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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국운(國運) 16

오늘의 쉼터 2014. 10. 11. 11:16

제22장 국운(國運) 16

 

 

 

“대체 저것이 어찌 된 노릇이냐?”

고구려 진영의 장수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특히 옛날부터 고정해의 무용을 인정해온 고유림은 귀신에 홀린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낭비성에서 죽은 솔천수의 사위 갑회가 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장군, 저 자의 목은 내가 따오겠소!”

갑회는 미처 고유림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가 말잔등에 훌쩍 뛰어올랐다.

 

을지문덕의 명을 받고 퍼붓는 장대비 속에서 우문술의 20만 대병을 무참히 짓밟았던

 

안주성(安州城) 신화의 주인공이 바로 갑회였다.

 

을지문덕을 깎아내리려는 자들은 흔히 살수대첩의 공을 말할 때 고웅과 갑회가 없었다면

 

을지문덕도 없었을 거라는 논리를 펴곤 했다.

 

그만큼 고웅과 갑회는 남진파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난전에서 배운 거지같은 검술을 감히 뉘 앞에서 자랑하느냐? 내가 더 보고 있지를 못하겠구나!”

알천과 마주선 갑회가 눈알을 험상궂게 부라리며 호통을 치자

 

알천도 지지 않고 빈정거림으로 응수했다.

“고구려에는 시시한 장수들이 많기도 하구나. 너는 또 누구란 말이냐?”

“허허, 나의 이름을 묻는가?

 

왕시에 우문술의 20만 대군을 개 잡듯이 두들긴 갑회의 이름을 너 따위가 알기나 하겠는가?”

갑회가 제법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하는 순간 알천은 갑자기 목청을 높이고 한참을 웃었다.

“우문술의 20만 군사가 살수에 빠져 죽은 것은 들어서 안다마는

 

너는 기왕 물에 빠진 시신을 무엇 하러 또 두들겼는가?

 

참으로 싱겁고 할 일 없는 놈이로구나.”

알천의 놀리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회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칼날을 세워 달려들었다.

“네 이놈, 목이 떨어져서도 그놈의 주둥아리를 줄창 나불거리는지 어디 두고 보자!”

갑회의 칼날이 알천의 가슴을 예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놀란 알천이 돗총이를 두어 걸음 뒤로 물렸다가 갑자기 고삐를 왈칵 놓으니

 

말이 비호같이 앞으로 달려나갔고, 순간 허공에서 만난 두 자루 칼에서 휘황한 불꽃이 일었다.

 

칼과 칼이 마주치고 말과 말이 머리와 꼬리를 이어가며 어지럽게 땅맴을 돈 지 한동안,

 

승부는 좀체 갈리지 않았으나 갈수록 밀리는 쪽은 갑회였다.

 

이를 본 고웅이 황급히 일어났다.

“알천은 과연 놀라운 장숩니다.

 

저대로 가다간 갑회마저 당하기 십상이니 내가 가서 돕겠소.”

“그게 좋겠구려.”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던 고유림도 쉽게 허락했다.

 

그런데 고웅이 막 말에 오르려 할 때였다.

 

갑자기 신라군 진채에서 뜨거운 함성이 솟구쳤다.

 

알천과 힘겹게 싸우던 갑회가 마침내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고웅은 돌연 싸우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아아, 갑회마저 당하다니……”

고구려 장수들은 모두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때 시종 말이 없던 동부 욕살 고명화가 나섰다.

“지금 알천이란 자가 홀로 나와 우리 장수들을 차례로 베어 넘기는 것은

 

저들의 숫자가 우리보다 적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고서야 일부러 성곽 하나를 내주고 도망하여 저런 계책을 쓸 까닭이 있소?

 

하니 알천의 무예를 당하기 어렵다면 군사들을 풀어 적진을 덮칩시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봐야 공연히 시간만 가고 사기만 떨어질 뿐이오.”

임금의 매제인 고명화의 말에 고유림도 잠시 귀가 솔깃했다.

 

한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거푸 장수들이 당하는 것을 본 군사들의 사기였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책사 맹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럴수록 신중하셔야 합니다.

 

지금 적진의 형세를 보니 성문과 성루에 횡렬로 늘여 세운 군사는 모두 합해야 2천 남짓하지만

 

그 뒤편 숲속에는 다시 얼마의 복병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알천이 홀로 나와 우리 장수를 거푸 쓰러뜨리는 것은 일종의 유인책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를 흥분시켜 숲속으로 유인하려는 술수지요.

 

거기에 말려들면 아무도 살아서 돌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듣고 보니 맹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면 자네의 계책은 무엇인가?”

고유림이 묻자 맹부는 약간 맥없이 대답했다.

“글쎄올시다. 저도 아까부터 줄곧 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와 같은 형편에선 선뜻 계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날짜는 흘러 어느덧 11월입니다.

 

성민들도 모두 달아나 구루밖에 없는 황량한 겨울 벌판에서 1만이나 되는 군사들의

 

식량과 마초를 조달할 일도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

맹부는 혀를 두어 번 찬 뒤에 책사로 따라온 자신의 구실이 스스로도 미미하다고 여겼던지

 

모든 책임을 장수들에게 전가했다.

“어떻게든 적장을 꺾어 땅에 떨어진 우리 군사들의 사기를 되찾아야 하는데

 

그럴 사람이 없으니 저 역시 딱하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맹부는 주둥이를 닥쳐라! 네 감히 어느 안전에서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리는가?”

고명화가 참지 못하고 버럭 역정을 냈다.

“숲에 복병이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그리고 적장을 꺾을 사람이 왜 없단 말이냐?”

그런데 고명화의 말이 끝나는 순간 마치 맹부의 예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건너편 숲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이어 왁자지껄한 함성도 들려왔다.

 

무참해진 쪽은 고명화였다.

 

그런 명화 앞에서 맹부가 해쭉해쭉 얄미운 표정으로 야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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