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4장 원한 19

오늘의 쉼터 2014. 10. 21. 08:45

제24장 원한 19

 

 

 

딸을 잃고 비탄에 잠긴 춘추에게 유신이 흘린 눈물은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밖을 향해 이가 갈리던 분노와 적개심이 안으로 녹아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비로소 고타소의 죽음이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임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유신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춘추가 깜짝 놀라,

 

“아니 벌써 가시렵니까?”

 

하니 유신이 어느새 웃으며,

 

“다음에 또 오지. 기운부터 차리게나. 긴한 말을 할 몰골이 아니야.”

 

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안채 문이 열리고 문희가 주안상을 장만해 지소와 함께 상을 나란히 들고 들어왔다가,

 

“왜 앉지 않고 여태까지 서 계십니까?”

 

엉거주춤 문을 잡고 선 유신을 보고 물었다.

 

“가려고 일어서는 길이다.”

 

유신의 말이 끝나자 문희의 곁에 선 지소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금방 그렇게 가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희 아버지께서 이틀간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으셔서 어머니와 저는 걱정이 태산인데,

 

다행히 외숙께서 오셔서 이젠 예의로나마 음식을 드시겠거니

 

좋아 라 주안상을 마련해 들어오는 길입니다.

 

제발 앉으셔서 저희 아버지 음식 좀 먹여놓고 가십시오.”

 

하고 야무지게 청탁을 했다.

 

춘추는 물 한 모금 안 먹었다는 것이 유신에게 미안해 얼굴이 붉어졌고,

 

문희는 제가 할 말을 딸이 대신 해주니 속이 다 후련한데,

 

유신은 그렇게 말하는 지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허허, 그랬느냐? 그럼 그래야지.”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희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겁내시는 분이 바로 큰외숙이세요.

 

호통을 쳐서라도 밥이건 술이건 좀 드시게 해주세요.

 

큰외숙도 아시다시피 어디 아버지가 평소에 자시기나 적게 자시던 분입니까?

 

하루에 쌀 서 말과 술 여섯 말을 드시고 꿩은 아홉 마리도 드시던 분입니다.

 

지난번에는 그렇게 드시고도 좀 서운하다며 기어코 꿩 한 마리를 더 보태어

 

열 마리를 채웠던 적도 있습니다.

 

음식을 드시고 기운이 나야 언니 원수도 갚을 게 아닙니까?”

 

과연 춘추는 옛날부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난 대식가였다.

 

지소의 말을 들은 유신이 또다시 허허 하고 웃었다.

 

“영락없는 얘기로고. 이 사람, 뭣하나? 어서 앉아서 숟가락 들게나!”

 

유신이 어쩔 줄 몰라하는 춘추에게 짐짓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치니

 

그 호통치는 소리가 거짓인데도 방안이 통째 쩌렁쩌렁 울렸다.

 

그 바람에 춘추는 엉겁결에 자리에 앉고,

 

문희는 자주 듣던 소리라 이골이 났는데도 간담이 서늘해 흐느끼듯 숨을 들이켜는데,

 

외숙 골난 소리를 처음 듣는 지소는 얼굴이 홀연 하얘져서,

 

“어마나!”

 

하고 문희 등뒤로 냉큼 숨었다.

 

유신이 그 모습에 더욱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문희가 지소를 데리고 나간 뒤에 춘추가 맥없는 숟가락질로 밥을 절반이나 먹고 입을 헹구니

 

유신이 춘추의 잔에 술을 따랐다.

 

“건복 말년에 워낙 정사가 황폐해 지방의 향군들은 물론이고 도성의 정군들까지도 9할이 오합지졸이야.

 

이번 일도 그래서 생긴 것일세.

 

내가 병부에 들어간 뒤로 이놈의 오합지졸들을 훈련시키느라고 아주 골치가 아파.

 

창을 거꾸로 잡는 놈이 없나, 칼등으로 사람 치는 건 예삿일일세.

 

그러고도 군사라고 갑옷 찾아 입고 방패 챙겨들고 나서는 걸 보면 웃음이 난다네.

 

그나마 다행은 아직 정식으로 관군에 등재되지 않은 화랑도 가운데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제법 있다는 걸세.

 

천존 천품 형제와 죽만랑 같은 이들은 자신의 낭도들을 이끌고 와서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있네.”

 

유신은 병부의 딱한 사정을 설명한 뒤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합지졸을 훈련시켜 맹졸을 만드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에 될 것인가?

 

그렇다고 또 날이 갈수록 미친개처럼 날뛰는 백제를 더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일세.

 

적을 치기엔 힘이 모자라고, 치지 않으면 이쪽이 망할 판이니 만조의 근심이 여기에 있네.

 

자네 같으면 이 양난곡경을 어떻게 풀어볼 것인가?”

 

유신의 질문에 춘추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저는 형님께 들은 삼한일통(三韓一統)의 꿈을 눌최의 장지에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잊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날 이후 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삼한을 일가로 아울러 싸우지 않는 세상을 만드느냐에 있었지요.

 

다행히 건복 말년의 둘로 나뉜 민심은 여주께서 즉위하신 뒤로 많이 좋아졌지만

 

대신 외환이 깊어 백성들이 당하는 환난이 극심하고 땅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지금 국토를 볼 것 같으면 시조 대왕께서 나라를 여신 이래로 가장 협소할 뿐만 아 니라

 

삼한 가운데 제일 작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민심을 아우르고 내실을 다져서 국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한 것이 영토입니다.

 

영토란 사람에게 육신과 같아서 제아무리 비상한 뜻을 가졌다고 해도 육신이 병들어 죽어버리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은 필지의 일입니다.

 

그런데 형님 말씀을 들어보면 잃어버린 국토를 자력으로 회복하기란 현재로선 어려우므로

 

이럴 때는 부득불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다른 나라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겐가?”

 

유신이 묻자 춘추는 깊은 한숨을 토했다.

 

“글쎄, 그것이 문제입니다.”

 

“당나라가 쉽기야 할 테지만 여우를 잡으려고 범을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습니다.”

 

“고구려는 어떤가?”

 

유신은 자신이 고구려와 싸워 낭비성(娘臂城)을 빼앗고도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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