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4장 원한 9

오늘의 쉼터 2014. 10. 19. 14:25

제24장 원한 9

 

 

 

“내 어찌 병관좌평의 출중한 지략과 무공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은상이 말한 것은 이미 선대왕께서 즐겨 쓰셨던 계책이라 더 이상 적을 속이기 어렵다.

 

그래서 3백 리나 떨어진 곳을 잇달아 치고 같 은 이유로 대야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가 대야성으로 군사를 낸다면 동적들은 위계를 의심하지 않고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

 

남역을 지키려고 들 것이다.

 

기껏 머리를 써본들 대야성을 치기 위해 미후성으로 군사를 냈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다.

 

그리하여 적들이 남역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벼락같이 당항성을 공격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철저한 속임수가 아니겠는가?”

설명을 마친 의자는 곧 군령을 내렸다.

“윤충은 들어라!”

이때 성충의 아우 윤충은 벼슬이 한솔에 이르러 휘하에 1천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너는 지금부터 꼭 한 달 뒤인 내달 초닷새에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남악으로 내려가서

 

국경의 정군과 향군을 총동원하여 대야성을 쳐라.

 

남악의 정군과 향군을 모두 합하면 1만 군사는 될 것이니

 

비록 대야성이 견고하더라도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다.”

임금의 말에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당자인 윤충조차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윤충이 제아무리 기백이 뛰어나고 용맹스럽다 해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적과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윤충은 하도 기가 막혀 눈만 끔벅거리는데 보다못한 성충이 나서서,

“신의 아우 윤충은 비록 칼 쓰는 법은 알지만 군사를 부려본 일이 없는 신출 중에서도 상신출입니다.

 

더구나 국운이 걸린 중대한 싸움에 선봉장은 당치 않으니 은상공과 같은 명장의 막하에서

 

시석이 나 나르도록 했다가 훗날을 기약하심이 가할 줄 압니다. 통촉하소서.”

하고 간하였다.

 

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과인도 병서는 읽고 칼은 쓸 줄 알지만 적을 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물며 윤충보다 한 달이나 앞서 바로 내일 1만 군사를 이끌고 친히 미후성을 치러 갈 것이니

 

사정은 윤충이나 과인이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는 그윽한 눈길로 윤충을 바라보았다.

“과인은 네가 칠악에서 맨손으로 곰을 때려잡을 때의 그 씩씩하고 늠름한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앉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으랴.

 

이번 출정은 너와 나를 위한 것이다.

 

지금 만군을 호령하는 장수치고 이런 과정을 겪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싸움의 승패란 경험의 유무와는 무관한 것이다.

 

또한 옛말에 거목은 거목 밑에서 자라지 않는 법이라고도 했다.

 

윤충은 실패를 너무 두려워 말라.

 

너의 뒤에는 항상 내가 있으니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칠악에서 곰을 때려잡을 때와 같은 기백으로 대야성을 친다면

 

틀림없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왕의 격려에 윤충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기분이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곧 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절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전하께서는 조금도 심려치 마소서!

 

신이 어찌 하해와 같은 성은에 승리로 보답하지 않으리까?

 

반드시 대야성을 취하여 바치겠나이다!”

의자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남악으로 내려가면 전날 흑치 장군의 휘하에 있던 부길(富吉)이라는 장수가 있을 것이다.

 

과인이 이번에 국토를 순시하면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험준한 남악의 고봉들을 손바닥처럼 꿰고 있을 뿐 아니라

 

동적들의 동향에도 정통하여 능히 자문을 구하고 향도(길안내자)로 삼을 만하다.

 

다만 그는 신라에서 이주해온 자라 많은 군사를 맡기기 어려우니

 

너의 휘하에 두고 잘 다스려 요긴하게 쓰도록 하라.”

젊은 왕은 이제 갓 보위에 오른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의젓하고 늠름할 뿐 아니라

 

계책을 내고 군사를 부리는 데 노련함마저 엿보였다.

 

선왕이 팔족들의 극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일찍부터 태자로 삼아 국정에 참여시킨 결과였다.

 

그는 임인년의 첫 출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진두 지휘했다.

 

그때 조정에는 신왕이 태자 시절부터 함께 학습하고 강론해온 성충, 흥수, 지적, 의직 등의

 

귀재들이 새파란 나이로 좌평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말 한 마디 보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까지도 신왕이 어떻게 계책을 내고 군사를 부리는지

 

한번 시험해보자는 듯한 태도였다.

 

이튿날 의자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미후성으로 출발한 뒤

 

윤충도 곧 휘하의 1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는 닷새쯤 뒤 남악을 넘어 거타주(함양)에 당도했다.

 

윤충은 그곳에서 임금이 말한 부길을 만났다.

 

부길은 흑치사차가 매우 아끼던 장수였다.

 

그는 본래 신라의 달구벌(대구) 사람이었는데,

 

갑신년(624년)에 장왕이 대군을 일으켜 거타주의 6성을 함락시킬 때

 

기잠성에서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때 기잠성을 공격한 백제 장수 흑치사차가 부길의 무용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고

 

백제에 귀화할 것을 권하자 그 뜻을 받아들여 사차의 부하가 되었다.

 

부길은 거타 6성이 함락될 때 원군이 와주지 않은 것을 매우 불만스럽게 여겨

 

신라 조정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다.

 

게다가 그는 범골 출신의 장수였으므로 아무리 공을 세워도 출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내달에 대야성을 쳐서 대야주를 수중에 넣으라는 어명이오.”

윤충의 말에 부길은 잠시 난색을 표했다.

“대야성은 신라에서 자랑하는 옹성 중에서도 관산성이나 삼년산성에 버금가는 철옹성입니다.

 

뜻만 가지고는 쉽지 않으니 꾀를 내고 치밀한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

“무슨 좋은 방안이 없겠소?”

“글쎄올시다.”

“대왕께서는 특별히 그대를 추천하며 자문을 구하라 하셨소.

 

거기에는 필시 그럴 만한 연유가 있을 게 아니오?”

그러자 부길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맥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연초 신왕께서 이곳에 납시었을 때 남악의 지세를 물어 자세히 설명해드린 일이 있고,

 

또 대야성 성주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 천하의 호색가라고 아뢴 일이 있는데,

 

아마도 저를 장군께 추천한 것은 그 때문인 듯합니다.”

“대야성 성주를 잘 아시오?”

부길은 윤충의 질문을 받고 다시 한 번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털어놓았다.

 

얘기를 듣고 난 윤충의 눈빛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이제야 전하의 성지를 알겠소!”

그는 처음의 난감한 표정에서 금방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돌변했다.

 

그 모습을 본 부길이 오히려 영문을 몰라,

“장군께서는 대야성 성주가 호색한이란 말씀만 듣고도 무슨 묘책이 떠오르셨는지요?”

하니 윤충이 껄껄 웃으며,

“묘책은 무슨, 날짜가 되면 그냥 들이치라는 얘기지.

 

성주가 호색한이면 제아무리 철옹성도 속은 필시 썩어 있을 터,

 

너무 깊이 생각하면 이것저것을 따지느라 도리어 위축되기 쉬우니

 

나같이 멋모르는 신출내기를 보내 무식하게 밀고 들어가란 뜻이외다.”

하고서,

“신왕은 과연 선대왕에 못지않은 명군의 자질을 타고나셨소!

 

이제 동적을 궤멸시켜 남역 평정의 대업을 이루는 건 시간문제요.

 

내 어찌 견마의 미력이나마 보태지 않겠소?”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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