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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국운(國運) 9

오늘의 쉼터 2014. 10. 11. 10:19

제22장 국운(國運) 9

 

 

 

옥문지의 일로 여주는 전에 비해 한결 제왕의 권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장과 여주 사이에 끊임없이 나도는 염문이요,

 

염문을 뿌릴 만치 각별한 두 사람의 마음이었다.

 

시초에는 험구한 도의 길을 작반하여 걷는 산문의 도반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관계가

 

신묘년에 백반 일당의 역모 사건을 겪으며 한식구처럼 정이 깊어졌고,

 

드디어는 남녀간의 연모로 이어져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목구멍에 밥도 넘어가지 않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여주가 그런 자신의 속내를 아무한테도 드러내지 않고 지내다가 신병이 어느 정도 낫고 난 뒤

 

궐에 놀러온 아우 천명에게,

“일생을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고적하게 살기로 천하에 나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하물며 산에 사는 새와 물에 노는 고기도 짝이 있고 자식이 있어 그 근본을 만대까지 이어가거늘

 

문득 나의 인생을 돌이켜보니 광대무변한 천지 한가운데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나뭇잎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으이.

 

이럴 줄 알았다면 젊어서 짝이라도 구할 걸 그랬네.

 

나는 시시각각 변하고 늙어가는 남자를 믿느니

 

차라리 삼보에 귀의하여 평온함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운명이 박복하여 나이 쉰에 산문마저 떠나왔으니

 

그야말로 승도 속도 아닌 어정쩡이가 되고 말었어.”

하며 깊은 한숨을 토하였다.

 

천명이 감히 무슨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았으려니

 

여주가 다시금 허공으로 눈길을 던지며,

“전에 칠숙이 죽어가며 자신을 논두렁의 미꾸라지에 빗대어 말하였다더니

 

내 신세가 꼭 그러하네.

 

여염의 이름 없는 촌부라면 쉰이 넘은들 어떻고 정인의 신분이 무엇이든 어떤가.

 

나는 만일 내 뜻에 부합하는 일을 벌이자면 세 가지 금기를 한꺼번에 깨뜨려야 하니

 

어쩌다가 이런 깊디깊은 논두렁에 오도 가도 못할 신세로 갇혀버리고 말았는지 모르겠네.”

하고 탄식하였다.

 

천명이 조심스럽게 세 가지 금기를 물었더니 여주가 더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것들은 임금이라서 오히려 깨뜨릴 수 없는 것일세.”

하였다.

 

늦게까지 여주와 말벗을 한 천명이 술시를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오니

 

용춘이 그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다가,

“무슨 일이 있었소? 왜 이리 늦게 오시오?”

하고 물어 천명이 여주의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용춘이 그 말을 듣고,

“세 가지 금기라……”

하더니 별안간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 전하께서 지금 배필을 구하자면 첫째는 나라에 성골 남자가 없으니

 

신분의 벽을 깨뜨려야 하고,

 

둘째는 성혼하지 않는 불가의 벽을 넘어야 하며,

 

셋째는 법강과 풍기를 바로잡고 다스려야 할 임금의 벽을 허물어야 하니

 

세 가지 금기가 틀림없소.”

하였다. 천명이 다른 말은 다 알아들었으나 불가의 벽이란 소리를 얼른 납득하지 못하여,

“전하께서는 지금 불가의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였더니 용춘이 미연히 웃으며,

“전하께서야 물론 그렇지만 상대가 될 배필감은 불가의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소?”

하므로 천명이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장 스님을 말씀하시는 게로군요?”

하였다.

좀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지내던 용춘이 원녕사에를 찾아가 자장을 만난 것은 바로 그 뒷날이다.

 

용춘이 자장과 마주앉아 한동안 이런저런 말로 담소하다가 불현듯 정색을 하며,

“선종(善宗:자장의 속명)은 각별한 성총을 입은 몸으로 혹시 이제쯤은 환속하여

 

전하의 왕업을 신하로서 보필할 뜻은 없으시오?”

하고 물었다.

 

자장이 안색을 붉히며 즉답을 못하자 용춘이 다시금,

“작고하신 무림공(자장의 아버지)께서 이미 전조에 소판 벼슬을 지내셨으니

 

만일 환속만 한다면 선친의 문벌을 고스란히 물려받도록 내가 힘써보리다.

 

지금 여주께는 선종과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오.”

하니 자장이 눈을 감고 한동안 깊은 사색에 잠겼다가,

“소승도 근자에 여러 가지 일로 생각이 번잡합니다.

 

며칠 심사숙고하여 찾아뵙겠으니 말미를 주십시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로부터 보름여 시일이 지난 뒤에 자장은 과연 용춘의 집을 찾아왔다.

“소승은 일찍이 처자를 둔 몸이었지만 뜻한 바가 있어 세속과 맺은 인연을 끊고 중이 되었습니다.

 

금상 전하와는 처음에 산문의 도반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만 여러 가지 곡경을 함께 겪었고,

 

그러면서 마음이 통하고 정이 흘러 마침내는 만인의 입초시에 오르내릴 만큼 과분하고

 

두터운 은애(恩愛)를 입게 되었습니다.

 

하오나 소승은 본래가 불법을 구하는 중일 따름입니다.

 

소승이 환속하지 않아도 조정에는 임금을 보필할 인재들이 허다하며,

 

또한 비록 산문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한들 어찌 전하의 왕업을 염려하지 않으오리까.

 

문사는 글로 임금을 보좌하고 장인은 기예로 종사에 보탬이 되듯이 승려 또한

 

왕업을 도울 길을 찾아보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간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오나 이는 오로지 소승의 주제와 본분을 망각한 탓이요,

 

신심이 깊지 못해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다행히 발심하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와 소승의 가야 할 길을 명확히 보았으니

 

수일 안에 계림을 떠나 당나라로 가겠습니다.

 

그리하면 구설은 저절로 가라앉아 전하께는 더 이상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며,

 

소승은 소승대로 이를 본업에 정진할 계기로 삼아 금생에서 반드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용춘은 자장의 뜻이 이미 확고한 것을 알았지만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자장은 마치 딴사람이라도 된 듯 싸늘하고 냉정하기만 했다.

“청초한 얼굴과 꽃다운 웃음은 풀잎에 달린 이슬이 되고,

 

지초 같은 정분과 난초 같은 약속은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허무한 것이 속세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을 자세히 헤아려보면 지나간 모든 일은 곧 우환의 계단이었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지만 소승은 아직 밤을 밝힐 등불을 준비하지 못하였나이다.

 

차라리 하루 동안 계(戒)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破戒)하여 1백년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장의 얼음장 같은 대답에 용춘도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자장이 돌아가고 나자 용춘은 길게 탄식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랑을 논하기에 그는 너무 젊었구나.

 

한생을 훌쩍 덜어 후한 인연과 살뜰한 정분을 나누고 살아도 좋으련만……”

며칠 뒤에 입궐한 자장은 임금을 만나서도 같은 말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여주는 크게 낙담하여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으나 그 역시 산문에 거할 때는

 

대덕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장의 결심이 결국은 임금에 대한 더 크고 넓은 애정에서 나왔다는 점을

 

모를 덕만이 아니었다.

 

왕은 자장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밥 한 솥을 능히 지어낼 시간만큼 말이 없다가

 

비로소 장부처럼 수럭수럭하고 박력 있는 말투로,

“가시거든 부디 대성(大成)하여 오시게나. 나는 도반이 성불을 하고서야 다시 만날 것이요,

 

만일 그렇지 못하면 지금 이 자리가 우리 인연의 마지막이네.”

하니 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두 번 절하였다.

그해 가을,

 

자장이 당나라로 떠날 때 왕은 임금의 인(印)이 찍힌 공문(公文)을 써주었을 뿐 아니라

 

선부에 말하여 관선(官船)을 준비하고 승려 실(實) 등 10여 명과 함께 떠나도록 선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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