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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원한 15

오늘의 쉼터 2014. 10. 19. 16:29

제24장 원한 15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아찬 서천이었다.

“나리, 적군이 사방을 개미 떼처럼 에워싸고 있지만

 

무기를 넣어둔 창고에 불이 나서 속수무책입니다!”

“뭐라고? 무기 창고에도 불이 났어?”

품석은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사이에 성문은 크게 부서졌고 이미 성벽을 타고 오른 백제군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서천이 급히 말했다.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선 저들에게 항복하여 목숨부터 부지한 뒤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품석은 항복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네가 적장과 얘기를 나눠보아라.”

그러자 서천은 적의 본진이 있는 성벽 망루 위에 올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만약 우리가 항복을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사방으로 군사를 지휘하던 윤충은 몇 사람을 통해 서천의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항장불살(降將不殺)은 병가의 상식이다!

 

어찌 항복한 사람을 해치겠는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거니와 항복한 자들과는 반드시 여생을 함께 즐길 것이다!”

윤충의 말은 다시 몇 사람을 거쳐 망루의 서천에게 전해졌다.

 

품석은 모여든 비장들과 의논해 성문을 열어 항복할 결심을 굳혔다.

 

대부분 별다른 말이 없었으나 유독 반대한 이는 죽죽이었다.

“백제는 예로부터 반복(反覆)이 심한 나라올시다.

 

절을 지을 백공을 얻어가고도 군사를 일으켜 성을 치고,

 

화친을 말한 입으로 군령을 내리는 믿을 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지금 저들의 달콤한 말은 우리를 유인하는 술책일 뿐,

 

정말 성문을 열고 나가면 틀림없이 죽일 것입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다 죽느니

 

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죽죽의 그 말도 이미 항복을 결심한 품석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기어코 죽어야겠다면 너처럼 하면 된다. 하지만 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게 아니냐?”

“그럼 우선 몇 사람을 먼저 보내보십시오. 결과를 지켜보면 알 것이 아닙니까?”

죽죽이 끝까지 반대했음에도 품석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서천과 더불어 스스로 선두에 서서 군사들을 데리고 백제군에 투항했다.

 

백기를 높이 든 군사들이 성문을 빠져나가 백제 진영에 이르자

 

윤충은 휘하의 장수들에게 그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항복한 군사들을 어떻게 죽이라고 하십니까?”

부길이 놀라서 묻자 윤충이 태연히 대답했다.

“평시만 같아도 죽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지금은 신왕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쳐 보일 때다.

 

대왕께서도 미후성을 쳐서 무수한 동적들을 참살했다고 하니 어찌 저들을 살려두겠는가?

 

마땅히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 대왕마마의 왕업을 반석 위에 올려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군, 방금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캄캄한 오밤중에 해가 어디 있느냐, 해가……”

윤충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한편 품석이 투항한 뒤 죽죽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 성문을 닫아걸고 앞장서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승패는 진작에 갈린 싸움이었다.

 

제아무리 견고한 철옹성도 그를 지키는 사람에 따라서는

 

한낱 높이 쌓은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죽죽이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분전했지만 승산 없는 싸움에 군사들은 급격히 지쳐갔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닐세.

 

우리도 이쯤에서 그만 항복했다가 후일을 도모함이 어떤가?”

용석이 죽죽에게 물었다.

 

그는 처음에 품석을 따라 투항하려 했으나 죽죽이 혼자 남을 것을 걱정해 마음을 고쳐먹었다.

 

용석의 말에 죽죽이 대답했다.

“자네 말이 옳네. 이길 수는 없는 싸움일세.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고 이름지어준 것은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말고 꺾이지도 굽히지도 말라는 뜻이었네.

 

그런 내가 어찌 죽음이 겁나 항복을 한단 말인가?

 

나는 대야성과 함께 죽겠네.”

죽죽의 의연함에 감동한 용석도 항복하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하긴 항복한다고 반드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충절을 지키는 편이 옳아.

 

나도 자네를 따르겠네.”

둘은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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