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원한 20
“당이 고구려를 넘보고 있으니 여지는 있는 일이 아닌가?”
“저도 어제오늘 줄곧 그 생각을 하는 중입니다.”
“당장 낭비성과 칠중성을 돌려달라고 할걸세.”
“네.”
“그렇다면 차제에 길게 한번 헤아려볼 필요가 있네.”
“어떻게 말씀입니까?”
“이를테면 합종연횡의 상대를 구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요.”
“지금 우리가 백제를 쳐서 설혹 자력으로 그 나라를 정복한다 해도 당은 당대로,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걸세.
현재로서야 우리가 힘이 없어 백제에 밀리니 당이 우리 편을 드는 것 같지만
전세가 바뀌면 사정은 금방 달라질 걸세.
다시 말해 백제를 치는 것만큼이나 외교도 중요하단 뜻일세.
그런데 당나라와 고구려는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아무리 잘 지내도 그 관계에 틈이 없을 수 없고,
세력이 기울면 어느 한쪽이 틀림없이 군사를 일으켜 치려 할 것이네.
이런 사실을 당도 고구려도 서로 잘 알고 있으니
우리로선 양국 가운데 하나를 택해 합종이든 연횡이든 공수 동맹을 맺을 틈새가 있는 것이지.”
유신은 계속해서 말했다.
“동맹의 상대를 정하는 문제는 그렇다네.
그 두 나라 가운데 약한 쪽을 택해야 하네.
그래야 훗날 동맹에 분란이 생기면 해결이 쉽지, 만일 강자와 동맹을 맺었다가
그 강자가 도리어 우리를 해치면 그땐 손을 쓸 방법이 없지 않겠나?
지금 양국의 국세를 보건대 분명히 당이 우위일세.
따라서 내 판단엔 고구려가 상책이고 당이 하책이지 싶네.
어떤가, 아우님의 생각은?”
유신이 묻자 춘추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것은 처음은 쉽지만 나중이 어렵고,
고구려와 동맹하는 것은 처음이 어렵지만 나중은 쉬울 테니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쉽게 응하지 않을 것은 명백하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춘추가 대답했다.
“고구려는 우리가 뺏은 낭비성과 칠중성을 돌려달라고 할 게 뻔합니다.
백제를 쳐서 아우른 뒤 한수 이북 땅을 모조리 돌려주겠다고 하면 관심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이번엔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 밝은 기색이 감돌았다.
“좋은 계책일세.”
“우리가 한수 유역을 뺏은 것은 서역의 뱃길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제를 병탄하고 남역을 평정한다면 한수 이북은 돌려주더라도 큰 손해는 없을 것입니다.”
“적지에 들어가서 그런 말을 할 만한 사람이 과연 우리 조정에 있을지 의문이네.”
“가게 된다면 제가 가야지요.”
춘추의 말에 유신은 깜짝 놀랐다.
“자네가?”
“네.”
“목숨을 건 일일세.”
“잘 알고 있습니다.”
“허, 혹을 떼려고 와서 혹 하나를 더 달게 생겼네.”
유신은 걱정스러운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먼저 우리 임금과 얘기가 되어야지. 조정에서도 상의가 있어야 하고.”
“내일 입궐하여 공론을 일으켜보겠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게. 사감(私憾) 때문에 무리수를 둔다는 의심을 받기 쉽네.
공론 일으키는 것은 내가 해보지.”
그리고 유신은 이렇게 덧붙였다.
“최악의 경우엔 당과 동맹하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걸세.
당나라 군사가 삼한 땅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길게 보고 준비를 착실히 해나간다면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닐세.
그러니 고구려가 무리한 요구를 해오면 절대 응해서는 안 되네.”
이날 두 처남 매부 간의 대화는 9월에 신라 조정의 공론에 부쳐져서 중신들 사이에 일대 설전이 벌어졌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원군을 청하는 일에 찬성하는 쪽도 있었지만 반대하는 신하가 훨씬 많았다.
반대하는 측은 자력으로 백제 토벌을 주장하는 측과, 공수 동맹을 맺는 데는 찬성하지만
전통적인 우호를 내세워 당나라의 원군을 빌려 오자는 측으로 다시 나뉘었다.
그런데 조정 공론에 참여한 병부령 알천이 중신들을 설득하다 말고 하도 울화가 치밀어,
“정말 답답들 하시오!
자력으로 백제 토벌만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무엇하러 이런 공론이 나오겠소?
누군 그것이 최선책인 줄 몰라 이러는 줄 아시오?
공들이 우리 군사들의 사정을 얼마나 아시오?
이제 겨우 오합지졸을 면하고 창칼이나마 손에 들 수 있는 것은 병부대감 김유신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지땀을 흘리며 3년째 군사들을 훈련시킨 공덕이오.
자력을 좋아하니 묻겠소만 자력으로 왜 백제 토벌만 합니까?
고구려도 토벌하고 당나라도 토벌해 천하 통일은 왜 못하는 게요?”
불같이 화를 낸 뒤로 자력 소리는 쑥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남은 공론이 당과 고구려 가운데
어느 쪽과 동맹을 맺고 원군을 청해오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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