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연개소문 2
“너는 당주와 특별한 교분이 있다고 들었다.
이세민의 됨됨이와 그의 신하들에 대해 아는 만큼 말해보라.”
성충은 허리를 굽혀 공손히 예를 표한 뒤에 입을 열었다.
“이세민은 자질이 명철하고 스스로 만군을 대적할 만큼 용맹스러우며,
학문을 숭상하고 백성을 애호하여 여러 모로 빈틈없는 명군의 자질을 갖춘 인물입니다.
게다가 그는 인재를 알아보는 비범한 눈을 가졌고,
인품에 덕이 있어 주변에는 늘 구름처럼 영웅호걸이 모여들 뿐 아니라,
한때 자신을 배척하고 반대하던 자들까지도 지금은 모두 그의 수족이 되어 충성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목숨을 바쳐 섬기는 수많은 현사, 달재와 양신, 명장들이 있으나
특히 손꼽을 만한 자로는 흔히 8신(臣)으로 불리는
방현령, 두여회, 위징, 이정, 왕규, 우세남, 이적, 마주, 이렇게 여덟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성충은 당조의 중신들 이름을 일일이 거명한 뒤 그들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8신 가운데 거록 사람 위징과 기현 사람 왕규(王珪)는 본래 이세민의 형인 건성의 심복들이었습니다.
고아인 위징이나 왕규는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에 비유할 인물로,
건성과 당주가 서로 헐뜯으며 보위를 탐할 때 언제나 건성의 편에 서서 적절한 계획을 만들어
당주를 궁지에 빠뜨렸던 사람들입니다.
당주가 형을 죽인 뒤에 위징을 불러 질책하자
위징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오히려 건성이 만일 자신의 말을 들었을 것만 같으면 틀림없이
오늘과 같은 재앙은 피했을 거라고 주장하니
당주는 그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고 곧 중신으로 발탁하였고,
위징 또한 자기를 진심으로 알아주는 군주를 만난 것에 기뻐하며 전력을 다하여 보필하고 있습니다.
위징과 왕규는 능히 일국을 다스릴 만한 재능이 있고 성품 또한 강직하여 누구에게도
굽히지 아니하니 당주는 그 두 사람을 간의대부로 삼아 자신의 실덕과 허물을 서슴없이
간언토록 하였는데, 무려 3백 가지의 귀에 쓴 말을 해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위징이나 왕규가 당주에게 지은 죄는 제나라 관중이 환공에게 저지른 죄보다 더 컸지만
그들 두 사람에 대한 당주의 신임과 은전은 환공이 관중에게 베푼 것을 뛰어넘는 바가 있습니다.”
장왕은 진지한 태도로 성충의 말을 경청했다.
“방현령과 두여회는 창업을 보좌하고 당주와 처음부터 운명을 같이했던 사람들로 한때는
황태자 건성에게 밉보여 귀양살이까지 한 일이 있습니다.
보위에 오른 뒤로 당주는 대부분의 국사를 이들 두 재상에게 맡겨 조정 기구의 규모와 법령,
제도와 문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상의하지 않는 것이 없어
세간에서는 이들을 방두(房杜)라고 묶어 마치 한사람처럼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섬서성 사람 이정과 조주 출신 이적은 모두 충직한 장수들로 당주는 매양
이 둘을 고대의 한신(韓信:초왕)과 백기(白起:전국시대 秦나라의 명장. 일명 공손기)에
비유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들은 건국 초에 당주를 도와 칭제건원하는 무리를 차례로 토벌하였고 정관 초에는
북방의 돌궐을 평정하였는데, 이정의 병법과 용병은 손빈에 필적하고,
이적의 용맹함은 전한의 명장 곽거병을 능가한다는 것이 세간의 정평입니다.
이들 외에도 왕규는 사람을 보는 눈이 매섭고 정확하며, 우세남과 마주는 두뇌가 명석하고
식견이 높아 하나같이 천하의 일을 맡길 만한 기재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당주의 곁에 있는 한 당나라의 위세는 당분간 계속될 게 틀림없습니다.”
성충의 설명이 끝나자 왕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그만 물러들 가라.”
왕은 두 사람을 물리치고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보위에 올랐을 때는 수나라가 막 건국하여 사방을 아우르며 한창 맹위를 떨치던 무렵이었고,
이후 그는 수나라 역대 임금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성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여
삼한의 어 느 나라보다 강력한 선린 정책을 구사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수로 하여금 북방의 강국 고구려를 치도록 하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고구려가 승리하여 수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은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향도를 자청하면서까지 수나라와 관계에 정열을 쏟아온 장왕으로서는
내심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먼 곳의 수를 움직여 고구려를 치고, 수나라가 북방의 패권을 확보하면
협공으로 신라를 정벌하려던 당초의 계획은 어떤 쪽으로든 수정이 불가피하였다.
수나라가 망한 뒤 장왕이 재빨리 남역 평정으로 돌아선 것은 외교의 공백기를 틈타
우선 신라부터 정벌하겠다는 정책의 전환이었다.
아울러 장왕의 마음속에 중국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도 수의 멸망을 전후해서였다.
그는 믿었던 수나라가 그처럼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차라리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를 치는 것이 나았을 뻔했다고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고구려와는 수나라의 향도를 자청하면서 생긴 감정의 골이 깊어 단기간에
우호를 논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수를 이어 당이 건국하였고,
그 형세는 자신이 등극한 직후 수나라가 일어나던 형세와 판에 박은 듯이 흡사했지만,
한번 실망한 장왕은 좀처럼 당의 위세를 인정할 수 없었다.
뒷일을 알 수 없으니 비록 의례적으로 사신을 보내고 철마다 안부를 주고받으면서도
속으로는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당에 대한 장왕의 불신이 극에 달한 것은 이세민이 형과 아우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압박하여 보위에 오른 직후였다.
“참 신통도 하다! 어쩌면 저리도 수나라의 전철을 고스란히 되밟는단 말이냐?
이세민이란 자는 흡사 양광의 분신과도 같구나!”
그는 당나라도 곧 망할 거라고 확신하여 한동안은 사신도 파견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주 이세민에 대한 감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장왕은 이세민을 천하의 패륜아로 규정하여,
“대저 천륜을 짓밟은 자가 어떻게 만인을 다스릴 수 있으며,
그런 패자역손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찌 유구할 수 있으리.
두고 보아라. 당이란 나라는 곧 망할 것이다!”
하며 장담하였고, 정해년(627년)에 그가 신라를 치려 했을 때
갓 보위에 오른 이세민이 부여헌의 아들인 복신을 통해 보낸 글을 읽고는,
“육친을 살해한 장안의 더벅머리 아이놈이 감히 뉘를 다스리고 훈계하려 하는가?”
하며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하였다.
하지만 일은 장왕의 예상대로 흐르지 않았다.
곧 망할 줄 알았던 당의 위세는 오히려 날로 번성하여 장안을 다녀오는 사람마다
입에 침이 말랐고, 천하의 패륜아 이세민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이세민을 욕했던 자신의 입에서까지,
“이럴 줄 알았으면 당주와 처음부터 잘 지낼 것을 그랬구나.”
하는 후회의 말이 나오게 되었다.
만일 이제라도 당나라의 위세를 인정한다면,
그간 중국을 무시하고 외교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던
장왕의 정책은 또 한번의 수정이 불가피한 국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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