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원한 11
그렇게 금지옥엽 키운 딸들이 어느새 여인으로 변해가니 춘추는 벌써부터,
“저것들을 어떻게 남의 집에 주나?”
“저것들 시집이라도 보내고 나면 내가 어떻게 사나?”
하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루는 문희가 그런 춘추를 보고,
“철이 된통 드셨구려.
당신 그 마음이 나 시집보낼 적에 우리 아버지 마음인 걸 드디어 아시겠수?”
하니 춘추가 잠자리에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서,
“임자 말이 맞소.
어서 술 한 되 병에 담고 보자기에 먹을 것 좀 싸시오.”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더니 그 길로 문희가 싸준 것들을 챙겨들고 두어 마장 거리에 사는
장인을 찾아가서 밤새 놀다가 새벽에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큰딸 고타소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지소와는 달리 자주 외로움을 탔다.
늦도록 등촉이 꺼지지 않는 날이 늘어나더니 언제부턴가는 끼니도 곧잘 거르고,
춘추가 퇴청하여 집에 돌아오면 제 방에서 울다 나왔는지 눈두덩이 퉁퉁 부어 있기도 했다.
문희가 그런 고타소를 데리고 앉아서,
“왜 그러니, 얘? 나나 집안 식구들한테 섭섭한 게 있니?”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혹시 중국에 있는 엄마가 생각나서 그러니?”
“아니에요.”
“그럼 왜 그러니?”
“이제부터 안 그럴게요.”
“어디 어미한테 속시원히 다 한번 털어놔 봐라.
태산을 사달래도 사주고, 용궁을 가고 싶대도 어미가 같이 가주마.”
“어머니도 참……”
문희의 말에 고타소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끝내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그 뒤로도 문희는 몇 번이나 큰딸을 찾아가 묻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는데,
하루는 보다못한 지소가 가만히 안방으로 건너와서,
“언니가 저러는 건 저절로 생긴 병이고 얼마 안 있으면 저절로 나을 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하고 오히려 문희를 위로하였다.
문희가 지소를 보고,
“이유가 뭔지 너는 혹시 아니?”
하니 지소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삼라만상이 다 허무해서 그런대요.
꽃이 피고 구름이 흘러가는 것도 허무하고,
자기가 죽어도 세상이 변함없이 돌아갈 것만 생각하면 슬프고 허무해서 잠이 안 온대요.”
하고 흉보듯이 일러바쳤다.
문희가 그제야 고타소의 병을 알아차렸다.
“파과병(破瓜病)이구나. 얘야, 너는 그런 생각 한 적이 없니?”
그러자 지소가 웃으며,
“그런 생각이야 전들 왜 없겠어요?
하지만 다 자기가 이겨내야지 저렇게 끙끙거리며 요란을 떤다고 어디 해결날 일인가요?”
대답을 야무지게 하는 품이 꼭 제가 언니 같았다.
문희가 지소의 말을 듣고 그때부터 심병(心病) 앓는 아이를 못 본 척 내버려두기로 작정했다.
뿐만 아니라 퇴청해 돌아온 춘추가 등촉을 밝힌 딸아이 방문 앞을 기웃거리며 계속 마음을 쓰자
지소의 말을 그대로 옮기고,
“세상 사람 다 앓는 병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파과병엔 세월이 약입니다.”
하고 언질을 주어 비로소 춘추도 사정을 대강 짐작하게 되었다.
부모가 일부러 외면하며 지내는 사이에 고타소는 혼자 꽃구경도 가고 달구경도 가는 눈치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아이가 과연 저절로 병이 나아 다시 옛날처럼 밝아졌는데,
이번엔 무엇에 홀린 듯 걸핏하면 웃어대고, 안절부절 서성거리다간 말도 없이 사라져
밤이슬을 맞고 들어오니 그게 또 걱정이었다.
문희가 가만 눈치를 본즉 친구를 사귀는지 남자를 사귀는지 아무튼 마음이 온통 바깥에만 가있었다.
그래 춘추와 의논해 하루는 늦게 들어온 딸을 불러 앉히고 자초지종을 캐어물었더니
순순히 입에서 나온 이름이 김품석이었다.
춘추가 관가에 나돌던 김품석의 조명을 모르지 않아 크게 놀랐으나 며칠을 두고 곰곰 생각하니
어린 딸에게서 생모 뺏은 일이 줄곧 애잔한데 저 좋아하는 정인(情人)마저 다시 물리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조명만 들었지 사람을 직접 본 것은 아니라서,
“아무래도 내가 김품석이를 만나 그 됨됨이를 좀 살펴봐야겠소.”
하고 문희에게 말하자
문희도 그게 좋겠다며 어서 만나보라고 재촉했다.
“호색이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지요.
그런 사람일수록 제 배필을 찾으면 소문나게 애처하는 수도 있답디다.”
이리하여 춘추가 품석을 만났다.
품석이 김춘추가 보자는 말에 가슴이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그는 하룻밤 재미 삼아 데리고 논 처자가 김춘추의 딸인 것을 안 날부터
밤잠을 못 이루고 고민이 심했다.
가죽은 탐이 나고 범은 보니 무섭다고, 김춘추의 사위가 되면
빈틈없는 왕가의 일원이 되는 것이어서 출세는 따놓은 당상이지만 문제는 그 뒷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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