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8
그는 원체 무예가 탁월해 누구든 한번 본 사람은 이름을 잊지 않을 정도였다.
애초에는 사본의 눈에 들어 사병(私兵)을 통솔하다가 다시 시명개가 탐을 내어
권세로 윽박지르다시피 빼앗아갔는데 고정의가 시명개와 아직 틈이 벌어지기 전에
사가에서 뇌음신을 보고,
“자네는 남다른 재주를 가진 사람이 젊디젊은 나이로 어찌하여 사병을 사는가?
장부라면 무릇 포부가 있어야지. 무관 시험을 봐서 당당히 장수의 길을 걷게나.”
하며 점잖게 충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듬해 무과를 보고 최고 점수를 얻었다.
뇌음신이 그때부터 인생을 제대로 인도해준 사람은 고정의라고 여겨 철이 바뀔 때마다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는데, 고정의가 사신으로 장안에 갈 때 수행하여 따라갔다가 돌아와
그의 고명딸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또한 의후사인 고운은 무술년(638년)에 칠중성에서 신라 장군 알천에게 패하여
삭탈관직을 당한 노장 고유림의 장자로, 평소 당나라에 굽실거리는 임금과 조정의 처사를
몹시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개소문은 상가의 뒷방에서 이들을 차례로 만났다.
그리고 세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지금의 당주는 오로지 국력을 키우기 위해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압박해 보위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만든 사람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제일 먼저 질문을 받은 고정의는 잠깐 침묵한 뒤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기백을 가진 왕자도 없으니 실로 막막하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두번째로 같은 질문을 받은 뇌음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자에게 해마다 조공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태자까지 인질로 바쳤으니
이놈의 나라 꼴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이젠 서부 대인조차 돌아가시니 누가 있어 작금의 난정을 바로잡겠습니까?”
고운의 대답 역시 내용은 뇌음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표현은 더욱 과격했다.
“을지 장군께서 천신만고 끝에 우뚝하게 세운 고구려의 명성을 임금은 20년에 걸쳐
거의 완전하게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임금은 성정이 비굴하고 야비합니다.
그런 임금을 모시는 한 누구라도 결국에는 저의 부친과 같은 꼴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개소문은 이들 세 사람의 대답을 듣고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저에게 작금의 그릇된 정사를 바로잡을 묘책이 있습니다.
훗날 제가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지 마시고 꼭 도와주십시오.
조만간 그럴 날이 올 것입니다.”
개소문의 간곡한 말에 세 사람은 무척 궁금해 하면서도 반드시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내직의 관리들과는 달리 5부 욕살들이 문상을 왔을 때는 사정이 판이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연태조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고구려의 큰 별이 떨어졌다고 슬퍼했다.
개소문은 그들에게도 앞서와 똑같이 당부하여 확답을 끌어냈다.
그는 부친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연나부의 선영으로 가서 장사를 지낸 다음
곧장 백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여러 날 말을 타고 달려 백산에 도착한 개소문은 하늘못 근처의 한 암자를 찾아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마침 백수풍신의 두 노인이 암자 들머리의 나무그늘에 앉아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있었다.
“스승님, 제가 왔습니다.”
말에서 내린 개소문이 땅바닥에 엎드려 넙죽 큰절부터 했다.
“개소문이냐?”
두 노인 가운데 기골이 장대하고 조금 더 젊은 노인이 손에 쥔 바둑돌을 놓고 반갑게 입을 열었다.
“그래, 어르신은 선영에 편히 모셨더냐?”
“네. 입관을 하고 이리로 곧장 달려오는 길입니다.”
“마음이 허전하겠구나. 아버지는 언제나 그리운 법이다.”
“스승님.”
“오냐.”
“아무래도 거사를 일으켜야 되겠습니다.”
개소문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방법은 그뿐이올시다.”
그러나 노인은 개소문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이세민은 제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직방랑중을 사신으로 위장해 보낼 만큼 간덩이가 커졌습니다.
소문을 들어보면 이번에 사신으로 온 진대덕이란 자가 요동 9성에 뿌린 비단이 1만 필이요,
관수(官守)들에게 지형지세를 물어 그려간 지도가 수백 장에 이른다고 하는데,
임금이란 자는 그것도 모르고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후한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선친께서는 바로 그 점을 따지려고 임금이 베푼 연회에 참석하려다가 제지를 당하자
그만 화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도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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