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1
젊은 군주 이세민이 보위에 오른 뒤로 당나라 국세는 한 해가 달리 크게 번창해갔다.
이세민은 문무를 겸전한 용감하면서도 영특한 군주였다.
그는 천하가 평정된 후, 수양제의 실패와 수나라의 멸망을 거울삼아 자만함을 경계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발굴, 육성하여 가히 정관의 치세(貞觀之治:‘정관’은 당태종 이세민의 연호)라
불리는 대륙의 황금시대를 구가하기에 이르렀다.
안으로는 수족과 같은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에게 정무를 총괄하게 하고,
형 건성의 심복이었던 위징(魏徵)을 간의대부로 발탁하여 내정을 풍요롭게 끌고 갔으며,
밖으로는 당대의 명장 이정(李靖)과 이적(李勣), 군사참모 울지경덕(蔚遲敬德) 등의
보필에 힘입어 대규모의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태종대의 당나라 군대는 북방의 돌궐에서부터 남방의 북부 베트남까지 영토를 넓혔고,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여 군현을 설치했으며, 파미르 고원의 서쪽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또한 유불선 3교의 철학을 자신의 치세에 적절히 이용하여 삼교정립(三敎鼎立)의 형세를 이루었고,
이를 통한 문치(文治)에 힘썼다.
그 가운데 특히 유가의 민본사상에 기초를 둔 예악(禮樂), 인의(仁義), 충서(忠恕), 중용지도(中庸之道)가
충분히 실천, 발휘되는 밝은 정사를 강조하였다.
그는 스스로가 공자에 대한 남다른 존경심을 지니면서 유학을 숭상하였을 뿐 아니라,
유학자들이 마음놓고 학문에 몰두할 수 있도록 여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이세민은 아직 황제에 등극하기 전, 진왕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문학관(文學館)을 세워
18학사를 두었고, 두여회를 그 수장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황제가 된 직후인 정관 초기에는 다시 문학관을 부활시켜 유학한 선비들을 널리 모집하고
경전과 역사를 연구하도록 장려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장안의 국학(國學)에는 학사(學舍)를
증설하여 널리 팔방의 인재들을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정관 14년인 경자년(640년), 당나라의 병부상서 후군집(侯君集)은 토번(吐蕃) 북쪽의
고창국(高昌國)을 토벌했다.
고창국 임금인 국문태(麴文泰)는 천하무적의 당나라 군대가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다 병이 나서 죽었는데, 후군집이 말하기를,
“장례의식을 습격한다면 비록 쉽게 이길 수는 있을지언정 이는 천자의 군대가 할 일이 아니다.”
하고 장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진군하니 적을 멸망시키고 천하의 인심까지 얻었다.
이세민이 등극한 이후로 이런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날로 번창해진 당나라의 위력은 가히 천하를 경도시키는 바가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사방의 인국과 번국들이 다투어 조공사를 파견하였다.
이세민은 그런 위세를 등에 업고 문호를 활짝 개방하여 수도 장안을 활력이 넘치는
사해 문물의 교역장으로 만들어갔다.
고창국을 토벌하던 바로 그해, 이세민은 황제의 명으로 국자감(國子監)의 학사 1,200칸을 증축하였다.
국자감이란 당나라 최고 학부인 국학으로, 국자학, 대학, 사문학(四門學) 등의 유학을 비롯해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곳이며, 경학(經學)은 대경, 중경, 소경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아울러 천하의 명유(名儒)를 학관(學官)으로 삼아 국학에서 학문을 강론하게 하고,
학생으로서 한 가지의 대경(大經:禮記, 春秋左氏傳) 이상을 통달한 사람은
모두 관리에 등용할 수 있도록 새 법을 마련하였으며, 증축한 학사에는 3,260명의 학생이
모두 차도록 만드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구름처럼 장안으로 모여들었다.
고구려에서는 2월에 세자 고환권(高桓權)을 당에 입조시켜 조공하고 왕가의 자제(子弟)를
국학에 입학시켜줄 것을 청하였고, 백제의 장왕도 같은 달에 자제를 당에 파견하여
국학 입학을 요청하였다.
신라에서는 그보다 조금 뒤인 5월에 역시 같은 부탁을 하였다.
백제왕 부여장은 당나라가 날이 갈수록 크게 번창한다는 소문을 듣고
하루는 개보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나는 당이 일천한 시기에 저토록 크게 성할 줄 꿈에도 몰랐다.
이세민은 대궐의 현무문(玄武門)에서 형과 아우를 쳐죽이고 아비를 압박하여 임금이 된 자라
수나라의 양광이나 진배없을 줄 알았더니 그렇게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닌 모양이구나?”
그러자 개보가 대답했다.
“근자 당의 국세가 여름 아침에 떠오르는 해와 같은 것은 사실이옵고,
당주 또한 의롭고 지혜로운 인물이어서 수나라 양광과는 그 격이 다릅니다.
오죽하면 고구려의 임금 건무가 당을 두려워한 나머지 나라 전역의 장정들을 동원해
요하에 1천리나 되는 성을 쌓고, 당나라 신하 장손사가 요하의 경관을 마음대로 헐어도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하겠나이까?
신이 짐작컨대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당이 조만간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킬 것은
필지의 일입니다.”
개보는 자신의 의사를 전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당주 이세민이나 당나라의 속사정을 자세히 알아보시려면
성충이나 사택지적을 부르옵소서.
그 두 사람은 당에 오랫동안 유학한 이들로 특히 성충은
지금의 당주와 깊은 교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장왕은 태자궁으로부터 성충과 사택지적을 불렀다.
“너희는 당의 창성함이 어디까지 갈 것으로 보느냐?”
임금의 질문에 먼저 연장자인 사택지적이 대답했다.
“당은 이제 막 시작한 나라이옵고 그 기세는 가히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들 만합니다.
유사 이래 천지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나라가 명멸하여 개중에 더러는 불길처럼 일어났다가도
수년 만에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예가 없지 않았으나,
대개 이런 경우는 민심을 거슬렀거나 개국 초에 법강과 풍기를 바로잡지 못했고,
또한 몇몇 세력들이 제휴하여 나라를 세운 경우엔 건국 후에 알력을 견디지 못해 자멸했습니다.
그런데 당은 나라를 세운 직후 곧바로 민심을 얻었고, 제도와 법률을 손질해 국기를 튼튼히 하였으며,
이 모든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이가 곧 지금의 당주 이세민입니다.
따라서 그가 현무문에서 형과 아우를 살해하고 스물아홉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일은 정변이나
하극상이 아니라 실은 난신을 토벌한 것이며, 주인이 남에게 도둑맞을 뻔한 자신의 물건을
되찾은 것입니다.
어찌 양광과 같은 철부지와 비교하오리까.
당의 창성함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점치는 일은 어렵지만 당이 쇠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신이 보기에 당은 한동안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장왕은 사택지적의 말이 끝나자 성충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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