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2장 국운(國運) 15

오늘의 쉼터 2014. 10. 11. 11:09

제22장 국운(國運) 15

 

 

 

“저 자가 김유신인가?”

시윤이 주위에 묻자 고구려 군사 가운데 전날 낭비성에서 신라군과 싸웠던 자가

 

실눈을 뜨고 한참을 보다가,

“그런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합니다.”

대답을 애매하게 하였다.

 

시윤은 그 말을 김유신이란 의미로 받아들였다.

“김유신이라면 내 어찌 저 자의 목을 베지 않겠는가.”

막리지 시명개의 집안에다 조의선인 출신으로 나이 스물에 구사자에 뽑혔던 시윤이었다.

 

그는 다른 장수들보다 먼저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칼을 뽑아 들고 알천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김유신은 듣거라! 나는 천하가 두려워하는 고구려의 장수 시윤으로,

 

우리 대왕의 명을 받고 낭비성에서 죽은 장군 솔천수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어디 너의 그 알량한 칼솜씨를 구경이나 해보자!”

시윤이 위엄과 거벽을 떨며 큰소리를 치자 알천은 호탕한 너털웃음으로 응수했다.

“김유신의 이름이 제법 알려진 모양이구나.

 

그러나 나는 김유신도 아닐뿐더러 너 따위 이름없는 졸개를 베는 데 어찌 김유신까지 동원하겠는가?

 

김유신은 지금 풍류를 즐기고 있어 너희와 싸울 형편이 못 된다.”

시윤은 자신을 깔보고 고구려 전체를 무시하는 알천의 말에 분기가 탱천했다.

 

곧 말 배를 걷어차고 뽑아 든 칼을 휘두르며 알천을 향해 달려드니

 

알천도 피하지 않고 시윤의 공격에 맞섰다.

 

칼과 칼이 허공에서 어울리고 말과 말이 땅에서 어우러지기를 여러 번,

 

시윤은 기량을 총동원하여 이를 악물고 분전했지만

 

갈수록 상대의 날카로운 공격에 자신감을 잃어갔다.

“칼깨나 써본 솜씨로구나.”

잠시 말머리가 떨어졌을 때 시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김유신이 아니라면 너는 대관절 누구냐?”

그러자 알천은 시윤이 이미 전의를 상실한 것을 깨닫고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너 따위가 감히 나의 이름은 알아 무엇하랴마는 굳이 물으니 가르쳐주마.

 

나는 계림의 대장군 알천이다.”

그리고 알천은 칼을 내리며 덧붙였다.

“살려줄 테니 돌아가라.

 

돌아가서 얌전히 성을 반환하고 군사들을 거두어 물러간다면 뒤쫓지 않겠다.”

시윤은 분하고 원통했지만 이미 알천의 실력을 경험한 터라 더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호기롭게 떠났던 시윤이 풀이 죽어 진채로 돌아왔을 때는 다른 장수들도 거의 도착해 있었다.

“저 적장이 바로 김유신인가?”

주장(主將) 격인 고유림이 시윤에게 묻자 시윤은 그가 들은 대로 말하고 뒤이어

 

알천의 무예가 신기에 가깝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윤이야 자신이 공 없이 돌아온 것을 변호하려고 지껄인 말이었지만

 

고유림은 속이 뒤집히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너는 우리 군사들의 끓어오르는 사기를 여지없이 꺾어놓고도 모자라

 

이젠 적장을 찬양까지 하더란 말이냐?”

고유림은 전장의 도부수들을 돌아보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여봐라, 저 시윤이란 놈을 끌어내 당장 참수형에 처하라!”

추상같은 주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시윤은 겁에 질려 안색이 백변했다.

 

여러 장수들이 고유림을 만류했다.

“고정하십시오, 장군.

 

시윤의 죄 비록 죽어 마땅하나 어찌 적을 눈앞에 두고 아군 장수를 베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시윤은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장수요,

 

막리지와는 숙질간입니다.

 

나라의 장래와 막리지의 안면을 봐서라도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고웅과 맹부의 간청에도 고유림은 군령을 거두지 않았다.

“시윤을 죽이지 않으면 군사들의 사기가 진작되지 않을 것이오.

 

이는 작은 것을 아끼려다 큰 것을 잃는 것과 같소.”

그러자 시윤과 절친한 고정해가 나섰다.

“떨어진 군사의 사기는 제가 나서서 되살리겠습니다.

 

알천이란 자의 목을 취하여 올 동안만 시윤의 참형을 미루어주십시오.”

좀체 누그러질 것 같지 않던 고유림도 고정해의 말이 끝나자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양원왕 때 장수 고흘(高紇)의 후손으로,

 

그가 쓰는 쌍검술은 오히려 고흘의 경지를 능가한다는 고정해였다.

“정해라면 믿을 수 있지.”

고정해의 검술을 익히 알던 고유림이 약간 어조를 눅여 말했다.

혈기방장한 고정해가 갑옷을 고쳐 입고 출정을 서두르자 고유림은

 

싸움판을 전전해온 노장답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상대는 동이를 대표하여 나온 장수로 딴에는 무술에 일가를 이룬 자가 틀림없다.

 

지금 적진의 형세를 보라. 일부러 성곽 하나를 버리고 땅을 물려 진채를 꾸민 것과

 

또한 알천이란 자가 자기 군사 앞에서 필마단기로 버티고 선 것은 우리 장수를 하나씩 상대하여

 

기세를 꺾어놓고 아울러 저희 군사들에게는 사기를 북돋아주려는 일석이조의 책략이다.

 

어지간한 실력을 믿고서야 어찌 저같이 위태로운 계책을 쓰겠는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우리는 반드시 저 자를 보기 좋게 베어넘겨야 한다.

 

대개 이런 형국에선 군사의 많고 적음은 별개의 문제다.

 

이번 출정의 승패는 오로지 그대의 손에 달렸으니

 

정해는 내 말을 각별히 유념하여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비겁하게 싸우거나 패하여 돌아오면 누구나 시윤과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장군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저 자의 목을 취하여 오겠습니다.”

고정해는 큰소리를 치고 말을 짓쳐나갔다.

 

그리고는 대뜸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알천에게 덤벼들었다.

 

고정해의 쌍검이 햇빛을 반사하며 알천의 목 언저리에서 한바탕 눈부시게 춤을 추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두 자루 칼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칼이 떨어지고 이내 칼 임자의 목도 떨어져 사방에 선홍빛 피를 뿌렸다.

 

싱거운 패배였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2장 국운(國運) 17  (0) 2014.10.11
제22장 국운(國運) 16  (0) 2014.10.11
제22장 국운(國運) 14  (0) 2014.10.11
제22장 국운(國運) 13  (0) 2014.10.11
제22장 국운(國運) 12  (0) 2014.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