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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원한 21

오늘의 쉼터 2014. 10. 21. 09:02

제24장 원한 21

 

 

 

신라 조정에서 한창 이 논의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다시 당항성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위계로 대야성과 미후성 일대를 공취한 의자왕이 당초 목표대로 또다시 엄청난 군사를 일으켜

 

당항성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만일 당항성마저 잃어버린다면 신라는 입당로(入唐路)마저 끊겨

 

그야말로 동쪽 변방의 이름 없는 소국(小國)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이에 신라 조정은 전군을 동원해 당항성으로 보내는 한편 사신을 장안으로 급파해

 

위급함을 호소하고 구원을 청하기로 했다.

 

사정이 다급하니 김춘추가 다시 사신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쌀 한 말, 비단 한 필 챙기지 않고 홀로 말잔등에 올라

 

밤중에도 말을 달리고 길 위에서 주먹밥을 먹으며 불과 하루 만에 당항성에 도착했다.

 

당항성에서 춘추를 맞은 사람은 성주 진춘(陳春)과 원병을 끌고 달려온 북한산주 군주 변품이었다.

 

두 사람이 급히 관선을 준비하는 사이에 춘추는 진지의 망루에 올라 적의 동향을 살폈다.

 

호수 건너편 육로에도 개미 떼처럼 적군이 깔려 있었지만 더욱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은

 

당나루 쪽에 포진한 수십 척의 전선(戰船)들이었다.

 

백제는 육로와 수로를 통한 협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춘추는 자신이 당나라를 다녀올 동안 과연 당항성이 무사할지를 걱정하다가 문득 한 가지 꾀를 떠올렸다.

 

“배를 잘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춘추가 진춘과 변품을 불러 묻고 연하여 까닭을 설명하자 진춘이 웃으며,

 

“마침 귀신 같은 수장이 한 사람 있습니다.”

 

하고 추천한 자가 온군해(溫君解)였다.

 

온군해는 당항성에서 선단 일군을 부리던 장수였다.

춘추는 온군해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협조를 구했다.

 

“어렵겠지만 자네가 나를 태우고 적선이 즐비한 당나루 해역을 한 바퀴 돌아 당나라로 가주어야겠네.

 

그래야 서적이 당항성을 함부로 침공하지 못할 것이네.”

 

춘추의 말을 들은 온군해는 당나루 해역을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소장이 뱃길과 물길을 잘 알아 별로 문제될 건 없습니다만 나라에 귀중하신 분을 태우고 가다가

 

만에 하나 실수가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런데 우리 영내에 며칠 전부터 수상한 노인 한 분이 머물고 계신데,

 

제가 일곱 살 때부터 갯가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다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노인께서는 뱃길과 물길을 아는 것은 그만두고 물빛만 보고도 그 밑에 노니는 고기 숫자를 알아내고,

 

손바닥으로 바람을 잡아서 물길이 바뀌는 때와 파도의 높낮이를 점치며,

 

심지어 알 수 없는 주문을 외면 잔잔하던 바다에 거짓말처럼 풍랑이 일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저희 수부들이 모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고,

 

소문에는 하룻밤에도 쪽배 한 척만 있으면 서역의 난장에서 파는 털 깔개를 가져온다고 하는데

 

그것만 아직 확인을 못했을 뿐입니다.

 

만일 그 노인을 함께 배에 태운다면 귀인의 공무를 수행하는 데 아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영내에 그런 신출귀몰한 사람이 다 있었던가?”

 

진춘은 온군해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그들은 온군해를 따라 노인이 머문다는 포구의 한 허름한 집을 찾았다.

 

노인은 마침 집에서 쌀을 씻어 안치려다가 장수들을 맞았다.

 

“허, 생각보다 되우 빨리도 왔네.”

 

예순쯤 되었을까.

 

허름한 평복 차림에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노인이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일순 춘추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노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아주 오랜 옛날 운문산 가실사 밑의 초막에서 가야금을 타며 노래를 불렀던

 

바로 그 두두리 거사였다.

 

“나를 알아보시겠는가, 담날의 문하생.”

 

노인이 춘추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제게 귀한 가르침을 주시고 앞길까지 인도해주신 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음 세대를 준비하라던 거사의 말씀을

 

저는 그때 이후 지금까지 한날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춘추는 감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넙죽 절을 했다.

 

돌이켜보면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해준 노인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중국으로 건너간 것도,

 

이세민의 집에서 시문을 지어 세객들을 물리친 것도 모두 그를 만났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춘추의 절을 받은 노인은 잠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잊지 않으니 고맙네.

 

자네는 나를 20년 만에 처음 보는 것이지만 나는 짬짬이 자네를 보았지.

 

몇 해 전 부친의 장례에서도 조문객 틈에 섞여 보았고.”

 

“하면 저희 돌아가신 선친과도 교유가 있으셨던가요?”

 

그 질문에 노인은 답을 하지 않고 천천히 바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중참때가 지나면 파고가 높아질 테니 멀미로 고생하지 않으려면 지금 나서는 게 좋아.

 

더구나 당나루를 한두 바퀴 돌아서 가야 우리 당항성이 안전할 것 아닌가?”

 

그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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