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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국운(國運) 13

오늘의 쉼터 2014. 10. 11. 10:57

제22장 국운(國運) 13

 

 

 

이때 왕이 내어준 군사 1만은 나라의 장정들을 죄 북방의 천리성 쌓는 일에 동원한 고구려로선

 

도성 부근을 지키던 전군(全軍)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리수(고구려에서 부르는 한강) 북녘은 본래 우리 것이다.

 

동쪽의 일개 분토(糞土)에 불과하던 신라가 근년에 저토록 방약무도하게 변한 것은

 

아리수를 장악하고 서해를 얻어 중국과 직접 교통하기 때문이니

 

그 화근이 모다 칠중하 이남에 있다.

 

이제 벼락같이 저들을 들이쳐서 하루아침에 우리의 구토를 되찾는다 한들 무슨 잘못이 있을 것인가?”

왕명을 받은 대군이 막 출병하려 할 때였다.

 

돌연 병권을 책임지고 있던 고유림이 임금 앞에 부복하여 아뢰었다.

“신에게는 어찌하여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까, 전하!”

왕은 고유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한낱 신라 따위를 치는 일에 노장의 수고로움까지 동원할 까닭이 있는가.

 

공은 편히 대궐에 머물며 가끔 사람을 보내 북방의 천리성 쌓는 일이나 차질 없이 감독하면 그만이다.”

그러자 고유림은 새삼 분하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낭비성에서 비명에 간 솔천수는 신과 둘도 없는 막역지간으로 젊어서부터 대왕 전하를 보좌하며

 

마치 한배에서 난 형제처럼 지내왔습니다.

 

그가 동이(東夷)의 새파란 아이인 김유신이란 자에게 목숨을 잃고 나서 신은 하루도

 

밥그릇을 제대로 비워본 일이 없고, 한 시도 벗의 복수를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나이다.

 

비록 뒤늦기는 하오나 이제라도 대왕께서 동이의 무리를 박멸하시겠다니

 

이는 신이 꿈에서도 바라던 일이올시다.

 

어찌 신에게서 천수의 원한을 갚을 천금 같은 기회를 빼앗으려 하시나이까?”

그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따졌다.

 

평양성 성주로 있으며 대형 벼슬에까지 오른 고웅이 나서서,

“노장군께서는 저희를 믿고 편히 기다리십시오.

 

천수공은 신과도 막역했던 사이지만 저기 소형 갑회와는 옹서간(翁壻間)이올시다.

 

굳이 노장군께서 가지 않더라도 천수공의 원한은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하며 임금을 거들었더니 고유림이 돌연 벌컥 역정을 내며,


“고웅은 입을 다물라!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데 어찌 늙고 젊음의 구분이 있을 것이며,

 

벗의 복수를 어떤 자가 남의 손에 미룬단 말인가?”

하고는 다시 왕을 향해,

“신이 비록 나이는 들었으나 아직도 기운을 쓰는 데는 부족함이 없고,

 

마상에서 칼을 휘두르면 젊은 장수 서넛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나이다.

 

엎드려 비옵건대 부디 신으로 하여금 앞장서게 해주옵소서!”

하고 간청하였다. 그제야 왕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어찌 평생을 지켜본 공의 기운과 무예를 의심하랴.

 

다만 수고로움을 덜어주고자 했을 뿐인데 공의 결심이 정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구나.”

하고서 친히 절도봉을 끌러주며,

“제장들은 모두 고유림의 절도를 받도록 하라.”

하고 명하였다.

고유림이 1만 군사를 이끌고 산양(개성 남쪽)을 거쳐 양국 국경인 칠중하 강변에 도착한 것은

 

10월 중순경이었다.

 

칠중하 건너에는 칠중성(七重城:積城)이 있었는데,

 

칠중성은 7겹의 높은 구루로 겹겹이 축조되어 예로부터 아녀자의 속곳에 곧잘 비유되던

 

옹성 중의 옹성이었다.

 

강변에 도착한 1만 고구려군은 곧 작은 배 수십 척에 군사를 나누어 태우고

 

야간을 틈타 칠중하를 건넜다.

이때 신라의 칠중성 현령은 내마 주평(柱平)이란 자였다.

 

주평은 변품이 신임하던 인물로 덕이 있고 영특한 사람이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이미 고구려가 쳐들어올 줄 알고 사방에 궁척들을 배치해

 

하루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해 3월이었던가,

 

주평은 관내를 순시하다 말고 성의 남쪽에 있던 집채만한 큰 돌이

 

저절로 35보나 옮겨갔음을 발견했다.

 

이를 본 주평은 성내의 군사들을 불러 모았다.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누가 옮겨놓은 것도 아닌데 돌이 까닭 없이 옮겨갔다면

 

이는 필시 사람의 앞날을 하늘이 일러주는 것이다.

 

그런데 돌이 옮겨간 거리가 35보이니 35란 양수(陽數)의 합으로 군사를 뜻하고,

 

그 옮겨간 방향이 남쪽이니 우리가 퇴각하는 것을 뜻한다.

 

머지않아 반드시 북적의 침입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대비를 철저히 해온 주평이었지만 1만에 달하는 대군이 새카맣게 강을 건너오자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성루에 배치한 궁수들로 하여금 도강하는 배들을 향해 활을 쏘도록 하는 한편

 

황급히 봉화대에 불을 지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신라 백성들의 동요였다.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가 올라가자 변방의 백성들은 물론 북한산주 전역과 더 남쪽,

 

심지어 도성의 백성들까지도 크게 놀라고 당황하여 산곡간으로 도망하느라고 난리였다.

 

일이 여기에 이른 데는 신라 사람들이 백제보다는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군사들에게

 

더 큰 두려움을 가진 때문이었지만 또한 여주를 신뢰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게다가 원광과 용춘, 두 거인마저 죽었으니 백성들로선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소문을 들은 여주 덕만은 급히 알천을 불렀다.

 

덕만이 보위에 오른 직후에 알천은 변란 중의 공을 인정받아 시위부 장군이 되었다.

여주는 알천에게 병부를 맡기려 하였지만 국정을 총리하던 을제 가 이를 반대하며,

“만일 알천에게 병부를 맡기려면 신은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겠습니다.

 

알천은 아직 연소할 뿐만 아니라 부자가 일국의 권세를 독점한다면

 

이는 만대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고 극간하여 하는 수 없이 시위부에 그대로 두었다.

 

그 뒤 을제가 신병으로 물러나자 여주는 알천에게 품주를 맡겼고,

 

을제가 죽은 뒤에는 벼슬을 두 계단이나 올려 잡찬에 두었는데,

 

정유년(637년) 7월에 다시 여근곡 옥문지의 공을 거론하며 그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알천에 대한 여주의 총애가 대략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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