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원한 4
개소문은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시윤을 바라보았다.
“공은 형제들과 함께 성문지기로 가장하였다가 신하들이 나타나면
징을 쳐서 죽일 자와 살릴 자를 구분해주시오.
나는 아직 몇몇 사람을 빼놓고 만조의 백관들을 잘 알지 못하오.
공은 오랫동안 조정에서 벼슬을 살았으니
어떤 자가 의롭고 어떤 자가 간사한지를 잘 알 것 아니오?”
“알지요, 알다마다요.”
시윤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공에게는 특별히 부탁할 게 있소.
옥석을 엄정히 구별하되 공 개인의 호불호(好不好)나 멀고 가까운 것으로 가리지 말 것이며,
의롭거나 간사한 구분을 임금의 편에서 가려서도 안 됩니다.
공은 오로지 우리나라 백성들과 천년 사직만을 생각하시오.
백관들의 죽고 사는 것이 오로지 공의 판단과 징을 치는 손끝에 달렸소.
부당하게 살아나는 자도 없어야 하겠지만 억울한 죽음이 있어서도 아니 되오.
내 말을 부디 유념하시오.”
“제가 한때 눈이 멀어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것은 사실이나 형제들과 함께
요동으로 쫓겨가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
상신의 뜻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 과히 심려하지 마십시오.”
시윤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개소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우인 정토에게 말했다.
“너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집안의 종들과 아낙네들을 모두 동원해 식달성 남문으로 가서
미리 준비한 술과 음식으로 떡 벌어지게 주안상을 마련하라.
내일은 나라의 잔칫날이다.
천막을 쳐서 장설간(帳設間)을 만들어 밥과 국을 끓이고 개와 돼지를 잡아
우리 군사들이 배불리 먹을 만큼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라.
거사를 끝내면 나도 그 음식을 먹을 것이다.”
이튿날 날이 밝자 개소문은 관복을 입고 입궐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임금이 몸이 아파 정무를 보지 못하겠다는 것이
침전을 다녀온 내관의 전언이었다.
개소문은 잠시 난감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한번 더 가서 여쭙게. 1만 군사가 훈련을 마치고 전하께서
참례하여 격려해주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네.
만일 우리 군사들이 전하의 격려에 힘입어 한껏 위용을 자랑한다면
도성의 백성들도 얼마나 듬직하고 마음에 위안이 되겠는가?”
개소문의 청에 늙은 내관이 눈을 아래로 뜨고,
“옥체가 미편하다지 않소?
그깟 군사들의 위용이나 자랑하려고 미편하신 대왕을 번거롭게 한단 말이오?
여러 말 할 것 없이 썩 물러가오!”
하며 제가 마치 임금이라도 된 양 꼴값을 떨었다.
화가 치민 개소문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치도가 무너지고 임금이 임금 같잖으니 하물며 내관 따위도 국사를 우습게 아는 것이리라.
그러나 개소문은 이를 악다물고 다시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내관을 달랬다.
“이보시게, 그럼 대신들만이라도 불러 군사들의 훈련하는 모습을 참관을 할 수 있도록
왕명을 받아주시게. 그건 할 수 있지 않겠나?”
막리지의 깍듯하고 다소곳한 말투에 늙은 내관은 여전히 심드렁한 낯으로,
“중신들을 소집해달란 말이오?”
하고 물었다.
개소문이 그렇다고 말하자
내관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그럼 번거롭게 대궐을 들락거리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훈련장에서 모이면 되겠소?”
하여 개소문이,
“그래도 좋지. 아니 그 편이 여러 모로 덜 번거롭겠네.
늙은 쥐가 독을 뚫는다고, 과연 노황문(老黃門)의 지혜로움이 만조를 통틀어 제일일세.”
하며 내관을 잔뜩 추켜세웠다.
그 말에 우쭐해진 내관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침전으로 어슬렁거리고 들어갔다가
조금 뒤에 다시 나왔다.
“허락은 얻었는가?”
“장소가 어디요?”
“식달성 남쪽 공지일세.”
“하면 식달성 남문에서 관병식(觀兵式)이 있다는 소집령을 내면 되겠소?”
“여부가 있겠나.”
“대상자는 어느 선에서 정하면 되오?”
“문무 백관들이 빠짐없이 모이면 좋겠네.”
“그러지요.”
내관은 개소문에게 물어 들은 바를 제가 직접 종이에 썼다.
“지금 곧바로 관부를 확인하고 도장을 찍어 관령을 놓을 터이니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고맙네.”
개소문이 공치사를 하자 지혜롭다는 말에 줄곧 우쭐했던 내관은,
“관령을 놓을 때 대왕이 편찮으신 말은 쓰지 않으리다.
대왕께서 관병하지 않는 것을 알면 빠지는 이가 한둘이 아닐 게요.”
하고 시키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개소문은 크게 기뻐하며 더욱 듣기 좋은 말로 내관을 칭찬했다.
“전하께서 안 계시니 황문이 알아서 정사를 다 보네그랴.”
관령이 돌자 만조의 문무 백관들이 하나둘씩 식달성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