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4장 원한 7

오늘의 쉼터 2014. 10. 19. 14:03

제24장 원한 7

 

 

 

왕이 허물을 고치지 않을 것을 알고 또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한 창조리는

 

곧 여러 신하들과 모의한 뒤 무력으로 임금을 폐하고 왕제의 아들 을불을 찾아내어

 

새 임금으로 삼았다.

 

을불이 임금이 된 뒤 봉상왕은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고

 

두 왕자도 따라 죽었다.

 

대양은 형인 임금이 무슨 잘못된 정보를 듣고 자신을 의심하여 사람을 보낸 줄로 아는 눈치였다.

 

개소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 창조리가 한 일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 말에 대양은 더욱 놀랐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개소문의 옷에 묻은 낭자한 피와 사람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살피다가

 

이윽고 사태를 짐작한 듯 크게 한숨을 토했다.

“한 해가 다르게 민심이 흉흉하여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소만……”

대양이 침통한 어조로 탄식한 뒤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다면 국상께서 나를 찾아온 연유가 무엇이오?”

“보위를 이으려고 왔습니다.”

“누구? 나를?”

“싫으십니까?”

대양은 눈을 감고 팔을 크게 내저었다.

“내가 보위를 이으면 나라 꼴은 더욱 엉망이 될 것이오.

 

국상도 방금 전에 눈으로 보지 않았소?

 

세상이야 어떻든 나는 흥겹게 가무나 즐기며 평생을 산 사람이외다.


임금의 재목이 아니오.”

대양의 말투는 확고했다.

 

개소문은 그가 과연 소문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정말로 대군께서는 돌고의 길을 가시렵니까?”

그 말을 대양은 자신을 해치겠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국상이 후환을 없애고자 우정 나를 죽이겠다면 하는 수 있겠소.”

대양이 의연하게 대답하자 개소문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창조리는 돌고의 아들인 을불로 새 임금을 세웠습니다.”

그제야 대양은 개소문의 뜻을 알아차렸다.

“내 아들은 나이가 열아홉밖에 되지 않은 어린앱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어 어지러운 정사를 보살필 수 있겠소?

 

더군다나 나는 그 아이가 행여 세도를 탐하고 권문을 기웃거릴까봐

 

틈이 날 때마다 가무를 가르쳐서 아는 것이 더욱 없소.

 

모르긴 해도 상신이 무엇을 하는 직책인지조차 알지 못할 겁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이란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드는 것이고, 코흘리개도 사직을 잇기 위해 보위에 오릅니다.

 

모르는 것은 가르칠 수 있고,

 

또 그릇되게 아는 것보다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끊어진 조업(祖業)을 잇고 만백성을 괴롭히는 난정을 다스릴

 

깨끗하고 청렴한 왕손입니다.

 

그러기엔 아무리 둘러봐도 대군의 아드님만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아드님을 주십시오.

 

그럼 견마지로를 다해 기필코 만대에 남을 성군이 되도록 보필하겠습니다.”

개소문은 갑자기 와락 엉덩이를 당겨 앉으며 굳게 대양의 손을 거머쥐었다.

“대군! 사직의 존망이 달린 막중대삽니다.

 

지금 임금은 죽고 대궐은 비어 있어 누구든 들어가서 용좌에 앉으면 임금이 될 수 있거니와,

 

만일 저에게 딴마음이 있다면 어찌 대군을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하겠습니까?

 

저는 역모를 꾀한 것이 아니라 고씨 사직을 받드는 이 나라의 충신으로

 

학정과 난치의 원흉들을 토벌했을 뿐입니다.

 

이런 충정을 대군이 몰라준다면 목숨을 걸고 거사를 도모한 처지로 어찌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이 모두가 백성과 대군의 조업을 위한 일이올시다.

 

도와주시오, 대군!”

눈에서는 불꽃이 일고 입에서는 침이 튀었다.

 

그 기백과 서슬에 대양은 일순 섬뜩함을 느꼈다.

‘이래도 거절한다면 이 사람은 능히 나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판단한 대양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작정했다.

 

평생 노래와 춤을 벗삼아 지내며 순리(順理)가 무엇인지쯤은 헤아리던 그였다.

 

아직 나이 어린 아들 보장(高寶臧)의 앞날이 다소 걱정스러웠지만

 

그 또한 자신과는 다른 아들의 운명이라면 운명일 터였다.

 

운명을 따르는 것이 곧 순리가 아니던가.

“그렇게 합시다.”

대양이 드디어 침묵을 깨고 고개를 끄덕이자 개소문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대양을 향해 넙죽 큰절을 올렸다.

“구덩이에 빠진 이 나라 사직이 드디어 헤어나올 방도를 찾았습니다.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이 모두가 대군의 은덕입니다.

 

신 연개소문,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아드님을 보필하여

 

오늘 이 방에서 맹세한 대군과의 굳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나이다!”

5척 단구에서 어쩌면 그토록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데 보니 눈물까지 흘리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며 대양은 생각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충신인가 역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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