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3
그는 여러 날을 심사숙고한 끝에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당에 적극적인 외교 공세를 펴서
수대(隋代)와 같은 우호 관계를 구축해보기로 결심했다.
장왕으로서는 일견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나 그는 신하들을 편전에 불러모으고,
“장안의 더벅머리 아이놈에게 머리를 굽히는 것이 흔쾌할 까닭이야 없지만
백제의 장래를 위해 과인이 못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하고서,
“고구려왕이 비록 상주국에 봉해졌다고는 해도 당과 고구려는 지경을 인접하여
그 우호에 반드시 한계가 있고, 신라가 김춘추를 통해 맺은 선린은 다분히 사사로운 것이라
그다지 신뢰할 게 못 된다. 항차 당주는 신라에 여자 임금이 들어선 것을 탐탁찮게 여겨
김춘추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4년 동안이나 책봉사를 보내지 아니하였다.
어찌 이런 기회를 놓치겠는가?
소문에 당주는 영특, 용맹하고 야심이 있는 인물이라 하니
만일 과인이 그와 깊은 말을 나눌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계책이 있다.
그러므로 비록 한발 늦기는 하였어도 아주 때를 놓쳐버린 것은 아니다.”
하며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조카 부여복신을 조공사로 삼아 이세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하도록 하고
아울러 철갑(鐵甲)과 조부(雕斧:도끼)를 바쳤다.
그러자 이세민은 장왕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복신을 후하 게 대접하여
돌려보내면서 금포(錦袍)와 채백(彩帛) 3천 단을 주어 화답하였다.
이 일로 장왕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이듬해와 그다음 해에도 계속해서 당에 금갑(金甲)과 조부를 바치며
자신의 각별한 마음을 전하였고,
드디어는 복신을 아예 장안의 숙위 사절로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장왕은 당주의 환심을 사려고 신라와 싸우는 일도 가급적 자제했다.
왜냐하면 당주는 삼한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무편무당(無偏無黨)의 등거리 외교를 펴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삼국이 서로 통호하고 화목하게 지낼 것을 거듭 당부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당주가 자신의 권위를 삼한에 고루 세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장왕은 이를 알면서도 당주의 뜻을 좇았다.
경자년(640년) 2월, 백제가 신라보다 석 달이나 앞서 당나라 국학에 왕가의 자제를
입학시키게 된 것도 대략 이런 배경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장왕은 당나라와 관련한 이런 조치들을 취하면서 사택지적이나
성충의 도움은 가급적 받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함께 일해온 장왕의 신하들은 모두 그 까닭을 알고 있었지만
태자인 의자는 부왕의 진의를 알지 못해,
“아바마마께서는 어찌하여 당주와 친분이 있는 성충을 당나라에 보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 왕이 도리어 의자를 보고,
“성충을 보내는 것이 좋겠느냐?”
하며 반문한 뒤에,
“네가 성충과 잘 의논하여 그가 만일 당에 숙위로 갈 마음이 있거든 내게 다시 말하라.”
하였다. 의자가 태자궁에 돌아와 성충과 이 말을 하니 성충이 웃으며,
“대왕께서는 저를 태자마마의 신하로 여기시는 탓입니다.”
하고서,
“이는 곧 태자마마께서 결정해야 할 일이옵니다.”
하므로 의자가 비로소 그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의자가 묻자 성충이 대답했다.
“이곳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장안에 가서 복신의 외교를 돕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면 내가 아바마마의 윤허를 얻을 테니 그렇게 하오.”
의자는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리고 부왕을 찾아가 허락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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