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4장 원한 18

오늘의 쉼터 2014. 10. 21. 08:35

제24장 원한 18

 

 

 

이때 신라 땅의 손실은 실로 엄청났다.

 

미후성을 포함한 중부 권역의 40여 개 자성을 모두 잃은 것도 큰일이지만

 

무엇보다 대야성이 함락되었으니 국경은 이제 압량주(경산과 대구 일대) 서남단과 아시량군(함안)으로

 

좁혀졌고, 그곳에서 왕도 금성까지는 3백 리가 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적을 코앞에 둔 셈이었다.

 

성이 함락됐다는 비보에 이어 품석과 고타소의 수급이 전해진 것은 아직 군신들이 입궐하기 전인

 

이른 아침이었다.

 

나무 궤짝을 제일 먼저 열어본 사람은 알천에 이어 시위부를 관장하던 삼도대감 필탄이었다.

 

기겁을 한 필탄이 임금에게 달려가서 나무 궤짝은 저만치 두고 사실만을 아뢰자

 

여주는 백제인들이 너무 잔인하다며 치를 떨다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필탄이 다시 고하기를,

 

“신의 소료에는 춘추공이 저 끔찍한 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령을 놓아 입궐하지 못하도록 하시옵소서.”

 

하니 여주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공의 말이 옳다.”

 

하고 사람을 보내 춘추의 입궐을 금하였다.

 

김춘추가 처음엔 무슨 영문인가를 몰라 궁금해하다가 그날 낮에 어전 조례를 마친 대신들이

 

위로하러 찾아와서야 딸이 죽은 줄을 알았다.

 

비보를 접한 춘추는 사랑채 나무 기둥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서서

 

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사랑채 마당으로 집안 하인들이 다니고 물건이 들락거려도 알지 못하더니

 

해질 무렵에서야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슬프다, 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백제 따위를 멸하지 못하랴!”

 

하고 탄식하였다.

 

안채에서 고타소의 소식을 들은 문희는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고,

 

지소는 그런 어머니를 위로하러 들어가서 같이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온 집이 슬픔과 비탄에 젖어 있을 때 법민은 인문을 데리고 바깥에서

 

동네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창검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집안의 종 하나가 달려와서,

 

“도련님, 큰누님이 대야성에서 참변을 당해 돌아가셨답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법민이 그 소리를 듣고도,

 

“어, 그래?”

 

하고는 별반응 없이 하던 놀이를 계속하니 종이 다시 한 번,

 

“큰누님이 돌아가셨다고요!”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법민이 별대꾸 없이 놀이에만 열중하자 종은 돌아서서,

 

“시집가는 누이를 붙들고 그렇게도 가지 말라고 울어 잔칫집을 온통 초상집으로 만들더니,

 

이젠 죽었다고 해도 코방귀도 안 뀌는 저것이 무슨 사람이야?

 

만판 철부지 어린앨세그려.”

 

하고 법민이 아직 철이 없다고 흉을 보았다.

 

땀을 쫄쫄 흘리며 종일 놀다가 돌아온 법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물가에서 몸을 씻고

 

제 방에 들어가 글까지 읽고 잠이 들었는데, 자다가 일어나서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에 놀란 식구들이 법민의 방으로 달려오니

 

아이가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되어,

 

“그럼 큰누나는 이제 다시 우리 집에 안 오나요?

 

큰누나는 어디로 갔나요?

 

큰누나를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해요?”

 

눈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대답하기 난처한 말들을 꼬치꼬치 캐어물었다.

 

그 바람에 가까스로 마음을 달랬던 문희와 지소는 다시 슬픔에 북받쳐 울었고,

 

여기저기에서 하인들이 흐느끼는 소리도 났다.

 

한참 뒤에 지소가 법민을 달랬지만 법민은 잠도 자지 않고 밤새 울더니

 

이튿날에는 전에 고타소가 쓰던 방으로 건너가서 종일 나오지 않고 또 울었다.

 

법민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오직 울기만 해서 보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더욱 찢어놓았다.

 

고타소의 죽음이 전해진 이튿날,

 

김유신이 저녁나절에 춘추의 집을 찾았다.

 

이때 김유신은 대아찬 벼슬을 살며 병부령 알천 밑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는 대감 일을 맡고 있었는데,

 

향도들과 더불어 시신 없는 죽죽의 장사를 지내고 막 남산 장지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전날에 이어 그날도 춘추의 집은 밀려드는 내방객들로 정신이 없었다.

 

소문을 듣고 위로하러 찾아오는 고마운 사람들이었지만 춘추는 마음이 괴로워

 

이들을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만나면 죽은 딸의 일을 거론해야 하니 심사가 골백번도 더 뒤집힐 판이었다.

 

춘추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거처를 옮기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전에부터

 

말 엉뚱하게 하는 집사를 시켜 보도록 하니 그가 특유의 장기를 발휘하여,

 

“천지간 만물 중에 유인이 최귀(最貴)한데 인면수심에 비절참절도 유분수지 이런 괴변이 또 있겠습니까?

 

사람이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살다가 정말 이런 일은 없어야지요.

 

우리 집 나리께서는 곡기도 끊고 물기도 끊고 주야장천 시름에 잠겨 귀빈들을 상견할 몰골이 아니십니다.

 

왕림하신 고귀한 뜻은 소인이 대신 전해드릴 테니 소찬을 안주 삼아 목이나 축이고 가십시오.”

 

저만 아는 문자를 섞어 내방객들을 맞았다.

 

김유신이 왔을 때도 집사가 나와 천지지간 만물지중을 운운하다가 다시 보니 김유신이라,

 

“가만있자, 용화 나리가 아니신지요?”

 

하고 물어 유신이,

 

“자네는 언제 봐도 용하구먼.”

 

하니 부리나케 안채로 들어가 주인 내외에게 알렸다.

 

만인을 기피하던 김춘추도 김유신이 왔다는 말에는 머리를 매만지고 옷깃을 여몄다.

 

문희가 일어나 바깥으로 나와서,

 

“어서 안채로 뫼시게나.”

 

집사에게 말하니 집사가 냉큼 달려 나가 유신을 달고 들어왔다.

 

문희가 주안상을 보러 나가다가 유신과 마주쳐,

 

“어서 오세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인사를 하자 유신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뒤,

 

“마음이 아프겠구나. 이럴 때일수록 심지를 굳게 가져라.”

 

다정한 어투로 위로했다.

 

문희가 그 말에 더욱 서러워 눈물이 나려는 것을,

 

“네.”

 

하고는 바삐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때 춘추가 대청으로 나와서,

 

“오셨습니까, 형님.”

 

하고 인사를 하니 유신이 신을 벗고 성큼성큼 청마루로 올라서서

 

춘추의 어깨를 와락 안았다가 놓았다.

 

“괜찮으신가?”

 

“……네.”

 

“저녁은 드셨고?”

 

“……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러세.”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유신은 한동안 춘추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나 긴한 말을 나눌 처지가 못 되는 것 같았다.

 

유신은 비로소 자신이 너무 빨리 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고타소와 관련된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죽죽의 장례 얘기만을 입에 담았다.

 

용화향도뿐 아니라 계림의 많은 화랑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여주가 친히 장지에 나와 죽죽에게는 급찬을, 용석에게는 대내마 벼슬을 추증하고

 

그 식솔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향도를 잃은 슬픔은 형제를 잃은 슬픔일세.

 

벌써 내 향도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는가.

 

처음 해론이 가잠성에서 죽었을 때만 해도 나는 조정을 원망하고 어른들을 원망했으나

 

이젠 사정이 달라졌네. 우리 아이들이 상하거나 죽는 것은 모두 우리 책임일세.”

 

유신의 부릅뜬 눈에서 돌연 굵은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4장 원한 20  (0) 2014.10.21
제24장 원한 19  (0) 2014.10.21
제24장 원한 17  (0) 2014.10.21
제24장 원한 16  (0) 2014.10.19
제24장 원한 15  (0) 201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