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11
그가 가고 나서야 맹부가 비로소 모골이 송연하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엉금엉금 기듯이 방으로 들어와 곰곰 되짚어보니
방금 다녀간 자는 개소문이 분명하거니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 눈매와 얼음장같이 싸늘한 말투가 자꾸만 눈에 밟히고 귓전을 맴돌았다.
맹부는 두어 차례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면서,
“저놈이 미쳤지.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감히 내게 협박을 해?”
일부러 거센 척 허세를 부렸으나 생각하면 할수록 섬뜩하고 두렵기만 했다.
그래서 처음엔 날이 밝는 대로 입궐해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려고 결심했는데,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뒷날 날이 밝아 다시 생각하니
그런 잔인하고 포악한 자를 조정에 들여놓고 조석으로 면대할 일이 당최 꿈만 같았다.
그러구러 대명천지 밝은 아침을 보니 제법 기운도 나고 용기도 생겨서,
“내 이놈을 아예 천길 낭떠러지로 밀어버려야겠다.”
하고는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관복을 챙겨 입고 대궐로 달려갔다.
맹부의 입을 통해 개소문의 포악함을 전해 들은 임금과 관리들은 혀를 내둘렀다.
더욱이 맹부가 사실만을 전하지 않고,
“그 새파란 놈이 글쎄 시퍼런 장도를 꺼내 나를 치려는 것을 한사코 피해 패대기를 쳐서
돌려보냈는데 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이 자리에 없을 뻔하였나이다.”
하고는 없던 말까지 꾸며 보태는 바람에 개소문은 더욱 나쁜 놈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연나부에 민심을 살피러 갔던 내관이 돌아와 고하기를,
“연서구란 자는 종친 가운데서도 별로 아는 자가 없고 이웃에 담을 격하고 사는 이들은
한결같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인물이라 만일 그런 자를 국상으로 세웠다가는
망신은 둘째치고 국사가 아 주 우스워질 판입니다.”
하고 연하여 서부 사람의 대체적인 인심이 연태조와 두 아들에게 있음을 말하였다.
임금이 마뜩찮은 기색으로 혀를 차며,
“허허, 이 노릇을 어찌하누?”
하고 난감해 앉았으려니 사본이 나서서,
“신에게 방도가 있으니 들어봅시오.”
하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에 연태조를 막리지로 앉힐 때는 어수선한 민심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연태조의 아들로 국상을 잇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습니다.
한데 재작년에 요동으로 갔던 맹진공이 죽고 금태공이 돌아온 뒤로 천리성의 공역이
지지부진하다고 들었습니다.
어차피 연태조의 아들로 막리지를 세울 양이면 직책을 맡기되 기회를 보아 요동의 장성 공역을
감독하도록 시켜 멀리 쫓아 보내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그럼 명분도 얻고 원하는 바도 취하는 일석이조의 인사가 될 것이옵니다.”
사본의 제안에 제일 기뻐한 자는 맹부였다.
“정말 절묘한 계책입니다.
장성을 감독하는 일은 나라의 중대사요,
막리지는 국상이니 도리에 어긋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연태조의 남은 임기가 고작 이태요,
장성 공역은 아직 기한이 몇 해는 더 남아 있으므로 전하께서는 영원히
그 포악한 자를 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한겨울입니다.
개소문이 요동에 가서 장성 공역을 독촉한다면 마침내는 서부에서도
인심을 잃게 될 공산이 큽니다.”
임금도 가만 헤아려보니 괜찮은 조치일 것 같았다.
“짐의 두 현자가 그렇게 말하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구나.
그러나 어차피 해가 저물었으니 정초에 다시 이를 논하는 것이 좋겠다.”
건무왕은 신축년(641년)을 보내고 이듬해인 임인년(642년)에 다시 정사를 돌보면서
제일 먼저 당에 또다시 조공사를 파견했다.
이제는 태자까지 장안에 숙위하고 있는 터라 당조에 더욱 마음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마소에 바리바리 실은 방물들을 이끌고 조공사가 떠나고 나자
왕은 사람을 시켜 연태조의 아들 개소문을 불러오도록 지시했다.
개소문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때 책사 맹부가 말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개소문은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며 무슨 악행이라도
능히 저지를 만한 위인입니다.
비록 국상의 자리를 계승시키더라도 대왕께서는 반드시 일침을 놓아 두 번 다시는
조정 중신들과 대왕의 왕업을 능멸하는 일이 없도록 다짐을 명백히 받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임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맹부는 너무 염려하지 말라.”
이윽고 개소문이 편전으로 불려와 임금의 앞으로 걸어왔다.
건무왕이 보니
앙바틈한 체격에 벌어진 어깨, 검고 거친 수염이 소문에 듣던 대로 매우 강인해 보였다.
더구나 누구든 임금에게 처음 불려오면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도록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엉금엉금 기듯이 들어오게 마련인데, 개소문은 허리와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 마치 개선 장수처럼 씩씩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자칫 무엄할 정도로 임금의 코앞에까지 걸어와서야 땅에 엎드렸다.
“신 연개소문, 대왕마마의 부르심을 받고 입궐하였나이다.”
작은 체구에서 터져나오는 목소리가 대궐을 쩌렁쩌렁 울리도록 우렁찼다.
건무왕은 그런 개소문이 부담스러웠다.
“내 너에게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 보자고 하였다.”
임금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너는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조정의 대신들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할 뿐 아니라 짐이 나라를 망친다는 말까지 지껄이고 다닌다고 들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인가?”
“사실이 아닙니다.”
개소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럼 과인이 헛소문을 들었단 말인가?”
“신은 전하께서 나라를 망친다고 말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세간에 나도는 풍문 가운데 임금을 올바로 보필하지 않고 권모술수에만 능한
신하가 있다기에 일전에 맹주부를 뵈었을 때 그 소문을 전하였을 따름입니다.”
개소문이 시치미를 떼자 편전에 부복한 중신들 가운데 유독 맹부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개소문은 바른 대로 아뢰어라, 대왕 폐하가 계시는 어전이다!”
맹부가 소리치는 순간 개소문의 시선이 곧장 맹부에게로 향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3장 연개소문 13 (0) | 2014.10.17 |
---|---|
제23장 연개소문 12 (0) | 2014.10.17 |
제23장 연개소문 10 (0) | 2014.10.15 |
제23장 연개소문 9 (0) | 2014.10.15 |
제23장 연개소문 8 (0) | 2014.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