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국운(國運) 7
여주 덕만은 영묘사에서 온 대사의 말을 듣고 가만히 무릎을 쳤다.
그는 곧 알천과 필탄, 두 장수를 불렀다.
“너희는 당장 정병 2천을 소집하여 영묘사로 달려가보라!
독산성을 지나면 부산 자락에 지형이 기묘하게 생긴 여근곡이 눈에 띌 것이다.
여근 계곡에는 옥문지란 못이 있는데,
그곳을 찾아가면 십중팔구 흉측한 무리가 불충한 마음을 품고 도사리고 있을 터이니
발견하는 즉시 모두 죽이고 돌아오라!”
알천과 필탄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임금이 사뭇 위엄을 갖춰,
“무엇들 하는가? 너희는 이제 왕명도 따르지 않을 참이냐?”
하고 다그치자 하는 수 없이 국궁하고 물러났다.
두 장수는 즉시 군사 1천씩을 이끌고 임금이 말한 여근곡 옥문지를 향해 달려갔다.
가는 길에 필탄은 알천을 보고,
“과연 여줍니다.
천하에 여자를 임금으로 세운 나라도 우리 계림밖에는 없지만 청개구리가 운다고
군사를 보내는 군주도 우리 임금밖에는 없을 거요.”
하고서,
“아침부터 집에 딸년이 울어 일진이 사납겠다 싶었더니 공연히 헛수고만 하게 생겼소.”
하며 시종 볼멘소리로 투덜댔다.
필탄과는 달리 여주를 극진히 모시던 알천조차도,
화적패라면 모를까 국경도 아닌 도성 인근에 무슨 군사가 있으랴,
여근곡을 찾아갈 때까지 내심 미심쩍게 여겼다.
그러나 독산성에서 향도를 얻어 기묘하게 생긴 여근 계곡으로 접어들자 사정은 달라졌다.
귀가 따갑게 울어대는 사방의 개구리소리도 개구리소리지만 부산 골짜기에 접어드는 순간
석연찮고 섬뜩한 기운이 왈칵 살갗에 닿았다.
“장군, 느낌이 제법 수상합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도성을 떠날 때부터 불평하던 필탄이었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몸에 익힌 두 장수가 계곡에서 전해져오는 뭉쳐진 살기(殺氣)를
느끼지 못할 턱이 없었다.
알천은 황급히 대장기를 거꾸로 세워 군사들의 행군을 멈추었다.
“하기는 희한하게 생긴 저 산의 음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필탄이 약간 겸연쩍은 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발소리를 죽이고 주의를 기울여 들어보니
여러 사람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창칼 부딪히는 쇳소리도 들려왔다.
“어쨌거나 군사를 양쪽으로 나누고 척후를 놓아 알아보세.”
알천의 말에 필탄도 쉽게 동의했다.
두 장수는 갈라진 여근곡의 양편으로 군사를 나누고 독산성에서 데려온
향도에 발 빠른 척후를 붙여 옥문지로 보냈다.
조금 있으려니 척후가 안색이 백변하여 달려와 아뢰기를,
“옥문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사들이 매복해 있습니다!”
하므로 사정을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군사들의 숫자는 대략 5백 명쯤 되는데 저희끼리 나누는 말을 엿들어보니 필시 백제인들 같았습니다.
각기 승려와 장사치의 복장으로 위장하고 옥문지에 둘러앉아 한창 저녁밥을 지어 먹으며
희희낙락하는 중이었습니다.”
하였다.
“백제가 이제는 여기까지 군사를 보낸단 말인가?”
알천과 필탄은 척후의 말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더니 부여장이 또다시 교활한 수작을 부리는구나.”
“저들을 단숨에 들이쳐 한 놈도 남김없이 주살합시다!”
의논을 마친 두 장수는 여근 계곡의 양갈래로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순식간에 옥문지에 이르렀다.
옥문지로 불리는 연못은 양갈래의 산길이 만나는 여근곡의 무성한 수풀 아래 비밀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비를 떠나온 백제군들은 신라왕의 행차를 기다리며 사나흘째 야영을 하던 중이었다.
옥문지에 도착한 시초만 해도 혹시 발각이 날 것을 두려워하여 사방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며칠 지내면서 보니 계곡이 깊어 사람의 왕래가 전무할뿐더러 산세도 아늑하여 자연히 마음이 풀어졌다.
그날도 해가 중천을 넘어설 때까지는 독산성 문밖에 초병을 세우고 신라왕의 행차를 기다렸으나
저녁때가 되자 우소가 말하기를,
“임금의 행차가 야밤에 올 리 있겠느냐.
공연히 번잡한 곳에서 얼쩡거리다가는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일찌감치 저녁이나 지어 먹자.”
하고는 초병을 거두었다.
그런데 숫자가 얼마인지도 모를 신라 군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백제군들은 너무도 놀라고 당황하여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웬놈들이냐?”
마상에서 눈알을 부라리며 묻는 알천의 고함소리가 조용하던 숲속을 쩌렁쩌렁 뒤흔들었다.
그러나 장수는 확실히 장수였다.
아무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쩔쩔맬 때 우소는 이미 말에 올라 무기까지 챙겨 들었다.
무슨 말로도 피할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쏜살같이 알천의 앞으로 달려나가며 위엄을 세워 소리쳤다.
“하찮은 계집의 군사들이 감히 뉘한테 큰소리를 치느냐?
나는 대국 백제의 서동 대왕을 모시는 장군 우소다!
우리 대왕께서 밤에 데리고 노실 노리갯감이 부족하여 옥대 찬 계집 하나를 잡아가려고
특별히 먼길을 왔으니 너는 냉큼 그 계집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라!”
우소는 부하들에게 싸울 채비와 각오를 하라고 뱉은 말이었지만 알천을 비롯한 신라군들은
그 소리를 듣자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크게 격분했다.
“닥쳐라 이놈! 마장수의 졸개 주제에 어디서 추악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너는 가잠성에서 2천 백제군을 개 잡듯이 토벌한 알천의 이름도 듣지 못하였더란 말이냐?”
알천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우소는 알천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약간 주춤했다.
은상이 가잠성에서 분패하고 돌아왔을 때 왕이 장수들을 모아놓고
특별히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은상이 당하지 못한 장수를 자신이 죽인다면 그만큼 공이 높아질 것이라
은근히 욕심이 일기도 했다.
“사비의 군사들은 조금도 겁을 먹지 말고 응수하라!
상대는 한낱 계집이 부리는 오합지졸에 불과할 뿐이다!”
우소도 백제군을 독려하며 칼을 뽑아 들고 알천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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