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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원한 8

오늘의 쉼터 2014. 10. 19. 14:14

제24장 원한 8

 

 

 

임인년(642년) 10월,

 

막리지 연개소문의 거사는 단 하루 만에 성공으로 끝났다.

 

치밀한 계획과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 기강이 무너진 조정과 흉흉한 민심 덕분이었다.

 

게다가 거사의 규모와 내용이 만인의 상식을 뛰어넘을 만큼 광범위하고 잔인하여

 

임금을 처참하게 시해하고 조정 대신 1백여 명을 죽인 그를 상대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날 이후 권세는 모두 그의 것이었다.

 

참변을 면한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일제히 사직을 청하고 돌아가 감히 집안에서 나오지 못했으며,

 

죽은 건무왕의 비빈들과 나인들도 궁중에서 모조리 개처럼 쫓겨났다.

 

하지만 학정에 시달려온 백성들은 대부분 왕의 비참한 죽음을 후련하게 여겼다.

 

민심은 임금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잔혹한 행동을

 

의롭게 평가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사정이 이러니 연개소문의 위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것은 일견 당연지사였다.

 

국정을 전제하게 된 개소문은 제일 먼저 당나라 장안에 숙위하던 태자 환권을 폐하고

 

대양의 아들 보장을 임금으로 세웠다.

 

이때 보장의 나이 열아홉,

 

그는 심성이 착하고 양순하며 겁이 많고 예절바른 인물이었다.

 

호랑이 같은 막리지의 강권과 하늘 같은 아버지의 권유로 꿈에서조차 생각해본 적 없는

 

보위에 올랐지만 보장은 속으로 하염없는 두려움과 또한 임금이 되기엔

 

스스로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백부의 왕업이 순탄하지 않아 왕정을 피로 물들이며 조업을 물려받았으니

 

겁이 많은 보장으로서는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개소문은 보장을 왕으로 세운 뒤 병부의 장수와 만조의 신하들을 일제히 갈아치우고

 

법과 제도를 실정에 맞게 정비하니

 

천지를 뒤흔들고 사해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의 30년 철권통치는 이렇게 막이 올랐다.

한편 침전에서 비참하게 죽은 건무왕의 시신은 동강이가 난 채 며칠동안이나 시궁창에서

 

그대로 썩어갔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워 누구 하나 나서서 수습하는 이가 없었는데,

 

하루는 생전에 그를 모셨던 후궁 하나가 야밤에 몰래 궁궐로 숨어들어 썩은 유골을

 

보자기에 싸서 도성 북방 20리허인 영류산에 묻고 가까스로 돌비석 하나를 세웠다.

 

나라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으니 시호(諡號)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궁녀는 비석에 무어라 적을까 고민하다가 새삼 죽은 임금의 처지가 불쌍하고

 

그러구러 생전에 받은 총애가 새록새록 떠올라 한참을 엎어져서 울었는데,

 

울다가 생각해낸 것이 영류산에 묻었으니 영류왕이 좋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한자로 쓸 적에 영화로울 영(榮)자로 고쳐 영류왕(榮留王)이라 쓰고

 

 비석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비록 박토야산(薄土野山)에 초라하게 모셨지만 여기서만은 오래도록 영화를 누리세요.

 

살아생전 전하에게 받은 총애를 보답하려고 보니 신첩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이것뿐입니다.”

말을 마치자 무덤에 두 번 절하고 그 길로 반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뒤에 이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궁녀의 의리가 하찮은 사내보다 낫다고 칭찬하며

 

그가 만든 시호를 그대로 불러주니 기록에 남은 영류왕이란 곧 건무왕을 말하는 것이다.

강군(强君) 부여장(武王)의 뒤를 이어 즉위한 백제왕 의자가 자신의 신하들을 편전에 불러모으고

 

신라를 치자고 의논한 것은 고구려의 개소문이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인 임인년(642년) 7월이다.

이때 의자는 부왕의 탄탄한 왕업을 이어받아 안팎으로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즉위 직후 당주는 정문표(鄭文表)를 책봉 사절로 파견해 외교적인 승인을 마쳤고,

 

의자왕도 답례로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하고 방물을 바쳤다.

 

해가 바뀌자 의자는 다시 당에 조공사를 보냈으며,

 

아직 추위가 가시기 전인 2월에는 문관들을 대동하고 전국의 주군(州郡)을 직접 돌아보면서

 

죄수들을 살펴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불세출의 명군을 잃고 비탄에 잠긴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왕은 이미 그때부터 신라를 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는 주군을 순시하면서 국경의 지형지세와 적의 동태를 무척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다시 환궁한 것이 6월인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군사를 일으키기로 한 것이었다.

부왕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임금의 권위를 세우고,

 

동요하는 백성들과 의심하는 귀족들에게 흔들림 없는 제왕의 위엄을 보이자면

 

하루빨리 강군의 기상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과인이 국경을 순시하며 살펴보니

 

동적의 방비가 허술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오.

 

그런데 선왕께서 생전에 가장 중히 여긴 곳은 당항성(黨項城:경기도 화성군)과 당나루(당진)인데,

 

당나루는 지난날 우리가 쳐서 빼앗았으나 당항성은 아직 동적의 수중에 있소.

 

그 곳만 쳐서 빼앗으면 동적들은 입당로(入唐路)를 잃고 동쪽 변방에 고립될 것이므로

 

선왕의 유지인 남역 평정은 손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오.”

의자는 잠시 신하들을 둘러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한 곳은 적에게도 중한 곳이라

 

당항성의 방비가 엄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오.

 

이를 무시한 채 처음부터 무턱대고 당항성을 공격한다면 피차 길고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니

 

과인은 전날 남악(지리산)을 얻을 때 선왕께서 쓰신 위계(僞計)를 다시 써볼 생각이오.”

그리고 의자가 말한 곳은 미후성과 대야성(합천), 두 군데였다.

 

두 성의 간격은 무려 3백 리,

 

게다가 대야성은 남악을 넘고도 훨씬 동쪽으로 붙은 적지의 한복판이요,

 

예로부터 철옹성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신왕의 계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 병관좌평 은상(殷相) 아룁니다.”

의자는 선왕의 노신들이 자발하여 물러난 뒤

 

유일하게 남은 좌장(左將) 은상을 병관좌평으로 발탁했다.

“어리석은 신의 소견에 위계를 쓰려면 마땅히 당항성에서 멀리 떨어진 한 곳을

 

집중 공략하는 것이 옳을 듯하고, 적군이 위계를 쓴 곳으로 몰려오는 즉시

 

대군을 움직여 당항성을 쳐야 승산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계로 3백 리나 떨어진 두 곳을 친다면 자칫 군사들의 힘이 분산되기 쉽고

 

더욱이 대야성은 당항성 만큼이나 공략이 어려워 위계를 쓰기엔 적당한 장소가 아닙니다.

 

차라리 미후성 한 곳으로만 군사를 내는 것이 어떻겠나이까?”

달솔 임자(任子)도 은상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나라 안팎에 지켜보는 눈들이 많으므로 이번에 군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전하의 왕업이 순탄할 수 있습니다.

 

좌평 은상공은 선대왕을 보필한 백전필승의 명장이올시다.

 

노신들이 모두 물러난 마당에 은상공의 진언을 부디 새겨들으소서.”

왕은 두 신하가 말하는 동안 웃음을 짓고 있다가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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