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의문의 초대장
세월은 흐르는 것, 어느 때, 어느 세월인들 흐르지 않는 세월이 있으랴만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인간 감정을 더구나 죽고 죽이고 쫓고 쫓기는 무술계의
파란만장의 저참한 살육전도 흐르는 세월 속에서는 한갖 지나간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조용한 가을 들판,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가면 벚꽃이 산과 들을 메우는 봄이 찾아들곤 하는
괄창산과 만리(萬里)를 연이은 기련산(祈連山)의 광활한 영산,
옛날 무술계 고수들의 창검의 대결과 뿌우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비명이 사라지지 않던 그 땅에
조용한 태평성쇄의 세월이 유유히 흐르고 있던 어느날,
오래도록 검(劍)과 창(蒼)을 잊었던 군웅 호걸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긴 잠에서 깨어나듯 기지개를 펴며, 하나 둘 일어나 앉는 그들에게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완전히 사라졌어야 할 옛날 일이 꺼진 불에서 마지막으로 솟아 오르는 연기처럼,
아니면? 꿈에서 더듬어 보는 그리움처럼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떠한 복(福)이며 또 어떠한 화(禍)인지 점칠 수도 없는 소문이......
그 누가 말했던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이?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을 샅살이 누비고 바람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날이 새면 자취를 감추는 달과 같이 소문은 자취를 감추었다? 드러냈다 하면서
수 만명의 가슴에다 제각기 다른 생각들을 가지게 하며 끊임없이 줄달음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로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소문을 따라 미친듯 발광했다.
그러던 어느 해지는 무렵 .
삼상(三湘)에서도 멀지않는 호남성 장사부(湖南省 長沙府).
당대(當代) 검술(劍術)의 명인(名人) 신도유원(神刀柳遠)은
이상하게 생긴 빨간색의 봉투가 지나는 바람결에 날려온듯
오수(午睡)를 즐기고 있는 대청 마루에
나뭇잎 처럼 사뿐히 떨어진 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봉투의 봉한 곳을 뜯는 손은 눈에 보일듯 말듯 가늘게 떨렸다.
좀체로 없었던 일이다.
여러가지의 편지가 왔어도 이저럼 겉봉이 피 빛으로 물들인 편지가 오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원은 냉정히 그러나 시선을 급히 돌리며 편지를 읽었다.
<오랫동안 오수(午睡)에 몸도 평안해졌겠지만 한편 얼마나 지루한 세월이었소이까?
지금 돌이켜 보면 모든 인간사가 약육강식(弱肉强食)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한(限)하며
서로 대적(對敵)하던 것도 한이 됩니다.
그래서 지나간 일도 이야기 하며 서로 우의(友誼)도 돈독(敦篤)케 하고자 하는 뜻에서
인연이 깊었던 분들과 한 자리에 모이고자 하오니
부디 거절치 마시고 왕림하여 주시면 영광(榮光)이겠습니다.
금야(今夜) 이경(二更)에 이 편지를 들고 옥성서선녀묘(玉城西仙女廟)에 나오셔서
달을 바라보고 계십시오, 그러면 안내할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 맨 끝에는 다정선자(多情仙子)의 네 글자로 서명되어 있었다.
읽기을 다 마친 유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흠......괴이한 일이군 ! 다정선자라? 듣지도 못한 이름인데......]
한편, 지금 유원이 받아 읽은 편지와 똑같은 편지를 받은사람은 장사부의 태수(太守)이자
박학(博學)으로 명성을 떨친 장인청(張人淸)을 비롯하여 당대 무공에 능한 사람은 물론
고을의 유지(有志)급은 거의 모두였다.
편지 형식으로 된 초청장을 받은 수 십명의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사람은 괴이하고 이상하게, 또 어떤 사람은 모험적으로 가보고 싶다는,
어떤 사람은 불길하게, 또는 여인에게서 처음 받는 연문(戀文)이기나 한 것처럼 가슴을 설레이는......
가지각색의 생각으로 편지를 몇번 고쳐 읽었다.
더구나 지정된 시간부터 참가장소까지,
찾아가는 경로가 어쩌면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달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데는
어느 누구도 한번쯤은 괴이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떠한 화복(禍福)이 다가오고 있는지 예측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얼마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원은 이윽고 가보기로 결심했다.
일단 가기로 결심이 되자 두려움 같은 것이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유원은 짙은 색의 장삼(長衫)으로 갈아입고 만일을 염려하여?
유엽(柳葉)형의 단검과 쇠갈쿠리를 가죽신 속에 감춘 후 지정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정서(正西) 방면으로 五리 정도 거리에 있는 선녀묘(仙女廟)는 시원한 저녁 바람에
산책하기 알맞는 장소였다.
유원은 초청장에 명시되어 있는대로 편지를? 왼손에 쥐고 바쁘지 않은 걸음을 옮겼다.
거의 다왔을 때 자기보다 먼저 와 있는 선객(先客)을 먼 빛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흰 도포의 선비 차림으로 키가 훤칠하게 큰 선객은 한 손에는 부채롤 다른 한 손에는
역시 편지를 들고 떠오르는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유원도 초청장의 편지를 받은 사람의 수가 상당 수에 달하리라고 생각했다.
거리가 약간 떨어져 있어 선비 차림의 사나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단정한 모습이 보통의 시인 묵객은 아닌 것 같은 직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선녀묘 안에서 나온 안내인을 따라 몸을 돌이키는
그 사나이의 얼굴을 희미한 달빚 아래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태수 장인청이었다.
순간, 유원은 얼핏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 도대체 다정선자라는 여자는 어떠한 사람인데 태수 장인청 같은 선비로부터
나 유원 처럼 무인에 이르기까지 초청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어서 그 다정선자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잠시, 금새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에 정색하고 말했다.
[유대 영웅께서도 원로(遠路)에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읍니다. 절 따라 오십시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니면 자기의 뒤를 밟아왔는지 분간할 수 었는 아리따운 여인이
검은 머리를 치렁 치렁 늘이고 다소곳이 유원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찾아주셔서 영광이옵니다. 그럼 준비한 말(馬)에 오르십시오.]
하고는 한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과연 그곳에는 십여명의 아리따운 시녀가 십여 마리나 되는 준마(駿馬)의 고삐를 잡고 있는 것이었다.
유원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판국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 나타난 이 여자가 다정선자인지,
누구인지도 모르거니와 이 묘(廟)는 또 어떠한 묘인지 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유원은 무인으로서의 노련한 지식으로 잠시도 주의를 살피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여자의 동작에 신경을 쓰고 있었 그러자 다시 좀전의 여자가 유원을 불렀다.
[ 유영웅께서는 말에 오르십시오.]
유원은 여자가 하라는 대로 가볍게 말 위에 올라탔다.
[대단히 죄송하옵니다만 도착할 때까지 수건으로 눈을 가리셔야 하겠읍니다.]
하면서 검은 색의 수건을 내미는 것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온 이상 하라는대로 하는 것이 좋으리라 여긴
유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수건을 받아 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합시다. 핫하......]
눈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수건으로? 가렸다.
그러자 정확히 가리어졌는지를 확인하려는듯 여자의 부드러운 손길이 수건을 쓰다듬는 듯했다.
그리고 여자의 부드러운 손길이 점점 목덜미? 쪽을 내려온다고 느끼는 순간,
유원은 자기도 모르게 아차 ! 하는 후회가 새어 나왔다.
어느 사이엔가 여자의 부드러운 손 끝은 유원의 두 팔 곡지혈(曲池穴)을 마비시켜 버리고 말았다.
후회 막심이지만 이제는 이미 때가 늦었다.
아무리 재간이 비상해도 팔을 쓰지 못하고 보면 만사휴의(萬事休矣)다.
그러나 유원의 후회함과는 달리 귀 끝을 간지르는 듯 조용 조용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유원은 말 잔등 위에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했을 것이었다.
[유대인 어른 !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저희들은 우리 주인 선자의 분부대로 행하는 것 뿐이에요.
잠깐만 참으시면 가린 눈도 뜨시게 되고 팔의 불편함도 없게 해드리겠어요.
지금 조금 불편하신 것은 잠시후 저의 주인 선자와 만나서 말씀하시면
노여움도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유원은 입안이 씁쓸했으나 별 수 없이 그녀들이 하는대로 몸을 맡겨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여자들에게 힐난하듯 노한 빛을 보이면 유원 자신의 체면도 있고 해서
겉으로는 이까짓것쯤 조금도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듯 더 위세를 떨치고 어깨를 폈다.
그러나 절로 새어 나오는 탄식은 금할 길이 없었다.
<아 ! 나도 이제는 늙어가는 모양이구나......>
유원의 두 팔을 마비시킨 다음부터 시녀는 유원을 어린 아기 다루듯 했다.
온 몸을 샅샅이 뒤져 가죽신 속에 감추어 두었던 단검과 쇠갈쿠리도 압수되었다.
[유대인 어른 ! 이 장난감 같은 물건은 잠시 보관해 두었다 드리겠어요!]
붉으락 푸르락 얼굴을 붉히느니 보다는 너털 웃음이라도 웃어두는 것이 유리할 것만 같았다.
[ 허 ! 허 ! 좋을대로 하시오. ]
엉덩이에 째찍을 맞은 말은 땅을 박차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눈은 가리워져 주위 사방을 식별할 수는 없으나 다년간 무술인으로서
종횡으로 달리던 산과 들인지라 지금 말이 달리는 방향이 악록산(嶽麓山) 기슭
이라고 까지는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말은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는가 하면 다시 동남편으로, 서북편으로,
그러다가는 뒤로 되돌아가는듯 북쪽으로 방향울 수 십번씩 바꾸어 달리는데는
아무리 왕년에 종횡하던 곳이라 해도 지금의 위치를 분간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머리가 어지럽도록 수 십번 방향을 바꾸어 달리던 말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며 멈추어 서는듯 했다.
그러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생전에 한번 들어보지 못한 은은하고도 옥구슬을 굴리는듯한 풍악 소리가
은은히 울려퍼지는 가운데 맑은 시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다 오셨읍니다. 고생스러웠죠?]
하는 것과 동시에 두 팔이 시큰하며 막혔던 혈도가 풀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을 가렸던 수건도 천천히 풀어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가리워졌던 눈이 뜨임과 동시에 주위가 어두우리라는 상상을 뒤엎고
환한 빛이 사방 팔방에서 휠황하게 비쳐지는 것이아닌가.
절로 눈이 휘둥그레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유원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흰 비단으로 아름답게 단장한
미모의 소녀가 한아름의 꽃다발을 안겨주며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천한 시녀가 유대인 어른을 삼가 모시겠읍니다.]
유원은 갈수록 미상에 빠지는듯 정신이 혼란했지만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했다.
[음, 고맙군, 수고를 끼쳐서 미안하오.]
[천만에 말씀을...... 초청하신 손님은 벌써 다 오셨지만 유대인?
어른께서 오시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유원은 시녀의 뒤를 따라 울창한 나무 숲을 지나 오색이 영롱하고 찬란한 꽃밭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에는 시녀의 말대로 수 십명의 손님이 편안히 앉아 웃으며 환담하고 그 옆으로 꽃밭에
나비가 날아다니듯 아름다운 시녀들이 술과 안주를 나르느라고 춤추듯 지나다니고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보기만? 해도 황홀하고 찬란해서 마치 인간 세상이 아닌 선경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얼마동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좌석을 바라보고 있던 유원은 시녀가 이끄는대로
미리 마련되어 있는 자기의 좌석으로 안내되었다.
중천에 걸린 명월은 한폭의 그림이며 오색 찬란한 꽃밭과 은은히? 들려오는 풍악 소리는
꿈 속에서 선경을 헤매는 도원(桃園) 바로 그것이랄 수 밖에 없는듯 했다.
시녀의 안내로 좌석에 앉고 얼마 지나서야 유원은
자기가 앉은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수석 자리에 앉은 태수 장인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인청으로 말하면 이 지방의 태수일 뿐만 아니라 문인으로서
그 명성은 삼척동자라도 익히 아는 바였다.
그와 비해서 태수는 아니지만 유원도 무예계 뿐만 아니라
이 지방에서는 태수에 버금가는 위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원은 자기의 지위나 명성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려는듯
먼저 태수 장인청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태수 대인 !]
그러자 태수 장인청도 반쯤 일어나 두 손을 마주 잡고 읍하며 인사를 받았다.
[유대인 ! 잘 오셨소이다. 어서 앉으시오. 그리고 이 잔을 받으시오 !]
[하 ! 태수 대인도 앉으시오. 참으로 반갑소이다.]
[ 반갑기 이를 말이오. 유쾌히 드십시다.]
이리하여 태수 장인청의 잔과 신도 유원의 잔은 시녀들의 심부름으로 바뀌어지고
또 그렇게 시녀들에 의해 술잔이 넘치도록 술이 부어졌다.
그와 때를 맞추어 풍악은 더더욱 흥을 돋우고 아름다운 시녀들은 목소리도 부드럽게
손님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산해진미(山海珍味)로 그득히 차려진 진수성찬(珍羞盛饌)은 상다리가 휘어지는 듯 했고
혀 끝을 대는 듯 하면 절로 넘어가는 신선주(神仙酒)는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너무나도 감미롭고 진귀한 술인 것만 같았다.
푸짐한 안주와 귀한 술에 풍악이 울리고 더구나 시녀들이 쉬임없이 잔을 따르는 데는
어느 사나이인들 사양하고 또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서로의 체면을 생각하여 조금씩 마시던 술도 점차 흥이 돋우어지고 취기가 오르자
누구 할 것 없이 거나하게 취하여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태수 장인청과 신도 유원이 더더욱 유쾌히 마셨다.
[유대인 ! 한잔 더 받으시오. 술 맛이 천하 제일이구려 !
]
하면서 들었던 술잔을 유대인에게 건네어 준다.
[태수 대인 ! 실로 오늘밤 같이 즐거운 날은 생전에 없었던듯 하오,
달빛도 아름답고 술도 좋으니 마음껏 취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
[암 ! 취하구 말구요, 자 이 잔을 비우고 한 순배 돌리시오 ! ]
[핫 ! 하! 그렇게 하십시다.]
이와 같이 해서 밤은 점점 깊어가고 술잔은 돌고 돌아 쉬임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술에 마음껏 취하면서도 정작 오늘의 주인공인 다정선자라는
여자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하는 궁금함이 떠나지를 않았다.
이제나 나타날까, 저제나 나타날까, 하며 풍악 소리의 곡조만 달라져도,
혹은 새술이 나올 때마다 눈여겨 보고 귀를 기울이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는 않았다.
혹시 삼 사십명이 넘는 이 시녀들 속에 섞여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똑같이 하얀 옷을 입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느린 시녀들 중에는 누가 누군지 조차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유원이나 태수 장인청 뿐만 아니라
무인, 묵객들도 그들의 주인공을 찾는 눈치였으나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정선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궁금함과 초조함 속에서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은은히 취흥을 돋우는 풍악이 안개가 사라지듯 긴 여운을 남기며 조용히 멎으면서
삼 사십명의 시녀들이 서북쪽의 바위 뒤를 향하고 일제히 허리를 굽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또 그렇게 조용히 허리를 펴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치 꿈 속에서나 본 것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검은 머리, 오똑한 코, 빚나는 눈, 보름달 같은 얼굴의 아름다움은
시녀들의 아름다움을 무색케 했고 연한 녹색(綠色)의 옷은 하얗게 입은 시녀들 속에서도
확연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녹색의 여인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춤을 추는 듯
경쾌한 율동과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순간 ! 무인, 묵객들의 시선은 일제히 녹색의 여인에게로 향하고 얼빠진듯
아니면 시선이 고정된듯 움직일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과연 상상대로 천하의 미인이었다.
녹의 여인의 뒤를 따르는 시녀들의 얼굴도 형언할 수 없는 미모의 여인이었지만
녹의 여인의 미모에 눌려 그 아름다운 빛은 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뭇 호걸들을 사로잡기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교교히 비치는 달빛 아래 녹의 여인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온 선녀인 듯
황홀하고 아름다왔다.
신도 유원 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녹의 여인의 모습에 모든 잡념을 싹 잊게 되고
지금 이 순간만이 여지껏 살아온 전부인양 모든 정신을 이 여인에게 쏟고 있었다.
잠시후, 녹의 여인은 녹색의 옷 속에서도 느껴지는 갸날픈 허리를 굽혀 살며시
눈을 내리깔며 바람결에 꽃이 혼들리듯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앵두같은 입술로 목소리 또한 청아하게 군중들읕 향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영웅 호걸들을 이 한 자리에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저가 바로 여러분에게 편지를 띄워 이 장사부(長沙府) 땅에 초대연을 연 다정선자입니다.]
라는 말이 나오자
초대연에 모인 시인 묵객들은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었다.
신도 유원과 태수 장인청도 침을 삼키며 또 무슨 말이 나올까 귀를 더 바짝 기울이는 것이었다.
하여 귀를 더 바짝 기울이는 것이었다.
[소저가 이 초대연을 연 까닭은 다만 무술계에서의 영웅 호걸들을 조금 더 가까이 뵙고
같이 어울려 보고픈 마음에서 였읍니다.
별로 차린 것도 없는 초대연이지만 어여삐 여기시고 아무 의심없이 여러분들 모두
저 환한 달빛과도 같이 마옴을 열어 젖히고 오늘 하룻밤을 유쾌하게
서로 덕담을 즐겨 주신다면 기쁘기 그지 없겠읍니다.]
하고 녹색의 소녀 다정선자가 말을 마치고 공손히 다시 절을 하자
장사부 땅이 하늘 나라의 일부가 되어 있는듯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비몽사몽하였다.
그들은 서로가 잔을 건네며 더욱 더 달콤한 술에 흥취되었고 심금을 사로잡는 풍악 소리에
몸과 마음이 함께 악기가 되어 춤을 추었다.
분위기는 점점 절정에 달하고 달빛은 한층 더 교교히 비추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틈속에서 다정선자는 부드럽고도 다정스런 눈길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간혹, 다정선자와 눈길이 마주치는 호걸들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다시 한번 그녀를 쳐다보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어쩔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 다정선자라는 여인은 누구일까?>
그래도 무예계에 덕망이 있고 명예도 있다는 신도 유원도 장사부에 불쑥 나타난
이 다정선자에게 정신을 빼앗겨 태수 장인청과 함께 이 초대연을 한껏 즐기는 것이었다.
한편 !
좌중을 한바퀴 둘러본 다정선자의 눈빛이 처음과는 달리 눈물이 글썽거리듯
안막을 가리는 것이었고 붉은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는 있었지만
마음속 깊이 슬픔이 몰려 오고 있는듯 하였다.
그렇게 그녀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변해 갔으나
그 표정을 그 누구도 알아 차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밤도 어지간히 깊어 중천에 떴던 달도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지고
술에 취해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은 쓰러져 코를 골기도 하고
시녀와 귀를 맞대고 황홀경에 빠져 있는가 하면 자작으로 술항아리를 거꾸로 들고
퍼마시는 주정뱅이도 있었다.
그래도 술과 안주는 때를 맞추어 날라져 오고 그쳤던 풍악도 다시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손님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손님의 얼굴을 눈여겨 보던 녹의의 여인은
그 누구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돌아서서 밤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에도 분명 없단 말인가? >
실망과 허탈로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없었지만 오늘 밤의 주인공으로서
실망의 빛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금새 눈물이 쏟아지고 그 자리에 엎드려 통곡이라도 하고 싫은 심정을 지그시 누르며 돌아섰다.
분명 녹의의 여인은 지금 그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술에 곯아떨어진 손님들이 어찌 여인의 심정을 알 길이 있겠는가.
삼 사십명의 손님들은 이제 완전히 술에 취했다.
무예인으로서, 혹은 시인 묵객으로서의 체통도 다 던져버리고 아무렇게나 쓰러져
코를 고는가 하면 그 중에 몇 명은 비틀거리며 자리를 떠나는 것이기도 했다.
어수선하고 취흥이 가득했던 자리가 조용해지고 끌날 때가 되었을때
녹의의 여인은 처음 이 장소에 나타날 때 처럼 네 명의 시녀를 뒤따르게 하고
천천히 무거운 걸음을 옮겨 자신의 처소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그 누군가를 찾겠다는 회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이처럼 아무 움직임 없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녹의의 여인을 뒤따르는 네 명의 시녀들은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비파와 꽃, 향로 주전자와 쟁반을 그대로 든채 따랐다.
이윽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녹의의 여인은 자기의 뒤에시녀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듯
참고 참았던 눈물을 기어이 흘리고 마는 것이었다.
처음엔 가늘게 두 어깨가 혼들리다가 끝내 파도처럼 어깨를 들먹거리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시녀들은 들었던 물건들을 내히 놓고 녹의 여인의 주위를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둘러앉았다.
통곡은 좀체로 그칠 줄 몰랐다.
흐느끼는가 하면 통곡하고 통곡하는가 하면 절규하듯 애통히 울고 있는 것이었다.
녹의 여인이 애절하게 우는 동안 서로 어쩔줄을 모르고 주위에 서 있는 시녀들은
무슨 말로 위로해서 울음을 그치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서로 착잡한 심정으로 녹의 여인을 지켜보는 동안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더 통곡할 힘도 없이 지친듯 녹의 여인의 울음이
조금 잠잠해졌을 때 시녀중의 하나가 약간 들먹거리는 녹의 여인의 어깨를 조심히 흔들었다.
[소저께옵서는 이제 그만 진정하옵소서,
부디 옥체를 보중하셔야 하십니다. 눈물을 거두옵소서!]
진정으로 위로하는 시녀의 말을 듣고도 그대로 얼마 동안 엎드려 있던 녹의의 여인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었다.
그 어느 누구든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있을 때 울고 싶은 만큼 울면 마음이 조금 후련해지는 것이
보통인 것처럼 녹의의 여인도 어느 정도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수심과 실망이 가득했던 얼굴에 다만 눈물이 흥건히 젖었을 뿐이다.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운다고 될 일이 있겠니 ? 너희들 앞에서 내가 너무 경솔했나 보구나.]
[ 아니옵니다. 우시고 싶을 때 우시면 슬픔도 가라앉는다는 말도 있읍니다.]
[ 그런지도 모르지, 야심했는데 너희들도 돌아가서 눈을 붙여야지 몇점이 되었을까? ]
[ 아마 사경(四更)이 넘은듯 하옵니다.]
[ 너무 늦었구나. 어서들 가서 자거라]
[ 예, 부디 보중하소서.]
녹의 여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듯 한 다음에야
네 명의 시녀들은 하직을 고하고 처소로 돌아왔다.
서쪽으로 기울어지던 달도 이제는 그 빛을 가리우고 풀벌레 우는 소리는
더더욱 처량히 들려오는 밤에 나란히 누운 네 명의 시녀는
녹의 여인의 통곡을 생각하며 저마다 한숨을 내려 쉬었다.
[큰 언니!]
큰 언니라고 부른 맨 끝자리에 있는 시녀가 상체를 일으키며
역시 맞은편 끝에 누운 시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 누운지가 거의 한 시간 정도가 되지만
그 누구도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듯 했다.
큰 언니라고 불리운 시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팔베개를 고쳐 베며 고개를 돌렸다.
[왜 잠이 안 오니?]
[예, 언니도 잠이 안 오죠?]
[그렇구나, 어떻게 하면 우리 주인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까?]
그러자 나머지 두 명의 시녀들도 각기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었다.
[언니, 우리 이렇게 하면 안 될까요?]
역시 큰 언니라고 부른 시녀의 말이다.
[어떻게?]
[우리들이 그 양(楊)상공을 직접 찾으러 나서면 어떨까 해서 말이예요.]
[이 넓은 천지에 어디 가서 찾겠니?]
[보기가 너무 애처로와요.
그 양상공인지 무언지 하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기에 우리 주인을 매일 밤 울릴까......]
그러자 두번째에 누웠던 시녀가 입을 연다.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해서 모르지만 천하에 그분 처럼 훌륭하고 잘 생긴 분은 없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우리 주인이 잊지 못하지!]
[훌륭하고 잘 생겼다고 한다면 우리 주인은 어디가 어때서 돌아보지 않을까?
더 어여쁜 아가씨가 있는 모양이지?]
[글쎄 언젠가 말하지 않았어? 그 왜 이소저와 심소저라는 천하 미인이 있다고.]
[천하 미인이면 우리 주인보다 더 아름다울까?]
[누가 봤어야 알죠? 어쨌든 우리둘이 그 양상공을 찾아봐요.]
[아유, 아서라, 그렇게 되면 이소저 심소저는 어떻게 되고?]
[과부가 되겠죠 뭐, 그렇지만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들도 여잔데,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긴 하지만 우리 주인 아씨가 불쌍해요.]
시녀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녹의 여인과 그 양상공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다
다시 한번 한숨을 쉰다.
그리고 잠시후 다시 도란도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디에 있는지 찾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설사 찾는다해도 어떻게 모셔오지?]
[우리 주인 말씀으로는 그분의 무공을 따를 사람이 없다는데.]
[아무렴 우리 네 명이 못 당할까요 뭐?]
[어림도 없는......우리들의 무공이라야 그분에 비기면 소꼽놀이 밖에 안 될거야.]
[그렇다면 언니 ! 좋은 수가 있어요.]
양상공이라는 사람을 찾기나 한 것처럼 맨 끝의 시녀가 손뼉을 치면서 발딱 일어난다.
[아이 깜짝야, 무슨 좋은 수가 있다고 그렇게 호들갑이냐? ]
[호들갑이 아니에요. 양상공이라는 사람을 만약 찾는다면 말이에요?]
[찾는다면?]
[예, 우리는 무술도 약하고 또 여자가 아니에요? ]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말이나 해 보려므나.]
[잠깐 계세요, 제가 말할께요,
우리가 당할 수 없으니 무술로는 안되고
그 왜 미혼[迷魂]약으로 마취시켜서 데려오면 되지 않아요?]
[뭐라고 마취를......무술계에서도 가장 악랄하고도 비겁한 수법인 마취로 그분을 데려온다고 말도 안돼.]
[ 뭐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건가요 뭐. 다 우리 주인을 생각해서 하려는 거죠.......]
[절대로 그렇게는 못할거야!]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재잘거리는 것이었지만 끝내 좋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인인 녹의 여인을 위한 자기들의 헌신은 좋았지만 별무신통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아요?]
[글쎄 그것이 걱정이구나!]
하는 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아름답고도 청아한 목소리가 시녀들의 귀를 가만히 흔들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지 않고 왜들 소란이냐,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하는데......]
녹의 여인이었다. 그제야 동녘이 희부옇게 밝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다 녹의 여인의 말에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온 시녀들은
옷을 갈아입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로 말이 없는 가운데 어질러 놓은 술상이며 그릇들을 깨끗이 닦아 짐을 꾸리고
둘러쳤던 휘장이며 지저분한 쓰레기를 말끔히 치운 다음 열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에 옮겨 실었다.
그리고는 해가 뜨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녹의 여인의 말을 들으며 말 고삐를 잡아 끌었다.
하룻밤 동안의 화려한 잔치도 흔적도 없이 이제 여기저기 흩어져 자고 있는 손님들만이
잔디 위에 누워 있을 뿐 그 많은 시녀들도 기침 소리 하나 없이 마차에 올라타고
천천히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제 해가 뜨고, 그래서 햇빛이 얼굴을 내려쬐고 갈증이 난 손님들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하룻밤의 다사롭던 잔치가 꿈이였던가, 생시였던가,
하며 오래토록 고개를 갸웃거리며 환상에 잠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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