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원한 3
“듣고 보니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다행히 장안에는 우리 태자께서 유숙하고 계시므로 사신이 가서 태자마마를 만나본다면
당조의 사정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소문이 사람을 보내 알아본 일을 장안에 사는 태자마마께서 모를 턱이 있겠습니까?
하니 개소문의 일은 사신이 돌아온 다음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과 중신들은 의논 끝에 사신을 당나라로 파견하되 개소문의 귀에는
이 사실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당이 정말 우리를 칠 계획이라면 경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개소문을 의심하지 말라.
그러나 만일 개소문의 말한 것이 모두 거짓으로 판명이 난다면 과인은 그를 참수형으로 다스리리라.”
하지만 이 일은 중신의 말석에 끼어 있던 고정의가 사위인 뇌음신을 통해 개소문에게 알려주었다.
소식을 들은 개소문은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저를 걱정하는 두 분의 마음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사신이 오가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이 넘어 걸릴 것이니
그다지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개소문은 병부의 군사 1만을 데리고 매일같이 장안성 남쪽 공터에서 호된 훈련을 시켰다.
9월이 지나고 10월이 되자 도성 근교에 이상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더러는 조의선인처럼 꾸미기도 하고, 소금장수나 방물장수, 중처럼 꾸민 이들도 있었으며,
10여 마리의 말을 거느린 말 장수도 어림잡아 6, 7명이나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주막이나 객사에서 묵었으므로 도성을 순시하는 관군들도
별로 수상히 여기지 않았다.
10월 보름이 되자 그들 가운데 호피 저고리를 입은 사람과 텁석부리 수염으로 얼굴이 뒤덮인 사람이
주모에게 막리지의 집을 물었다.
사람 상대하는 주모가 막리지의 집을 모를 턱이 없어 살가운 말씨로 가르쳐주자
이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주모가 말한 곳을 찾아갔다.
그날 밤에 막리지 연개소문의 집에서는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모인 사람은 모두 열셋, 집주인 형제와 을지유자 내외, 신통 대사와 텁석부리 상기,
그리고 요동에서 데려온 시윤의 일곱 형제가 동석했다.
이들은 모두 유자의 처인 청령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천문을 살피고 간지를 짚어대던 청령이 이윽고 붉고 아리따운 입술을 열었다.
“내일은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일은 반드시 남동쪽에서 벌여야 성공하기 쉽고 중앙은 장담하기 어려우며
서북방의 기운은 피해야 합니다.
또한 이른 아침이나 저녁보다는 한낮이 좋고 해가 지고 나서도 좋습니다.”
그 아버지 대허한테서 배운 청령이 평소에도 곧잘 천문을 살피고 길흉을 점쳐
개소문과 유자는 큰 도움을 받곤 했다.
맹부를 죽이던 날도 청령이 날을 뽑고 경비가 허술해 일이 수월할 것도 가르쳐주었다.
청령이 말미에 확신에 찬 얼굴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천문을 살피니 임금의 운이 오늘로 다했습니다.
다만 달이 너무 밝아 일관들이 거사의 조짐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내일 날짜를 잡는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청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자 개소문이 상기를 보고 물었다.
“갈석산에서 데려온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1백이 조금 넘습니다.”
상기는 일국의 재상에 대한 예의로 깍듯하게 공대말을 썼다.
“더 데려올 수도 있었지만 선별을 하느라 숫자가 좀 줄었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용맹한 자들이라 웬만한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상기는 신통사에서 장담한 숫자보다 부족해 미안한 심정으로 한 말이었으나
개소문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온 계획을 비로소 여러 사람 앞에서 털어놓았다.
“내일 낮에 나는 그간 훈련시킨 군사들을 식달성(息達城)의 빈 공터에 모아놓고
그 남쪽에 성대한 주연을 베풀어 임금과 대신들을 초빙할 작정이오.
평소에 나한테서 흠을 잡지 못해 안달하던 자들이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관병(觀兵)을 청하는데 마다할 리가 없소.
그런데 성문을 지나 음식상을 차려놓은 곳까지 어른 걸음으로 3 백 보 남짓한 길의 양쪽엔
몸을 숨기기 쉬운 나무숲이 있소.
그곳 지리는 을지유자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노형들께서는 갈석산의 군사들을 이끌고
유자를 따라가 숲의 양편에 매복했다가 들어오는 자들을 처리해주시오.”
개소문의 말에 상기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신통 대사는 그다지 신통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말을 달리고 창칼을 쓰는 것이 아니라
고작 나무 뒤에 숨었다가 나타나는 놈 목이나 따라는 것 아니오?
차라리 작대기로 밤송이를 털지. 이거 원, 싱거워서……”
처음부터 잔뜩 고개를 뽑고 개소문의 말을 경청하던 신통 대사 팽지만이
실망한 얼굴로 입맛을 쩍쩍 다시자 옆에 앉은 상기가 팔로 팽가의 어깨를 툭 쳤다.
“영험한 대사가 못하는 말이 없군.
말을 달리고 창칼을 쓰는 게 그토록 소원이면 내일 자네 혼자 갈석산에서
끌고 온 말 한 마리를 집어타고 국상이 말한 곳을 흙먼지가 나도록 뛰어다니게나.
어른 걸음으로 3백 보쯤 되는 길이라고 하니 말을 타고 달리자면 도느라고 꽤나 바쁘겠네.”
심각하던 좌중에 일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