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원한 5
기한도 되기 전에 요동의 역사에서 빠진 시윤의 일곱 형제는 도성에 돌아온 뒤
혹시 말이 날까 두려워 아직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개소문의 집에서 기거해온 터였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성문지기 복장으로 위장한 채 조정 중신들이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관령을 받고 제일 먼저 나타난 자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숙부뻘인 중외대부 시명개였다.
오랜만에 시명개를 본 시윤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제발 저희 형제들만이라도 좀 구해주십시오, 숙부님!”
“이놈아, 너 하나 때문에 내 목도 날아갈 판이다.
무슨 수로 너를 돕는단 말이냐? 시끄러우니 어서 물러가라!”
문책을 당하던 날 밤,
부리나케 시명개의 집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도와줄 것을 간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던 그 싸늘한 말투가 새삼 시윤의 귓전을 맴돌았다.
그는 성문 뒤에 숨어서 손에 든 징을 크게 울렸다.
“중외대부께서 납셨소!”
징과 함께 울린 그 소리는 즉시 나무숲에 매복한 상기와 팽지만의 군사들에게 전해졌다.
영문도 모르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노신 시명개는 그늘진 숲길 한복판에 이르자
갑자기 칼을 들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장정들 손에 그만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내평 금태공이오!”
시명개의 처참한 주검을 미처 치우지도 않아 또다시 징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길 앞쪽에 매복했던 장정들이 금태를 처치했다.
그 역시 비명 한번 지르지 못했다.
“좌장군 동부 욕살 고명화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징소리는 울렸다.
“우장군 고정해요!”
“대형 고웅이오!”
고웅이 목을 잃고 불귀의 객이 된 직후 곧바로 사본이 허겁지겁 나타났다.
그는 평소 뇌물로 구워삶은 내관으로부터 왕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궐에 문병을 갔다가
개소문이 관병식을 이유로 관령을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순간 사본은 개소문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중신들을 만나 대책을 강구할 생각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길이었는데,
제아무리 사본이더라도 차마 노상참변을 당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태대형 책사 사본이오!”
잰걸음으로 달려가는 사본의 앞을 막아선 것은 을지유자였다.
“누, 누구냐?”
사본이 기겁을 하며 묻자 유자는 차갑게 웃음을 지었다.
“혹시 오래전에 역적으로 몰려 죽은 귀유공을 기억하는가?”
“귀유? 그, 그럼, 기, 기억하고 말고.”
“그렇다면 귀유공이 과연 역적이었던가?”
생면부지의 사내가 갑자기 30년도 더 지나 기억마저 가물거리는 것을 물어보자
사본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어서 대답하라, 귀유공이 과연 역적이었던가?”
그런 사본에게 사내는 소리를 높여 호통을 쳤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역적이라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역적이 아니었네. 내가 잘못 알았소.”
하지만 그것은 사본의 착오였다.
그는 무슨 말을 했어도 목이 떨어지게 돼 있었다.
유자의 입가에 잠시 씁쓸한 웃음이 스치는가 싶더니
번개 같은 솜씨로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대체 뉘, 뉘시오……”
아마도 사본은 그렇게 물으려고 입술을 움직인 듯했다.
하지만 유자는 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칼을 휘두르며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죽어라, 이놈!”
놀란 눈을 부릅뜬 채로 사본의 목은 댕강 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머리를 잃고 허우적거리는 사본의 몸에서 피가 사방으로 높이 솟구쳤다.
“이제 지하에서 편히 쉬십시오, 아버지.”
유자는 입술을 깨물며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날 식달성 남쪽에서 이렇게 목을 잃은 신하들의 숫자는 무릇 1백 명이 넘었다.
하물며 참변을 당한 자들 대부분이 임금의 총애를 받던 높은 벼슬의 중신들이라
전조(全朝)가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중신들을 모두 참수한 다음 개소문은 곧장 말을 타고 궁중으로 달려갔다.
그는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왕의 침전으로 향했다.
개소문을 발견한 내관들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지만 개소문은 눈 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그들을 베어 넘겼다.
그는 침전의 문을 부수고 임금 앞에 이르렀다.
자리를 깔고 누워 낮잠을 자던 임금은 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급히 몸을 일으켜보니 어느새 개소문이 칼을 차고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