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국운(國運) 11
용춘이 장지에서 돌아올 때 낭지를 자신의 집으로 달고 와 같이 하룻밤을 유하고
뒷날 낭지가 취산으로 갈 때 몽암 구경이나 한다고 따라나섰다.
낭지가 용춘을 데리고 산을 오르는데 용춘보다 더 걸음이 가볍고 빠르니
용춘이 연신 숨을 헐떡거리며 따라가다가,
“아이고 스님, 좀 천천히 갑시다. 내가 전과 같지 않소!”
하고 몇 번이나 주저앉았다.
용춘이 바위에 퍼더버리고 앉아 숨을 고르며,
“아무래도 스님이 먹을 나이를 내가 다 먹은 모양이오.
누가 법사를 백수 넘은 어른으로 보겠습니까?”
또 나이 말을 하니 낭지가 그제야 정색을 하며,
“늙지 않는 게 좋을 법하지만 그게 실은 업연이야. 내가 이승서 받는 벌이네.”
하고는 전생에 자신이 북량의 이름난 장수로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죽이듯이 했던 일과
또 삼한(三韓)의 어느 고을에서 남의 집 종을 살 때 숱하게 짐승 잡아죽인 일들을 열거한 뒤에,
“그때 나로 인하여 죽은 생목숨들이 허다한데 그 뒤에 남은 수를 모다 내가 살아야 해.
그래야 겨우 업장 소멸이 되니 반드시 자네가 부러워할 일만도 아님세.”
하였다.
낭지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용춘은 그저 부럽기만 했다.
“하면 앞으로 남은 수가 얼마나 됩니까?”
“그런 건 모르겠고 내가 이승서 만나 법통 전해줄 아이가 둘 있는데,
하나는 조만간에 만날 테지만 뒤에 날 놈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네.
그놈이 나서 산문에 들 때까지는 살아야지.”
그러구러 용춘이 쉬엄쉬엄 몽암에 이르러 며칠을 마음 편히 묵다가 하루는 낭지를 보고,
“스님, 비형은 지금 어디에 사는지 아십니까?”
하며 생전 입에 안 올리던 제 아우의 소식을 물었다.
“비형이야 잘 있네.
어디에 사는가는 모르지만 좌우간 이 산 저 산 옮겨다니면서 사는 것처럼 살지.
일전에는 죽은 원광이 중창한 가실사에서 화랑들을 훈육한다고 들었네.
어디 화랑뿐이야? 지금 이 나라 산곡간에서 도술 부리고 유술 공부하는 자치고
비형을 모르는 이가 없다네.
참 비형이라면 모를 사람이 많으련가? 두두리 거사가 바로 비형일세.”
용춘은 낭지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사람한테 두두리 거사라는 이름을 듣고 혹시 비형이 아닐까 싶었더니 과연 그랬군요.”
“그런데 자네는 만인의 신망을 얻고 나라에도 적잖은 공을 세운 사람이 어찌하여
비형한테만은 일생을 두고 그토록 까다롭고 냉혹하였던가?”
그러자 용춘의 시선이 천천히 허공으로 향했다.
“비형을 인정하면 폐위된 부왕의 허물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 자연히 멀리하게 되었지요.
젊었을 때야 어떻게든 부왕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고 집안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일념으로
살았으니까……”
용춘은 말허리를 끊고 길게 한숨을 토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지금 돌아보면 모다 허망한 짓이지요.
그저 마음 흐르는 대로 형제간의 정리나 원 없이 나누고 살 걸 그랬습니다.
비형이란 놈이, 처음 부왕의 능에서 만났을 적부터 싫지가 않았어요.
그래 더 쌀쌀맞게 군 게지요.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나서는 행여 나를 찾아올까 기다린 날도 숱합니다.
그런데 통 현형하지 않는 걸로 봐선 아마 제 녀석도 뭐가 잔뜩 틀어진 모양이에요……
내가 비형만 생각하면 마음이 언짢고 아파요.
그래도 형이라고, 일전에 한번은 운문산 폭포에서 내 목숨을 구해준 일도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스님이 만나거든 살아생전 형 노릇 한번 하게 해달라고 말이나 전해주세요.”
이에 낭지가 용춘의 심정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네. 그리하지.”
하고는,
“그래도 자네와 비형은 둘 다 나라에 큰일을 한 사람이야.
세상에 나서 자네들만큼만 살면 장하지.
왕후장상에 따로 씨가 있냐고들 하지만 자네 형제가 살아가는 것을 보면 더러 씨앗도 있나보이.
어쨌거나 오래오래 사시게.”
하며 위로하였다.
용춘이 몽암에서 꽤 여러 날을 묵고 집으로 돌아와 뒷날 여주에게 문후나 여쭙는다며
관복을 말끔히 손질하여 머리맡에 고이 접어두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어느덧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원광이 가고 불과 달포 안쪽의 일이었다.
목숨이란 본래가 생멸 변화 어디에도 상주(常住)함이 없는, 가고 가고 또 가는 것이라지만
의인 용춘의 갑작스런 죽음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하룻밤 사이의 변고여서 더욱 무상하고
절통한 데가 있었다.
죽음도 그 사람의 생시 성정을 닮는다던가.
젊어 월성 밖에서 역부를 단칼에 베던 그 성품 그대로 하룻밤 자는 잠에 태산보다 높다는
생사의 경계를 훌쩍 넘으니 당자로야 유복함을 논할 일일지언정 유언 한 마디 듣지 못한 처와
종신하지 못한 자식으로서는 여간 비절참절한 일이 아니었다.
뒷날 용춘의 손자인 법민(문무 대왕) 대에 한 문사가 용춘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폐왕의 적자로 태어나
궁성 밖에 은거하며
천하를 떠돌다가
월성에 이르러 빼어남을 펼쳤네
온 성읍 사람 우러름을 받았으나
허정한 마음 장한 기상으로
녹읍을 사양하고 벗과 함께하며
시대와 더불어 부침하였다네
고향으로 말고삐를 돌려 돌아와
오로지 광명한 날을 기다리다
세상의 일을 바로잡고 나더니
그만 훌쩍 저승길에 올랐구려
이때 서현은 각간 벼슬을 지내며 병부령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는데,
막 조반상을 받고 앉았다가 용춘이 죽었다는 기별을 듣자 신발도 신지 않고 용춘의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대문을 들어서며 이미 본정신을 잃은 그는 아직 식지 않은 용춘의 몸을 붙들고 몇 번이나
고함을 지르며 통곡하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시신 위에 쓰러졌다.
서현을 뒤따라온 유신과 흠순이 상주 춘추와 함께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하였지만
서현이 혼절을 하면서도 수의(壽衣) 깃을 움켜쥔 손아귀를 놓지 않아 애를 먹었다.
천명이 그 모습을 보고 울며 말하기를,
“그냥 놓아두어라.
두 어른은 젊어서부터 생세지락을 함께하고 한날한시에 생을 마치기로 약속한 분들이시다.
어찌 그만한 슬픔이 없겠는가.”
하여 서현이 깨어날 때까지 입관을 미루었다.
거인 용춘의 죽음은 원광의 입적에 이어 또다시 신라 조정을 비탄에 몰아넣었다.
여주 덕만은 대궐에서부터 울며 나와 사흘을 상가에 머물며 슬퍼하였고,
대소 신료들과 궁중의 나인들도 임금을 따라 상가에서 밤을 지새며 고인을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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