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5
국상이 나자 백제에 살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달려 나와 울부짖었으며,
내외관의 신하들 가운데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다가 혼절까지 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조정에서 는 돌아가신 왕의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하고 사비 근교의 볕 바른 양지에 능을 써 모셨는데, 현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고자 모여든 사람들로 도성은 무려 반년간이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의자의 명을 받은 사신이 당나라에 가서 소복을 입고 글을 올려,
“외신(外臣) 부여장이 죽었습니다.”
하고 고하니 당주 이세민은 현무문에 나와 애도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어 말하기를,
“먼 곳의 사람들을 위무하는 도리는 임금이 총애하여 내리는 명(命)보다 나은 것이 없고,
죽은 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리는 길이 멀다고 막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인이 된 주국대방군왕(柱國帶方郡王) 백제왕 부여장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멀리서
정삭을 받들고 보배를 바치며 글월을 올려 안부를 묻는 것이 시종 한결같았는데,
이제 별안간 돌아가셨다고 하니 슬픔에 잠겨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에 마땅히 보통의 예우에 더하여 슬픈 영전을 표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의 벼슬을 추증합니다.”
하고는 장례에 쓸 부의를 후하게 챙겨주었다.
부여장의 장례가 끝나고 태자 의자가 뒤를 이어 즉위하자
이세민은 사부낭중(祠部郎中) 정문표(鄭文表)를 책봉사로 보내어
곧바로 선왕의 봉작을 이어받도록 하였다.
이는 비록 관례와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신라의 여주를 4년간이나
인정하지 않았던 데 비하면 지극히 발빠른 행보였다.
의자왕은 그해 8월,
사신을 당에 보내어 글로써 감사의 뜻을 표하고 겸하여 약간의 방물을 바쳤다.
그런데 당나라 책봉사가 다녀간 직후 하루는 상좌평 개보가 여러 중신들을 이끌고 입궐하여 말하기를,
“신 등은 선대왕의 두터운 총애를 입은 덕에 비록 견양지질이나마 오랜 세월 나라의 녹을 받았는데,
이제는 선대왕께서 계시지 않고 신 등도 나이를 먹었으므로 이만 사직을 청하오니 윤허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이때 개보를 따라 함께 사직을 청한 이가 여섯 좌평과 달솔 벼슬의 족친 장수들,
그리고 노장 연문진(燕文進) 등이었다. 의자가 깜짝 놀라며,
“당치 않소. 선왕께서 아끼시던 중신들을 내 어찌 물러나게 할 것이며,
본래 충신이란 대를 이어 섬기기를 다하는 것이 만대를 흘러온 법도가 아니오?
더욱이 나는 이제 보위에 올라 군국 사무를 빈틈없이 관장하기에 부족하고 모르는 것도 너무 많소.
지금 물러나는 것은 과인에 대한 불충이오.”
하고 극구 만류하였지만 노신들은 한결같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선대왕께서 늙은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신 까닭은 바로 오늘과 같은 날에 전하로 하여금
조정을 일신하여 새로운 정사를 펴게 하기 위함이었나이다.
제아무리 깨끗한 물도 너무 오래 한자리에 두면 썩어 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온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겠나이까?
선대왕께서도 춘추 아직 젊으실 적에 보위에 올라 연소몰각한 신 등의 보좌로
오늘날 이만한 성취를 이루었나이다.
만일 정사를 돌보시다가 의심나는 일이 있어 저희를 찾으신다면 하시라도 촌각을 다투어
달려올 것이니 전하께서는 부디 안심하시고 신 등의 사직을 윤허합소서.”
의자는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더 만류하였지만 노신들의 마음을 끝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하면 과인이 자주 부를 것이오. 부를 때마다 지체 없이 달려와 과인의 앞날을 밝혀주시오.”
하니 노신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머리를 조아리며,
“여부가 있겠나이까. 실로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자는 하는 수 없이 내관과 외관의 벼슬을 일제히 정리하면서 흥수와 의직,
사택지적을 불러 좌평을 맡기고 당에 사람을 보내어 성충을 불러들이는 한편,
노장과 족친의 아들 가운데 아버지를 이을 만한 사람을 골라 큰 허물이 없는 한
선대의 벼슬을 고스란히 잇도록 하니
이로써 백제는 명실상부 의자왕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신왕 의자는 선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안으로는 팔족 세력의 지나친 발호를 경계하고
밖으로는 당나라와 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임인년(642년) 정월에 그는 또다시 당에 조공사를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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