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6
당주 이세민(李世民)이 장안에 설립한 국자감은 당대 최고의 배움터였다.
그곳에서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산지사방에서 구름같이 당의 수도로 모여들었다.
백제와 신라, 고창과 토번 등 주변국에서도 왕가의 자제를 장안에 입조시켜
국자감에 입학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학문을 배우겠다는 뜻보다
각국의 왕실 자제를 당나라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당조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일종의 충성 서약과도 같은 성격이 짙었다.
이런 조류에 제일 먼저 앞장선 사람은 어이없게도 고구려왕 건무였다.
그는 경자년(640년) 2월, 삼국 가운데 제일 먼저 자신의 장자인 태자 환권(高桓權)을
당나라에 파견해 조공하고 국자감에 입학시킬 것을 청하였다.
당주는 크게 기뻐하며 환권을 친히 만나 위로하고 특별한 물건들을 후하게 주며 환대했다.
이듬해 당주 이세민은 고구려 태자가 입조한 데 따른 보답으로 직방랑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로 파견했다.
직방랑중이란 성곽과 해자,
진지의 형태와 봉수(烽燧) 따위를 조사하고 방국(邦國)의 원근(遠近)을 변별하며 외지에 흩어진
중국인 후손들의 귀화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던 관리였다.
따라서 직방랑중의 파견은 실은 답례를 가장한 염탐이요,
고구려를 치기 위한 사전 답사인 셈이었다.
진대덕 일행은 수십 대의 수레에 질 좋은 비단을 잔뜩 나눠 싣고 이르는 성읍마다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나는 아름다운 경치와 빼어난 산수를 좋아합니다.
혹시 구경할 만한 곳이 있으면 인도하여주십시오.”
하고 청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성읍의 관리들은 기꺼이 그를 데리고 다니며
관내의 모든 곳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당에서 요하와 압록강을 거쳐 평양의 장안성에 이르는 요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나라 말에 양광의 대군으로 종군하였다가 고구려에 잡혀 있는 중국 사람을 만나면
친족의 생사를 묻고 자신들이 아는 사실들을 들려주며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니
이르는 곳마다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길가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를 통해 진대덕 일행은 고구려의 허실을 샅샅이 염탐하였지만 고구려 조정에서
이를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건무왕은 호위병을 성대하게 늘여 세우고 진대덕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고구려 조정의 극진한 환대를 받고 돌아간 진대덕은 귀환하자마자 자신의 주군을 만났다.
“노고가 많았다. 그래 고구려의 의심은 사지 않았던가?”
“의심이 다 무엇입니까? 고구려에서는 고창국(高昌國)이 멸망한 사실을 소문으로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를 대하는 것이 여느 때보다 오히려 후하였나이다.”
진대덕으로부터 고구려의 사정을 낱낱이 전해들은 이세민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전날 건무왕한테서 받은 봉역도(封域圖:고구려 지도)와 진대덕이 파악한 지형 지세를
비교해가며 자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기록한 뒤 매우 흡족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는 본래 한사군(漢四郡)의 땅이다.
내가 수만의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치면 그들은 반드시 국력을 기울여 이를 구할 것이다.
그럴 때 동래(東萊:산동반도)에서 따로 수군(水軍)을 내어 평양에서 수륙군이 합세한다면
별로 어렵잖게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세민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다만 산동의 주현(州縣)이 피폐하여 아직 회복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가
마음에 걸릴 뿐이다.”
고창국을 얻은 뒤 요동을 치려는 이세민의 야심이 차츰 구체화되고 있을 무렵,
고구려에서는 서부 욕살 연태조가 고령으로 죽었다.
연태조는 건무왕 재위 기간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
5부 욕살들의 수장으로 막리지를 지낸 연태조는 당에 대해 줄곧 강경한 외교를 펴자고 주장했다.
신장 을지문덕이 양광(楊廣:煬帝)의 1백만 대군을 물리쳐 중국이 망하였는데,
건무왕이 20년 동안 그 승부를 뒤바꾸어놓았다는 것이 연태조의 주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은 건국 초기에만 해도 고구려를 크게 두려워하여 매사를 조심하였으나
건무왕의 저자세 외교 탓에 날이 갈수록 상국 행세를 하려고만 들었다.
이것이 연태조를 수장으로 한 강경파 신하들의 불만이었다.
신묘년(631년)에 광주사마 장손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연태조는 노구를 이끌고
직접 입궐해 눈물을 뿌려가며 왕을 설득했다.
그러나 왕은 오히려 충정으로 읍간하는 노신에게 호통을 치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장손사가 경관을 헐어버린 일은 당주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다.
신하가 저지른 잘못이 어찌 반드시 그 주군의 뜻이라고만 하겠는가?
그대와 나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 이 아닌가?”
하고는 물리쳤고, 백성을 동원해 천리성을 쌓을 때도 연태조가,
“폐하, 그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올시다.
노역에 동원될 백성들의 노고를 떠올리면 신은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군사를 기르고 무기와 물자를 준비하면 될 일을 어찌하여 수십 년씩 백성들의 피고름을 짜서
스스로 속을 곪게 만드시려 하나이까?
이는 자멸의 방책이오니 부디 통촉해주사이다.”
하고 반대하자 듣기 싫다고 궐옥에 며칠간 가두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작된 장성 공역이 10년 이상 계속되자
백성들간에는 조정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수나라를 상대로 전서(戰書)에 길이 남을 혁혁한 무공을 세운 천하무적 고구려가
이젠 신라 장군 알천 한 사람에게 초주검을 당하고 개처럼 쫓겨와도 속수무책이었으니,
뜻 있는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리장성 축조가 10여 년째 계속되면서 고구려의 민심은 왕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섰다.
고구려왕 건무는 인격이 야비하고 변덕이 심했으며 심지가 약한 사람이었다.
젊어서는 한때 좌장군으로 복무하며 말 위에서 제법 이름을 떨치기도 했으나 나이가 들수록
싸움을 싫어하고 변화를 두려워했다.
수나라 말엽에도 그는 영양왕의 위엄과 을지문덕의 패기에 내둘려 창칼을 들고 싸우긴 했지만
속으로는 양광의 대군을 무섭게 여기는 마음이 컸다.
그런 수나라를 단번에 제압하고 들어선 당조가 거대한 대륙을 달구며 찬란한 문물을 꽃피우고
파죽지세로 주변국을 아우르자 맞서려는 생각 따위는 진작 포기한 채 어떻게든 복종하여
섬기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측근이나 조정 대신들에게는 누구보다 무서운 강군이었지만 대외적인 일을 처리함에는
비굴할 정도로 유약한 임금이었다.
정사를 폄에 백성을 애호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뜻이 늘 일신의 안락함과 호의호식에 있었고,
누가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을 항상 가슴에 품고 지냈다.
또한 계책을 내면 술수와 지략을 구분하지 못했고, 일의 순리와 역리를 몰랐으며,
신하를 부림에 간신과 충신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군사를 낼 때도 스스로 무슨 방책이 없고 단지 지고 돌아오면 불같이 역정을 내며 엄벌로만 다스렸다.
얕은꾀를 탁견으로 여기는 일도 허다하고, 한번 뱉은 말은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도 고치지 않았으며,
충언은 귀에 거슬려 싫어하고 앞에서 발발거리기 좋아하는 자만 편애하니
비록 대궐은 조용했지만 궐 밖이 날로 소란스러워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는 입만 열면 당나라를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면서도 언제나 외신(外臣)의 예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장손사가 경관을 함부로 헐어버린 사건이 났을 때만 해도 임금은 자신의 신하들에게는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화를 냈지만 정작 당나라에는 항의 한번 하지 못했고,
오히려 당나라 사신이 왔을 때는 더욱 후한 대접을 하는 이해하지 못할 면모를 보이곤 했다.
바로 어제까지 온갖 험한 말을 동원해 당조를 욕하던 왕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고
너그러워지는 것을 지켜볼 때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조차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런 비굴함과 용렬함을 임금은 스스로 만국을 거느릴 덕치(德治)의 관대함으로 착각하는 눈치였다.
“천하는 창칼로써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철없는 젊은 당주도 과인의 너그러움에 감복하여 숙이고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임금은 당나라 사신을 후히 접대하며 늘 그렇게 주장했다.
천리장성 축조만 해도 그랬다. 기왕 당의 침략을 경계할 양이면 요동 9성7)의 성곽이나 손보고
안으로 군사를 키우며 군량과 무기를 차근차근 준비하면 될 것을,
자신은 온갖 진귀한 방물을 해마다 당에 갖다 바치면서 전국에 노역동원령을 내려
애꿎은 백성들만 몇 년씩 들들 볶아대니 죽어나는 것은 제 나라 백성들뿐이었다.
아무리 어리석은 군주라도 제 백성을 잘살게 하려는 마음은 있는 법인데
건무는 오히려 해가 갈수록 백성을 괴롭히는 군주였다.
그는 고구려 임금이 아니라 당의 외신일 뿐이었다.
요동의 7백 년 역사상 최악의 군주가 아닐 수 없었다.
안이 썩어들어가는데 밖이 순탄할 리 없었다.
수나라 말엽만 해도 고구려에 복종했던 동돌궐은 시필(始畢)의 뒤를 이어 가한(可汗:족장)에 즉위한
힐리가 당에 맞서 싸우다가 사로잡히자 당의 번국이 되고 말았다.
일이 그쯤 되면 군사를 내어 동돌궐을 돕고 팽창하는 당의 세력을 견제해야 마땅했지만
건무는 거꾸로 사신을 당에 파견해 당주를 치하하고 자진하여 봉역도까지 바쳤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예로부터 고구려를 따르던 거란과 말갈까지 태도를 바꾸어 당을 섬기려 들었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우습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스스로 동방의 맹주를 포기한 당연한 대가였다.
한데 그것도 모자랐는지 왕은 자진해서 태자를 인질로 삼아 국자감에 입학시키고
아울러 또다시 조공사를 파견하자 궐 밖에서는 세 사람만 모이면 임금을 욕하고
조정을 비난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그런 민심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해 9월 갑자기 해가 사라져 천지가 암흑으로 돌변하더니
사흘이 지나서야 다시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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