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4장 원한 6

오늘의 쉼터 2014. 10. 18. 15:07

제24장 원한 6

 

 

 

“이 무슨 소란이냐?”

 

임금은 짐짓 위엄을 갖추고 소리쳤지만 개소문은 노기등등한 얼굴로 임금을 노려보았다.

 

“건무는 들어라! 너는 애초에 잘못된 임금이다!

 

잘못된 임금을 폐하는 것은 민심이며 또한 천심이다.

 

신하로서 민심을 좇고 천심을 따르는 것이 무슨 죄가 될 것인가?

 

나는 7백 년 사직을 보전하기 위해 너를 죽인다.

 

너 하나 죽어 사직이 유구하고 만백성이 편안하다면 이는 마땅히 충신이 해야 할 일이다!”

 

말을 마친 개소문은 그대로 칼을 뽑아 임금을 찔러 죽였다.

 

건무가 피를 토하며 고꾸라지자 개소문은 용포에 침을 뱉었다.

 

“지난 25년간 너 하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던가!

 

아아, 지금도 요동에서 돌을 지고 낑낑대는 불쌍한 사람들을 떠올리면

 

나는 죽은 너도 용서할 수 없구나!”

 

피묻은 칼을 쥔 개소문의 손이 다시 한 번 부르르 떨렸다.

 

그는 고꾸라진 임금을 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시신을 아홉 동강으로 끊어 시궁창에 버렸다.

 

부하 몇 명을 이끌고 개소문을 뒤따라온 팽지만과 상기도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혀를 내두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임금을 잔인하게 시해한 개소문이 곧장 말을 타고 달려간 곳은 왕제 대양(大陽)의 집이었다.

 

미리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해둔 듯 그는 조금도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없었다.

 

건무의 아우 대양은 젊어서부터 글을 가까이하고 노는 것을 좋아해 예인(藝人)들과 자주 어울렸다.

 

형과는 달리 인품도 고매하고 정사에는 뜻이 없어 길에서 중신들을 만나도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만일 그가 신라의 백반처럼 형의 왕업을 돕는다는 핑계로 권세를 추구했다면 형의 성품을 고려할 때

 

진작 큰 화를 당했을 공산이 컸다.

 

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대양으로선 어쩌면 한인(閑人)으로 지낸 것이 세상을 탈없이 살아가는

 

한 방편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선비나 예인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만났지만 행여 관직에 오른 인물이 찾아오면

 

호통을 쳐서 내쫓았고, 우연히 마주친 벼슬아치들이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개소문이 들이닥쳤을 때 마침 대양은 악공인(樂工人)과 무인(舞人)을 초청하여 제 집 정자에서

 

가무판을 벌여놓고 그 스스로도 횡적(橫笛)을 불고 오현금(五絃琴)을 뜯으며 한껏 흥에 도취해 있었다.

 

개소문은 말에서 내려 노래 한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막리지 연개소문이 왕제께 알현을 청합니다.”

 

하고 말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대양은 막리지가 찾아왔다는 말에 잠깐 뜻밖인 기색을 보였으나

 

곧 쳐다보지도 않고,

 

“저는 정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더구나 나라의 상신을 은밀히 만날 이유가 없으니 그냥 돌아가시지요.”

 

공손히 말을 마치자 자줏빛 비단 모자에 새 깃으로 장식한 화려한 차림의 악공인들에게

 

끊어진 음악을 연주하도록 명하였다.

 

연주가 시작되자 이마에 붉은 칠을 한 무인 네 사람이 나와 춤을 추었다.

 

개소문은 정자 아래에 서서 다시 노래와 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노랑 치마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은 무인 둘과 적황색 치마저고리에 노랑 바지를 입은

 

무인 둘이 짝을 이뤄 한바탕 정자를 돌고 나자 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왕제께서는 옛날 봉상왕(烽上王:14대 임금) 때의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순 대양은 안색이 벌개지며 오현금을 뜯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정자 아래 서 있던 개소문을 향해 비로소 눈길을 주었다.

 

대양이 언뜻 보니 개소문의 옷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 있어 그제야 무슨 변고가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대양은 급히 정자를 내려와 개소문의 팔을 이끌고 사랑채로 갔다.

 

그는 단둘이 자리를 잡고 앉자 여러 사람들 앞에서보다 오히려 태도가 당당했다.

 

“하면 내가 지금 돌고의 신세가 되었단 말씀이오?”

 

정중하게 묻는 대양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봉상왕은 성정이 포악하고 의심이 많아 즉위하자마자 숙부인 안국군(安國君)을 죽인 데다

 

이태 뒤에는 자신의 아우인 돌고마저 딴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해 죽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돌고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을불(乙弗:15대 임금 미천왕)까지

 

찾아서 죽이도록 명하였다.

 

또한 악정도 잇달아서 해마다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도

 

임금은 국내의 15세 이상 남녀를 모조리 징발하여 궁정 역사를 일으키니

 

굶주린 백성들 가운데는 학정에 시달려 나라 밖으로 도망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보다못한 국상 창조리가 봉상왕을 찾아가서,

 

“천재(天災)가 거듭되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살 곳을 잃고 장정들은 사방으로 떠돌며

 

늙은이와 어린이는 구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뒹굴게 되었으니

 

지금이야말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위해 근심할 때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을 토목의 역사(役事)로 괴롭히니

 

이는 만백성의 어버이가 된 처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웃에는 강적이 도사리고 있어 만일 우리의 피폐한 틈을 타서 공격이라도 해오는 날엔

 

사직과 백성이 어떻게 되오리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고 간곡히 말하니 왕이 노하여 대답하기를,

 

“임금이란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존재다.

 

궁전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어떻게 위엄을 보일 수 있겠는가?

 

지금 너는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구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오히려 창조리를 의심했다. 대경실색한 창조리가,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임금은 인자(仁者)가 아니고

 

그릇된 임금을 간하지 않는 신하는 충신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국상의 자리에 있으므로 그릇된 일을 보고 그냥 넘길 수 없어 드린 말씀이지

 

어찌 백성들의 칭송을 구하겠나이까?”

 

하며 자신에게 딴마음이 없음을 발명하자 왕이 그제야 웃으며,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을 것인가?

 

다시는 내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하지 말라.”

 

하고 엄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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