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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국운(國運) 12

오늘의 쉼터 2014. 10. 11. 10:51

제22장 국운(國運) 12

 

 

 

한편 이 무렵 고구려 조정은 당나라와 맺어온 밀월 관계에 심각한 변화의 조짐을 깨닫고

 

몹시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당이 서고 건무왕(榮留王)이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된 양국간의 우호는

 

해가 갈수록 돈독함을 더하여 10여 년 가까이 화친의 세월이 이어졌는데,

 

이연이 물러나고 이세민이 당주가 되면서 고구려를 대하는 당의 태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건무왕은 병술년(626년)에 남진을 시도하려다가 이연이 시랑 주자사를 보내 삼국의 화친을 말하자

 

즉시 글을 올려 사죄하고 오히려 당의 중재를 요청하기까지 했는데,

 

그로부터 3년 뒤인 기축년(629년)에 신라가 아무 까닭 없이 낭비성을 습격해 성을 뺏고

 

장졸들을 무참히 죽였음에도 당에서는 이를 거론조차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성을 뺏긴 직후 건무왕은 당에 조빙사(朝聘使)를 파견하여 자초지종을 알리고 신라로 하여금

 

낭비성을 반환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젊은 당주 이세민은 그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세민이 보위에 오른 직후 당조에 끝까지 저항하던 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잡은 일을 치하하고

 

겸하여 고구려 지도인 봉역도(封域圖)까지 스스로 바치며 선주(先主) 때의 우호를 변함없이

 

이어가고자 했던 건무왕으로서는 여간 서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건무왕의 친당파 조정이 당에 대해 더욱 충격과 분노를 느낀 것은

 

바로 신묘년(631년) 정초에 있었던 장손사(長孫師) 사건이었다.

당은 광주사마(廣州司馬)로 있던 장손사를 요동에 파견해 수나라 전사(戰士)의 무덤에

 

제사지내고 요하 하류의 경관(京觀)을 허락도 없이 함부로 헐어버린 것이었다.

장손사가 임의로 파괴한 경관은 고구려에서 수나라 전사자의 유해를 쌓고

 

그 위를 봉토하여 세운 일종의 전승(戰勝) 기념관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건무왕은 머리털이 곤두설 만치 크게 노했다.

“이세민의 무도함이 어찌 여기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국에 대한 예가 아닐 뿐더러 그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놈이

 

우리를 만만히 보고 뒷구멍으로 무슨 야심을 키워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를 알고도 대비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왕 건무는 젊은 당주 이세민에 대해 내심 두려운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세민은 그가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부터 숱한 군웅을 평정하며

 

용맹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형을 살해하고 아버지를 위엄으로 눌러 보위에 올랐고,

 

당주가 된 뒤로는 다시 맹렬한 기세로 사방의 인국을 아울러 그 위용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다.

만일 그런 이세민이 요동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이제 겨우 국세를 회복해가던 고구려로선

 

또다시 사활을 건 대전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건무왕과 친당파 조정으로선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왕은 중신들과 공론 끝에 요동 8성을 감싸는 방어용 성곽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장손사 사건이 있고 난 직후 왕은 즉시 나라 전역에 노역 동원령을 내리고

 

수만 명의 역부를 징발해 장성(長城) 축조에 나섰다.

 

그것은 부여성에서 시작해 통정진과 요하를 가로지르고 백암성과 안시성을 거쳐

 

비사성 바닷가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역사였는데, 그 길이가 무릇 1천여 리나 되었다.

무술년(638년) 10월,

 

고구려왕 건무는 휘하의 장수들을 편전으로 불러 모으고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지난번에 무도한 신라가 감히 낭비성으로 쳐들어와 우리 장군 솔천수와 성주 적문을 죽이고

 

성과 성민들을 빼앗아갔을 때에도 이를 단숨에 응징할 수 있었지만 당의 체면을 고려해

 

함부로 군사를 내지 않았다.

 

이는 새로 황제가 된 이세민에게 기회를 주고 당이 서방의 강국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과인의 호의였음에도 이세민은 이를 알아주기는커녕 도리어 장손사를 보내어 우리를 능멸하였다.

 

과인은 우리와 당이 동서의 양대 강국으로 나란히 사방 번국들을 거느리고 서로 존중하고 조력하여

 

천하를 사이좋게 경략하기를 바랐지만 이세민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그는 우리를 경계하는 마음이 지나쳐 남적(南狄)들과 손을 잡고 오히려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뜻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왕은 잠시 말허리를 끊고 장수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만일 그렇다면 더 이상 당의 체면을 고려할 이유가 없으며,

 

마땅히 신라를 쳐서 낭비성의 앙갚음을 하고 솔천수와 적문의 묵은 원한을 갚아야 할 것이다.

 

항차 신라에선 만고에 유례가 없는 여자로 임금을 세웠는데,

 

근자에는 여주의 뒷전에서 정사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던 김용춘 마저 죽었다 하니

 

국정이 문란하고 민심이 흉흉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또한 우리가 신라를 응징했을 때 이세민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신라가 우리를 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우리가 신라를 칠 때만 간섭하고 나온다면

 

이는 곧 이세민의 흉악한 저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어 왕은 고웅과 갑회, 자신의 매제인 동부 욕살 고명화 등과 젊은 장수 고정해(高正海),

 

시윤(侍允), 책사 맹부(孟負) 등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그리고 이들에게 1만의 군사를 나눠주며 칠중하(七重河:임진강)를 넘어

 

신라의 북한산주 전역을 치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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