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15
“임금이 하필이면 날도 풀리지 않은 겨울에 국상을 보낸 것이 어떤 의도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지금 공역을 독촉하면 오히려 민심이 돌아설 것입니다.
차라리 관수와 역부들에게 말하여 실컷 놀도록 하시는 게 좋습니다.
오죽하면 공역을 독촉하는 부지런한 자는 폐신, 악신이고,
게으른 자가 충신이라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개소문도 그제야 한겨울에 자신을 요동으로 보낸 임금과 조정 대신들의
간교한 술수를 알아차리고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양만춘의 권유로 개소문은 더 이상 9성을 순시하지 않았고, 공역을 감독하지도 않았다.
직무를 스스로 내던지고 나자 먹고 자는 일밖에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뜻만 같아서는 당장 도성으로 돌아가 거사를 일으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 돌아가면 의심을 사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고,
의심을 사면 자연히 그 뒤의 일도 순조롭지 못할 것이었다.
개소문은 거사를 일으킬 날짜를 대략 10월경으로 잡고 그사이에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로 마음을 먹었다.
3월이 되자 그는 유자와 더불어 요하와 당나라 국경을 차례로 지나 갈석산 팽지만의 산채를 찾아갔다.
본래 사람살이란 게 근본이 달라지기는 힘들고 살던 대로 살면서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법이라, 이때 팽지만은 갈석산에 신통사(新通寺)라는 큰절을 짓고 스스로 신통(新通) 대사라 칭하며
고승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속은 여전히 산적패 두목 그대로였다.
그가 중노릇을 하게 된 연유는 법강과 치도가 자리를 잡은 당나라의 시속이 예전과 달라서
산적패를 그대로 두지 않아서인데, 나라의 치도가 바로 섰다고 산적패의 행실까지
저절로 고쳐지는 것은 아니어서 팽지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재물을 모두 털어 절을 짓고
배찰산에서 멀쩡한 진짜 중 하나를 납치해 염불을 배웠다.
두목 팽가는 중노릇을 한다손 쳐도 2, 3백 명이나 되는 산적패 부하들이 일시에 중이 될 수는 없으니
텁석부리 상기가 부근에서 산채를 따로 꾸며 예전처럼 화적질을 그대로 하면서 관군이
소탕을 나오면 팽가의 절로 숨어들곤 했다.
어느 해던가 조명으로 산적패 소탕령이 내려 관군들이 한 차례 돌고 간 직후에 요서의 한 현령 부인이
갈석산에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러 왔다가 신통사에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이 절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습니까?”
마침 관군을 피해 숨어 지내던 상기를 보고 물으니 상기가 얼떨결에,
“절이 영험하니 사람이 많지요.”
“무엇이 영험한가요?”
“소원을 빌면 다 이루어지는 신통(神通)한 절이오.
그래 절 이름도 신통사가 아니오?”
하고 몇 마디 말대답을 해주었다.
그 부인이 다시 건장하고 불한당같이 생긴 사람들의 행색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그런데 저 사람들은 무엇을 빌러 왔습니까?”
하고 물어 상기가 급히 둘러대기를,
“저 사람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장사치들인데 처음엔 말끔한 행색으로 왔다가
절이 하도 영험하니 1년, 2년씩 내려가지 않고 치성을 드리는 바람에 몰골들이
그만 화적패들처럼 되었소.
이 제 며칠 안 있으면 다들 떠날 겁니다.”
하고는,
“그런 부인께서는 무엇을 빌러 오셨수?”
하고 되물었다.
그 부인이 상기의 말을 믿고 속사정을 털어놓으니 상기가 껄껄 웃으며,
“그 정도 소원은 열흘만 빌고 가도 대번 이뤄질 것이오.”
입찬말을 하였다.
부인이 절반은 의심이 갔지만 또 절반은 믿는 마음도 없지 않아서 일행과 함께 절에 며칠을 묵었는데,
과연 사나흘이 지나자 화적패 같은 사내들이 일제히 사라지므로 믿는 마음이 더 생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부인이 신통사에 유할 때 날이 궂더니 밤새 폭우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초저녁부터 신통사 머리 위에서 우글거리고 번쩍거리던 천둥 번개가 갑자기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을 내며 본당 뒤로 떨어진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가 마당으로 달려나가니 높다란 본당 뒤편에 불길도 보이고 연기도 심해
벼락 떨어진 줄을 알았다.
세찬 폭우로 불길은 곧 잡혔지만 연기는 한동안 계속해서 피어났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 그때는 아무도 신통함을 알지 못했는데,
이튿날 날이 밝아 연기 나던 곳으로 가보니
나무 두 그루와 가운데 커다란 바위 하나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벼락이 바위를 때린 줄로만 알고 신통사 주지인 신통 대사조차도,
“저놈의 날벼락이 조금만 앞으로 떨어졌으면 1만 냥짜리 절이 통째 날아갈 뻔했네.”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부처다, 부처!”
“벼락이 바위에 부처를 새겼다!”
하는 감탄이 나오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그 말을 듣고 자세히 바위를 살펴보니 시커멓게 그을린 형상이 불상과 흡사했다.
아니, 보면 볼수록 영락없는 불상이었다.
그러자 구경 나온 사람들이 바위 앞에 엎어져서 절을 하고,
염불과 축문도 외고, 흥분이 지나쳐서 비린 것까지 올려놓고 제사도 지냈다.
이때부터 갈석산에 벼락이 떨어져서 부처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자
산지사방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기 시작해 화적패나 드나들던 신통사가
졸지에 명찰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신통 대사는 범인이 함부로 만날 수도 없는
귀인이 되어 그 기고만장함이 본당의 불상을 내리고 제가 연좌방석 위에 올라앉을 정도였다.
게다가 벼락치던 날 그 과정을 직접 목도한 현령 부인이 하산하여 어찌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고 다녔는지 현령이 재물도 보내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보내고, 심지어는 관군을 동원해
갈석산 들머리를 지켜주기까지 했다.
이에 신통 대사는 상기 일패를 모조리 절로 데려다가 일부는 머리를 깎아 중노릇도 시키고,
일부는 불목하니로, 나무꾼으로, 벼락친 불상 앞에서 돈 받는 사람으로 쓰기도 하고,
더러는 현령에게 말하여 관군으로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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