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4장 원한 10

오늘의 쉼터 2014. 10. 19. 15:34

제24장 원한 10

 

 

 

윤충은 휘하의 1천 정병과 남악의 1만 군사를 모두 한곳에 집결시키고 매일 호된 훈련을 거듭하며

 

어서 날짜가 흘러가 신왕이 말한 때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이때 신라의 대야성 성주는 이찬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그는 본래 경사의 문벌 높은 진골 귀족 출신으로 일찍이 벼슬길에 나섰는데,

 

위인이 제법 총명하고 몸놀림도 재빨라 글을 읽어도, 칼을 들어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귀족의 자제로 일찍부터 출세한 사람에게 여자들이 줄줄이 따르는 것은

 

고금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품석은 젊어서부터 어디를 가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건복 말년에 신라의 시속이 크게 문란해지면서 금성에 색주가가 늘어나자

 

그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연일 상대를 바꿔가며 주지육림에 파묻혀 지냈는데,

 

한 가지 남다른 것은 아무리 말술을 마셔도 이튿날 아침에는 단정히 관복을 입고 관청에 나가

 

빈틈없이 집무를 보았고, 밤새 네댓 여자의 감탕질, 요분질을 상대하느라

 

허벅다리에 알이 배겨도 말을 탈 일이 생기면 남들보다 빨리 내달았다.

품석이 매양 자랑삼아 말하기를,

“나는 여인의 음기를 먹고 사는 절굿공이 축축(築築) 도사다.”

하고는 여름에 벗들과 사냥이라도 나가면 시내나 폭포수에 멱을 감다가

 

희한한 재주를 보여주곤 했는데, 양물로 빨아들였다가 도로 내뱉는 물이, 놀라지 마시라,

 

말통 하나는 그득하게 채울 정도였다.

 

칼잡이한테 자상(刺傷) 흔하고 먹보 체하기도 잦다고,

 

여자 좋아하고 양물 자랑하는 자에게 추문이 없을 리 없어,

 

제 집에 인물 반반한 계집종은 시조 대왕 낮잠 자던 시절에 벌써 요절이 났고,

 

스무 살 저쪽엔 갓 시집온 집안 숙모 항렬도 후린 적이 있고,

 

전란에 죽은 친구 문상을 가서는 상복 입은 친구 처도 밤새 가지고 놀았다.

이런 것들은 당사자만 알고 끝난 일이나 황룡사 백고좌(百高座)에 구경가서 여승한테

 

수작 건 일과 누이가 낳은 제 조카 건드린 일,

 

이웃 아낙네와 눈이 맞아 헛간에서 벌거벗고 뒤엉킨 일 따위는 소문이 나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 조명이 높았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본래 음식하고, 여자하고, 술하고, 약(藥)하고는

 

탐할수록 더 진귀하고 좋은 것을 탐하게 마련이라,

 

품석은 날이 갈수록 호색에 몰두했다.

 

양물 하자는 대로 하다가 패가망신한 자가 고금에 어디 한둘일까만

 

위인이 한번 상관한 여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시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나이 서른이 넘도록 그런대로 날벼락은 비껴 갔는데,

 

어느 보슬비 오던 봄밤 알천변을 지나다가 꽤나 말쑥하고 어여쁜 처자를 눈에 넣게 되었다.  

 

그런 쪽으로야 귀신 재주로도 못 당한다는 품석이 몇 차례 말수작으로 마음을 열고,

 

슬그머니 손을 붙잡으며 가슴도 열고 급기야 몸도 열었는데,

 

일이 잘되려고 그랬는지 못 되려고 그랬는지

 

하필이면 그 처자가 세상이 다 아는 김춘추의 큰딸이었다.

김춘추가 계화와 사이에서 낳은 고타소와 지소를 우여곡절 끝에 본국으로 데려온 것은

 

둘째아들 인문이 태어나던 해다.

 

계화는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쾌히 딸들을 내주지 않았지만,

 

계화의 부친 구칠이 나서서 일을 마무리짓고,

“다행히 내 딸년을 좋아하는 자가 있으니 걱정 말게.”

하여 춘추가 귀국하는 관선에 딸 둘을 태우고 돌아왔는데,

 

집에 오니 싫어할 줄 알았던 문희가 오히려 좋아라 날뛰며,

“저는 아들만 낳았는데 당신이 이렇게 고운 딸들을 데려왔으니

 

부창부수란 바로 우리 내외를 두고 나온 말입니다.”

하고는,

“얘야, 넌 이름이 무어니?”

“아유, 곱기도 해라. 그 옷은 누가 지어 입혔니?”

“인물이 고운 것을 보니 엄마가 미인인 모양이구나.”

살갑게 말도 시키고, 먹을 것도 주고, 그야말로 어미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때 이미 여덟 살, 일곱 살이던 고타소와 지소는 처음엔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사이에 주눅이 들어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만 살폈으나 얼마 안 있어 제일 먼저 새어머니와 친해져서,

“이건 어떻게 먹어요?”

“이 꼬마는 누구예요?”

“동생 한번 업어봐도 돼요?”

매일 눈에 띄게 말수가 늘어났다.

 

하물며 짐승도 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 용케 가려내는 법이어서 아이들은

 

새어머니 곁에서 점점 표정들이 밝아지고 행동도 거침없이 변해갔다.

아니 오히려 몸 아픈 핑계로 걸핏하면 짜증이나 부리던 생모보다

 

저희들과 잘 놀아주고 먹을 것, 입을 것 살뜰하게 챙겨주는 새엄마가 갈수록 더 좋았다.

이렇게 한식구가 된 고타소와 지소는 점점 자라면서 인물이 툭 틔어 미인 소리를 들었다.

 

게다가 성격들도 착하고 온순해서 웬만한 일에는 하인을 부리는 법이 없고

 

되레 하인 하는 일을 도울 때가 많았다.

그 뒤로 새엄마가 심심하면 배가 불러 문왕(文王), 노차(老且), 인태(仁泰), 지경(智鏡), 개원(愷元) 등

 

남동생들을 줄줄이 낳자 큰동생 법민과 둘째 인문은 고타소와 지소가 하나씩 맡아서

 

키우다시피 했는데, 철부지 아이들이 등에 업혀 머리채를 휘어감거나 오줌을 싸도

 

화를 내기는커녕 웃기만 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아버지 김춘추가 두 딸을 생각하는 마음도 실로 자별했다.

비록 문희가 생모 이상으로 잘은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두 아이만 보면 늘 가슴 한복판이 아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부정(父情)이었다.

춘추는 귀한 것이 생기면 먼저 두 딸을 떠올렸고,

 

어쩌다 몸이라도 아프면 밤새 머리맡을 지키며 이마를 짚어본다,

 

볼을 만져본다,

 

손을 쥐었다놓았다 어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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