠십 여수 !

유원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태풍이 그래도 예전에는 강호에? 이름을 날리던 신도 유원이다.

 

비록 악명이 높은 복우삼인의 노인이지만 유원의 무공으로서 겁낼 것은 못된다.

 

그러나 지금 대적하기 칠십 여수! 승부는 고사하고 유원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는 것이다.

 

거기다 노인은 맨 주먹이지만 유원은 빛이 번쩍이는 검을 들지 않았는가 !

 

조금의 여유나 사정도 두지 않고 좌우로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는 유원이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예전엔 이와 같은 싸움이라면 노인을 쓰러뜨리고 유유히 땀을 닦아야 할 유원이었다.

 

러나 지금은 형세가 달랐다.

어디 그 뿐인가.

 

아차하고 실수하면 유원의 생명이 풍전등화격(風前燈火格)이다.

 

잠시도 숨을 돌려 쉴 수 없는 위급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아! 몇년 검을 쥐지 않고 지냈더니 이 모양인가! >

지난 날을 한탄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선 달려드는 노인의 장풍이 더 급했다.

서로 휘두르고 막기 어언 팔십 여수 ! 노인의 심정은 어떤지 유원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이제 몇 수만 더 계속한다면 검을 쥔 손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겨우겨우 노인의 장풍을 피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는 순간 !

 

유원을 향해 거센 장풍을 몰아붙이며 기세도 맹렬하게 달려오던 노인은

 

유원과 맞닿을듯 아슬아슬한 순간을 스치고 그냥 앞으로 화살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유원 자신이 피했는지, 아니면 노인이 일부러 유원을 피해? 달렸는지,

 

어쨌든 충돌을 피한채 유원과 노인의 거리는 거의 일 마장,

 

그대로 노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감추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괴이한 일이었다.


싸움도 거의 절정에, 그것도 유원이 매우 불리한 입장에서 전개되는 싸움인데

 

노인은 마지막의 일격을 피하고 그대로 달려가버리고 말았다.

승부가 없는 상태로 싸움은 끝이 났지만 유원으로서는 개운치 않은 일전이었다,

 

무엇인가 검을 비껴든채 노인이 사라져간 방향을 넋없이 바라보고 섰던 유원은

 

그의 모습이 온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다음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차했으면 오늘 저녁의 일전으로 나 신도 유원은 이 황야에 외로운 넋이 되었을 것을......

 

오늘의 이 수치를 어떻게 만회하면 좋을 것인가......>


암담한 기분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악양루를 향하여 돌아오는 유원의 심정은?

 

지금까지 지나온 그 어느 때 보다도 자신이 무력하고 자기가 지닌 무공이라는 것도

 

어린이들의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탄했다.


도대채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무공에 있어서 남에게 뒤지지 않던 신도 유원이

 

검까지 쥐고서 맨 주먹의 노인에게 생명을 맡긴채 이리저리 흔들렸다면

 

이제 그의 무공도 끝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에 신비에 싸인 다정선자(多情仙子)를 찾아 악양성을 헤맨다는 것은

 

자기의 죽음을 그만큼 빨리 초래한다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신도 유원은 혼이 나간 껍데기뿐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길로 되돌아가서 글 공부나 하던가 아니면? 심심 산골에 들어가 몇년 간 더 무술을 닦고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울 정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지......>

돌아오는 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고 머리까지 띵! 하고 지끈지끈 쑤시는듯 했다.

별빛과 달빛이 고요히 비치는 들판을 터벅터벅 걸어오는 유원의 심정은 산란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처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산란한 생각에 잠기어 걷고 있는데 마차의 바퀴 소리와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마차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돌린 유원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 옆으로 비켜 섰다.

지금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는 마차가 꼭 유원을 짓밟고 지나갈듯이 요란스럽게 굴러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원을 마차의 바퀴로 깔아버릴? 듯이 달려오던 마차는 유원의 가는? 길을 가로막으며

 

멈추어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차의 포장이 걷히며 아름다운 소녀가 깡총 뛰어내리며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별빛에도 완연히 반짝이는 초롱초롱한 눈을 똑바로 뜨는 것이

 

나이든 여자의 아리따운 눈짓만 같았다.

[거기 서 있는 분이 유대인 어른이 아니신가요?]


[그렇소만......소저는 뉘시오?]

엉겁결에 되물었지만 유원으로서는 괴이하고 또 상상도 못했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황막한 들판에 마차가 달려가고 달려올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유원 자신의 이롭을 알며 또 무슨 일로 마차를 멈추고 따라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것은 아실 필요가 없어요! 저의 명령대로 이 마차에 오르세요!]

[명령이라고요? 도대체 소저는 누군데 남의 이름을 알며 또 마차에 타라 마라 명령이오?]


[명령이 듣기 싫으면 부탁이라고 할까요? 여러 말씀 마시고 속히 오르세요.]


유원은 심히 난처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노인과의 일전으로 기운도 기운이지만 자신의? 무술에 환멸을 느끼고

 

거의 절망 상태에 놓여 결심했던 모든 일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 뿐이었는데

 

난데없이 마차가 나타나고 또 소녀의 힐난같은 명령을 받고보니

 

더이상 꼼짝 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지는 것이었다.

물 먹은 솜처럼 지친 상태여서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어디까지 가는지 그 행선지만은 알아야 했다.


[소저의 명령대로 마차에 타라면 타겠소만 무슨 이유로 길가는 나그네를 괴롭히시오?]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문책하기 위해서에요.]


[무슨 문책이오?]

[여하간 마차에 오르시오.

 

정 오르지 않겠다면 제가 강제로라도 오르게 하겠어요.]

하면서 그 하얗고 예쁘게 생긴 손을 쭉! 펴는 것이었다.

 

그러자 가슴이 뛰는듯 하고 숨이 탁탁 막혀 유원은


자기도 모르게 마차 위로 성큼 오르고 말았다.


유원이 마차에 오르자 그 뒤를 소녀가 오르고 마차는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차 안은 비교적 아늑하고 여자의 몸 냄새가 싫지 않게 코 끝에 와 닿았다.


모든 것은 운명이 정해진 대로 될 뿐이라고 체념하면서, 유원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유원과 소녀 사이에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유대인께서는 지위도 명예도 또 재산도 많아 덕망이 있다고들 하는데 어찌 거짓말을 하세요?]


[무슨 거짓말을 했는지, 나는 거짓말을 한 일이 없소!]


[방금 하시지 않으셨어요? 우리 주인 다정선자를 쫓아 악양성까지 오셨으면

 

그렇다고 바른대로 말씀하세요! ]

여기에 이르러 유원은 더 버틸 재간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원은 송구스러운 듯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소저 말이 옳소.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져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소.]

[왜 생각이 달라졌죠?]

재차 묻는 소저의 말에 유원은 입이 닫혀버렸다.


제일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무술이 노인이? 피해감으로써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한? 일이며

 

노인과도 비교가 안 되는 무공으로 신출귀몰하듯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정선자를

 

추적할 자신이 없어졌다고 어찌 이 소저에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


묵묵부답으로 발 끝만 내려다 보고 있는 유원을 지켜보던 소녀는


[말씀 안 해도 좋아요.

 

짐작은 하였겠지만 나는 다정선자의 시녀에요.

 

저번 잔치 좌석에서 유대인을 뵈웠죠.


그런데 주인이 유대인을 모셔오라는 분부여서? 모셔가는 길이지만

 

우리 주인? 앞에서도 지금처럼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말을 하면 어떠한 벌을 당할지,

 

그것만은 미리 각오하셔야 돼요.]


[.................]

유원은 할 말이 없었다.

[다 왔어요. 내리세요.]


언제 마차가 섰는지,

 

그리고 얼마 만큼의 거리를 달려왔는지 소녀의 말을 듣고 마차에서?

 

내렸을 때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만금 캄캄한 어둠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만일 시녀가 흰 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가까이 서 있는 시녀마저 보이지 않을 어둠이었다.


잠시 후,

 

사방을 휘둘러보며 머뭇머뭇하는 유원의 소매를 잡아 끌며 시녀가 앞장 서서?

 

길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어둠에 싸여 보이지는 않지만 코 끝에 스며드는 향기와 발에 밟히는 촉감으로 보아

 

어느 아름다운 꽃밭 사이를 걷고 있다고 느꼈다.


얼마나 왔을까.


시커먼 건물이 앞을 가로막는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문 앞에서 유원을 멈추게 한 시녀가 대문의 한 끝을 똑, 똑, 똑,

 

정확히 그러나? 가볍게 세 번을 두들기자

도무지 열릴 것 같지도 않던 그 큰 대문이 스르르 열리며 시녀와 유원을 집어삼키고는

 

또 그렇게 소리없이 닫히는 것이었다.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 유원이었다.

밖에서도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지만 건물? 안은 더더욱 캄캄절벽이었다.

 

어느 한 구석이라도? 등불이 켜진 곳이 없었다.

 

그런데다 찬바람이 옷깃을 맴돌자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시녀의 손을 놓치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 어둠이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공은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하시오. 무슨 일로 우릴 쫓아오셨소?]

순간, 유원은 될 수 있는대로 크게 눈을 뜨고 소리가 들린 곳을 응시했으나

 

역시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다만 어둠의 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단지 소리가 들리는 곳에 사람이 있으려니 하고 그 쪽으로 몸을 돌리고 섰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속히 대답하시오.]

유원은 하는 수 없이 어둠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자기는 상대가 보이지 않지만? 상대방에서는 자기를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쫓아온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소.]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씀이시오?]

마차 속에서 시녀와의 문답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중에 여기까지 마차에 실려오게 되었소.]

[왜 자신이 없어졌는지는 차차 듣기로 하고 우선 유공도 악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여기까지 온 것을 다른 사람이 알면 우리가 귀찮을 것이오.]

하고는 누군가에게 가만히 명령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불을 밝혀라 !]


그러자 주위가 갑자기 밝아져 눈이 부셨다.


그리고 얼마후 상대방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인은 까만 옷을 입고 있는데다가 주위까지 어두워서 알아볼 수가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름답기는 먼저의 시녀보다 더한 것 같으나 키가 조금 작은듯 했다.

어둡던 실내에 갑자기 불이 켜지자 유원은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흘러 밝음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흑의(黑衣)의 여인이 쏜살같이 달려들며 불문곡직하고?

 

유원의 곡지혈을 향해 덮치는 것이었다.


유원은 기운이 있다 해도 대항할 여지가 없는데 맥없이 완전히 넋이 빠진채 서 있는

 

지금으로서는 그냥 당할 도리밖에 없는 일이었다.


유원을 덮친 여인은 유원의 곡지혈을 눌러 두 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이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유원의 뒤로 들아가서 아혈(啞穴)을 짚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물러서며 냉랭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유공! 당신은 지금 곡지혈이 짚혀 두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혈도 짚혀 말도 못하게 되었어요.

 

제는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눈으로 본 일을 말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와 동시에 유원은 그만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로 벙어리가 되어야 하는지 답답할 뿐 손을 쓸 수도 말도 할 수도 없게 된 유원은

 

눈만 뜨고 그녀를 노려볼 수 밖에 없었다.


[유공이 지은 죄는 유공이 알거에요. 다시는 우리들을 쫓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말아요.

 

만일 그러한 생각을 품는다면 그때는 두 발도 못 쓰게 해버리겠어요.

 

오늘은 이 정도로 그치겠으니 집으로 돌아가세요 ! ]


유원은 벙어리가 된 것도 모르고 고함을 쳤으나 소리가 되어 말이 그녀에게 들릴리가 없었다.


흑의의 여인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저의 수법이 가혹하다 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더구나 일년 동안만 요양하면 자연히 나을 것이오.

 

러나 일년내에 복수를 하려고 힘을 쓴다면 생명이? 위험해 질 것이니

 

될 수 있는대로 욕심을? 내지 마세요.

그리고 밖에 마차가 준비되었으니 곧 여기를 떠나세요!]

하는 여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환하게 켜졌던 붙이 꺼지고?

 

다시 주위는 종전대로 칠흑같은 어둠에 싸이고 말았다.

순간, 유원의 눈에서는 분노에 가득 찬 빛이 수없이 발하다가

 

드디어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시녀의 말을 따라 마차에 탄 일, 캄캄한 길을 걸어오던 일,

 

대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일을 생각하고 이렇게 처참하게 병신이 될 줄 알았다면

 

왜 일찍 시녀를 해치우고 도망가지 못했을까 후회하고 혀를 깨물었으나

 

이제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호의의 여인이?

 

어디론가 가버리는 가벼운 걸음 소리가 들리고 다시 주위는 조용해졌다.


애걸복걸한대도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신도 유원은 할 수없이

 

들어왔던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좀전의 시녀가 유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지?

 

유원이 나타나자 차가운 목소리로 잔소리를 퍼붓는 것이었다.


[물러가라면 빨리빨리 나오지 뭘 꾸물거리고 있어요.

 

조금만 더 늦게 나왔다면 나는 그냥 가버렸을 거에요]

노기 띈 음성이었다. 유원을 기다리기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유원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 손도 못쓰는 병신, 하라는 대로 할 도리 밖에 없었다.


[이리 따라와요. 말이 있는 곳까지 모셔드릴께요!]


시녀를 따라 꽃밭을 지나고 건장한 말이 매여?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시녀가 부축해 주는? 대로 말 위에 올라탄 유원은 시녀를 한 번 노려보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단념하고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말았다.

어느덧 어둡던 밤의 장막이 차차 걷히고 동녁이 훤히 밝아오는 황야에서?

 

말 위에 올라탄 채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긴 유원은 앞일이 암담했다.


사지가 멀쩡하던 사람이 일시에 두 손을? 쓰지 못하고 말도 못하게 된다는 것은?

 

그 고통을 무엇에다 비길 것인가 !


동터오는 새벽 하늘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고 두 손으로 가슴을 치고 통곡하고 싶어도

 

마음 뿐 제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얼마를 더 말에 실려가던 유원은 절로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에 그대로 가기만 할 수가 없어

 

말에서 굴러 떨어져 그 자리에 죽은듯이 엎어졌다.

 

그리고 혀를 깨물며 맹세했다.


<그렇다. 꼭 복수하고 말겠다.

 

그래도 명색이 남아 대장부 아닌가.

 

순간의 불찰로 팔이 마비되고 말을 못한다 해서 이렇게 비통해 한다면 장차 무슨 일 할 것인가......

용기를 내자!>

속으로 다짐하며 주위를 돌아보자 날은 이미 완연히? 밝아 아침안개가 뽀오얗게 깔리고

 

어렴풋이 악양성의 높은 집둘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고 서쪽을 돌아보는 순간,

 

뽀오얀 안개속에서 말 발굽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그 다음 순간!


안개 속을 해치며 백의(白衣)의 소녀가 말을 탄 채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자 유원은 재빨리 외면하고 말았다.

 

그것은 백의의 소녀를 보는 순간 마차를 끌고? 왔던 시녀를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나 여자를 허술히 보았다가 이같이 처참하게? 된 자신을 돌이켜 보고 스스로 뉘우치는? 한면,

 

 경계심이 우러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자기가 맹세한 것을 혹시 그 시녀가 눈치채고 다시 납치하러 온 것이나 아닐까 해서 였다.


이윽고 요란하던 말 발굽 소리가 옆에서 멈추고 그대신 옥을? 굴리는 듯한 낭랑한 소녀의 음성이

 

둘려오는 것이었다.


[여보시오. 무슨 변을 당했기에 이렇게 쓰러져 계신지요? ]


부드럽고도 아름다운 목소리에 유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의 시선에는 백설같이 흰 옷으로 전신을 감싼 여인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원은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이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할수 있다는 것인가?


아무 말 없이 유원이 다시 고개를 숙이자 마상(馬上)의 여인은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리고는?

 

유원의 전신을 이리저리 급히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앉으며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어마! 가엾게도......혈도를 찔리셨군요!]

하고는 여자의 독특하고 가벼운 기합 소리와 함께 유원의 오른 팔을 내려쳤다.


순간,? 유원은 두 팔이 약간 뜨끔한 것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여자의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정말 무의식증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


그렇게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두 팔이 가볍게 움직여지며?

 

여인의 공격을 막으려는듯 앞으로 굽혀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 신도 유원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도대체 어떠한 여자이기에 짚힌 혈도를 풀 수 있단? 말인가,

 

하며 그 여인을 바라보자 여인은 아침 헷살에 이슬을 머금은 꽃같이 청초한? 얼굴로

 

아름답게 미소지은 채 하얀 이를 가지런히 드러내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당신은 투골타맥수법(透骨打脈手法)에 의해 경맥이 상했어요.

 

이 수법은 매우 신랄하고도 무서운 수법으로서 보통의 무예인은 쓰지도 못하는 것이에요.

 

겨우 몇명 정도가 있을 뿐인데...... 어느 고수에게 입은 상처인지는 모르지만......]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는 다시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당신을 상하게 한 고수는 그렇게 악한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비록 제가 지금 막힌 혈도를 풀어드리긴 했지만 그냥 지나도 일년 후면

 

절로 낫도록 상처를 조금 밖에 내지 않았어요]

처음 경계와 의심으로 가득찼던 유원의 심중은 어느 사이엔가 놀라움과 고마움으로

 

그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말은 하지 못하고 안타까이 손짓만? 했다.

 

그러자 유원의 말 못하는 모양울 눈치? 챈 백의의 여인은 그의 말 못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는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기의 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왜 말씀을 안 하시죠?]


말은 할 수 없지만 듣기는 다 하는 유원은 손짓으로만 자기의 입과 또 팔을 가리키며?

 

아혈(啞穴)이 짚혔다고 표시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쉽사리 그의 표현을 알아듣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벙어리라구요?]

유원은 또 다시 고개를 완강히 흔들었다.

 

그리고 좀전과 같은 행동을 되풀이 했다.


그제야 백의 여인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어머 ! 아혈(啞穴)까지......그래서 말도 못하게......]


하고는 누구인지 증오의 눈길을 보내다가 그대로 유원의 등뒤로 돌아가서

 

옥같은 흰손을 들어 유원의 아혈을 눌러 풀어주는 것이었다.


그제야 신도 유원은 말문이 열렸다.

 

나이며 명성이며 체면 따위를 내던져버린 유원은 그? 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숙였다.


[소저는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아름다운 마음씨와 착한 일을 한 소저를 평생 잊을 길 없소이다.

 

나는 장사부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름은 신도 유원이라 부르오.

 

소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드릴 수 있는 대로 다 하겠소.!]

어찌 감사함을 표할 길이 이뿐이겠는가 마는 당장 유원으로서는

 

어떻게? 그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자 백의의 여인은 사양하듯 손을 저으며 맑게 웃었다.


[천만에 말씀을, 속히 일어나세요.

 

은혜는 서로 받기도 하고 갚기도 하는 것인데...... 보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 성명 석자라도......]

[저의 이름은 들어서 알리도 없고, 무술계에 이름이 있는 사람도 아니에요.]

하면서 겸손해 하며 이름도 밝히지 않으려는 것을 유원은 굳이 캐물었다.

[그래도 알고 싶소이다.]


여러번 간청하는 유원의 간곡한 말에 소저는 얼마를 망설인 후 결심한 듯이 입을 여는 것이었다.


[정 그러시다면 알려드리겠어요.

 

혹시 아실지는 모르지만 양부인(楊夫人)이라고 불러주세요.]


순간, 유원은 양씨(楊氏)성을 가진 무예계의 고수들을 더듬다가 얼핏 양몽환(楊夢 )을 생각했다.


[양부인......그러면 혹시...]


하면서도 확실치 않아서 머뭇거리자 백의의 여인이 미소를 띄우며 그 뒷 말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혹시...... 아는 분이 계세요?]


[글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혹시 양몽환 대협(大俠)의 부인이 아니신지요?]


그러자 여인은 자못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는 것이었다.


[어머 ! 어떻게 아세요? 저의 오빠를 잘 아세요?]


[알다 뿐이겠소? 그분의 무공이야말로 이 천하에 따를 자가 없는데 어찌 모른다는 말이오 ! ]


하는데 난데없는 큰 웃음 소리가 유원과 백의 여인의 말을 끊으며 우렁차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핫...... 하...... 하...... 아직 시집도 안 간 심소저가 어찌 양부인이라 자칭하시오?]


흠칫 놀라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백의의 여인은 입술을 파르르 떠는 것이었다.


[도옥 ! 벌써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있었군 !]


하는 소리를 듣고 유원도 고개를 들었다.


약 삼장 거리의 바위 위에는 황의(黃衣)를 입고 등에는 금환검을 멘 세 명의 젊은이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세명은 옷차림이나 금환검 그리고 생긴 모습도 거의 똑같았다.


백의의 여인이 깜짝 놀라며 분노에 가득 찬 음성으로 외치자 세명 중에서 가운데 섰던

 

황의의 젊은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읍을 하듯 허리를 굽혔다 펴는 것이었다.


[헛...... 허...... 그래도 하림<霞琳)아씨는 아직 이 도옥을 잊지 않고 있었군 !]


하림이라고 불리워진 백의 여인의 얼굴에 노한 빛을 띄우며 흘겨 보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를 하림이라고? 그렇지만 당신은 도옥이가 아니에요!]


그러나 황의의 젊은이는 어깨를 떡 펼치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도옥이 아니라고? 천만에, 나는 틀림없는 도옥이오 !]


[아무리 도옥이라고 우기지만 비록 외형이 닮았다 해서 도옥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죠?]


[그럼 못 믿겠다는 말씀이군 !]

[그렇지 않고요 ! 세상에 도옥이란 사람이 한 사람이겠지, 세 명씩이나 될라구!]


[몇년 못보는 동안 안목도 넓어졌는데요 !]


하기야 지금 상대하고 있는 황의의 젊은이가 도옥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검을 메고 거기다가 얼굴 마저 비슷한데는 누가 도옥인지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다 첫번부터! 도옥이 아니라는 하림의 말에 도옥은 그녀의 날카로운 판단력에 놀라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요. 나도 이제는 배운 것이 많아요. 그래서 나를 속이지는 못해요!]


[핫 하...... 아뭏든 좋아요. 그러나 첫눈에? 도옥이를 알아보는 것은 분명히 심소저가?

 

이 도옥과의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거겠지 !]


[뭐요! 첫사랑이라구요? 어머 !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우리? 오빠의 친구로서 저도 오빠처럼 대했을 뿐인데 첫사랑이라고...... 내 참 별꼴 다 보겠어 ! ]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듯이 하림이 비웃고 일소에 붙이자 황의의? 젊은이는 조금 부끄럽고

 

창피한듯 할 말을 못한다.


그러자 다시 하림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여하간 나는 도옥이라고 믿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 오빠를 알죠?]

[왜 모르겠소? 내가 몸소 겪은 일인데...]

[그러면 정말 도옥이란 말이죠?]


[열 백번 말해도 못 알아 듣는군 ! 틀림없이 나는 도옥이오 !]

그러자 하림은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싹 다가서지는 못했다.


[그럼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군데 도옥과 똑같이 생겼죠?]


[내 제자요 ! ]


[제자라면 꼭 얼굴까지 닮아야 제자인가요?]

[핫...... 하......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소.

 

옷 차림과 얼굴이 비슷하다 뿐이지, 자세히 보겠소?]


하면서 다가오는 것을 하림은 손을 저어 필요없다는 표시를 하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진짜 도옥이라면 한 마디 하겠어요.

 

과거처럼? 그렇게 간사하고 꾀가 많은 사람이 되지? 말고 마음을 고쳐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


[핫...... 하...... 심소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성격이 바르군요! ]

[바르지 않더라도 도옥이처럼 간교를 부릴 줄은 몰라요.]

[좋은 말씀이오. 그러나 나는 한결같이 심소저를 잊은 일이 없소.]


하며 그 눈빛에 조금 음탕한 빛을 띄우자

 

하림은 더러운 것이나 본듯 외면했다가 성을 발끈 내며 돌아섰다.

[그것은 도옥의 자유에요 ! 그러나 나는 이미 어엿한 양씨의 부인이에요! ]


[부인?...... 천만에 내가 알기로는 아직도 깨끗한 처녀일텐데......]

[아무리 처녀라고 해도 일단 출가한 사람이면 당연히 부부죠.

 

앞으로는 심소저라고 부르지 마세요!]


냉정하고도 단호하게 양몽환의 부인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하는 하림은 여차하면 도옥을 공격하려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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