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4
성충이 의자의 곁을 떠나 당나라로 향한 것이 경자년 겨울인데,
장왕은 성충이 떠난 뒤부터 가끔 가까운 신하들을 보고,
“과인이 근자에 와서 부쩍 마음이 늙는 것 같구나.
세상의 일도 뜻대로 되지 않고, 언제부턴가는 예측이나 직감도 적중하는 것보다 어긋나는 것이 많다.
우소가 죽은 뒤로는 계책을 내기도 겁이 나는구나.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우면 운이 먼저 간다더니 아마 내가 갈 때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는 소리를 곧잘 입에 담았다. 이에 그 말을 들은 신하들마다,
“당치 않습니다.
춘추와 기력이 아직 왕성하신데 어찌 그토록 불길한 말씀을 입에 담으십니까?
신은 간담이 서늘하고 오금이 떨리옵니다.”
하고 펄쩍 뛰었으나 왕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나는 할 일을 거진 했어. 당주도 젊고 태자도 젊으니 당나라와 관계를 보더라도
나보다는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사람들끼리 어울려 일하는 게 훨씬 낫지.
내 나이가 곧 일흔일세. 임금이 늙으면 나라도 늙는 게야.
신라의 예를 봐도 그렇지. 백정왕이 팔구십을 사니 나라 꼴이 그 모양이 되지 않던가?
당나라만 해도 이연이 물러나고 젊은 아들이 임금이 되니 위세가 저리 당당해졌다고들 하지 않아?”
신하들이 듣기에 여전히 불안한 소리를 내뱉곤 하였다.
그래도 나이가 드니 공연히 하는 소리로 여기는 축들이 많았는데,
하루는 신하들 가운데 천문을 잘 보는 이 하나가,
“근년에 이르러 패성(혜성)이 걸핏하면 도성의 서북방에 나타나곤 하는 것이
아마도 나라에 큰 흉사가 있을 조짐입니다.”
하여 이 소리가 편전에까지 이르렀다.
왕이 그 말을 듣고는 황급히 의자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당부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내정을 돌봄에 가장 유의할 일이 대성 팔족의 세력을 경계하는 것이다.
임금의 권위가 위축되고서는 국가가 강성할 수 없음을 늘 명심하라.
둘째는 나라 밖의 일을 살핌에 당나라와 왜국을 횡으로 연결하여 천년사직의 숙원인
고구려와 신라를 정벌하는 것이다.
당주 이세민은 야심이 있는 인물이므로 조만간 고구려를 향해 군사를 일으킬 것이 명백한데,
그때까지 우호를 돈독히 해두었다가 만일 이런 계획을 잘 협의하고 조력한다면
신라는 반드시 우리가 공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수나라의 예를 너무 크게 생각하여 당나라의 앞날을 잘 예측하지 못하였으나
너는 나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죽거든 나의 신하들은 모두 물러나게 하고 너의 사람들로 조정을 일신하여
새로운 정사를 펴도록 하라.”
하니 의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바마마, 어찌하여 갑자기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안색이 백변하고 눈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왕이 그런 의자에게,
“부디 사람을 잘 가려 써서 삼한을 하나로 아우르되 만일 여의치 않거든
내가 이루지 못한 남역 평정만이라도 너의 세대에 반드시 이루도록 해라.
그래야 우리 백성들이 사람마다 천수를 누릴 수 있고,
대국 백제의 옛 영화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너무 놀랄 것 없다. 내가 나이를 먹었으니 만일을 몰라 미리 해두는 말이야.”
하며 우는 아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장왕은 편전에서 정무를 살피고 나오다가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내관들이 혼비백산하여 쓰러진 임금을 침전으로 옮기고 어의를 부르느라
수선을 피우니 왕이 그새 정신이 돌아와 말하기를,
“부산떨 것 없다. 내 병은 의원이 와서 고칠 병이 아니다.”
하고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희는 어서 국상 준비를 서둘러라.”
하므로 퇴궐했던 신하들이 모조리 다시 입궐하였다.
조금 뒤에 연락을 받은 어의가 이마에 신짝을 붙이고 달려와 임금의 병을 살폈는데
왕이 진찰을 마친 어의를 보고,
“천하만물이 소생하느라 야단인데 올 봄에는 나만 소생하지 못하는구나.”
하니 어의가 침통한 낯으로 아무 대꾸도 못하였다.
어의가 나갈 적에 선화비와 의자가 따라 나가서 임금의 용태를 묻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옥체의 어느 곳에서도 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신이 알기로 본래 저 정도가 되면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었어야 하는데
숨도 쉬시고 항차 말씀까지 하시니 불가사의하기가 이를 데 없나이다.”
하고 답하였다. 어의가 벌써 죽은 사람으로 단정한 임금은 스스로 자신의 갈 때를 아는지
초저녁 내내 평화롭고 안온하기가 그지없었고, 급보를 접하고 외관에서 달려온
족친 장수들에게도 면담을 허락해 일일이 다 만나보았다.
왕은 삼경에 접어들자 다른 사람은 모두 물리치고 오로지 선화비만을 가까이 불러
그 섬섬옥수를 가만히 붙잡았다.
“한날한시에 갔으면 좋으련만 천수가 다르니 유한이오.
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뒷날 꼭 오시오. 와서 함께 마 농사나 지읍시다.”
“어찌하여 하필이면 또 마 농사입니까?
일생을 듣고 산 그놈의 서동 소리가 지긋지긋하지도 않습니까?”
모든 것을 각오한 선화비가 자꾸만 솟아나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훔쳐대며
간신히 억지웃음을 짓고 물었더니 왕이 덩달아 힘없이 웃으며,
“임자가 마 농사를 싫어하면 또 음부의 나라 하나를 들어 다스리지?”
하고서,
“마 농사를 짓건 나라를 다스리건 내 곁에는 임자가 있어야 하오.
이승에서는 나를 따라와 고생이 많았으니 저승에 가거든 그 보답을 꼭 하리다.”
하며 붙잡은 손을 꼭 쥐었다. 부여장은 그 말을 끝으로 말문을 닫았고,
이어 순식간에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그대로 돌아가시니 이때가 신축년(641년) 3월,
보위에 오른 지 42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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