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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국운(國運) 6

오늘의 쉼터 2014. 10. 11. 09:44

제22장 국운(國運) 6

 

 

 

그런데 이 일이 그만 사람들의 구설에 올라 두 사람은 곧 염문에 휩싸였고,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여주라고 업신여기던 일부 신하와 장수들도

 

여왕은 국사보다 연애질에 더 어울린다며 해괴한 말과 노래를 퍼뜨리고 다녔다.

사찬 벼슬의 장수 필탄(弼呑)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필탄은 전조의 명장 거칠부의 손자요 장연의 아들인데,

 

장연은 백반이 꾸민 용춘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난 뒤

 

줄곧 술과 한탄으로 소일하다가 말년에 자신의 본향인 전날의 장산국(거칠산군, 부산 동래)으로

 

돌아가 죽었다.

황종 장군 거칠부가 본래 거칠산군 사람이요,

 

그 아들 장연이 거칠산군에 돌아와 비참하게 지내다가 죽으니

 

거칠산군 백성들은 장연이 남긴 식솔들을 동정하며 나라의 정사가 바르지 않음을 욕하였다.

 

그래 십시일반으로 곡식과 재물을 모아 장연의 식솔들을 돕곤 했는데,

 

필탄은 거칠산군 백성들의 보살핌 덕에 먹을 것과 입을 것 걱정을 면하고 날만 새면

 

거칠산(居漆山:금정산)에 올라가 조부가 쓰던 70근짜리 백련검(百鍊劍)으로 지며리 무예를 익혔다.

필탄이 외모부터가 저희 아버지인 장연보다도 조부인 거칠부를 더 닮았고,

 

기운 쓰는 것에서 칼 다루는 솜씨까지 아는 사람들은 다 조부를 판에 박았다고 입을 모았다.

 

백반 반란 사건이 났을 때 거칠산군 군수 오지(伍之)가 금관주 군주의 절도를 받고 향군을 소집하여

 

출동할 때 필탄을 선봉장으로 삼아 나갔는데, 나중에 필탄이 알천의 휘하에 배속되어 반란군과 싸운

 

막판 접전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무공을 세웠다.

 

거칠산의 방목장에서 말 키우는 노인으로부터 얻은 찬간자를 타고 백련검을 작대기처럼 휘두르며

 

싸우는 필탄의 모습은 그야말로 보는 이들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알천이 월성 앞에서 반란군들 사이를 종횡무진 치달리는 필탄의 무예를 한동안 구경하다가,

“저 장수가 대체 누구인가?”

하고 물어 비로소 그가 황종 장군의 손자임을 알았다.

 

이에 난리가 평정되고 공을 논할 때 알천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필탄의 무공을 극찬하고

 

또 용춘이 죽은 장연의 억울한 사연을 여주에게 아뢰니

 

여주가 필탄을 불러 친히 위로하고 난리 때 죽은 구평의 뒤를 이어 삼도 대감직을 맡겼다.

그러나 필탄은 성격이 그다지 겸손한 편이 아니었다.

 

그의 바탕에는 왕실을 불신하는 마음이 있었고,

 

제아무리 종사에 공을 세워도 하루아침에 쫓겨나 비참한 말년을 보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게다가 임금은 천하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여주였다.

 

그는 삼도 대감으로 국왕을 근시하는 처지임에도 늘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나는 조부를 능가하는 무예를 익혔지만 임금은 조부가 모시던 임금보다 못하니

 

아무래도 시운을 잘못 타고났지 싶네.

 

심지가 굳은 남자들도 간신배 몇이 작심하면 언제 악정을 펼지 모르는 판인데

 

하물며 여자 임금임에랴.

 

내 비록 삼도의 일원으로 대궐을 지키기는 하지만 야밤에 임금이 앉아서 오줌 누는 것을

 

떠올리면 말할 수 없이 허무한 느낌이 드네.”

하니 필탄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야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으나 더러 같은 부류를 만나면

 

서로 여주의 흉을 보느라 날 새는 줄을 몰랐다.

그런 필탄이 여주가 자장이란 중과 정분이 나서 비영비영한 몸을 이끌고 분황사로 영묘사로

 

바쁘게 돌아다니자 어가를 호위하면서도 마음이 흡족할 리 없었다.

 

하루는 어가와 나란히 가던 자장의 수레에 바퀴가 빠져 독산성의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달린

 

사고가 생겼는데, 필탄이 말을 달려 능히 구할 수 있었음에도 그대로 구경만 하였다.

 

다행히 자장이 수레에서 몸을 날려 가까스로 큰 봉변은 모면하였지만 얼굴이며 몸에

 

피를 흘릴 만큼 상처가 깊으니 여주가 필탄을 불러,

“너는 어찌하여 스님의 수레를 구하지 않았느냐?”

하고 꾸중하였다.

 

그러자 필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신은 어가를 모시는 시위부의 대감이지 중의 승여(乘輿)를 모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대답을 부러지게 하였다.

 

여주가 이 일로 종시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다가 환궐한 뒤 수품을 불러 필탄의 일을 말하였더니

 

직언 잘하는 수품이 아뢰기를,

“송구하오나 성조황고께서 남자가 아니오라 더러 심신을 다해 신뢰하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다.

 

필탄과 같은 이가 만조에 아직 적지 아니합니다.”

하고서,

“차차 나아질 것이니 심려를 거둡시오.”

하며 위로하였다.

 

여주는 자신을 대신하여 만조를 통솔하던 을제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을제가 살았을 때는 여주라고 털끝만큼이라도 깔보는 이가 있으면 당석에서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호통을 쳐 꾸짖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었다.

 

용춘이라도 있다면 좀 나았을 테지만 용춘 역시 어느 순간부터는 고령을 핑계 삼아

 

특별한 일이 아니면 궐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수품이 물러간 뒤에 덕만은 제왕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누구한테도 의지할 수 없는 바로 자신만의 문제였다.

 

그는 채 병색이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지혜와 묘안을 얻고자 좌선에 들었다.

 

상악의 장안사를 떠난 이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여주가 편전에서 백관들을 모아놓고 정사를 살피는 중에

 

영묘사 공역을 맡긴 공장(工匠)의 대사 하나가 장인(匠人)을 구하러 경사에 왔다가

 

임금의 안부를 물으러 입궐하였다.

 

대사는 공역의 진척 상황을 아뢰고 난 말미에,

“그런데 사나흘간 청개구리가 떼를 지어 여근곡 옥문지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니

 

이것이 과연 상서로운 징조인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순간 여주 덕만의 시선이 빛을 머금었다.

 

장안사 승방에서 좌선 삼매에 들면 때로 육신통(六神通)이 터지고

 

오안(五眼)이 열려 성도(成道)에 이르렀다는 소리를 듣던 덕만이었다.

 

어느 해 방선(放禪) 기간에 덕만이 절 마당으로 툭 떨어지는 밤송이를 보고서,

“벌써 가을이 왔구나.”

하고 떨어진 밤송이를 집어 들었다가 화들짝 놀라며,

“수나라에 망조가 들었다.”

하였는데 그러고 얼마 뒤 수나라에 정변이 일어나 양광이 부형을 죽이고 등극하니

 

시자들이 덕만의 예측을 신통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절 앞의 밤나무 묘목은 전날 중국에서 옮겨다 심은 것인데 그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떨어지고,

 

또 속을 들여다보았더니 도사리가 어긋나게 자리를 잡아 서로 자라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있었다.

 

태산에 지진이 나면 그 산의 쇠를 녹여 만든 풍경이 1만리 밖에서도 절로 운다고 하였는데

 

살아 있는 밤나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덕만의 스승인 연적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덕만에게 남은 것은 오안 가운데 마지막 경지인 불안(佛眼) 하나로구나.”

하였다.

 

또 을미년 봄, 당주 이세민의 책봉문을 들고 온 지절사가 홍색, 자색, 백색의 3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그림의 씨앗 3되를 가져왔다.

 

덕만이 지절사로부터 그림을 받아본 연후에,

“이 꽃은 아름답긴 하지만 향기가 없겠구나.”

하여 신하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체로 여자가 국색이면 남자들이 따르듯이 향기 있는 꽃에는 봉접이 다투어 몰려드는 법인데

 

이 꽃은 매우 고우나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이다.”

하고서,

“이는 당주가 배필이 없는 나를 놀린 것이다.”

하였는데, 뒷날 신하들이 종자를 심어 꽃을 보았더니

 

과연 여주의 말과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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