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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연개소문 14

오늘의 쉼터 2014. 10. 17. 23:49

제23장 연개소문 14

 

 

 

장성 축조를 감독하기 위해 요동으로 간 일은 개소문의 오랜 계획을 앞당기는 데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

나라의 상신 막리지가 임금이 써준 사령장에 절도봉까지 지니고 요동에 도착하자

외지의 관리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었다.

개소문은 공역 감독을 핑계로 이들을 만나 어떤 생각을 가진 인물인지를 샅샅이 알아보았고,

행여 건무왕의 정책에 동조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관직을 빼앗아 내쫓고

자신의 뜻에 부합하고 마음에 드는 인물로 관수를 다시 세웠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공역의 부진에 있었다.

그러나 10년을 넘겨 공역이 지리하게 계속되었으므로 대부분의 공사가 지지부진했고

따라서 핑계를 대고 흠을 잡을 곳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무리한 공역 때문에 요동의 관리 대부분이 임금과 조정의 처사에

심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점이었다.

개소문은 요동의 민심을 직접 확인하자 더욱 확신에 찬 얼굴로 유자에게 말했다.

 

“나는 요동에 와서 정말 귀한 것을 얻었네. 줄곧 갈등하던 거사의 명분이야.”

 

공역 현장을 두루 돌아본 개소문은 내친 김에 요동 9성의 성주들까지 직접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우선은 국경을 지키는 성주들의 속마음을 파악하는 것이 첫번째 목적이었고,

만일 그들에게 조정에 대한 불만과 의기(義氣)가 있다면 뒷날 도성에 변고가 생겨도

동요하지 말 것을 은밀히 부탁해둘 계산이었다.

그는 유자와 함께 우선 신성으로 가서 성주 양만춘(楊萬春)을 만났다.

그런데 양만춘은 개소문을 보자 몹시 반가워하며,

 

“그러잖아도 국상께서 언제쯤 오실까 날마다 망루에 올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며 개소문이 방문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투로 말했다.

개소문이 내심 놀라며,

 

“성주께서는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대단하십니다. 제가 올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요?”

 

하고 물으니

양만춘이 빙그레 웃으며,

 

“허, 다 아는 수가 있지요.”

 

하고는 관사로 안내하였다.

개소문이 성주의 거처와 관사의 살림살이를 두루 살펴보니

새것은 하나도 없고 대개가 낡은 것들인데,

궤짝이나 책상 같은 것은 칠이 모두 벗겨져서 모양새가 우스웠다.

성주가 들어가면서,

 

“누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 말이 결코 인사치레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낡은 것을 어찌나 닦아가며 쓰는지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겉면에는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볕에도 먼지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개소문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성주의 인품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관사에서 개소문은 자신이 왕명을 받아 장성 공역을 감독하러 나온 것과 내친김에

요동 9성을 두루 순시할 계획임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성주가,

 

“날도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그렇게 고생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하고서 개소문의 곁에 앉은 유자를 바라보더니,

 

“아버님께서 달포쯤 전에 여기를 다녀가셨습니다.”

 

하였다.

성주의 말에 개소문과 유자는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을지 장군께서요?”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백산에 계신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답니까?”

 

유자가 묻자

성주가 사뭇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한 달만 있으면 누구든 임금과 조정에 등을 돌리게 돼 있지요.

요동성의 민심은 10년 전 장성을 축조하면서 완전히 임금을 떠났습니다.

심지어 작년에 당나라 진대덕 일행이 지나갈 때는 그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뻔히 알고서도 기꺼이 호응하는 관수들이 여럿 있었지요.

당은 수나라의 전몰자까지 챙기는데 우리는 어린애와 등이 굽은 늙은이까지 동원해

과중한 노역을 시키고 마소처럼 부리니 누가 고구려의 백성으로 살고자 하겠습니까?

차라리 당나라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올시다.”

 

성주 양만춘의 말에 개소문은 속으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태산 같은 걱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누가 임금이 되든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섰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양만춘은 마치 그런 개소문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막리지께서 방책이 있다면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습니다.

요동의 민심은 하나도 걱정할 게 없으니 굳이 9성을 순시하실 까닭도 없습니다.”

 

일순 개소문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게 무, 무슨 말씀이오?”

 

“을지 장군께서 언질을 주시고 저에게도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양만춘은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개소문과 유자는 그제야 을지문덕이 요동을 다녀간 이유를 알아차렸다.

 

“을지 장군께서는 이미 동남쪽 비사성을 필두로 9성을 차례로 돌아 마지막에

제가 있는 신성을 다녀가셨습니다.

9성 성주들을 만나서도 저한테 하듯이 도움을 청한 줄 압니다.

민심도 민심이지만 요동의 뉘라서 감히 을지 장군의 청을 거절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막리지께서는 걱정하실 일도 없고 요동을 새삼 순시하실 까닭도 없습니다.”

 

개소문은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던 을지문덕이 암암리에 뒤에서 원조하고 있음을 알고

마음이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유자를 돌아보며,

 

“들었는가? 스승님께서 드디어 몸을 일으키셨네!”

 

하니 유자도 기쁜 낯으로,

 

“나도 귀가 있는 사람일세.”

 

하고는,

 

“그럼 여기서 며칠 더 묵다가 곧장 도성으로 돌아가세나.”

 

하였다. 그러자 양만춘이 물었다.

 

“국상께선 요동에 오신 뒤로 공역이 부진한 곳 몇 군데를 엄히 문초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요?”

 

“그렇습니다. 네댓 군데 그런 곳이 있었지요.

하나 실은 그곳의 책임을 맡은 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지

공역의 부진함을 문초한 것은 아닙니다.

한데 왜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앞으로는 공역의 부진함으로 관수를 문초하지는 마십시오.

그럼 국상께서도 민심을 얻지 못하십니다.”

 

양만춘은 개소문이 간과하고 있던 문제를 거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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