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9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지금 때를 놓치면 7백 년 사직이 망하는 것은 필지의 일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스승님!”
개소문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치자 노인은 크게 한숨을 토했다.
“내가 너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한참 만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너는 도성에 가면 아버지의 남은 임기를 물려받을 수 있는 몸이 아니냐?
아무리 임금이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른다지만 막리지는 나라의 상신이다.
상신이 앞장서서 임금과 조정을 설득시킨다면 시일은 걸리겠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
“쉬운 길을 버리고 어찌 어려운 길로 가라고 하십니까?”
“국기(國基)는 한번 훼손하면 다시 세우기 어렵다.
너희는 나이 아직 젊어 패기와 과단성은 있으나 순리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를 알지 못한다.
병든 짐승을 죽이기란 쉬우나 살리기는 어렵다.
덕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수가 덕이 없으면 어제까지 따르던 부하도 오늘 갑자기 등을 돌리는 것이 세상 이치다.
돌아가서 임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어라.
이것은 임금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장래를 위해 하는 말이다.
그런 연후에 다시 생각해도 과히 늦지 않을 것이다.”
노인의 말에 개소문은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나이다. 스승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노인에게 절하고 일어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옛날 스승님을 따라 유랑할 때 구경한 호태 대왕 시절의 광활한 경략지를
한시도 잊어본 일이 없습니다.
흑수 북방의 끝도 뵈지 않는 영토와 대륙의 푸른 초지들이 눈만 감으면 아직도 선하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지금 요동에 가면 말이 지치도록 평원을 내달리며 봉역을 넓히고 5호를 제압하던
그 거룩하신 군주의 후손들이 노역과 학정에 시달려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돌을 나르고
성을 쌓는 일에 급급하니 나라가 이 꼴이 된 건 모두 임금의 탓입니다.
스승님께서 양광의 군사들을 모조리 고기밥으로 만들었을 때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그 뜨거운 열기조차 지금은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싸움이란 창칼과 병법에 앞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당을 겁내고 이미 당조에 복속하였는데
이세민이 쳐들어오면 무슨 수로 이를 물리칠 수 있겠는지요?
제가 판단하기엔 한시가 급하지만 그러나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따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면 그때는 부디 제 청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개소문이 떠나려 하자 노인은 팔을 들어 그를 불러 세우고,
“유자를 데려가거라.”
하고 말했다. 일순 개소문의 안색에 화기가 돌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오냐. 데려가면 필히 쓸 데가 있을 것이다.”
“유자는 어디 있는지요?”
“제 처랑 토끼사냥을 갔으니 아마 곰재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가서 내 말을 전하면 그 녀석도 좋아하며 너를 따라 나설 게다.”
개소문이 희색이 만면하여 뛰어가고 나자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던 더 나이 든 백발노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아이들에게 헛걸음을 시킵니까?”
“대허(大虛)의 생각도 그렇소?”
“더구나 지금 요동에서 이세민을 상대할 인물은 개소문밖에 없다고
장군께서도 늘 말씀하시지 않으셨는지요?”
“그랬지요.”
“개소문은 곧 다시 올 것입니다.”
“나도 알고 있소.”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쉽게 얻은 것은 소홀히 여기게 마련이외다.
중한 것일수록 어렵게 얻어야지요.
헛걸음인 줄 알면서도 다시 보낸 것은 그 때문이올시다.”
도성으로 돌아온 개소문에게 한 가지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국법에 따라 반드시 자신이 계승해야 할 막리지와 서부 욕살을 조정 대신들이
공론 끝에 연서구(淵庶龜)라는 자에게 맡기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연서구는 연태조의 6촌 아우로 개소문에게는 아저씨뻘이었으나
사람이 똑똑치도 못할뿐더러 눈앞의 이문에만 밝았다.
그는 연태조의 초상을 치러 연나부에 사는 일가붙이들을 이끌고 도성에 왔다가
상가에 부조가 쌓이는 것을 보고 행여 얻어갈 것이 있을까 싶어 혼자 남았는데,
왕의 책사 맹부가 조문을 왔다가 조카들 밑에서 잔심부름이나 거드는
그를 먼발치에서 보고는 연태조의 계승자를 거론할 때 임금에게 강력히 추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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