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국운(國運) 17
“지금 적진의 형세는 병법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 보면 누구든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군만이 모르고 계실 뿐이지요.
하오나 비록 복병이 있다 해도 범처럼 날뛰는 저 적장만 장군이 해치운다면 문제는 다릅니다.
그럼 앞에 보이는 구루를 공취하고 숲에다가 불을 놓아버리면 그만일 테니까요.”
그러잖아도 무참해 있던 고명화는 맹부의 빈정대는 말에 이성을 잃을 만큼 크게 격분했다.
“뭐라구? 이 설삶은 말대가리 같은 놈아! 네까짓 게 감히 뉘를 능멸하느냐?”
고명화는 서부 출신의 젊은 맹부가 자신을 예우하지 않는 것에 벌써부터 불만을 품고 있던 터였다.
그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고 단숨에 찔러 죽일 기세로 맹부에게 덤벼들었다.
고웅이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서 간신히 뜯어말리긴 했지만 군사를 인솔해온 고유림의 입에선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장수 둘을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제 적전(敵前)에서 장수와 책사 간에 자중지란까지 일어났으니
여간 착잡한 노릇이 아니었다.
그런 판에 갑회를 쓰러뜨린 알천은 코앞에까지 말을 타고 와서 시종 우렁찬 소리로 약을 올려댔다.
“고구려의 오합지졸들은 들으라!
우리 성조황고께서는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비록 전장에서 만난 적병이라도
함부로 주살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라 하셨다!
너희가 무슨 연유로 남의 땅에 허락 없이 왔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이제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한다면 부처가 중생의 죄를 용서하듯 살아갈 길을 마련해줄 것이요,
만일 강을 건너 돌아간다면 뒤쫓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참고 베푸는 데도 한계는 있다!
여기서 더 시일을 끌거나 저항을 한다면 한 놈도 살려두지 않을 테니 명심하라!”
주장 고유림은 사태가 결국 자신의 손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그는 시윤을 풀어주고 고명화와 고웅을 불러 말했다.
“나는 옛 벗의 원수를 갚으러 왔으므로 김유신이란 자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저 자의 오만방자함을 더 두고 보지 못하겠소.
장군들은 군사들을 세 갈래로 나누고 철갑 기병과 충차(衝車:성문을 파괴할 때 쓰는 무기)
부대를 전면에 배치하여 기다렸다가 내가 저 자의 목을 치거든 동시에 적진을 벼락같이 습격하시오.
하지만 만일 내가 불귀의 객이 되더라도 서로 다투지 말고 힘과 지혜를 모아 맡은바 소임을 다해야 하오.
아리수는 예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소.”
노장은 비장한 어조로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말에 올랐다.
고유림이 백발을 휘날리며 알천에게로 달려나가자 알천도 무기를 고쳐 잡고 싸울 태세를 취했다.
“젊은것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제는 늙은이가 무기를 들고 나오셨소?”
알천이 상대의 기세를 꺾어놓고자 말을 건넸지만 고유림은 대꾸도 하지 않고 들고 나온 환도를 휘둘렀다.
그렇게 어울린 두 사람은 양편 구경꾼들의 탄성을 자아낼 만큼 화려하고 격렬한 마상 무예를 펼치며
꽤나 오랫동안 공방을 계속했다.
한쪽은 칠십 평생 싸움터와 병부를 전전하며 일국의 재상에까지 오른 사람이요,
다른 한쪽은 사직의 존망을 등에 걸머지고 나온 한창나이의 명장이었다.
두 장수는 사력을 다해 80여 합이나 겨뤘지만 워낙 손놀림이 빠르고 기예가 뛰어난 호적수라
쉽게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사이에 노장은 두어 번 머리카락을 베이고 수염과 볼에 칼날이 스치는 위험한 고비를 맞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노련한 임기응변으로 화를 면했다.
그러나 공방이 끝없이 계속될수록 늙은이의 힘이 부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섭리였다.
“말이 지쳤으니 갈아타고 나오겠다.”
잠깐 말머리가 떨어졌을 때 고유림이 말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도 내심 상대의 날렵한 몸놀림에 탄복하던 알천은
순순히 노장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고유림이 말을 바꾸려고 진채로 돌아가자 고웅이 말했다.
“장군께서는 잠시 쉬고 계십시오. 제가 한번 상대해보겠습니다.”
그러자 고유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가 상대할 사람은 아니네.
나는 아까부터 저 장수가 전력을 다하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어.”
“전력을 다하지 않다니요?”
그러나 고유림은 더 말하지 않고 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마신 뒤 새 말을 갈아타고 나갔다.
두 사람은 다시 어울렸고 치열한 공방이 그로부터 30여 합 더 이어졌다.
말과 말이 엇갈리며 잠시 틈을 본 고유림이 알천의 가슴팍에 칼을 찔러넣었을 때였다.
갑자기 고유림의 말이 탄력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는가 싶더니
칼 한 자루가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고, 다음 순간 고유림은 말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알천이 허공으로 쳐올린 환도를 한 손으로 가볍게 낚아챘다.
가슴을 조이던 신라 진영에서는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뜨거운 함성이 일었다.
쓰러졌다가 일어난 고유림의 말은 미처 붙잡을 겨를도 없이 앞다리를 절뚝거리며 달아나버렸고,
그 바람에 고유림은 도망갈 수조차 없이 되고 말았다.
알천이 천천히 말을 몰아 쓰러진 고유림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졌네.”
고유림은 무인답게 자신의 패배를 깨끗이 시인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알천을 마주보았다.
싸움에서 졌으니 죽음을 각오한다는 투였다.
알천이 마상에서 그런 고유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손에 든 환도를 훌쩍 주인에게 집어던졌다.
“말의 실수로야 어찌 참된 승패를 가렸다 하겠소. 돌아가서 새 말을 타고 나오시오.”
알천은 짤막하게 한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말을 달려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버렸다.
고유림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했다.
“아, 싸움은 끝났다.
저 자는 시종 전력을 다하여 싸우지 않더니
결국은 나의 마지막 계책에도 걸려들지 않는구나!”
1백여 합을 겨루는 동안 알천은 몇 번이나 빈틈을 보고도 고유림을 공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한 일이었으나 직접 상대한 당자로는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말이 쓰러지고 칼 을 손에서 놓쳤을 때 고유림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군사들의 분기를
이끌어내려고 생각했다.
어차피 상대를 꺾지 못한다면 노장의 처참한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실추된 전의를 되살리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대의 의도를 미리 간파한 알천은 사책(死策)마저도 영악하게 빠져나갔고,
고유림은 적장에게 목숨을 구걸한 꼴이 되어 털레털레 자신의 진채로 되돌아 왔다.
그것은 장렬한 죽음보다도 훨씬 욕되고 수치스러운 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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