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원한 14
대경실색한 품석이 칼을 뽑아 들고 뒤따라 달려나가며,
“게 섰거라! 서지 못하겠느냐?”
고함을 치고 또 일변으론,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붙잡지 못하겠느냐?”
하고 관속들을 불러대니 정문을 지키던 관군들이 엉겁결에 문을 닫아걸어서
검일이 그만 문을 나서지도 못하고 붙잡혔다.
“저놈은 집안 단속도 못하는 놈이 상전까지 능멸하였다!
논죄를 하기로 들면 이 자리에서 당장 칼로 목을 쳐도 무방하지만 그간의 정리를 보아 죽이지는 않겠다.
포승으로 묶어 성옥에 가두고 스스로 뉘우칠 때까지 물 한 모금 주지 말아라!”
검일은 옥에 갇혀 사흘을 보냈다.
그사이에 죽죽과 용석, 서천 등의 동료들이 품석을 찾아가서,
“나리, 검일도 화가 나서 뱉은 말이지 어찌 진심이겠습니까?
굳이 잘잘못을 따지기로 들면 나리께도 얼마간 책임이 있으니 그만 풀어주시지요.
검일의 충심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몇 번이나 용서해줄 것을 간청했지만 품석은 듣지 않았다.
“제 놈이 진실로 뉘우칠 때까지는 시일이 좀 걸려야 할 것이다.
여러 말 말고 좀더 두고 보자.”
그런데 검일이 갇힌 성옥의 책임자가 바로 모척이었다.
모척 역시 성주에게 처를 뺏긴 적이 있어 아직도 그 일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밤중에 음식을 장만해 은밀히 검일을 찾아와서,
“장군, 우리 저놈의 성주를 죽이고 차라리 백제로 도망가서 살지 않으시려오?”
하고 잔뜩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검일이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이내 눈빛을 빛내며 모척에게 말했다.
“자네 말씀에 일리가 있네.
저런 놈을 상전으로 섬겨야 하는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하물며 백제에는 골품제가 없어 사람을 오로지 능력에 따라 쓴다 하니
세도만 믿고 부녀자나 갈취하는 인종은 없을 테지.”
검일은 잠시 궁리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며칠 전 자성 순시를 나갔다가 들은 말인데
지금 백제군이 거타주에 집결해 호시탐탐 우리 대야성을 넘본다고 하네.
자네와 내가 성주를 죽이고 도망가는 것도 좋지만 관아의 경비가 삼엄하니
일이 잘못되는 날엔 우리가 저놈의 손에 목이 떨어지기 십상일세.
싸우다 적의 손에 죽는 것이 차라리 낫지,
어떻게 마누라를 뺏은 저놈 손에 죽겠나?
게다가 기왕 백제로 도망을 가려면 무슨 공이 있어야 그곳에서 편히 살지 않겠는가?”
“하면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따로 있는지요?”
“자네와 나처럼 성주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꽤나 있을 테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 거타주로 보내세.
이를테면 백제군과 내응하여 대야성을 바치자는 걸세.
그 정도 공이면 적국에 가서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새살림을 다시 일굴 수 있을 걸세.”
동병상련에 의기투합까지 마친 두 사람은 곧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모척의 인척이기도 한 두신을 보내기로 했다.
두신의 딸은 품석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불과 두어 달 만에 품석으로부터 버림을 받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매어 죽은 터라 두신의 원심 또한 만만찮았다.
접경을 거치지 않고 거타주로 넘어가는 길은 검일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두신은 검일이 일러준 곳으로 가서 거타주에 주둔한 백제 진영을 찾아갔다.
때는 바야흐로 임인년(642년) 8월,
이때 백제군은 의자왕이 미후성 공략에서 대승을 거두어
무려 40여 개의 대소 성곽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창 사기가 치솟아 있을 때였다.
윤충은 휘하의 군사들을 독려하며 하루 이틀 사이에 대야성을 치려고 잔뜩 독이 올라 있었는데
부길이 저녁에 신라인 하나를 데리고 들어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장군, 기뻐하십시오! 대야성이 저절로 굴러들어왔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윤충이 부길한테서 사정 얘기를 전해 듣고,
“혹시 술책은 아니겠나?”
하니 부길이 웃으며,
“제가 신라 사람입니다.
저 자가 하는 말에 거짓은 하나도 없으니 저를 믿으십시오.”
하므로 의심을 거두었다.
두신이 전한 말은 야간 기습이었다.
이튿날 대야성에 불길이 치솟아오르면 이를 신호로 쳐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뒷날 밤이 되자 과연 대야성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윤충은 미리 준비한 군사들을 이끌고 벼락같이 대야성으로 달려갔다.
성주 품석은 고타소의 방에서 나와 몰래 성희의 거처로 가서 한창 몸이 달았다가
적군이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받았다.
그가 갑옷을 입고 관아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사방에서 시석이 날아들고,
대야성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디서 나는 연기냐?”
품석이 앞을 볼 수 없는 자욱한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묻자 누군가가,
“성안이 불바다올시다.”
하고 대답했다.
“그럼 꺼야 할 게 아니냐?”
“끌 줄을 몰라서 안 끄는 게 아닙니다.
성옥도 불에 타고, 쌓아놓은 나락도 불에 타고,
곡식 창고도 모조리 불이 붙어 어디서부터 꺼야 할지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순간 품석은 검일의 소행임을 직감했지만 이미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죽죽은 어디 있느냐? 용석과 서천은 어디 있느냐?”
그는 다급하게 부하들을 찾았다.
그러나 부하들이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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